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월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주의 길은 바닷속에 있습니다 (시 77편 19-20절)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주의 길로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주의 길은 주님이 예비하신 길이요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에서 주의 길을 “주의 계명들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19편 32절에서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고 했고, 35절에서는 “나로 하여금 주의 계명들의 길로 행하게 하소서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이다”고 고백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주의 길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말씀을 뒤져보아도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무엇을 주님이 기뻐하실지, 분명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주의 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어디에 있는 줄 알아야 주의 길을 걷든지 말든지 할텐데 주의 길이 오리무중, 감추어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종종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의 길로 인도해주세요.”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도 주의 길은 처음부터 명백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의 길은 본토, 친척, 고향,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는 것이었는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순종하여 떠났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들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려는 원대한 계획을 가지셨지만 이러한 주의 길을 아브라함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요셉에게 주의 길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흉년의 시절을 하나님의 지혜로 잘 대비하여 아브라함의 자손을 기근에서 보호하는 것이었지만, 총리가 되기까지 그의 인생길은 온통 가시밭길이었습니다. 형들에게 속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고, 보디발의 가정에서 종살이 해야 했고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생활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감옥에 있을 때 총리가 되는 꿈을 과연 꿀 수 있었을까요, 감옥에서 나와 햇빛을 볼 수 있을 것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과 동행하는 형통함이라는 복을 누릴 수 있었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하지 않으려는 굳은 심지를 간직하고는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셔서 결국에는 주의 길로 인도하시는데요, 주의 길로 나아가기까지 우리는 수도 없이 시행착오를 겪곤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는 말로 말하자면 한 번의 성공을 이루기까지 수없는 실패를 경험합니다. 시행착오와 연이은 실패 끝에 마지막으로 주의 길을 찾는 성공에 이르면 모든 실패가 만회되고 이전의 잇따른 실패가 성공을 위한 길로 인도해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일본의 경영자들에게 존경받는 경영자로 늘 손에 꼽히는 분이 혼다자동차를 창업한 혼다 쇼이치로입니다. 이분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아홉 형제 중 다섯 명이 영양실조로 일찍 죽었을 정도로 집이 가난했습니다. 이분의 아버지는 길에서 자전거를 수리해주는 걸로 밥벌이를 했습니다. 혼다 쇼이치로도 자전거와 기계에 관심이 많았고, 나중에 오토바이의 작동 원리도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웠습니다. 나중에 혼다 쇼이치로가 혼다 오토바이를 제작할 때도 그가 직접 실험하고 설계하는데 가장 중요한 연구원 역할을 하게 되었을 정도로 기계에 밝았습니다. 드디어 1950년대 초기, 혼다는 오토바이 사업에 뛰어들었고 5년 안에 250개 경쟁업체를 제치고 세계 1등의 오토바이 생산 기업이 되었습니다. 오토바이를 한창 제작할 때 그는 언젠가 세계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본 혼다자동차가 그렇게 만들어졌고, 지금은 토요타에 이어서 일본 내 2위인 자동차기업이 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자동차를 판매하는 글로벌한 기업이 되었습니다.
혼다자동차는 일본 기업 특유의 정신이 살아있는 회사로 정평이 나있는데, 이를 일컬어 혼다이즘이라고 칭할 정도로 세계 어느 곳에서 공장을 가동해도 혼다이즘 정신에 따른 스탠다드로 기업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일례로 전 세계 혼다자동차 공장에서는 어디에서나 근로자가 흰색 작업복을 입고 자동차를 생산한다고 합니다. 흰색 작업복은 자동차 공장에서 적합하지 않은 듯합니다. 기름때가 많은 자동차 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합니다. 이는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의 영향 때문입니다. 그는 창업 시절 평소 하얀 옷을 입고 오토바이 수리를 했는데, 이유는 하얀 옷을 입으면 더러움이 쉽게 보여 다시 갈아입게 되고, 따라서 정갈한 마음으로 일하고 고객을 맞을 때도 깔끔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흰옷을 입고 작업하면 마음까지 단정해져 보다 품질에 완벽을 기할 수 있다는 이유도 있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자동차를 만드는 작업자는 의사와도 같다는 혼다 소이치로의 철학이 들어간 흰색 작업복입니다. 공장을 방문하는 본사 직원이나 연구소 직원도 마찬가지로 공장에 오면 흰색 상의로 갈아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사장도 예외가 없습니다. 공장은 자동차를 만드는 신성한 장소이기 때문이랍니다. 이 작업복은 일본 공장뿐 아니라 세계 33개국 62개 혼다 공장 모두에서 착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혼다이즘이라는 정신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이분이 1974년에 미국의 미시간대학교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고 연설한 내용 중의 일부입니다: “그간의 일들을 돌아봤을 때 실수와 실패, 후회할 것을 제외하면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자랑스러운 것은 비록 연이어서 잘못을 저지르기는 했으나 그래도 이 잘못과 실패들이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성공한 삶을 살고자 합니다. 내 경우에 성공은 여러 차례의 실패 후, 그리고 실패에 대한 반성을 한 후에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성공은 그저 내가 한 일의 1% 밖에 되지 않았고, 99%가 실패였습니다.”
