* 7월 19일 주일 1부예배 전체영상입니다.
■2020년 7월 19일 동산교회 설교
지속가능한 믿음 (요 4:43-54)
우주비행사들 혹은 우주인이 우주탐사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한 후에는 대개 환경주의자나 생태주의 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주를 직접 보고 겪고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 거기에 비하면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이뿐 아니라 지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빈번해진 기상 이변과 곳곳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환경파괴와 그에 따른 자연의 역습이라고 말해집니다. 환경 파괴로 자연을 공격했던 인간을 향한 자연의 역공이라는 거죠.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요즈음입니다.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커진 1980년대 후반에 동장한 개념이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세대가 물고기 다 잡아서 물고기 씨가 말라버리면 후손들이 먹고 살 물고기가 없어진다는 것이요, 지금 세대가 목재를 다 벌채해버리면 다음세대가 사용할 목새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미래를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현 세대도 충족되면서도 미래 세대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남겨놓는 발전을 의미합니다.
개발과 환경 보존이 동시에 충족되는 발전입니다. 상당히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 "경작하고 지키라!"였듯이 말입니다. '경작하라'는 명령은 창조세계의 개발과 발전을 가리키고 '지키라'는 명령은 보존과 보호를 가리킵니다. 후손을 위해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죠. 개발과 개량과 성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즉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우리의 신앙세계에서도 믿음이 중요한데, 믿음은 '지속가능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믿음이 되어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속가능한 믿음이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믿음'이란 현 세대인 우리의 믿음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손들도 공유하고서 계속 발전시키고 성장시켜나가야 할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속가능한 믿음'을 보유하지 못한 세대의 믿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요, 필요가 있을 때 반짝 생겨났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함께 사라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지속이라기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는 믿음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있지만, 자녀들에게 이어지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생수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하고서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갈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본격적인 갈릴리사역울 하시려고 유대에서 바로 갈릴리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향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갈릴리를 고향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본문 43~44절을 보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 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친숙한 고향땅이지만 고향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발견하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다만 이전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거기서 행한 기적을 본 갈릴리인들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돌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위풍당당하게 가르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일을 목격했던 갈릴리사람들이 고향을 찾은 예수님을 마치 유명인사처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렀을 때 아마 분봉왕 헤롯의 신하였던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아버지의 간청을 듣고서 보인 예수님의 반응은 좀 냉정합니다. 본문 4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갈릴리사람들이나 지금 예수님께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왕의 신하나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입니다. 기적을 보아야만 믿는 믿움이라는 겁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당장의 필요를 위해 반짝 생겨난 믿음입니다. 아들이 고침을 받고 살아나면 필요가 채워짐과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뿌리를 내리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왕의 신하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어서 속히 함께 집으로 가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기세입니다. 본문49절입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고도가 낮은 가버나움이어서 거리가 2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곳이지만 '내려오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향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온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의 문제는 그가 예수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예수의 인격을 향하지 않고 예수를 통해 얻게 될 자신의 필요만 지금 눈에 보이고 거기에 급급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 관계보다 당장 아들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요가 채워지면, 혹은 필요가 사라지면 믿음도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질 믿음이기 때문이빈다. 지속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지속가능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진단 결과는 암울했습니다. 그녀는 아마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 부임한 젊은 목회자에게 그 젊은 여인이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 경애서 치료를 행하셨다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이 말에 젊은 목사도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를드렸고 목사도 가족들도 모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가족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그들 모두가 완전히 다시 헌신하여 매주일 교회에 나오겠다고 약속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고 진지한 젊은 목회자는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녀를 완전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의사를 뒤 로 한 채 그녀는 퇴원하여 집으로 왔습니다. 다음 주일에 그녀의 온 가족은 말쑥하게차려 입고 활기 넘치는 표정으로 교회에 나와 회중석 앞자리에 앉았고 그 젊은 여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간증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도 그 가족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4주가 지나자 오직 그녀와 그녀의 남편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후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그들은 과거의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그 여인은 자신이 겪은 일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표적인 극적인 치료를 경험했고 기도에 집중했었고 교회성도들에 의해 둘러싸였지만, 겨우 두 달이 지나자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NIV적용주석 요한복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황에 따라 믿음이 변화되거나, 믿음이 약해지거나 떨어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려면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본문 5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급히 자신의 집으로 내려와서 아들을고쳐달라는 왕의 신하의 거듭되는 간청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네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확고히 붙들고 믿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도움을 요청하러 온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에 선 사람이 해결되었으니까 돌아가라고 말하면 꼭 그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더 강청해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애걸복걸하면서 그래도 우리 집에 같이 가서 고쳐달라고 할 수 없겠죠.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그렇게 하면 심한 결례가 되므로 감히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던 거겠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니까요.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그 말씀만 붙들고 지푸라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왕의 신하는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집에서 좋은 소식을 들고 온 하인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 51-52절을 보겠습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어제 일곱 시, 그러니까 오후 1시부터 회복되기 시작해서 살아났는데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났다” 하신 바로 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식언치 않으시고 하신 말씀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의 무게가 있는 분이십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내뱉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지 않다면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분의 인격을 신뢰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려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지속가능한 밑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구보다도 갈릴리호수를 잘 알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그래서 밤새도록 헛수고하고 돌아와서 이미 그물도 다 씻어놓은 상태인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어떠한 말로 들렸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뭐라고 대답합니까? 누가복음 5장 5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도무지 따르기가 어려운 말씀처럼 들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곧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이미 그가 예수님 이라는 인격을 신뢰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말씀 붙드는 믿음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믿음이고 우리의 믿음이 상황에 따라 변화되거나 믿음이 약화되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건강한 믿음은 말씀 붙드는 믿음입니다.
둘째,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려면 말씀 붙드는 믿음이어야 할 뿐 아니라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소망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어떤 분은 해석하기를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우리의 과거가,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우리의 현재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은총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지탱할 수 있는 것이고 살아갈 수 있는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가라는 믿음의 미래와 소망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왕의 신하가 반신반의 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에 이르지 않은 채로 한줄기 소망으로 붙든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아들이 치유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한줄기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작고 희미하지만 한 줄기 소망을 불들고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동행하여 주셔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치료해주시는 눈에 보이는 기적을 구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과정보다는 우리는 당장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향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고 동행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확보하지 못한 채 믿음 안에서 소망 안에서 행동하며 집을 향해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가버나움 자신의 집으로 직접 모셔가지 못하고 대신 단지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것인지, 그분의 인격을 신뢰할 것 인지, 희미한 소망의 빛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짧은 시간에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게 소망을 붙들고 그는 집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믿음, 비결, 말씀 붙들고 소망 붙들고 가장 좋은 것 주시는 가치관, 생명 붙들고 그런 믿음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7월 12일 주일1부 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7월12일 동산교회 설교
활력 넘치는 삶 (요 4:27-42)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으니까 안심하고서 이제는 예전처럼 그냥 살아가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더 이상 목말라할 것 없이 안심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하나님의 선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확보하고 마셨으니까 이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한 자가 되었으니까, 죽음도 두려워할 것도 없고 죽고 나서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그런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이전처럼 계속 하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긴 대화 끝에 하나님의 선물을 이 여인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로서 예수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성령님이 증거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됨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받은 자가 됩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아닌 죽음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생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허무, 공허, 덧없음, 생의 유한함, 죄책감, 죽음의 두려움 등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생수를 건네주시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궁금증이 일어났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구원자이심을 바로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자는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찾고 계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성령 안에서 아들 예수님과 연합하므로 이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이 여인이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어떠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요? 다시 물을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수고를 통해서 헛우물을 자꾸 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게 될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여러 남자들을 전전하면서 마치 사랑만 받으면 인생의 근본적 목마름이 해갈될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단순히 도덕적으로 정죄받는 남성 편력적 삶을 계속 살게 될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삶의 가치추구가 어떻게 변화될 것이냐를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전에 추구하던 것, 그러한 추구가 나오게 된 밑바탕, 이 여인의 삶의 밑바탕에 늘 자리잡고 있어서 어떠한 활동을 하더라도 그 흐름을 저항할 수 없어 원치 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 여인의 인생을 몰고 갔던 어떤 힘,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인생의 참된 주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을 너무나 잘 아시는 이 여인을 창조하신 주를 만났습니다. 대화 속에 녹아들어있는, 앞으로 십자가에서 찬연하게 드러날 주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생수를 마시므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영원한 고향이신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인생의 근본적 목마름의 해갈을 받은 이 여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28-2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벌써부터 몇 가지 변화가 눈에 띕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대낮에 우물물을 뜨러 올 정도로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여인이 적극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던 자신의 치부로 인해서 사람들을 피한 것이고, 사람들에 의해서 소외된 것인데, 이제는 자신의 아픔과 상처라 할 만한 것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삶의 이력이 이 여인에게는 굉장히 큰, 자신을 압도하는 이슈가 되고 있고 자신이 거기에 신경 쓰고 있는 것임을 은연 중에 드러냅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언급했다는 것이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고’, 참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물동이’는 매일 마셔도 또 마셔야 하는, 그렇게 수고스럽고 그래도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의 작은 해갈을 위한 도구죠. 순간순간 차 오르는 갈증을 해갈하고 가지 않으면 안되기에 물을 떠 마셔야 하는 도구인데, 그 작은 갈증, 그 작은 성취, 그 작은 성공의 힘에 의존해서 또 인생의 한걸음을 내딛게 하는 도구, 계속 그러한 삶을 반복하다가 인생의 근원적 목마름을 해갈해보지도 못한 채 평생 그렇게 살게 했던 작은 해갈의 도구를 기꺼이 내던지고 전혀 새로운 삶, 생수를 마시므로 근본적 해갈을 도모하는 인생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요 출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여인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자신이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겁니다. 와서 보라는 겁니다. 자신의 삶의 이력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평소에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다녔던 이 여인이 적극적으로 그러한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하도 신기해서, 도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어떠한 사람을 만나서 저러는지 확인해보려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도 극적으로 만나고 변화도 극적입니다. 그동안 목마름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더욱 커진 이유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갈증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럽고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근본적 목마름을 의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근본적 목마름의 실체를 깨닫는다 해도 삶의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인해서 그 목마름이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예수 믿는 연예인들의 뜨거운 신앙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는데 그들의 삶은 무대 뒤의 공허로 점철돼 있거나 소위 뜨기까지 부단한 노력의 결과를 성취한 자들, 성취하고서 더욱 공허감에 사로잡혔던 그들이 진정한 생수를 마신 결과로 얻게 된 뜨거운 신앙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목마름이라면 예수 믿고 나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허기입니다. 굶주림입니다. 목마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이전처럼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변화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허기입니다. 굶주림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안심 속에서 이전처럼 추구하던 것을 계속 추구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삶은 배고픔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덟가지 복, 팔복을 가르치셨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누가 복된 자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슬퍼하며 우는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예수님도 목마름과 주림을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주림과 목마름은 둘 다 결핍, 채워지지 못함을 가리키는 유사어이지만 오늘 저는 굳이 구분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 칭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라고 선언해주실 하나님의 의를 덧입기를 목말라하는 자, 그리고 그 의를 향해서 주려하는 자,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선은 목마른 문제는 해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굶주림, 허기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처럼 계속 살다가는 굶주림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인생, 공허한 인생을 면할 길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제 돌아온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자들은 마을에 양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목마름이 너무 커 우물로 직행하신 듯합니다. 제자들이 양식을 구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 드리며 잡수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양식 구하러 마을에 들어가서 양식 가져다주니까 예수님께서 뭔 뚱딴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법한 제자들이 아마 누군가 예수님께 먼저 잡수실 것을 갖다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적인 부분에 아직 완전히 눈을 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말씀하자 “그 생수 얼른 주소!”했던 그 이유가 사람들 시선 피해가며 대낮에 땡볕 받아가며 매일 고역스럽게 우물물 뜨러오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거라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인생의 참된 양식, 영의 양식을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육체적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욱 자세하게 자신이 말씀하신 양식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생수를 마셔도 매일 우물물 뜨러 와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목마름은 영적 목마름과 별개로 계속 마셔야하듯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해야 몸에 힘이 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양식, 이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이 되버릴 수밖에 없는 참된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을 우리가 먹어야 하는데 그 양식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서 활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활력 있는 삶의 비결이 되는 겁니다.
참된 삶의 만족, 뿌듯함, 보람, 기쁨, 가치, 삶의 의미와 목적, 이런 것들이 없으면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인생, 그저 입에 풀칠하는 인생, 밥벌이 하는 인생에 불과할 텐데, 그러한 것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삶이 더욱 고귀해지고 가치 있어지고 보람되고 뿌듯해지는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땅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땅으로 보냄을 받은 이유는 십자가에 들리셔서 자신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신 성령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사명을 받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생수를 나눠주어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만들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러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굳이 사람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찾아와서 이 여인을 찾고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드리고 있으니까 지금 너무 만족스럽고 뿌듯하고 먹지는 않았아도 배부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양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전달해주자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증거를 받은 마을 사람들은 지금 떼로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예수님은 더없이 만족스럽고 배부르고 뿌듯한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아마 추수 전 넉 달 전, 아마 파종한 지 얼마안 된 시기인 듯합니다. 씨를 뿌린지 얼마 안됐으니까 추수하기까지 넉 달이 필요할 것이지만, 지금 종말이 동터온 이 때는 파종과 추수가 연이어 일어나는 종말론적 풍성함에 우리가 와 있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종말론적인 추수가 뿌림과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풍성하게 일어남을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생수를 전달한 것인데, 이 생수를 마시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대거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단순히 말씀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이 여인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어서 그 추수를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거두는 자는 거두는 자의 기쁨이 있고 뿌린 자는 뿌린 자의 기쁨이 있고 대규모 추수의 기쁨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 며칠 더 유하시며 마을 사람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복음을 전해주셨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 여인의 증거로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이제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41-42절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찬송가 가사와 같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예수를 믿는 것은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셔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부활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친 안심 속에서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았다고 확신하고서 이후의 삶이 이전과 같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허기질 것입니다. 헛될 것입니다. 공허할 것입니다. 결국 삶이 덧없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참된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에 만족이 있고 가슴이 뿌듯하고 삶이 보람되고 의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허기진 채 살아가지 않고 배부름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참된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그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돼 있고,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창조 목적이 드러나 있고,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고 계셨던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삶의 법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사명을 알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될 때 우리 삶은 배부르고 만족스럽고 의미로 충만하고 뿌듯해질 것입니다. 늘 말씀을 사모하시고 말씀 연구에 매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을 활력이 넘치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공급하는 참된 양식은 하나님나라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비전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인생이 되고 그 사명을 이루어갈 때 삶의 가치가 숭고해지고 참된 만족이 뒤따릅니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마시고 영원한 해갈을 얻게 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때론 직업활동으로, 가정활동으로, 교회활동으로써 복음 전하고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참된 양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압도당하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의 큰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늘 섭취해야 할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철학자 김진영이라는 분이 암 투병을 하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유작으로 남긴 책이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말합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직면하자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사라지고, 눈앞에 오직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았다고 고백합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상들을 치워버리자, 이제 세상이 딱 두가지로 보이더랍니다. ‘사랑의 대상들’과 ‘시끄럽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이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들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직 사랑의 대상에만 완전히 집중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또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사랑을 나눌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생수를 선물로 받아 마신 영생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참된 양식을 먹고 배고픔 없이 허기짐 없이 공허함 없이 가치 있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보람되게 뿌듯하게 기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참된 양식을 섭취하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명을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이요, 사랑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삶입니다. 이로써 삶이 더욱 힘을 얻고, 참된 양식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삶이 활력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7월 5일 주일오전예배 전체 영상을 올려드립니다.
■2020년 7월5일 동산교회 설교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요? (요 4:19-26)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오늘 본문에서도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목마름을 해갈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피조물이기에 목마름과 결핍이 있고 필요에 목마릅니다. 그러한 갈증을 해결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삶을 살아가죠. 예수님은 그러한 목마름이 과연 어떠한 목마름인지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 목마름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 아느냐는 겁니다. 목마르기 때문에 물을 찾아나서는 게 인생인데 목마름의 근원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남들에게 원없이 인정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물질적 필요에서 해방 받을 정도로 풍요롭고 싶고, 지루한 삶이 아니라 기쁘고 스펙터클한 삶, 편안한고 안락한 삶, 소위 잘나가고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들이 달성되면 목마름이 없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성공과 성취는 우리를 목마름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켜줄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잠깐 동안 목마름이 해갈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인생은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만족이 될 수 없고 내일은 더더욱 그리합니다. 또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쥐어야, 또 다른 더욱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이제 만족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향해 찾아나섭니다. 여전한 목마름을 안은 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고인 우물과는 달리 샘 근원에서 샘솟듯 솟구쳐올라 흐르는 생명력 있는 물을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영생의 샘물을 말씀하시는데도 여인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단순히 영원히 목마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그래서 다시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한 채 땡볕 내리쬐는 한낮 정오에 우물물 뜨러오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벌컥 들이켜서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고단한 현실을 아편을 맞음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현실도피의 구원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과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므로 삶의 목적과 이유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서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고달픈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생수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인이 자신의 삶을 거울로 적나라하게 비춰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인의 치부를 꺼냅니다.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평범치 않은 기구한 삶을 꺼내놓습니다. 이 한마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여인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인생의 단면입니다. 이 여인이 무엇을 추구했고,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서 무엇을 구원으로 삼아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물 뜨러 오는 것이 고역인 인생, 이러한 삶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소외당하므로 고통당하고 있는 인생, 아닌 줄 알면서도 마력의 힘에 이끌려서 또다시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려지는 인생, 그래도 여전히 목마른 인생,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일상을 털어버리고 달아나버리고 싶은 인생, 현실의 고단함을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버리고 싶은 현실 도피의 인생, 예수님은 그러한 인생을 살아왔던 여인의 삶을 되돌아보라고 여인의 치부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생수를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여인의 가치추구체계 전체의 단면을 이 한마디 말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선지자, 성경을 잘 아는 선지자, 뭔가 영적인 궁금한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생수, 목마름,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인생의 시도 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여인의 머릿속에서 이제 인생의 근본적인 종교적 문제 예배에 관한 주제를 꺼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인생의 근원적 목마름에 대해서 대답하려는 시도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적 존재로서 종교적 욕구가 있습니다. 종교성을 충족하려는 종교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예배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짓고 예배하던 곳은 세겜 근처 그리심산입니다. 이 우물물에서 보이는 가까운 곳입니다. 잘 지어놓은 그리심산 성전을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군대가 파괴한지도 이미 100년도 지난 상황에서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그곳을 성전 삼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하고 있는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겁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모세오경만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사마리아 오경을 편집해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 모세오경과 큰 틀은 갖지만 사마리아 중심으로 작은 변형을 한 사마리아 오경입니다.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삼는다는 것은 다윗 왕조나 다윗 계열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이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진정한 회복이 하나님이 부어주실 성령으로 가능케될 거라는 선지자의 메시지도 알지 못함을 뜻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 그리고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가 돌아와서 지은 제2성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여기 그리심산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맞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사람들이 종교적 논쟁이랍시고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본질적 중요한 사안에 대한 토론이라기보다 지엽적이고 인간의 이기성과 소속감이라는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벌이는 논쟁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곳 사마리아까지 찾아오셔서 사마리아인이라는 인종적 장벽, 여성이라는 성적 장벽, 그리고 성적 문란함으로 간주될 수 있는 도덕적 장벽을 뛰어넘고서 여인을 찾아온 것인데, 여인은 아직도 자신의 장벽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실체가 오기 전까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은 실체가 오면 뒤로 물러나야 함을 말씀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그간 유대인들에게 참된 하나님 섬김으로 제시되었을지라도 진정한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실체를 보내시고, 참된 성전이라는 실체가 지금 이땅에 와있는 사실을 안다면 이 산이든 저 산이든 뭐가 중요하겠냐는 겁니다. 참된 성전이 되셔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시는 분, 그 실체가 여기 와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광받으시는 때가 곧 이르렀다는 사실, 진정으로 예배가 가능한 때가 이르게 될 거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겠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는 예수님이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 영생의 축복을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게 핵심입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22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전통과 전승은 단절돼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도 오셨죠. 다윗왕에게 약속하신 다윗 왕조를 굳게 세울, 물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세우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전통은 이러한 약속을 받지 못한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 전승 전체의 약속으로 자신이 오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르는 분을 어떻게 예배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면 예배가 되겠습니까? 사마리아인들과는 달리 구약성경 전체를 받고서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약속들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의 총 결산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게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요,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영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예배함을 뜻합니다. 왜 성령님이 진리의 성령님이십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셔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 받습니까?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믿을 때입니까? 세례받을 때입니까?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성경을 가지고서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측면도 있고,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말씀읽을 때 성령의 조명에 힘입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므로 참된 예배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겁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이 때는 언제입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는 때겠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 한량없이 부어진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육체가 찢기고 피를 흘리셔야 그 육체를 넘어서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곧 이 때’는 여러분에게 언제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서부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영의 도움을 받고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죠. 육은 죽었다 깨도 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차원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육은 죽었다 깨도 영이 될 수 없으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예수 믿는 자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원, 인간적 차원, 인간의 수단, 온갖 인간적이고 육적인 것들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결심과 결단 가지고도 안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늘 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안에서 굳게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었듯이, 동일한 성령을 예수 믿는 자에게도 주셔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와 굳게 연합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 믿고 세례를 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게 되어 비로소 참된 예배가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예수님은 긴 대화 끝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진정한 예배의 때를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알려주십니다.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한량 없이 받아서 믿는 자에게 나눠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밝히 증거해주심으로써 여인과의 대화가 마무리됩니다. (2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나선 것도, 그 장벽을 뛰어넘고 만나고 대화를 나누신 이유도, 그리고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알고 아는 분에게만 예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압니까?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참된 생수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유일하게 영원토록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갈급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예전 성경번역을 할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의미 있게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과 준비와 성실한 마음과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 기대의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해서 나오라는 부르심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부름은 또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자동적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되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육에 빠질 수도 있고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해서 다시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시 성령 안에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예배 예전 때 예배 시작부에 참회의 기도의 시간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예배 전에 미리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하고 성령을 구하고 새로워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맥추감사절입니다. 올해 2020년 상반기는 압도적으로 코로나19로 지나갔습니다. 일상의 대변혁이랄 수 있는 어려움도 많았고 여전히 코로나의 위협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어려울 때 피할 길 주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함을 하나님이 기뻐받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50편 23절을 읽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성령을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면서 영과 진리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감사함으로 늘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배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주일 1부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6월28일 동산교회 설교
장벽을 넘어선 만남 (요 4:1-18)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나섰습니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셨습니다. 유대에서 세례요한의 회개 표시로서의 세례운동과 유사하게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불필요한 마찰과 오해를 받을 소지가 생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에 임하고자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초기 유대 사역을 생략하고 세례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서 시작한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대 지역 사역이 중심이 됩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빠른 길은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빠른 길이지만 고지대이고 길이 상대적으로 험하다보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서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땅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이후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갈릴리에 가곤 했습니다. 이 길은 걷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으나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우회하는 길로 북쪽으로 갔냐면 사마리아땅을 통과하지 않으려는 게 큰 이유였습니다. 사마리아나 유대나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는 곳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어느 때부턴가 큰 장벽이 세워져 마치 우리 남북한이 철책선으로 분단되었듯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마 유대 지역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셨던 예수님이 정오쯤 되어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그때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굉장히 더운 그쪽 지역에서 대낮에 물 길러 왔다는 점에서 이 여인은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는 여인입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여인입니다.
