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19일 동산교회 설교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인 (행 11:19-26)
우리나라에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완연한 감소세로 돌아서서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러나 세계 상황은 여전히 심각합니다. 미국 뉴욕 요양원에는 시체가 즐비하다고 합니다. 한 언론 보도에 의하면 뉴욕에서만 2500명 넘게 요양원에서 숨졌으며, 지난주에만 그 숫자는 1000명을 웃돌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요양원들이 이러한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을 은폐해와서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소자의 가족들조차 요양원 내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고 합니다.
유럽 역시 상황이 여전히 심각합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는 사망자수가 2만명을 넘어섰습니다. 의료적 대처가 불가능한 소위 의료 붕괴까지 이르렀습니다. 의료진으로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한 이탈리안 의사가 쓴 글이 최근에 잔잔한 감동이 된 적이 있습니다. 3월 23일에 알려진 내용인데요, 제목이 '나는 이제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믿습니다'입니다. 지난 3주간 의료진으로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고서 쓴 글입니다. "처음에는 몇명이 병원으로 실려왔고 그 다음은 몇 십명 그리고 몇백명이 몰려옵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의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누가 살 수 있고, 누가 죽음을 맞으러 집으로 보내져야 하는가'를 결정하고 라벨을 붙이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2주 전까지만 해도 나와 내 동료들은 무신론자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내 부모님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9일 전 75세의 한 목사님이 바이러스 확진자로 우리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주위의 죽어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줄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성경을 읽어주곤 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고백할 수 있습니다. 한낱 무력한 인간인 우리들은 매일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이 상황에 대하여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한계에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끝나는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짧은 몇 분의 휴식 시간이 주어질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얘기를 나눕니다. 치열한 무신론자였던 우리가 지금 매일 우리의 평강을 구하고 우리가 환자들을 잘 돌볼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주님께 구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가 없노라고 말입니다... 나는 지금 이땅에서 나의 무익함을 깨닫지만, 나의 마지막 호흡을 다른 이들을 돕는데 줄 수 있기 원합니다. 나의 나의 동료들의 죽음과 그들의 고통에 둘러싸여 내가 하나님께로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이 넘칩니다." 율리아나 우르반이라는 의사의 간증 글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용한 한 음악회, 음악회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하고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세계적인 성악가와 파이프오르간 연주자 단 두 사람이 거대한 밀라노의 한 성당에서 한 사람의 관객도 없이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이라는 공연을 최근에 했습니다. 아마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코로나로 고통을 받고 있는 인류를 치료하고 음악 안에서 위로와 소망을 전달하고자 기획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음악회 실황을 유트브에 올린 영상 조회수가 어제 보니까 전 세계적으로 3700만뷰가 넘었습니다. 약 25분 정도의 짧은 공연이었는데 참으로 감동적인 음악회였습니다. 잇달아 부른 곡 중에서 맨 첫곡은 ‘생명의 양식’이라는 노래였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맘이 빈 자에게 내리워주소서 낮고 천한 우리 긍휼히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라는 이 곡은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고요하지만 웅변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밀라노 대성당 안에서 울려퍼지는 노래는 이탈리아가 카톨릭 국가답게 모든 곡이 성가곡이었습니다. 맨 마지막 곡을 부르기 전에 성당 밖으로 나와서 마지막 노래를 했는데 마지막 곡은 찬송가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였습니다. 아마 이 곡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곡이지만 개신교 찬송가였기 때문에 성당 밖으로 나와 부른 듯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하는 찬송으로 음악회의 대미를 장식했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됩니다. 코로나19로 고통받고 지친 영혼들에게 필요한 것이 ‘생명의 양식’이요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자 한 듯 보입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은 존 뉴톤이라는 분이 작사했는데요, 자신의 체험을 녹여낸 명곡입니다. 존 뉴톤이라는 분이 원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영국으로 수송하는 노예운반선의 선장이었는데 나중에 예수님을 믿게 된 후 자신의 과거의 죄를 참회하는 심정으로 작사한 곡이 ‘나 같은 죄인 살리신’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워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1절부터 4절까지 주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주옥 같은 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부르는 찬송가이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많은 신앙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감동을 주고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안디옥교회에 파송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 밖에서 세워진 최초의 교회입니다. 초대교회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경험하고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어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아마 모두가 유대인, 특별히 예루살렘 사람들이었습니다. 초기에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밖에서 보기에 어쩌면 유대교의 한 분파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정한 시간에 성전에 가서 기도하고 성전 체제를 활용했고 보이지 않게 가정 중심으로 모여 성찬식을 조용히 진행했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것입니다. 반면에 정통파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추종하는 나사렛 이단이라고 보았을 것입니다. 