(책 <하버드 인생특강> 285-7쪽 참고, 아울러 중앙일보 기사 “이공계가 이끌어온 일본 제조업 신화” 참고)
우리가 주의 길을 찾는 과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됩니다. 주의 길을 찾기까지, 주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우선은 주의 길에 관심이 없을 때가 많고, 주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될 때도 나의 길로 가기를 원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주의 뜻보다는 내 뜻을 앞세우거나, 주의 계획보다는 내 계획을 우선시하거나, 주의 길로 들어서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를 우리가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우리들을 종종 주의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없도록 몰아가시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77편이 그러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19절에서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다”라는 고백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염두에 둔 표현입니다. 홍해 앞에서 가로막힌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자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몰랐지만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실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보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을 때 주의 길이 비로소 드러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에는 이처럼 극적인 요소가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너무나 극적이죠.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가실 주의 길이 바닷속에 감추어져 있었다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앞으로 나아가기까지 주의 길을 통과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을 누군들 알 수 있었겠습니까, 어리석은 인생들은 홍해 앞에서 우리는 죽게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홍해 앞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리고 추격해오는 바로의 군대를 목도하게 되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여기까지 우리는 실패한 인생이다, 우리는 실패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홍해를 통과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이를 위해서 바닷속에 주의 길을 감추어두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행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시편 저자는 주의 길이 바다에 있었지만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었다”(19절)고 고백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또 내가 하나님의 모든 행사를 살펴 보니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일을 사람이 능히 알아낼 수 없도다 사람이 아무리 애써 알아보려고 할지라도 능히 알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알아내지 못하리로다”(전 8:17), 또 “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지를 네가 알지 못함 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전 11:5)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행사를 전부 알지 못하고, 어떻게 일을 성취해가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주의 발자취를 알 수 없고 주의 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주의 길이 바닷속에 있고, 주님은 우리를 주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주의 백성을 양 떼 같이 모세와 아론의 손으로 인도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양으로 생각하셔서 목자가 양을 인도함같이 인도해가십니다. 주의 종들을 통해서 인도해가십니다. 주님이 인도해가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주님이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주의 길이 감추어져 있어서, 심지어 바닷속에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없고 알지 못한다 해도 주님은 주의 양떼들을 인도해가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이러한 믿음을 우리는 하나님께 보여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홍해 앞에서 우리의 믿음과 신뢰를 요청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뭐라고 말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13-14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두려워하지 말고 우선 가만히 좀 있으라,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의 역사를 너희가 곧 보게 될 터이니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 믿고 맡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행하실 일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무사히 건넜고 뒤쫓아오던 애굽 군대는 바닷물에 수장되었습니다. 이러한 큰 구원의 기적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난 변화는 무엇이었습니까? 출애굽기 14장 31절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행하신 그 큰 능력을 보았으므로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크심을 체험하고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었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하나님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의 원로목사이시며 극동방송 이사장이신 김장환목사님의 자서전적인 글에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면서 한 마디로 요약하기를,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합니다. 이분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라가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절에 다섯 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저를 아버지는 석달이 지나서야 호적에 올리셨습니다. 제 위로 다섯 명이나 돌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제가 열네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제 삶에는 지독한 가난과 암담한 미래만이 펼쳐졌습니다. 일곱 식구가 작은 방에서 자다 보니 어머니는 제가 형들에게 깔려 행여나 큰일이 나지 않을까 걱정하실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유년 시절이 줄거울 리 없고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자 중학교도 갈 수 없는 지독한 가난이 너무도 미웠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홀어머니 밑에서 학비 걱정을 해야 하는 비참한 형편 때문에 남몰래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공부해도 내 인생에 빛이 비치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랬던 제 인생에 하나님의 손길이 닿으며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참담한 시대에 태어나 끼니를 걱정하며 살던 저를 하나님은 미군 부대 하우스 보이에서, 미국의 유학생으로, 주님의 종으로 한해 한해 인도하셔서 지금은 세계선교를 위해 상요하고 계십니다. 지금의 현실을 보고 실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닿고 길이 열려서 인도함을 받게 된 그의 삶이 주의 길을 걷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이분의 전 생애가 참으로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극동방송을 운영하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음을 간증합니다.
원래 극동방송 송신소는 서해안 소래포구 염전 인근에 있었습니다. 바닷물이 들어오는 외딴 뻘밭에 송신소를 세우고 방송을 송신하기 시작한 이래 40년이 훌쩍 지났을 때,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인근에 신도시가 생기면서 민원이 빗발친 것입니다. 송신소의 고압선이 위험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 송신소를 옮겨달라는 민원이었습니다. 당국의 중재로 어쩔 수 없이 송신소를 이전해야 했습니다. 이때 김장환목사님은 어디로 옮겨야 할지, 이전 비용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당황스러웠고 막막했습니다. 그러나 옮기기로 결심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했을 때 한 장로님을 통해서 새로운 부지를 시세보다 훨씬 저렴하게 구입하게 하셨고, 기존 송신소 부지도 땅값이 크게 올라서 이전 비용의 손실을 만회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존 송신소 부지보다 더 입지가 좋은 곳이었습니다. 한국은 물론 북한과 중국에까지 더욱 강력한 전파를 보낼 수 있는, 송신소로서는 더 좋은 입지였습니다. 허가를 받는 까다로운 과정도 비교적 수월하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스러웠고 막막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위기를 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회를 주신 것임을,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김장환목사님은 고백합니다. 이러한 간증을 말씀하시고서 다음과 같이 마무리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 어딘지 모를 때에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을 잡아 인도하겠다고 분명하게 약속하셨습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주시는 주님의 뜻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순종하십시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장환 저에서 발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의 길을 걷기를 원하십니까? 주의 길은 종종 감추어져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곳에, 심지어 상상하지도 않았던 곳에 주의 길이 숨겨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를 주의 길로 몰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의 행사를 알리시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우리가 알고 믿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한 하나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믿고 맡기세요.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양들을 인도하십니다. 비록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고 계시는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분의 손을 꼭 붙잡고 인도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9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주의 길은 바닷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의 길로 반드시 있다는 것이요, 우리가 주의 길로 인도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홍해 앞에서 두려워 떨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만히 서서,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달으라고 말씀하신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입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은 광야에 길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막에 강을 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여러분의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십시오. 주께서 가장 좋은 것으로 예비하고 계심을 믿고 주님의 손길 꼭 붙잡고 올 한 해도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승리하시는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2년 1월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자 (골 2장 6-7절)