대화가 시작됩니다. 대 여섯 시간 땡볕 받으며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물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침 물 길러 온 여인도 있으니까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한 멘트입니다. “물 좀 주소!”
자유로운 영혼 가수 한대수가 부른 ‘물 좀 주소’라는 노래는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로 시작합니다. 3절 가사는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상당히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시대 상황과 관련돼서 읽히는 노래입니다.
목마르신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셨지만 원래 목마름과 갈증은 피조물이라면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창조주께서 비록 인성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다고는 하나 목마르다고 하시는 말씀이 의외로 들립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거겠죠. 피조물의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목마르시지만 실제로 목마른 입장은 아마 이 여인입니다. 남들 시선 의식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을 때 마을 공동의 우물로 와서 물을 뜨러 온 여인, 지루하고 반복되고 고된 일상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여인, 매일 가족을 위해 우물을 뜨러 왔다면 그나마 보람이 있을 텐데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우물을 뜨러 오는 일이 지겨운 반복이요 고된 일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여인, 이 여인이 진정으로 목마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부탁하자 여인은 놀랍니다.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부탁해서 한 번 놀라고, 또 한 번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부탁해서 놀랍니다. 당시 사마리아의 베두인들은 천막치고 유목 생활하던 사람들이라 여인들은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남편을 제외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유목민적 환경에서 가정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치였지만 여성 억압적 차원도 있었겠죠. 예수님은 두가지 사회적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어서 여인에게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본인이 목마르시니까 그러셨겠지만 진정한 목마름을 느끼는 여인과의 만남에 있어서 일종의 접촉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어떤 갈증이나 목마름,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못했다는 불만족감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문제는 오히려 그러한 자기 만족, 자충족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직선으로 나아갔다면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늘 목말라하고 늘 허기지고 늘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속에서 살아온 여인에게 가장 좋은 접근은 그녀의 필요와 관심사를 당근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인이 대화에 뛰어드는 거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로 시작된 대화가 ‘생수’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화제로 꺼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록 지금 내가 너에게 물을 구하는 처지지만 네가 만약 내가 들고 온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또 그 선물을 가져온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그 선물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 선물이 뭐냐면 이 우물물과 비교도 안되는 샘솟듯 솟아올라 흐르는 신선한 생수다!’
유독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왜 선물을 유달리 좋아하냐면 선물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겠죠.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마음의 빈자리를 물질로 채워보고 싶은 마음도 들겠고, 선물을 전해준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의 심리도 있겠죠.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합니다. 특히 필요가 채워지지 못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선물을 주면 너무 좋고 고마워하겠죠.
예수님의 대화법, 단어 선택, 접근 방식, 장벽을 무장해제시키는 방법,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뜻이 있는 곳에 발견된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니고데모들에게 설교할 때와 사마리아 여인들에게 설교할 때는 분명히 달라야겠죠.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니고데모들에게 설교했구나’ 제가 좀 니고데모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은 사마리아 여인들인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에 한 번 귀가 솔깃했고, ‘생수’라는 말에 다시 귀가 솔깃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대화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생수’는 끊임없이 솟구쳐흐르는 샘에서 솟아나와 흐르는 살아있는 물을 가리킵니다. 고여 있는 우물과는 다른 물입니다.
‘생수’라는 말을 듣고 여인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아마 예수님이 땅도사나 땅을 살피는 지관인 것처럼 보인 게 아닐까요? ‘나는 이 마을의 공동의 우물, 야곱의 우물 밖에 모르는데 이 분은 수맥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도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듯합니다. 아니면 허풍쟁이거나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닐까, 복잡한 심경이 내비쳐집니다. 여인이 뭐라고 예수님께 대답합니까?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우선은 조롱조가 담겨있습니다. ‘깊이 땅을 파서 물 근원을 찾아내서 우물을 만든 건데, 그 깊은 곳에 어떻게 이르러 생수를 얻겠냐는 겁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당신에게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천상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마리아 사람인 내 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실 수 있겠소?’라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여인은 이 우물의 전통, 전승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야곱이 팠던 우물, 혹은 그 아버지 이삭이 팠던, 소위 뼈대있는 우물, 이 우물은 마을의 자랑이요,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모세오경만을 정통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성경속 유서깊은 장소인 프라이드가 강하게 느껴지는 발언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만 프라이드, 자긍심이 있는 게 아니라 사마리아사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까지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유월절 절기를 정확하게 지키는 사마리아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게 유대인들에 의해서 차단되자 보란 듯이 더 멋지게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지었던 사마리아사람들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족장들의 삶의 발자취가 남아있고 그들의 후손으로서 그 삶을 이어서 같은 생활 터전에서 살고있다는 자부심입니다.
예수님이 던진 ‘생수’라는 말에 여인이 관심을 보이자 예수님께서 더 진전된 대화로 이어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우물에서 물을 뜨는 일은 매일 반복해야 하고, 이 물을 오늘 마셔도 내일 또 목마른 게 인생인데, 그게 우리가 먹는 이 물인데, 내가 주는 물, 아까 말한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인생의 해갈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시는 영생을 가져다주시는 생수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굳이 찾아오셔서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서 이 여인을 굳이 만나러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바로 생수 곧 영생의 샘물, 곧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자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이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이 여인도 늘 물질적 필요, 자연적 생명, 이땅에서의 삶의 관심사에 붙잡혀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식대로 이해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가치 체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꾸 유사 구원에 만족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진짜 구원 필요 없으니까 유사 구원을 달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생수, 주시면 너무 좋겠다는 겁니다. 왜냐, 사람들 시선 의식할 필요도 없이 대낮에 땡볕 받으며 무거운 물 실어나르는 고생 안해도 되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냐는 겁니다. 시선이 현세에 고정돼 있어요. 눈이 이땅에만 국한돼 있어요. 영생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너무 멀리 있어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지금 이 여인의 관심사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인생의 목마름이 해갈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이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자신의 가치체계가 어떠한지 드러내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방식, 인생의 목마름을 어떤 식으로 돌파해왔는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정한 해갈을 얻지는 못해서 늘 불만족 가운데 살아왔는데, 여전히 지금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추구와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구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여태까지의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낯선 남자와의 만남에서 이 여인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의 탈출, 현실 도피의 다름아닙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하는, 곤궁과도 같은 자신의 삶에서의 구원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 유사 구원이죠. 유사 구원을 추구하는 삶, 이것이 진정한 해갈의 지름길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평생을 그렇게 추구하여 살아온 거죠. 비로소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정한 인생의 거울을 발견한 겁니다. 오늘 처음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춰보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결정타입니다. 이걸로 게임 끝입니다.
왕년의 인기 여배우 김지미씨가 기자회견에서 4명의 남편에 대해 평을 해달라고 하니 웃으면서 한 말이 "그놈이 그놈이다"였습니다. 김지미씨의 첫 남편은 당대의 명감독 홍성기씨였고, 두번째 남편은 최민수씨의 아버지 배우 최무룡이었고, 세번째 남편은 인기가수인 나훈아씨였고, 네번째 남편은 심장내과 전문의인 이종구씨였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놈이 그놈이다”가 삶의 진실인 듯합니다.
가끔 아주 신실한 여자분들이 만약 다음생이 있어서 다음생을 살게 된다면 나는 다시 우리 남편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현실을 정확히 짚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삶의 궤적이 비슷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답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 여인에 관한 정보를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해하고 싶다기보다 뭐 저렇게 살아가나, 이런 마음이 더 들 것입니다. 기구한 삶은 알겠지만 평범치 않은 삶을 자초한 여인이라는 판단이 더 들지 않습니까? 언뜻 들어도 허망한 삶을 살았구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도덕적으로 정죄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아까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에게 찾아온 것은 인종적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넨 것은 성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세 번째 장벽,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만남을 포기하게 만들고, 접근을 아예 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오늘 이 시대에 더욱 중요한 장벽, 소위 도덕적 장벽을 예수님께 지금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전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필요로하는 인생과의 만남을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여인에게 둘러쳐진 철벽 방어막과도 같은 장벽을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야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벽이 제일 거대한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습니다. 남들에게 내놓기를 꺼려하는 삶의 진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의 진실, 여인은 여인대로 항변할 이유들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려기보다 정죄하고 외면하고 소외시키려고 했던 이유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에서 높은 장벽으로 세워야 했던 그 장벽조차 예수님께서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일화를 가지고 두 가지로 우리 신앙과 삶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땅에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분명하셨기 때문에 그 뜻이 분명했기 때문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기 마련이어서 길을 찾아나선 것이고, 그 고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가는 고생도 자처하시고,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기 위해서 사회적 편견과 장애물과 인생에게 둘러쳐진 장벽도 뛰어넘으셨습니다. 여인을 이해하려고 하셨기에 여인을 아셨고 여인의 관심사를 아셨고 그래서 대화의 접촉점을 지혜롭게 찾아서 결국 생수를 전달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라면 장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인격과 인격 사이에는 언제나 장벽이 세워져있습니다. 그것이 편견일 수 있고 어쩌면 본인의 결함이나 문제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예수님의 생수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 영생을 필요로 합니다. 이 고귀한 복음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벽을 보고 아예 접근 불가, 이러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여 접촉점을 지혜롭게 발견하시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셔서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것을 우리가 삶의 원리로 붙들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도, 직장에서 어떤 어려운 과제나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지혜와 상상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뜻이 분명하게 세워져있다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실 것이고 문제의 해결책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여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이력과 지나온 과거가 무엇을 추구한 것인지, 왜 인생이 그토록 초라하고 비참하고 목말랐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사 구원에 안주하고 만족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진정한 목마름을 해갈해준다고 착각하고 속은 채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은 아니십니까? 진정한 구원, 진정한 생명수, 인생의 온갖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나아오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고 다시 새로운 마음의 각오와 결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수가 강처럼 흘러넘치시는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6월 21일 주일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6월21일 동산교회 설교
천지 차이 (요 3:31-36)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평생의 과제라기보다 영원한 과제입니다. 영원토록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해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전한 말씀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죠. 하나님을 알려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란 우리를 위한 성령님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성령의 조명’에 해당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올려놓고 기도한 것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조명이 함께 동시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은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깊고 넓고 측량할 수 없는 우주와 같은 인격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부부여도 서로를 이해하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게 여간 쉽지 않습니다. 수십년을 보았어도 매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활동을 함께 해도 그분이 어떤 분인가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무한하신 인격이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인간적 수행이나 학문의 정진이나 큰 깨달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되, 효과적으로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아들 성자 하나님을 이땅에 파송하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하나님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고 지칭됩니다.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죠. 예수님은 이땅에 파송 받고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육신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c.s 루이스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듭니다. 호수에 귀한 물건을 빠뜨렸는데 깊은 호수의 바닥의 진흙에 빠진 소중한 것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잠수부(다이버)가 필요하겠죠. 죄와 세상의 진흙속에 빠진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잠수부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잠수부는 호수 바닥 진흙에 빠진 소중한 것들을 되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깊은 호수로 들어가고 바닥까지 잠수해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고자 했던 귀중한 물건을 손에 쥐고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운 상태로 수면으로 올라오는데 성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호수로 들어오신 잠수부 예수님! 영혼들을 손에 쥐고서 물위로 끌어올리신 예수님! c.s 루이스는 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고서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우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셨고, 인간 본성을 함께 끌어올리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84-85쪽)
그러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공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요한복음에는 영생입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하셨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례적인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우주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회개입니까? 인생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으로서 회개입니다. 여태까지 살던 방식대로 살면 안된다는 겁니다. 180도 돌아서야 한다는 겁니다.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되돌려드리기 위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이를 위한 회개, 인생에서 진정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천국 비유 중의 하나가 값진 진주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5-46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한 상인이 수도없이 많은 진주를 사고 팔았는데 이번에 매물로 나온 진주는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진기했습니다.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진기한 진주이다보니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여태까지 보아온 진주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상인은 이 진주를 소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것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주고 살만큼,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이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별 가치가 없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 진주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이미 여러 진주들을 사고 팔고 소유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느 정도 만족을 얻기는 했으나 자신의 진정한 갈망과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진주를 보고서 완전히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사로잡히고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한때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 진주를 보게 되니까 최고의 진주를 열망하는 마음이 또한 생겨났습니다.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상인은 더 나은 것을 원하고, 진정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줄 더 나은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 우리가 바라마지 않았던 욕망들, 때로는 성공하기도 해서 만족감에 이르기도 했던 과거 역사들이 질 떨어지는 진주들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한동안 귀하게 보였고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최고의 진주를 열망하게 되었고 이 진주를 보니까 더 나은 것이 틀림 없이 있을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인생의 진정한 왕이시오 가장 소중한 분임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각성입니다. 그동안 마음의 소원을 채우기 위해서 시도했던 모든 노력들이 이제 제대로 방향감각을 찾은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서 제대로 방향을 찾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궁극적 가치, 즉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소중한 분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고 물거품과 같은 인생이었고 신기루와 같은 인생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회개를 촉구하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같은 책, 121-125쪽 참고)
사람은 누구나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무언가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진짜 보화를 발견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가져오시며 그 나라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참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허망한 인생일 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결국 실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계속 헛된 길로만 가는 걸까요? 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영적 갈망을 보지 못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르게 표현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 넓은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야할텐데 말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3장 31-36절은 요한복음 3장을 마무리하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논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대화가 나오고 또 지난 주일에 본 말씀 세례요한이 오직 예수님만을 높임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했던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다음장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나게 될, 갈급했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내다보면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이 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진정한 생수를 얻게 되는지, 왜 반면에 어떤 이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지 않아서 헛된 가치를 추구하며 계속 살던 대로 살아가는지를 정리해보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언,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받지 않습니다.
궁극적 가치,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예수님을 생수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갈증과 목마름과 갈망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헛된 것 추구하면서 얻게 되는 작은 성공과 작은 만족이 어느 정도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아직 손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어떤 일만 잘 이루어지면 인생이 괜찮아질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지내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그렇게 살다보니 진정한 영적 갈증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진정한 생수를 구하기보다 그동안 다른 방법으로 채워보려고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 때로는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해서 작은 만족에 머무르고 또 다른 만족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을 그런 추구 속에 살아가는 겁니다. (<인생질문>, 팀 캘러 저, 58-68쪽 참고)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 추구하는 방식가지고 계속 살 것이냐, 아니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나서 성령으로 살아가겠느냐를 도전하신 겁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이미 시작된 영생의 삶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거예요. 유사 구원으로 만족해하면 안되고 인생에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왜 회개가 필요하신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요 천국 백성의 삶이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이 이미 이땅에 임한 영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태까지 잘못된 부류의 구원을 추구하고 가짜 구주를 숭배했던 삶을 청산하고 전혀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증언이었어요. 안타깝게도 아직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을 준비가 돼있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증언을 받고서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영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을 한량 없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성령님을 한량 없이 보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한량 없이’는 측정불가할 정도로 많이, 말 그대로 한량 없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성령의 담지자가 되셨고 그 성령님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게 된 것인데, 그 성령이 바로 생수이십니다. 인생의 진정한 갈망에 대한 충족, 진정한 삶을 살게 하는 성령이십니다. 영생을 이미 이땅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36절 말씀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아들을 믿지 않는 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고 지금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과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동격으로 취급됩니다.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이요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이요, 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과하고서 거룩한 성령을 받는 물과 성령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전에 살아왔던 나, 이전에 살던 방식, 이전에 몸담고 살아왔던 세상적 환경,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와 방향이 싸구려 진주에 집착하는 삶에 지나지 않았고 이제 진정한 진주를 만나고서 전혀 새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요, 이미 시작한 영생입니다. 나는 죽고 그래서 예수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 곧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이요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절대적으로 한 분이시니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나오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성령이 나오며, 성령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께 나를 열다>, 스콧 맥나이트 저, 51쪽)
예수님께서 성령을 한량 없이 받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고 십자가 사명 완수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능력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서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성령을 또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때 그 일의 중요성과 가치와 상응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보내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인류 구원 사명 감당은 너무나 막중해서 비교할 수 없이 한량 없이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나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를 거듭거듭 죽이고 새 자아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옛 자아가 새 자아로 될 수 있을까요? 늘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께 내 자아를 굴복시키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새 자아로서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날이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거듭거듭 거듭나야 합니다. 늘 새롭게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그 능력으로 우리의 자아가 거듭 죽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36절 말씀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말씀에서처럼 영생을 얻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귀기울여야 하고 늘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사귐인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는 천지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신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천지 차이라는 간극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우리에게로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의미를 두고두고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이땅에서 영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영생의 삶, 이미 시작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아들을 믿고 아들에게 순종해야 함을 깨닫고, 영생이란 다른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그리고 이 아들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요 보화임을 소중히 여기고, 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말씀에 귀기울이고 기도에 정진하고 성령께 붙들려서 그렇게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예배 전체 영상을 올려드립니다.
■2020년 6월14일 동산교회 설교
성도의 기쁨 (요 3:22-30)
성경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여러번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어떻게 명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명령으로 될 성질이 아니지 않을까요? 기뻐하라는 명령을 계명으로 받는다 해도 마음이 기뻐야 기쁜 것이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보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더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상 노래가 기쁘게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듯합니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노래의 가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푸른 나무와 빨간 장미를 바라봅니다. 그 나무와 꽃이 당신과 나를 위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나는 아기들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들은 내가 알려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그래요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생각해보면 이 노래 가사가 맞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입니까? 요즘과 같이 신록이 우거지는 5월 6월 우리 주위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쁘십니까? 이 멋진 세상을 누리고 계십니까? 자연을 보고 누리기에는 삶이 너무 각박하고 힘들게 느껴지시지는 않으신지요?
가수 김완선씨가 벌써 올해 52세가 되었는데,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댄스가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춤을 추고 기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같은 낙천성과 순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감사를 많이 해요. 순간순간 감사를 잊지 않으려고 해요. 가장 좋은 친구는 자연이에요. (바깥을 쳐다보며) 저렇게 싱그런 나무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지, 구름은 또 얼마나 어여쁘게 흘러가는지...”(조선일보 2020.6.13.)
가끔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종종 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태도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는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기뻐한 ‘이러한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역사적 자료를 들여다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세례요한을 추종하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세례나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아는 요한의 추종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집단도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사람들이 내세웠던 주장은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운동은 영향력이 컸습니다. 유대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서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전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셨죠. 세례를 받으실 때 죄도 없으셨던 예수님이 뭐라고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셨단 말입니까? 세상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세상 죄, 하나님을 떠난 세상 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의 죄를 고백하고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것을 눈으로 보았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아마 속으로, 우리 스승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셨지만 죄 고백과 아울러 회개의 표시로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주는 것을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강권해서 세례를 베풀었죠. 세례요한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셨는지.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서 뭐라고 증언했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유월절 어린양, 도살장에 끌려가는 죽임 당한 어린양, 왜 죽음으로 끌려갑니까? 세상 죄를 짊어지고서, 세상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죄 때문에,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세상 죄를 자신의 육체 안에 짊어지시려고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은 것임을 세례요한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도 우리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우위에 서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를 주는 일에 있어서 선구자요 원조라 할 수 있는 세례요한이 후발 주자인 예수님에게 밀리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22절)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23절). 예수님도 세례를 베풀고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원조요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세례요한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 세례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분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분히 여긴 것일 수도 있고 질시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을 썼던 요한이나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빌립 역시 예수님의 제가가 되기 이전에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마저도 세례요한을 외면한 채 세례 받으러 예수님 쪽으로 몰리고 있으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분노할 만도 합니다. 어찌보면 세례요한은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제자들의 말에 대해 세례요한은 27절에서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선물로 묘사됩니다.