이후 예루살렘 초대교회 사람들에 의해 간헐적으로 특정한 이방인에게 복음이 증거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 빌립 집사에 의해서 절기 때 예루살렘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이 증거되었고, 하나님은 사도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고 지시하여서 로마군대의 백부장인 고넬료 가정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에 보면 안디옥 지방에서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됩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안디옥교회는 이방인 중심의 최초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성을 띤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태동되게 되었는지 오늘 본문은 간단하게 말씀합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던 스데반이 돌로 맞아 순교했죠. 이때 일어난 핍박으로 인해서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베니게’는 페니키아 지방을 가리키는데 두로와 시돈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북쪽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면 시리아의 안디옥이 있습니다. 터키 내부에 있는 비시디아 안디옥과 구분하기 위해서 시리아(수리아)를 붙여서 보통 표기하는데 여기서 안디옥은 시리아 안디옥을 가키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가까운 섬이 구브로섬입니다. 베니게, 안디옥, 구브로에 이르러 흩어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하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이 중에, 그러니까 예루살렘에서 흩어진 성도 중에 특별히 구브로섬 출신과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 사람들이 안디옥에 이르렀는데, 안디옥에서 본격적으로 헬라어를 말하는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구레네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죠.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짊어져야 했던 바로 그 사람이 구레네 출신입니다. 하여튼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이름은 기록되지 않은 구브로 사람과 구레네 사람이 안디옥에서 이방인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전한 복음은 “주 예수를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이 효과적인 결과를 산출했습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주 예수를 전파했을 때 ‘주의 손’은 권능의 손이요 성령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고 본적도 없는 헬라인들이 오직 성령의 권능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디옥에서 이방인들로 이루어진 교회가 최초로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에 세워진 교회를 목회하게 하려고 바나바를 파송했습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바나바를 안디옥교회에 파송한 것은 참으로 적절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 구브로섬 출신이었는데 바나바 역시 구브로섬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바나바는 별명이죠. 본명은 요셉이고 레위 지파 사람인데 이분이 예루살렘교회에서 믿음으로 인정 받는 분이었습니다. 자신의 밭을 팔아서 예루살렘교회에 헌금했고 교회 안에서 하도 위로와 격려를 잘해서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이라는 뜻에서 사람들이 그에게 바나바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이기 때문에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을 보낸 것입니다. 바나바가 안디옥에 이르러서 그들의 모임에 참여했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여기서 “권하니”라는 말도 바나바라는 이름의 뜻처럼 위로하다, 격려하다, 권면하다는 뜻입니다. 바나바는 자신의 이름처럼 안디옥교회에 이르러서도 위로하고 격려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러서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교회 목회자로서 성도들에게 이러한 은혜 안에 머물러 있도록, 특별히 주님과 함께 머물러 있도록 격려하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나바가 보았다고 한 ‘하나님의 은혜’는 아마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예수님께로 돌아오게 되어서 이전의 우상숭배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게 된 것과, 이전의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그들의 변화를 보고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위로의 사람’, ‘격려의 사람’으로서 바나바는 인품이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을 안했는데 ‘왜냐하면’이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23절에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에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고 그래서 더욱 기쁜 마음으로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이 은혜 안에 머물러 있으라고 주 안에 계속 머물러 있으라고 권면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나바라는 사람이 ‘위로의 아들’, ‘격려의 아들’ 답게 착하고 선한 사람이요 성령충만, 믿음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큰 무리가 더하여지는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보고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성품이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한 것과 성도들에게 믿음의 권면을 하는 것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훌륭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자기가 안디옥교회를 목회하면서 부족한 부분을 어떻게 채울까를 고민한 사람입니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안디옥교회에 몰려오는 부흥을 경험하고서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적임자를 찾은 것입니다. 사울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핍박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고꾸러지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믿게 되자마자 다메섹에서부터 예수님을 전하고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기존의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을 받아들이기를 주저했습니다. 바울이 거짓 전향을 해서 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려고 하는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도들도 사울을 만나기를 주저했을 때 사도들에게 사울을 연결시켜준 분도 바나바입니다. 아마 바나바는 이전에도 예루살렘과 회당에서 사울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친분이 있던 사울을 떠올린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오는 안디옥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줄 수 있는 적임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고심하다가 사울을 찾게 된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복음을 전하자 기존 교인들의 꺼려함뿐 아니라 정통파 유대인들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길리기아 다소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10년이 지났습니다.