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19일 주일 1부예배 전체영상입니다.
■2020년 7월 19일 동산교회 설교
지속가능한 믿음 (요 4:43-54)
우주비행사들 혹은 우주인이 우주탐사를 마치고 지구로 귀환한 후에는 대개 환경주의자나 생태주의 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우주를 직접 보고 겪고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주가 얼마나 큰지, 거기에 비하면 지구가 얼마나 작은지, 이뿐 아니라 지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빈번해진 기상 이변과 곳곳에서 일어나는 천재지변의 주요 원인이 인간의 환경파괴와 그에 따른 자연의 역습이라고 말해집니다. 환경 파괴로 자연을 공격했던 인간을 향한 자연의 역공이라는 거죠.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진 요즈음입니다.
환경보호의 중요성이 커진 1980년대 후반에 동장한 개념이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쉽게 말해서 지금 세대가 물고기 다 잡아서 물고기 씨가 말라버리면 후손들이 먹고 살 물고기가 없어진다는 것이요, 지금 세대가 목재를 다 벌채해버리면 다음세대가 사용할 목새가 없어진다는 겁니다. 한마디로 미래를 위한 지속가능한 발전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현 세대도 충족되면서도 미래 세대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을 보존하고 남겨놓는 발전을 의미합니다.
개발과 환경 보존이 동시에 충족되는 발전입니다. 상당히 성경적인 개념입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서 첫사람 아담에게 주신 명령이 "경작하고 지키라!"였듯이 말입니다. '경작하라'는 명령은 창조세계의 개발과 발전을 가리키고 '지키라'는 명령은 보존과 보호를 가리킵니다. 후손을 위해 남겨놓아야 한다는 것이죠. 개발과 개량과 성장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즉 '지속가능한 발전'입니다.
우리의 신앙세계에서도 믿음이 중요한데, 믿음은 '지속가능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잠깐 반짝하다가 사라지는 믿음이 되어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이 될 수 없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지속가능한 믿음이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계속 발전하고 성장하는 믿음이어야 하고 자손들에게도 이어지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지속가능한 믿음'이란 현 세대인 우리의 믿음이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손들도 공유하고서 계속 발전시키고 성장시켜나가야 할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속가능한 믿음'을 보유하지 못한 세대의 믿음에 대해서 안타까워하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기적을 보고서야 믿는 믿음이요, 필요가 있을 때 반짝 생겨났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함께 사라지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과의 인격적 관계의 지속이라기보다 예수님을 통해서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예수님과의 관계도 그 중요성을 잃어버리는 믿음입니다. 기적을 체험한 당대의 사람들에게는 있지만, 자녀들에게 이어지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생수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이 메시야임을 확신하고서 마을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무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세상의 구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갈릴리로 올라가셨습니다. 본격적인 갈릴리사역울 하시려고 유대에서 바로 갈릴리로 가시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사마리아를 거쳐 갈릴리로 향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갈릴리를 고향으로 여기는 듯합니다. 본문 43~44절을 보겠습니다. "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친히 증언하시기를 선지 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 하시고” 예수님은 자신에게 친숙한 고향땅이지만 고향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발견하시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신 듯합니다.
다만 이전에 유월절 명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가셨을 때 거기서 행한 기적을 본 갈릴리인들은 예수님을 반갑게 맞이할 뿐이었습니다. 본문 45절입니다. "갈릴리에 이르시매 갈릴리인들이 그를 영접하니 이는 자기돌도 명절에 갔다가 예수께서 명절 중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위풍당당하게 가르치시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는 일을 목격했던 갈릴리사람들이 고향을 찾은 예수님을 마치 유명인사처럼 환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렀을 때 아마 분봉왕 헤롯의 신하였던 한 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아들이 병들어 죽게 되자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달려온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는 아버지의 간청을 듣고서 보인 예수님의 반응은 좀 냉정합니다. 본문 48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아니하리라“
예수님은 갈릴리사람들이나 지금 예수님께 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간청하는 왕의 신하나 그들의 믿음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입니다. 기적을 보아야만 믿는 믿움이라는 겁니다. 아들이 죽어가는, 당장의 필요를 위해 반짝 생겨난 믿음입니다. 아들이 고침을 받고 살아나면 필요가 채워짐과 동시에 사라져버리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뿌리를 내리는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지 못하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비판적으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보고서 왕의 신하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식으로 어서 속히 함께 집으로 가서 아들을 고쳐달라는 기세입니다. 본문49절입니다.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고도가 낮은 가버나움이어서 거리가 20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곳이지만 '내려오소서'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요? 예수님이라는 인격을 향하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 때문에 예수님께 나아온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왕의 신하의 믿음의 문제는 그가 예수 자신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엇인가에만 관심을 가졌다는데 있습니다. 예수의 인격을 향하지 않고 예수를 통해 얻게 될 자신의 필요만 지금 눈에 보이고 거기에 급급해하고 있다는 겁니다. 자신의 이익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인격적 관계보다 당장 아들의 질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인가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필요가 채워지면, 혹은 필요가 사라지면 믿음도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질 믿음이기 때문이빈다. 지속되지 못하는 믿음입니다. '지속가능한 믿음'이 아닙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심한 병에 걸렸습니다. 진단 결과는 암울했습니다. 그녀는 아마 올해를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의사는 말했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부활절과 성탄절에만 교회에 출석하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마침 그 교회에 부임한 젊은 목회자에게 그 젊은 여인이 말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성 경애서 치료를 행하셨다면 오늘날에도 기적을 행하실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나오는 기적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이 말에 젊은 목사도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기도를드렸고 목사도 가족들도 모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가족들은 만약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신다면 그들 모두가 완전히 다시 헌신하여 매주일 교회에 나오겠다고 약속하며 하나님께 기도했고 진지한 젊은 목회자는 마음을 다하여 열심히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녀를 완전하게 고쳐 주셨습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젓는 의사를 뒤 로 한 채 그녀는 퇴원하여 집으로 왔습니다. 