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24일 동산교회 설교
성령으로 난 사람 (요 3:1-8)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오늘 이렇게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복음에 관한 믿음, 믿는 자를 자녀 삼아주시겠다는 말씀에 대한 믿음이 없이 하나님께 예배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여기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의 믿음도 다 다를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 믿음에 이르게 되었는지도 다양할 것입니다. 모태신앙으로 자라서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녀서 자연스럽게 믿음을 갖게 된 분도 있을 것이고, 결혼해서 남편 혹은 아내의 인도로 교회에 나와 세례 받고 성도가 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어렵고 힘들어서 스스로 교회를 찾아온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인생의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더니 놀라운 일을 경험하고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분도 계실 겁니다. 부르심도 다양하고 믿음에 이르게 된 계기도 여러가지고 믿음의 정도도 다 다를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한 사람이 있습니다.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1절)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을 굳이 강조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읽었던 요한복음 2장 23-25절에서 ‘사람’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2장 23절을 보십시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많은 ‘사람’이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표적’이라고 말합니다. 기적 중에서 그 기적을 넘어서 무언가를 가리키는 특별히 의미 있는 기적을 요한은 ‘표적’으로 선별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 중에서 ‘표적’으로 불릴만한 것들의 주된 특징은 그것이 구원에 관한, 특별히 영생에 관한, 부활에 관한 것들입니다.
이러한 표적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장 24절을 보십시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아셨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도 아셨습니다.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의탁하지 않으셨다는 표현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고 했을 때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을 믿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믿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왜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을 예수님은 믿지 않으셨을까요? 요한복음 2장 25절에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더라도,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더라도 그들의 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예수님은 다 꿰뚫어보고 아셨기 때문에 사람을 믿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이 말씀에 이어서 오늘 본문 요한복음 3장 1절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유월절 절기를 맞아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설교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이해서 성전에 가서 성전이 거대한 장터가 되어있음을 보고 “내 아버지의 집”인 성전에서 난동을 부리고 성전을 청결케한 사건을 보았습니다.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계신 예수님을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찾아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의 지도자라고 소개되는데요,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서 오늘날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고위직입니다. 그가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데는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유대 나라의 지도자로서 재야세력이라 할 수 있는 갈릴리 출신 예수를 만나는데 아무래도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쓰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를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 이유를 알게 됩니다. 니고데모 역시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니고데모도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의 부류에 속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러한 믿음이 불충분하다고 평가합니다. 나중에 니고데모는 오늘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나중에 온전한 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안식일 전에 시신을 급히 처리하고자 했을 때, 로마 군인들이 유대인의 고유한 장례 절차대로 하려고 하지 않을 때,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더불어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에 싸고 새 무덤에 장사지내게 됩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서 표적을 보고서 시작했던 믿음이 예수님의 제자의 믿음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게 된 믿음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리킬까 생각해봅니다. 우리 인생에 뭔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살아 계실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증거하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런 것들을 보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인사, 연예인이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니 나도 믿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이고 뭔가 달라보이고 가정도 화목해보이니까 나도 뭔가를 의지해야겠는데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동한 것이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겠죠.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게 되어 혹시나 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인간의 마음이 어느 정도 설득되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한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믿음은 하나님을 제대로 발견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믿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그분의 통치를 이해하기 보기 위해서는 사람이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야만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위로부터 태어나다, 다시 태어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에서는 위로부터, 그러니까 초자연적으로 태어나다는 뜻을 우선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낳다 혹은 태어나다는 동사에 전치사 ‘아노뗀’이 붙어 있는데, ‘아노뗀’의 뜻은 기본적으로 ‘위로부터’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태어나다는 뜻입니다. 자연적 출생과는 전혀 다른 초자연적 출생을 말합니다. 그런데 ‘아노뗀’이라는 단어는 ‘다시’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연적 출생과는 다른 초자연적 출생이 있어야, 그러니까 위로부터 태어난 사람만이 영적인 실체로서의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역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깨달을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표적을 보고서 인간적으로 마음이 동하고 설득이 되고 그럴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속에서 갖게 된 믿음으로서는 불충분하고, 전혀 다른 차원에서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는 전적인 새로운 출생으로만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게 된 믿음은 쉽게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흔들리고, 건강하지 못하고 바람직하지 못한 교회의 모습을 보고서 흔들리고, 목회자의 비행을 보고서 실족하게 되기도 합니다.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은 살아계시지 않는구나는 회의감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니고데모는 영적인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밤에 찾아왔듯이 그 영혼도 여전히 밤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4절에서 “니고데모가 이르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아노텐’을 ‘다시’로 이해했습니다. 한 번 엄마 뱃속에서 출생해서 나온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냐는 겁니다. 