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5일 주일오전예배 전체 영상을 올려드립니다.
■2020년 7월5일 동산교회 설교
어떻게 예배해야 할까요? (요 4:19-26)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가 오늘 본문에서도 이어집니다. 지난 시간에 보았듯이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이 어떠한 방식으로 목마름을 해갈하려고 했는지를 지적하셨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피조물이기에 목마름과 결핍이 있고 필요에 목마릅니다. 그러한 갈증을 해결하려고 이것저것 시도해보면서 삶을 살아가죠. 예수님은 그러한 목마름이 과연 어떠한 목마름인지를 사마리아 여인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묻고 계시는 듯합니다. 그 목마름이 과연 무엇인지 진정 아느냐는 겁니다. 목마르기 때문에 물을 찾아나서는 게 인생인데 목마름의 근원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겁니다. 남들에게 원없이 인정받고 싶고 사랑 받고 싶고 주목받고 싶고, 물질적 필요에서 해방 받을 정도로 풍요롭고 싶고, 지루한 삶이 아니라 기쁘고 스펙터클한 삶, 편안한고 안락한 삶, 소위 잘나가고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그것들이 달성되면 목마름이 없어질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열심히 추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한 성공과 성취는 우리를 목마름의 굴레로부터 영원히 해방시켜줄 수 없다고 단언하십니다. 잠깐 동안 목마름이 해갈된 것처럼 보이지만 다시 인생은 본연의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만족이 될 수 없고 내일은 더더욱 그리합니다. 또 다른 무언가를 손에 쥐어야, 또 다른 더욱 강력한 무언가가 있어야 이제 만족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무언가를 향해 찾아나섭니다. 여전한 목마름을 안은 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생수를 주시겠다고 약속해주십니다. 고인 우물과는 달리 샘 근원에서 샘솟듯 솟구쳐올라 흐르는 생명력 있는 물을 주셔서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합니다. 영생의 샘물을 말씀하시는데도 여인은 알아듣지 못합니다. 단순히 영원히 목마름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그래서 다시는 사람들 시선을 의식한 채 땡볕 내리쬐는 한낮 정오에 우물물 뜨러오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합니다. 예수님이 주시겠다는 생수를 벌컥 들이켜서 지긋지긋한 일상에서 벗어나는 구원을 삼고자 한 것입니다. 고단한 현실을 아편을 맞음으로 고통에서 벗어나는 현실도피의 구원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는 영생의 소망과 구원의 확신과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께로 우리를 연결시켜주므로 삶의 목적과 이유를 깨닫게 하시는 것이요, 하나님 안에서 고달픈 현실을 벗어나는 게 아니라 고달픈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제공하는 생수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오해를 교정하기 위해서, 그리고 여인이 자신의 삶을 거울로 적나라하게 비춰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여인의 치부를 꺼냅니다.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사람도 남편이 아닌 평범치 않은 기구한 삶을 꺼내놓습니다. 이 한마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여인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 여인의 인생의 단면입니다. 이 여인이 무엇을 추구했고,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서 무엇을 구원으로 삼아 살아왔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래도 여전히 우물 뜨러 오는 것이 고역인 인생, 이러한 삶 때문에 마을 공동체의 일원이 되지 못한 채 소외당하므로 고통당하고 있는 인생, 아닌 줄 알면서도 마력의 힘에 이끌려서 또다시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려지는 인생, 그래도 여전히 목마른 인생, 벗어날 수만 있다면 일상을 털어버리고 달아나버리고 싶은 인생, 현실의 고단함을 떠날 수만 있다면 떠나버리고 싶은 현실 도피의 인생, 예수님은 그러한 인생을 살아왔던 여인의 삶을 되돌아보라고 여인의 치부를 끄집어낸 것입니다. 생수를 자기 식으로 받아들인 여인의 가치추구체계 전체의 단면을 이 한마디 말로 끄집어낸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가 여기까지 이르렀을 때 예수님이 유대인으로서 선지자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선지자, 성경을 잘 아는 선지자, 뭔가 영적인 궁금한 문제에 대해서 대답해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생수, 목마름, 목마름을 해갈하려는 인생의 시도 등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까 여인의 머릿속에서 이제 인생의 근본적인 종교적 문제 예배에 관한 주제를 꺼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종교라는 것이 인생의 근원적 목마름에 대해서 대답하려는 시도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은 종교적 존재로서 종교적 욕구가 있습니다. 종교성을 충족하려는 종교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종교의 핵심이랄 수 있는 예배에까지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20절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 짓고 예배하던 곳은 세겜 근처 그리심산입니다. 이 우물물에서 보이는 가까운 곳입니다. 잘 지어놓은 그리심산 성전을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군대가 파괴한지도 이미 100년도 지난 상황에서 무너진 성전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여전히 그곳을 성전 삼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하고 있는 그 성전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 질문하는 겁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과는 달리 모세오경만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고 사마리아 오경을 편집해서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 모세오경과 큰 틀은 갖지만 사마리아 중심으로 작은 변형을 한 사마리아 오경입니다. 모세오경만을 경전으로 삼는다는 것은 다윗 왕조나 다윗 계열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없다는 것이고,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고 회개를 촉구하고 진정한 회복이 하나님이 부어주실 성령으로 가능케될 거라는 선지자의 메시지도 알지 못함을 뜻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이 지은 성전, 그리고 바벨론에 사로잡혀갔다가 돌아와서 지은 제2성전,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우리 사마리아인들은 여기 그리심산 성전에서만 예배해야 한다고 하는데, 무엇이 맞느냐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사람들이 종교적 논쟁이랍시고 주장하는 것을 들어보면 본질적 중요한 사안에 대한 토론이라기보다 지엽적이고 인간의 이기성과 소속감이라는 우물 안을 벗어나지 못한 채 벌이는 논쟁일 때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를 전달하기 위해서 이곳 사마리아까지 찾아오셔서 사마리아인이라는 인종적 장벽, 여성이라는 성적 장벽, 그리고 성적 문란함으로 간주될 수 있는 도덕적 장벽을 뛰어넘고서 여인을 찾아온 것인데, 여인은 아직도 자신의 장벽 안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이 그게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실체가 오기 전까지 그림자에 불과한 것들은 실체가 오면 뒤로 물러나야 함을 말씀합니다.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도 그간 유대인들에게 참된 하나님 섬김으로 제시되었을지라도 진정한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 실체를 보내시고, 참된 성전이라는 실체가 지금 이땅에 와있는 사실을 안다면 이 산이든 저 산이든 뭐가 중요하겠냐는 겁니다. 참된 성전이 되셔서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시는 분, 그 실체가 여기 와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분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영광받으시는 때가 곧 이르렀다는 사실, 진정으로 예배가 가능한 때가 이르게 될 거라는 사실이 더욱 중요하겠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는 예수님이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선물인 생수, 영생의 축복을 예수님께서 가져다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게 핵심입니다. 예배는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22절입니다.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적 전통과 전승은 단절돼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분일 뿐만 아니라 다윗의 자손으로도 오셨죠. 