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3일 동산교회 설교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 (사 65:17-25)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안타깝게도 코로나로 인해서 교회학교를 재개하지 못한 가운데 맞이하는 어린이주일입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가정의 자녀들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이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가장 큰 일을 행하시는 바 그것은 바로 창조와 새 창조입니다. 창조와 새 창조를 통해서 자녀들이 마음껏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는 우리 인생들이 마음껏 달릴 수 있는 운동장입니다. 창조세계에서 먹거리를 얻고 창조세계를 탐구하여 전인이 성장하고 창조세계 안에서 우리는 일하며 살아갑니다. 남과 여로 곧 복수의 사람들로 지음 받은 사회적 관계적 존재인 우리는 다른 사람과 함께 어우러져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요 첫 창조입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위해 삶의 틀을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틀 안에서 우리는 수고와 노력을 기울이면 다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창조를 마치시고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은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동산을 경작하고 지키는 임무를 인간이 부여받았습니다. 경작하고 지키는 것은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일의 두 측면입니다. 종교개혁가인 마틴 루터는 이 절을 “이 두 가지는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땅을 경작할 뿐 아니라, 경작한 것을 또한 보호해야 한다.”고 해석했습니다. 즉 모든 일에 는 생산적인 측면뿐 아니라 보호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생산적인 측면 곧 경작하라는 명령은 자신을 위해 경작하고 거기서 나오는 것들을 누리고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지키라는 명령은 보호 관리하라는 명령인데 단순히 보호하라는데서 그치지 않고 잘 관리하고 “더 훌륭하게 가꾸어진 상태로 후손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칼빈이 창세기 주석에서 마틴 루터의 사상에 덧붙인 내용입니다. 당대에 누릴 것 다 빼먹을 정도로만 경작하고서 방치하지 말고 다음세대는 더 나은 환경의 과실을 누릴 수 있도록 기성세대가 잘 관리하여 전수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를 아름답게 완성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인 아담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하나님이 창설해주신 첫 창조세계 특별히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를 누릴 뿐 아니라 자신의 자손들에게까지 더 큰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보호, 관리, 발전시켜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일과 성령>, 미로슬라브 볼프 저 참고)
창조주 아버지 하나님께서 자녀인 우리를 위해서 하시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당대에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경작할뿐 아니라 지킴으로써 자녀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전수해주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기성세대인 우리는 우리 살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늘 다음세대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경제를 운영할 때도 자연환경을 보호할 때도 이 터전이 자손대대로 우리 자손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처음 창조로 말미암아 우리가 살아가야 할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주시고 틀을 만드시고 운동장을 제공해주신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이 그 틀 안에서 마음껏 달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임무입니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먼저 믿은 우리 부모 세대가 교회학교 다음 세대에게 좋은 신앙을 물려줄뿐 아니라 그들이 마음껏 신앙생활 할 수 있는 여건과 터전을 물려주어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제 장례 입관예배 때 말씀을 전했습니다만 우리의 죄와 연약함으로 인해서 처음 창조세계는 시편 90편에서 모세가 말한 대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10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오래 살면 오래 살수록 고통과 아픔과 슬픔이 더해지는 안타까운 세월임에도 불구하고 세월의 빠름은 마치 쏜살같이 지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처음 창조세계의 적나라한 현실이고 우리 인생이 체험하는 실재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런 슬픔과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살았더라도 자녀들 만큼은 즐거움과 기쁨과 보람 속에서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부모로서 우리 모두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자녀 삼아주시는 큰 사랑으로 지금도 우리를 사랑해주시는데 사랑하는 자녀인 우리가 현실의 고통과 슬픔 때문에 기쁘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도 역시 큰 고통과 슬픔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는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존재인데 자녀들이 늘 목말라하고 배고파하고 필요가 채워지지 않아서 힘겨운 인생을 살게 된다면 부모로서 자녀를 바라볼 때 얼마나 가슴 아프겠습니까?
“수고와 슬픔뿐”인 처음 창조세계를 살아가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그래서 언제나 필요가 발생합니다. 늘 결여돼 있고 채워지지 못한 허기와 갈증이 늘 상존합니다. 처음 창조세계의 구조적 결함이라기보다는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얼굴이 가려졌기 때문입니다. 죄로 인해서 처음 창조의 목적이라는 목표물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불만족과 불안입니다.
