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2일 주일1부 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7월12일 동산교회 설교
활력 넘치는 삶 (요 4:27-42)
생각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구원 받으면 모든 것이 끝났다라는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천국행 티켓을 확보했으니까 안심하고서 이제는 예전처럼 그냥 살아가려고 합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의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더 이상 목말라할 것 없이 안심하고 살아가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신 하나님의 선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확보하고 마셨으니까 이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한 자가 되었으니까, 죽음도 두려워할 것도 없고 죽고 나서 하나님 품에 안길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그런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이전처럼 계속 하던 일을 하면서 자신의 유익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우물가에서 긴 대화 끝에 하나님의 선물을 이 여인에게 전달하는데 성공하십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생수로서 예수 믿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성령님이시고, 성령님을 선물로 받은 이들은 성령님이 증거하시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결국 삼위일체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됨으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영원토록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받은 자가 됩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다름아닌 죽음 아니겠습니까. 죽음 이후에 대해서 알지 못한 채 평생 죽기를 무서워하며 죽음의 종노릇하는 인생이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허무, 공허, 덧없음, 생의 유한함, 죄책감, 죽음의 두려움 등에서 건짐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생수를 건네주시려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궁금증이 일어났던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요 구원자이심을 바로 알려주셨습니다. 아울러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신 자는 이제는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됩니다. 하나님이 이제껏 찾고 계시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됩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들은 성령 안에서 아들 예수님과 연합하므로 이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 받은 이 여인이 오늘 예수님과의 만남 이후 어떠한 인생을 살게 되었을까요? 다시 물을 가둘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파는 수고를 통해서 헛우물을 자꾸 켜는 이전과 같은 삶을 살게 될까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여러 남자들을 전전하면서 마치 사랑만 받으면 인생의 근본적 목마름이 해갈될 거라고 착각하면서 그렇게 살아왔는데 예수님을 만난 이후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요? 단순히 도덕적으로 정죄받는 남성 편력적 삶을 계속 살게 될 것인가를 묻는 게 아닙니다. 삶의 가치추구가 어떻게 변화될 것이냐를 묻고 있는 질문입니다. 이전에 추구하던 것, 그러한 추구가 나오게 된 밑바탕, 이 여인의 삶의 밑바탕에 늘 자리잡고 있어서 어떠한 활동을 하더라도 그 흐름을 저항할 수 없어 원치 않은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이 여인의 인생을 몰고 갔던 어떤 힘, 그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인생의 참된 주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을 너무나 잘 아시는 이 여인을 창조하신 주를 만났습니다. 대화 속에 녹아들어있는, 앞으로 십자가에서 찬연하게 드러날 주님의 사랑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가져다주시는 생수를 마시므로 성령을 선물로 받고 영원한 고향이신 하나님 품에 안겼습니다.
인생의 근본적 목마름의 해갈을 받은 이 여인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단초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 28-2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 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벌써부터 몇 가지 변화가 눈에 띕니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서 대낮에 우물물을 뜨러 올 정도로 마을 공동체에서 소외되었던 여인이 적극적으로 마을 사람들을 향해 나아갑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던 자신의 치부로 인해서 사람들을 피한 것이고, 사람들에 의해서 소외된 것인데, 이제는 자신의 아픔과 상처라 할 만한 것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드러냅니다. “내가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의 떳떳하지 못한 삶의 이력이 이 여인에게는 굉장히 큰, 자신을 압도하는 이슈가 되고 있고 자신이 거기에 신경 쓰고 있는 것임을 은연 중에 드러냅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예수님이 언급했다는 것이고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물동이를 버려 두고’, 참 의미심장한 표현입니다. ‘물동이’는 매일 마셔도 또 마셔야 하는, 그렇게 수고스럽고 그래도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인생의 작은 해갈을 위한 도구죠. 