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월 21일 주일예배 영상 전체를 올려드립니다!
■2020년 6월21일 동산교회 설교
천지 차이 (요 3:31-36)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인생의 평생의 과제입니다. 평생의 과제라기보다 영원한 과제입니다. 영원토록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분과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그분을 즐거워하며 영원토록 그분을 찬양해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요예배 때 전한 말씀입니다만,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위해 무엇을 기도했습니까?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겠죠. 하나님을 알려면 지혜와 계시의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지혜와 계시의 성령’이란 우리를 위한 성령님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성령의 조명’에 해당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비추어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내적 조명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기도제목으로 올려놓고 기도한 것이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말씀과 기도와 성령의 조명이 함께 동시에 있을 때 하나님을 알게 되는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하나의 인격은 소우주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깊고 넓고 측량할 수 없는 우주와 같은 인격의 비밀입니다. 우리가 부부여도 서로를 이해하는 게 얼마나 어렵습니까. 교회 안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고 알아가는 게 여간 쉽지 않습니다. 수십년을 보았어도 매주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교회활동을 함께 해도 그분이 어떤 분인가 제대로 알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무한하신 인격이요 보이지 아니하시는 영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인간적 수행이나 학문의 정진이나 큰 깨달음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되, 효과적으로 알려주시는 계시를 통해서만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계시하셨습니다. 아들 성자 하나님을 이땅에 파송하셨고,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하나님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보내십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고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해주시기 위해서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이”라고 지칭됩니다.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시죠. 예수님은 이땅에 파송 받고 오셔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성육신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c.s 루이스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의 비유를 듭니다. 호수에 귀한 물건을 빠뜨렸는데 깊은 호수의 바닥의 진흙에 빠진 소중한 것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겠습니까? 잠수부(다이버)가 필요하겠죠. 죄와 세상의 진흙속에 빠진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서 잠수부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잠수부는 호수 바닥 진흙에 빠진 소중한 것들을 되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래서 깊은 호수로 들어가고 바닥까지 잠수해서 내려갑니다. 그리고 마침내 찾고자 했던 귀중한 물건을 손에 쥐고 숨을 쉬지 못해 고통스러운 상태로 수면으로 올라오는데 성공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호수로 들어오신 잠수부 예수님! 영혼들을 손에 쥐고서 물위로 끌어올리신 예수님! c.s 루이스는 이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고서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우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가셨고, 인간 본성을 함께 끌어올리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시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신 이유입니다. (<포스트모던 시대, 어떻게 예수를 들려줄 것인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저, 84-85쪽)
그러면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공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 요한복음에는 영생입니다.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임박한 통치를 선포하셨죠. 하나님의 나라가 곧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례적인 하나님의 다가오심을 선포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 그의 십자가와 부활로 임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우주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서,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를 믿음으로 받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려면 먼저 회개해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회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회개입니까? 인생의 근본적인 방향 전환으로서 회개입니다. 여태까지 살던 방식대로 살면 안된다는 겁니다. 180도 돌아서야 한다는 겁니다.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권을 되돌려드리기 위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통치, 이를 위한 회개, 인생에서 진정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대표적인 천국 비유 중의 하나가 값진 진주 비유라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5-46절에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한 상인이 수도없이 많은 진주를 사고 팔았는데 이번에 매물로 나온 진주는 이전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진기했습니다. 너무나 크고 아름답고 진기한 진주이다보니 값이 매우 비쌌습니다. 여태까지 보아온 진주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상인은 이 진주를 소유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이것을 사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팔기로 결정합니다. 자신의 소유를 다 주고 살만큼, 아니 그보다 더 위대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이기 때문에 이것과 비교하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별 가치가 없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이 진주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는 이미 여러 진주들을 사고 팔고 소유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어느 정도 만족을 얻기는 했으나 자신의 진정한 갈망과 욕구를 채워주지 못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충격으로 다가왔을 겁니다. 