이어서 본문 28절에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예전에도 내가 너희에게 증거한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해야 할 책임이 너희 제자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요한이 다른 복음서보다 세례요한의 증언,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29절에서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세례요한 자신은 마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친구로서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예식을 위해 지정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보통은 신랑의 친구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세웁니다. ‘신랑의 친구’는 오늘날에 신랑의 들러리이면서 혼인 예식 전체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쁨은 ‘신랑의 친구’의 기쁨과 같은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말은 직역하면 나는 ‘기쁨으로써 기뻐한다’, ‘기쁨으로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빼앗겨서 분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신랑을 위해 신부를 준비하고 혼인 잔치를 주관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혼인 잔치의 신랑에 해당되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신부에 해당되고, 세례요한은 이러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친구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신랑의 친구로서 혼인 잔치를 주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신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혼인 예식을 위해 신부를 잘 준비하였다가 신랑에게 인계한 후에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유대지방에서 회개운동, 세례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진정한 죄사함을 메시야게서 받게 하기 위한, 그래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표현으로 하면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막 1:4)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 말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마지막 말입니다. 이 말과 더불어서 세례요한은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여기서 흥하다, 쇠하다는 말은 천체의 빛이 차거나 기운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생신인 성탄절이 동지 부근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12월 25일이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축일은 하지 부근으로 정해졌습니다. 6월 24일로 정해졌습니다. 동지 이후에는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집니다. 빛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점점 흥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지 이후에는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야 합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님은 흥해야 했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축일은 하지 부근으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고 말하고 있는 ‘이러한 기쁨’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은 어떤 종류의 기쁨일까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은 세례요한에게 충만했던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소유하고 계셨던 기쁨과 같은 종류의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예수님의 기쁨, 곧 ‘내 기쁨’은 예수님이 이땅에서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버지 품에 계셨으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인격적 교제 관계속에서 누리셨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 바로 예수님의 기쁨이었고, 이와 같은 기쁨이 이미 세례요한에게는 충만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얻게 된 이 기쁨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높임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소망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그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소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합당한 예와 절차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 우리는 마땅히 기쁨을 얻고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었던 이 기쁨, 먼저는 예수님에게 충만했던 그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열망할 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드리는 삶으로 결단할 때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얻게 되는 희락 곧 기쁨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하나님을 높일 때 얻게 되는 이러한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예배하고픈 마음이 드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을까요?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자신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지하므로 일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뮬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록 더 행복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무엇이 우리를 천국에서 그렇게도 행복하게 하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더 완전한 지식일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의 자신의 신앙생활을 성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회심 후 처음 4년 동안 전혀 발전이 없었는데, 이것은 성경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마음과 영혼을 염두에 두고 성경 전체를 규칙적으로 읽었을 때 발전이 있었다. 그때 나의 평안과 기쁨은 계속해서 더 커졌고, 이제 47년째 이렇게 하고 있다. 나는 성경을 100번 가량 읽었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러므로 나의 평안과 기쁨은 점점 더 커진다.” 그는 회심한 지 50년이 지난 그의 나이 76세 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매일 신경 써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의 기뻐할 수 없을 때>, 존 파이퍼 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기쁨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을까요? 세례요한에게 충만했던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을 높이고자 할 때, 그리고 세례요한처럼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할 때, 그러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충만케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쁨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일까요? 세례요한은 다 빼앗긴 것 같았지만 내면에 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신을 다 내주셨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 세례요한의 기쁨, 이러한 기쁨은 곧 섬김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이요 새 생명의 기쁨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누리게 되는 기쁨이요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염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6월7일 동산교회 설교
구원과 심판 (요 3:16-21)
작년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감독과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한 배우 송강호씨의 인연과 우정이 많이 회자됩니다. 봉준호감독이 조감독으로 참여한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 배우 오디션을 진행했습니다. 연극배우로 활동해왔던 송강호씨도 오디션에 나갔는데 그만 탈락했습니다. 탈락했는데 아무도 왜 탈락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조감독이었던 봉준호는 송강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고 그에게 삐삐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에는 어떤 이유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차분한 설명이 있었고 메시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평생에 남을 말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언젠가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이후 봉준호는 감독으로서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신예 감독이 되었지만,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심기일전해서 두 번째 영화를 만들면서 당시 충무로에서 첫 작품의 실패에 이어 연달아 실패하면 영화판을 떠나야하는 상황을 아는 봉준호는 이번 작품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준비했습니다. 흥행 성공을 위해서 이번 영화만큼은 유명 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는 송강호였습니다.
조연 배우 오디션에서도 탈락했던 송강호였지만 이후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연기에 호평을 받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배우 송강호였습니다. 송강호는 어느 새 유명 배우 반열에 올랐던 것입니다. 첫 작품에서 흥행에 실패한 감독에게 송강호는 캐스팅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봉준호는 '믿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서 송강호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응낙 여부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초조했던 탓에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송강호는 봉준호에게 대뜸 "시나리오 봤습니다. 출연하겠습니다."고 말하고서는 선뜻 응한 이유에 대해서 "감독님 우리 5년 전에 만났잖아요. 나는 그때 당신 영화에 출연하기로 이미 결정했어요."고 말했습니다. 5년 전 무명 배우 시절 오디션에 비록 탈락했고 아무도 왜 탈락했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무시 받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공손하게 메시지를 보내준 조감독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작은 만남도 소중히 여기는 관계의 신실성이 봉준호를 세계적 거장으로 끌어올린 하나의 단초가 되었고, 이 둘의 우정은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봉준호가 송강호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서로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치켜세우는 귀한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만남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봉준호와 송강호에게 둘의 만남이 서로에게 축복이었고 큰 선물이었음을 두고 두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귀한 선물을 우리가 받고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심판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해서 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미래는 결정되고 구원과 심판이 확정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너무도 유명하고 잘 아는 은혜로운 말씀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분을 마치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괴로워하며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독에서 치유함을 얻기 위해 보낸 구원책이었던 놋뱀과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드높여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났고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값비싼 선물이십니다. 이 선물을 받은 우리가 선물의 포장도 뜯지 않고 관심도 표명하지 않고 “나 이런 거 필요 없어!”하고 반응하면 그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심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고뇌도 읽을 수 없고 큰 사랑도 깨닫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어떠한 결단이었고 어떠한 슬픔이었고 어떠한 사랑이었는지, 우리는 비록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성경의 인물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은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서 난 유일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은 그의 씨를 복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부된, 약속의 자녀입니다. 어렵사리 얻은 이삭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돌연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민됐겠습니까. 얼마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유일무이한 독자 이삭을, 단지 이삭 한 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의 약속이 아들 이삭의 자손을 통해서 주어질 것인데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의 모든 미래가 떨어져나가는 고통이고 아픔이었을 겁니다. 분신과도 같았던 독자 이삭을 그래도 순종해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지금도 깨닫고 감동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멸망치 말고 영생을 얻으라는 부름이요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신 이유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사후에 얻게 되는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는 의미보다 영생이란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소위 거듭나서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본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영생은 헬라식 표현이고 구약 히브리식 표현은 ‘오는 세대에서의 삶’,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가 가져올 새 시대에 대한 메시야 대망 사상이 있었죠.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이전 세대를 끝내고 유대인들을 위해서 새로운 세대를 가져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렇게 올 시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곧 영생입니다. 시편 133편에서 그리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천상적이고 영적이기보다 지상적이고 물질적으로 그려집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모임 가운데 가득 흘러내리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땅에서든 저땅에서든,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기서 ‘영생’이라고 번역했지만 실제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단순히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다가올 세대에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공동체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한 복은 곧 생명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영생인 것이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영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칼럼에 <지옥과 천국>이라는 글을 썼습니다만,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도 마치 천국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영생을 이미 얻은 자와 그렇지 않은 차의 차이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이미 영생이 시작된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끝장난 이전 세대를 뒤고 하고 다가올 세대를 미리 당겨와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다가올 세대가 이미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이 우리 안에서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형제 자매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이미 시작된 영생입니다.
그러면 영생 얻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을 가리킵니까? 몇 주 전에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평가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지만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고 신뢰할만한 믿음으로 인정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니고데모라는 사람 역시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어둠과 무지를 책망하셨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은 영생을 얻게 하는 믿음과는 구분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어떠한 믿음일까요? 물론 표적을 보는 믿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게 된 믿음에 대해서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리킬까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에 뭔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살아 계실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증거하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런 것들을 보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인사, 연예인이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니 나도 믿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이고 뭔가 달라보이고 가정도 화목해보이니까 나도 뭔가를 의지해야겠는데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동한 것이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겠죠.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다.”(5월 24일 설교 중)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서, 그리고 예수님의 신선하고도 능력있는 가르침을 듣고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도전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정 자유롭게 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죄의 종인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이전 세대에서 우리를 얽매이게 했던 모든 것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되고,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시작하여 누릴 수 있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임을 도전하신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현 세대의 삶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을 붙들고 영생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이 말씀 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또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전 세대에서의 삶, 이전 생명에서 죽어야 새 생명, 영생으로 나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의 삶을 특징짓는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첫째 목적으로 삼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추구를 제일 앞세우는 삶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믿음이요 영생을 살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삶이요, 가치체계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에서의 삶, 이미 임한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이 곧 영생입니다. 이기적인 욕망 추구의 삶이 아니라 형제 자매가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 삶이 곧 이미 시작한 영생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거듭난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삶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원론적인 용어는 공통적으로 ‘이미 임한’(already)과 ‘아직 아닌’(not yet)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도 그렇고 하나님나라도 그렇고 칭의도 그렇고 화목도 그렇고 양자됨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이미 임한’, 다시 말해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심판에 관해서 오늘 요한복음은 심판도 이미 임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심은 그를 구원자로 세우심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라도 세상에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어지는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심판입니다.
예전에 실업인회 CBMC를 1년간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매주 모여 예배드리는 모임에서 언젠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로마서를 가지고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한 장로님이 요한복음의 이 말씀을 가지고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이미 구원과 심판을 결정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지 최후의 심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이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요한복음 말씀, 곧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읽고 위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말씀은 이미 심판이 임했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무이하신 아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랑 받는 자로서의 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포장지도 뜯어보지도 않고 나름 자충적인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죄 아래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심판과 정죄는 같은 단어고 바꿔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19절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왔죠.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요 서로 사랑의 삶이요 곧 영생인데 이러한 새로운 삶을 받지 않으려는 겁니다. 왜냐, 고집적으로 어둠이 더 좋은 거예요. 자기 유익, 자기 안위, 자기 욕망 충족, 그 악한 삶을 버릴 용의가 없는 겁니다. 빛으로 나아오기보다 고집스럽게 이전 세대에서의 삶을 고수하는 인생입니다.
반면에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기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예정론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빛으로 나아온 자, 진리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진리로 나아오게 되고 빛으로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거듭남의 역사, 물과 성령으로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의 역사, 십자가에 들린 예수를 놋뱀 바라보듯이 진실한 믿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 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 안에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자의로 되어진 것이 아니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게 된 역사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간증이요 찬송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시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시작한 영생의 삶, 곧 천국에서의 삶을 이땅에서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5월31일 동산교회 설교
땅의 일과 하늘의 일 (요 3:9-15)
여러분 주위에 크게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일을 계기로 사람이 변한 겁니다. 좋게 변하든, 나쁘게 변하든 크게 변화되어서 놀란 적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스스로 놀란 적도 있을 것입니다.
주로 놀라운 변화는 종교의 역할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려면 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목회자가 되려면 외적, 내적 소명(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내적 소명이라면, 외적 소명은 주위 사람들의 목회자로의 부르심에 대한 인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사람들에게 목회자의 자질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만이 영입니다. 육은 죽었다 깨어나도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돈 주고 살 수도 없고 불어오라고 부탁해서 부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도 누구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불어옵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우리가 완전히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입은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이요 중생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관건은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전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시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니까 기적이고 표적이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들을 행하는데, 그분이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에서 불경한 행동 곧 성전에서 난동을 부렸는데, 그걸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분 같기도 하고, 표적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 과거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 같기도 하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보고자 예수님을 밤중에 찾은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나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겁니다.
구도자적인 열정과 진지한 탐구가 있었지만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계와 같은 틀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원으로서의 높은 고위직의 귀족 신분이었던 그가, 그리고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기존의 틀을 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당대 유대인들을 지도하던 지도층 인사로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로서 그가 생각하는 구원이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에게만 주신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적 혈통적 출생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고 이후의 삶은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따라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흔들어 깨어버렸습니다. 자연적 출생은 아무 것도 아니요 육은 육일 뿐이요, 초자연적 출생,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의 역사로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길 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반문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십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로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유대 사회에서 정치 지도자요 종교 지도자요 성경 교사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왜 알지 못하고 있느냐고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잘 알고 있어야 할 니고데모가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다가올 시대에 있게 될 성령의 역사를 왜 알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유다 나라가 죄악으로 인해서 다윗 왕조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그 직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그로 인한 전적인 갱신과 변화를 약속해주신 말씀들을 왜 알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그 죄로 인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차례로 멸망당했는데,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전혀 새롭게 변화되려면 육적인 개량과 개선과 발전 차원에 그치면 어림없고, 위로부터 내리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영의 부어주심에 의한 새로 태어나는 갱생과 변화가 없이는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이사야, 요엘,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등을 통해서 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신 놀라운 변화의 말씀, 지난 시간에 보았던 에스겔 36장 말씀 곧 죄로 인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이키시기 위해서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는 소위 “물과 성령”의 약속을 주셨고, 이어서 에스겔 37장에는 골짜기에 가득한, 죽은 지 오래되어서 뼈가 말라버린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옴으로 인해서 오래 죽은 것같이 무기력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 우뚝 서는 에스겔의 환상과 비전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말씀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자처하는 니고데모는 응당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책망입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책망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불신을 이어서 지적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확신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보고 관측되고 경험된 것을 증언하는 것인데도 니고데모가 자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와 보라”는 말씀을 하셨죠. 와서 경험해보고 자신에 대해 알아보고서 자신을 따르라는 도전입니다. 우리 주위에 변화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과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꼭 있습니다. 세심하게 관찰해보고 판단해보라는 겁니다. 이들의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던 인생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에 매달려 소망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 이제는 확고한 소망을 붙들고 소망 중에 기쁨으로 인내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고 어디서 기원했는지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변화된 사람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요?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난 변화가 아닐까요?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 ‘땅의 일’이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땅의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지금도 불어오고 있는 성령의 바람,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 바람 같은 성령의 현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 이것은 실제 현상이어서 관측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땅의 일’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고 따져보고서 판단해보아야 할 ‘땅의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오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도 ‘땅의 일’, 이 땅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성령에 관한 말씀, 성령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말씀이 ‘땅의 일’이요 편견을 버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기존의 틀을 버리고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를 관찰해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실제 현상이기 때문에 진리에 이르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니고데모가 지금 ‘땅의 일’조차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찰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면, 소위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 ‘하늘의 일’을 말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하늘의 일’은 더더욱 믿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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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하늘의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주석가들마다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설명은 ‘하늘의 일’은 ‘땅의 일’과 대비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더욱 이해할 수 없고 더욱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요,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으키는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눈에 보여지는 현상이라면 그것이 ‘땅의 일’이지만 그 현상을 일으키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계획과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의 일’이 과학이라면 ‘하늘의 일’은 신학이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시고 알려주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비전입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 현상과 성령의 역사로 인한 관찰되는 변화를 통해서 지금도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까지 ‘땅의 일’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려는 차례입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먼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의 자격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인이 바로 그 사람, 곧 인자라고 자신을 일컫습니다. 하늘에서 계신 분, 창세 전부터 영원하신 말씀이셨던 자신이 곧 사람이 되었는데 바로 그 사람으로서 자신만이 하늘의 일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 자신만이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말씀이신 자신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가 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는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늘의 일’ 곧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과 계획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주재하고 주관하고 다스리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줄곧 행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일관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의도에 따른 일이겠죠. 역사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비전이겠죠.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땅의 일을 통해서 하늘의 일을 하시죠.
하나님께서 이땅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세우시고 그를 드높이시려고 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깃발 아래 자신의 백성들을 모아서 영생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을지라도 회복의 길,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죠.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 놋뱀을 들어올리라고 하셨죠.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의 소위 ‘놋뱀 공동체’입니다. 장대라는 높은 깃발 아래 자신의 백성들을 치유하여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서,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여서 죄로 인해서 죽어 마땅하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을 내셨던 바, 그것이 바로 높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얻고 생명의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하늘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로서 ‘His Story’ 곧 ‘history’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늘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느냐는 겁니다. 광야에서 뱀을 치켜올려 높이 세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세우실 것인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죄라는 독에 물린 자들이 치유함을 얻고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변화된 심령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십자가 위에 들려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대신 십자가 위에 못박으신 것입니다. 인자의 들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킬 뿐 아니라 들어올려지심 곧 그분의 높아지심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런 죽음임과 동시에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 위에 들림은 곧 높아지심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신 예수님께서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서의 높아지심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죽음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는 승천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높이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본문 15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높이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그 안에 있던 생명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요 의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그를 믿는 자마다”는 직역해보면 예수를 믿는 다기보다 “예수 안에서 믿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믿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육체 안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로마 군사의 창에 찔렸을 때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피와 물, 특별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의 거룩하신 영으로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진실하게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그 안에 있는 생명 곧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나는 물과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레 다음 시간에 볼 너무나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하나님의 세상 사랑 방법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역사 내내 일관되게 계속되는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들을 향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시려는 ᄒᆞ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일이고 땅의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 곧 하늘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땅의 일은 계속되고 하늘의 일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지금도 불어오고 있는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도 성령으로 인한 변화의 역사,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으로 인한 초자연적인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역사를 현상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울러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역사 섭리와 주재,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에 일관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이러한 하늘의 일 진리를 깨우치는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고 이러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시는, 이미 시작된 영생의 삶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땅에서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5월24일 동산교회 설교
성령으로 난 사람 (요 3:1-8)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믿음, 믿는 자를 자녀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의 믿음도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다양할 것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녀서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된 분도 있을 것이고, 결혼해서 남편 혹은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와 세례 받고 성도가 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분도 계실 겁니다. 부르심도 다양하고 믿음에 이르게 된 계기도 여러가지고 믿음의 정도도 다 다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1절)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을 굳이 강조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읽었던 요한복음 2장 23-25절에서 ‘사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기적 중에서 그 기적을 넘어서 무언가를 가리키는 특별히 의미 있는 기적을 요한은 ‘표적’으로 선별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 ‘표적’으로 불릴만한 것들의 주된 특징은 그것이 구원에 관한, 특별히 영생에 관한, 부활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아셨습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을 때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을 예수님은 믿지 않으셨을까요? 요한복음 2장 25절에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더라도,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더라도 그들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예수님은 다 꿰뚫어보고 아셨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절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이해서 성전에 가서 성전이 거대한 장터가 되어있음을 보고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고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계신 예수님을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되는데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고위직입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데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유대 나라의 지도자로서 재야세력이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출신 예수를 만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를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부류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믿음이 불충분하다고 평가합니다. 나중에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나중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안식일 전에 시신을 급히 처리하고자 했을 때,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의 고유한 장례 절차대로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더불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에 싸고 새 무덤에 장사지내게 됩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표적을 보고서 시작했던 믿음이 예수님의 제자의 믿음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게 된 믿음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리킬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생에 뭔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살아 계실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증거하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런 것들을 보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인사, 연예인이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니 나도 믿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이고 뭔가 달라보이고 가정도 화목해보이니까 나도 뭔가를 의지해야겠는데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동한 것이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겠죠.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게 되어 혹시나 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 설득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그분의 통치를 이해하기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다, 다시 태어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위로부터, 그러니까 초자연적으로 태어나다는 뜻을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낳다 혹은 태어나다는 동사에 전치사 ‘아노뗀’이 붙어 있는데, ‘아노뗀’의 뜻은 기본적으로 ‘위로부터’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나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출생과는 전혀 다른 초자연적 출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노뗀’이라는 단어는 ‘다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적 출생과는 다른 초자연적 출생이 있어야, 그러니까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만이 영적인 실체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표적을 보고서 인간적으로 마음이 동하고 설득이 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속에서 갖게 된 믿음으로서는 불충분하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전적인 새로운 출생으로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게 된 믿음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흔들리고, 건강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서 흔들리고, 목회자의 비행을 보고서 실족하게 되기도 합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구나는 회의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니고데모는 영적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왔듯이 그 영혼도 여전히 밤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노텐’을 ‘다시’로 이해했습니다. 한 번 엄마 뱃속에서 출생해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여전히 자연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출생,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남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이나 오늘날의 많은 유대인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약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으로서 유대인으로 출생하는 것이 곧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길이라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합니다. 당시 니고데모와 같은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생각이 철칙과도 같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출생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정형화된 틀이 되어서 전혀 새로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떤 점에서 더욱 구체적인 설명이 되냐면 예수님께서 ‘위로부터’의 출생에 대해서 다시 자연적 출생을 거듭해야 하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의 출생이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더욱 생생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여기서만 사용되는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생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나라는 곧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다음세대에서의 삶 곧 영생을 가리키는데 성령에 의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는 세대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는 세대에 참여해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물과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반복적인 표현 곧 중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역해보면 ‘물 곧 성령으로’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물로 상징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7장 37-39절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 배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을 예수를 믿는 자는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 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터져나오는 생수가 곧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3-34절에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뿐 아니라 물이 나왔다고 보도하는데,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신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성령으로 난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물과 성령으로 말씀하신 걸까요? 성령으로 나기 위해서 깨끗해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요? 카톨릭에서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교회가 제공하는 물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다소 예전적으로 설명합니다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성령의 깨끗케하심을 강조하는 의미로서 물이 추가된 것으로 봅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함이 더욱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과 성령’이라는 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인데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깨끗해하심을 강조합니다만, 이러한 성령의 깨끗케 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물과 성령’이 함께 나란히 나오는 유일한 본문이 에스겔서 36장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4-27)
물은 정결하게 하는 씻기는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정결해져야 합니다. 정결해지기 위해서 물을 뿌려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십자가의 보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피가 우리를 정결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고 씻어버려서 정결케함으로써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셔서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심령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서 예수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계속 육으로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 남게 되어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을 터지만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땅에 속한 육신만을 입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으로서 자연적으로, 자연적 출생만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생각을 틀을 깨지 못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위로부터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리 놀란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도 이해 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신약성경에는 프뉴마입니다. 루아흐나 프뉴마는 원래 뜻이 바람입니다. 그리고 호흡 혹은 숨입니다. 그래서 바람 같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숨을 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부는지, 그리고 왜 바람이 부는지 설명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람 때문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갈대가 흔들리고 바람이 불어서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다는 소위 바람의 효과를 우리 몸이 감지하여 알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역시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자연적 설명으로 도저히 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그분이 누구인가, 알기는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성령의 효과는 우리에게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람이 내게 불었다는 것입니다. 일말의 바람도 없었다면 바람이 자신에게 불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고, 바람이 불었다면 그 바람을 내가 느꼈다면 바람이 불어온 것이죠.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효과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감지될 수는 있고 본인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람이 불었습니까? 오늘 예배의 현장이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성령께서 오늘 진실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거룩해진 여러분들의 심령 위에도 오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께서 숨을 크게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오늘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운행하시고 임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인간적 수준의 개량과 진보와 개선과 발전을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됩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붙들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 우리가 구원 얻을 길이 없고 죄로부터 깨끗해질 길이 없음을 분명히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가지고서 우리의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때에 오늘 우리의 심령에 거룩하신 성령의 바람이 충만하게 불어올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20년 5월17일 동산교회 설교
내 아버지의 집 (요 2:12-25)
지난 수요예배 때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쳤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하면서 조심스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는 십자가가 자칫 윤리적 가르침으로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갈라디아서는 죄 문제 해결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면서도 뒷부분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일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확연히 달라지는 바 이전에 몸담고 살아가던 일체의 세상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창조함을 입고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음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됩니다. 이것 자체가 윤리적 가르침이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에는 바로 그런 윤리적 가르침이 포함돼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죄 용서함과 구원뿐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전과 전혀 다른 삶에 대한 강조입니다. 십자가의 윤리적 측면이 정통파 개신교도인 우리에게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만 이것만을 붙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 또한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윤리적 의미를 실천하기 위해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할 것인가?’는 물음을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자아중심적이고 세상적 흐름에 따라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되겠다는 결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의 양심에도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특별한 계기로 발견하고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십자가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요? 꼭 예수를 구원자로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어서 이전 세상의 가치관을 멀리하고 자아중심적 이기주의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를 붙든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음과 관계없이 십자가를 붙드는 삶이요 십자가라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전의 삶에 대한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요?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이런 오해를 받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신실하게 믿는 신심 좋은 신앙인 중에도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음을 깨닫고 개방적인 마음의 태도로 연대하면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명한 스승 중에도 중생들을 사랑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고 현 세상의 가치를 멀리한 채 구도자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들도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자아의 죽음, 이전 세상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발견하고 붙드는 삶이 아닐까요? 비록 예수를 주님으로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최근에 코로나 이후 사회,정치,경제,국제간 신 질서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전망이 언론에서 우후죽순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사회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가 어떻게 변화될지, 그리고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길희성이라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계십니다. 이분은 개신교인으로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카톨릭대학교인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은퇴한 후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심도학사를 열었습니다. 심도학사는 종교의 경전과 인류의 고전을 함께 연구하면서 소위 삶의 길(道)을 찾는 곳입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관해서 말하기를, “제도 종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서구에서도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제도화된 종교들이 성업 중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 종교도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이고 영성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라고 영성이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갖는 우월함을 말합니다.
