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6월7일 동산교회 설교
구원과 심판 (요 3:16-21)
작년 칸 영화제에서 <기생충>으로 최고상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감독과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한 배우 송강호씨의 인연과 우정이 많이 회자됩니다. 봉준호감독이 조감독으로 참여한 어떤 영화에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 배우 오디션을 진행했습니다. 연극배우로 활동해왔던 송강호씨도 오디션에 나갔는데 그만 탈락했습니다. 탈락했는데 아무도 왜 탈락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조감독이었던 봉준호는 송강호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았고 그에게 삐삐 문자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메시지에는 어떤 이유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차분한 설명이 있었고 메시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평생에 남을 말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언젠가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이후 봉준호는 감독으로서 첫 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신예 감독이 되었지만, 처참하게 흥행에 실패했습니다. 심기일전해서 두 번째 영화를 만들면서 당시 충무로에서 첫 작품의 실패에 이어 연달아 실패하면 영화판을 떠나야하는 상황을 아는 봉준호는 이번 작품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준비했습니다. 흥행 성공을 위해서 이번 영화만큼은 유명 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가 제일 먼저 떠올린 배우는 송강호였습니다. 조연 배우 오디션에서도 탈락했던 송강호였지만 이후 <반칙왕>과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연기에 호평을 받고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배우 송강호였습니다. 송강호는 어느 새 유명 배우 반열에 올랐던 것입니다. 첫 작품에서 흥행에 실패한 감독에게 송강호는 캐스팅하기에는 이미 너무 큰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봉준호는 '믿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용기를 내서 송강호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응낙 여부를 기다리기에는 너무나 초조했던 탓에 먼저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송강호는 봉준호에게 대뜸 "시나리오 봤습니다. 출연하겠습니다."고 말하고서는 선뜻 응한 이유에 대해서 "감독님 우리 5년 전에 만났잖아요. 나는 그때 당신 영화에 출연하기로 이미 결정했어요."고 말했습니다. 5년 전 무명 배우 시절 오디션에 비록 탈락했고 아무도 왜 탈락했는지 이유를 알려주지 않는 무시 받은 상황에서 유일하게 공손하게 메시지를 보내준 조감독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서 이루어집니다. 작은 만남도 소중히 여기는 관계의 신실성이 봉준호를 세계적 거장으로 끌어올린 하나의 단초가 되었고, 이 둘의 우정은 칸 영화제 시상식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황금종려상 트로피를 봉준호가 송강호에게 헌정한 것입니다. 서로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며 서로를 치켜세우는 귀한 우정을 통해서 우리는 만남이 얼마나 소중하고 만남에 대한 반응이 우리의 미래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봉준호와 송강호에게 둘의 만남이 서로에게 축복이었고 큰 선물이었음을 두고 두고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최고의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과의 만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신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귀한 선물을 우리가 받고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구원과 심판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신다 해서 과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반응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미래는 결정되고 구원과 심판이 확정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에 너무도 유명하고 잘 아는 은혜로운 말씀이 들려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분을 마치 광야에서 불뱀에 물려 괴로워하며 신음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독에서 치유함을 얻기 위해 보낸 구원책이었던 놋뱀과 같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드높여 달려 죽게 하심으로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드러났고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독생자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 중에서 최고의 값비싼 선물이십니다. 이 선물을 받은 우리가 선물의 포장도 뜯지 않고 관심도 표명하지 않고 “나 이런 거 필요 없어!”하고 반응하면 그에 따라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진다 해도 우리가 거기에 대해서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나오면 어떻게 하냐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독생자를 주심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고뇌도 읽을 수 없고 큰 사랑도 깨닫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심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어떠한 결단이었고 어떠한 슬픔이었고 어떠한 사랑이었는지, 우리는 비록 다 헤아릴 수 없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던 성경의 인물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은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서 난 유일한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이 노년에 얻은 아들 이삭은 그의 씨를 복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결부된, 약속의 자녀입니다. 어렵사리 얻은 이삭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돌연 번제로 바치라는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고민됐겠습니까. 얼마나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 유일무이한 독자 이삭을, 단지 이삭 한 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모든 축복의 약속이 아들 이삭의 자손을 통해서 주어질 것인데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은 아브라함의 모든 미래가 떨어져나가는 고통이고 아픔이었을 겁니다. 분신과도 같았던 독자 이삭을 그래도 순종해서 바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아브라함은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지금도 깨닫고 감동하고 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주신 이유는 예수님을 믿고 멸망치 말고 영생을 얻으라는 부름이요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주신 이유는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자가 얻게 되는 영생은 무엇입니까? 