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8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다시(Again) (창 35장 1-7절)
오늘 본문 말씀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야곱에게 벧엘은 어떤 의미가 있는 장소입니까?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처음으로 만났던 곳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났다 함은 직접 눈으로 보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의미라기보다 하나님이 정말로 살아계시는구나를 확신하게 된 체험을 가리킵니다. 벧엘에서 야곱에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이 형 에서의 장자권을 속임수로 가로채고서 에서에게 죽임을당할까봐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쳤죠. 야곱의 어머니가 잠깐 외삼촌집에 가 있으라고 했죠. 형의 노가 잠잠해질때까지 거기에 있다가 오라고 한 것입니다. 야곱이 난생 처음으로 부모 품을 떠나서 저 멀리 밧단아람으로 가던 중 벧엘이라는 곳에 이르러 길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브엘세바에서 출발했으니까 벧엘에 이르기 위해서는 며칠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벧엘에 이르러서 길에서 언뜻 잠에 들었는데 꿈에서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잇는 거대한 사다리(계단) 위에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장면의 꿈을 꾸게 되었고, 긴 사다리 끝 하늘쪽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것 같았습니다. 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창 28:13) 야곱의 할아버지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인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소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 아직 야곱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걱정과 근심,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보호와 위안의 약속을 주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 28:15) 야곱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 법한 말씀입니다.
꿈에서 깬 야곱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서 자신이 누웠던 그곳을 ‘벧엘’이라고 명명합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소개한 여호와 하나님을 야곱이 이곳에서 만났던 것입니다.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창 28:20-21)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신과 함께 동행하여 주시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무사히 고향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해주시면 여호와께서 자신의 하나님의 되실 것이라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드립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 이제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벧엘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던 곳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이삭에게서 들어서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일 뿐 아니라 이제는 야곱이 직접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확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야곱의 하나님이 되어주신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우리에게 벧엘은 어떤 곳입니까? 우리가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 곳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신하게 된 체험입니다. 더 이상 누군가의 하나님으로만 존재하시지 않고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되고 고백된 곳이 바로 벧엘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을 만난 곳이고 그래서 나의 하나님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곳이요, 이뿐 아니라 앞으로 펼쳐질 불확실한 미래와 어두운 미래속으로 뚫고 들어갈 용기를 얻었던 곳이 또한 벧엘입니다. 야곱이 벧엘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이후에 불확실한 미래,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20년간이나 지내야 했던 앞으로 펼쳐질 두려운 미래의 발걸음을 힘있게 내딜 수 있게 된 하나님과의 만남이었습니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얼마나 힘든 일이 많았습니까?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였던 속임수 대장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서 여러 번 속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멸시를 받고 억울한 일도 많이 겪었던 야곱의 삶, 외삼촌 라반 밑에서의 길고 긴 20년의 세월을 참아낼 수 있었던 비결은 벧엘에서 만났던 하나님 체험이었고 들었던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벧엘이 밧단아람에서 야곱을 지탱시켜주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벧엘로 다시 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야곱이 지금 거주하고 있는 곳은 세겜 지역입니다. 벧엘은 세겜에서 대략 40킬로미터 정도 남쪽에 위치한 곳입니다. 왜 벧엘로 가라고 하신 걸까요?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창 35:1) 하나님은 야곱에게 “다시 벧엘로!”, 그리고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고 명하십니다. 네가 형 에서에게서 도망칠 때 두렵고 떨리는 공포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확신하게 되었던 벧엘, 이후 20년의 고된 밧단아람에서의 삶을 지탱시켜주었던 힘의 근원이 되었던 벧엘, 그 벧엘로 다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지금이 어떠한 상황이길래 야곱에게 벧엘로 다시 가라고 명하신 걸까요? 야곱에게 어떠한 일이 있었나요? 