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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6월14일 동산교회 설교
성도의 기쁨 (요 3:22-30)
성경에는 “기뻐하라!”는 명령이 여러번 나옵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에는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쁨이 어떻게 명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명령으로 될 성질이 아니지 않을까요? 기뻐하라는 명령을 계명으로 받는다 해도 마음이 기뻐야 기쁜 것이지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우리보다 오히려 세상 사람들이 더 기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세상 노래가 기쁘게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권면하는 듯합니다.
루이 암스트롱이 부른 “What a wonderful world"라는 노래의 가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나는 푸른 나무와 빨간 장미를 바라봅니다. 그 나무와 꽃이 당신과 나를 위해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나는 아기들이 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들이 자라는 것을 지켜봅니다. 그들은 내가 알려는 것보다도 훨씬 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그래요 나 혼자 생각해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생각해보면 이 노래 가사가 맞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입니까? 요즘과 같이 신록이 우거지는 5월 6월 우리 주위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실제 모습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쁘십니까? 이 멋진 세상을 누리고 계십니까? 자연을 보고 누리기에는 삶이 너무 각박하고 힘들게 느껴지시지는 않으신지요?
가수 김완선씨가 벌써 올해 52세가 되었는데, 여전히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댄스가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춤을 추고 기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인터뷰에서 기자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같은 낙천성과 순진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감사를 많이 해요. 순간순간 감사를 잊지 않으려고 해요. 가장 좋은 친구는 자연이에요. (바깥을 쳐다보며) 저렇게 싱그런 나무를 볼 수 있으니 얼마나 감사해요. 바람은 얼마나 시원한지, 구름은 또 얼마나 어여쁘게 흘러가는지...”(조선일보 2020.6.13.)
가끔은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울 것이 종종 있는데 이러한 마음가짐이라고 할까요? 이러한 태도는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영성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향해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는 “항상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세례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기뻐한 ‘이러한 기쁨’은 어떤 기쁨일까요?
역사적 자료를 들여다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세례요한을 추종하는 공동체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세례나 성령 세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요한의 세례를 아는 요한의 추종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집단도 있었습니다. 세례요한을 메시야로 믿었던 사람들이 내세웠던 주장은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의 세례 운동은 영향력이 컸습니다. 유대 지방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나와서 죄를 고백하면서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전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새롭게 살겠다는 각오로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세례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으셨죠. 세례를 받으실 때 죄도 없으셨던 예수님이 뭐라고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셨단 말입니까? 세상 죄를 자신이 짊어지시고 세상 죄, 하나님을 떠난 세상 죄,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사람들의 죄를 고백하고서 세례를 받으신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것을 눈으로 보았던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아마 속으로, 우리 스승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아니셨지만 죄 고백과 아울러 회개의 표시로 받는 요한의 세례를 받은 이유는 죄인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주는 것을 주저하자 예수님께서 강권해서 세례를 베풀었죠. 세례요한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려고 하셨는지. 그래서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이 나아오시는 것을 보고서 뭐라고 증언했습니까?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이르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유월절 어린양, 도살장에 끌려가는 죽임 당한 어린양, 왜 죽음으로 끌려갑니까? 세상 죄를 짊어지고서, 세상 죄 때문에,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양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세상 죄 때문에, 죄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려고, 세상 죄를 자신의 육체 안에 짊어지시려고 자신에게 와서 세례를 받은 것임을 세례요한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도 우리 스승 세례요한에게서 세례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보다 우위에 서있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세례를 주는 일에 있어서 선구자요 원조라 할 수 있는 세례요한이 후발 주자인 예수님에게 밀리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유대 땅으로 가서 거기 함께 유하시며 세례를 베푸시더라”(22절)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한도 살렘 가까운 애논에서 세례를 베푸니 거기 물이 많음이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와서 세례를 받더라”(23절). 예수님도 세례를 베풀고 세례요한도 세례를 베풀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원조요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세례요한에게 가지 않고 예수님에게로 다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의 제자들이 스승 세례요한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그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분히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분히 여긴 것일 수도 있고 질시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복음을 썼던 요한이나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도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빌립 역시 예수님의 제가가 되기 이전에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마저도 세례요한을 외면한 채 세례 받으러 예수님 쪽으로 몰리고 있으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분노할 만도 합니다. 어찌보면 세례요한은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입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의 제자들의 말에 대해 세례요한은 27절에서 대답합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선택한 자녀들을 예수님께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님에게로 몰려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37절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이미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에게 주시는 선물로 묘사됩니다.