전형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의 생각입니다. 수년 전에 길희성 교수의 지인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지인은 크리스천이었지만 고인, 그러니까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에게 장례 예배를 부탁했습니다. 길희성교수는 고민 끝에 장례 예배 때 고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반야심경’을 미리 몇십 부 복사해서 가져갔습니다. 아무래도 상주가 기독교인이다보니 장례 예배에는 수십 명의 교인이 참석했습니다. 길희성교수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인은 평소 사랑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공(空)’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그리고 추모객들에게 한글 반야심경이 적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함께 읊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당황했지만 추모객들도 모두 따라서 낭송했습니다. 길 교수는 “처음에는 걱정도 좀 했는데, 뒤로 갈수록 목청이 더 우렁차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대목에서는 쩌렁쩌렁할 정도였습니다. 장례 예배가 끝난 뒤에 추모객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일화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이 오자 갈릴리의 여느 순례객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날에 성전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소위 성전 정화를 하셨다고 보도합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초기에 성전에서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도 동일한 모습을 보고서 또다시 분노하셨다고 말합니다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보도는 꼭 연대기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는 않고 주제별로 묶어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아마 공관복음이 말하는 시기,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그 주간에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고 분노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셨을 걸로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일화를 앞부분에 배치한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 째 표적, 북쪽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나 남쪽 예루살렘에서 기존의 종교체제의 중심인 성전체제를 정화하시고 정화할 뿐 아니라 새롭게 대체하시겠다는 말씀이 기존의 유대교 체제가 아닌 전혀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주제별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잔치와 함께 요한복음 2장에서 함께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서니까 성전이 거대한 장터가 돼 있음을 보셨습니다. 당시 여러 종류의 돈을 사람들이 사용했는데, 로마의 데나리온이나 헬레니즘의 드라크마와 같은 동전을 성전에서 성전세로 낼 수는 없으니까 성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성전 경내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오래 전에 건축을 시작하고 지금 예수님 시대에도 계속 건축 중인 거대한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기원후 63년에나 완공을 할 수 있었는데 그후 66년부터 발발한 예루살렘 전쟁,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 열심당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서 대략 70년에 완전히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처럼 거대한 헤롯 성전에는 큰 규모의 이방인의 뜰이 있었는데 거기가 완전히 시장 바닥이 된 것입니다. 환전상들은 돈을 바꿔주고 거기서 수수료를 챙기고 환전상들이 성전 경내에서 돈을 바꿀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성전 당국자들도 아마 이득을 챙겼을 것입니다. 더 큰 규모의 경제는 동물 제물과 관련되어 얻는 이익이었습니다. 유월절 규례대로 절기를 지키고자 성전에서 동물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의 제물을 가령 저 멀리 갈릴리에서 삼일길을 걸어서 오는 예배자가 자신이 기른 양이나 염소 중에서 하나님께 제사로 바칠 좋은 것들을 골라서 왔는데 며칠 길을 걸려서 예루살렘에 와보니까 싱싱함은 사라지고 제물로서 자격이 박탈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한 것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성전 경내에서 제사 제물로 적합한 동물을 판매하는 것입니다. 성전 당국자들이 오랜 토론을 거쳐서 마침내 성전 경내에서 제사에 적합한 동물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동물들을 어디서 가져옵니까.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성전 직영 농장에서 가져옵니다. 부자들은 소를 제물로 가져오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가져옵니다. 가령 100만원짜리 소를 저 북쪽 갈릴리에서 가져왔는데 와서 보니까 제자에도 적합하지 않고 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성전에서 80만원에 사들이고 대신 질 좋은 동물을 130만원에 판매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순례객들은 경제적 손실이 만만찮고 배를 불리는 쪽은 성전 당국자들입니다. 성전 당국자의 최 정점에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완전히 성전이 경제공동체, 독과점 이익업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제적 체제를 인식하고 성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서 지금 성전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시고 거의 난동 수준으로 소란을 피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시려는 것이죠. 예수님께 어떠한 행동을 하셨습니까? 그리고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4-16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인데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 직역하면 ‘상인의 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전상도 불가피하고 흠없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성전 경내에서 흠있는 동물을 구매해주고 흠없는 동물을 판매하는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불가피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면면히 흘러가고 있는 경제체제와 돈의 움직임을 들여다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체제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식을 지니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지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지칭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하신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님에 대한 강조입니다. 유일하신 아들, 혹은 맏아들로서 ‘내 아버지의 집’이 ‘상인의 집’이 된 현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분노하고 계시는 겁니다.
아까 말한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인 길희성교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예수만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는 될 수 있지만, 예수만 본성상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만 그렇다는 배타적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품는 예수의 메시지를 후대의 기독교가 좁혀버린 것이다.” 이어서 말합니다.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탐욕스런 목사보다 낫지 않나. 또 겸손하고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이 탐욕스런 주지 스님보다 낫지 않나. 가령 예수를 닮은 불자, 부처를 닮은 크리스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나 좋나.”
여러분 좋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더러운 이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고 계십니다. 이 현장을 본 일부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약성경 말씀을 생각해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시편 69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지,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열정이 어떠한지, 제자들이 본 것입니다.
결국 성전에 대한 이러한 열정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모독, 신성모독으로 성전 당국자들에 의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고서 성전 당국자들은 적지않게 당황합니다. 순결하고 온유하신 분이 터뜨린 분노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자주 내는 분노와는 확연히 다르겠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 거냐, 무슨 신적 권세라도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그렇다면 그런 권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있느냐, 무슨 보여줄 기적이 있는 거냐고 혹시나 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소 아이러니가 가미된 대답을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러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안그래도 ‘내 아버지의 집’을 ‘상인의 집’으로 만들고서 온갖 탐욕을 채우는 너희들이 안그래도 성전을 헐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계속 해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복원시켜놓겠다. 진정한 성전을 만들어주겠다. 이런 말씀으로도 읽히고 ‘내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서 내가 이렇게 성전 체제를 흔드니까 너희들이 아마 나를 죽이지 않고 배길 수 없을 터지만 나를 죽여봐라. 내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그렇게 해서 내가 진정한 성전을 세우겠다. 이런 의미로도 읽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참된 성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교통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깁니다. 참된 성전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죄사함을 가져다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도 산 길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죄용서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도 용서해주고 함께 어울려서 화해하고 교제하는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이름 자체가 벌써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불렀는데 지금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성전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렀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면 예수님은 성전인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됨을 확신하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를 향한 이러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원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바로 서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아들로서 자녀로서 갖게 되는 의분, 우리가 이것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사랑이요 주님 사랑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 사랑입니다. 이러한 열심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오 우리의 주님이심을 다시금 고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4장 11-12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2020년 5월10일 동산교회 설교
이전 세대와 장래 세대 (전 1:1-11)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에 우리는 이전 세대의 지혜를 들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장래 세대라면, 먼저 앞서 인생길을 걸어갔던 이전 세대의 경험을 경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지혜의 가르침으로 여깁니다. 명시적으로 솔로몬이 언급되지 않아서 100% 확신을 가지고 전도서를 솔로몬이 썼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솔로몬이 왕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었고 그 번영이 오히려 신앙의 독이 되어서 하나님을 떠났던 솔로몬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성찰하면서 쓴 참회록이 전도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유다 왕조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누릴 것을 다 누려본 왕으로서,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을 거의 다 살아본 사람으로, 특별히 경건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의 아들로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로서, 이전 세대이 대표로서 장래 세대에게 지혜의 가르침을 준 말씀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이전 세대의 지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의 가르침의 핵심을 생각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 백번을 이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입니다. 본디 손자병법에는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전불태(白戰不殆·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로 적혀 있습니다. 위태롭지 않다는 것은 승리보다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알고 적을 알면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겠죠. (뉴시스 2020.3.21.)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도 이 손자병법의 경구가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알아야 하는데, 잘 잡혀가던 분위기가 요새 또한번 반전됐죠. 처음에도 잘 대처해서 코로나가 별 게 아니구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갈 때 돌연 듯 31번 신천지 환자로 인해서 감염이 겉잡을 수 없이 퍼져갔는데, 이번에도 서울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집단감염이 얼마나 확산될지 지켜보아야 할 상황입니다. 지난번에는 이단 종파 신천지였다면 이번에는 성 소수자 클럽이 진원지입니다. 이태원에 있는 클럽, 주로 성 소수자들이 이용하는 클럽에서 확산 감염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잠복기가 긴데 감염 초반 3~5일에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때 사람들이 증상이 없어 감염된 줄 모르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집니다. 감염 초기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감염된 것을 보르고 사람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죠. 초기에 바이러스가 대량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킵니다.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은 종종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말라리아 원충과 비교가 되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생 생물은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죠. 숙주가 죽으면 자기 살 집이 사라지니까 그렇죠. 그런데 말라리아 환자는 치사율이 매우 높습니다. 말라리아원충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감염되자마자 사람을 거의 초죽음상태로 내모는지 의아하죠. 말라리아원충은 모기가 옮깁니다. 그러니까 모기가 와서 물어도 때려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숙주가 녹초가 돼버리는 게 병원체 확산에 유리합니다. 그 결과 독성이 강한 말라리아원충이 자연의 선택을 받은 거죠. 반면 비말이나 접촉을 통해 다른 숙주로 옮아가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이때는 숙주가 열이 나도 회사에 출근해 동료들 앞에서 재채기를 하고, 콧물 닦은 손으로 다른 사람과 악수도 막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니 숙주를 괴롭히되 죽이지는 않는, 독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쪽이 살아남는 겁니다. 코로나19는 모기 같은 매개체가 없어서 숙주가 드러누우면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염된 사람이 이태원 클럽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해서 감염 확산이 벌어진 겁니다. 증상이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스크도 안쓰고 클럽에서 종횡무진, 수많은 바이러스를 퍼뜨린 겁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 확산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아마 계속될 겁니다. 전문가들도 사람이 코로나19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이 바이러스의 종식 또는 박멸 등을 목표로 삼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월간 신동아 4월호)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이용해서 대규모로 안전하게 진단토록 한 김진용(45) 인천의료원 감염내과 과장입니다. 인천의료원은 인천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의료기관으로서 공항 검역소에서 이상 증세를 보인 환자들이 직행하는 병원입니다. 이곳에서 감염내과장이 김진용씨입니다.
이번에 이분이 제안한 ‘드라이브 스루’ 덕에 대규모 진단이 안전하게 가능했고 이를 통해서 바이러스를 통제하기가 쉬웠습니다. 지난 2월 20일일 밤 11시 30분에 대한감염학회 신종감염병위원회 정책태스크포스(TF) 단톡방에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가 SOS를 쳤습니다. 이 교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수퍼 전파자인 31번 확진자가 발생한 후 패닉에 빠진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요. 빨리 대규모 진단 방안을 만들어야겠어요." 이분이 단톡방에 올린 글입니다.
김진용 과장이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밖에서 해야 해, 밖! 감염을 막으려면.' 이분이 과천에 사는데 스타벅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커피를 이용할 수 있게 했는데, 그것도 생각나고 특별히 전에 보았던 논문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2010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인플루엔자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비해 드라이브 스루로 진단과 백신을 배포하는 모델을 논문으로 발표한 게 떠오른 것입니다. 그 논문의 아이디어를 이분이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대략 4시간만에 파워포인트로 만든 개념도를 단톡방에 올렸고, 이를 본 칠곡 경북대병원에서 이틀 뒤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DT) 선별진료소'를 개설했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라도 하늘에서 불쑥 땅에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전의 어떤 것을 다듬고 발전시켰거나 자연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었거나 역사에서 지혜를 얻은 경우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에도 다 있었던 것이 장래 세대에 옷을 바꿔입고 다시 등장할 뿐입니다. 역사 발전과 창의적 혁신과 아이디어도 새로워보여도 어찌보면 과거의 유산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장래 세대들이 이전 세대들에 대해서 너무 잘난척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시대에, 과학문명의 첨단을 산다고 지나간 세대에 대해서 꼰대라고 하는 것이나,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래 세대는 이전 세대의 지혜와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세대차이 난다고 소통을 끊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전세대의 대표로서 솔로몬이 장래세대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솔로몬을 전도자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지혜를 지녀서 모임을 주최하고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전도자로서 이전세대의 대표자로서 단도직입적으로 장래세대에게 가르쳐주는 인생의 만고불변의 진리는 삶이 참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살아보니까, 특별히 정상에 올라보니까 별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땀을 흘렸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짓밟기도 했고 때로는 비굴하기도 했고, 그리고 쾌락을 포기하면서까지 불철주야 노력하기도 해서 올라온 정상인데, 올라와보니까 별 게 없다는 허무감이요 인생의 덧없음입니다.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니까 그랬다는 거겠죠.
2절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는데 그 ‘모든 것’은 3절에 나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를 가리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땀 흘리는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익’이라는 말은 상거래에서 남긴 이익을 가리킵니다. 장사해서 남은 이익입니다. 총매출액에서 원가, 비용, 임금, 감가상각비, 세금 등을 빼고 남은 순이익입니다. 땀 흘리며 애쓴 수고의 대가로 얻은 순익이 어떤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죠. 사람마다 치열함의 정도가 다르고 아무리 세상살이를 요란하게 살았다 한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 아래에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해 아래에서’는 시간의 제약 속에 사는 현 세상으로서 말 그대로 해의 통제를 받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 없이 해만을 따라가며 사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해를 지으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해를 따라가며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해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인 인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체나 근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실체, 세상의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세상의 시공간만 붙들고 살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사람의 세상살이란 결국은 허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이라는 현상에만 매달린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국 헛된 것으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11절에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하고 연구했던 해 아래 세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소개합니다. 4-11절 단락은 ‘세대’로 시작해서 ‘세대’로 끝납니다. 세대는 오고 가는데 땅은 그대로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틀 속에서 해 아래 세상사에는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4-11절은 3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묻고서 4-11절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4-11절에서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4-7절에서 자연을 보더라도, 그리고 8-11절에서 사람들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 결과는 뻔하다는 겁니다. 자연의 해, 바람, 강물과 바다를 보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그대로지 변화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 역사를 보더라도 세상의 모습은 늘 되풀이될 뿐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발전을 위한 모든 노력, 진보를 위한 외침, 성장을 위한 몸부림을 통해서 발전하는 듯 보이나 결국 세상만사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뾰족한 탈출구와 진정한 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한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새 것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에는 이것이 새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땅을 그대로 있지만 그 땅에 왔다 가는 사람만 다를 뿐입니다. 왔다 가는 사람도 한 세대만 지나면 다 사라지고 다 잊혀집니다. 태산은 유구하되 그 태산을 거처 삼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왔다고 사라지고 그렇게 다 파묻혀서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땅은 여전한데 땅의 주인이라 할 수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 사라져버리는 이보다 헛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너무 비관적이지 않습니까? 성경의 창조신앙은 인생살이를 아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자는 무슨 근거로 전도서 1장에서 이토록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덧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세상살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다 움켜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헛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헛되냐면 전도서 1장 14절에 보면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즉 해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이 다 바람을 잡으려는 무익한 시도요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는 수고입니다. 한 마디로 해 아래서 이익을 좇아서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다보니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온통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거품처럼 때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집착은 사라져버림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늘 ‘다음’을 찾아나섭니다. 사라짐을 막기 위해 언제나 다음을 찾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만족과 행복을 찾기 위해 늘 다음 것을 계속 잡으러 다니는 게 바로 인생입니다. 성 소수자가 밤새 이태원의 클럽을 세 개나 찾아다닌 이유가 또한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라질 것을 잡으려는 인간의 무익한 시도 끝에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곤함뿐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사람이 수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허무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나섭니다만, 나가봐야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새롭다는 것들도 다 뜯어보면 이전 것들의 조합일 뿐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다 사라질 것들이요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살이를 아무리 아등바등 노력하면서 산다고 한들 무슨 이득이 남겠습니까? 이것이 권력을 누릴 대로 누려봤고, 영화를 누릴대로 누려봤고,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로서 최정상에 오르기도 했던 솔로몬의 인생론입니다. 이것이 해 아래서의 삶입니다. 진정한 이득이나 진보가 없는데도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솔로몬 자신이 반성하면서 참회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요? 우선 이러한 정서와 결론은 인생에게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해 아래에서 인생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익한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해 아래에서는 다 사라질 것이고 새로울 것이 전혀 없을 지라도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고, 오늘 우리를 통해서 새 창조 역사를 계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종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 인생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했지 않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2-15)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를 단행하실 새 창조의 실현은 한편으로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과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로써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로써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나라에 편입될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들을 환히 보여줄 것입니다. 금과 은 보석처럼, 그러한 일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정화되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새 창조의 요소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온통 사라질 것들과 전혀 새로운 창조에 적합하지 않은 새롭지 않은 일들은 하나님의 불의 심판으로써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창조로 이룩하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우리 안에 늘 경험하는 결핍과 허무감과 공허감은 우리가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창조된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새 창조를 단행하실 하나님 밖에서 즉 해 아래에서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소중합니까? 예배는 최고의 가치요 인생의 궁극적 실체요 우주만물의 실재이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행위,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드리는 행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들은 인간의 본분을 실현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해 아래서의 무익한 활동과는 차원이 다른 예배입니다! 종말론적인 예배, 종말론적인 예배를 드리는 종말론적인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먼저 삶을 살아간 이전 세대의 말을 늘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전 세대의 지혜와 경험을 경청해야 합니다. 인생을 다 살되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갔던 솔로몬이 자신의 말년에 장래 세대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해 아래서의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우리는 인정하고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하신 새 창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지으심으로써 완성될 새 창조, 이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의 동역자가 될 때에만 우리는 인생의 허무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새 창조를 이루어가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 안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과 일을 수행할 때 그것만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허무한 인생이 아닌 새 창조에 부합한 일과 예배로써 금과 은과 보석으로 인생을 건축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5월3일 동산교회 설교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 (사 65:17-25)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학교를 재개하지 못한 가운데 맞이하는 어린이주일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행하시는 바 그것은 바로 창조와 새 창조입니다. 창조와 새 창조를 통해서 자녀들이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우리 인생들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운동장입니다. 창조세계에서 먹거리를 얻고 창조세계를 탐구하여 전인이 성장하고 창조세계 안에서 우리는 일하며 살아갑니다. 남과 여로 곧 복수의 사람들로 지음 받은 사회적 관계적 존재인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요 첫 창조입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위해 삶의 틀을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틀 안에서 우리는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면 다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를 마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임무를 인간이 부여받았습니다. 경작하고 지키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의 두 측면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이 절을 “이 두 가지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땅을 경작할 뿐 아니라, 경작한 것을 또한 보호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일에
는 생산적인 측면뿐 아니라 보호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산적인 측면 곧 경작하라는 명령은 자신을 위해 경작하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누리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키라는 명령은 보호 관리하라는 명령인데 단순히 보호하라는데서 그치지 않고 잘 관리하고 “더 훌륭하게 가꾸어진 상태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창세기 주석에서 마틴 루터의 사상에 덧붙인 내용입니다. 당대에 누릴 것 다 빼먹을 정도로만 경작하고서 방치하지 말고 다음세대는 더 나은 환경의 과실을 누릴 수 있도록 기성세대가 잘 관리하여 전수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를 아름답게 완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아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창설해주신 첫 창조세계 특별히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누릴 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들에게까지 더 큰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 관리, 발전시켜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일과 성령>, 미로슬라브 볼프 저 참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당대에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경작할뿐 아니라 지킴으로써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성세대인 우리는 우리 살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늘 다음세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를 운영할 때도 자연환경을 보호할 때도 이 터전이 자손대대로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처음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주시고 틀을 만드시고 운동장을 제공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이 그 틀 안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임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먼저 믿은 우리 부모 세대가 교회학교 다음 세대에게 좋은 신앙을 물려줄뿐 아니라 그들이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여건과 터전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 장례 입관예배 때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서 처음 창조세계는 시편 90편에서 모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더해지는 안타까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빠름은 마치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세계의 적나라한 현실이고 우리 인생이 체험하는 실재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런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살았더라도 자녀들 만큼은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 속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부모로서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는 큰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데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가 현실의 고통과 슬픔 때문에 기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도 역시 큰 고통과 슬픔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인데 자녀들이 늘 목말라하고 배고파하고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서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된다면 부모로서 자녀를 바라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인 처음 창조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래서 언제나 필요가 발생합니다. 늘 결여돼 있고 채워지지 못한 허기와 갈증이 늘 상존합니다. 처음 창조세계의 구조적 결함이라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처음 창조의 목적이라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불만족과 불안입니다.