이 진주를 보고서 완전히 그 아름다움과 가치에 사로잡히고서 생각해보니 예전에 한때 만족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깨달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이 진주를 보게 되니까 최고의 진주를 열망하는 마음이 또한 생겨났습니다. 인생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상인은 더 나은 것을 원하고, 진정으로 자신을 만족시켜줄 더 나은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했던 가치들, 우리가 바라마지 않았던 욕망들, 때로는 성공하기도 해서 만족감에 이르기도 했던 과거 역사들이 질 떨어지는 진주들과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도 한동안 귀하게 보였고 어느 정도 만족감을 준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최고의 진주를 열망하게 되었고 이 진주를 보니까 더 나은 것이 틀림 없이 있을 것임을 깨달을 수 있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이 인생의 진정한 왕이시오 가장 소중한 분임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된 각성입니다. 그동안 마음의 소원을 채우기 위해서 시도했던 모든 노력들이 이제 제대로 방향감각을 찾은 것입니다. 이 세상 것들로는 결코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이 하나님의 나라를 만나서 제대로 방향을 찾게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나라의 궁극적 가치, 즉 인생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가장 소중한 분이 누구인지를 가르쳐줄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의 삶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고 물거품과 같은 인생이었고 신기루와 같은 인생이었는지를 깨닫게 해줌으로써 회개를 촉구하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같은 책, 121-125쪽 참고)
사람은 누구나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무언가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진짜 보화를 발견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를 가져오시며 그 나라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기 전까지는 참된 만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허망한 인생일 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은 결국 실망으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계속 헛된 길로만 가는 걸까요? 왜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정한 영적 갈망을 보지 못하는 걸까요?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은 이러한 상황을 상당히 비관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가 친히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하되 그의 증언을 받는 자가 없도다”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르게 표현해보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계속 넓은 길로 간다는 것입니다. 좁은 길로 가야할텐데 말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3장 31-36절은 요한복음 3장을 마무리하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논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대화가 나오고 또 지난 주일에 본 말씀 세례요한이 오직 예수님만을 높임으로써 기쁨으로 충만했던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다음장 4장에서 예수님이 만나게 될, 갈급했던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을 내다보면서 저자 요한은 예수님과의 만남을 가졌던 사람들이 왜 어떤 이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여서 진정한 생수를 얻게 되는지, 왜 반면에 어떤 이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지 않아서 헛된 가치를 추구하며 계속 살던 대로 살아가는지를 정리해보는 듯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증언,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받지 않습니다.
궁극적 가치, 최고의 가치인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를 우리에게 가져오신 예수님을 생수로 받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갈증과 목마름과 갈망을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합니다. 헛된 것 추구하면서 얻게 되는 작은 성공과 작은 만족이 어느 정도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아직 손에 얻지 못했기 때문에 만족이 없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기만 하면, 어떤 일만 잘 이루어지면 인생이 괜찮아질 거라는 착각에 사로잡혀 지내기 때문입니다. 한평생 그렇게 살다보니 진정한 영적 갈증을 알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이라는 진정한 생수를 구하기보다 그동안 다른 방법으로 채워보려고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 때로는 작은 성공을 거두기도 해서 작은 만족에 머무르고 또 다른 만족을 찾아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평생을 그런 추구 속에 살아가는 겁니다. (<인생질문>, 팀 캘러 저, 58-68쪽 참고)
이렇게 계속 살아가는 것이 거듭나지 못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하신 말씀의 뜻이 바로 그것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던 방식, 추구하는 방식가지고 계속 살 것이냐, 아니면 위로부터 새롭게 태어나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마치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성령으로 태어나서 성령으로 살아가겠느냐를 도전하신 겁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요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이미 시작된 영생의 삶입니다. 그래서 회개가 필요한 거예요. 유사 구원으로 만족해하면 안되고 인생에게 진정한 구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진정한 구원을 얻기 위해서 왜 회개가 필요하신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요 천국 백성의 삶이요 다가올 세상에서의 삶이 이미 이땅에 임한 영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여태까지 잘못된 부류의 구원을 추구하고 가짜 구주를 숭배했던 삶을 청산하고 전혀 새롭게 태어나야 함을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겁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증언이었어요. 안타깝게도 아직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을 준비가 돼있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증언을 받고서 오직 예수님만을 높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누리는 영생을 살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34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예수님은 성령 하나님을 한량 없이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신 예수님에게 하나님은 성령님을 한량 없이 보내주셨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여기서 ‘한량 없이’는 측정불가할 정도로 많이, 말 그대로 한량 없이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성령의 담지자가 되셨고 그 성령님을 자신을 믿는 자들에게 나누어주실 수 있게 된 것인데, 그 성령이 바로 생수이십니다. 인생의 진정한 갈망에 대한 충족, 진정한 삶을 살게 하는 성령이십니다. 영생을 이미 이땅에서 살아가게 하시는 생명의 영이신 성령이십니다.
