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일 1부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6월28일 동산교회 설교
장벽을 넘어선 만남 (요 4:1-18)
오늘 본문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과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나섰습니다. 우연히 만난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가서 만나셨습니다. 유대에서 세례요한의 회개 표시로서의 세례운동과 유사하게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이 불필요한 마찰과 오해를 받을 소지가 생겼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본격적인 갈릴리 사역에 임하고자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에서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초기 유대 사역을 생략하고 세례요한이 잡힌 후 갈릴리에서 시작한 하나님나라 운동으로 복음서를 시작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대 지역 사역이 중심이 됩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빠른 길은 중간에 있는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빠른 길이지만 고지대이고 길이 상대적으로 험하다보니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서 요단강을 건너 요단 동편땅에서 북쪽으로 올라가서 이후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갈릴리에 가곤 했습니다. 이 길은 걷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했으나 멀리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까운 길을 놔두고 굳이 우회하는 길로 북쪽으로 갔냐면 사마리아땅을 통과하지 않으려는 게 큰 이유였습니다. 사마리아나 유대나 로마 총독의 지배 아래 있는 곳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어느 때부턴가 큰 장벽이 세워져 마치 우리 남북한이 철책선으로 분단되었듯이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사마리아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마 유대 지역에서 이른 아침에 출발하셨던 예수님이 정오쯤 되어서 사마리아 수가성의 한 우물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그때 물 길러 온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습니다. 굉장히 더운 그쪽 지역에서 대낮에 물 길러 왔다는 점에서 이 여인은 뭔가 수상한 구석이 있는 여인입니다. 뭔가 사연이 있는 여인입니다.
대화가 시작됩니다. 대 여섯 시간 땡볕 받으며 길을 걸으셨던 예수님이 우물가에서 물을 구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마침 물 길러 온 여인도 있으니까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습니다. 의미심장한 멘트입니다. “물 좀 주소!”
자유로운 영혼 가수 한대수가 부른 ‘물 좀 주소’라는 노래는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로 시작합니다. 3절 가사는 “물 좀 주소 물 좀 주소 목마르요 물 좀 주소 그 비만 온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리 아! 그러나 비는 안 오네”, 상당히 절망적이고 비관적인 시대 상황과 관련돼서 읽히는 노래입니다. 목마르신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셨지만 원래 목마름과 갈증은 피조물이라면 불가피한 현실입니다. 창조주께서 비록 인성을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다고는 하나 목마르다고 하시는 말씀이 의외로 들립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는 거겠죠. 피조물의 입장에 서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목마르시지만 실제로 목마른 입장은 아마 이 여인입니다. 남들 시선 의식하면서 아무도 찾지 않을 때 마을 공동의 우물로 와서 물을 뜨러 온 여인, 지루하고 반복되고 고된 일상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여인, 매일 가족을 위해 우물을 뜨러 왔다면 그나마 보람이 있을 텐데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지 못한 채 매일 우물을 뜨러 오는 일이 지겨운 반복이요 고된 일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여인, 이 여인이 진정으로 목마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물 좀 달라고 부탁하자 여인은 놀랍니다.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부탁해서 한 번 놀라고, 또 한 번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네고 부탁해서 놀랍니다. 당시 사마리아의 베두인들은 천막치고 유목 생활하던 사람들이라 여인들은 얼굴 뿐 아니라 온 몸을 가려야 했습니다. 남편을 제외한 남자와 대화하는 것도 금했습니다. 유목민적 환경에서 가정을 보호하는 일종의 장치였지만 여성 억압적 차원도 있었겠죠. 예수님은 두가지 사회적 장벽을 단숨에 뛰어넘어서 여인에게 말을 건네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물 좀 달라고 하셨을까요? 물론 본인이 목마르시니까 그러셨겠지만 진정한 목마름을 느끼는 여인과의 만남에 있어서 일종의 접촉점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는 사회적 지위와 명성을 지닌 인물이었기에 어떤 갈증이나 목마름, 자신의 필요가 채워지지 못했다는 불만족감은 없었습니다. 그에게 문제는 오히려 그러한 자기 만족, 자충족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고 직선으로 나아갔다면 이 여인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다른 방식을 취합니다.
늘 목말라하고 늘 허기지고 늘 채워지지 않은 공허감속에서 살아온 여인에게 가장 좋은 접근은 그녀의 필요와 관심사를 당근으로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여인이 대화에 뛰어드는 거겠죠. 그래서 예수님은 ‘물’로 대화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물’로 시작된 대화가 ‘생수’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화제로 꺼내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비록 지금 내가 너에게 물을 구하는 처지지만 네가 만약 내가 들고 온 하나님의 선물을 알았다면, 또 그 선물을 가져온 내가 누구인 줄 알았다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그 선물을 요구했을 것이다. 그 선물이 뭐냐면 이 우물물과 비교도 안되는 샘솟듯 솟아올라 흐르는 신선한 생수다!’
