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12일 동산교회 설교 (부활절)
첫째 부활 (계 20:1-6)
신천지는 요한계시록을 참 좋아합니다. 신천지뿐 아니라 한국의 많은 이단들이 요한계시록을 좋아합니다.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자신이 계시록에 나오는 “이긴 자”요 “백마”라고 강조합니다. “백마”를 탄 모습을 연출하기도 하는데 이는 이전의 많은 이단의 교주들이 연출했던 장면입니다. 이만희는 요한계시록 19장에 나오는 “백마 탄 자” 곧 재림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자신이 백마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만희 자신이 예수님의 영과 하나가 되고, 신천지 열 두 지파의 십이 지파장들이 열 두 사도의 영과 하나가 되고, 신천지 성도 14만 4천명이 하늘의 순교자 14만 4천명의 영과 하나가 되어 육신이 영생하게 된다는 소위 ‘육신영생교리’를 신천지는 말합니다. 올해로 한국 나이 90세인 그 역시 곧 죽게 될 터인데 죽은 이후 신천지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질문하는 기자에게 신천지 고위관계자는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잘라 말합니다.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고 예수님의 영과 하나 되어서 육신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들이 말하는 ‘첫째 부활’입니다. 신천지 성도들만이 얻게 되는 ‘첫째 부활’입니다.
오늘 본문에 ‘첫째 부활’이 나옵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여기서 순교자들 곧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이땅의 신천지 증거장막 성전의 신자들 곧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결합해서 육신이 영생하는 소위 ‘첫째 부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첫째 부활’이 일어날 것이고, 이만희뿐 아니라 14만 4천의 진정한 신천지 성도들이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육신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을 그들은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뭐 새로울 것이 없는 이단의 교리입니다. 예전 영생교라는 이단도 ‘육신영생교리’를 주장했습니다. 이미 20만을 훌쩍 넘긴 신천지 신도들이 진정한 14만 4천의 성도가 되기 위해서 내부 경쟁이 치열하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첫째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알고, 오늘 부활주일에 부활의 의미와 부활의 삶이 이땅에서 어떻게 펼쳐져야 할 것인지를 깨달아 알기를 소망합니다. 이미 시작된 부활 생명을 누리고 그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20장은 소위 ‘천년왕국’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이해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성도들이 ‘첫째 부활’을 경험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간 왕노릇하며 통치한다는 ‘천년통치’, ‘천년왕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땅에서의 천년간의 메시야 통치가 끝날 무렵 천년왕국 기간 내내 결박당했던 사탄이 잠깐 놓임을 받게 되어 만국을 미혹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짧은 환난의 시련 기간이 이어지고, 이러한 사탄의 세력이 예수님에 의해 최후의 심판을 받게 되어 소위 둘째 사망 곧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문자적으로 이 부분을 보는 분들은 실제로 이땅에서 예수님의 천년통치가 있을 것이고, 이 천년통치 직전에 믿는 자들의 부활 곧 첫째 부활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이것을 소위 전천년설이라고 부릅니다. 천년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뜻에서 전천년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혁신학 전통이나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무천년설로 본문을 해석합니다. 천년의 기간이 영적이고 상징적인 기간으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교회를 다스리시고 이땅을 다스리시는 기간으로 이해합니다. 지금 교회시대가 천년기로 보는 것입니다. 본문을 비유적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본문 자체가 비유로 혹은 상징으로 보아야 자연스럽습니다. 사도 요한이 본 환상이라는 점에서 환상 자체는 문자적 해석보다는 의미를 해독해야 하는 비유적 해석이 자연스럽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년 동안 결박하여” 천년왕국이 어떻게 시작되냐면 예수님의 주권을 중개하는 대리인인 천사가 사탄을 잡아 결박하므로 예수님의 천년통치가 시작합니다. 사탄을 잡아 결박하여 무저갱에다 가두고 그곳에 열쇠를 채우고 쇠사슬로 닫아버립니다. 이러한 표현 자체가 문자적인 이해보다는 비유적 혹은 상징적으로 볼 것을 안내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탄이 언제 사로잡혀 무저갱 곧 어두움의 영역 혹은 음부에 가둬지게 됩니까? 언제 그 일이 발생합니까? 사망의 권세가 제압당했을 때 그때가 곧 어두움의 세력인 사탄이 결박당하는 때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언제 제압당했습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을 때 예수님을 가두었던 무덤에 놓인 굴이 굴러졌을 때, 그리고 무덤 문을 열고 예수님이 나오셨을 때 그때 이 세상을 호령하던 어두움의 세력의 바탕이 된 사망 권세가 무너진 것입니다. 사망의 권세가 제압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곧 사탄의 내쫓김이요 결박이요 무저갱 곧 그들의 활동 영역에 감금되어 활동이 제한되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곧 사탄의 세력을 무너뜨린 쾌거요, 그래서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하나님의 나라가 본격적으로 세워진 사건이요, 그래서 메시야의 천년 통치가 개시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전에도 예수님이 이땅에서 사역을 시작하셨던 공생애 초기 때부터 사탄은 내쫓김을 당하고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결박당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과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과 치유와 귀신 축출로 인해서 사탄의 결박이 시작된 것입니다. 결정적으로는 십자가로 승리하시므로,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므로, 어두움의 사망에 대해서 부활생명을 드러내보이시므로 사탄을 결박하신 것입니다.
