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10일 동산교회 설교
이전 세대와 장래 세대 (전 1:1-11)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주일에 우리는 이전 세대의 지혜를 들었으면 합니다. 특별히 장래 세대라면, 먼저 앞서 인생길을 걸어갔던 이전 세대의 경험을 경청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고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전도서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의 지혜의 가르침으로 여깁니다. 명시적으로 솔로몬이 언급되지 않아서 100% 확신을 가지고 전도서를 솔로몬이 썼다고 말할 수 없지만 아마 솔로몬이 왕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나라를 태평성대로 이끌었고 그 번영이 오히려 신앙의 독이 되어서 하나님을 떠났던 솔로몬이 죽기 전에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성찰하면서 쓴 참회록이 전도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유다 왕조의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누릴 것을 다 누려본 왕으로서,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삶을 거의 다 살아본 사람으로, 특별히 경건하게 하나님을 의지했던 다윗의 아들로서 신앙의 유산을 물려받은 자로서, 이전 세대이 대표로서 장래 세대에게 지혜의 가르침을 준 말씀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버이주일을 맞이하여 이전 세대의 지혜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의 가르침의 핵심을 생각하고 우리 삶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손자병법에 나오는 가장 유명한 말은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을 싸워 백번을 이긴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입니다. 본디 손자병법에는 백전백승이 아니라 백전불태(白戰不殆·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로 적혀 있습니다. 위태롭지 않다는 것은 승리보다는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알고 적을 알면 결코 패배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겠죠. (뉴시스 2020.3.21.)
요즘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도 이 손자병법의 경구가 유효하다고 생각됩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잘 알아야 하는데, 잘 잡혀가던 분위기가 요새 또한번 반전됐죠. 처음에도 잘 대처해서 코로나가 별 게 아니구나는 생각이 사람들 사이에서 번져갈 때 돌연 듯 31번 신천지 환자로 인해서 감염이 겉잡을 수 없이 퍼져갔는데, 이번에도 서울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집단감염이 얼마나 확산될지 지켜보아야 할 상황입니다. 지난번에는 이단 종파 신천지였다면 이번에는 성 소수자 클럽이 진원지입니다. 이태원에 있는 클럽, 주로 성 소수자들이 이용하는 클럽에서 확산 감염이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잠복기가 긴데 감염 초반 3~5일에 바이러스가 집중적으로 나옵니다. 이때 사람들이 증상이 없어 감염된 줄 모르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바이러스가 급속도로 퍼집니다. 감염 초기에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아서 감염된 것을 보르고 사람들이 왕성하게 활동을 하죠. 초기에 바이러스가 대량으로 나와서 많은 사람들을 감염시킵니다.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의 특성은 종종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말라리아 원충과 비교가 되곤 합니다. 일반적으로 ‘기생 생물은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는 게 정설이죠. 숙주가 죽으면 자기 살 집이 사라지니까 그렇죠. 그런데 말라리아 환자는 치사율이 매우 높습니다. 말라리아원충이 왜 사람을 죽이는지, 감염되자마자 사람을 거의 초죽음상태로 내모는지 의아하죠. 말라리아원충은 모기가 옮깁니다. 그러니까 모기가 와서 물어도 때려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숙주가 녹초가 돼버리는 게 병원체 확산에 유리합니다. 그 결과 독성이 강한 말라리아원충이 자연의 선택을 받은 거죠. 반면 비말이나 접촉을 통해 다른 숙주로 옮아가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이때는 숙주가 열이 나도 회사에 출근해 동료들 앞에서 재채기를 하고, 콧물 닦은 손으로 다른 사람과 악수도 막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니 숙주를 괴롭히되 죽이지는 않는, 독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쪽이 살아남는 겁니다. 코로나19는 모기 같은 매개체가 없어서 숙주가 드러누우면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감염된 사람이 이태원 클럽에서 왕성하게 활동을 해서 감염 확산이 벌어진 겁니다. 증상이 없어서 괜찮다고 생각하고 마스크도 안쓰고 클럽에서 종횡무진, 수많은 바이러스를 퍼뜨린 겁니다. 앞으로 어느 정도 확산될지 두고 볼 일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은 아마 계속될 겁니다. 전문가들도 사람이 코로나19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이 바이러스의 종식 또는 박멸 등을 목표로 삼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월간 신동아 4월호)
코로나 바이러스와의 싸움에서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이용해서 대규모로 안전하게 진단토록 한 김진용(45) 인천의료원 감염내과 과장입니다. 인천의료원은 인천공항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의료기관으로서 공항 검역소에서 이상 증세를 보인 환자들이 직행하는 병원입니다. 이곳에서 감염내과장이 김진용씨입니다.
이번에 이분이 제안한 ‘드라이브 스루’ 덕에 대규모 진단이 안전하게 가능했고 이를 통해서 바이러스를 통제하기가 쉬웠습니다. 지난 2월 20일일 밤 11시 30분에 대한감염학회 신종감염병위원회 정책태스크포스(TF) 단톡방에 이재갑 한림대 강남성심병원 감염내과 교수가 SOS를 쳤습니다. 이 교수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수퍼 전파자인 31번 확진자가 발생한 후 패닉에 빠진 대구로 내려가는 길이었습니다. "사태가 심상치 않아요. 빨리 대규모 진단 방안을 만들어야겠어요." 이분이 단톡방에 올린 글입니다.
