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5월17일 동산교회 설교
내 아버지의 집 (요 2:12-25)
지난 수요예배 때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쳤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해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교하면서 조심스런 부분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강조하는 십자가가 자칫 윤리적 가르침으로 흘러가는 것이었습니다. 왜냐면 갈라디아서는 죄 문제 해결을 위한 속죄의 죽음으로서의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강조하면서도 뒷부분에서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일 뿐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확연히 달라지는 바 이전에 몸담고 살아가던 일체의 세상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새 창조함을 입고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었음이 갈라디아서에서 강조됩니다. 이것 자체가 윤리적 가르침이요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새 창조의 삶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하는 십자가에는 바로 그런 윤리적 가르침이 포함돼 있습니다. 십자가로 말미암은 죄 용서함과 구원뿐 아니라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전과 전혀 다른 삶에 대한 강조입니다. 십자가의 윤리적 측면이 정통파 개신교도인 우리에게 더욱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만 이것만을 붙드는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 또한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이러한 윤리적 의미를 실천하기 위해서 꼭 예수를 믿어야만 할 것인가?’는 물음을 종교다원주의자들이 제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자아중심적이고 세상적 흐름에 따라 헛되고 헛된 것들을 추구하던 사람이 어느 날 큰 깨달음을 얻고 이렇게 살아가서는 안되겠다는 결단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자신의 양심에도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특별한 계기로 발견하고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십자가를 발견한 것은 아닐까요?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아닐까요? 꼭 예수를 구원자로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인생의 큰 깨달음을 얻어서 이전 세상의 가치관을 멀리하고 자아중심적 이기주의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십자가를 발견하고 십자가를 붙든 것은 아닐까요? 예수 믿음과 관계없이 십자가를 붙드는 삶이요 십자가라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전의 삶에 대한 죽음을 경험한 것이 아닐까요?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욕심을 버리고 십자가를 붙들고 살아가는 삶이 이런 오해를 받지나 않을까, 우려했던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신실하게 믿는 신심 좋은 신앙인 중에도 다른 사람과 연결돼 있음을 깨닫고 개방적인 마음의 태도로 연대하면서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저명한 스승 중에도 중생들을 사랑하고 삶의 진리를 깨닫고 현 세상의 가치를 멀리한 채 구도자적인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들도 이전과 이후가 확연히 구분되는 자아의 죽음, 이전 세상의 죽음을 경험한 것이라면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를 발견하고 붙드는 삶이 아닐까요? 비록 예수를 주님으로 구원자로 믿고 고백하지 않았더라도 말입니다.
최근에 코로나 이후 사회,정치,경제,국제간 신 질서가 어떻게 펼쳐질지에 대한 전망이 언론에서 우후죽순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사회에서 종교, 특히 기독교가 어떻게 변화될지, 그리고 변화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가끔씩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길희성이라는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명예교수가 계십니다. 이분은 개신교인으로서 비교종교학을 공부하고 카톨릭대학교인 서강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은퇴한 후 사재를 털어 강화도에 심도학사를 열었습니다. 심도학사는 종교의 경전과 인류의 고전을 함께 연구하면서 소위 삶의 길(道)을 찾는 곳입니다. 이분은 말합니다. 코로나 이후 교회가 나아갈 방향에 관해서 말하기를, “제도 종교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이제는 종교에서 영성으로 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미 서구에서도 제도화된 종교를 외면하기 시작했는데 유독 한국에서만 제도화된 종교들이 성업 중이라는 것입니다. 코로나 이후 한국 종교도 제도화된 종교가 아니라 영성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되지 않겠냐는 겁니다. 그렇다면 종교란 무엇이고 영성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합니다: “종교는 본래 제도나 조직을 위해 생겨난 게 아니다. 사람들의 목마름, 사람들의 근원적인 갈망을 채워주기 위해서 생겨났다. 그게 영성이다. 예수도 그랬고, 붓다도 그랬다. 영성을 중심에 두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종교에서 ‘영성’이 빠져버렸다. 그 자리를 종교의 제도와 조직이 대신했다.” 덧붙여 말하기를 그러나 “인간은 종교를 벗어나 살 수는 있지만, 영성 없이는 못 산다. 이 광대한 우주에서 내가 왜 여기 있나. 그 이유가 뭔가. 온갖 질문을 던지는 존재다. 이러한 물음의 답을 찾아가는 게 영성이다. 그래서 영성은 종교의 핵심이자 존재 이유다.”라고 영성이 제도화된 종교에 대해 갖는 우월함을 말합니다.