자신의 딸 디나가 세겜 땅에 거하는 하몰의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자 디나의 오라비들이 속임수로 결혼을 약속하고 단 조건을 내걸기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몰 집안 남자들이 다 할례를 받고 한참 고통스러워하는 제 3일에 그곳을 급습해서 하몰 집안 일가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하몰뿐 아니라 강간을 저질렀던 그의 아들과 그 집안 남자들을 다 죽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 야곱을 닮아서 세겜 족속을 속인 것입니다. 야곱 집안은 세겜에 잠깐 거주하고 있는 유목민인데 세겜땅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죽였으니 닥쳐올 보복을 야곱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어도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아내 레아의 소생이어서 그런지 소극적이었던 야곱이 몰살 당할 위기를 피부로 느끼게 되자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야곱의 위기의식과 다급함이 창세기 34장 30절에 표현돼 있습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죽음의 공포, 멸절당할 것 같은 위기를 야곱이 느끼고 있습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낯을 피해서 도망갈 때 해가 지고 처음 벧엘에 이르러서 느꼈던 두려움과 공포가 지금 다시 야곱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 하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을 다시 벧엘로 가라고 하셨는지 야곱은 즉시 깨달았습니다. 야곱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 35:3) 자신에게 벧엘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야곱이 상기하였던 것입니다.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야곱은 벧엘로 즉각 갔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으로 입증된 벧엘, 지난 이 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가운데서 나를 지탱시켜주었고 그 소망의 말씀 붙들고 험난한 터널을 통과할 수 있는 힘이 되었던 벧엘, 그러나 다시 고향땅에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어서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벧엘입니다. 다시 위기가 들이닥치고 두려움과 공포에 직면하게 된 상황 앞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예전처럼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야곱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벧엘로 올라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다시 하나님을 만나라는 요청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부르심입니다. 위기의 때에 두려워하던 너를 찾아와서 만나주신 여호와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십 여년의 긴 고통의 터널 끝에 이제 가나안에 다시 돌아와서 안정된 삶을 살게 되었던 야곱, 그러나 그 결과로 벧엘을 잊어버렸던 야곱에게 하나님은 다시 위기와 다급함을 주셨고,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은 또다시 은혜를 베푸셔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하신 것입니다. 나태와 안일에 빠져있던 삶을 새롭게 정돈하고 일신하여서 다시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만나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우리는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특권이라고, 특혜라고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옆에 믿음의 동료가 함께 한다는 것을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바른 복음의 기초 위에 말씀 위에 세워진 정통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크게 의식하지 못했고 자부심을 갖지도 못했습니다. 코로나19가 이제 모든 것을 바꿔버렸습니다. 당연시했던 모임을 이제는 더 이상 갖지 못하게 되었고, 마음이 힘들 때 함께 모여서 교제를 나누었던 형제자매를 이제는 쉽사리 만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순탄한 삶, 특별한 문제거리도 없이 평범한 삶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보증수표인 줄 알고 그렇게 신앙생활해왔습니다. 이정도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어엿이 살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나름 괜찮은 신앙인이라고 자부하면서 살았습니다. 코로나 19 위기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의문시되었습니다. 예배생활을 규칙적으로 하지 못함과 기도생활을 할 수 없게 되자 과연 하나님을 섬김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가 하는 확신도 조금은 허물어진 느낌입니다. 위기가 신앙의 감별사 노릇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바닥까지 드러내보일 법한 위기의 때입니다. 바이러스의 습격을 어떻게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작지만 새록새록 생겨났습니다. 이것이 지금 우리의 상황입니다. 다시 위기와 어려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다시 벧엘로!”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을 위해서 야곱이 준비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꿈에 불쑥 찾아오셨을 뿐입니다. 단지 야곱의 마음이 낮아져있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처음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도 대개가 마음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힘들고 어려운 때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쑥 찾아와주셨습니다. 위로해주시고 힘을 주시고 격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때 비로소 성경의 하나님을, 혹은 내 부모의 하나님을, 내 이웃의 하나님을, 비로소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지금 돌이켜생각해보면 벧엘에서의 나의 체험이 있었기에 그나마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을 겁니다. 벧엘에서의 하나님 체험이 없었다면 아마 하나님을 포기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마 아직도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이유는 벧엘에서 불쑥 만났던 하나님 체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다시 위기에 처한 우리에게, 기존 생각이 붕괴되고 있는 요즈음 다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벧엘로 가서 나를 만나라!” 