다윗왕에게 약속하신 다윗 왕조를 굳게 세울, 물론 보이지 않는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세우실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사마리아 전통은 이러한 약속을 받지 못한 종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 전승 전체의 약속으로 자신이 오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모르는 분을 어떻게 예배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하나님을 모르면 예배가 되겠습니까? 사마리아인들과는 달리 구약성경 전체를 받고서 구약성경이 가리키는 메시야를 기다리는 유대인들만이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우리가 아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약속들을 성취하러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구약성경의 총 결산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아는 게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3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알기 때문이요,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한 영이 믿는 자들에게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진리의 성령 안에서 예배함을 뜻합니다. 왜 성령님이 진리의 성령님이십니까?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조명해주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셔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 생명의 길임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성령 받습니까?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믿을 때입니까? 세례받을 때입니까?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성경을 가지고서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믿고 세례받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자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시면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자동적으로 알게 되는 측면도 있고, 우리가 성령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말씀읽을 때 성령의 조명에 힘입어서 하나님을 알게 되므로 참된 예배가 비로소 가능해지는 겁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이 때는 언제입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시는 때겠죠. 진리의 성령이 오시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합니다. 예수님의 육체 안에 한량없이 부어진 하나님의 성령이 그 육체가 찢기고 피를 흘리셔야 그 육체를 넘어서 믿는 우리에게 주어지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곧 이 때’는 여러분에게 언제입니까?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서부터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성령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영의 도움을 받고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4절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라고 말씀하셨죠. 육은 죽었다 깨도 영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차원이 영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시지 않으시면 육은 죽었다 깨도 영이 될 수 없으므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령을 예수 믿는 자에게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자원, 인간적 차원, 인간의 수단, 온갖 인간적이고 육적인 것들로는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인간적 결심과 결단 가지고도 안됩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늘 영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영역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영과 진리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부어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아들이 사랑 안에서 굳게 연합하여 하나가 될 수 있었듯이, 동일한 성령을 예수 믿는 자에게도 주셔서 예수를 믿고 하나님 아버지와 굳게 연합하게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 믿고 세례를 받으면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 14장 2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만 하나님을 알게 되어 비로소 참된 예배가 가능해진다는 겁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입니다.
예수님은 긴 대화 끝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이 바로 진정한 예배의 때를 가져다주시는 분으로 알려주십니다. 성령을 아버지께로부터 한량 없이 받아서 믿는 자에게 나눠주시는 분으로 자신을 계시하십니다. 자신이 메시야 곧 그리스도임을 밝히 증거해주심으로써 여인과의 대화가 마무리됩니다. (26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나선 것도, 그 장벽을 뛰어넘고 만나고 대화를 나누신 이유도, 그리고 우리를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신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가 되도록 부르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예배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하나님을 알고 아는 분에게만 예배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압니까? 하나님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유일한 참된 생수의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마름을 유일하게 영원토록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갈급한 마음,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하러 가면 하나님이 기뻐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그래서 예전 성경번역을 할 때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것으로 의미 있게 번역한 것입니다. 우리의 정성과 준비와 성실한 마음과 주를 향한 사랑의 마음, 기대의 마음으로 정성껏 준비해서 나오라는 부르심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부름은 또한 우리의 자세에 대해서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왜냐면, 성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자동적으로 성령 안에서 예배하는 것이 되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시 육에 빠질 수도 있고 다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통회하고 자복해서 다시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다시 성령 안에 있게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예배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로부터 예배 예전 때 예배 시작부에 참회의 기도의 시간이 있었던 이유입니다. 예배 전에 미리 예배당에 와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추어보고 회개하고 성령을 구하고 새로워진 심령으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모든 문제의 해답이 하나님께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고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이 우리 영혼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맥추감사절입니다. 올해 2020년 상반기는 압도적으로 코로나19로 지나갔습니다. 일상의 대변혁이랄 수 있는 어려움도 많았고 여전히 코로나의 위협 아래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어려울 때 피할 길 주셔서 여기까지 이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배함을 하나님이 기뻐받으십니다. 마지막으로 시편 50편 23절을 읽고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성령을 의지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면서 영과 진리로 마음과 정성을 다해 감사함으로 늘 하나님께 예배하고, 예배하는 시간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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