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5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우리의 자랑 (갈 6:14)
우리는 신앙생활하면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랄 때가 많습니다.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타개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문제가 해결되고 치유가 일어나고 새로워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만큼 삶이 쉽지 않기 때문이고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치열하게 하루 하루 살아갈수록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의 은혜가 우리 삶에서 얼마나 필요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가끔씩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그많은 기적을 행하셨는데 우리 신앙생활에서는 그러한 기적이 왜 잘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고 사도행전에도 보면 사도들도 많은 기적을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병자들이 고침받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는데 동일한 성령께서 왜 이 시대에는 기적을 자주 보여주지 않을까 의아할 때가 많습니다.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포이트레스라는 교수가 <예수의 기적>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서 예수님이 이땅에서 행하셨던 수많은 기적을 분석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밝혀줍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 창조의 중보자로서 창조를 실행하신 분이 이땅에 오셔서 기적을 베푸셨죠. 그 기적들은 창조자가 창조를 회복하는, 창조의 회복으로서의 새창조입니다.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에게서 귀신이 쫓겨나가고 폭풍조차 잠잠케 되는 기적 사건은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고 죄와 사망의 비참한 세상이 되었음을 가르쳐줍니다.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고 작동하지 않고 있는 기존 창조세계를 원래의 창조 의도대로 회복하는 사건으로서 기적은 새 창조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은 새 창조입니다. 새 창조로서의 기적은 일종의 예표로서 진정한 기적을 가리킵니다. 기적의 절정, 진정한 기적은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베푸신 기적은 부활이라는 새 창조, 하나님의 통치의 본격적인 시작과 확립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을 가리킵니다.
제가 두 주 전에 ‘하나님의 통치’라는 제목으로 이사야서 52장 7-10절을 본문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이기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사건이 이사야의 예언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을 실제로 성취하신 사건임을 강조하였습니다. 부활은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의 확립입니다. 부활은 죄로 인해서 사망 권세 아래서 해체와 부패의 길을 걷고 있는 기존 창조세계에 대하여 단행된 새 창조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고 끊임없이 가리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이땅에서 행하신 수많은 기적들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랄 때가 많습니다. 기적이 아니고서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한 것 같은, 그만큼 우리가 무기력하고 무능력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이 다시 우리 삶에서 일어나서 우리의 병든 몸이 치유받고 관계가 회복되고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하기를 그 어느 때보다 갈망합니다. 코로나 사태도 어서 속히 진정되고 코로나 이전처럼 마음껏 자유롭게 모여서 예배하고 교제하고 신앙생활이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적이 필요한 시점이요 하나님의 도우심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회복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적이 자주 나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기적이 있더라도 가뭄에 콩나듯 현실적으로 기적을 자주 접할 수 없습니다. 왜 기적이 자주 일어나지 않습니까? 지난 주 설교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과학시대, 정보화시대, 테크놀로지 시대, 소위 ‘성인이 된 세계’에 살고 있기 때문일까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고 있는 세계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요? 의학이 발달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의술을 발전시켜주었는데 의사를 찾아가지 않고 하나님께만 매달리기 때문일까요? 기적이 필요 없게 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포이트레스 교수에 의하면 기적은 부활을 가리키는 예표요, 비록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부활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요 믿음으로 붙잡고 살아가야 할 소망으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부활 국면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기에,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가 예수님에게 이미 굴복당했기 때문에 우리가 부활의 확실성을 믿는 것이고 우리 부활의 근거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이땅에서 수도 없이 행한 기적이 우리 신앙생활에서 자주 발생하지 않는 이유는 기적은 부활국면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활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부활의 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먼 미래가 우리 현실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맨 마지막에 멸망 받을 원수인 사망을 제압하고 이땅에 이미 임했습니다만 그러나 아직은 아닙니다. 우리는 아직 부활 국면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부활의 때가 아닙니다. 지금이 부활의 때가 아니라면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지금은 십자가의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바와 같습니다. “현재의 고난”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현재라는 기간은 고난의 때로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기간입니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요 그러나 확실히 올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미래요 부활의 때입니다. 그러나 현재는 고난의 때요 십자가의 기간입니다.
오늘이라는 십자가의 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내 삶에는 왜 그처럼 자주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기적은 부활의 때를 가리키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부활 국면에 진입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십자가의 때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전히 말씀하시는 때입니다. 뭐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심지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 없는 복음을 원합니다. 십자가 없이 부활의 복음만을 원합니다. 부활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기 적과 하나님의 능력만을 앙망합니다. 그토록 많은 신앙인들이 기적에 목매는 이유입니다. 얼른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바랍니다. 그러나 지난 시간에 설교 말씀에서 강조했듯이 히브리서 11장이 말하는 믿음은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이요, 아직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실제로 생애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약속을 끝까지 붙드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평생 살았는데 그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이란 십자가의 길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험한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험난한 삶일 수밖에 없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는 못했어도 그들 역시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이고 고난주간을 시작하는 날입니다. 한 주간 고난주간을 통과하면 부활주일을 맞이하게 됩니다. 고난주간을 생략하고 부활주일로 바로 진입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의 기쁨과 영광에 동참하려면 이땅에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매년 돌아오는 고난주간은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해버리고 싶은 기간이기도 합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에 관한 복음을 전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찔림을 받고 설교자인 저 또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신앙생활하는 우리 삶의 기준이고 표준이고, 이뿐 아니라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말한 대로 십자가만이 참된 말씀입니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참된 말씀인 십자가를 듣는데 실패하고 십자가를 삶의 기준과 표준으로 붙잡는데 실패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삶의 기준이고 우리의 신앙생활의 표준이고 십자가만이 참된 말씀인지 아닌지를 분별하는 시금석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해야겠는데 그래서 먼 발치에서 예수님을 따라갔던 베드로의 실수를 우리가 거듭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제 곧 십자가를 짊어지실 예수님께 가까이 밀착하여 따라가지 못한 베드로는 결국 예수님을 부인한 것처럼 십자가를 붙들지 못하면 누구라도 넘어지게 돼 있고 실패하게 돼 있습니다.