예일대학교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말합니다. 물질이나 재화에 대한 필요가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로서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모든 인간의 필요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필요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자신의 신앙여정을 진술한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진정한 필요는 당신, 곧 영혼의 양식이신 당신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허기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썩지 않을 양식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배부르게 먹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먹지 못할수록 그것이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 인간의 자연과의 연대에 대한 필요입니다. 우리가 자연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안정감을 얻습니다. 도시 문명에 발을 딛고 사는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을 지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연을 만끽하고 자연을 공유하고 자연을 경험하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 이번 황금 연휴에도 코로나로 격리되었던 삶에 대해 소위 ‘보복 나들이’를 많은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필요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경험하는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갈망하면서도 응집해서 도시 문명을 이루는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하고자 하는 필요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인격을 발전시키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보유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 존재입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스트레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상의 네 가지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말하고서 이 필요들이 언제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새 창조를 단행하는 종말의 때입니다. “슬픔과 수고 뿐”이 되어버린 처음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이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필요가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마주보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 것과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어서 완벽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새 창조세계는 인간이 자연과 평화를 이루며 자연의 구성성분인 인간과 동물과 모든 피조물 각각이 썩어짐이라는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65장 25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필요가 온전히 채워질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얻게 될 기업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났듯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어느 누구라도 외로움과 사랑의 결여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새 창조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마지막 필요 역시 채워집니다. 우리 각자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필요입니다.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계속적으로 영원토록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에게까지 유한자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만, 왜냐면 무한과 유한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한자에게 이르는 영원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성장과 발전이 계속될 것입니다. (<일과 성령>, 미로슬라브 볼프 저 참고)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들을 가진 채 우리는 이땅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창조세계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필요들이 다 채워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수고와 슬픔뿐”인 자녀들의 삶을 역전시켜서 기쁨과 즐거움과 환호 가득한 인생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창조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사야서 뒷부분, 그러니까 이사야서 56-66장이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인가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이사야서 1-39장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의 심판 앞에서 서있는, 선지자 이사야 시대의 유다왕조와 유다의 왕에 대한 통렬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사야서 40-55장은 죄로 인해서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BC8세기 말에 선지자로 불러서 긴 시대를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뒷부분 56-66장은 예언의 말씀이 바벨론의 포로민들이 아니라 포로상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포로상태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팍팍하고 죄악된 삶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실망한 채로 살아가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염두에 두고 예언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막상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전 재건도 결코 쉽지 않고 중단되어버린 학새 스가랴 선지자의 시대적상황,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의 고단함이 계속되었던 에스라 느헤미야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이들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도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새 창조의 기쁨보다는 여전히 수고와 슬픔 가득한 인생을 좌절하고 실망한 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 예언의 말씀이 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59장 1-3절에서 이렇게 되어버린 삶의 결정적인 이유를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이러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 창조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서 우리를 대신하셨던 죄없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새 창조를 시작하시고 새 창조의 기틀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바벨론 포로상태가 끝나고 그토록 열망했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여전히 수고와 슬픔뿐인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생활로 되돌아왔을 뿐인 예루살렘 주민들이 얼마나 실망과 좌절이 컸겠습니까? 그러한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전혀 새로운 그림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전의 틀로서는 안되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고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 하지만 삶의 고단함은 여전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만 때로는 버거운 삶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아버지노릇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전혀 새로운 인생 환경을 조성해주시는 아버지, 전혀 새로운 틀을 제공해주시는 아버지, 전혀 새로운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도록 하시는 아버지께서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를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이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완성하시는 새 창조 사역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서 더 이상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다시 약속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약속만 반복하실 뿐 아니라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를 이미 마련하신 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거룩한 성전이 된 우리 심령에 새 창조의 영이시고 새 창조의 완성을 보증해주실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새 창조의 보증이시오 미래 완성이라느 건축 프로젝트의 계약금 조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미래에만 있을 소망으로만 남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의 만족에 이르게 하십니다. 새 창조세계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하게 이루어져서 기도 응답도 빠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또한 자연을 하나님의 손길로 감상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할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성도 간의 교제를 이루시고 관계의 욕구를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거룩케하시는 사역과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가십니다. 새 창조 때 완성될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지금 성령 안에서 채워가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누리게 되는 이땅에서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새 창조로써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고단한 노역과 일이 아니라 참된 안식이겠지만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는 일하는 것으로, 그리고 일한 수고의 대가를 정당하게 얻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본문 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일 자체라기보다 죄로 가득한 기존 창조세계에 만연한 불의와 불공정의 역전입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손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고스란히 결실로 돌아오는 새 창조세계, 당대 우리가 경작해서 누릴 뿐 아니라 그것을 잘 관리하고 물려주어서 자손대대로 기쁨과 혜택을 누리는 새 창조세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린이주일에 부모세대로서 우리의 책임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신실하셔서 자녀 삼은 우리에게 창조와 새 창조를 통해서 아버지노릇을 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자녀들에게 제공될 환경이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아버지노릇을 잘 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역할, 경작할 뿐 아니라 지키는 임무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늘 당대 우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 우리의 자녀들,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늘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기술과 창의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마치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서 미래를 설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성령 안에서 열심히 일하시며 그 일로써 이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4월26일 동산교회 설교
성실 (골 3:22-25)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흔히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의 의식속에는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듯합니다. 보통 좋은 직업이라 함은 보수를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는데 일과 직업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직업은 당연히 의료진들이죠. 이것은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진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영국에서는 ‘키워커’(Key Worker), 미국에선 ‘에센셜 임플로이’(Essential Employee)라고 부르는 노동자들입니다. 슈퍼마켓 노동자나 배달 노동자들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최소한 안전마저 확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이 그동안 간과되었고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처우를 제대로 개선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어로 ‘케어 이코노미’(Care Economy)라고 하는 소위 ‘돌봄 경제’의 중요성도 높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요양원에서 일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을 더 올리거나, 그런 분야엔 규제를 강화해 노동조건을 개선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가사노동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집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먹거리와 건강을 챙기는 일이 우리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습니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겨레신문 2020.04.25. 장하준 교수 인터뷰)
코로나19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 두고두고 나타날 것입니다. 직업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선호하는 직업에 대한 수요도 바꿔놓을 전망입니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고 싶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예전에는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던 학생들이 개학이 한 달 이상 연기되고 수업이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자 어서 학교에 가고 싶다고 안달합니다. 아마 사회적거리두기가 5월 5일로 끝나고 생활 방역으로 전환되면 대학교에서 대면 현장 강의가 속속 재개될 전망입니다. 초중고 역시 순차적으로 현장 수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교수님들이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1시간 수업 분량이라고 생각하는 내용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영상으로 혼자 녹화하면 대개 1시간 분량이라고 생각되는 수업이 20분이면 녹화가 마친다고 합니다. 수업을 위해 동영상을 촬영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입니다. 60분 분량 수업을 촬영하면 꼭 20분짜리 동영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강(인터넷강의)’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빨리보기를 통해 이를 10분 이내로 보는 것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 수업은 대략 40분을 허비하는 비효율적인 수업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린 40분인 셈입니다. 아마 대면 수업 때는 학생들이 가끔은 불필요한 어리석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도 있을 것이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미세한 시간과 그 사이의 어색한 침묵의 시간도 포함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교육이라는 것은 상호작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2020.4.24. 박원호 교수 칼럼)
모든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의 효율성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인간관계가 어김없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하면서 사회에 기여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관계적 존재입니다. 일의 효율과 관계는 어찌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두 마리 토끼’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평생 살아가면서 일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 우리 인간에게 일의 효율성, 그러니까 효과적으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일의 효율성과 그 일을 하는 도중에 늘 끼어있기 마련인 인간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지,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 3장 18절부터 4장 1절까지에서 다루는 인간관계 영역 중에서 특별히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인간관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직장에서 직장동료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일가친척과의 관계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당시 노예사회를 배경으로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상전 앞에서 종이 어떠한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노예제 사회라는 엄연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오늘날 같이 자유화된 시대 현실속에서는 신분적 차이라는 종과 상전의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조직의 기능과 역할의 차이에 있어서 직장 상사와의 관계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일을 할 때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어디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직업활동을 하게 됩니다.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오더를 주는 쪽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대등한 인격적 관계로서 수평적 관계이면서도 불가피하게 일의 효과와 효율을 위해서 기능과 역할의 차이가 수직적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상관이 있고 부하가 있습니다. 지시를 하는 쪽이 있고 지시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룰 때 주로 종의 의무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총 4절로서 종에게 말씀하는 것이고, 다음 절 그러니까 골로새서 4장 1절은 상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상전에게 주시는 말씀은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이 한 절뿐입니다. 아무래도 초대교회 성분 분포가 종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키를 종이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된 이유는 복음 선포를 들은 종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얻은 자로서 복음이 선포하는 “주 예수 안에서는 종이나 주인이나 하나다”는 말씀에 힘을 지나치게 얻어서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 불렀던 종과 주인이 다시 가정에서 만나게 될 때 그 위치를 망각해버리기 쉬웠던 데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요, 한 형제요 자매인데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한다고, 잘못 적용해서 지시를 받지 않으려 하고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사례도 종종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종에게 주시는 말씀이 더욱 부각되고 강조되었던 듯합니다.
하여튼 오늘날은 노예제사회도 아니고 직급의 차이가 있다고 수직적 신분의 차이로 보지도 않습니다만, 여전히 사회 안에서 일을 할 때 관리자가 있고 때로는 지시를 받는 분들이 있는 조직 안에서 일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일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도 소중히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비결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듣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기본적으로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죠. 모든 일에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복종을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우선 인간관계에서 질서를 존중하고 명령과 지시에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단, 순종하고 지시를 따를 때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는 상전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면 안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가끔은 “눈가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관의 눈가림만 한다는 것은 외관상의 섬김을 뜻합니다. 눈가림이란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단순히 외적인 모양으로 만족하는 일과 봉사의 형태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는 상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눈가림’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일을 수행할 때 “성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실한 마음’이란 ‘전심으로‘를 의미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음을 다해서, 섬김도 마음을 다해서, 일도 마음을 다해서. 전심으로! 단순하고도 진실한 인간의 내면 곧 ‘성실한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성실한 마음’은 거짓된 이면의 동기가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왜냐면 종이든 상전이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 서있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첫째로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전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이 일을 열성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일차적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 크든 작든 어떤 일이라도 우리가 누구에게 하는가 하면 사람에게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일을 하면 일의 효율도 살고 인간관계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 삶이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죠. 코람데오입니다.
24절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당시 종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인의 것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었죠. 그러한 종들에게 하늘의 주님이 유업으로 상을 주신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상전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지 너희에게 는 너희에게 갚아 주실 한 주인이 계신다’, 마지막 날에 보상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영원한 생 명을 보상으로, 유업으로 주실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사람을 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전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일할 때 바로 그러한 행동으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늘의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25절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앞서 상전이 있더라도 이제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러한 자세로 일하고 살아가라고 권면했다면 이 말씀에서는 그렇게 해야 할 근거가 진술되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과 수치를 당하고 주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종들이기 때문에 악한 행실들이 하나님 앞에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종이었기 때문에 상황을 참작하여 너그러이 대해 줄 것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주님은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외모의 영향도 받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20세기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던 재판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 그 일을 위해서 기여했던 사람, 아히히만이라는 독일 군인의 재판이었습니다. 그는 달리는 열차 안에 가스실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한 열차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남미에서 몰래 숨어지내다가 예루살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서 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 내내 그는 자신은 지시 받은 대로 했을 뿐이며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지시받은 대로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고서 월급을 받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양심에 가책이 됐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의 결정적인 잘못은 지시받은 대로 임무를 수행했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성실성을 하나님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놓고 생각해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는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성실함이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성실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할 때든 인간관계에서든 중심에 주님이 주인으로 좌정해계신 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실한 마음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일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기 위해서 성실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고 열매맺기 위해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은 인간의 가장 기본이요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그 성실함이라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촉발되고 유지되는 성실함이 될 때 우리는 일의 효율과 인간관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신학적으로 우리가 성실해야 하는 이유를 또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한 구절을 꼽자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구약성경 하박국에 있는 말씀이죠. 거기서 ‘믿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므나’는 보통 믿음이라고 할 때 말하는 의존과 신뢰로서의 믿음을 뜻하지 않고, 원래 이 단어의 뜻은, 끝까지 한결같이 버팀, 견디어 냄, 인내함,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쭉,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인내, 성실의 뜻이 강합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나”는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피스티스(그리스어로). 하나님의 신실, 하나님의 미쁘심, 하나님의 성실로 번역함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70인역의 내용이 그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하나는 의인이 가지고 있는 인내하는 자질, 성실한 자세에 의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반면에, 70인역은 하나님의 붙드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의인이 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인용할 때도 늘상 70인역을 인용하니까 당연히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인용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신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 16-17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은 “그의 믿음”이나 “나의 믿음”,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지 않고 그것을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70인역을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붙드심, 성실하심을 선택하지 않고, 그렇다고 히브리어 성경을 따라 신앙인의 인내하는 신실함, 견딤, 성실함,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의존과 신뢰로서의 믿음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두 성경을 다 알고 있었을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에 이름을 가리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신실이며 하나님의 성실인 것이고, 이러한 객관적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이 복음의 효력을 받을 것이냐 말것이냐의 의존적 믿음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박국을 인용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버지노릇 해주시는 성실하심의 터 위에서 그분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동시에 아울러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믿음의 뿌리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실하라는 권면의 신학적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게 받아들여진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 믿음의 토대는 우리를 향하신, 언제나 한결같고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로서 언제나 정성을 다하고 우리의 필요와 고통에 민감하시며 보호하시고 채워주신 성실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며 신뢰이며, 자녀로서 내맡김이며 그분의 품에 안김입니다. 우리를 향해 언제나 한결같으신 신실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자녀로서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것이며, 성실한 것이며, 그분이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고 이끌어가심을 믿고 안심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평안하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고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게 응답하는 삶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주님을 언제든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므로 인해서 일의 좋은 결과가 뒤따르고 인간관계도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4월19일 동산교회 설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인 (행 11:19-26)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완연한 감소세로 돌아서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세계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미국 뉴욕 요양원에는 시체가 즐비하다고 합니다.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뉴욕에서만 2500명 넘게 요양원에서 숨졌으며, 지난주에만 그 숫자는 1000명을 웃돌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요양원들이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은폐해와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소자의 가족들조차 요양원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 역시 상황이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사망자수가 2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의료적 대처가 불가능한 소위 의료 붕괴까지 이르렀습니다. 의료진으로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이탈리안 의사가 쓴 글이 최근에 잔잔한 감동이 된 적이 있습니다. 3월 23일에 알려진 내용인데요, 제목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습니다'입니다. 지난 3주간 의료진으로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서 쓴 글입니다. "처음에는 몇명이 병원으로 실려왔고 그 다음은 몇 십명 그리고 몇백명이 몰려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죽음을 맞으러 집으로 보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라벨을 붙이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내 동료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9일 전 75세의 한 목사님이 바이러스 확진자로 우리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주위의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성경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낱 무력한 인간인 우리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 상황에 대하여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끝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짧은 몇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눕니다. 치열한 무신론자였던 우리가 지금 매일 우리의 평강을 구하고 우리가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가 없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이땅에서 나의 무익함을 깨닫지만, 나의 마지막 호흡을 다른 이들을 돕는데 줄 수 있기 원합니다. 나의 나의 동료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에 둘러싸여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 넘칩니다." 율리아나 우르반이라는 의사의 간증 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용한 한 음악회, 음악회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하고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세계적인 성악가와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단 두 사람이 거대한 밀라노의 한 성당에서 한 사람의 관객도 없이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이라는 공연을 최근에 했습니다. 아마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코로나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인류를 치료하고 음악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전달하고자 기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음악회 실황을 유트브에 올린 영상 조회수가 어제 보니까 전 세계적으로 3700만뷰가 넘었습니다. 약 25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었는데 참으로 감동적인 음악회였습니다. 잇달아 부른 곡 중에서 맨 첫곡은 ‘생명의 양식’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워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라는 이 곡은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요하지만 웅변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밀라노 대성당 안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이탈리아가 카톨릭 국가답게 모든 곡이 성가곡이었습니다. 맨 마지막 곡을 부르기 전에 성당 밖으로 나와서 마지막 노래를 했는데 마지막 곡은 찬송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였습니다. 아마 이 곡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곡이지만 개신교 찬송가였기 때문에 성당 밖으로 나와 부른 듯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찬송으로 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지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이 ‘생명의 양식’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자 한 듯 보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은 존 뉴톤이라는 분이 작사했는데요, 자신의 체험을 녹여낸 명곡입니다. 존 뉴톤이라는 분이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영국으로 수송하는 노예운반선의 선장이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자신의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작사한 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1절부터 4절까지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주옥 같은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부르는 찬송가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신앙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감동을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안디옥교회에 파송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밖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아마 모두가 유대인, 특별히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밖에서 보기에 어쩌면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정한 시간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성전 체제를 활용했고 보이지 않게 가정 중심으로 모여 성찬식을 조용히 진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정통파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추종하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후 예루살렘 초대교회 사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특정한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집사에 의해서 절기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이 증거되었고,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지시하여서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 가정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안디옥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띤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태동되게 되었는지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돌로 맞아 순교했죠. 이때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니게’는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키는데 두로와 시돈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북쪽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리아의 안디옥이 있습니다. 터키 내부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구분하기 위해서 시리아(수리아)를 붙여서 보통 표기하는데 여기서 안디옥은 시리아 안디옥을 가키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까운 섬이 구브로섬입니다. 베니게, 안디옥, 구브로에 이르러 흩어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중에,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 중에 특별히 구브로섬 출신과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렀는데, 안디옥에서 본격적으로 헬라어를 말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구레네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짊어져야 했던 바로 그 사람이 구레네 출신입니다. 하여튼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구브로 사람과 구레네 사람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주 예수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이 효과적인 결과를 산출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 예수를 전파했을 때 ‘주의 손’은 권능의 손이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헬라인들이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게 하려고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에 파송한 것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구브로섬 출신이었는데 바나바 역시 구브로섬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바나바는 별명이죠. 본명은 요셉이고 레위 지파 사람인데 이분이 예루살렘교회에서 믿음으로 인정 받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교회에 헌금했고 교회 안에서 하도 위로와 격려를 잘해서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들의 모임에 참여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여기서 “권하니”라는 말도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처럼 위로하다, 격려하다, 권면하다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이름처럼 안디옥교회에 이르러서도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러서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교회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은혜 안에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도록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보았다고 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마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어서 이전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된 것과, 이전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들의 변화를 보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위로의 사람’, ‘격려의 사람’으로서 바나바는 인품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을 안했는데 ‘왜냐하면’이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23절에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그래서 더욱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답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요 성령충만, 믿음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큰 무리가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성품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것과 성도들에게 믿음의 권면을 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훌륭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안디옥교회를 목회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울까를 고민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안디옥교회에 몰려오는 부흥을 경험하고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적임자를 찾은 것입니다. 사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고꾸러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자마자 다메섹에서부터 예수님을 전하고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습니다. 바울이 거짓 전향을 해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하는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도 사울을 만나기를 주저했을 때 사도들에게 사울을 연결시켜준 분도 바나바입니다. 