지금 신앙상태에 안주하지 말고 지금 헌신에 만족해하지 말고 이 어려운 때에 다시 나를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끄시고 교육하실 때 반복을 사용하십니다. 위기의 반복이요 어려움의 반복이요 그래서 또한 은혜의 반복입니다. 은혜로 우리를 불쑥 만나주시고 다시 위기를 맞아 허둥지둥하고 있는 우리에게 다시 벧엘로 가라고 은혜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첫 번째와는 달리 야곱은 준비를 합니다. 이미 하나님을 체험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야곱이 느낀 주된 감정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창세기 28장 16-17절입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이에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렵도다 이 곳이여 이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요 이는 하늘의 문이로다 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똑똑이 기억하고 있는 야곱은 벧엘에서 다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냥 갈 수 없었습니다. 준비가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어떻게 준비합니까? 오늘 본문 2절입니다: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상을 버리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입고 있던 옷도 갈아입고서 그러한 준비를 하고서 벧엘로 다시 나아갑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두려워할만한 분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시 벧엘로 올라간다는 것은 다시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서는 것입니다. 벧엘에 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함인데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외감, 하나님을 향한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기에 철저하게 회개하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고 정결한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첫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처럼 불쑥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두 번째 벧엘에서의 만남은 우리의 준비를 필요로 합니다. 거룩하고 정결함, 그리고 주님을 향한 갈급함과 사모함, 이러한 준비가 없이는 하나님을 다시 만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첫 번째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아는 사람이라면 이제는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다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거룩함과 정결함에 힘을 써야 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만큼 소중하게 높아져있는 우상들을 다 깨뜨리고 전심으로 순결하고 정결한 마음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변화되지 못하고 정체상태에 빠졌던 안일한 신앙생활을 일소해버리고 다시 새로워진 마음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코로나19가 잦아들면 우리는 곧 다시 예배의 자리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피난갔던 마을 주민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예배당에서 서로 만나고 예배를 드릴 때 기분이 어땠을까를 생각해봅니다. 우리가 다시 만나서 예배하게 될 때의 감격을 머릿속에서 그려봅니다. 그 감격이 새로운 출발점이 되고 지속적인 변화의 밑거름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다시 찾은 벧엘에서, 예배와 하나님에 관한 태도는 분명히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니 달라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의 태도와 각오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은혜인 줄 알지 못했고 당연시했던 모든 것들을 이제는 뒤로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의 제목임을 새삼 깨닫고 감격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그간의 우리의 나태와 안일과 거짓과 기만을 다 회개하고 심령이 성령으로 정결해지고 순수해져서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오직 하나님 밖에 없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고서 다시 벧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것입니다.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님뿐이구나 하는 깨달음입니다.
코로나19가 우리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목회자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던 삶에서 묵상과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확보되었고, 정독보다는 필요한 부분을 얼른 찾아 스쳐지나듯 읽어야 했던 좋은 책들도 다시 정독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저는 유튜브에서 워십팀들의 경배와 찬양 영상을 많이 보았습니다.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워십팀, 가령 제이어스나 어노인팅 그리고 마커스워십 팀등의 예배 실황과 그들의 찬양곡들을 듣고 보면서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배팀들이 하나님을 열망하는 태도에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갈급함과 사모함으로 오직 하나님만을 추구하는 경배와 찬양의 태도에서 그곳에 많은 젊은이들을 보면서 큰 소망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제 자신에게도 메마른 땅의 생수와 같은 은혜의 단비였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의 관건은 우리의 거룩함과 정결함이고, 이뿐 아니라 우리의 목마름과 주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갈망을 채워주실 하나님, 문제를 해결해주실 하나님을 향한 기대감입니다. 이러한 마음과 감정과 태도를 가지고 우리는 새로워진 심령으로 다시 하나님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유투브에서 여러 유명 인사들의 간증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적인 간증은 마커스 워십팀에서 찬양인도자로 섬기고 있는 소진영간사의 간증이었습니다.