김진용 과장이 이 메시지를 보자마자 머릿속에 즉각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밖에서 해야 해, 밖! 감염을 막으려면.' 이분이 과천에 사는데 스타벅스가 처음 들어왔을 때 드라이브 스루 방식으로 커피를 이용할 수 있게 했는데, 그것도 생각나고 특별히 전에 보았던 논문이 생각났던 것입니다. 2010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인플루엔자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에 대비해 드라이브 스루로 진단과 백신을 배포하는 모델을 논문으로 발표한 게 떠오른 것입니다. 그 논문의 아이디어를 이분이 현실에 적용한 것입니다. 대략 4시간만에 파워포인트로 만든 개념도를 단톡방에 올렸고, 이를 본 칠곡 경북대병원에서 이틀 뒤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DT) 선별진료소'를 개설했습니다. 아무리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생각과 아이디어라도 하늘에서 불쑥 땅에 떨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전의 어떤 것을 다듬고 발전시켰거나 자연에서 영감과 아이디어를 얻었거나 역사에서 지혜를 얻은 경우들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해 아래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 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이전 세대들에도 다 있었던 것이 장래 세대에 옷을 바꿔입고 다시 등장할 뿐입니다. 역사 발전과 창의적 혁신과 아이디어도 새로워보여도 어찌보면 과거의 유산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장래 세대들이 이전 세대들에 대해서 너무 잘난척 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디지털시대에, 과학문명의 첨단을 산다고 지나간 세대에 대해서 꼰대라고 하는 것이나,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래 세대는 이전 세대의 지혜와 경험에서 배워야 합니다. 세대차이 난다고 소통을 끊어버리는 우를 범해서는 안됩니다.
이전세대의 대표로서 솔로몬이 장래세대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솔로몬을 전도자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전도자’는 지혜를 지녀서 모임을 주최하고 가르침을 전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전도자로서 이전세대의 대표자로서 단도직입적으로 장래세대에게 가르쳐주는 인생의 만고불변의 진리는 삶이 참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헛되다는 것입니다. 삶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살아보니까, 특별히 정상에 올라보니까 별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간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얼마나 땀을 흘렸고 때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하면서 짓밟기도 했고 때로는 비굴하기도 했고, 그리고 쾌락을 포기하면서까지 불철주야 노력하기도 해서 올라온 정상인데, 올라와보니까 별 게 없다는 허무감이요 인생의 덧없음입니다. 솔로몬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니까 그랬다는 거겠죠.
2절에서 ‘모든 것이 헛되다’고 말했는데 그 ‘모든 것’은 3절에 나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를 가리킵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도자는 해 아래에서 땀 흘리는 수고가 사람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냐고 말합니다. 여기서 ‘유익’이라는 말은 상거래에서 남긴 이익을 가리킵니다. 장사해서 남은 이익입니다. 총매출액에서 원가, 비용, 임금, 감가상각비, 세금 등을 빼고 남은 순이익입니다. 땀 흘리며 애쓴 수고의 대가로 얻은 순익이 어떤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죠. 사람마다 치열함의 정도가 다르고 아무리 세상살이를 요란하게 살았다 한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해 아래에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해 아래에서’는 시간의 제약 속에 사는 현 세상으로서 말 그대로 해의 통제를 받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 없이 해만을 따라가며 사는 세상을 가리킵니다. 해를 지으신 하나님을 따라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해를 따라가며 사는 삶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해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현상에 매인 인생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실체나 근본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이 되는 실체, 세상의 실재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신데, 하나님 없이 해 아래서 세상의 시공간만 붙들고 살다 보면 아무리 애를 써보아도 사람의 세상살이란 결국은 허망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이라는 현상에만 매달린다면 세상에서 아무리 수고하여도 결국 헛된 것으로 그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4-11절에서 전도자는 자신이 관찰하고 연구했던 해 아래 세상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소개합니다. 4-11절 단락은 ‘세대’로 시작해서 ‘세대’로 끝납니다. 세대는 오고 가는데 땅은 그대로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틀 속에서 해 아래 세상사에는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4-11절은 3절에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라고 묻고서 4-11절에서 대답하고 있습니다. 4-11절에서의 대답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4-7절에서 자연을 보더라도, 그리고 8-11절에서 사람들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 결과는 뻔하다는 겁니다. 자연의 해, 바람, 강물과 바다를 보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그대로지 변화하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 역사를 보더라도 세상의 모습은 늘 되풀이될 뿐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역사 발전을 위한 모든 노력, 진보를 위한 외침, 성장을 위한 몸부림을 통해서 발전하는 듯 보이나 결국 세상만사는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뾰족한 탈출구와 진정한 진전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력한들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새 것이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만사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해 아래 세상에는 이것이 새 것이라고 내놓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땅을 그대로 있지만 그 땅에 왔다 가는 사람만 다를 뿐입니다. 왔다 가는 사람도 한 세대만 지나면 다 사라지고 다 잊혀집니다. 태산은 유구하되 그 태산을 거처 삼고 살아가는 사람만이 왔다고 사라지고 그렇게 다 파묻혀서 잊혀진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헛되고 헛될 뿐입니다.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땅은 여전한데 땅의 주인이라 할 수 있고 만물의 영장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흙으로 돌아가 사라져버리는 이보다 헛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솔로몬이 너무 비관적이지 않습니까? 성경의 창조신앙은 인생살이를 아주 긍정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전도자는 무슨 근거로 전도서 1장에서 이토록 모든 것이 다 헛되고 덧없다고 말하는 걸까요? 세상살이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무엇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일까요? 다 움켜잡을 수 없는 바람을 잡으려고 사람들이 헛노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헛되냐면 전도서 1장 14절에 보면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즉 해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이 다 바람을 잡으려는 무익한 시도요 헛수고라는 것입니다. 유익한 것이 하나도 없는 수고입니다. 한 마디로 해 아래서 이익을 좇아서 살아왔는데 그렇게 살다보니까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되었다는 탄식입니다.