오늘 새해 첫주일에 주앞에 나와 예배하는 여러분의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와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될만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교회 성도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핵심적인 말씀입니다. 신앙의 기본과 본질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올 한해에도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이 고백이 그리스도인의 최초의 신앙고백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다”(6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인생의 주인, 생명의 주인, 내 영혼의 주인, 그렇게 주님으로 모시고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고, 날마다 예수님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은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예수님에게 속했다는 고백입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니라 일터에서도, 그리고 가정에서도, 자녀를 양육하고 교육하는 원리에서도, 내 인생의 미래까지도, 내 삶의 모든 영역이 주님의 영역이란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든 주님의 뜻을 분별하여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라는 것은 우리 영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을 신뢰하고 복종한다는 의미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에는 늘 회개를 동반하는 믿음이 요청됩니다. 회개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돌아섬을 의미하는데요, 완전히 돌아서야 합니다. 인간의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뜻하는데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죄는 피조물 즉 지음 받은 자로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조물주가 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오만이요 교만이요, 성경은 그것을 인간의 원죄라고 합니다. 원죄는 무엇을 훔치거나 미워하거나 거짓말하는 것과 같은, 개인이 저지르는 죄를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이어령 선생은 말합니다. “이러한 원죄가 밑바탕에 깔려서 우리 사회 전체 시스템에 내재하고 있는 문명과 사회 자체에 죄가 있다고 봅니다. 부족한 인간이 마치 전능한 신처럼 지식과 지혜를 갖고 선악을 판단하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원죄라는 겁니다. 원죄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없어요.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고, 지혜를 가졌다고 생각하며, 남을 심판하려 하니까요.” (국민일보 2021년 12월 21일)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권위에 복종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죄인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을 수 없고 동시에 영혼의 구세주로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이 신앙고백은 신앙의 시작일뿐 아니라 우리 믿음의 모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캠브리지대학교 채플에서 ″예수의 주되심″이라는 주제로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 한 학생이 루이스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오늘 선생님께서 예수는 본받아야 할 위대한 스승이라고 말했다면, 우리 모두는 선생님에게 박수를 보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예수는 구세주이다 ′는 케케묵은 기독교의 교리를 이야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때 루이스는 그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정말 예수가 완벽한 모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러면 이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믿는가?″
″그렇지요.″ ″그러면 자네에게 묻겠네. 자네는 도덕적으로 완벽한 모델이신 예수를 자네가 완전히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청년은 한참 생각하다가 대답했습니다. ″완전하게 따라갈 수는 없겠지요!″ ″아, 그러면 자네도 도덕적 실패를 인정하는군. 그렇다면 자네의 삶 속에서 실수가 있었고, 죄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가?″ ″아, 인정하지요″ 루이스는 청년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자네에게 필요한 것은 도덕적 모델로서의 예수가 아니네. 자네의 도덕적인 실패와 죄에서부터 자네를 구원할 수 있는 구세주이신 예수가 먼저 필요하다네. 죄인에게는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예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세주로서의 예수가 필요하다네. 구주이신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 비로소 그분은 자네에게 도덕적인 모델이 될 수가 있다네.″ (www.onebody.org에서 발췌)
예수님을 주님으로,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실 수 있는 구세주로 우리는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수님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뜻을 구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행하라!”, 즉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기, 예수님과 동행하기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는 삶인지 본문 7절에서는 네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첫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고, 둘째, 예수님으로 인해서 세워져가고, 셋째, 가르침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마지막으로 감사가 넘치는 삶, 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내리는 삶입니다. 이는 인생의 토대를 어디에 둘 것인가의 문제인데요, 많은 사람들이 삶의 안정성과 견고함을 물질적 기반에 둘 때가 많습니다. 인적 관계에 둘 때도 많습니다. 젊음과 건강에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취와 성공에 두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결국에는 흔들리고 요동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것들에 삶의 토대를 삶는 인생은 결국에는 흔들리고 무너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 때문이라고 이어령 선생은 말합니다. “모든 것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쳐봅시다. 성공해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기업인, 세계 모든 것을 알게 된 과학자, 모든 것을 성취한 이들도 알지 못하는 것, 바로 죽음이에요. 세상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다 죽었어요. 그들 중에 죽음이 뭔지 알고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죽음이 두렵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면 종교는 없을 것이에요. 하지만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 종교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마지막 질문은 죽음에 관한 것이 될 것입니다.” (국민일보 2021.12.22.)
예수님에게 뿌리를 박고 뿌리를 내리는 인생만 영원한 거처에 닻을 내리고 정박한 배와 같은, 삶의 견고한 안정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인생의 항해에서 끊임없이 파도에 따라 요동하고 표류할 수밖에 없는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 안에 거하면 견고한 토대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겁니다. 왜냐면 예수님만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이시오 부활의 보증이셔서 우리 죽을 몸을 살리실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새해에 더욱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는 복된 인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란, 다시 말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뿌리를 예수님께 박을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식물이 자라듯이, 건축물이 세워져올라가듯이 그렇게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면서 신앙이 자라나고 인격이 자라나고 소망이 자라나고 인생을 통달해가는 것입니다. 오늘이 주어진 이유는 어제보다 성장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내일이 주어지게 된다면 내일이 주어지는 이유 또한 오늘보다 성장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새해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성경을 알아가고 인생을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도록 성장해가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11절에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는 성장해서 더 이상 어린 아이와 같이 생각하지 않아야 하고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곽선희목사님의 설교집에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에 관한 설교에서 그는 미국의 부흥사 무디 목사님이 한 말을 인용합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살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르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성숙도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분은 강조합니다. “여기 ‘장성한 사람’이라는 말에 깊은 뜻이 있습니다. 어떻게 성장하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성장하도록 키워가고 계십니까. 많은 환난과 시련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성령을 통하여, 많은 사람과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성장해갑니다. 평안하고 안일한 가운데서 성장할 수는 없습니다. 비바람을 많이 맞는 나무라야 튼튼한 나무가 됩니다. 인격은 많은 환난과 시련을 겪음으로 높은 수준의 성장을 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크게 성장한 사람은 유치한 것을 버린다 하였습니다. 큰 것을 발견한 사람, 참사랑을 발견한 사람은 모든 유치한 것으로부터 벗어납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은 전에 소중히 여기던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나니까 전에 소중하던 것을 분토와 같이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노라고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다 쉽게 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큰 것, 소중한 것을 깨닫고 나면 시시한 것은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 <지식을 버린 자의 미로> (곽선희 저, 17-18쪽)