사후에 얻게 되는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이라는 의미보다 영생이란 현세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내세에서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소위 거듭나서 이땅에서 하나님나라를 본 자들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영생은 헬라식 표현이고 구약 히브리식 표현은 ‘오는 세대에서의 삶’,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을 뜻합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메시야가 가져올 새 시대에 대한 메시야 대망 사상이 있었죠. 여호와의 날에 대한 기대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이전 세대를 끝내고 유대인들을 위해서 새로운 세대를 가져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그렇게 올 시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곧 영생입니다. 시편 133편에서 그리고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천상적이고 영적이기보다 지상적이고 물질적으로 그려집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의 백성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섬기면서 함께 공동체를 이루는 아름다운 모습 위에 하나님의 임재가 가득하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모임 가운데 가득 흘러내리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이땅에서든 저땅에서든, 현세에서든 내세에서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여기서 ‘영생’이라고 번역했지만 실제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단순히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다가올 세대에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공동체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령한 복은 곧 생명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기 때문에 영생인 것이지, 사후에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에서 영생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칼럼에 <지옥과 천국>이라는 글을 썼습니다만,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과 조건에서도 마치 천국에서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모든 환경이 잘 갖추어져 있는데도 지옥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차이가 영생을 이미 얻은 자와 그렇지 않은 차의 차이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이미 영생이 시작된 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써 끝장난 이전 세대를 뒤고 하고 다가올 세대를 미리 당겨와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곧 영생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다가올 세대가 이미 우리에게 침투해 들어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이 우리 안에서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삶,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형제 자매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 이미 시작된 영생입니다.
그러면 영생 얻는 믿음은 어떠한 믿음을 가리킵니까? 몇 주 전에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에 대해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평가하십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고서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겨났지만 그러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고 신뢰할만한 믿음으로 인정하시지는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가 계속 살펴보고 있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 니고데모라는 사람 역시 표적을 보고서 예수님에 대해서 궁금해서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은 그의 영적인 어둠과 무지를 책망하셨습니다. 표적을 보고서 믿는 믿음은 영생을 얻게 하는 믿음과는 구분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고 우리로 영생을 얻게 하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어떠한 믿음일까요? 물론 표적을 보는 믿음으로 시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게 된 믿음에 대해서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가리킬까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우리 인생에 뭔가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존재하고 살아 계실 수도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겁니다. 하나님을 증거하는 간증을 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그 인생 가운데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을 증거하는 그들의 말이 거짓말은 아닐텐데, 그런 것들을 보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유명 인사, 연예인이나 권력자들도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니 나도 믿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행복해보이고 뭔가 달라보이고 가정도 화목해보이니까 나도 뭔가를 의지해야겠는데 예수를 믿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동한 것이고 어느 정도 설득이 되었기 때문에 믿게 된 것이겠죠. 그러나 이렇게 형성된 믿음에 대해서 예수님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십니다.”(5월 24일 설교 중)