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 받은 사울이 10년 가까이 고향땅에 파묻혀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거기 고향땅에서도 복음을 전했겠죠. 그러나 자신의 소명은 ‘이방인을 위한 사도’인데 아마 본인도 여러 가지로 어떻게 그 소명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바나바가 사울을 찾은 것입니다. 안디옥에서 터키 길리기아 다소까지는 뱃길로 160km가 넘는 먼 지역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을 불러다가 공동 목회를 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 25-26절을 보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울을 불러온 데서 바나바의 인품과 그릇됨을 확인하게 됩니다. 사울이 안디옥교회에 와서 얼마나 잘 말씀을 가르쳤겠습니까. 1년간 공동목회하다보니 안디옥교회가 얼마나 양질의 성장을 했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것이겠죠.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 집중된 성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께만 충성된 사람이라는 외부의 평가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에다 접미사를 붙여 만든 신조어인데 2세기까지 외부에서 교인들을 부르는 칭호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내부적으로 ‘형제’, ‘성도’ 등으로 서로 불렀고, 외부인들이 교인들을 향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2세기가 지나서 교인들도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칭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에서 은혜를 아는 것이 어쩌면 제일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격해서 신앙생활하고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척이나 중요합니다.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간적인 매력이 있었던 대통령이 누군가 생각해보면 버락 오바마가 아닐까요. 최초의 흑인 출신 대통령이었던 그는 평범치 않은 출생과 성장환경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케냐 출신 미국 유학생이었고 어머니는 미국 백인이었습니다. 결혼해서 낳게 된 아들을 두고서 두분은 곧 이혼했습니다. 어머니가 오바마를 길렀는데 그후 어머니가 인도네시아 사람과 재혼해서 오바마는 유년 시절을 인도네시아에서 자라야 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모양은 마냥 흑인인데 인도네시아 양아버지와 백인 어머니라는 흔치 않은 조합의 가정이니까 어머니는 오바마를 자신의 친청으로 보냅니다.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하와이에서 살고 계셔서 거기서 유년 시절을 지내게 됩니다. 다행히 그의 조부모가 훌륭하게 그를 양육해서 반듯하게 자라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특이한 성장 환경이 포용과 공감의 캐릭터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2015년, 두 번의 대통령 임기의 막바지에 미국 사우스캐롤나이나주 찰스턴이라는 조그만 도시에서 총기사건이 발생합니다. 백인우월주의자가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교회에 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한 것입니다. 핀크니목사와 8명의 성도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조용한 도시였던 찰스턴시에 긴장이 감돌았습니다. 수많은 흑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인종주의자의 총에 죽임을 당한 흑인들을 추모했고, 자칫하면 흑백갈등으로 비화될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였습니다. 이때 장례위원회에서 오바마대통령에게 장례식 추도 연설을 부탁합니다. 재임 내내 자신이 흑인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지 않았던 오바마가 자신의 임기 막바지에 무고하게 희생당한 흑인들의 장례식에서 어떠한 연설을 할 것인가에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습니다. 오바마는 다음과 같은 신앙의 말로 연설을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찬양과 영광을 드립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견디어내고 보이지 않는 것에 믿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들은 죽음의 순간에도 여전히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들은 약속된 것들을 얻지 못하였다. 이들은 단지 그들을 멀리고 보고 환영해주었다. 그들을 이 땅의 타국인이자 이방인으로 받아주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믿음으로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을 추억하기 위해 왔습니다. 보이지 않은 것을 믿은 사람....미래에 더 나은 날들이 있다고 믿은 사람...인내를 하는 사역을 맡은 사람.”, 이라고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던 핀크니 목사님을 우선적으로 추모합니다. 그리고서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에게 미국땅에서 교회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감동적으로 역사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나서 다음과 같이 연설을 마무리합니다. “미움에 눈이 멀어 살인용의자는 핀크니 목사님과 성경공부반을 둘러싸고 있는 은혜를 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교회문을 열고 이 낯선 이를 기도모임으로 인도했을 때 빛나던 사랑의 빛을 볼 수 없었습니다. 살인용의자가 고인의 가족들을 법정에서 마주쳤을 때 가족들이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결코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의 한가운데서 용서의 언어를 건네었습니다. 그는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증오에 눈이 멀어 핀크니 목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하나님 은총의 능력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번주 내내 저는 은혜에 대해 성찰해보았습니다. 사랑받던 이들을 잃은 가족의 은혜. 핀크니 목사가 설교에서 전했던 은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에 있는 은혜. 우리 모두가 아는 노래 어메이징 그레이스!”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오바마가 연설 도중에 직접 부르자 스타디엄과 같은 큰 곳에 모여든 수많은 군중들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함께 ‘나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합창을 하였습니다. 노래를 다 부르고서 숨진 9명의 이름을 직접 부르며 그들도 이 은혜를 발견했다고 일일이 열거했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의 삶을 통해 은혜를 우리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우리 삶이 다하는 그날까지 그 고귀하고 특별한 선물의 가치를 알게 되기를. 은혜가 그들을 집으로 인도하기를. 하나님이 은혜를 계속해서 미국에 내려주시기를” 이렇게 연설을 마쳤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교의 핵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리시도인다움 핵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우리는 그래서 그리스도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그 은혜의 감격속에서 신앙생활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 은혜의 능력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서 변화의 능력이 되어서 세상속에서 그리스도인이라 칭함 받고 인정되는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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