그렇습니다. 예수님께 뿌리를 내린 식물처럼, 예수님의 터 위에 세워진 건축물처럼, 어제와 다르게 오늘은 한 층이 더 올라가야 합니다. 오늘과 다르게 내일은 더욱 아름답게 성장해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그 중심성이 더욱 견고해지고 성장해가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 다시 말해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이란 첫째는 인생의 토대, 무엇이 견고한 토대이며 진정한 인생의 안정성인가의 문제였다면, 즉 예수 그리스도께 뿌리를 내리고 뿌리를 박으라는 것이었다면, 둘째는 인생의 성장, 그리스도 안에서 세움을 받고 세워져가는 것에 관해서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셋째는 믿는 것이란 믿는 것을 아는 것이고 믿는 것을 행하는 것, 행하는 것이 진정 믿는 것이며, 즉 가르침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한결같이 그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충성됨이요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헌신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영국 성공회의 총 본산이요 성공회 수장은 켄터베리 대주교입니다. 켄터베리라는 영국 남부의 지역의 교구를 책임지면서 전 세계 영국 성공회를 관장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켄더베리 교회에 니콜라이라는 집사가 있었습니다. 열 일곱 살에 교회를 관리하는 사찰집사가 되어 평생을 교회 청소와 심부름을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고 맡은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하는 일 중에는 시간에 맞춰 교회 종탑의 종을 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 종을 얼마나 정확하게 쳤든지 런던 시민들은 도리어 자기 시계를 니콜라이 집사의 종소리에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가 그렇게 교회에 열심히 일하면서 키운 두 아들은 캠브리지와 옥스포드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아들이 아버지 니콜라이에게 말하였습니다. “아버지, 이제 일 그만 하세요.” 그러나 니콜라이는 “아니야, 나는 끝까지 이 일을 해야 해.” 그는 76살까지 종을 치며 교회를 사랑하고 관리하였습니다. 그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족들이 그의 임종을 보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종을 칠 시간이 되자 일어나 옷을 챙겨 입더니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가 종을 쳤습니다. 얼마간 종을 치다 종탑 아래에서 그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엘리자베스 여왕은 감동을 받고 영국 황실의 묘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귀족으로 대우해 주었으며 모든 상가와 시민들은 그 날 하루 일을 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심지어 유흥주점도 문을 열지 않자 자연히 그가 세상 떠난 날이 런던의 공휴일로 되었습니다. 열일곱 살 때부터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사람들에게 종을 쳤던 그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된 것입니다.엘리자베스 여왕시대에 수많은 성직자들이 죽었으나 황실의 묘지에 묻히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단지 하찮게 보이는 예배당 종치기를 충성스럽게 한 그는 황실의 묘지에 묻히는 영광과 자기가 죽은 날이 공휴일이 되는 명예도 함께 얻었습니다.” <‘햇볕 같은 이야기’ 중에서 발췌>
사도 바울은 아들과 같이 여기는 디모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 3:14-15) 배우고 확신하게 된 말씀, 그 말씀에 따라 세워진 신념, 그 믿음과 신념에 따라 확신한 바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확신하고 있는 진리에 따라 그 진리를 붙들고 끝까지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아닙니까? 그리스도를 위해서 끝까지 헌신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끝까지 확신한 바를 실행하고 그 진리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삶,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감사함이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로 가득한 입술이요 감사로 가득한 인생입니다.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평생 감사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 오늘도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부활의 소망이 있으니까 감사, 기도할 수 있음에 감사, 환난 중에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감사, 늘 감사가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어령 선생은 라틴어로 된 3대 명구를 말합니다: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제국 때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국에 돌아오는 장군이 개선행진을 할 때 옆에서 해골을 들고 있는 노예가 장군의 귓속에 계속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속삭였다고 하죠. 그만큼 중요한 진리죠. 죽음을 기억하라는 게. 특별히 승리의 순간에 영광의 순간에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더욱 붙들어야 할 명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카르페 디엠’ 곧 현재를 붙잡으라,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것입니다. 현재의 기회를 잘 붙드라는 것이죠. 하여튼 아무리 미래를 위한 것이라도 현재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러지 말고 현재를 충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모르 파티’ 곧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현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재능,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과도 같은 것들을 먼저 사랑하고, 그리고 그 현실에서 현실을 극복할 방법들을 찾아내야겠죠. ‘아모르 파티’는 자족하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자족이요 우선 감사입니다. 그리고서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요 꿈을 꾸는 것입니다.
소극적인 차원에서 감사하는 정도로 그치지 말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입니다. 늘 감사, 감사가 넘치는 삶이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 하나님을 믿으니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늘 감사하는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해를 맞이하는 첫 주일에 신앙의 기본과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이요 구원하여 주시는 구세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은 사람들의 이후의 삶 역시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것,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하며 살아간다는 것은 크게 네 가지로 제시됩니다. 가장 먼저는 예수님께 뿌리를 박는 인생입니다. 삶의 토대와 안정성을 오직 예수님께 두는 인생입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성장해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해서 세워지는 것입니다. 인격과 믿음의 성장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받은 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믿는 것을 행하는 것이요 행하되 끝까지 진리의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끝까지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한결같이 충성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감사가 넘치는 삶입니다. 감사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하면 감사하게 됩니다.
새해에도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시는, 예수님과 동행하시는, 생명 되시는 예수님과 더욱 깊은 교제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31일 동산교회 송구영신예배 설교 (온라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사 62:6-12)
이땅에 많은 교회가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다 한분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늘 바라보는 성도, 안타깝게 여기며 더욱 사랑하여주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자녀들인 우리 모두를 100% 전심으로 다 각각 사랑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라도 하나님이 나를 제일로 사랑하신다, 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더욱 각별히 돌보아주시는 성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더욱 기억하시고 주목하시는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욱 특별하게 생각하고 친밀하게 다가오시는 자녀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땅의 수많은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를 우선적으로 떠올리실까, 또 우리 동산교회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누구를 제일 먼저 떠올리실까, 누굴까요?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납니다만 하나님이 친구처럼 여기고 벗 삼은 이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자기의 벗이라고 인정하셨고, 또 하나님은 모세와 회막에서 교제할 때에 친구와 이야기함같이 모세와 대화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고 그를 이어서 왕을 세울 때 이스라엘 전역을 샅샅이 뒤진 것처럼 성경은 보도합니다. 주의 종 사무엘로 하여금 사울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세울 사람을 찾아나서도록 하시는데요, 물론 하나님은 이미 찾으셨지요. 마치 구글 어스가 조그마한 동네, 자그마한 집까지 위성에서 클로즈업 해서 찾아내는 것처럼, 유대 땅 조그마한 동네 베들레헴에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을 찾아내셨습니다. 다윗을 찾으시고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행 13:22)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찾고 또 찾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찾은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2021년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2022년을 맞이하면서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바라보고 찾고 찾을 때 발견되는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자’는 각오와 결심으로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성도, 하나님이 특별히 더욱 각별히 자신의 임재를 허락하시는 성도, 하나님이 친구와 같이 이야기나누는 친밀한 성도,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들어서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시는 성도,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러한 포부와 기대를 가시고서 맞이하시는 2022년 새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 이사야서 본문에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상황을 돌아보시게 하는 사람,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에 주신 찬란한 약속들을 속히 이행하게 하는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시는 것처럼 그 사람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하게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찾으시는 겁니다. 이런 사람은 파수꾼과 같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여호와로 이땅을 돌아보게 하는 자’, ‘여호와로 우리 교회를 찾아오게 하는 자’, ‘여호와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게 하는 자’, ‘여호와로 약속하신 것들을 이루는데 있어서 쉬지 못하시게 하는 자’, ‘여호와로 코로나로 인해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이 땅을 치유하고 회복하게 하는 자’, 오늘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의 마음에서부터 ‘주님, 제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겠습니다, 라는 소망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포부를 가지고서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있는 가정은 하나님이 더욱 특별한 사랑으로 돌보아주실 겁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많은 교회를 하나님이 더욱 특별히 기뻐하실 겁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일하는 일터를 하나님은 더욱 축복해주실 겁니다.