예수님의 표적을 보고서, 그리고 예수님의 신선하고도 능력있는 가르침을 듣고서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도전하시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정 자유롭게 되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입니다. 요한복음 8장 31-32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은 죄의 종인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실 수 있는 분이시고,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순종하면 이전 세대에서 우리를 얽매이게 했던 모든 것에서 참된 자유를 얻게 되고,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시작하여 누릴 수 있는 참된 예수님의 제자가 될 것임을 도전하신 겁니다. 이러한 믿음은 현 세대의 삶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믿음의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귀한 선물인 예수님을 붙들고 영생이라는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을 완전히 신뢰하는 믿음에까지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이 말씀 하시기 바로 전에 예수님께서 또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2장 24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전 세대에서의 삶, 이전 생명에서 죽어야 새 생명, 영생으로 나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 세대의 삶을 특징짓는 인생은 어떤 인생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인생의 첫째 목적으로 삼지 못하고 자신의 유익과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추구를 제일 앞세우는 삶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남이 어떻게 되든 말든 나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행동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삶입니다. 이런 점에서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수동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선택하는 믿음이요 영생을 살아가게 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삶이요, 가치체계가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세대에서의 삶, 이미 임한 다가올 세대에서의 삶이 곧 영생입니다. 이기적인 욕망 추구의 삶이 아니라 형제 자매가 연합하여 공동체를 이루고 서로 사랑하는 삶이 곧 이미 시작한 영생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오는 세대에서의 삶을 이미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곧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새롭게 거듭난 사람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십자가에 들린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삶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원론적인 용어는 공통적으로 ‘이미 임한’(already)과 ‘아직 아닌’(not yet)의 두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영생도 그렇고 하나님나라도 그렇고 칭의도 그렇고 화목도 그렇고 양자됨도 그렇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특별히 강조되는 것은 ‘이미 임한’, 다시 말해 실현된 종말론입니다. 심판에 관해서 오늘 요한복음은 심판도 이미 임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이유는 심판이 아니라 구원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심은 그를 구원자로 세우심입니다. 그를 믿는 자는 누구라도 세상에서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심판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어지는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심판은 최후의 심판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심판입니다.
예전에 실업인회 CBMC를 1년간 지도한 적이 있습니다. 매주 모여 예배드리는 모임에서 언젠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로마서를 가지고 설교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배 후에 한 장로님이 요한복음의 이 말씀을 가지고서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심판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물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이미 구원과 심판을 결정한다는 점을 강조한 말씀이지 최후의 심판이 없다는 말씀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이 장로님은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분이어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차에 요한복음 말씀, 곧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는다는 말씀을 읽고 위안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요한복음 말씀은 이미 심판이 임했음을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하나님의 유일무이하신 아들,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랑 받는 자로서의 아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 선물에 관심을 갖지 않고 포장지도 뜯어보지도 않고 나름 자충적인 삶을 계속 살아가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미 심판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죄 아래 놓여져 있다는 겁니다. 심판과 정죄는 같은 단어고 바꿔쓸 수 있는 단어입니다. 19절입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빛이 왔죠.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준 새로운 삶입니다. 십자가의 길이요 서로 사랑의 삶이요 곧 영생인데 이러한 새로운 삶을 받지 않으려는 겁니다. 왜냐, 고집적으로 어둠이 더 좋은 거예요. 자기 유익, 자기 안위, 자기 욕망 충족, 그 악한 삶을 버릴 용의가 없는 겁니다. 빛으로 나아오기보다 고집스럽게 이전 세대에서의 삶을 고수하는 인생입니다.
반면에 빛으로 나아오는 자는 스스로 그렇게 하였다기보다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럴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요한복음은 예정론적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빛으로 나아온 자, 진리를 따르는 자들의 행위는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아 진리로 나아오게 되고 빛으로 나아오게 된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리는 거듭남의 역사, 물과 성령으로 전적으로 새롭게 태어남의 역사, 십자가에 들린 예수를 놋뱀 바라보듯이 진실한 믿음으로 바라보게 된 것 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 안에서 행하게 된 것입니다. 자의로 되어진 것이 아니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게 된 역사조차도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입니다.
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 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여러분들의 간증이요 찬송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를 믿어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시는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시작한 영생의 삶, 곧 천국에서의 삶을 이땅에서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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