유독 선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왜 선물을 유달리 좋아하냐면 선물을 별로 받아본 적이 없어서겠죠. 사랑을 받고 싶은 마음이기도 하고, 마음의 빈자리를 물질로 채워보고 싶은 마음도 들겠고, 선물을 전해준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는 것으로 기뻐하는 사람의 심리도 있겠죠. 사람들은 선물을 좋아합니다. 특히 필요가 채워지지 못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누군가 자신을 위해서 선물을 주면 너무 좋고 고마워하겠죠.
예수님의 대화법, 단어 선택, 접근 방식, 장벽을 무장해제시키는 방법,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됩니다. 뜻이 있는 곳에 발견된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니고데모들에게 설교할 때와 사마리아 여인들에게 설교할 때는 분명히 달라야겠죠.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반성이 되었습니다. ‘내가 그동안 니고데모들에게 설교했구나’ 제가 좀 니고데모거든요. 그런데 대부분은 사마리아 여인들인데 말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에 한 번 귀가 솔깃했고, ‘생수’라는 말에 다시 귀가 솔깃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의 대화가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여인이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대화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생수’는 끊임없이 솟구쳐흐르는 샘에서 솟아나와 흐르는 살아있는 물을 가리킵니다. 고여 있는 우물과는 다른 물입니다.
‘생수’라는 말을 듣고 여인은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아마 예수님이 땅도사나 땅을 살피는 지관인 것처럼 보인 게 아닐까요? ‘나는 이 마을의 공동의 우물, 야곱의 우물 밖에 모르는데 이 분은 수맥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도사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한 듯합니다. 아니면 허풍쟁이거나 자신에게 사기를 치려고 수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닐까, 복잡한 심경이 내비쳐집니다. 여인이 뭐라고 예수님께 대답합니까?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우선은 조롱조가 담겨있습니다. ‘깊이 땅을 파서 물 근원을 찾아내서 우물을 만든 건데, 그 깊은 곳에 어떻게 이르러 생수를 얻겠냐는 겁니다. 게다가 유대인은 당신에게는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천상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사마리아 사람인 내 것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러실 수 있겠소?’라며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회의적입니다.
여인은 이 우물의 전통, 전승을 알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야곱이 팠던 우물, 혹은 그 아버지 이삭이 팠던, 소위 뼈대있는 우물, 이 우물은 마을의 자랑이요, 사마리아인들에게는 모세오경만을 정통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 성경속 유서깊은 장소인 프라이드가 강하게 느껴지는 발언입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인만 프라이드, 자긍심이 있는 게 아니라 사마리아사람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까지 구약성경에 나오는 그대로 유월절 절기를 정확하게 지키는 사마리아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는 게 유대인들에 의해서 차단되자 보란 듯이 더 멋지게 그리심산에다 성전을 지었던 사마리아사람들입니다. 구약 창세기의 족장들의 삶의 발자취가 남아있고 그들의 후손으로서 그 삶을 이어서 같은 생활 터전에서 살고있다는 자부심입니다.
예수님이 던진 ‘생수’라는 말에 여인이 관심을 보이자 예수님께서 더 진전된 대화로 이어가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 우물에서 물을 뜨는 일은 매일 반복해야 하고, 이 물을 오늘 마셔도 내일 또 목마른 게 인생인데, 그게 우리가 먹는 이 물인데, 내가 주는 물, 아까 말한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인생의 해갈의 문제를 단번에 해결해주시는 영생을 가져다주시는 생수다,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굳이 찾아오셔서 주시고자 하시는 선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보냄을 받아서 이 여인을 굳이 만나러 오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은 바로 생수 곧 영생의 샘물, 곧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자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고 모시고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이땅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 이것이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니고데모처럼 이 여인도 늘 물질적 필요, 자연적 생명, 이땅에서의 삶의 관심사에 붙잡혀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자신의 식대로 이해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을 말씀하시는데 이 여인은 여태까지 살아왔던 삶의 방식과 가치 체계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자꾸 유사 구원에 만족하려고 한단 말이에요. 진짜 구원 필요 없으니까 유사 구원을 달라는 겁니다. 아까 말한 생수, 주시면 너무 좋겠다는 겁니다. 왜냐, 사람들 시선 의식할 필요도 없이 대낮에 땡볕 받으며 무거운 물 실어나르는 고생 안해도 되고 편하게 살 수 있지 않냐는 겁니다. 시선이 현세에 고정돼 있어요. 눈이 이땅에만 국한돼 있어요. 영생이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고 너무 멀리 있어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거예요, 지금 이 여인의 관심사는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벗어나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 인생의 목마름이 해갈될 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이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고 있는지, 자신의 가치체계가 어떠한지 드러내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여인의 삶의 방식, 인생의 목마름을 어떤 식으로 돌파해왔는지,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정한 해갈을 얻지는 못해서 늘 불만족 가운데 살아왔는데, 여전히 지금 예수님과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추구와 고집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추구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여태까지의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예수님이라는 낯선 남자와의 만남에서 이 여인이 지금 기대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지긋지긋한 일상에서의 탈출, 현실 도피의 다름아닙니다. 이것이 사마리아 여인이 생각하는, 곤궁과도 같은 자신의 삶에서의 구원이었습니다. 이러한 구원, 유사 구원이죠. 유사 구원을 추구하는 삶, 이것이 진정한 해갈의 지름길이라는 착각을 가지고 평생을 그렇게 추구하여 살아온 거죠. 비로소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진정한 인생의 거울을 발견한 겁니다. 오늘 처음으로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춰보게 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결정타를 날림으로써 말입니다.