그러면 어떠한 사람이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사야 62장을 근거로 세 가지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첫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과 사귐과 교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사야 62장 4절을 보십시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 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결혼한 부부와 같은 친밀함을 지닌,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헵시바’와 ‘쁄라’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입니다.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에게 있다’는 뜻이며 ‘쁄라’는 ‘결혼한 여인’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 마치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듯이 그렇게 기뻐하는 신랑과 신부의 친밀한 관계를 지닌 자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고 또한 더욱 알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 늘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또 주님께 사랑받는 성도입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누구보다도 주님을 더 소중히 여기며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한 왕이 여자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고 가장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고 싶었습니다. 결국 왕은 비록 가난하지만 지혜롭고 아름다운 처녀를 왕비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귀족들 중에는 여기에 불만을 품고 왕비를 무시하며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왕비를 쫓아내고 자기들이 원하는 여인을 왕비로 세우려고 여러 가지 음모를 꾸며서 왕비를 모함하였습니다.
왕은 이들의 계속되는 음모와 계략에 넘어가 결국 왕비를 폐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왕비를 내보내려고 하니까 너무나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왕비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도록 하였습니다. 왕은 가난한 왕비가 값진 보물이라도 가져가서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왕비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 하는 것을 하나 가져가도록 한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비는 술을 준비해서 왕에게 이별주라고 드렸는데 이 술에는 수면제가 들어 있었습니다. 왕은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 후에 왕이 깨어보니 마차 안이었습니다. 옆에는 왕비가 앉아 있고 밖을 보니 마차는 시골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으니까 왕비가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저에게 왕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하나 가지고 가도록 허락해주셔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폐하를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왕은 왕비의 지혜와 사랑에 감동을 받아 다시 왕비를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왕비는 정말 지혜로운 선택을 했습니다. 왕비는 진심으로 자신이 가장 귀하고 사랑하는 왕을 모시고 함께 했을 때 그녀는 다시 왕비의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 누구십니까?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하나를 선택하라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혹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http://www.fgnc.org/board_nLri15/50953에서 발췌)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시고 주목하시는 자녀가 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헵시바’와 ‘쁄라’와 같은 주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의 큰 사랑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둘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파수꾼처럼 깨어 있고 주야로 잠잠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이것은 깨어 있어서 주야로 기도하는 성도를 가리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로 인해서 여호와께서도 쉬지 못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기도가 없다고 해도 하나님은 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말합니다. 잠잠하지 않는 성도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성도들로 인해서도 하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일하시고 졸지 않으시고 깨어 있으신다는 겁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연결된 핫라인입니다. 한 곤충학자가 거미들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거미줄에 작은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어미 거미가 나타나 새끼들을 챙기는 것이었습니다. 가령, 거미줄이 흔들려 새끼들이 떨어지려고 하거나 다른 위험한 곤충이 접근해오면 갑자기 어디선가 어머 거미가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곤충학자는 다른 거미들에게도 이러한 현상이 있는지 세심하게 관찰했습니다. 다른 거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엄마 거미가 어떻게 새끼들의 위험을 눈치 챘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새끼 거미들은 비슷한 모습으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계속 정밀한 관찰의 결과 그 이유를 발견했습니다. 거미 새끼들의 몸에서 얇은 실이 나와 있고 그 줄이 엄마 거미와 이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새끼들이 거미줄 밖에 나가 위협을 당해 그 줄이 팽팽해지면 엄마 거미가 신호를 접하고서 어김없이 재빨리 달려오는 것이었습니다.
새끼 거미의 몸에 나와 있는 줄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기도 역시 성도들의 생명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연결될 핫라인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로 하나님과 연결되게 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신음의 기도라는 신호를 들으시고 응답해주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핫라인입니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하면 이처럼 하나님의 세밀한 도우심을 늘 받을 수 있습니다. (<김장환목사와 함께, 하나님은 나의 힘이요 구원이십니다>에서 발췌)
우리의 기도는, 특별히 꾸준한 기도, 정규적인 기도,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세한 것까지 챙겨주시고 돌보아주십니다. 이러한 기도가 우리 입술에서 우리 마음에서 주야로 잠잠하지 않을 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셋째,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는 주를 위한 열심을 가지고서 주의 일에 헌신하고 주의 뜻을 이루고 사명을 감당하는 자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성문으로 나아가라 나아가라 백성이 올 길을 닦으라 큰 길을 수축하고 수축하라 돌을 제하라 만민을 위하여 기치를 들라” 깃발을 들고 뭔가 앞장서는 사람 같지 않습니까? 주를 위한 열심과 열정이 특별한 사람 같지 않습니까? 주님이 하시려는 일에 맨 앞장서서 주의 일에 열정과 헌신으로 임하는 사람입니다. 주의 일에 힘쓰는 사람입니다. 맡은 바 사명을 이루어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주님이 이루라고 허락하신 사명을 위해서라면 가장 큰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앞장서서 주의 일을 이루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농구의 신이라 불리며 미국 NBA에서 한 시대를 평정했던 마이클 조던을 잘 아실 겁니다. 미국의 동기 부여 전문가 중 한 명인 팻 윌리엄스라는 사람이 그의 책에서 마이클 조던을 시대의 영웅으로 우뚝 서게 한 그의 모든 특성들을 면밀히 분석했습니다. 그는 조던의 현란한 플레이와 농구 기술, 체력을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화려한 재능 이면에 오히려 숨어 있는 조던의 피나는 노력, ‘지금 여기에’ 100% 몰입하는 집중력, 열정, 집념 승부근성 등을 꼽았습니다. 한 번은 농구 캠프에서 한 참석자가 조던에게 물었습니다. “어렸을 때 하루에 몇 시간씩 연습했나요?” 그러자 조던은 “시간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았어요. 시계를 본 적도 없어요. 지칠 때까지, 아니면 어머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를 때까지 연습했거든요.” 한마디로 자신의 일에 대한 열정이 그를 농구의 천재로 만든 것입니다.
