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26일 동산교회 설교
성실 (골 3:22-25)
직업에 귀천이 어디 있느냐는 말을 흔히 합니다만 아직도 우리의 의식속에는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에 대한 선입견이 있는 듯합니다. 보통 좋은 직업이라 함은 보수를 많이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여러 가지 변화가 있는데 일과 직업에 있어서도 우리의 생각에 변화를 주었습니다. 우리의 생존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직업은 당연히 의료진들이죠. 이것은 이전이나 이후나 마찬가지입니다. 의료진만큼이나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영국에서는 ‘키워커’(Key Worker), 미국에선 ‘에센셜 임플로이’(Essential Employee)라고 부르는 노동자들입니다. 슈퍼마켓 노동자나 배달 노동자들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이 없으면 최소한 안전마저 확보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의 중요성이 그동안 간과되었고 제대로 대우해주지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처우를 제대로 개선해주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영어로 ‘케어 이코노미’(Care Economy)라고 하는 소위 ‘돌봄 경제’의 중요성도 높아졌습니다. 예를 들어 요양원에서 일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최저임금을 더 올리거나, 그런 분야엔 규제를 강화해 노동조건을 개선해 주어야 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가사노동의 소중함을 느끼게 됐습니다. 집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먹거리와 건강을 챙기는 일이 우리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았습니다. 가사노동의 가치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겨레신문 2020.04.25. 장하준 교수 인터뷰)
코로나19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앞으로 두고두고 나타날 것입니다. 직업활동에도 영향을 미치고 선호하는 직업에 대한 수요도 바꿔놓을 전망입니다.
학생들도 학교에 가고 싶다고 비명을 지릅니다. 예전에는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는 것을 싫어했던 학생들이 개학이 한 달 이상 연기되고 수업이 비대면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자 어서 학교에 가고 싶다고 안달합니다. 아마 사회적거리두기가 5월 5일로 끝나고 생활 방역으로 전환되면 대학교에서 대면 현장 강의가 속속 재개될 전망입니다. 초중고 역시 순차적으로 현장 수업을 시작할 것입니다.
교수님들이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1시간 수업 분량이라고 생각하는 내용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라인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영상으로 혼자 녹화하면 대개 1시간 분량이라고 생각되는 수업이 20분이면 녹화가 마친다고 합니다. 수업을 위해 동영상을 촬영하는 이들이 공통적으로 호소하는 어려움입니다. 60분 분량 수업을 촬영하면 꼭 20분짜리 동영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인강(인터넷강의)’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빨리보기를 통해 이를 10분 이내로 보는 것을 마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통적 수업은 대략 40분을 허비하는 비효율적인 수업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서 사라져버린 40분인 셈입니다. 아마 대면 수업 때는 학생들이 가끔은 불필요한 어리석은 질문들을 던지고, 그 질문에 답변하는 시간도 있을 것이고, 서로의 얼굴을 보는 미세한 시간과 그 사이의 어색한 침묵의 시간도 포함될 것입니다. 아무래도 교육이라는 것은 상호작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앙일보 2020.4.24. 박원호 교수 칼럼)
모든 일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의 효율성만이 아니라 거기에는 인간관계가 어김없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일하면서 사회에 기여하고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펼쳐나가는 존재이면서도 여전히 관계적 존재입니다. 일의 효율과 관계는 어찌보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두 마리 토끼’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평생 살아가면서 일하는 존재로 남아 있는 우리 인간에게 일의 효율성, 그러니까 효과적으로 일을 하고 좋은 결과를 산출하는 일의 효율성과 그 일을 하는 도중에 늘 끼어있기 마련인 인간관계를 어떻게 아름답게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지,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 것인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골로새서 3장 18절부터 4장 1절까지에서 다루는 인간관계 영역 중에서 특별히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해볼 수 있는 인간관계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그리고 직장에서 직장동료나 직장 상사와 부하 직원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일가친척과의 관계 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는 당시 노예사회를 배경으로 종과 상전의 관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상전 앞에서 종이 어떠한 마음으로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노예제 사회라는 엄연한 현실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말씀을 전해주고 있다면 오늘날 같이 자유화된 시대 현실속에서는 신분적 차이라는 종과 상전의 관계라기보다는 사회조직의 기능과 역할의 차이에 있어서 직장 상사와의 관계로 적용해볼 수 있습니다.
