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22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사 52:7-10)
딸 셋을 기르다가 막내 아들을 얻고 아들을 키워보니 아들과 딸이 참 다름을 알게 됩니다. 딸 셋을 기르면서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질문을 아들은 거듭합니다. 아들의 관심은 “누가 더 힘이 세냐?”에 모아져 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도둑과 경찰 중에 누가 더 세?”, “경찰과 군인 중에 누가 더 힘이 세?” 복합적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 어른과는 달리 단선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의 질문입니다. 유치한 질문이지만 대답하기는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경찰과 군인 중에 누가 더 셉니까?”, 경찰도 경찰 나름이고 군인도 총 든 군인인지 취사병인지, 다양한 상황에 따라 대답도 달라질 터지만 아이들은 그 복잡함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묻습니다. 귀찮아서 얼른 군인이 더 세다고 말해주면 그래서 자신은 군인이 되겠다고 말합니다. 가장 힘이 센 것이 아들의 로망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스라엘이나 열방들은 자신들의 신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바벨론은 마르둑을, 모압은 그모스를 각각 섬겼습니다. 이스라엘에게만 고유한 여호와 신앙, 배타적인 유일신 신앙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내에서도 다른 민족의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는 역사적인 흐름도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특별히 유다 나라가 멸망해서 이국땅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마르둑이라는 신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세계에서 어느 신이 더 강한 신이고 더 우월한지는 전쟁이 결정한다고 보았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민족의 신이 더 강력한 신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했다는 엄연한 사실은 마르둑이 여호와보다 더 강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낳았습니다. 유다땅에서 살지 못하고 바벨론에 강제 이주해서 살아가야 했던 포로민들에게 여호와는 자신의 백성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결코 끝나지 않고 계속될 것처럼 보인 포로 기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생각은 더욱 확실해진 듯 보였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러한 생각에 붙잡혀있는 포로민들을 향해서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마르둑보다 약해서 유다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벨론을 사용해서 유다의 죄를 심판하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유다의 죄로 인해서 유다가 멸망했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있는 기간은 마치 죄수가 감옥에서 복역하는 기간과 방불하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과 결정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바벨론의 신 마르둑이 여호와 보다 더 강해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한 것이 아니고, 실제로 마르둑은 아무 것도 아닌 헛된 우상에 불과할 뿐이며,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요 우주의 창조주이심을 말했습니다.
포로기 백성들에게, 포로 기간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고 계속되어가는 때에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포로기 곧 복역의 때가 끝나가고 있다고, 이제 죄값을 충분히 받았다고, 그래서 복역해왔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고 선포합니다. 곧 회복이 있을 것임을 선포합니다. 이 회복은 전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가능한 회복이어서 광야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내는 기적과 같은 놀라운 미래가 펼쳐질 것임을 예언했습니다. 기적 같이 펼쳐질 임박한 미래에 포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을 선포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선지자 이사야는 놀라운 영감적 비전과 환상을 생생하게 그려줍니다. 무너질 것 같지 않고 영원토록 지속될 것만 같았던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주는 한 전령을 선지자는 보고 있습니다. 마치 도시국가 아테네가 페르시아 대군을 맞아서 마라톤 평원해서 싸워야 했던 소위 마라톤 전투에서 많은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오히려 아테네가 지형을 잘 활용하고 전략을 잘 써서 승리했다는 기쁜 소식을 고국 아테네 도시국가에 전달하기 위해서 약 50km나 떨어진 전쟁터에서 아테네까지 한숨에 달려온 한 군인과 같이, 바벨론이 무너졌다는 기쁜 소식을 조국 예루살렘에 전달하기 위해서 급하게 달려오는 한 전령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함은 곧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해방과 고국으로의 귀환을 의미했기에 유다 백성들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이 기쁜 소식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온 전령이 산을 넘고서 그 발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전령이 전달한 기쁜 소식은 바벨론이 무너졌음이요 바벨론의 무너짐은 곧 여호와의 통치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먼발치의 예루살렘성을 내려다보면서 전령이 외치는 소리는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 곧 너의 하나님이 통치하시기 때문에 바벨론이 무너졌고,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돌아오게 될 것임을 기쁘게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포로민들에게 예루살렘의 함락은 군사적 패배만을 의미하지 않은 더 큰 충격이었습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그치지 않고 성전이 파괴되고 성전에서 섬김을 받는 여호와 하나님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성전 신학이었습니다. 그 틀에 갇혀서 새로운 충격적인 현실을 해석해낼 능력이 없는 무능한 신학이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내리자 신학도 무너져내렸고, 신학이 무너져내리자 현실을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포로민들의 더 큰 절망의 이유였습니다. 포로가 된 고통스런 현실에 대해서 신학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어서 갖게 된 절망이었습니다. 여호와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음으로 인해서 갖게 된 소망의 끊어짐 곧 절망이었습니다.