스포츠, 음악, 예술, 학문 등 어느 분야에서든 진정한 성공자들의 공통점을 찾으라면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크랩스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열정 없는 성공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승리하는 생활을 하는 비결은 가슴을 열정으로 가득 채우는 데 있습니다. 열정이야말로 온갖 장애와 싸우게 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인생의 순간 순간을 즐기게 합니다” (http://cyw.pe.kr에서 발췌)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헌신과 열정으로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마음에 두시고 기억에 두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많은 성도가 이땅에 있고, 수많은 교회가 이땅에 있습니다. 그만그만한 성도로 남고 싶지 않으시죠? 우리 교회가 고만고만한 교회로 평가받고 싶지 않으시죠? 하나님이 특별히 주목하는 성도와 교회, 하나님이 특별히 돌보아주시고 사랑하여주시는 성도와 교회,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억하게 만드는 성도와 교회, 그러한 성도가 되고 우리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새해를 맞이하면서 여러분의 심령에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겠다는 소망이 간절히 생겨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 그래서 내가 몸담고 있는 가정과 교회와 일터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돌봄과 사랑과 축복을 받는 공동체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나로 말미암아 내가 속한 공동체에 하나님의 큰 복이 흘러넘치면 얼마나 보람되겠습니까? 새해에는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로 쓰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를 위해서 세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과 연합을 가진 성도, 마치 부부와 같은 친밀함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하는 성도, 헵시바와 같은 성도. 그리고 늘 깨어 있어서 시시때때로 쉬지 말고 기도하는 성도, 계속 잠잠하지 않는 깨어 있는 성도.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더욱 열심과 열정을 가지고 앞장서서 주의 일에 힘쓰며 주신 사명을 이루어드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성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성도를 찾으십니다. 새해에는 더욱 여러분 모두가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성도’가 되시므로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을 더욱 크게 받아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2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알파와 오메가 (계 22장 12-13절)
오늘은 2021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에 역사를 마무리하러 오실 예수님의 재림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마지막 사건입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첫 사람 아담의 범죄 직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고, 창세 전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의 협약으로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셨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땅에 보내셨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새로운 창조를 단행하셨고,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우주만물을 통치하시도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교회에 부어주셔서 구원 역사를 이땅의 교회가 계승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의 가장 마지막 사건은 이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구원 역사의 다음 사건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 사이에 구원 역사의 중요한 사건은 없습니다. 이미 종말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이미 역사는 종말에 이르렀고 종말이 시작되었습니다. 종말의 완성은 예수님의 다시 오심으로 최종적 완성에 이를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시작된 교회시대에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특별한 사건은, 즉 다음 사건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내가 속히 오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로 다음 사건이기 때문에 속히 오시는 것이요 임박한 재림이요 때가 가까운 것입니다. 비록 그때 이후로 2천년이 흘렀고 또 얼마나 더 있어야 예수님이 재림할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시간법에서는 언제나 예수님의 재림은 임박해 있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밤중에 도둑같이 오실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성도들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확신하지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를 했지만 롯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던 것처럼 지금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때도 예수님의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나봅니다. 베드로 사도가 재림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 3-4절입니다. “먼저 이것을 알지니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여 이르되 주께서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만물이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라는 점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도, 역사의 종말과 심판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세상이 있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것으로부터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임을 알 수 있고, 노아 시대 때도 세상은 이미 물로써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말씀은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옛 세상은 불사르게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베드로후서 3장 5-7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입니다: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그들이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어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하나님은 노아 시대 때는 물로써 세상을 심판하셨지만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는 불로써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왜 불로 심판하시느냐면, 물에 의한 심판은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지 못하지만 불에 의한 심판은 악한 자들을 멸망시킬 뿐 아니라 다 태워버림으로써 옛 세상을 정화시키고 새로운 ‘새하늘과 새 땅’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역사를 끝내러 오실, 그리고 종말을 완성하러 이땅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이로써 재림 신앙으로 무장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울러 재림 신앙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쳐야 할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에게 구원의 완성이라는 상을 주시는 때요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계시록 22장 1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주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실 상은 구원의 완성이요, 우리의 비천한 몸을 예수님의 영광스런 몸과 같이 변케 해주시는 것이요, 더 이상 슬픔과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주시는 상은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상입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에 근거하여 구원을 받게 해주시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심판하시러 이땅에 다시 오실 때, 즉 최후의 심판 때에 예수의 십자가의 피로 씻음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요 믿음의 열매로서 선한 행실이 우리의 믿음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한 대로 갚아주시는 예수님의 심판에 의해서 더욱 구원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라면 이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한 긴 논의를 마치면서 최종적으로 결론적으로 한 말이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5장 58절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을 줄 앎이라” 재림 신앙으로 무장한 성도는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됩니다.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에 직분에 충실하고 맡겨진 일에 헌신하고 주를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의 일’은 교회 일뿐 아니라 주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뿐 아니라 여러분이 이 사회를 위해 섬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매사 성실하게 모든 일을 ‘주께 하듯’ 수행해야 합니다.
청교도 시대에 영국에서 의회가 모였습니다. 여러 가지 나라 일을 의논하는데 그 때는 신앙이 좋은 영국 사회인지라 많은 사람이 가까운 장래에 예수께서 재림할 것이라는 말세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국회의원들이 모여 국사를 의논하는 가운데 갑자기 천지가 변하고 하늘에 이상한 징조 같은 것이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의사당에 모였있던 여러 국회의원들이 천지가 심상치 않으니까 이제 주님께서 재림할지 모르겠는데 우리가 이렇게 한가히 국회에 앉아 있기만 해서는 되겠는가 어서 폐회하고 준비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한 청교도 국회의원이 일어서서 말하기를 "만일 이 시간에 주님께서 임한다고 할 때도 우리는 그대로 앉아서 수천 수만 사람을 대신해서 우리의 의무를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것을 주님께서 보시면 하나님께서는 더 기뻐하실 줄 압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이 더 가까울수록 우리는 맡은 임무를 더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http://cyw.pe.kr/xe에서 발췌)
여러분은 오늘이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이라면,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어떻게 사시겠습니까? 한결같이 주의 일에 헌신하며 충성하는 것이 주님을 가장 잘 맞이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재림은 마침입니다. 예수님의 창조와 재림은 각각 시작과 마침입니다. 성경은 창조로 시작하고 예수님의 재림으로 마칩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성경은 시작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끝책 요한계시록의 가장 끝 말씀 계시록 22장 20-21절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이렇게 성경은 마칩니다. 주님의 손이 시작하시고 친히 마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이는 그리스어 알파벳 첫글자와 마지막 글자입니다. 예수님은 시작과 마침이십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역사의 시작과 끝이요 창조와 창조의 완성이시오, 이뿐 아니라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받아들일 때 주님이 우리를 인도해가시고 완성해가실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이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확신을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분명하게 피력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손은 시작하는 손이요 또한 마치는 손입니다. 주님의 손과 팔이 얼마나 든든합니까? 그러니 우리는 찬송가 가사처럼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라고 찬송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과 팔에 안겨서 평안함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시작도 주님과 더불어, 마침도 주님과 더불어!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연말, 또 주님과 함께 하는 연시, 연말연시를 주님과 함께! 새해를 시작하면서 새벽 작정기도회로 새해를 열고 구상하거나 제가 아는 분은 금식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 새해를 열기 위해서입니다.