일을 할 때 프리랜서가 아닌 이상 어디에 소속되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직업활동을 하게 됩니다. 프리랜서라 하더라도 오더를 주는 쪽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대등한 인격적 관계로서 수평적 관계이면서도 불가피하게 일의 효과와 효율을 위해서 기능과 역할의 차이가 수직적으로 규정돼 있습니다. 상관이 있고 부하가 있습니다. 지시를 하는 쪽이 있고 지시를 받는 쪽이 있습니다.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에 보면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룰 때 주로 종의 의무에 대해서 많이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은 총 4절로서 종에게 말씀하는 것이고, 다음 절 그러니까 골로새서 4장 1절은 상전에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상전에게 주시는 말씀은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이 한 절뿐입니다. 아무래도 초대교회 성분 분포가 종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종과 상전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키를 종이 쥐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주된 이유는 복음 선포를 들은 종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유를 얻은 자로서 복음이 선포하는 “주 예수 안에서는 종이나 주인이나 하나다”는 말씀에 힘을 지나치게 얻어서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라 불렀던 종과 주인이 다시 가정에서 만나게 될 때 그 위치를 망각해버리기 쉬웠던 데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요, 한 형제요 자매인데 지시를 하고 명령을 한다고, 잘못 적용해서 지시를 받지 않으려 하고 명령을 듣지 않으려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잘못된 사례도 종종 있었을 겁니다. 그래서 특별히 종에게 주시는 말씀이 더욱 부각되고 강조되었던 듯합니다.
하여튼 오늘날은 노예제사회도 아니고 직급의 차이가 있다고 수직적 신분의 차이로 보지도 않습니다만, 여전히 사회 안에서 일을 할 때 관리자가 있고 때로는 지시를 받는 분들이 있는 조직 안에서 일을 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일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일의 결과를 얻을 수 있고, 그 과정에서 사람과의 관계도 소중히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비결을 오늘 말씀을 통해서 듣고 깨닫기를 원합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기본적으로 지시와 명령을 따라야죠. 모든 일에 상급자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과 복종을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습니다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 우선 인간관계에서 질서를 존중하고 명령과 지시에 순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단, 순종하고 지시를 따를 때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지시를 내리고 명령을 내리는 상전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기가 되면 안되고, 그것이 동기가 되어서 가끔은 “눈가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관의 눈가림만 한다는 것은 외관상의 섬김을 뜻합니다. 눈가림이란 진실한 마음으로부터 나오지 않고 단순히 외적인 모양으로 만족하는 일과 봉사의 형태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하나님 보다는 상관의 위치에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눈가림’이 아니라 우리는 모든 일을 수행할 때 “성실한 마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성실한 마음’이란 ‘전심으로‘를 의미합니다. 마음을 다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예배도 마음을 다해서, 섬김도 마음을 다해서, 일도 마음을 다해서. 전심으로! 단순하고도 진실한 인간의 내면 곧 ‘성실한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성실한 마음’은 거짓된 이면의 동기가 아니라 주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갖게 되는 마음입니다. 왜냐면 종이든 상전이든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사람 앞에서 서있기 이전에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 서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첫째로 우리의 주인이신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전들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주 그리스도에 대한 경외심이 일을 열성적으로 수행함에 있어서 일차적인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우리가 하는 모든 일, 크든 작든 어떤 일이라도 우리가 누구에게 하는가 하면 사람에게 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의 인생의 참된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 수행하고 있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일을 하면 일의 효율도 살고 인간관계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적 삶이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죠. 코람데오입니다.
24절입니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당시 종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주인의 것을 유업으로 물려받을 수 없었죠. 그러한 종들에게 하늘의 주님이 유업으로 상을 주신다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상전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든지 너희에게 는 너희에게 갚아 주실 한 주인이 계신다’, 마지막 날에 보상해주시는 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 주님은 앞으로 다가올 시대에 영원한 생 명을 보상으로, 유업으로 주실 것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지 단순히 사람을 섬기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전을 위하여 온 마음을 다하여 일할 때 바로 그러한 행동으로 우리의 주인이신 하늘의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25절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앞서 상전이 있더라도 이제 그리스도를 모든 것의 주님으로 모시고 그러한 자세로 일하고 살아가라고 권면했다면 이 말씀에서는 그렇게 해야 할 근거가 진술되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 ‘불법을 행하는 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죄책과 수치를 당하고 주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종들이기 때문에 악한 행실들이 하나님 앞에서 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종이었기 때문에 상황을 참작하여 너그러이 대해 줄 것 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주님은 사람들을 편견 없이 대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외모의 영향도 받지도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20세기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던 재판이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나치 독일이 수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을 때 그 일을 위해서 기여했던 사람, 아히히만이라는 독일 군인의 재판이었습니다. 그는 달리는 열차 안에 가스실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고 그러한 열차를 제작하기도 했습니다. 남미에서 몰래 숨어지내다가 예루살렘 정보기관 모사드에 의해서 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 내내 그는 자신은 지시 받은 대로 했을 뿐이며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지 알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만약 지시받은 대로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고서 월급을 받았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양심에 가책이 됐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이분의 결정적인 잘못은 지시받은 대로 임무를 수행했을 때 뒤따를 결과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았다는데 있습니다. 성실성을 하나님과의 관계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놓고 생각해보지 못했다는데 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는 참으로 성실한 사람이었고 성실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었지만 그 성실함이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인해서 생겨난 성실함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을 할 때든 인간관계에서든 중심에 주님이 주인으로 좌정해계신 분의 삶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성실한 마음이 중요한 까닭입니다.