니고데모는 여전히 자연적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거듭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초자연적인 출생,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남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대의 유대인이나 오늘날의 많은 유대인들도 이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언약 백성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적 자손으로서 유대인으로 출생하는 것이 곧 언약 백성의 일원이 되는 길이라고 지금도 많은 유대인들이 생각합니다. 당시 니고데모와 같은 경건한 바리새인들은 그러한 생각이 철칙과도 같았을 겁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출생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정형화된 틀이 되어서 전혀 새로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더욱 자세하게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어떤 점에서 더욱 구체적인 설명이 되냐면 예수님께서 ‘위로부터’의 출생에 대해서 다시 자연적 출생을 거듭해야 하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위로부터’의 출생이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할 수도 깨달을 수도 없다고 하셨는데, 이제는 더욱 생생하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십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은 공관복음과는 달리 여기서만 사용되는데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영생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나라는 곧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 다음세대에서의 삶 곧 영생을 가리키는데 성령에 의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지 않으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는 세대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를 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는 세대에 참여해서 영생을 누리지 못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물과 성령으로’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이 전형적으로 사용하는 반복적인 표현 곧 중언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직역해보면 ‘물 곧 성령으로’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물로 상징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요한복음 7장 37-39절입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그 배에서 나오는 생수의 강을 예수를 믿는 자는 받게 될 것인데, 그것이 곧 성령입니다. 그 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육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터져나오는 생수가 곧 성령이십니다. 요한복음 19장 33-34절에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뿐 아니라 물이 나왔다고 보도하는데, 곧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 자가 받을 성령은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피흘려 죽으신 결과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그냥 성령으로 난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물과 성령으로 말씀하신 걸까요? 성령으로 나기 위해서 깨끗해져야 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닐까요? 카톨릭에서는 성령을 받기 위해서 교회가 제공하는 물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으로 다소 예전적으로 설명합니다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성령의 깨끗케하심을 강조하는 의미로서 물이 추가된 것으로 봅니다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강조함이 더욱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물과 성령’이라는 것은 결국 성령의 사역인데 성령께서 우리 심령을 깨끗해하심을 강조합니다만, 이러한 성령의 깨끗케 하심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역과 떼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물과 성령’이 함께 나란히 나오는 유일한 본문이 에스겔서 36장에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겔 36:24-27)
물은 정결하게 하는 씻기는 이미지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심령이 정결해져야 합니다. 정결해지기 위해서 물을 뿌려야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십자가의 보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쏟으신 물과 피가 우리를 정결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덮어버리고 씻어버려서 정결케함으로써 거룩하신 성령이 우리 가운데 와 계셔서 우리가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워진 심령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고서 예수님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본문 6-7절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육적이고 인간적인 것은 계속 육으로 혹은 인간적인 것으로 남게 되어 그것을 벗어날 수 없을 터지만 위로부터 오시는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땅에 속한 육신만을 입은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교통하고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영적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추구하고 거룩하여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를 원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유대인으로서 자연적으로, 자연적 출생만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된다는 생각을 틀을 깨지 못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위로부터 성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깨닫지 못하고 놀라워하고 있는데 그리 놀란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성령으로 난다는 것이 설령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연적으로도 이해 가능하다는 설명입니다. 성령이라는 단어는 구약성경에는 히브리어로 루아흐이고 신약성경에는 프뉴마입니다. 루아흐나 프뉴마는 원래 뜻이 바람입니다. 그리고 호흡 혹은 숨입니다. 그래서 바람 같은 성령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찾아와서 숨을 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을 놀라워할 필요가 없다는 설명입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어디서부터 와서 어디로 부는지, 그리고 왜 바람이 부는지 설명할 수는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람 때문에 나뭇잎이 흔들리고 갈대가 흔들리고 바람이 불어서 내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있다는 소위 바람의 효과를 우리 몸이 감지하여 알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 역시 바람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다는 것은 자연적 설명으로 도저히 하기가 어렵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믿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우리가 언제 성령을 받았는가, 성령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 그분이 누구인가, 알기는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지만 성령의 효과는 우리에게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바람이 내게 불었다는 것입니다. 일말의 바람도 없었다면 바람이 자신에게 불어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고, 바람이 불었다면 그 바람을 내가 느꼈다면 바람이 불어온 것이죠. 성령의 역사와 성령의 효과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감지될 수는 있고 본인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람이 불었습니까? 오늘 예배의 현장이 바람이 불어오고 있습니까? 거룩하신 성령께서 오늘 진실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 거룩해진 여러분들의 심령 위에도 오늘 성령의 바람이 불어오는 줄 믿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예수님께서 숨을 크게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 우리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오늘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운행하시고 임재하시는 성령의 충만함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인간적 수준의 개량과 진보와 개선과 발전을 가지고서는 안됩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안됩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붙들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외에 우리가 구원 얻을 길이 없고 죄로부터 깨끗해질 길이 없음을 분명히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가지고서 우리의 마음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볼 때에 오늘 우리의 심령에 거룩하신 성령의 바람이 충만하게 불어올 줄 믿습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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