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31일 동산교회 설교
땅의 일과 하늘의 일 (요 3:9-15)
여러분 주위에 크게 변화된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특별한 일을 계기로 사람이 변한 겁니다. 좋게 변하든, 나쁘게 변하든 크게 변화되어서 놀란 적이 다들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달라지다니!’, 스스로 놀란 적도 있을 것입니다.
주로 놀라운 변화는 종교의 역할일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종교인이 되기로 결심하려면 결단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기독교에서 목회자가 되려면 외적, 내적 소명(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불러주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내적 소명이라면, 외적 소명은 주위 사람들의 목회자로의 부르심에 대한 인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이 사람들에게 목회자의 자질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변화의 주체는 성령이십니다.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요 3:6)이기 때문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만이 영입니다. 육은 죽었다 깨어나도 영이 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바람은 돈 주고 살 수도 없고 불어오라고 부탁해서 부는 것도 아닙니다.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성령의 바람도 누구의 통제를 따르지 않고 임의로 불어옵니다. 분명한 사실은 성령의 바람이 불어와야 우리가 완전히 변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변화를 입은 사람은 “성령으로 난 사람”입니다.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것이 곧 거듭남이요 중생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관건은 성령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겁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전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시자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고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반문합니다.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9절)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밤중에 찾아온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니까 기적이고 표적이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들을 행하는데, 그분이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성전에서 불경한 행동 곧 성전에서 난동을 부렸는데, 그걸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분 같기도 하고, 표적을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는 특별한 능력을 보여준 과거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 같기도 하는데, 무엇이 진실인지 알아보고자 예수님을 밤중에 찾은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나 하나님에 대한 깊은 갈망이 없었다면 예수님을 찾지도 않았을 겁니다. 구도자적인 열정과 진지한 탐구가 있었지만 기존에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한계와 같은 틀을 깨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산헤드린 공의원으로서의 높은 고위직의 귀족 신분이었던 그가, 그리고 전형적인 바리새인이었던 그가 기존의 틀을 깨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으로서 당대 유대인들을 지도하던 지도층 인사로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유대 사회의 종교 지도자로서 그가 생각하는 구원이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태어나서 하나님이 유대 민족에게만 주신 율법을 잘 지켜서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연적 혈통적 출생과 더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것이고 이후의 삶은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을 따라 살면 그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그가 기존에 갖고 있던 틀을 흔들어 깨어버렸습니다. 자연적 출생은 아무 것도 아니요 육은 육일 뿐이요, 초자연적 출생,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의 역사로 전혀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길 외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니고데모는 이해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반문하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십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지도층 인사로 정치와 종교가 일치된 유대 사회에서 정치 지도자요 종교 지도자요 성경 교사로서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왜 알지 못하고 있느냐고 예수님이 책망하십니다.
구약성경에 정통하고 잘 알고 있어야 할 니고데모가 구약성경이 예언하고 있는 다가올 시대에 있게 될 성령의 역사를 왜 알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유다 나라가 죄악으로 인해서 다윗 왕조가 멸망하게 되었는데 그 직후에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령의 부어주심과 그로 인한 전적인 갱신과 변화를 약속해주신 말씀들을 왜 알지 못하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그 죄로 인해서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차례로 멸망당했는데, 이스라엘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약속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답게 전혀 새롭게 변화되려면 육적인 개량과 개선과 발전 차원에 그치면 어림없고, 위로부터 내리는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영의 부어주심에 의한 새로 태어나는 갱생과 변화가 없이는 이스라엘이 온전히 회복될 수 없다는 말씀을 이사야, 요엘, 예레미야, 에스겔 선지자 등을 통해서 주셨던 것입니다.