우리는 일을 효과적으로 잘 수행하기 위해서 성실해야 합니다. 사람과의 관계를 잘 형성하고 열매맺기 위해서도 성실해야 합니다. 성실은 인간의 가장 기본이요 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 그 성실함이라는 것은 주님을 두려워함으로 촉발되고 유지되는 성실함이 될 때 우리는 일의 효율과 인간관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습니다.
아울러 신학적으로 우리가 성실해야 하는 이유를 또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의 성실하심 때문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중의 한 구절을 꼽자면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원래 구약성경 하박국에 있는 말씀이죠. 거기서 ‘믿음’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에므나’는 보통 믿음이라고 할 때 말하는 의존과 신뢰로서의 믿음을 뜻하지 않고, 원래 이 단어의 뜻은, 끝까지 한결같이 버팀, 견디어 냄, 인내함, 신실한 마음을 가지고 쭉, 한결같은 성실함으로,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인내, 성실의 뜻이 강합니다.
하박국 2장 4절은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는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기록됩니다. 여기서 “나”는 문맥상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피스티스(그리스어로). 하나님의 신실, 하나님의 미쁘심, 하나님의 성실로 번역함이 정확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히브리어 구약성경과 70인역의 내용이 그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하나는 의인이 가지고 있는 인내하는 자질, 성실한 자세에 의해 살아간다고 말하는 반면에, 70인역은 하나님의 붙드심,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해 의인이 살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바울이 인용할 때도 늘상 70인역을 인용하니까 당연히 “의인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로 인용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이 구절을 인용할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하신지 아십니까? 로마서 1장 16-17절을 찾아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도바울은 “그의 믿음”이나 “나의 믿음”, 둘 중 어느 것을 택하지 않고 그것을 생략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모호하게 처리했습니다. 70인역을 따라 하나님의 신실하심, 붙드심, 성실하심을 선택하지 않고, 그렇다고 히브리어 성경을 따라 신앙인의 인내하는 신실함, 견딤, 성실함, 그리고 거기서 파생되는 의존과 신뢰로서의 믿음을 선택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을 뿐입니다. 두 성경을 다 알고 있었을 사도바울이 의도적으로 생략함으로써 모호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설득력이 있는 주장입니다.
복음 안에서. 그렇기 때문에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부터 우리의 믿음에 이름을 가리킵니다.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바로 하나님의 신실이며 하나님의 성실인 것이고, 이러한 객관적 토대 위에서 하나님을 의존하며 이 복음의 효력을 받을 것이냐 말것이냐의 의존적 믿음이 기능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하박국을 인용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아버지노릇 해주시는 성실하심의 터 위에서 그분만을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신뢰하는 우리의 믿음을 동시에 아울러 가리키는 겁니다.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우리의 믿음의 뿌리요 바탕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실하라는 권면의 신학적 근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의롭게 받아들여진 우리 신앙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 믿음의 토대는 우리를 향하신, 언제나 한결같고 변함없으신 신실하신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로서 언제나 정성을 다하고 우리의 필요와 고통에 민감하시며 보호하시고 채워주신 성실하신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의존이며 신뢰이며, 자녀로서 내맡김이며 그분의 품에 안김입니다. 우리를 향해 언제나 한결같으신 신실하신 하나님, 성실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자녀로서 서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삶의 자세는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것이며, 성실한 것이며, 그분이 나의 삶을,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주관하고 이끌어가심을 믿고 안심하고 그분의 품 안에서 평안하며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믿고 안심하십시오. 그리고 주어진 길을 충실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충분합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책임감 있게 응답하는 삶입니다. 모든 일을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주님을 언제든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성실하게 살아가므로 인해서 일의 좋은 결과가 뒤따르고 인간관계도 아름답게 결실을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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