전형적인 종교다원주의자의 생각입니다. 수년 전에 길희성 교수의 지인이 모친상을 당했는데 그 지인은 크리스천이었지만 고인, 그러니까 어머니는 불교 신자였습니다. 이분에게 장례 예배를 부탁했습니다. 길희성교수는 고민 끝에 장례 예배 때 고인을 존중하는 의미로 ‘반야심경’을 미리 몇십 부 복사해서 가져갔습니다. 아무래도 상주가 기독교인이다보니 장례 예배에는 수십 명의 교인이 참석했습니다. 길희성교수는 설교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인은 평소 사랑을 많이 베푸셨습니다. 반야심경에 등장하는 ‘공(空)’은 다름 아닌 사랑입니다.” 그리고 추모객들에게 한글 반야심경이 적힌 종이를 한 장씩 나누어주고 함께 읊었습니다. 처음에는 교인들이 당황했지만 추모객들도 모두 따라서 낭송했습니다. 길 교수는 “처음에는 걱정도 좀 했는데, 뒤로 갈수록 목청이 더 우렁차더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 “아제아제 바라아제” 대목에서는 쩌렁쩌렁할 정도였습니다. 장례 예배가 끝난 뒤에 추모객들이 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은혜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기독교를 이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을 읽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복음서에 모두 실려 있는 예수님의 일화입니다. 유월절이 가까이 오자 갈릴리의 여느 순례객처럼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유월절 규례를 지키고자 함이었습니다. 공관복음과는 달리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으로 보도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반면에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마지막 주간, 고난주간에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에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날에 성전에서 성전을 청결케 하는 소위 성전 정화를 하셨다고 보도합니다. 그래서 보수적인 어떤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 초기에 성전에서 잘못된 모습을 보시고 분노하셨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도 동일한 모습을 보고서 또다시 분노하셨다고 말합니다만,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보도는 꼭 연대기적으로 보도하고 있지는 않고 주제별로 묶어 나오는 것도 있습니다. 아마 공관복음이 말하는 시기, 즉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던 그 주간에 성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시고 분노하시고 성전을 정화하셨을 걸로 생각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일화를 앞부분에 배치한 이유는 예수님이 행하신 첫 번 째 표적, 북쪽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이나 남쪽 예루살렘에서 기존의 종교체제의 중심인 성전체제를 정화하시고 정화할 뿐 아니라 새롭게 대체하시겠다는 말씀이 기존의 유대교 체제가 아닌 전혀 새로운 체제를 가져오신 새로운 시대의 도래라는 주제별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잔치와 함께 요한복음 2장에서 함께 소개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서니까 성전이 거대한 장터가 돼 있음을 보셨습니다. 당시 여러 종류의 돈을 사람들이 사용했는데, 로마의 데나리온이나 헬레니즘의 드라크마와 같은 동전을 성전에서 성전세로 낼 수는 없으니까 성전에서 통용될 수 있는 세겔로 바꿔주는 환전상이 성전 경내에 있었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 대왕이 오래 전에 건축을 시작하고 지금 예수님 시대에도 계속 건축 중인 거대한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헤롯 성전은 기원후 63년에나 완공을 할 수 있었는데 그후 66년부터 발발한 예루살렘 전쟁, 로마에 대항하는 유대 민족주의 열심당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서 대략 70년에 완전히 성전이 파괴됩니다.
이처럼 거대한 헤롯 성전에는 큰 규모의 이방인의 뜰이 있었는데 거기가 완전히 시장 바닥이 된 것입니다. 환전상들은 돈을 바꿔주고 거기서 수수료를 챙기고 환전상들이 성전 경내에서 돈을 바꿀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준 성전 당국자들도 아마 이득을 챙겼을 것입니다. 더 큰 규모의 경제는 동물 제물과 관련되어 얻는 이익이었습니다. 유월절 규례대로 절기를 지키고자 성전에서 동물 제사를 드려야 했는데 제사의 제물을 가령 저 멀리 갈릴리에서 삼일길을 걸어서 오는 예배자가 자신이 기른 양이나 염소 중에서 하나님께 제사로 바칠 좋은 것들을 골라서 왔는데 며칠 길을 걸려서 예루살렘에 와보니까 싱싱함은 사라지고 제물로서 자격이 박탈될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한 것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때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이 성전 경내에서 제사 제물로 적합한 동물을 판매하는 것입니다. 성전 당국자들이 오랜 토론을 거쳐서 마침내 성전 경내에서 제사에 적합한 동물을 판매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제사장들이 이 동물들을 어디서 가져옵니까. 예루살렘 인근에 있는 성전 직영 농장에서 가져옵니다. 부자들은 소를 제물로 가져오고 중산층은 양이나 염소를 가져오고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가져옵니다. 가령 100만원짜리 소를 저 북쪽 갈릴리에서 가져왔는데 와서 보니까 제자에도 적합하지 않고 상태가 썩 좋지 못해서 성전에서 80만원에 사들이고 대신 질 좋은 동물을 130만원에 판매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순례객들은 경제적 손실이 만만찮고 배를 불리는 쪽은 성전 당국자들입니다. 성전 당국자의 최 정점에 대제사장이 있습니다. 완전히 성전이 경제공동체, 독과점 이익업체가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경제적 체제를 인식하고 성전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알고서 지금 성전 안에서 채찍을 휘두르시고 거의 난동 수준으로 소란을 피시고 계신 것입니다.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보여주시려는 것이죠. 예수님께 어떠한 행동을 하셨습니까? 그리고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14-16절을 보십시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성전은 “내 아버지의 집”인데 ‘아버지의 집’이 “장사하는 집‘, 직역하면 ‘상인의 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환전상도 불가피하고 흠없는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점에서 성전 경내에서 흠있는 동물을 구매해주고 흠없는 동물을 판매하는 효율성과 편리성, 그리고 불가피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면면히 흘러가고 있는 경제체제와 돈의 움직임을 들여다보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성전체제를 책망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라는 표현은 예수님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민의식을 지니고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만, 언제나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렀지 ‘내 아버지’라고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내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지칭하시는 겁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유일무이하신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님에 대한 강조입니다. 유일하신 아들, 혹은 맏아들로서 ‘내 아버지의 집’이 ‘상인의 집’이 된 현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분노하고 계시는 겁니다.