아마 바나바는 이전에도 예루살렘과 회당에서 사울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친분이 있던 사울을 떠올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오는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줄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사울을 찾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자 기존 교인들의 꺼려함뿐 아니라 정통파 유대인들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10년이 지났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은 사울이 10년 가까이 고향땅에 파묻혀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기 고향땅에서도 복음을 전했겠죠. 그러나 자신의 소명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데 아마 본인도 여러 가지로 어떻게 그 소명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은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터키 길리기아 다소까지는 뱃길로 160km가 넘는 먼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불러다가 공동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5-26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울을 불러온 데서 바나바의 인품과 그릇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울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얼마나 잘 말씀을 가르쳤겠습니까. 1년간 공동목회하다보니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양질의 성장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겠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집중된 성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께만 충성된 사람이라는 외부의 평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다 접미사를 붙여 만든 신조어인데 2세기까지 외부에서 교인들을 부르는 칭호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내부적으로 ‘형제’, ‘성도’ 등으로 서로 불렀고, 외부인들이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2세기가 지나서 교인들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은혜를 아는 것이 어쩌면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신앙생활하고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대통령이 누군가 생각해보면 버락 오바마가 아닐까요.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이었던 그는 평범치 않은 출생과 성장환경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 미국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백인이었습니다. 결혼해서 낳게 된 아들을 두고서 두분은 곧 이혼했습니다. 어머니가 오바마를 길렀는데 그후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해서 오바마는 유년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양은 마냥 흑인인데 인도네시아 양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라는 흔치 않은 조합의 가정이니까 어머니는 오바마를 자신의 친청으로 보냅니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하와이에서 살고 계셔서 거기서 유년 시절을 지내게 됩니다. 다행히 그의 조부모가 훌륭하게 그를 양육해서 반듯하게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특이한 성장 환경이 포용과 공감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2015년, 두 번의 대통령 임기의 막바지에 미국 사우스캐롤나이나주 찰스턴이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총기사건이 발생합니다. 백인우월주의자가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교회에 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핀크니목사와 8명의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조용한 도시였던 찰스턴시에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인종주의자의 총에 죽임을 당한 흑인들을 추모했고, 자칫하면 흑백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때 장례위원회에서 오바마대통령에게 장례식 추도 연설을 부탁합니다. 재임 내내 자신이 흑인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던 오바마가 자신의 임기 막바지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흑인들의 장례식에서 어떠한 연설을 할 것인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말로 연설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견디어내고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들을 얻지 못하였다. 이들은 단지 그들을 멀리고 보고 환영해주었다. 그들을 이 땅의 타국인이자 이방인으로 받아주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 왔습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믿은 사람....미래에 더 나은 날들이 있다고 믿은 사람...인내를 하는 사역을 맡은 사람.”, 이라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핀크니 목사님을 우선적으로 추모합니다. 그리고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에게 미국땅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감동적으로 역사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나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미움에 눈이 멀어 살인용의자는 핀크니 목사님과 성경공부반을 둘러싸고 있는 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문을 열고 이 낯선 이를 기도모임으로 인도했을 때 빛나던 사랑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살인용의자가 고인의 가족들을 법정에서 마주쳤을 때 가족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의 한가운데서 용서의 언어를 건네었습니다. 그는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증오에 눈이 멀어 핀크니 목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하나님 은총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주 내내 저는 은혜에 대해 성찰해보았습니다. 사랑받던 이들을 잃은 가족의 은혜. 핀크니 목사가 설교에서 전했던 은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에 있는 은혜. 우리 모두가 아는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오바마가 연설 도중에 직접 부르자 스타디엄과 같은 큰 곳에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함께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합창을 하였습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서 숨진 9명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그들도 이 은혜를 발견했다고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의 삶을 통해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 고귀하고 특별한 선물의 가치를 알게 되기를. 은혜가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기를.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해서 미국에 내려주시기를” 이렇게 연설을 마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시도인다움 핵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 은혜의 감격속에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은혜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변화의 능력이 되어서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고 인정되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4월12일 동산교회 설교 (부활절)
첫째 부활 (계 20:1-6)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을 참 좋아합니다. 신천지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좋아합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자신이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 자”요 “백마”라고 강조합니다. “백마”를 탄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전의 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연출했던 장면입니다. 이만희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백마 탄 자” 곧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자신이 백마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만희 자신이 예수님의 영과 하나가 되고, 신천지 열 두 지파의 십이 지파장들이 열 두 사도의 영과 하나가 되고, 신천지 성도 14만 4천명이 하늘의 순교자 14만 4천명의 영과 하나가 되어 육신이 영생하게 된다는 소위 ‘육신영생교리’를 신천지는 말합니다. 올해로 한국 나이 90세인 그 역시 곧 죽게 될 터인데 죽은 이후 신천지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질문하는 기자에게 신천지 고위관계자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잘라 말합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예수님의 영과 하나 되어서 육신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첫째 부활’입니다. 신천지 성도들만이 얻게 되는 ‘첫째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첫째 부활’이 나옵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여기서 순교자들 곧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이땅의 신천지 증거장막 성전의 신자들 곧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결합해서 육신이 영생하는 소위 ‘첫째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첫째 부활’이 일어날 것이고, 이만희뿐 아니라 14만 4천의 진정한 신천지 성도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육신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 새로울 것이 없는 이단의 교리입니다. 예전 영생교라는 이단도 ‘육신영생교리’를 주장했습니다. 이미 20만을 훌쩍 넘긴 신천지 신도들이 진정한 14만 4천의 성도가 되기 위해서 내부 경쟁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째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고, 오늘 부활주일에 부활의 의미와 부활의 삶이 이땅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 알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시작된 부활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20장은 소위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들이 ‘첫째 부활’을 경험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간 왕노릇하며 통치한다는 ‘천년통치’, ‘천년왕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천년간의 메시야 통치가 끝날 무렵 천년왕국 기간 내내 결박당했던 사탄이 잠깐 놓임을 받게 되어 만국을 미혹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짧은 환난의 시련 기간이 이어지고, 이러한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에 의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어 소위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이 부분을 보는 분들은 실제로 이땅에서 예수님의 천년통치가 있을 것이고, 이 천년통치 직전에 믿는 자들의 부활 곧 첫째 부활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소위 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천년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뜻에서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신학 전통이나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천년설로 본문을 해석합니다. 천년의 기간이 영적이고 상징적인 기간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교회를 다스리시고 이땅을 다스리시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지금 교회시대가 천년기로 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보아야 자연스럽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라는 점에서 환상 자체는 문자적 해석보다는 의미를 해독해야 하는 비유적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년 동안 결박하여” 천년왕국이 어떻게 시작되냐면 예수님의 주권을 중개하는 대리인인 천사가 사탄을 잡아 결박하므로 예수님의 천년통치가 시작합니다. 사탄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다 가두고 그곳에 열쇠를 채우고 쇠사슬로 닫아버립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문자적인 이해보다는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볼 것을 안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언제 사로잡혀 무저갱 곧 어두움의 영역 혹은 음부에 가둬지게 됩니까? 언제 그 일이 발생합니까? 사망의 권세가 제압당했을 때 그때가 곧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이 결박당하는 때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언제 제압당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예수님을 가두었던 무덤에 놓인 굴이 굴러졌을 때, 그리고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이 나오셨을 때 그때 이 세상을 호령하던 어두움의 세력의 바탕이 된 사망 권세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제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사탄의 내쫓김이요 결박이요 무저갱 곧 그들의 활동 영역에 감금되어 활동이 제한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린 쾌거요, 그래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사건이요, 그래서 메시야의 천년 통치가 개시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이 이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던 공생애 초기 때부터 사탄은 내쫓김을 당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결박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치유와 귀신 축출로 인해서 사탄의 결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십자가로 승리하시므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므로, 어두움의 사망에 대해서 부활생명을 드러내보이시므로 사탄을 결박하신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당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로 등극하신 예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사탄의 세력은 감금당하고 활동이 제약되어서 그 결과 천년기간 내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 뱀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넘어뜨리므로 첫 언약 세대 전체를 무너뜨렸던데 반해서 새 언약 세대인 교회를 향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려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것처럼 만국을 미혹함을 통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계략입니다. 사탄이 만국을 미혹한다는 것은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해서 교회를 대적하여 싸움을 붙이려는 미혹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보십시오.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천년기가 끝날 무렵 사탄이 감금되었던 무저갱에서 잠깐 놓임을 받게 될 때 거기서 나와 사탄이 하는 일은 땅의 사방 백성 곧 만국을 미혹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게 하고 교회에 싸움을 붙일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총수가 다 차고 난 이후가 될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을 따라 땅의 사방 백성이 미혹되고 이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교회에 가입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천년통치 기간입니다. 그래서 첫 언약세대 전체가 넘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서 구원에서 이탈되는 소위 영적 넘어짐은 없을 것이지만 사탄의 방해나 죄로 넘어뜨리려는 미혹이나 때로는 물리적인 핍박은 여전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소위 영적전쟁이라고 하죠.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영적 현실입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미혹당하여 완전히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사탄을 결박하여 그 활동을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사탄이 무저갱에 감금되고 결박당한 결과로 첫째 부활이 일어나게 되고, 예수님과 더불어 성도들의 왕적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미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실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핍박을 받아 심지어 순교한 자들이나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섬긴 성도들은 죽자마자 다시 살아서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과 같이 성도들도 죽자마자 다시 살아서 하늘 보좌에 앉아서 예수님의 왕노릇, 주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로 나타나는 왕노릇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을 보십시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러면 첫째 부활이 무엇입니까? 첫째 부활은 세 가지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째, 첫째 부활은 무엇보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도들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우선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최근에 부활절을 맞이해서 중앙일보에 정양모신부라는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분이 한국 카톨릭의 성경신학의 석학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어찌 되겠나.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답변도 없어진다. 그러니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추수’ ‘수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신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다... 그런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덕을 끝까지 밀고 가다가 처형이 되셨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고, 또 제대로 죽었다.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그럼 우리의 부활은 무엇인가? “내가 이 생을 살다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내가 익으면,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거두어가신다. 수확하신다. 나는 거기에 부활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다소 카톨릭적인 부활 개념입니다만 성경적 부활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신양성경에서 부활을 열매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분의 독특한 표현,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그 인생을 추수한 것으로 본다는 관점이 신선합니다.
이분은 인터뷰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생각하는 육신적 지속으로서 부활 개념을 ‘시신 소생’이라는 말로 반대합니다. 몸의 부활을 ‘시신 소생’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이다. 영광스러운 육신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승의 육신이 아니라 이승을 초월한 육신이란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첫째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면서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들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보통 부활은 몸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 몸이란 것이 아까 정양모신부님이 말한 것처럼 ‘시신 소생’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서 몸의 부활이기는 합니다만, 요한계시록 이곳을 빼면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첫째 부활’이라는 말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 부활이라고 하면 역사의 끝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셔서 몸을 입혀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통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첫째 부활’이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하다가 그 믿음 때문에 순교한 자들이나 황제숭배의 압력에 저항하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우상숭배하지 않은 신실한 성도들의 삶이 당시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물론 이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오늘날 우리도 코로나19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삶이 때로는 문제의 연속이요 고통의 연속인 듯 보이는 우리네 삶 역시 어렵습니다만, 당시 로마제국의 회유와 핍박속에서 제국 내의 소수자로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그래서 순교자도 많이 생기고 믿음 지키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갔던 그들에게 먼 훗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부활 소위 몸의 부활을 강조하기보다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하거나 자연사한 성도들이 그 죽음 직후에 죽자마자 영적인 부활을 경험하고서 하나님 품에서 복락을 즉각적으로 누리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통은 부활이라는 표현까지 쓰기에는 좀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인 ‘첫째 부활’이라고 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그러니까 ‘첫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붙들고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성도들의 죽음 직후의 영적 부활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지금 죽으면 죽음 직후에 영혼이 하늘 보좌에 앉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왕노릇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첫째 부활입니다.
첫째 부활이 있음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비록 이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퍼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고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첫째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자마자 첫째 부활을 하게 되고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늘 보좌에 앉혀져서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하게 됩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성도들만이 둘째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본문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둘째 사망은 첫째 부활이 영적인 부활인 것처럼 둘째 사망은 영적이고 최종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최후 심판을 거쳐 영원형벌을 받는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이미 육신이 죽은 것은 첫째 사망이라 할 수 있고 불신자로 죽은 자들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이 곧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신자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죽어서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예수님이 이땅에 재림하실 때 최후 심판에 의해서 영원한 정죄를 받아 지옥형벌을 받게 되는 둘째 사망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처하게 되는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성도들은 둘째 부활을 경험하게 될 터입니다. 둘째 부활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우리의 이름을 불러내서 영적인 몸의 부활을 입혀주시는 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도들 곧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첫째 부활’은 죽은 성도들의 즉각적인 영적 부활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이땅에 사는 우리 성도들의 중생한 삶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점을 강조한 신학자가 어거스틴입니다. 이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시작되었고, 이땅에서 이미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먼 훗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실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첫째 부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죽고나서 비로소 제사장으로 왕노릇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이땅에서 영적인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사시는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적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부활절이 더욱 뜻깊은 이유는 지난 6주간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다가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예배당에 모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신실하게 끝까지 믿음으로 붙드는 여러분들은 ‘첫째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첫째 부활’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생이 지속된다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요 하나님이 영원한 선이요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확증입니다. 왜 옳은 것을 끝까지 추구해야 하는지, 왜 선한 것을 끝까지 준행해야 하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들이 현실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왜 끝까지 가치를 고수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부활은 우리에게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너무나 뜻깊은 부활절 아침에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자로서 이러한 복락을 누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4월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우리의 자랑 (갈 6:14)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만큼 삶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게 하루 하루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의 은혜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가끔씩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그러한 기적이 왜 잘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사도행전에도 보면 사도들도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병자들이 고침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동일한 성령께서 왜 이 시대에는 기적을 자주 보여주지 않을까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포이트레스라는 교수가 <예수의 기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예수님이 이땅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을 분석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 창조의 중보자로서 창조를 실행하신 분이 이땅에 오셔서 기적을 베푸셨죠. 그 기적들은 창조자가 창조를 회복하는,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새창조입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고 폭풍조차 잠잠케 되는 기적 사건은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고 죄와 사망의 비참한 세상이 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작동하지 않고 있는 기존 창조세계를 원래의 창조 의도대로 회복하는 사건으로서 기적은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새 창조입니다. 새 창조로서의 기적은 일종의 예표로서 진정한 기적을 가리킵니다. 기적의 절정, 진정한 기적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베푸신 기적은 부활이라는 새 창조,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과 확립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제가 두 주 전에 ‘하나님의 통치’라는 제목으로 이사야서 52장 7-10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이기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이사야의 예언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을 실제로 성취하신 사건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부활은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입니다. 부활은 죄로 인해서 사망 권세 아래서 해체와 부패의 길을 걷고 있는 기존 창조세계에 대하여 단행된 새 창조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고 끊임없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땅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것 같은, 그만큼 우리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다시 우리 삶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병든 몸이 치유받고 관계가 회복되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갈망합니다. 코로나 사태도 어서 속히 진정되고 코로나 이전처럼 마음껏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신앙생활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적이 필요한 시점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적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적이 있더라도 가뭄에 콩나듯 현실적으로 기적을 자주 접할 수 없습니다. 왜 기적이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과학시대, 정보화시대, 테크놀로지 시대, 소위 ‘성인이 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의학이 발달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의술을 발전시켜주었는데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때문일까요? 기적이 필요 없게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포이트레스 교수에 의하면 기적은 부활을 가리키는 예표요, 비록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부활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요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가야 할 소망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부활 국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가 예수님에게 이미 굴복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의 확실성을 믿는 것이고 우리 부활의 근거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수도 없이 행한 기적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자주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기적은 부활국면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활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먼 미래가 우리 현실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제압하고 이땅에 이미 임했습니다만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부활 국면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부활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부활의 때가 아니라면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지금은 십자가의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현재라는 기간은 고난의 때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기간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요 그러나 확실히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미래요 부활의 때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고난의 때요 십자가의 기간입니다.
오늘이라는 십자가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내 삶에는 왜 그처럼 자주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기적은 부활의 때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부활 국면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의 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복음을 원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복음만을 원합니다. 부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
적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앙망합니다. 그토록 많은 신앙인들이 기적에 목매는 이유입니다. 얼른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설교 말씀에서 강조했듯이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요, 아직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평생 살았는데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십자가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험난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는 못했어도 그들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한 주간 고난주간을 통과하면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난주간을 생략하고 부활주일로 바로 진입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영광에 동참하려면 이땅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매년 돌아오는 고난주간은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해버리고 싶은 기간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설교자인 저 또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신앙생활하는 우리 삶의 기준이고 표준이고, 이뿐 아니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십자가만이 참된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말씀인 십자가를 듣는데 실패하고 십자가를 삶의 기준과 표준으로 붙잡는데 실패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삶의 기준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이고 십자가만이 참된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해야겠는데 그래서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베드로의 실수를 우리가 거듭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짊어지실 예수님께 가까이 밀착하여 따라가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면 누구라도 넘어지게 돼 있고 실패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살다가 고난주간이 찾아오면 다시금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이 표준에서 얼마나 이탈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풍선의 바람이 빠지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기간이 바로 고난주간입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드는 기간이요 기적과 능력과 부활의 영광만을 추구하던 우리 신앙생활에 현실감각을 되찾게 해주는 기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설교에서 우리가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힘이라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세가지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살이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이요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요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10분만이라도 묵상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참된 말씀을 붙잡는 것이요 삶이 다시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신앙생활과 세상살이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활력을 얻는 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행엘이 쓴 책 <십자가 처형>을 보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한 개인에게 행해진 국가의 보복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역사에 기록된 십자가 처형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망라하고 정리하면서 십자가가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을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행해진 폭력인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 처형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자가 받을 수 있는 형벌이 아니었고 노예들에게 해당된 극형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말하고서 곧바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노예만이 받는 극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가 대신 고난 당한 것이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대 문화권에서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메시지로서 십자가의 복음은 적합하지 않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행엘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에서 십자가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곧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그 복음을 듣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인지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불명예와 모욕과 고통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입밖에 꺼내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대화 나누기에는 적합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요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고의 중심에는, 그의 관심의 중심에는, 그의 열정의 중심에는 바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매달려 죽은 십자가, 그것이 그의 선택, 그의 생각, 그의 관심, 그의 열정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와 불명예와 모욕으로 간주되어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도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왜 바울은 자랑한다고 할까요? 왜 십자가에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십자가는 곧 죽음인데 특별히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음이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죽음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어찌보면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고 있는 말씀인 듯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세상, 소위 육체적인 조건들과 가치들로 지탱되는 세상과의 관계 단절이 일어나서 비록 세상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천국 백성으로서 하늘나라의 식민지에서 새로워진 심령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통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서 말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혔다거나 혹은 “내가 정과 욕심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5)고 말할 때 거의 단순과거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현재완료형을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강조한 것은 “나는 아직도 육체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삶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서 세상과의 관계 단절을 지금도 계속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래로 십자가를 삶의 기준과 표준으로, 십자가를 선택과 결정의 기준과 표준으로, 십자가를 참된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과 표준과 원리로 삼고 지금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강조입니다.
한 주간 우리는 고난주간을 통과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를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가져와야 합니다. 헛된 것 추구하고 부풀어오를 대로 부푼 우리의 심령을 바늘로 풍선을 터트리듯 터트리고 신앙의 초심,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각오와 결단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던 십자가, 참된 말씀을 분별하는 시금석이요 표지가 되지 못했던 십자가, 그래서 자꾸 기적과 능력과 번영과 값싼 복음에 기울어졌던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되찾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모욕거리인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위치한 우리 교회는 남들이 선망하는 숭배자를 우리가 모시고 예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없는 십자가가 우리 교회에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전략입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 분열과 배타와 반목이 아닌 연합할 수 있는 힘, 갈등과 다툼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가능케 하는 힘, 세상의 조롱거리와 냉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힘, 천국을 이루어가는 힘, 이 모든 힘을 우리는 십자가를 소유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자랑할 때 얻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묵상하고 가까이함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새워지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29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본향 찾는 자 (히 11:8-16)
어제 중앙일보에 실린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글을 읽었습니다. 김우창 교수는 한국 인문학의 석학 중의 석학으로 인정받는 분입니다. 이분이 쓴 글의 제목은 <지구적 재앙 코로나19 확산 속 되새겨보는 ‘메멘토모리’>였습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라틴어로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라는 말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의 바로 뒤를 따르는 한 노예는 ‘메멘토 모리’라고 쓴 팻말을 들고 개선 행렬에 참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개선 장군이 어떤 세속적 자만심에 도취되지 않도록, 오히려 겸손함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로마인의 관습을 보여줍니다.