작금의 한국교회의 하나님의 백성들 역시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두려워해서 모이지도 않고 예배도 폐하고 모여서 예배하던 교회 중에서 감염자가 나오자 사회적 비난을 받고 고개를 숙이고 위축되어서 코로나19의 포로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이 견고하지 못한 교인 중에서 코로나19 이후에 이탈자가 생겨날 수도 있으리라 전망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감염이 되고, 모여서 예배하나 모이지 않으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고, 코로나19는 믿는 자나 그렇지 않은 자나 가리지 않는 듯하고, 영적인 법칙이라는 것이 실은 자연의 법칙보다 별로 더 센 것 같지도 않는 듯하고,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사회가 교회를 걱정하는 것을 보고서 신앙생활에 회의가 찾아오는 성도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고서 코로나19 바이러스 앞에 무력한 하나님을 은연 중에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배를 사수하기 위해서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조차도 코로나 감염이 잇따르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무엇이 진정한 포로일까요? 바벨론에 강제 이주되었기 때문에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진정한 포로됨은 포로된 현실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 소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지 못한 탓에 미래에 대한 아무런 소망을 갖지 못하게 되면 비로소 진정한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절망이 우리를 진정한 포로로 만드는 것입니다. 현실 상황에 압도당해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 때 진정한 포로가 되는 것입니다. 전도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다”(전 3:11)는 영원한 복음을 잊어버리게 될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와 선하심에 집중하지 못하게 될 때, 현실 상황의 어려움으로 인해서 이 복음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소망을 상실해버릴 때 진정으로 포로생활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코로나19 때문에 실족하게 되는 성도는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앞으로 코로나19보다 더 강하고 더 센 위기가 아마 여러차례 찾아올 것입니다. 코로나19보다 더 강한 현실의 위세로 인해서 더 큰 낙심과 좌절과 절망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현실의 위기와 어려움 때문에 소망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되는 그때 진정한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의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계시는 바벨론의 포로민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것이요, 그렇게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었다는 선포입니다. 포로민들이 여호와와 함께 돌아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52장 7절을 보십시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전령이 가져온 좋은 소식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이르게 될 ‘평화’이며 ‘구원’입니다. 이 ‘평화’와 ‘구원’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통치’에 관한 기쁜 소식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셔서 바벨론이 무너지고 이스라엘에 평화가 이르게 되고 고국으로의 귀환이 이루어지는 구원이 가능케 될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페르시아 제국이 바벨론 제국을 무너뜨리는 것이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로써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아시다시피 페르시아 제국 역시 바벨론 제국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고국에 돌아왔다고는 하나 여전히 페르시아의 압제 아래 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겪은 좌절은 또 한 번의 좌절이요 그래서 더 큰 좌절이었을 것입니다. 더 큰 절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고국으로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다가 실제로 돌아왔는데 별반 달라지지 않은 현실으로 인해 겪게 되는 더 큰 절망이었을 것입니다. 포로민에서 자유인이 된 줄 알았는데 여전히 고국의 품에 안긴 채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여전히 소망 중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진정한 통치를 기다린 사람은 포로민으로 전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대부분은 달라지지 않은 현실의 위력 앞에 무릎을 꿇고 소망을 상실해버림으로 인해서 포로생활을 계속하게 되었을 겁니다.