그래서 36절 말씀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매우 생생한 표현입니다. 아들을 믿지 않는 자,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이고 지금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과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동격으로 취급됩니다. 아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이요 이전의 삶을 청산하고,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삶이요, 물은 무엇입니까? 십자가를 통과하고서 거룩한 성령을 받는 물과 성령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전에 살아왔던 나, 이전에 살던 방식, 이전에 몸담고 살아왔던 세상적 환경,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겁니다. 이전에 추구했던 가치와 방향이 싸구려 진주에 집착하는 삶에 지나지 않았고 이제 진정한 진주를 만나고서 전혀 새롭게 살아가는 삶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요, 이미 시작한 영생입니다. 나는 죽고 그래서 예수로 사는 삶이 되는 것이 곧 십자가를 통과하는 삶이요 그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삶입니다.
이러한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금도 일하시는 겁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신학자들은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절대적으로 한 분이시니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아들이 나오고,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성령이 나오며, 성령을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이유는 오직 예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기 위함이다.” (<성령께 나를 열다>, 스콧 맥나이트 저, 51쪽)
예수님께서 성령을 한량 없이 받으셔서 하나님의 사역을 능력 있게 감당하시고 십자가 사명 완수를 이루신 것처럼, 우리가 능력 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서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수를 마셔야 합니다. 성령을 또한 충만하게 받아야 합니다. 유대교 랍비들은 구약성경을 연구하면서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할 때 그 일의 중요성과 가치와 상응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을 선지자들에게 보내주셨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인류 구원 사명 감당은 너무나 막중해서 비교할 수 없이 한량 없이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나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옛 자아를 거듭거듭 죽이고 새 자아로 살아가야 합니다. 어떻게 옛 자아가 새 자아로 될 수 있을까요? 늘 성령을 구하고 성령을 의지하고 성령께 내 자아를 굴복시키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새 자아로서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날이 영생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거듭거듭 거듭나야 합니다. 늘 새롭게 물과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과 그 능력으로 우리의 자아가 거듭 죽고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가 살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오늘 36절 말씀처럼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말씀에서처럼 영생을 얻고 영생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귀기울여야 하고 늘 주님과의 영적인 교제와 사귐인 기도에 게을리해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는 천지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존재하시는 분이신데 삼위일체 하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천지 차이라는 간극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우리에게로 보내셨고,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우리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의 의미를 두고두고 숙고해보아야 합니다. 이땅에서 영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통과해야 할 십자가와 부활의 영생의 삶, 이미 시작된 영생을 누리기 위해서 우리가 아들을 믿고 아들에게 순종해야 함을 깨닫고, 영생이란 다른 게 아니라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요, 그리고 이 아들이 우리 인생의 최고의 가치요 보화임을 소중히 여기고, 늘 성령 안에서 하나님을 추구하고 말씀에 귀기울이고 기도에 정진하고 성령께 붙들려서 그렇게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복된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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