유럽의 중세에 이르러서는, 해골이 귀족 가문의 집 탁자에 올려놓은 장식품으로 유행했다고 합니다. 해골을 새겨 넣은 목걸이도 종종 차고 다녔다고 합니다. 이것도 ‘메멘토 모리’ 관습이었겠죠.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삶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상기하자는 것입니다. 김우창 교수가 보기에 ‘메멘토 모리’가 중요한 이유는 삶을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서 바르게 살기에 도움이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거리를 두고서 삶을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삶을 의미 있게, 그리고 바르게 살자는 것입니다. 어떤 바른 삶이냐면, 죽음을 생각함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넘어서 ‘사랑’ 또는 ‘박애(博愛)’에로 사람의 마음을 열리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그 마음에 ‘온화함과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가질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분은 작금의 코로나 위협에 대한 한국 국민들의 자발적 참여 의식과 극복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메멘토 모리’가 한국인들의 심성 근저에 자리잡고 영향력을 발휘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멘코 모리’가 긍정적으로 작용해서 한국민들 사이에서 어떤 사랑과 박해와 연대의 정신으로, 그리고 사재기와 불안과 패닉과 공포보다도 온화함과 자연스러운 편안함을 이러한 사태속에서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처럼 코로나 사태를 진단하고 이해하고 문명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분석하는 전문가들의 글이 종종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코로나 위기가 교회에 미치는 충격과 의미를 교회사적으로 의미를 정초해보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신광은이라는 분은 침례교 신학자요 목회자인데 이분이 쓴 글을 최근에 뉴스엔조이라는 기독교언론 사이트에서 읽어보았습니다. 이분의 글은 코로나 사태로 불어닥친 '주일성수 논쟁'에 관한 논평으로 글을 시작합니다만, ‘주일을 어떻게 거룩하게 지킬 것인가’ 꼭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려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방식의 예배는 불가능한가, 하는 주일성수에 관한 논쟁에 머물지 않습니다. 한국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가장 중요하게 붙들었던 신앙적 가치는 주일성수일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경험하는 충격이 큰 것입니다. 언제 다시 교회당 문이 열리고 예전처럼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을까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만약 이런 상황이 몇 개월 더 지속된다면 한국교회 모습은 어떻게 바뀔까요? 그때까지 교인들 중에서 몇 퍼센트나 예전의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이 사태를 계기로 많은 사람이 예배가 무엇인지, 교회가 무엇인지, 신앙이 무엇인지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지금의 코로나19 사태가 전례 없는 상황이라고 진단합니다. 교회에게 전례없는 상황인 이유는 이전에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나 천재지변이 일어날 때에는 종교마다 오히려 가득찼고 소위 흥행했는데, 이번에는 다르다는 겁니다. 어려울 때에 오히려 교회당이 북적였고 무언가를 하나님께나 종교인들에게 요구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요구하는 것은 딱 한가지, "제발 모이지 마라!"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가 경험하고 있는 전례 없는 상황이라는 겁니다. 이러한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요인은 무엇일까요? 소위 전염병이 눈에 보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의 보건 방역체계가 정보화시대의 디지털 기술과 빅데이터와 결합해서 전염병의 진행 패턴과 예측이 눈에 보이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사회에서 사재기 현상이 유일하게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겁니다. 눈으로 볼 수 있게 된 전염병이어서 시민들이 뭘 해야 할지 스스로 안다는 겁니다. 사재기할 만큼 위급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를 찾지 않게 되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교회를 찾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눈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교회를 멀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과학 테크놀로지의 발달이 종교를 밀어냈다는 분석입니다. 종교라 하면 "한계 상황에 마주한 인간이 자신의 결핍을 초월자 도움으로 채우려는 시도"라고 정의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종교적 인간에게 종교란 이런 의미였습니다. "인간은 자기 능력의 한계 앞에 서게 되면 본능적으로 신을 찾고, 신에게 의존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전염병이 창궐할 때마다 종교가 부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코로나19는 다른 그림을 연출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당을 찾아가 기도하는 대신 TV나 스마트폰을 보고, 사제의 설교가 아닌 정은경 질병본부장의 브리핑에 귀를 기울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모습은 80년 전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말한 '성인이 된 세계'를 떠올리게 합니다. '성인이 된 세계'란 인간의 능력이 신장되어서 더 이상 초월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 세계에서는 능력의 결핍을 보충하기 위해 초월자를 의존하던 방식으로서의 종교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본 회퍼는 예견했습니다. 요즈음 현장 예배를 강행하는 교회들이 보여주듯 종교가 천덕꾸러기로 간주되는 '성인이 된 세상'입니다. 종교가 필요 없는 시대로 한국사회도 접어들었다는 분석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단순히 주일성수 논쟁에 관한 문제제기가 아니라 '과연 성인이 된 세계에서 기독교는 생존할 수 있을까?'를 묻습니다. 본회퍼는 '탈종교화된 기독교'만이 성인이 된 세계에서도 지속될 수 있으리라고 전망했는데, 즉 만일 기독교가 인간의 능력 결핍을 초월적 신의 도움으로 극복하려는 종교로 계속 남아 있으려고 한다면, 앞으로 생존이 어려울 것이라는 것입니다. 종교의 옷을 벗어야만 생존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본회퍼가 내다보았던 '탈종교로서의 기독교의 모습'에 대해서 이분은 말합니다. 특별히 기독교 공동체와 예배에 관해서 탈종교화된 바람직한 기독교의 모습을 말합니다: “새로운 기독교는 모임이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가능할 뿐 아니라 새로운 기독교는 진정한 모임을 추구하는 기독교일 수밖에 없다.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참 모임이 아니라 유사(pseudo) 모임이었다. 종교로서의 기독교적 모임은 한곳에 모여 있기는 하지만 사실 개인들의 집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이 개별적인 종교적 욕구로 한 장소에 모였다가, 각자 알아서 은혜를 받고, 개인으로 흩어진다. 겉만 모임이지 참 모임이 아니다. 새로운 기독교적 모임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몸의 일부분으로 결합되어 예수라는 하나의 집단 인격을 이루는 공동체로의 모임이다.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는 모임, 곧 코이노니아는 새로운 기독교의 표지다.
두 번째로, 예배는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새로운 기독교는 참 예배를 드리는 기독교다. 종교로서의 기독교 예배는 제의(ritual)로 압축된다. 제의는 특정 시간, 특정 장소, 특정 사람, 특정 형식으로 구성된다. 제의는 형식 자체에 지나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이다. 주일성수도 결국 제의적 문제다. 하지만 제의는 예배 형식이지 본질이 아니다. 예배(worship)의 본질은 가치(worth)를 인정하는 것(ship)이다. 물론 기독교의 절대 가치는 하나님이다. 그것은 새로운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여러 절대 가치들, 곧 돈·권력·명예·성(sex) 등의 우상의 해체를 동반하며, 이는 자연스럽게 인간의 해방을 초래한다.”
이분은 작금의 코로나19가 초례한 전례 없는 한국교회의 위기가 오히려 한국교회가 탈종교화된 진정한 기독교로 거듭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분의 글을 읽으면서 타임지가 선정한 미국의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꼽힌 스탠리 하우어워즈가 쓴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다시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책은 세밀한 분석이 있는 방대한 책은 아니지만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좋은 책입니다. 특별히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러합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렸거나 아니면 잘못된 틀로 보았던 관점 자체를 전혀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만드는 훌륭한 책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교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교회에 관해서 자주 말했는데 이분은 오히려 건강하고 바른 성경적 교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 오히려 세상에 충격파를 던져줌으로써 세상에 영향을 준다고 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의미를 드러내주는, 세상 속에 있는 교회의 존재 자체가 세상에 충격을 던져줌으로써 복음이 선포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이책은, 미국 교회사에서 전환점이 될만한 사건으로, 1963년에 있었던 별로 크지 않는 사건에 의미를 부여합니다. 1963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이야말로 미국 교회사에서나 세계교회사에서 상징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는데, 낡은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시작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냐면, 미국의 사우스캐롤나이나주, 이곳은 보수 기독교가 맹위를 떨치던 곳입니다. 그곳의 한 극장, 폭스 극장이 정부의 방침, 곧 주일에는 교회를 가는 것 외에 특별히 극장을 열 수 없도록 강제화한 정부 법규를 어기고 주일에 문을 열고 영화를 상영한 사건입니다. 스탠리 하우어워즈는 이 작은 사건이 기독교의 역사에서 분기점이 되었다고 조금은 과장하여 평가합니다. 폭스 극장이 위치한 사우스케롤나이나주의 그린빌이라는 작은 도시는 미국 사회에서 소위 세속성에 맞서 싸운 마지막 보루요 성채였는데, 마지막으로 그곳마저도 허물어졌다는 겁니다. 폭스 극장과 교회의 싸움에서 폭스 극장이 승리는 거둔 것은 많은 기독 청년이 비록 예배를 드린 후에라도 주일에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는 것입니다. 당시에 주일에는 온 마을이 문을 닫았고 심지에 자동차에 주유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였고, 주일 오전에는 교회로 가는 사람들로 인해서 도로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던 그곳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후 미국사회는 봇물 터지듯 세상이 주도하는 세속사회로 진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작은 사건에 큰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는 주일에 영화를 상영하기 이전 시대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착각에 빠져서 교회에 주도권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사회에서 더욱 중요하다, 우리는 기독교 문화를 이룩했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다라는 일반 통념을 갖고 있었는데 이 사건을 기점으로 이러한 잘못된 생각이 산산이 부서져버린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보기 시작한 기점, 시작점은 로마제국 시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원후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한 이후부터입니다. 이때 이후로 저 1963년의 상징적인 작은 사건까지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국가와의 긴밀한 연합, 복음과 문화와의 동맹 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그속에서 살았지만 1963년 이후에는 그렇게 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교회를 둘러싼 세속사회가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을 우려했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즈는 이때부터 오히려 교회의 기회가 되었다고 봅니다. 옛 세상이 힘을 잃게 되면서 비로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진리란, 교회에 관한 바른 관점을 회복한 것인데 교회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불러내셔서 이 세상이 자기 스스로는 이룰 수 없는 대안적인 사회를 세우셨던 바, 그것이 바로 교회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콘스탄티누스적으로 교회와 세상을 하나로 묶었던 낡은 통합은 힘을 잃게 되었으며, 그 결과....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롭게 되어 이제 그리스도인의 삶을 신나는 (믿음의) 모험으로 만들어가는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분명히 드러나게 된 진리는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나그네 된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이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과 차별화되어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점입니다. 콘스탄티누스적인 주장과 생각을 가지고서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1963년에 일어난 저 작은 상징적인 사건이 참으로 고맙게 다가오는 것입니다. 세상 문화와 교회의 동맹을 역설적으로 끝낸 그 사건이 주도권을 세상에 내준 것이 아니라 교회의 참된 정체성을 되찾아올 수 있게 한 절호의 기회가 되어주었던 것입니다. 왜냐면, 세상이 끝장 나고 낡은 세상이 된 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 이 복음으로서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그리스도 사건이 역사의 분기점이요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요 역사의 절정이요 참으로 종말론적인 사건이라는 그 중요성을 망각해버렸던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교회 역사가 1963년 사건 이후 비로소 교회가 제 자리를 찾게 해준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나 ‘탈종교화된 기독교’에 대한 강조나, 스탠리 하우어워즈의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으로서 교회, 세상에 대항하는 대안 사회로 우뚝 선 교회, 이 교회는 어떤 곳이냐면, 십자가와 부활로 증거된 하나님의 통치를 입증하는 곳으로 하나님이 마련하신 전략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본 모습. 신광은 목사가 기술한 코로나19 사태, 소위 전례 없는 위기가 오히려 한국교회를 새롭게 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제가 보기에 같은 맥락에 위치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3월 첫째주부터 오늘 다섯 번째 주일까지 우리는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 드리지 않고 각자 가정에서 혹은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습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를 겪으로 우리 각각 개인적으로 여러 생각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 19가 가족의 의미, 일의 의미, 그리스도인됨의 의미, 예배의 의미, 교회의 의미 등을 새롭게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유명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알려져 있죠. 믿음, 특별히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간 믿음의 본보기들을 구약성경에 나오는 인물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통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할 것인지, 하나님의 부르심의 의미에 대해서 그리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서, 신앙을 가지고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다르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등을 생각하게 합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아브라함도 우리처럼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세상에서 부르심을 받아서 교회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는 것은 이전 세계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은 떠나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떠나 이전 세상을 낡은 세상으로 생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살라는 부르심입니다. 새로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진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으로 진입했는데도 오히려 그 땅에서 정착하기보다 장막에 거하는 삶입니다. 한동안 장막치고 지내다가 이동해서 또 장막치고 잠깐 지내다가 또 이동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갔는데도, 즉 가나안땅에 들어갔는데도 거기에 정착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장막을 치고 잠깐 살고 또 이동하고 그렇게 지내는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살아가면서 아브라함이 깨달아야 했던 진리는 가나안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지만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더 큰 약속을 자신에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도 장막치고 지내는 유목민의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었죠. 약속하신 땅을 그들의 생에속에서 실제로 손에 넣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이 표면적으로 약속하신 가나안땅보다 더 큰 약속을 하고 계신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냐면 가나안땅에 들어갔지만 약속하신 그 땅을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본문 13절은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약속하신 땅에 진입했지만 실제로 땅을 소유하지 못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장막치고 살아가는 유목민으로 살아가야 해서 마치 그 땅의 사람들에게는 외국인처럼, 나그네처럼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하심입니까?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가나안땅에 들어왔어도 거기에 정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정체성이 “본향 찾는 자”임을 가르쳐주시고자 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15-1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본향 찾는 자”임을 말하고서 그 본향이 혹시 그들의 고향인 갈대아 우르나 혹은 하란으로 혼동할까봐 덧붙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 본향이 그들의 고향을 뜻하였다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터인데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본향 찾는 자”로서 그들의 본향이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본향 찾는 자”로서 아브라함의 신앙의 강조점은 이땅을 부정하고 하늘나라에 가고 싶다는 갈망을 뜻한다기보다 참된 본향인 하나님을 추구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16절 하반절에서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이 성, 하나님이 계획하고 지으시고 예배하신 성은 새 예루살렘성이요 새 하늘과 새 땅이요 거기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영원토록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며 하나님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가 서로 사랑하며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는 완성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의 삶입니다.
나그네요 거류민이요 외국인처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배회했던 아브라함의 삶은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무엇을 했습니까?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창세기 12-13장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것이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신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새롭게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예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본향 찾는 자”들입니다. “본향 찾는 자”로서 이땅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들입니다. 작금의 코로나19 사태가 이땅에서 안주하고 이땅에서 정착하려던 우리의 마음, 그러한 마음 곁에다 나란히 신앙생활을 함께 하려 했던 우리의 콘스탄티누스적 생각을 결연히 끊어내고, 종교성을 충족시키는 종교생활과 기독교를 하나의 종교로 생각하려는 우리의 잘못된 신앙도 버리고, 성경에 입각한 건강한 신앙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새로운 계기가 됨으로 인해서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되는 복된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2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사 52:7-10)
딸 셋을 기르다가 막내 아들을 얻고 아들을 키워보니 아들과 딸이 참 다름을 알게 됩니다. 딸 셋을 기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아들은 거듭합니다. 아들의 관심은 “누가 더 힘이 세냐?”에 모아져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도둑과 경찰 중에 누가 더 세?”, “경찰과 군인 중에 누가 더 힘이 세?” 복합적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 어른과는 달리 단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질문입니다. 유치한 질문이지만 대답하기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경찰과 군인 중에 누가 더 셉니까?”, 경찰도 경찰 나름이고 군인도 총 든 군인인지 취사병인지, 다양한 상황에 따라 대답도 달라질 터지만 아이들은 그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묻습니다. 귀찮아서 얼른 군인이 더 세다고 말해주면 그래서 자신은 군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가장 힘이 센 것이 아들의 로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열방들은 자신들의 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바벨론은 마르둑을, 모압은 그모스를 각각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고유한 여호와 신앙, 배타적인 유일신 신앙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도 다른 민족의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흐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특별히 유다 나라가 멸망해서 이국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마르둑이라는 신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어느 신이 더 강한 신이고 더 우월한지는 전쟁이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민족의 신이 더 강력한 신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마르둑이 여호와보다 더 강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낳았습니다. 유다땅에서 살지 못하고 바벨론에 강제 이주해서 살아가야 했던 포로민들에게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처럼 보인 포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 듯 보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생각에 붙잡혀있는 포로민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마르둑보다 약해서 유다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해서 유다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다의 죄로 인해서 유다가 멸망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있는 기간은 마치 죄수가 감옥에서 복역하는 기간과 방불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여호와 보다 더 강해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르둑은 아무 것도 아닌 헛된 우상에 불과할 뿐이며,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요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말했습니다.
포로기 백성들에게, 포로 기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되어가는 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포로기 곧 복역의 때가 끝나가고 있다고, 이제 죄값을 충분히 받았다고, 그래서 복역해왔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선포합니다. 곧 회복이 있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 회복은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한 회복이어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미래가 펼쳐질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기적 같이 펼쳐질 임박한 미래에 포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영감적 비전과 환상을 생생하게 그려줍니다. 무너질 것 같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던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는 한 전령을 선지자는 보고 있습니다. 마치 도시국가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서 마라톤 평원해서 싸워야 했던 소위 마라톤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테네가 지형을 잘 활용하고 전략을 잘 써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을 고국 아테네 도시국가에 전달하기 위해서 약 50km나 떨어진 전쟁터에서 아테네까지 한숨에 달려온 한 군인과 같이,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기쁜 소식을 조국 예루살렘에 전달하기 위해서 급하게 달려오는 한 전령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함은 곧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고국으로의 귀환을 의미했기에 유다 백성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온 전령이 산을 넘고서 그 발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령이 전달한 기쁜 소식은 바벨론이 무너졌음이요 바벨론의 무너짐은 곧 여호와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먼발치의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면서 전령이 외치는 소리는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바벨론이 무너졌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돌아오게 될 것임을 기쁘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은 군사적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그치지 않고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에서 섬김을 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전 신학이었습니다. 그 틀에 갇혀서 새로운 충격적인 현실을 해석해낼 능력이 없는 무능한 신학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내리자 신학도 무너져내렸고, 신학이 무너져내리자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민들의 더 큰 절망의 이유였습니다. 포로가 된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어서 갖게 된 절망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서 갖게 된 소망의 끊어짐 곧 절망이었습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해서 모이지도 않고 예배도 폐하고 모여서 예배하던 교회 중에서 감염자가 나오자 사회적 비난을 받고 고개를 숙이고 위축되어서 코로나19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견고하지 못한 교인 중에서 코로나19 이후에 이탈자가 생겨날 수도 있으리라 전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감염이 되고, 모여서 예배하나 모이지 않으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고, 코로나19는 믿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가리지 않는 듯하고, 영적인 법칙이라는 것이 실은 자연의 법칙보다 별로 더 센 것 같지도 않는 듯하고,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것을 보고서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오는 성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 무력한 하나님을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사수하기 위해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조차도 코로나 감염이 잇따르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포로일까요? 바벨론에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포로됨은 포로된 현실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 소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지 못한 탓에 미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되면 비로소 진정한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진정한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압도당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때 진정한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는 영원한 복음을 잊어버리게 될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선하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때, 현실 상황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이 복음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소망을 상실해버릴 때 진정으로 포로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앞으로 코로나19보다 더 강하고 더 센 위기가 아마 여러차례 찾아올 것입니다. 코로나19보다 더 강한 현실의 위세로 인해서 더 큰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현실의 위기와 어려움 때문에 소망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그때 진정한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의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계시는 바벨론의 포로민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것이요,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포로민들이 여호와와 함께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2장 7절을 보십시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전령이 가져온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이르게 될 ‘평화’이며 ‘구원’입니다. 이 ‘평화’와 ‘구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바벨론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에 평화가 이르게 되고 고국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구원이 가능케 될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로써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페르시아 제국 역시 바벨론 제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고국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페르시아의 압제 아래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좌절은 또 한 번의 좌절이요 그래서 더 큰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더 큰 절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국으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실제로 돌아왔는데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으로 인해 겪게 되는 더 큰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포로민에서 자유인이 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국의 품에 안긴 채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여전히 소망 중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기다린 사람은 포로민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소망을 상실해버림으로 인해서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을 겁니다.
구약의 약속은 더 큰 약속 성취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은 비록 바벨론이 무너져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왔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제국도 로마 제국도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정확하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전령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마지막 전령으로서 이땅에 오셔서 선포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는 더 정확하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구원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사망 권세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인해서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고전 15:26)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수립함에 있어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이 당면한 가장 센 현실의 위세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모든 두려움의 최종 귀착지가 무엇입니까? 왜 인간은 이토록 막연한 걱정에 사로잡히기가 쉽고, 실체도 없는 두려움에 붙들려 살아가는 겁니까? 왜 인간은 늘 배고프고 그래서 죄의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겁니까? 사망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이 세고 가장 강력한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서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생에게 사망이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가 현실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미래에 관한 소망일 뿐입니다. 아직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우리의 대적 원수, 가장 힘이 센 인생 현실의 위력 곧 사망을 이기고 사망을 폐하는 승리는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서 이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것이야말로 미래에 속한 부활의 능력을 현실로 가져오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돌이켜야 하는 우리 마음의 전환으로서의 회개입니다.
회개란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요 돌이킴입니다. 마음의 전환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한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가장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 안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회개요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믿는 믿음이요 삶의 전환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진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철저함이야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재조정되고 정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으로 우리 안에서 인정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믿음이 없이는 이런 삶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받아들이는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왔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더욱 평화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인한 평화요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으로 인해서 비롯되는 참된 평화요 진정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인생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힘이 센 사망 권세를 예수님이 이기셨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이기게 될 것이라는 굳센 믿음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시 걱정의 포로, 두려움의 포로, 불안의 포로, 절망의 포로, 죄의 포로, 사망의 포로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의 포로, 이보다 더 센 무엇 무엇의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현실 상황에 압도당해서 부활의 소망을 상실해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포로생활이 끝난 게 아닙니까? 아니면 여전히 포로생활 중이십니까? 상황이 어려워져서, 미래가 불확실해서, 잘못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걱정과 근심이 엄습해서,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의 포로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가장 확실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가장 확실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인생의 모든 소망을 두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굳세면 굳셀수록 우리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샬롬, 진정한 구원과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복음을 선포하기에 앞서 이사야 40장 9절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에 앞서 선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하나님께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 불안과 염려, 죄의 욕망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상황을 통제하시고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할 때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전령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붙들고 바라보며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예수님과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예수님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포로생활이 정말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참된 평화와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참된 평화와 구원이 참으로 어려운 이때에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1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이제는 안심하라! (행 27장 20-26절)
로드니 스타크는 워싱턴대학교 사회학 교수입니다. 이분이 <기독교의 발흥>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기원후 처음 5세기 동안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발흥했는지 당시 사회에 깊은 관심을 품고 사회학적 이론과 분석 방법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급성장 요인을 밝히고자 이 책을 썼습니다. 이책에서 5세기의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과 확장을 촉진한 주요한 요인 중 하나는 기독교인들이 3-4세기에 창궐한 전염병에 걸린 모든 사람들을 돌보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교회사가 에우세비오스는 기원후 312년경 로마제국의 동부지역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 기독교인들이 차별 없이 돌본 것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기독교인들의 끝없는 열정과 헌신의 열매들이 모든 이교도들에게 명백해졌다. 이 끔찍한 재앙의 와중에 그들만이 가시적 행동을 통해 그들의 연민과 자비를 증명해보였다.”