구약의 약속은 더 큰 약속 성취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은 비록 바벨론이 무너져 이스라엘 백성이 고국으로 돌아왔어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기대했던 페르시아 제국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역사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과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알렉산더 제국도 로마 제국도 하나님의 통치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이사야의 예언은 정확하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전령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1:14)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마지막 전령으로서 이땅에 오셔서 선포한 기쁜 소식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는 더 정확하게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진정한 평화와 진정한 구원을 가능케 하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약속은 언제 성취되었습니까? 사망 권세 이기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로 인해서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고전 15:26)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수립함에 있어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시므로 본격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것입니다. 인간이 당면한 가장 센 현실의 위세가 무엇입니까? 인간의 모든 두려움의 최종 귀착지가 무엇입니까? 왜 인간은 이토록 막연한 걱정에 사로잡히기가 쉽고, 실체도 없는 두려움에 붙들려 살아가는 겁니까? 왜 인간은 늘 배고프고 그래서 죄의 욕망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겁니까? 사망 권세 아래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힘이 세고 가장 강력한 사망의 권세 아래 놓여서 죽기를 두려워하는 인생에게 사망이란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통치가 임했다고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 권세 이기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미래, 하나님의 백성의 미래가 현실 한 복판으로 뚫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도 미래에 관한 소망일 뿐입니다. 아직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우리에게 이루어지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우리의 대적 원수, 가장 힘이 센 인생 현실의 위력 곧 사망을 이기고 사망을 폐하는 승리는 우리에게는 아직 미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시고서 이 기쁜 소식을 믿음으로 받기 위해서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이것이야말로 미래에 속한 부활의 능력을 현실로 가져오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음을 받아들이는 믿음이요,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음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돌이켜야 하는 우리 마음의 전환으로서의 회개입니다.
회개란 예수님과 완전히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요 돌이킴입니다. 마음의 전환입니다. 예수님과 온전한 일체를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가장 중심에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염두에 둔다는 것은 하나님을 제일로 소중히 여기는 것이요 하나님 중심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님 안에 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회개요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믿는 믿음이요 삶의 전환인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가장 소중한 삶의 진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그 능력을 힘입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철저함이야말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속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일체를 이루어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에 의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재조정되고 정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으로 우리 안에서 인정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그분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임박했다는 믿음이 없이는 이런 삶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회개요 예수님을 믿는 것이요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받아들이는 “복음을 믿으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왔음을 증거하는 복음의 기쁜 소식입니다.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으면 믿을수록 우리는 더욱 평화와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으로 인한 평화요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으로 인해서 비롯되는 참된 평화요 진정한 구원의 능력입니다. 인생을 가장 무력하게 만드는 가장 힘이 센 사망 권세를 예수님이 이기셨고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도 이기게 될 것이라는 굳센 믿음의 소망이야말로 우리에게 참된 평화와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믿음을 가진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다시 걱정의 포로, 두려움의 포로, 불안의 포로, 절망의 포로, 죄의 포로, 사망의 포로로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코로나19의 포로, 이보다 더 센 무엇 무엇의 포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온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현실 상황에 압도당해서 부활의 소망을 상실해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포로생활이 끝난 게 아닙니까? 아니면 여전히 포로생활 중이십니까? 상황이 어려워져서, 미래가 불확실해서, 잘못될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걱정과 근심이 엄습해서, 이러한 현실적 어려움의 포로가 되지는 않으셨습니까? 가장 확실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가장 확실한 소망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증거하는 예수님의 부활에 인생의 모든 소망을 두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굳세면 굳셀수록 우리에게는 진정한 평화와 샬롬, 진정한 구원과 영생이 주어질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복음을 선포하기에 앞서 이사야 40장 9절에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본격적인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기에 앞서 선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시선을 집중하고 하나님께 주목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 불안과 염려, 죄의 욕망과 죄의 권세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상황을 통제하시고 우리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집중할 때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이 우리에게 실제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마지막 전령이신 예수님을 온전히 붙들고 바라보며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 예수님과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예수님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온전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포로생활이 정말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 참된 평화와 구원이 여러분에게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참된 평화와 구원이 참으로 어려운 이때에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2
1951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