아까 말한 서강대 종교학과 명예교수인 길희성교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말하기를 “기독교는 예수만 하느님(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양자는 될 수 있지만, 예수만 본성상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나는 크리스천이다. 나는 예수만 그렇다는 배타적 생각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인간을 품는 예수의 메시지를 후대의 기독교가 좁혀버린 것이다.” 이어서 말합니다. “자비로운 불교 신자가 탐욕스런 목사보다 낫지 않나. 또 겸손하고 사랑을 베푸는 크리스천이 탐욕스런 주지 스님보다 낫지 않나. 가령 예수를 닮은 불자, 부처를 닮은 크리스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얼마나 좋나.”
여러분 좋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로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의 집’이 더러운 이득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보고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고 계십니다. 이 현장을 본 일부 예수님의 제자들이 구약성경 말씀을 생각해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시편 69편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어떠한지, 아버지의 집을 향한 열정이 어떠한지, 제자들이 본 것입니다. 결국 성전에 대한 이러한 열정 때문에 예수님은 성전모독, 신성모독으로 성전 당국자들에 의에 십자가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거룩한 분노를 보고서 성전 당국자들은 적지않게 당황합니다. 순결하고 온유하신 분이 터뜨린 분노는 신경질적인 사람이 자주 내는 분노와는 확연히 다르겠죠.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18절) 도대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는 거냐, 무슨 신적 권세라도 네가 가지고 있는 거냐, 그렇다면 그런 권세를 지니고 있다는 증거가 있느냐, 무슨 보여줄 기적이 있는 거냐고 혹시나 해서 묻고 있는 겁니다.
이들의 질문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다소 아이러니가 가미된 대답을 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여러 의미로 전달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안그래도 ‘내 아버지의 집’을 ‘상인의 집’으로 만들고서 온갖 탐욕을 채우는 너희들이 안그래도 성전을 헐어가고 있는데, 그렇게 계속 해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복원시켜놓겠다. 진정한 성전을 만들어주겠다. 이런 말씀으로도 읽히고 ‘내 아버지의 집’에 대한 열심을 가지고서 내가 이렇게 성전 체제를 흔드니까 너희들이 아마 나를 죽이지 않고 배길 수 없을 터지만 나를 죽여봐라. 내가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그렇게 해서 내가 진정한 성전을 세우겠다. 이런 의미로도 읽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참된 성전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기도하고 교제하고 교통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깁니다. 참된 성전으로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죄사함을 가져다주시므로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갈 새롭고도 산 길이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의 죄용서함을 받고 용서받은 자로서 다른 사람들도 용서해주고 함께 어울려서 화해하고 교제하는 성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이름 자체가 벌써 성전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불렀는데 지금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예수님이 성전인가 아닌가를 알려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불렀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면 예수님은 성전인 것입니다. 기도가 바로 예수님의 육체가 성전됨을 확신하는 증거가 됩니다.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를 향한 이러한 사랑과 열정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원래 취지대로 운영되지 못하고 바로 서있지 못함으로 인해서 아들로서 자녀로서 갖게 되는 의분, 우리가 이것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분노도 없는 법입니다. 이것이 아버지 사랑이요 주님 사랑이요 주님의 몸된 교회 사랑입니다. 이러한 열심을 회복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자시오 우리의 주님이심을 다시금 고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도행전 4장 11-12절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려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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