기원후 250년경 키프로스섬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이 기간동안 카르타고의 주교가 교인들에게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이교도들 모두에게 자비와 자선을 베풀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우리가 신자들에게만 필요한 사랑의 돌봄을 베풀어 그들을 소중히 여긴다면 거기에는 훌륭할 것이 전혀 없지만, 이교도들보다 뭔가 더 나은 일을 해서 선으로 악을 이기고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람, 자기를 박해하는 자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완전해질 것이다.”
구체적으로, 기원 후 26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창궐한 전염병의 영향 하에서 당시 기독교인들이 환자들에게 베풀었던 돌봄에 관해서 디오니소스 주교가 말합니다: “우리의 형제 기독교인들 대부분은 몸을 사리거나 서로만을 생각하지 않고 위대한 사랑과 성실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위험에 개의치 않고 환자들의 보호를 떠맡아 그들의 모든 필요를 돌보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섬기면서 그들과 함께 평온하고 행복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그들도 병에 걸린 다른 이들에 의해 감염되어 이웃의 병을 자신들의 몸에 지고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리 펭그렌이라는 역사학자는 기독교의 원수 사랑과 박애 그리고 돌봄으로 인해 전염병 치료에서의 사회적 책임 개념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고 평가합니다. (<환대와 구원>, 조슈아 지프 저 참고)
대구 경북 지역이 신천지로 인해서 코로나19의 최대 피해 지역이 됐습니다만, 그곳 교회에게는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대구 경북 지역 교회들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 복음의 불모지인 그곳에 부흥의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도 대구 경북 지역 교회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해보려고 합니다. 신천지 세력의 와해와 더불어 대구 경북 지역의 복음화를 촉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세계보건기구 WHO가 코로나19 전염병에 대해서 펜데믹을 선언했습니다. 펜데믹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선포하는 감염병의 최고 경고 등급으로, 세계적으로 감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일컫죠. WHO는 지난 12일에 펜데믹 선언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코로나19 확진자의 규모가 전세계적으로 급속도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첫 발병 사례가 발생한 이후 70여일 만에 세계 확진자 수가 12만명을 넘어섰습니다. 확진자가 발생한 국가만 해도 118개 국가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코로나19 확산세가 지속되면서 심한 '감염 불안'과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들도 늘고 있습니다. 특히 확진자나 자가격리자들의 스트레스가 고조된 것은 물론 기존에 공황장애 같은 불안장애를 가진 환자들은 증세가 악화되는 일도 발생하고 있습니다. 확진자 다수는 스트레스 고위험군에 들어서 죄책감을 갖거나 동선이 공개돼 사생활 침해를 받아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신상이 유출돼 욕설 문자 등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극심한 스트레스는 몸에 대한 증상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감염병 전염에 대한 불안으로 소위 '상상 코로나'가 올 수 있습니다. 발병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어디가 조금만 안좋아도 코로나에 걸린 것 아닌가 하는 불안입니다. 어느 정도 불안을 느끼는 건 정상적 반응이지만 악화하면 병적 증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합니다. 전문의들은 감염 위기 상황에서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안, 분노, 짜증, 혐오 등의 부정적 감정과 트라우마를 '두 번째 화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건강, 경제적 위협 등 현실적 고통은 피하기 어렵지만 2차적인 심리적 반응은 관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의료진들은 일반 국민들에게 소위 '심리 방역'이 필요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심리방역이란 감염위기 상황에서 효과적인 위기 의사소통과 고위험군에 대한 정신건강 서비스를 통해 감염병으로 인한 마음의 고통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불안증세는 전국적인 현상이 되었습니다. 최근 온라인 설문조사 결과, 일상생활이 절반 이상 정지했다는 응답자는 10명 중 6명에 이르고, 코로나19 뉴스를 접할 때 떠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불안’(48.8%)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습니다.
서울시는 시민들의 심리 방역을 강화하기 위해 '코비드(COVID)19 심리지원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코비드19 심리지원단은 '심리 방역을 위한 마음 백신 7가지'를 제시했습니다. △격려 백신-나를 격려하기 △긍정 백신-좋은 일 하기 △실천 백신-수칙을 솔선수범 실천하기 △지식 백신-제대로 알기 △희망 백신-끝이 온다는 것을 알기 △정보 백신-도움 받는 법 알아두기 △균형 백신-이성의 균형 유지하기 등을 제시했습니다. (CBS노컷뉴스 2020.3.6.)
위기상황에서 불안과 공포는 어찌보면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사도행전 27장에서 바울 역시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바울이 겪고 있는 위기상황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서 해와 달과 별도 보지 못한 채 십여일에 걸쳐 배 안에서 표류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대해서 본문 20절에 보면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고 말씀합니다. 참으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사도행전 27장과 마지막장 28장은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군대에 의해서 로마로 압송되어 가고 있는 바울을 보여줍니다. 배를 타고 호송되던 중 폭풍을 만나 배가 좌초될 위기를 겪고 표류하고 있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입니다만, 여기서 오직 바울만이 평온합니다. 276명이 타고 있는 이 배 안에는 공포와 패닉과 두려움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참된 평안이 있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이 하나님을 알았기 때문이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25절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장을 면하였더라면...”이라고 바울이 이미 제안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27장 9-11절에 보면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바울은 선교사로서 곳곳에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항해에 관한 실제적 경험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항해하기에는 적합지 않은 때임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죄수에 불과한 신분이었을 뿐입니다. 사람들, 특히 결정권자인 로마군대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고 항해를 강행했습니다.
항해를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바울의 제안이 배에서 바울이 행했던 첫 번째 말이었습니다. 죄수 바울의 두 번째 말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1-25절입니다. 바울의 연설 내용은 무엇입니까? “이제는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풍랑에 떠밀려 표류한지 14일이 되는 지금, 이제는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바울이 안심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겁니까? 그가 지난 밤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로마 황제 가이사 앞에 서야 할 계획을 내가 가지고 있다. 이 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생명을 네게 맡겼다. 한 사람도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해를 받는 것은 오직 배뿐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울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결코 코로나19에 안 걸린다거나 걸려도 죽지 않는다거나 이렇게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라기보다 중요한 것은 극심한 위기상황에서도, 큰 풍랑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요, 그래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생명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요, 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이라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주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죽게 되는 그리스도인도 아마 분명히 있을 것이지만 공포와 패닉과 두려움이 아닌 죽음 앞에서도 평온, 위기 앞에서의 평안입니다. 이를 가능케하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이요, 상황을 통제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붙드는 믿음이요,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인 것입니다.
어떤 분이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광풍이 클 수록 고요도 크다.고난이 클 수록 위로도 크다. 오르막이 클 수록 내리막도 크다. 상처가 클 수록, 더욱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가 즐겨 부르고 있는,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찬송가는, 작사자인 스패포드(Spafford) 교수의 엄청난 비극 속에서 탄생한 찬송가입니다. 그래서 “찬송가 속의 욥기”라고 불립니다. 스패포드는 변호사였고 또한 법학 교수였을 뿐 아니라 무디 교회의 회계 집사였습니다.
1871년에, 이토록 평화롭고 행복한 가정에 엄청난 시련이 닥쳤습니다. 화재로 집은 불타 버리고, 재산은 전부 잿더미로 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시카고 대화재로 인해서입니다. 자신의 집 뿐만 아니라, 무디 교회도, 그만 잿더미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 화재로 300명 가까이 사망하고, 시카고의 9 km²에 달하는 지역이 불에 타고 10만명 이상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때 화재로 인해서 스패포드의 부인은 충격으로, 화재의 커다란 충격으로 인해서, 건강이 몹시 악화되었습니다. 스패포드는 병약한 아내의 휴양을 위해서,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출발하려고, 여객선을 예약하였습니다. 스패포드는 무디 교회의 재정을 맡고 있어서 불에 탄 교회당의 재건 때문에, 그의 부인과 네 명의 딸이 먼저 여행을 떠나고, 자신은 며칠 후에 뒤따라 가기로 했습니다.
부인과 네 딸이 탄 여객선은 일주일 동안, 대서양을 순항했습니다. 그런데 새벽 2시, 모든 승객들이잠든 시간에, 여객선은 영국 선적의 화물선과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충돌을 당한 여객선은, 2백 26명의 사람을 실은 채로, 바다 속으로 침몰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패포드 부인은, 익사를 하기 직전에 실신한 채로, 구명정에 의해서 구조가 되었으나 4명의 딸들은 모두 익사를 당했습니다.
스패포드는 슬픔을 가득 안고 아내를 데리고 오려고, 서둘러서 영국으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그가 탄 배가, 비극의 대서양 사고 지점을 지나 갈 때에, 그는 아픔과 슬픔으로 인해서,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사고가 난 시각과 비슷한 시각에 한참 울부짖던 스패포드에게 지금까지 일찍이 체험을 해보지 못한 평안이, 그의 마음속에 깊이 찾아왔습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평안을 느낀 스패포드는, 얼른 종이를 꺼내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를 기록했습니다.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평안해.” 스패포드는 유명한 작곡가인 블리스(Bliss)에게, 자신의 찬송시를 보여 주면서, 작곡을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이 유명한 찬송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스패포드가 혹독한 고통과 아픔 중에서 체험한 평안을, 세상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평안이,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폭풍이 없어서 평안이 아니라 폭풍 가운데서의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입니다. (https://blog.naver.com/leesanginkr/221828012723)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장로는 “조국이여 안심하라”를 붙여놓고 늘 외치셨습니다. 늘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니 조국이여 안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풍랑속에서 소망이 일절 없는 것같은, 표류하는 배속에서 “사람들이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뱃사람들이여, 그리고 동료 죄수여, 그리고 로마군인들이여, 276명의 모든 탑승객들이여 이제는 안심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그리고 하나님이 한 사람의 생명도 해를 받지 않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일개 죄수의 신분에 불과해서 처음 제안, 항해를 중단하자는 제안을 거부당했습니다. 누구도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수에 불과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서 오늘 본문에서 두 번째 연설을 합니다. 바울이 행한 연설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냥 듣고 있습니다.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는 않아도 그의 말을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세 번째 연설은 사도행전 27장 31-34절에 나옵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날이 새어가매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음식 먹기를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기다리고 기다리며 먹지 못하고 주린 지가 오늘까지 열나흘인즉 음식 먹기를 권하노니 이것이 너희의 구원을 위하는 것이요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 하고” 바울이 무엇을 제안했습니까? 섬에 가까이 온 것을 가장 먼저 알았던 사람들이 선원들이요 노를 젓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조그마한 거룻배를 내려서 도망가려고 하자 이를 눈치챈 바울이 로마 군인들에게 말해서 그것을 못하도록 끊어내라고 제안하고 군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서 바울이 제대로 식사를 준비해서 하자고 제안하자 다들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리더십이 위기의 순간에 인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죄수에 불과한 사람의 말이어서 바로 일축당했지만 이제는 이 배의 영적인 리더십이 공고하게 세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위기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게는 곧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리더십이 위기의 때에 배라는 세속사회 안에서 공고해진 것처럼 말입니다. 왜냐 그에게만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만 진정한 믿음과 신앙,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비롯된 용기가 있었고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절망 속에 피어나는 소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통찰력과 성령의 인도하심에서 비롯된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의 시간속에서 유독 오직 바울만이 하나님의 평안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고 말씀합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함께 겪는 위기의 순간에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반응하여, 비겁 대신 용기를, 절망 대신 소망을, 두려움 대신 평안을, 거짓소문과 가짜뉴스 대신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내보여줄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우리를 다르게 보게 될 것이요, 배속에서 리더십이 세워진 바울처럼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의 위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첫째, 폭풍 속의 평온, 위기 시의 담대함, 두려움과 패닉과 공포 대신 용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믿음.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함. 두려움과 공포와 패닉이 아닌 참된 평안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276명 중 오직 바울뿐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알았고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둘째, 바울에게 있는 이 믿음 어디서 왔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우리도 이처럼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받고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와야 믿음도 생기고, 평안도 생기고, 담대함도 생기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이럴 때일수록 성경을 자주 읽고 많이 읽고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들었던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들어야 합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듣고 붙잡아야 합니다.
셋째, 믿음을 가진 우리에게는 위기도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전화위복입니다! 바울은 죄수의 신분에서 구조의 총책임자처럼 리더십을 위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코로나19를 통해서도 하실 일을 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소망, 그리스도인의 용기,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이 세워질 수 있습니다! 위기의 때에! 국가여 안심하라! 이제는 안심하라! 말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 꼭 코로나가 그리스도인은 빗겨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우리는 복원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이기는 부활의 생명, 영생의 소망이 있다! 죽음의 공포를 이긴 담대한 능력! 반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신천지는 위축되고 복음의 불모지라 할 수 있는 대구 경북지역이 부흥하게 되는, 세상의 사람들에게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발언할 기회가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오늘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코로나19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만드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3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다시(Again) (창 35장 1-7절)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까?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 함은 직접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는구나를 확신하게 된 체험을 가리킵니다.
벧엘에서 야곱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가로채고서 에서에게 죽임을당할까봐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죠. 야곱의 어머니가 잠깐 외삼촌집에 가 있으라고 했죠. 형의 노가 잠잠해질때까지 거기에 있다가 오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난생 처음으로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벧엘이라는 곳에 이르러 길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브엘세바에서 출발했으니까 벧엘에 이르기 위해서는 며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벧엘에 이르러서 길에서 언뜻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사다리(계단)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의 꿈을 꾸게 되었고, 긴 사다리 끝 하늘쪽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았습니다.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아직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보호와 위안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법한 말씀입니다.
꿈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서 자신이 누웠던 그곳을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한 여호와 하나님을 야곱이 이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0-21)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무사히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되실 것이라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삭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야곱이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된 체험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시지 않고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고백된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그래서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곳이요, 이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와 어두운 미래속으로 뚫고 들어갈 용기를 얻었던 곳이 또한 벧엘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불확실한 미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20년간이나 지내야 했던 앞으로 펼쳐질 두려운 미래의 발걸음을 힘있게 내딜 수 있게 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습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던 속임수 대장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여러 번 속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멸시를 받고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던 야곱의 삶, 외삼촌 라반 밑에서의 길고 긴 20년의 세월을 참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 체험이었고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벧엘이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지탱시켜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벧엘로 다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겜 지역입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대략 4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왜 벧엘로 가라고 하신 걸까요?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그리고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네가 형 에서에게서 도망칠 때 두렵고 떨리는 공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벧엘, 이후 20년의 고된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지탱시켜주었던 힘의 근원이 되었던 벧엘, 그 벧엘로 다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떠한 상황이길래 야곱에게 벧엘로 다시 가라고 명하신 걸까요? 야곱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나요? 자신의 딸 디나가 세겜 땅에 거하는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자 디나의 오라비들이 속임수로 결혼을 약속하고 단 조건을 내걸기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몰 집안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한참 고통스러워하는 제 3일에 그곳을 급습해서 하몰 집안 일가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하몰뿐 아니라 강간을 저질렀던 그의 아들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닮아서 세겜 족속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 집안은 세겜에 잠깐 거주하고 있는 유목민인데 세겜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닥쳐올 보복을 야곱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어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아내 레아의 소생이어서 그런지 소극적이었던 야곱이 몰살 당할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야곱의 위기의식과 다급함이 창세기 34장 30절에 표현돼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죽음의 공포, 멸절당할 것 같은 위기를 야곱이 느끼고 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도망갈 때 해가 지고 처음 벧엘에 이르러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금 다시 야곱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셨는지 야곱은 즉시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자신에게 벧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야곱이 상기하였던 것입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야곱은 벧엘로 즉각 갔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입증된 벧엘, 지난 이 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가운데서 나를 지탱시켜주었고 그 소망의 말씀 붙들고 험난한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벧엘, 그러나 다시 고향땅에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벧엘입니다. 다시 위기가 들이닥치고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게 된 상황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예전처럼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는 요청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위기의 때에 두려워하던 너를 찾아와서 만나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끝에 이제 가나안에 다시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던 야곱, 그러나 그 결과로 벧엘을 잊어버렸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위기와 다급함을 주셨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태와 안일에 빠져있던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 일신하여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특권이라고, 특혜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믿음의 동료가 함께 한다는 것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복음의 기초 위에 말씀 위에 세워진 정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크게 의식하지 못했고 자부심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이제 모든 것을 바꿔버렸습니다. 당연시했던 모임을 이제는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이 힘들 때 함께 모여서 교제를 나누었던 형제자매를 이제는 쉽사리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순탄한 삶, 특별한 문제거리도 없이 평범한 삶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보증수표인 줄 알고 그렇게 신앙생활해왔습니다. 이정도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엿이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름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코로나 19 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의문시되었습니다. 예배생활을 규칙적으로 하지 못함과 기도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과연 하나님을 섬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확신도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입니다. 위기가 신앙의 감별사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바닥까지 드러내보일 법한 위기의 때입니다. 바이러스의 습격을 어떻게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작지만 새록새록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입니다. 다시 위기와 어려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다시 벧엘로!”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을 위해서 야곱이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불쑥 찾아오셨을 뿐입니다. 단지 야곱의 마음이 낮아져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도 대개가 마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쑥 찾아와주셨습니다.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의 하나님을, 혹은 내 부모의 하나님을, 내 이웃의 하나님을, 비로소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벧엘에서의 나의 체험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벧엘에서의 하나님 체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나님을 포기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아직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벧엘에서 불쑥 만났던 하나님 체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다시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기존 생각이 붕괴되고 있는 요즈음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벧엘로 가서 나를 만나라!” 지금 신앙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헌신에 만족해하지 말고 이 어려운 때에 다시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고 교육하실 때 반복을 사용하십니다. 위기의 반복이요 어려움의 반복이요 그래서 또한 은혜의 반복입니다. 은혜로 우리를 불쑥 만나주시고 다시 위기를 맞아 허둥지둥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벧엘로 가라고 은혜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첫 번째와는 달리 야곱은 준비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야곱이 느낀 주된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똑똑이 기억하고 있는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준비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오늘 본문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입고 있던 옷도 갈아입고서 그러한 준비를 하고서 벧엘로 다시 나아갑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두려워할만한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는 것입니다. 벧엘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인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외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고 정결한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처럼 불쑥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은 우리의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함,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 이러한 준비가 없이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함과 정결함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만큼 소중하게 높아져있는 우상들을 다 깨뜨리고 전심으로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변화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빠졌던 안일한 신앙생활을 일소해버리고 다시 새로워진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우리는 곧 다시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갔던 마을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예배당에서 서로 만나고 예배를 드릴 때 기분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서 예배하게 될 때의 감격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 그 감격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지속적인 변화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다시 찾은 벧엘에서, 예배와 하나님에 관한 태도는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의 태도와 각오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은혜인 줄 알지 못했고 당연시했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뒤로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임을 새삼 깨닫고 감격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의 우리의 나태와 안일과 거짓과 기만을 다 회개하고 심령이 성령으로 정결해지고 순수해져서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오직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목회자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던 삶에서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었고, 정독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얼른 찾아 스쳐지나듯 읽어야 했던 좋은 책들도 다시 정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유튜브에서 워십팀들의 경배와 찬양 영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워십팀, 가령 제이어스나 어노인팅 그리고 마커스워십 팀등의 예배 실황과 그들의 찬양곡들을 듣고 보면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팀들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태도에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의 태도에서 그곳에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제 자신에게도 메마른 땅의 생수와 같은 은혜의 단비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관건은 우리의 거룩함과 정결함이고, 이뿐 아니라 우리의 목마름과 주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우리는 새로워진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투브에서 여러 유명 인사들의 간증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간증은 마커스 워십팀에서 찬양인도자로 섬기고 있는 소진영간사의 간증이었습니다.
이분이 지금은 40이 되었는데 2005년 25살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온지 얼마 안된 글리벡이라는 획기적인 신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근육 경련, 구토 등의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이 약을 6개월 복용하자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이 약을 평생 복용하겠느냐며 골수이식을 하자고 해서 오빠가 가능해서 이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 조혈모세모를 이식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단 받은 날보다 오히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에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다시 글리벡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복용해오던 중에 나이 30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당연히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면 약을 끊어야 하는데 남편과 주위 분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약을 복용해오고 있는데 약을 끊으면 재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고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솔직한 마음을 꺼내 기도했습니다. 당연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이날만은 마음에 뭔가 큰 평안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도 아이를 가져봐야겠다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 남편, 부모님 등을 설득해서 아이를 갖기 위해서 시도를 했습니다. 몸에 남아 있는 약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몇 개월이 지난 후 본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약을 끊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니까 의사선생님이 한 달만 더 두고보자며 그때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며 다시 약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마침 그 달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때가 2015년이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지 딱 10년만에 불가능해보였던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서 만든 찬양곡이 ‘오직 예수뿐이네’라는 곡입니다.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이 곡에 얽힌 기가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분이 어느 날 마커스워신 찬양집회 끝나고 가는데 어떤 분이 급히 뛰어와서 자신을 붙잡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친오빠가 얼마 전에 죽어서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찬양집회에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그날 찬양집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엄마가 자신의 오빠를 잃고, 그러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 찬양을 듣고 가사를 적고 주방에 붙여놓고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고 수시로 가사를 읽으면서 하루 하루를 견디며 버티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엄마가 자신한테 그러더래요. “이 찬양곡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일까 이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가 자신에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날 찬양집회에 와서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 곡을 쓴 분이 바로 소진영간사임을 알게 된 것이죠. 물론 이분은 소진영간사의 아픔을 알지는 못하죠. 이 말을 듣고 있던 소진영간사는 자신에게 고통이 있었던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심은 어려운 위기의 때이니까 지혜롭게 기도하면서 극복하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우리 인생에게 무엇이 남을 수 있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특별히 신앙인에게는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심을 분명히 깨닫고 이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전혀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써 이후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청입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얻고 이후 삶의 방향이 그 방향으로 지속된다면 이 위기의 시간이 분명 축복의 시간, 전화위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이겨내시고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