시작과 마침이 되신 주님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우리는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하면 누가 떠오르십니까? 에녹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5장 21-22절입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것을 뜻합니다. 에녹에 대해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으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창조주요 재림주로서 알파와 오메가 되시고 시작과 마침이 되심을 믿는다면 이땅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늘 하나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가는 겁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께 기도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 곧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해서,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이유에 대해서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이는 휴거가 아니라 에스코트를 말함입니다. 귀한 손님이 오실 때 집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고 집안으로 모시고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가장 귀한 손님, 재림주로 이땅에 오실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가 공중으로 올라가서 맞이하고 이땅에 들일 것입니다. 그때에 새 하늘과 새땅으로 변화된 이땅에서 주님과 항상 함께 있으려고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주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아멘.
셋째,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재림하시기 전에 준비를 잘 갖춘, 우리는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까요? 베드로후서 3장 10절-14절입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면서 스스로 다음과 같이 늘 질문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우리는 마땅히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단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점과 흠’은 하나님께 열납되지 못할 부정하고 의롭지 못한 것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부정한 것들을 늘 성령의 불로 태우고 소멸시켜야 합니다. 계속적으로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사의 위대한 인물인 어거스틴은 젊은 시절에는 방탕한 시간들을 보냈으며,결혼도 하지 않고 한 여자와 동거하여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거스틴이 32세에 밀라노에서 유명한 암브로스의 설교를 듣다가 회심하게 됐습니다. 회심한 후 성경도 부지런히 읽고 기도하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어느 날,길가에서 옛날에 드나들던 술집의 여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거스틴에게 “왜 요즘은 저희 집에 들르지 않나요”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은 “옛날의 어거스틴은 죽었고 나는 새 사람이 됐소”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속에는 옛 성품이 우리 안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우리의 새 사람을 방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죄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날마다 변화의 삶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옛사람을 끊임없이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계속적으로 입어야 합니다.
(햇볕같은 이야기 /피영민 목사 글에서 발췌)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사모하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다. 만약 오늘 밤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나요?, 이 질문을 스스로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4장 7절에서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음을 깨닫는 사람이라면 기도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정신을 차리라’는 말은 잡념을 버리고 다른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근신하라’는 것은 없어져버릴 이 세상에 대한 관심과 쾌락에 기울어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므로 깨어 있으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13절에서 예수님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적 각성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언제 주님께서 오실지 아무도 모르는 바, 주님이 언제 다시 오신다 할지라도 자신 있게 맞이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을 것을 촉구한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20221년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역사의 대미를 장식할, 역사를 마무리하고 창조를 완성하러 이땅에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이 반드시 있을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한 재림신앙으로 무장돼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 구원을 완성하러 오시는 재림이므로 우리는 기쁘게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재림신앙을 가진 자라면 이땅에서 주님께 충성되고 주의 일에 힘쓰고 헌신된 자가 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이시오 시작과 마침이신 분임을 믿고 연말연시를 주님과 함께, 특별히 마무리도 주님과 함께, 시작도 주님과 함께, 그렇게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바랍니다. 시작과 마무리 사이에서 우리는 늘 주님과 동행하며 인생길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준비해야겠습니까? 늘 ‘내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를 질문하고 거룩한 생활과 경건한 행실로 성장해가야 합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늘 새사람을 입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늘 깨어 기도하므로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시므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 듣고 면류관을 얻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25일 동산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눅 1:46-56)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이 되셨다는 소위 성육신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와 같이 아기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어떠한 좋은 영향과 확신을 줄 수 있을 것인지를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 아기를 잉태한 젊은 여인 마리아의 마음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고 오늘 우리에게는 어떠한 위안과 확신을 가져다줄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위대한 설교자인 마틴 로이든 존스 목사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묵상하고서 성육신 메시지에는 3가지 원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성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약속의 성취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된 최고의 사례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심을 보여 준 최고의 사례입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으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십니다. 구약의 모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예’가 되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메시지에 담긴 두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의 인간 되심이 무엇을 보여주냐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과 방식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방법과 방식을 환히 드러내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오래 기다리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는 않으셨는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잊으신 듯 보입니다.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실 뿐 아니라 잊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고 많은 인내가 필요한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끝을 보시는 분입니다. 영원한 현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처럼 시간의 흐름 속에 계시지 않으시고 시간의 창조주로서 시간 바깥에 계십니다. 우리는 현재 상황을 보고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것을 이루셔서 마침내 우리에게 자비와 축복을 베푸시기까지 우리에게는 오랜 기다림이 필요하고, 그 기다리는 기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잊지 않으셨나, 라고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약속을 기다리다가 지쳐서 약속하신 것을 잊으셨나고 생각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패배하는 것도 허락하시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몸에 잉태된 아기에 관한 소식을 전달 받고 오늘 본문의 찬양을 부르기까지 2천년이 필요했습다. 그 2천년의 기간 동안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기도 했고, 나라가 멸망해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고, 마리아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오늘 그 시간에도 로마 제국에 압제에 시달리는 상태였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이 성취되기까지 약속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명백한 패배를 허락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약속을 받았으나 패배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그 약속을 끝까지 붙들 수 있도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간간이 계속해서 격려하시고 위로해주십니다. 어느 때는 약속하신 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하심으로써 약속을 붙들고 가도록 격려해주십니다. 비록 소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작은 물방울들을 끊임없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약속을 붙잡고 인내하며 살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은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축복을 우리가 누리게 되며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경험하게 되는 겁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약속해주시고 그 약속을 붙들고 나가는 그들을 인도해가십니다. 약속이 더디 이루어지는 것 같아 잊으신 듯해 보이고 심지어 약속과는 정반대로 상황이 이루어져서 패배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작은 격려들과 위로를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그리고 약속을 반복해서 말씀해주심으로써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갈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때에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어주시고 한없는 자비와 축복을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성육신 메시지에 담긴 세 번째 원리는 구약의 모든 약속을 성육신을 통해서 이루어주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신약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반드시 이루어주실 거라는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땅에 오심이 그분이 다시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약속을 성취하실 것을 보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부활의 소망, 우리의 낮은 몸이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될 거라는 영광의 소망,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 있도록 거룩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될 거라는 소망,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아서 더 이상 우리의 눈에 눈물과 고통이 없게 될 거라는 소망, 이 모든 약속을 하나님께서 또한 신실하게 이루어주실 것임을 우리는 성육신을 통해서 더욱 확신하게 되는 겁니다. (책 <마틴 로이든 존스의 내 구주 예수> 100-137쪽 참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여인 마리아의 심정 변화를 들여다보면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말한 세 가지 성육신 메시지의 원리에다가 한 가지 더 생각해볼 수 있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50절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성육신이 인간의 근원적인 두려움이라는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두려워합니까? 