본문 16절입니다.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결정타입니다. 이걸로 게임 끝입니다. 왕년의 인기 여배우 김지미씨가 기자회견에서 4명의 남편에 대해 평을 해달라고 하니 웃으면서 한 말이 "그놈이 그놈이다"였습니다. 김지미씨의 첫 남편은 당대의 명감독 홍성기씨였고, 두번째 남편은 최민수씨의 아버지 배우 최무룡이었고, 세번째 남편은 인기가수인 나훈아씨였고, 네번째 남편은 심장내과 전문의인 이종구씨였습니다. 다양한 직업과 개성을 가진 사람들인데 “그놈이 그놈이다”가 삶의 진실인 듯합니다. 가끔 아주 신실한 여자분들이 만약 다음생이 있어서 다음생을 살게 된다면 나는 다시 우리 남편이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현실을 정확히 짚고 계신 것 같습니다.
이 사마리아 여인도 삶의 궤적이 비슷합니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고 답하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17-18절)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부러 만나기 위해서 찾아온 여인에 관한 정보를 우리가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생각이 듭니까? 이해하고 싶다기보다 뭐 저렇게 살아가나, 이런 마음이 더 들 것입니다. 기구한 삶은 알겠지만 평범치 않은 삶을 자초한 여인이라는 판단이 더 들지 않습니까? 언뜻 들어도 허망한 삶을 살았구나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도덕적으로 정죄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습니까?
아까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에게 찾아온 것은 인종적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고, 남자가 여자에게 말을 건넨 것은 성의 장벽을 뛰어넘는 일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세 번째 장벽, 사람과 사람과의 만남에서 만남을 포기하게 만들고, 접근을 아예 안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오늘 이 시대에 더욱 중요한 장벽, 소위 도덕적 장벽을 예수님께 지금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 하나님이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이 전달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을 필요로하는 인생과의 만남을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여인에게 둘러쳐진 철벽 방어막과도 같은 장벽을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야 진정한 만남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벽이 제일 거대한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외면했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습니다. 남들에게 내놓기를 꺼려하는 삶의 진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삶의 진실, 여인은 여인대로 항변할 이유들도 가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이해하려기보다 정죄하고 외면하고 소외시키려고 했던 이유 때문에 사람들과 관계에서 높은 장벽으로 세워야 했던 그 장벽조차 예수님께서 뛰어넘고 계시는 겁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 일화를 가지고 두 가지로 우리 신앙과 삶에 적용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이땅에 자신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명,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하려는 목적이 분명하셨기 때문에 그 뜻이 분명했기 때문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기 마련이어서 길을 찾아나선 것이고, 그 고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찾아가는 고생도 자처하시고, 진정한 만남을 가능케하기 위해서 사회적 편견과 장애물과 인생에게 둘러쳐진 장벽도 뛰어넘으셨습니다. 여인을 이해하려고 하셨기에 여인을 아셨고 여인의 관심사를 아셨고 그래서 대화의 접촉점을 지혜롭게 찾아서 결국 생수를 전달하는데 성공하셨습니다.
진정한 만남을 위해서라면 장벽도 뛰어넘어야 합니다. 인격과 인격 사이에는 언제나 장벽이 세워져있습니다. 그것이 편견일 수 있고 어쩌면 본인의 결함이나 문제일 수도 있고 상대방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예수님의 생수는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선물,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 영생을 필요로 합니다. 이 고귀한 복음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벽을 보고 아예 접근 불가, 이러지 마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지혜를 구하여 접촉점을 지혜롭게 발견하시고 조심스럽게 접근하셔서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것을 우리가 삶의 원리로 붙들면 좋겠습니다. 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의 문제를 회복하는데 있어서도, 직장에서 어떤 어려운 과제나 프로젝트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의 지혜와 상상력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뜻이 분명하게 세워져있다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실 것이고 문제의 해결책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둘째, 사마리아 여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봅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신을 객관적으로 비추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삶의 이력과 지나온 과거가 무엇을 추구한 것인지, 왜 인생이 그토록 초라하고 비참하고 목말랐는지를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을 수 있었을 겁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무엇을 추구하고 무엇을 바라고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유사 구원에 안주하고 만족하고 작은 성공에 만족하고, 그것이 마치 인생의 진정한 목마름을 해갈해준다고 착각하고 속은 채 여태까지 살아온 인생은 아니십니까? 진정한 구원, 진정한 생명수, 인생의 온갖 갈증과 목마름을 해결해주실 수 있는 예수님,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나아오십시오. 오늘 하나님을 구하십시오. 예수님을 구하십시오. 성령님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과의 만남을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마음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분에게 여러분의 마음을 여시고 다시 새로운 마음의 각오와 결단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생명수가 강처럼 흘러넘치시는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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