온통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집착으로 가득한 인생은 허무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거품처럼 때로는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 것들에 대한 집착은 사라져버림에 대한 아쉬움 때문에 늘 ‘다음’을 찾아나섭니다. 사라짐을 막기 위해 언제나 다음을 찾는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만족과 행복을 찾기 위해 늘 다음 것을 계속 잡으러 다니는 게 바로 인생입니다. 성 소수자가 밤새 이태원의 클럽을 세 개나 찾아다닌 이유가 또한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요? 사라질 것을 잡으려는 인간의 무익한 시도 끝에 남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피곤함뿐입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사람이 수행하는 모든 일들이 다 지쳐있다는 것입니다. 사라질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허무감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새로운 것을 찾아나섭니다만, 나가봐야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새롭다는 것들도 다 뜯어보면 이전 것들의 조합일 뿐입니다. 해 아래 새 것이 없습니다. 다 사라질 것들이요 전혀 새롭지 않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살이를 아무리 아등바등 노력하면서 산다고 한들 무슨 이득이 남겠습니까? 이것이 권력을 누릴 대로 누려봤고, 영화를 누릴대로 누려봤고, 왕으로서 최고 통치자로서 최정상에 오르기도 했던 솔로몬의 인생론입니다. 이것이 해 아래서의 삶입니다. 진정한 이득이나 진보가 없는데도 같은 일이 계속 반복될 뿐입니다. 솔로몬 자신이 반성하면서 참회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정녕 없는 걸까요? 우선 이러한 정서와 결론은 인생에게 불가피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해 아래에서 인생의 탈출구를 찾으려는 시도는 무익한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해 아래에서는 다 사라질 것이고 새로울 것이 전혀 없을 지라도 해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도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를 시작하셨고, 오늘 우리를 통해서 새 창조 역사를 계속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종국에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해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는 인생입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남길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했지 않습니까?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고전 3:12-15)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를 단행하실 새 창조의 실현은 한편으로 심판의 날이기도 합니다.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활동과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불로써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로써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새 창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나라에 편입될 궁극적인 중요성을 지닌 것들을 환히 보여줄 것입니다. 금과 은 보석처럼, 그러한 일은 불에 타지 않고 남아 정화되어서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새 창조의 요소로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온통 사라질 것들과 전혀 새로운 창조에 적합하지 않은 새롭지 않은 일들은 하나님의 불의 심판으로써 소멸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창조로 이룩하실 새로운 세상을 위해 창조된 존재들입니다. 우리 안에 늘 경험하는 결핍과 허무감과 공허감은 우리가 장차 올 세상을 위해 창조된 존재임을 가르쳐줍니다. 새 창조를 단행하실 하나님 밖에서 즉 해 아래에서는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얼마나 소중합니까? 예배는 최고의 가치요 인생의 궁극적 실체요 우주만물의 실재이신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행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행위, 하나님께 전심으로 감사드리는 행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들은 인간의 본분을 실현하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해 아래서의 무익한 활동과는 차원이 다른 예배입니다! 종말론적인 예배, 종말론적인 예배를 드리는 종말론적인 공동체, 곧 교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는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먼저 삶을 살아간 이전 세대의 말을 늘 귀 기울여 들어야 합니다. 이전 세대의 지혜와 경험을 경청해야 합니다. 인생을 다 살되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아갔던 솔로몬이 자신의 말년에 장래 세대에게 들려주는 지혜의 가르침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해 아래서의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을 우리는 인정하고 눈을 들어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시작하신 새 창조,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지으심으로써 완성될 새 창조, 이러한 하나님의 새 창조의 동역자가 될 때에만 우리는 인생의 허무감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새 창조를 이루어가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성령 안에서 우리의 모든 활동과 일을 수행할 때 그것만이 영원한 하나님나라에 가지고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허무한 인생이 아닌 새 창조에 부합한 일과 예배로써 금과 은과 보석으로 인생을 건축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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