사탄이 결박당한 결과가 무엇입니까?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부활하셔서 만유의 주로 등극하신 예수님의 주권으로 인해서 사탄의 세력은 감금당하고 활동이 제약되어서 그 결과 천년기간 내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옛 뱀인 사탄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미혹하여 넘어뜨리므로 첫 언약 세대 전체를 무너뜨렸던데 반해서 새 언약 세대인 교회를 향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도록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탄을 결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도록 예수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려는 이유는 아담과 하와를 넘어뜨린 것처럼 만국을 미혹함을 통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계략입니다. 사탄이 만국을 미혹한다는 것은 땅의 사방 백성을 미혹해서 교회를 대적하여 싸움을 붙이려는 미혹을 가리킵니다. 요한계시록 20장 7-8절을 보십시오. “천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천년기가 끝날 무렵 사탄이 감금되었던 무저갱에서 잠깐 놓임을 받게 될 때 거기서 나와 사탄이 하는 일은 땅의 사방 백성 곧 만국을 미혹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게 하고 교회에 싸움을 붙일 것입니다. 이때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의 총수가 다 차고 난 이후가 될 것입니다. 사탄의 계략을 따라 땅의 사방 백성이 미혹되고 이들의 핍박으로 인해서 교회가 어려움에 처하고 교회에 가입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은 교회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시작된 천년통치 기간입니다. 그래서 첫 언약세대 전체가 넘어진 것처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사탄의 미혹을 받아서 구원에서 이탈되는 소위 영적 넘어짐은 없을 것이지만 사탄의 방해나 죄로 넘어뜨리려는 미혹이나 때로는 물리적인 핍박은 여전합니다. 이것을 일컬어 소위 영적전쟁이라고 하죠. 이것은 지금도 계속되는 영적 현실입니다만, 하나님의 구원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이 미혹당하여 완전히 넘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사탄을 결박하여 그 활동을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서 사탄이 무저갱에 감금되고 결박당한 결과로 첫째 부활이 일어나게 되고, 예수님과 더불어 성도들의 왕적 통치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미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 예수님을 증언하고 신실하게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핍박을 받아 심지어 순교한 자들이나 우상숭배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신실하게 섬긴 성도들은 죽자마자 다시 살아서 예수님과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을 하게 됩니다. 부활 승천하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과 같이 성도들도 죽자마자 다시 살아서 하늘 보좌에 앉아서 예수님의 왕노릇, 주로 세상을 심판하는 권세로 나타나는 왕노릇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을 보십시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그러면 첫째 부활이 무엇입니까? 첫째 부활은 세 가지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첫째, 첫째 부활은 무엇보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성도들이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이라고 불리기 때문입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첫째 부활은 우선은 부활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최근에 부활절을 맞이해서 중앙일보에 정양모신부라는 분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이분이 한국 카톨릭의 성경신학의 석학이라고 합니다. 이분이 부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어찌 되겠나. 인생과 죽음에 대한 답변도 없어진다. 그러니 예수 부활, 우리 부활을 궁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저는 부활을 생각할 때마다 ‘추수’ ‘수확’이란 단어를 떠올린다. 신약 성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이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제게 가장 감동적인 말씀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정의다... 그런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랑의 화신(化身)이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깊이깊이 깨닫고, 맑게맑게 반사하신 분이다. 예수님은 사랑의 덕을 끝까지 밀고 가다가 처형이 되셨다. 그러나 하느님 보시기에 제대로 살았고, 또 제대로 죽었다. 그런 예수의 인생을 추수해 가신 것. 나는 그걸 부활이라고 본다.” 그럼 우리의 부활은 무엇인가? “내가 이 생을 살다가, 예수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신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으로 내가 익으면, 하느님께서 내 인생을 거두어가신다. 수확하신다. 나는 거기에 부활의 깊은 뜻이 있다고 본다.” 다소 카톨릭적인 부활 개념입니다만 성경적 부활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신양성경에서 부활을 열매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의 첫 열매로 표현한다는 점에서 이분의 독특한 표현,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그 인생을 추수한 것으로 본다는 관점이 신선합니다.