이분이 지금은 40이 되었는데 2005년 25살에 만성 골수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습니다. 당시 나온지 얼마 안된 글리벡이라는 획기적인 신약을 복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근육 경련, 구토 등의 부작용이 있는 약이었습니다. 이 약을 6개월 복용하자 의사 선생님이 어떻게 이 약을 평생 복용하겠느냐며 골수이식을 하자고 해서 오빠가 가능해서 이식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사실, 조혈모세모를 이식하면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단 받은 날보다 오히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말에 더 큰 슬픔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골수이식을 포기하고 다시 글리벡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계속 복용해오던 중에 나이 30에 결혼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해서 당연히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이를 갖게 되면 약을 끊어야 하는데 남편과 주위 분들이 다 반대했습니다. 거의 10년 가까이 약을 복용해오고 있는데 약을 끊으면 재발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를 가질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나도 아이를 갖고 싶고 나도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라고 하나님께 울면서 솔직한 마음을 꺼내 기도했습니다. 당연히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마음이 늘 있었지만 이날만은 마음에 뭔가 큰 평안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나도 아이를 가져봐야겠다는 큰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 남편, 부모님 등을 설득해서 아이를 갖기 위해서 시도를 했습니다. 몸에 남아 있는 약의 독을 제거하기 위해서 몇 개월이 지난 후 본격적인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약을 끊은 지 1년이 되었는데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1년이 지나니까 의사선생님이 한 달만 더 두고보자며 그때도 아이가 생기지 않으며 다시 약을 복용하기로 했습니다. 근데 마침 그 달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아이를 출산했습니다. 그때가 2015년이었습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안지 딱 10년만에 불가능해보였던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고서 만든 찬양곡이 ‘오직 예수뿐이네’라는 곡입니다.
오직 예수뿐이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호흡마저도 다 주의 것이니 세상 평안과 위로 내게 없어도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크신 계획 다 볼 수도 없고 작은 고난에 지쳐도 주께 묶인 나의 모든 삶 버티고 견디게 하시네 은혜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네 나의 모든 것 다 주께 맡기니 참된 평안과 위로 내게 주신 주 예수 오직 예수뿐이네
이 곡에 얽힌 기가막힌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이분이 어느 날 마커스워신 찬양집회 끝나고 가는데 어떤 분이 급히 뛰어와서 자신을 붙잡더라는 겁니다. 자신의 친오빠가 얼마 전에 죽어서 자신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고서 교회를 더 이상 다니지 않았습니다. 친한 친구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찬양집회에 한 번만 같이 가자고 제안해서 그날 찬양집회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의 엄마가 자신의 오빠를 잃고, 그러니까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을 잃고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계시는데, 이 찬양을 듣고 가사를 적고 주방에 붙여놓고 노래를 들으며 따라 부르고 수시로 가사를 읽으면서 하루 하루를 견디며 버티시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엄마가 자신한테 그러더래요. “이 찬양곡을 쓰신 분이 어떤 분일까 이분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엄마가 자신에게 말하더라는 거예요. 그날 찬양집회에 와서 하나님이 답을 주셨다는 거예요. 그 곡을 쓴 분이 바로 소진영간사임을 알게 된 것이죠. 물론 이분은 소진영간사의 아픔을 알지는 못하죠. 이 말을 듣고 있던 소진영간사는 자신에게 고통이 있었던 게 다 이유가 있구나, 자신에게 이런 시간을 주신 게 다 이유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심은 어려운 위기의 때이니까 지혜롭게 기도하면서 극복하라는 의미만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오히려 우리 인생에게 무엇이 남을 수 있고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특별히 신앙인에게는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심을 분명히 깨닫고 이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만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라는 부르심입니다. 다시 마음을 새롭게 하고 전혀 새로운 결단과 각오로써 이후의 삶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 앞에 설 날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주님을 위해서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요청입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지내면서 우리가 오직 하나님뿐이요 오직 주님뿐이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얻고 이후 삶의 방향이 그 방향으로 지속된다면 이 위기의 시간이 분명 축복의 시간, 전화위복이 될 줄 믿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이겨내시고 오히려 전화위복으로 삼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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