특별히 에스겔 선지자에게 주신 놀라운 변화의 말씀, 지난 시간에 보았던 에스겔 36장 말씀 곧 죄로 인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고국으로 돌이키시기 위해서 맑은 물을 뿌려서 정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 행하게 하시겠다는 소위 “물과 성령”의 약속을 주셨고, 이어서 에스겔 37장에는 골짜기에 가득한, 죽은 지 오래되어서 뼈가 말라버린 마른 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성령의 바람이 불어옴으로 인해서 오래 죽은 것같이 무기력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다시 태어나 우뚝 서는 에스겔의 환상과 비전을 보여주셨던 이러한 말씀을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자처하는 니고데모는 응당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책망입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책망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의 불신을 이어서 지적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초자연적인 성령의 역사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확신하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보고 관측되고 경험된 것을 증언하는 것인데도 니고데모가 자신의 틀을 깨지 못하고 선입견에 사로잡혀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와 보라”는 말씀을 하셨죠. 와서 경험해보고 자신에 대해 알아보고서 자신을 따르라는 도전입니다. 우리 주위에 변화된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전과 전혀 달라진 모습을 보고 놀라워했던 사람들이 주위에 꼭 있습니다. 세심하게 관찰해보고 판단해보라는 겁니다. 이들의 변화의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이들이 자신만을 위해 살던 인생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으로 변화되었는지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헛되고 헛된 것들에 매달려 소망 없이 살아가던 인생이 이제는 확고한 소망을 붙들고 소망 중에 기쁨으로 인내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고 어디서 기원했는지 생각해보라는 겁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적으로 듣고 가랑비에 옷이 젖듯 그렇게 변화된 사람을 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성령의 역사가 아닐까요?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난 변화가 아닐까요?
계속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여기서 ‘땅의 일’이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땅의 일’입니다. 우리 주위에서 지금도 불어오고 있는 성령의 바람,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나는 거듭남, 바람 같은 성령의 현상,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주위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 이것은 실제 현상이어서 관측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땅의 일’입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고 따져보고서 판단해보아야 할 ‘땅의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심오한 말씀을 하시는 것 같아도 ‘땅의 일’, 이 땅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성령에 관한 말씀, 성령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말씀하시는 말씀이 ‘땅의 일’이요 편견을 버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기존의 틀을 버리고서 나타나고 있는 변화를 관찰해보고 합리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것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실제 현상이기 때문에 진리에 이르는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니고데모가 지금 ‘땅의 일’조차 믿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찰 가능하고 눈에 보이는 변화를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면, 소위 ‘땅의 일’을 말하여도 믿지 못하겠다면 어찌 ‘하늘의 일’을 말하면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하늘의 일’은 더더욱 믿기 어렵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 그러면 ‘하늘의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을 해석하는 주석가들마다 신학자들마다 다양한 설명이 있습니다. 가장 좋은 설명은 ‘하늘의 일’은 ‘땅의 일’과 대비되는 눈에 보이지 않고 더욱 이해할 수 없고 더욱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일이요, 땅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으키는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통해서 역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역사의 목표라 할 수 있는 하나님나라 완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지금도 하시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 눈에 보여지는 현상이라면 그것이 ‘땅의 일’이지만 그 현상을 일으키는 역사를 주관하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와 계획과 관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땅의 일’이 과학이라면 ‘하늘의 일’은 신학이요 계시입니다. 하나님이 계시해주시고 알려주시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나라의 완성의 비전입니다. 눈에 보이는 역사 현상과 성령의 역사로 인한 관찰되는 변화를 통해서 지금도 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금까지 ‘땅의 일’을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하늘의 일’을 말씀하시려는 차례입니다. 본문 13-15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먼저 ‘하늘의 일’을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의 자격에 대해서 예수님은 본인이 바로 그 사람, 곧 인자라고 자신을 일컫습니다. 하늘에서 계신 분, 창세 전부터 영원하신 말씀이셨던 자신이 곧 사람이 되었는데 바로 그 사람으로서 자신만이 하늘의 일을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시다가 하늘에서 내려온 자인 자신만이 하늘의 일을 말할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영원하신 말씀이신 자신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가 된 자신과 하나님 아버지는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하늘의 일’ 곧 하나님이 행하시려는 일과 계획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를 주재하고 주관하고 다스리면서 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줄곧 행하시고 계신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도 일관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러한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과 의도에 따른 일이겠죠. 역사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비전이겠죠. 지금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땅의 일을 통해서 하늘의 일을 하시죠.