이분은 인터뷰에서 신천지와 같은 이단들이 생각하는 육신적 지속으로서 부활 개념을 ‘시신 소생’이라는 말로 반대합니다. 몸의 부활을 ‘시신 소생’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사도 바울이 ‘부활의 육신은 신령한 육신이다. 영광스러운 육신이다’고 했다. 다시 말해 이승의 육신이 아니라 이승을 초월한 육신이란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둘째, ‘첫째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이면서 동시에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활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성도들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보통 부활은 몸의 부활을 강조합니다. 물론 그 몸이란 것이 아까 정양모신부님이 말한 것처럼 ‘시신 소생’이 아니라 영적인 몸으로서 몸의 부활이기는 합니다만, 요한계시록 이곳을 빼면 신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첫째 부활이라는 표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도 요한이 이곳에서 ‘첫째 부활’이라는 말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보통 부활이라고 하면 역사의 끝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셔서 몸을 입혀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경의 통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이 ‘첫째 부활’이라는 생소한 표현으로 강조하고자 했던 바는 무엇일까요? 특별히 핍박을 당하고 어려움 가운데 신앙생활하다가 그 믿음 때문에 순교한 자들이나 황제숭배의 압력에 저항하고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우상숭배하지 않은 신실한 성도들의 삶이 당시 얼마나 고달팠겠습니까? 물론 이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고 오늘날 우리도 코로나19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까? 삶이 때로는 문제의 연속이요 고통의 연속인 듯 보이는 우리네 삶 역시 어렵습니다만, 당시 로마제국의 회유와 핍박속에서 제국 내의 소수자로서 믿음을 지키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요? 그래서 순교자도 많이 생기고 믿음 지키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살아갔던 그들에게 먼 훗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부활 소위 몸의 부활을 강조하기보다 어려운 가운데서 신앙생활하다가 순교를 당하거나 자연사한 성도들이 그 죽음 직후에 죽자마자 영적인 부활을 경험하고서 하나님 품에서 복락을 즉각적으로 누리게 됨을 강조하기 위해서 보통은 부활이라는 표현까지 쓰기에는 좀 지나치게 느껴질 정도인 ‘첫째 부활’이라고 하지 않았나 추측해봅니다.
그러니까 ‘첫째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붙들고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한 성도들의 죽음 직후의 영적 부활을 가리키는 표현인 것입니다. 성도들이 지금 죽으면 죽음 직후에 영혼이 하늘 보좌에 앉혀지고 예수님과 더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고 왕노릇을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첫째 부활입니다. 첫째 부활이 있음은 성도들에게 큰 위로가 됩니다. 비록 이땅에서의 삶이 힘들고 고달퍼도 끝까지 인내할 수 있고 버텨낼 수 있는 이유는 첫째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습니다. 죽자마자 첫째 부활을 하게 되고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은 하늘 보좌에 앉혀져서 예수님과 더불어 왕노릇하게 됩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성도들만이 둘째 사망의 권세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본문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 둘째 사망은 첫째 부활이 영적인 부활인 것처럼 둘째 사망은 영적이고 최종적인 죽음을 가리킵니다. 최후 심판을 거쳐 영원형벌을 받는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이미 육신이 죽은 것은 첫째 사망이라 할 수 있고 불신자로 죽은 자들이 영원한 죽음에 처하게 되는 것이 곧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신자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죽어서 첫째 부활을 경험한 자들은 예수님이 이땅에 재림하실 때 최후 심판에 의해서 영원한 정죄를 받아 지옥형벌을 받게 되는 둘째 사망에 떨어지지 않게 됩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운명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이 처하게 되는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부활을 경험한 성도들은 둘째 부활을 경험하게 될 터입니다. 둘째 부활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는 재림의 때에 우리의 이름을 불러내서 영적인 몸의 부활을 입혀주시는 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성도들 곧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복되다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첫째 부활’은 죽은 성도들의 즉각적인 영적 부활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이땅에 사는 우리 성도들의 중생한 삶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점을 강조한 신학자가 어거스틴입니다. 이땅에서 이미 하나님의 통치 곧 천국이 시작되었고, 이땅에서 이미 영생이 주어진 것입니다. 더 이상 육신의 몸으로 살아가지 아니하고 먼 훗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실 성령을 받아서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첫째 부활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죽고나서 비로소 제사장으로 왕노릇하는 게 아니라 이미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이땅에서 영적인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살아계시고 사시는 존재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영적 제사장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부활주일입니다. 오늘 부활절이 더욱 뜻깊은 이유는 지난 6주간 코로나19로 인해서 우리가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하다가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해서 다시 예배당에 모여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를 신실하게 끝까지 믿음으로 붙드는 여러분들은 ‘첫째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첫째 부활’을 경험하고 믿음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한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 생이 지속된다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확증이요 하나님이 영원한 선이요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가치 있는 것을 추구하는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라는 확증입니다. 왜 옳은 것을 끝까지 추구해야 하는지, 왜 선한 것을 끝까지 준행해야 하는지,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들이 현실적 이익에 반하더라도 왜 끝까지 가치를 고수해야 하는지, 거기에 대해서 부활은 우리에게 확증을 주는 것입니다. 오늘 너무나 뜻깊은 부활절 아침에 이러한 부활의 의미를 깨닫고 첫째 부활에 참여하고 있는 자로서 이러한 복락을 누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올바른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632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