이어서 본문 28절에서 세례요한은 말합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예전에도 내가 너희에게 증거한 것처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서 보냄을 받은 자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해야 할 책임이 너희 제자들에게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세례요한의 제자였던 요한,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요한이 다른 복음서보다 세례요한의 증언,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관계를 더욱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29절에서는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고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세례요한 자신은 마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친구로서 기뻐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랑의 친구’는 결혼식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신랑과 신부가 결혼예식을 위해 지정하여 세운 사람입니다. 보통은 신랑의 친구 중에서 유력한 사람을 세웁니다. ‘신랑의 친구’는 오늘날에 신랑의 들러리이면서 혼인 예식 전체를 주관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기쁨은 ‘신랑의 친구’의 기쁨과 같은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다’는 말은 직역하면 나는 ‘기쁨으로써 기뻐한다’, ‘기쁨으로 기뻐하다’는 뜻입니다. 빼앗겨서 분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신랑을 위해 신부를 준비하고 혼인 잔치를 주관하는 신랑의 친구로서 자신의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메시야로서 혼인 잔치의 신랑에 해당되고, 이스라엘은 예수님의 신부에 해당되고, 세례요한은 이러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의 친구에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신랑의 친구로서 혼인 잔치를 주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이전에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의 오실 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을 위해서 신부 곧 이스라엘 백성들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혼인 예식을 위해 신부를 잘 준비하였다가 신랑에게 인계한 후에 무대 뒤로 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유대지방에서 회개운동, 세례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준비시켜서 진정한 죄사함을 메시야게서 받게 하기 위한, 그래서 마가복음에 나오는 표현으로 하면 “죄 사함을 받게 하기 위한 회개의 세례”(막 1:4)운동을 펼친 것입니다.
그리고 30절에서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이 말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요한의 마지막 말입니다. 이 말과 더불어서 세례요한은 무대 뒤로 사라집니다. 여기서 흥하다, 쇠하다는 말은 천체의 빛이 차거나 기운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들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예수님의 생신인 성탄절이 동지 부근으로 정해졌습니다. 그래서 12월 25일이 성탄절입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의 축일은 하지 부근으로 정해졌습니다. 6월 24일로 정해졌습니다. 동지 이후에는 낮의 길이가 점점 길어집니다. 빛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 세상이 점점 밝아지는 것이어서 예수님은 점점 흥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지 이후에는 낮의 길이가 점점 짧아져야 합니다. 이처럼 세례요한은 쇠하여야 하겠고 예수님은 흥해야 했기 때문에 세례요한의 축일은 하지 부근으로 정해졌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기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29절)고 말하고 있는 ‘이러한 기쁨’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은 어떤 종류의 기쁨일까요? 요한복음에 의하면, ‘이러한 기쁨’은 세례요한에게 충만했던 기쁨이었을 뿐 아니라 예수님이 소유하고 계셨던 기쁨과 같은 종류의 기쁨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3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지금 내가 아버지께로 가오니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던 예수님의 기쁨, 곧 ‘내 기쁨’은 예수님이 이땅에서 누리셨던 기쁨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버지 품에 계셨으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인격적 교제 관계속에서 누리셨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하나가 되는 기쁨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쁨이 바로 예수님의 기쁨이었고, 이와 같은 기쁨이 이미 세례요한에게는 충만하게 있었던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얻게 된 이 기쁨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을 높임으로써 얻게 되는 기쁨입니다. 우리를 위해, 세상 죄를 지고가신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부활의 소망이 되신 예수님 때문에 기뻐하고, 그 예수님을 좋아하고 예수님을 높이는 자에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소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을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행위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합당한 예와 절차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찬양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 때 우리는 마땅히 기쁨을 얻고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세례요한에게 있었던 이 기쁨, 먼저는 예수님에게 충만했던 그 기쁨은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자 할 때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열망할 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올려드리는 삶으로 결단할 때 누리게 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얻게 되는 희락 곧 기쁨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8절입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하나님을 높일 때 얻게 되는 이러한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 되려면 먼저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하나님을 예배하고픈 마음이 드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갈 수 있을까요? 영국 브리스톨에 고아원을 세우고 자신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지하므로 일만번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으로 널리 알려진 조지 뮬러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수록 더 행복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조금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더 진정으로 행복해진다. 무엇이 우리를 천국에서 그렇게도 행복하게 하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더 완전한 지식일 것이다” 그러면서 이전의 자신의 신앙생활을 성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회심 후 처음 4년 동안 전혀 발전이 없었는데, 이것은 성경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마음과 영혼을 염두에 두고 성경 전체를 규칙적으로 읽었을 때 발전이 있었다. 그때 나의 평안과 기쁨은 계속해서 더 커졌고, 이제 47년째 이렇게 하고 있다. 나는 성경을 100번 가량 읽었지만 다시 읽을 때마다 새롭다. 그러므로 나의 평안과 기쁨은 점점 더 커진다.” 그는 회심한 지 50년이 지난 그의 나이 76세 때 고백합니다. “나는 내가 매일 신경 써야 할 가장 크고 중요한 일은 내 영혼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의 기뻐할 수 없을 때>, 존 파이퍼 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기쁨을 소유하고 누릴 수 있을까요? 세례요한에게 충만했던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만을 높이고자 할 때, 그리고 세례요한처럼 예수님만을 높이고자 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할 때, 그러한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때, 하나님 안에 있는 이러한 기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충만케 해주실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기쁨이 사라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서일까요? 세례요한은 다 빼앗긴 것 같았지만 내면에 비할 수 없는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자신을 다 내주셨지만 기쁨으로 충만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쁨, 세례요한의 기쁨, 이러한 기쁨은 곧 섬김의 기쁨이요 존재의 기쁨이요 새 생명의 기쁨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인생이 누리게 되는 기쁨이요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고자 염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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