순간순간 차 오르는 갈증을 해갈하고 가지 않으면 안되기에 물을 떠 마셔야 하는 도구인데, 그 작은 갈증, 그 작은 성취, 그 작은 성공의 힘에 의존해서 또 인생의 한걸음을 내딛게 하는 도구, 계속 그러한 삶을 반복하다가 인생의 근원적 목마름을 해갈해보지도 못한 채 평생 그렇게 살게 했던 작은 해갈의 도구를 기꺼이 내던지고 전혀 새로운 삶, 생수를 마시므로 근본적 해갈을 도모하는 인생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진정한 생수의 근원이요 출처가 되시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여인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자신이 메시야,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겁니다. 와서 보라는 겁니다. 자신의 삶의 이력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는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언합니다. 평소에는 마을 사람들을 피해다녔던 이 여인이 적극적으로 그러한 말을 하니까 사람들이 하도 신기해서, 도대체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어떠한 사람을 만나서 저러는지 확인해보려고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도 극적으로 만나고 변화도 극적입니다. 그동안 목마름이 더욱 컸기 때문입니다. 목마름이 더욱 커진 이유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갈증이 증폭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만족스럽고 괜찮은 삶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은 근본적 목마름을 의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설령 근본적 목마름의 실체를 깨닫는다 해도 삶의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인해서 그 목마름이 가려질 때가 많습니다. 최근에 예수 믿는 연예인들의 뜨거운 신앙이 일반 사람들에게도 알려졌는데 그들의 삶은 무대 뒤의 공허로 점철돼 있거나 소위 뜨기까지 부단한 노력의 결과를 성취한 자들, 성취하고서 더욱 공허감에 사로잡혔던 그들이 진정한 생수를 마신 결과로 얻게 된 뜨거운 신앙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 믿기 전의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목마름이라면 예수 믿고 나서 문제가 되는 것은 허기입니다. 굶주림입니다. 목마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이전처럼 자신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변화되지 못한 채 살아간다면 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허기입니다. 굶주림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안심 속에서 이전처럼 추구하던 것을 계속 추구하려고 하는 고집스러운 삶은 배고픔을 면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여덟가지 복, 팔복을 가르치셨는데, 그 복이 무엇입니까? 누가 복된 자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 슬퍼하며 우는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예수님도 목마름과 주림을 따로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주림과 목마름은 둘 다 결핍, 채워지지 못함을 가리키는 유사어이지만 오늘 저는 굳이 구분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 칭의, 심판대 앞에서 무죄라고 선언해주실 하나님의 의를 덧입기를 목말라하는 자, 그리고 그 의를 향해서 주려하는 자, 이러한 사람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우선은 목마른 문제는 해결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굶주림, 허기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처럼 계속 살다가는 굶주림을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늘 채워도 채워도 허기진 인생, 공허한 인생을 면할 길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점을 오늘 예수님께서 이제 돌아온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려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인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제자들은 마을에 양식을 구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은 아마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목마름이 너무 커 우물로 직행하신 듯합니다. 제자들이 양식을 구해서 예수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음식을 갖다 드리며 잡수시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3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양식 구하러 마을에 들어가서 양식 가져다주니까 예수님께서 뭔 뚱딴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가, 이런 생각이 들었을 법한 제자들이 아마 누군가 예수님께 먼저 잡수실 것을 갖다드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 역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영적인 부분에 아직 완전히 눈을 떴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생수를 말씀하자 “그 생수 얼른 주소!”했던 그 이유가 사람들 시선 피해가며 대낮에 땡볕 받아가며 매일 고역스럽게 우물물 뜨러오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벗어날 수 있게 될 거라는 헛된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인생의 참된 양식, 영의 양식을 말씀하시고 계신데 제자들은 육체적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더욱 자세하게 자신이 말씀하신 양식이 무엇인지 설명해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34절) 생수를 마셔도 매일 우물물 뜨러 와야 하는 것처럼, 육체적 목마름은 영적 목마름과 별개로 계속 마셔야하듯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해야 몸에 힘이 나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의 근본적인 양식, 이 양식을 먹지 못하면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인생이 되버릴 수밖에 없는 참된 생명의 양식, 영혼의 양식을 우리가 먹어야 하는데 그 양식이 뭐냐, 바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힘이 되어서 활력 있게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활력 있는 삶의 비결이 되는 겁니다.