예일대학교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말합니다. 물질이나 재화에 대한 필요가 아닌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로서 다음 네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모든 인간의 필요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필요입니다. 성 어거스틴이 자신의 신앙여정을 진술한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하나님, 진정한 필요는 당신, 곧 영혼의 양식이신 당신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허기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썩지 않을 양식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은 그것을 배부르게 먹어서가 아니라, 그것을 먹지 못할수록 그것이 전혀 맛있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우리 인간의 자연과의 연대에 대한 필요입니다. 우리가 자연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때 안정감을 얻습니다. 도시 문명에 발을 딛고 사는 현대인들이 끊임없이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충동을 지닌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연을 만끽하고 자연을 공유하고 자연을 경험하고 자연과의 일체감을 얻기 위해서 이번 황금 연휴에도 코로나로 격리되었던 삶에 대해 소위 ‘보복 나들이’를 많은 사람들이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셋째,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필요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외로움은 인간이 경험하는 큰 고통 중의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자연을 갈망하면서도 응집해서 도시 문명을 이루는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함께 하고자 하는 필요 때문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인간은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려는 필요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술을 발전시키고 인격을 발전시키려는 끊임없는 열망을 보유한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되고 무언가를 이루지 않으면 안되고 그렇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 존재입니다.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과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스트레스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이상의 네 가지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말하고서 이 필요들이 언제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 것인가를 논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새 창조를 단행하는 종말의 때입니다. “슬픔과 수고 뿐”이 되어버린 처음 창조에 대해서 하나님이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새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에 대한 필요가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과 우리 자신의 얼굴이 마주보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신 것과 같이 우리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어서 완벽한 교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새 창조세계는 인간이 자연과 평화를 이루며 자연의 구성성분인 인간과 동물과 모든 피조물 각각이 썩어짐이라는 종노릇에서 해방되어서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평화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65장 25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필요가 온전히 채워질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12-13절에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성도가 얻게 될 기업은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타났듯이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서로간의 사랑의 교제 속에서 어느 누구라도 외로움과 사랑의 결여를 느끼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새 창조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마지막 필요 역시 채워집니다. 우리 각자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대한 필요입니다.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에게까지 계속적으로 영원토록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무한에게까지 유한자가 도달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만, 왜냐면 무한과 유한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한자에게 이르는 영원한 과정이 될 것입니다. 영원한 성장과 발전이 계속될 것입니다. (<일과 성령>, 미로슬라브 볼프 저 참고)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들을 가진 채 우리는 이땅에서 살아갑니다. 처음 창조세계에서는 이러한 근본적인 필요들이 다 채워지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들을 위해서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수고와 슬픔뿐”인 자녀들의 삶을 역전시켜서 기쁨과 즐거움과 환호 가득한 인생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 창조를 내다보고 있습니다. 이사야서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이사야서 뒷부분, 그러니까 이사야서 56-66장이 일차적으로 누구에게 주시는 예언의 말씀인가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이사야서 1-39장은 죄로 인해서 바벨론의 심판 앞에서 서있는, 선지자 이사야 시대의 유다왕조와 유다의 왕에 대한 통렬한 예언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사야서 40-55장은 죄로 인해서 멸망당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포로민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BC8세기 말에 선지자로 불러서 긴 시대를 예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뒷부분 56-66장은 예언의 말씀이 바벨론의 포로민들이 아니라 포로상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예루살렘 주민들을 향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포로상태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고국에 돌아왔지만 여전히 그들의 삶은 팍팍하고 죄악된 삶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실망한 채로 살아가는 예루살렘 주민들을 염두에 두고 예언의 말씀이 펼쳐지는 것입니다. 