다음 주일에 그녀의 온 가족은 말쑥하게차려 입고 활기 넘치는 표정으로 교회에 나와 회중석 앞자리에 앉았고 그 젊은 여성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며 간증을 했습니다. 다음 주에도 그 가족은 교회에 나왔습니다. 하지만 4주가 지나자 오직 그녀와 그녀의 남편만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 후에는 교회에 출석하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그들은 과거의 습관으로 되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그 여인은 자신이 겪은 일 전체를 합리적으로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표적인 극적인 치료를 경험했고 기도에 집중했었고 교회성도들에 의해 둘러싸였지만, 겨우 두 달이 지나자 원래대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입니다. (NIV적용주석 요한복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까요?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상황에 따라 믿음이 변화되거나, 믿음이 약해지거나 떨어지지 않고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비결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세 가지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려면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본문 5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급히 자신의 집으로 내려와서 아들을고쳐달라는 왕의 신하의 거듭되는 간청을 듣고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네 아들이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돌아가라는 것입니다.왕의 신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그 말씀을 확고히 붙들고 믿음으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다른 무엇을 할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도움을 요청하러 온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입장에 선 사람이 해결되었으니까 돌아가라고 말하면 꼭 그 말을 믿어서라기보다 더 강청해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애걸복걸하면서 그래도 우리 집에 같이 가서 고쳐달라고 할 수 없겠죠.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그렇게 하면 심한 결례가 되므로 감히 그렇게까지 할 수 없었던 거겠죠. 가까운 거리도 아니니까요.
하여튼 어쩔 수 없이 그 말씀만 붙들고 지푸라기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심정으로 왕의 신하는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집으로 가는 도중에 집에서 좋은 소식을 들고 온 하인 무리를 만나게 됩니다. 본문 51-52절을 보겠습니다.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아있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일곱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어제 일곱 시, 그러니까 오후 1시부터 회복되기 시작해서 살아났는데 예수님께서 “네 아들이 살아났다” 하신 바로 그 시각이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결국 이루어집니다. 말씀대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은 식언치 않으시고 하신 말씀을 이루실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말의 무게가 있는 분이십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쉽게 내뱉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이 있지 않다면 그분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말씀하시는 그분의 인격을 신뢰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지속가능한 믿음을 가지려면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지속가능한 밑음을 가지려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그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누구보다도 갈릴리호수를 잘 알고 있는 베드로에게, 그리고 그는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그래서 밤새도록 헛수고하고 돌아와서 이미 그물도 다 씻어놓은 상태인데,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에게 어떠한 말로 들렸겠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 뭐라고 대답합니까? 누가복음 5장 5절입니다.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도무지 따르기가 어려운 말씀처럼 들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대로 순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곧 말씀에 대한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는 이미 그가 예수님 이라는 인격을 신뢰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말씀 붙드는 믿음이야말로 지속가능한 믿음이고 우리의 믿음이 상황에 따라 변화되거나 믿음이 약화되거나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안전한 믿음이 되는 겁니다. 건강한 믿음은 말씀 붙드는 믿음입니다.
둘째, 지속가능한 믿음이 되려면 말씀 붙드는 믿음이어야 할 뿐 아니라 말씀이 약속하고 있는 소망을 바라보고 인내하고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어떤 분은 해석하기를 믿음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는 말은 우리의 과거가, 지금 여기에까지 이른 우리의 현재가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임을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믿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그 은총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지탱할 수 있는 것이고 살아갈 수 있는 거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믿음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은 믿음으로 살아갈 때 그 믿음이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가라는 믿음의 미래와 소망에 관한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왕의 신하가 반신반의 하면서도, 확고한 믿음에 이르지 않은 채로 한줄기 소망으로 붙든 것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살아났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아들이 치유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한줄기 소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작고 희미하지만 한 줄기 소망을 불들고 자신의 집으로 내려갔던 것입니다.
왕의 신하는 예수님께서 동행하여 주셔서 자신의 눈으로 직접 치료해주시는 눈에 보이는 기적을 구했습니다. 믿음으로 기다리는 과정보다는 우리는 당장 무언가를 손에 쥐고 싶어하는 인간의 성향을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고 동행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왕의 신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손에 확보하지 못한 채 믿음 안에서 소망 안에서 행동하며 집을 향해 걸어가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가버나움 자신의 집으로 직접 모셔가지 못하고 대신 단지 그분의 말씀을 신뢰할 것인지, 그분의 인격을 신뢰할 것 인지, 희미한 소망의 빛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걸어가야 할지를 짧은 시간에 선택해야 했던 것입니다.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게 소망을 붙들고 그는 집으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속가능한 믿음, 비결, 말씀 붙들고 소망 붙들고 가장 좋은 것 주시는 가치관, 생명 붙들고 그런 믿음 가지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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