하나님께서 이땅에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을 십자가 위에 세우시고 그를 드높이시려고 하시는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 백성들을 위해 하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깃발 아래 자신의 백성들을 모아서 영생을 주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마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 하나님이 불뱀을 보내서 그들을 징계하시고 심판하셨을지라도 회복의 길, 구원의 길을 보여주셨죠. 하나님께서 놋으로 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 놋뱀을 들어올리라고 하셨죠.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구약의 소위 ‘놋뱀 공동체’입니다. 장대라는 높은 깃발 아래 자신의 백성들을 치유하여 다시 모으시는 하나님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자녀들의 회복과 구원을 위해서,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하여서 죄로 인해서 죽어 마땅하다 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셔서 구원의 길을 내셨던 바, 그것이 바로 높은 장대에 매달린 놋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놋뱀을 바라보는 자마다 치유를 얻고 생명의 회복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일이 하늘의 일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간 역사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요 하나님의 역사로서 ‘His Story’ 곧 ‘history’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요 하나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요 하늘의 일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믿느냐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아느냐는 겁니다. 광야에서 뱀을 치켜올려 높이 세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예표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십자가 위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치켜세우실 것인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죄라는 독에 물린 자들이 치유함을 얻고 죄로부터 용서함을 받고 변화된 심령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킵니다. 십자가 위에 들려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를 대신 십자가 위에 못박으신 것입니다. 인자의 들림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리킬 뿐 아니라 들어올려지심 곧 그분의 높아지심을 아울러 가리킵니다. 십자가는 수치스런 죽음임과 동시에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십자가 위에 들림은 곧 높아지심이요, 하늘에서 내려온 분이신 예수님께서 원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으로서의 높아지심입니다. 십자가 죽음과 죽음 이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에 올라가시는 승천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높아지심은 완성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예수님을 만유의 주로 만왕의 왕으로 높이 들어올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본문 15절에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높이 세워진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예수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마다 그 안에 있던 생명을 얻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요 의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입니다. 여기서 “그를 믿는 자마다”는 직역해보면 예수를 믿는 다기보다 “예수 안에서 믿는 자”를 뜻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믿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요한복음 1장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씀에서 사용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바라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육체 안에서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로마 군사의 창에 찔렸을 때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피와 물, 특별히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을 가리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의 거룩하신 영으로서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진실하게 믿고 바라보는 자마다 그 안에 있는 생명 곧 성령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전혀 새롭게 태어나는 물과 성령의 역사가 있게 될 것입니다.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자연스레 다음 시간에 볼 너무나 유명한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이는 하나님의 세상 사랑 방법을 가리키는데, 이것이 역사 내내 일관되게 계속되는 언약 백성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들을 향한 신실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고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부활생명을 주시려는 ᄒᆞ님의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이것이 바로 땅의 일이고 땅의 일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일 곧 하늘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도 땅의 일은 계속되고 하늘의 일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지금도 불어오고 있는 성령의 바람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지금도 성령으로 인한 변화의 역사, 위로부터 내리는 성령으로 인한 초자연적인 다시 태어나는 변화의 역사를 현상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변화의 주인공이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아울러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에 이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고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를 구원해주시고 하나님나라의 완성을 향해서 역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을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역사 섭리와 주재, 그리고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과 실행에 일관되는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이러한 하늘의 일 진리를 깨우치는 심령이 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고 이러한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시는, 이미 시작된 영생의 삶을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땅에서도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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