참된 삶의 만족, 뿌듯함, 보람, 기쁨, 가치, 삶의 의미와 목적, 이런 것들이 없으면 말 그대로 먹고 사는 인생, 그저 입에 풀칠하는 인생, 밥벌이 하는 인생에 불과할 텐데, 그러한 것들이 있음으로 인해서 삶이 더욱 고귀해지고 가치 있어지고 보람되고 뿌듯해지는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이땅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이땅으로 보냄을 받은 이유는 십자가에 들리셔서 자신에게 한량없이 부어주신 성령을,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들에게 나눠주라는 사명을 받고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생수를 나눠주어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을 만들고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성령 안에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러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굳이 사람들이 가지 않는 사마리아땅으로 찾아와서 이 여인을 찾고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을 전달한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명이었고 하나님의 뜻이었고 하나님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이루어드리고 있으니까 지금 너무 만족스럽고 뿌듯하고 먹지는 않았아도 배부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양식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수를 전달해주자 예수님을 만난 여인은 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그 증거를 받은 마을 사람들은 지금 떼로 예수님께 나아오고 있습니다. 이 현장을 목격하고 있는 예수님은 더없이 만족스럽고 배부르고 뿌듯한 것입니다. 본문 3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아마 추수 전 넉 달 전, 아마 파종한 지 얼마안 된 시기인 듯합니다. 씨를 뿌린지 얼마 안됐으니까 추수하기까지 넉 달이 필요할 것이지만, 지금 종말이 동터온 이 때는 파종과 추수가 연이어 일어나는 종말론적 풍성함에 우리가 와 있음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종말론적인 추수가 뿌림과 동시에 동시다발적으로 풍성하게 일어남을 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예수님은 한 여인에게 생수를 전달한 것인데, 이 생수를 마시겠다고 마을 사람들이 대거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음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단순히 말씀의 씨앗을 뿌린 것이고, 이 여인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나아오고 있어서 그 추수를 제자들이 아무런 노력 없이 하게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거두는 자는 거두는 자의 기쁨이 있고 뿌린 자는 뿌린 자의 기쁨이 있고 대규모 추수의 기쁨을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을에 며칠 더 유하시며 마을 사람들에게 더욱 자세하게 복음을 전해주셨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에는 한 여인의 증거로 예수님을 찾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이제는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41-42절입니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찬송가 가사와 같습니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많도다 예수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주소서!”
예수를 믿는 것은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겁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고 구원 이후의 삶에 대해서 무관심하면 안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마셔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기고 부활생명,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나친 안심 속에서 천국행 티켓을 보장받았다고 확신하고서 이후의 삶이 이전과 같이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으로 남는다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여전히 허기질 것입니다. 헛될 것입니다. 공허할 것입니다. 결국 삶이 덧없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세례 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제 참된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야만 삶에 만족이 있고 가슴이 뿌듯하고 삶이 보람되고 의미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허기진 채 살아가지 않고 배부름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으려면 하나님의 참된 양식을 끊임없이 공급받고 그 양식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양식, 그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하는 이유는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돼 있고,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의 창조 목적이 드러나 있고,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고 계셨던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삶의 법칙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자신의 사명을 알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이 될 때 우리 삶은 배부르고 만족스럽고 의미로 충만하고 뿌듯해질 것입니다. 늘 말씀을 사모하시고 말씀 연구에 매진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을 활력이 넘치도록 만들어주는 힘을 공급하는 참된 양식은 하나님나라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비전 삼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는 곳은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드러나는 곳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나를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명이 있는 인생이 되고 그 사명을 이루어갈 때 삶의 가치가 숭고해지고 참된 만족이 뒤따릅니다.
우리의 사명은 예수님,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마시고 영원한 해갈을 얻게 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고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때론 직업활동으로, 가정활동으로, 교회활동으로써 복음 전하고 어디서나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참된 양식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참된 양식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사랑에 압도당하고 그 사랑을 흘려보내주는 사랑의 사람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의 큰 보람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우리가 늘 섭취해야 할 영혼의 참된 양식입니다.
철학자 김진영이라는 분이 암 투병을 하면서도 생의 마지막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유작으로 남긴 책이 <아침의 피아노>라는 책입니다. 그 책에서 말합니다. 그가 죽음을 눈앞에 직면하자 그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시끄러운 일상들이 사라지고, 눈앞에 오직 사랑의 대상들만이 남았다고 고백합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일상들을 치워버리자, 이제 세상이 딱 두가지로 보이더랍니다. ‘사랑의 대상들’과 ‘시끄럽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 자신이 사랑을 쏟아야 할 대상들과 소란하고 무의미한 소음들의 대상들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오직 사랑의 대상에만 완전히 집중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고 또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받고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지금이 바로 사랑을 나눌 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생수를 선물로 받아 마신 영생의 사람들입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참된 양식을 먹고 배고픔 없이 허기짐 없이 공허함 없이 가치 있게 의미 있게 행복하게 보람되게 뿌듯하게 기쁘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처럼 참된 양식을 섭취하십시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요 사명을 알고 사명을 감당하는 인생이요, 사랑 안에서 사랑받고 사랑을 나누는 사랑의 삶입니다. 이로써 삶이 더욱 힘을 얻고, 참된 양식으로 말미암아 매일의 삶이 활력 넘치는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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