그렇게 한 해를 살다가 고난주간이 찾아오면 다시금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게 되고 자신이 표준에서 얼마나 이탈했는지를 새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풍선의 바람이 빠지고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기간이 바로 고난주간입니다. 다시 십자가를 붙드는 기간이요 기적과 능력과 부활의 영광만을 추구하던 우리 신앙생활에 현실감각을 되찾게 해주는 기간입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십자가를 바라보라!”는 설교에서 우리가 십자가로 가까이 나아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붙들 때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힘이라고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가 얻게 되는 세가지 힘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살이를 살아낼 수 있는 힘이요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이요 희생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매일 십자가를 10분만이라도 묵상한다면 우리는 이러한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를 묵상한다는 것은 참된 말씀을 붙잡는 것이요 삶이 다시 표준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준을 되찾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변질되지 아니하고 계속적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신앙생활과 세상살이를 살아갈 수 있는 힘과 활력을 얻는 길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마틴 행엘이 쓴 책 <십자가 처형>을 보면 십자가 처형이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하고 한 개인에게 행해진 국가의 보복이라는 점이 강조됩니다. 역사에 기록된 십자가 처형에 관한 수많은 기록을 망라하고 정리하면서 십자가가 국가 권력이 한 개인을 얼마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방식으로 행해진 폭력인지, 고대 그리스와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 처형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생생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 시대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형은 로마 시민권자가 받을 수 있는 형벌이 아니었고 노예들에게 해당된 극형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하나님과 방불한 존재이신 예수님께서 종의 형체를 취하셨다고 말하고서 곧바로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노예만이 받는 극형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선포한 복음의 핵심이 십자가에 달려 죽은 나사렛 사람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었고 우리의 죄 때문에 그가 대신 고난 당한 것이었다는 십자가의 복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경험상으로는 양립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이는 당대 문화권에서 복음 전파의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구원의 메시지로서 십자가의 복음은 적합하지 않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었고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마틴 행엘은 <십자가 처형>이라는 책에서 십자가가 당대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바울이 선포한 복음 곧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사실이 그 복음을 듣는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걸림돌이 되었을 것인지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수치와 불명예와 모욕과 고통입니다. 누구도 십자가를 입밖에 꺼내려고 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일상에서 대화 나누기에는 적합한 주제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요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설교 본문으로 삼은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에서는 사도 바울은 나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분이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사고의 중심에는, 그의 관심의 중심에는, 그의 열정의 중심에는 바로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나님의 아들이 매달려 죽은 십자가, 그것이 그의 선택, 그의 생각, 그의 관심, 그의 열정을 온통 사로잡았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수치와 불명예와 모욕으로 간주되어 대화의 소재로 삼기에도 부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십자가를 왜 바울은 자랑한다고 할까요? 왜 십자가에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십자가는 곧 죽음인데 특별히 내가 세상에 대해서 죽음이고 세상도 나에 대해서 죽음이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갈라디아서 6장 14절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어찌보면 다른 관점에서 반복하고 있는 말씀인 듯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바울이 십자가를 자랑하는 이유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새로운 삶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기존에 몸담고 살아가고 있던, 그리고 지금도 그 환경에서 살고 있는 세상, 소위 육체적인 조건들과 가치들로 지탱되는 세상과의 관계 단절이 일어나서 비록 세상속에서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고 할지라도 천국 백성으로서 하늘나라의 식민지에서 새로워진 심령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자랑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보통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리켜서 말할 때 십자가에 못 박혔다거나 혹은 “내가 정과 욕심을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았다”(갈 5:25)고 말할 때 거의 단순과거형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과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바울은 현재완료형을 사용했습니다. 이로써 바울이 강조한 것은 “나는 아직도 육체와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삶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으로서 세상과의 관계 단절을 지금도 계속하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처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래로 십자가를 삶의 기준과 표준으로, 십자가를 선택과 결정의 기준과 표준으로, 십자가를 참된 말씀을 분별하는 기준과 표준과 원리로 삼고 지금도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는 강조입니다.
한 주간 우리는 고난주간을 통과합니다. 고난주간을 지내면서 우리는 다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다시 십자가를 우리 신앙생활의 중심에 가져와야 합니다. 헛된 것 추구하고 부풀어오를 대로 부푼 우리의 심령을 바늘로 풍선을 터트리듯 터트리고 신앙의 초심, 내가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의 각오와 결단으로 되돌아와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과 결정의 기준이 되지 못했던 십자가, 참된 말씀을 분별하는 시금석이요 표지가 되지 못했던 십자가, 그래서 자꾸 기적과 능력과 번영과 값싼 복음에 기울어졌던 우리의 신앙의 본질을 되찾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수치와 모욕거리인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자랑도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위치한 우리 교회는 남들이 선망하는 숭배자를 우리가 모시고 예배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의 예배의 대상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에 없는 십자가가 우리 교회에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는 세상의 소망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전략입니다. 우리 교회가 십자가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미움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힘, 분열과 배타와 반목이 아닌 연합할 수 있는 힘, 갈등과 다툼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가능케 하는 힘, 세상의 조롱거리와 냉소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힘, 천국을 이루어가는 힘, 이 모든 힘을 우리는 십자가를 소유하고 십자가를 붙들고 십자가를 자랑할 때 얻게 될 것입니다. 한 주간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묵상하고 가까이함으로 말미암아 다시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백성으로 새워지시는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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