막상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성전 재건도 결코 쉽지 않고 중단되어버린 학새 스가랴 선지자의 시대적상황, 성전을 재건했지만 그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의 고단함이 계속되었던 에스라 느헤미야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이들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지금도 받고 살아가고 있지만 새 창조의 기쁨보다는 여전히 수고와 슬픔 가득한 인생을 좌절하고 실망한 채 살아가는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이 예언의 말씀이 미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사야서 59장 1-3절에서 이렇게 되어버린 삶의 결정적인 이유를 말해줍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이러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새 창조를 이룰 수 없습니다.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생의 즐거움과 기쁨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죄악의 문제를 해결하고서 우리를 대신하셨던 죄없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써 새 창조를 시작하시고 새 창조의 기틀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바벨론 포로상태가 끝나고 그토록 열망했던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삶은 여전히 수고와 슬픔뿐인 고단하고 고통스러운 생활로 되돌아왔을 뿐인 예루살렘 주민들이 얼마나 실망과 좌절이 컸겠습니까? 그러한 자녀들에게 아버지로서 하나님은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전혀 새로운 그림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이전의 틀로서는 안되는 혁명적인 변화가 아니고서는 안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천국 백성이 되었다 하지만 삶의 고단함은 여전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지만 때로는 버거운 삶이 감당하기 힘들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아버지노릇 할 것인가를 생각한 것이 아닐까요? 전혀 새로운 인생 환경을 조성해주시는 아버지, 전혀 새로운 틀을 제공해주시는 아버지, 전혀 새로운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도록 하시는 아버지께서 새 창조를 단행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된 새 창조를 그리스도 예수를 다시 이땅에 보내심으로 말미암아 완성하시는 새 창조 사역입니다. 새 창조를 통해서 더 이상 수고와 슬픔으로 점철된 인생이 아니라 영원한 즐거움과 기쁨으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9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하나님께서 아버지로서 자녀들에게 다시 약속을 들려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약속만 반복하실 뿐 아니라 약속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근거를 이미 마련하신 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거룩한 성전이 된 우리 심령에 새 창조의 영이시고 새 창조의 완성을 보증해주실 성령님을 보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새 창조의 보증이시오 미래 완성이라느 건축 프로젝트의 계약금 조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서 새 창조를 이미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먼 미래에만 있을 소망으로만 남게 하지 않으시고 우리 안에서 새 창조를 이루어가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의 만족에 이르게 하십니다. 새 창조세계에서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충만하게 이루어져서 기도 응답도 빠를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또한 자연을 하나님의 손길로 감상하게 하시고 누리게 하시며,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찬양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하시고 서로를 돌아보고 사랑할 마음을 불러일으키시는 사랑의 영이신 성령 안에서 성도 간의 교제를 이루시고 관계의 욕구를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거룩케하시는 사역과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성장과 발전을 이루어가십니다. 새 창조 때 완성될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지금 성령 안에서 채워가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함으로 누리게 되는 이땅에서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새 창조로써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삶은 고단한 노역과 일이 아니라 참된 안식이겠지만 놀랍게도 오늘 본문에서는 일하는 것으로, 그리고 일한 수고의 대가를 정당하게 얻는 것으로 제시됩니다. 본문 21-22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일 자체라기보다 죄로 가득한 기존 창조세계에 만연한 불의와 불공정의 역전입니다. 이어지는 23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손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고스란히 결실로 돌아오는 새 창조세계, 당대 우리가 경작해서 누릴 뿐 아니라 그것을 잘 관리하고 물려주어서 자손대대로 기쁨과 혜택을 누리는 새 창조세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어린이주일에 부모세대로서 우리의 책임을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신실하셔서 자녀 삼은 우리에게 창조와 새 창조를 통해서 아버지노릇을 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는 자녀들에게 제공될 환경이 더 나은 환경, 더 나은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아버지노릇을 잘 해야 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수고와 슬픔뿐인 인생이 아니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의 역할, 경작할 뿐 아니라 지키는 임무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늘 당대 우리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다음세대, 우리의 자녀들, 교회학교 어린이들을 늘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 안에서, 성령이 주시는 지혜와 기술과 창의력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자녀들이 더 나은 세상에서, 마치 운동장에서 마음껏 뛰어놀 수 있을 것인가를 염두에 두고서 미래를 설계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우리의 자녀들을 위해서 성령 안에서 열심히 일하시며 그 일로써 이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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