두려워하는 이유가 수도 없이 많고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없을 때도 막연한 두려움에 시달리는 연약한 인생들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해내고 그저 살아가는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고, 두려움 없이 미래로 내달리는 사람보다는 현재의 두려움과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괜히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무려 365번이나 말씀한다고 합니다. 매일 들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에 365번이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두려움의 문제는 언제든 우리를 습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본문은 소위 ‘마리아의 찬가’ 혹은 ‘마리아의 찬양’이라고 불립니다. 아마 십대 초중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리아라는 가냘픈 여인에게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너는 곧 임신하게 될 것이다”는 소식이 전달됩니다. 당시 풍습대로 이미 결혼할 상대가 정해져있던 마리아에게 임신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았을 겁니다. 이 소식에 대한 마리아의 첫 번째 반응은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였습니다. 누가복음 1장 34절입니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마리아는 너무나 당황스럽고 놀랍고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결혼하기도 전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마을 사람들이 알게 되면 그 마을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도 있고 심지어는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을 법한 끔찍한 일이 자신에게 벌어질 수도 있는 심각한 사안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고지를 전달받고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여느 십대 여자 아이처럼 울고불고 소리 지르고 화를 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은 놀라고 혼란스럽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두려움으로 가득 찼을 겁니다. 비록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찾아가서 임신 소식을 알리기 전에 말한 인사말이 “은혜를 입은 자야”였고 또 마리아에게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는 말을 했지만 마리아의 두려움을 진정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겁니다. 누가복음 1장 28-31절을 보겠습니다. “그에게 들어가 이르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가 생각하매 천사가 이르되 마리아여 무서워하지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느니라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처럼 마리아에게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무서움이었고 자신에게 어떠한 미래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과 무서움이었습니다. 겁에 질린 상태죠.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마리아는 천사가 전한 소식을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가브리엘 천사가 떠나자 마리아가 무엇을 합니까? 자신의 친척이었던, 그리고 최근에 임신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를 찾아갑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는 유대 산골 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방금 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임신의 소식을 들었던 마리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논의하고 상의하는데 그들이 적격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왜냐면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도 최근에 임신했는데 나이가 많은데다가 오랜 불임이어서 불가능한 임신을 한 경우였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이 낳은 아들은 세례요한이죠. 엘리사벳은 자신처럼 불가능한 임신을 하게 된 마리아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장 4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안정을 되찾은 마리아는 오늘 본문의 소위 ‘마리아의 찬가’를 부르게 됩니다. 마리아는 상당히 사려 깊은 어린 여인이었고 구약성경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약속하신 구원의 위대한 약속을 자신을 통해서 이루실 거라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자신의 몸에 잉태케 된 아기 예수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 54-55절을 보십시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잊으신 것처럼 보인 하나님께서 오랜 기다림의 끝에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기억해내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셔서 약속을 기억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이스라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고 계심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신에게 임신 소식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무서움을 가져다 주었다면, 이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깨달은 마리아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소위 하나님 경외의 마음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50절의 고백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여기서의 두려움은 하나님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나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경험하고 나서 생겨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게 겁에 질려서 생겨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게 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하나님에게서 도망가버리는 그러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이로움을 경험하고서 하나님의 어떤 속성을 깨닫고서 마음에 일어난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심입니다.
마리아가 그런 삶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큰 일을 위해서 선택을 받는다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환영할만한 일이라기보다 어느 때는 인생의 큰 도전으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아마 마리아에게도 ‘왜 하필 나야’, 이런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운 마음뿐이었겠죠. 천사의 소식을 듣고서 곰곰이 생각해보았을 것이고 이스라엘 민족의 오랜 소망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아마 엘리사벳을 찾아가서 큰 위로와 확신을 얻게 되었던 듯합니다. 자신이 진정 하나님의 큰 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엘리사벳의 말에 큰 위로와 힘을 얻게 된 듯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어린 마리아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리아의 찬양’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합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마리아가 깨달았고 그 전능하신 분이 자신에게 아기 예수를 임신케 한 것은 비단 한 아이를 임신하게 되는 정도의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어마어마한 큰 일을 자신에게 행하심으로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인류를 구원해내기 위해서 큰 일을 행하신 사건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이 뒤따릅니다. 전능하실 뿐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체험한 것입니다. 전능하심과 거룩하심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도 느꼈습니다. 이스라엘을 얼마나 불쌍히 여기셨으면 이 큰 구원을 이루어주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을 잊으신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결코 잊지 않으셨고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이스라엘을 긍휼히 여기셨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그러한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라고 말한 것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마리아에게 지금 있는 두려움은 비겁한 두려움도 아니요 지옥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처벌에 대한 두려움도 아니요 자신의 인생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된데서 비롯된 경건한 두려움이요 하나님의 경이로운 속성을 깨닫고 나서 생겨난 경외감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거룩, 위엄, 영광, 위대함과 영원하심을 어느 정도 깨달을 때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겁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라도 하나님을 겁낼 때가 있습니다. 죄를 짓고서 두려운 마음이 생겨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도록 만드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무서워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말 그대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두려운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두려움은 사탄의 역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탄의 의도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마음 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켜서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게 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행하시는 사역은 그것과는 정반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경이로운 두려움이 생겨나게 하십니다. 결국에 우리가 하나님께 기꺼이 마음을 드리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이끌어주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32장 40절에서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함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구지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참되고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자비와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생겨난다. 이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지닌 달콤한 맛을 체험하며 그분의 은총 가운데만 모든 행복이 존재함을 깨달을 때, 깊은 내적 외경심과 그분을 공경하는 마음을 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은 그분의 영광스러움을 바라볼 때 생겨난다. 다시 말해, 그 두려움은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제대로 헤아릴 때 나타난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경건한 두려움은 주로 하나님이 우리 영혼에 부어주신 사랑과 인애를 아는데서 흘러나온다. 그 두려움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자비를 느끼거나 소망할 때 생겨난다. 실로 그분의 자비를 인식하거나 기대하는 일만큼 우리 영혼에 그분을 두려워할 의무를 강력히 부과하는 것은 없다.” 스펄전 목사님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분을 겁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더욱 두려워할수록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떨며 즐거워하다> 마이클 리브스 저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독생자를 이 세상에 아기로 보내시고 인간이 되게 하심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이 얼마나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신가를 입증하셨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거룩하심,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깨닫게 됩니다. 성육신을 통해서 알게 된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알 때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생겨납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두려움이요, 이 두려움 가득한 사랑만이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온갖 두려움들을 물리칠 수 있는 참된 두려움입니다. 오늘 성탄절 아침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신 성육신을 깊이 생각해봄으로 말미암아 여러분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을 향한 경외하는 마음이 생겨나셔서 여러분의 마음에 있는 온갖 두려움으로부터 참된 자유와 해방을 누리시는 기쁜 성탄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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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
▶찬송 - 32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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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635장
■2021년 12월1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계 12장 1-6절)
돌아오는 토요일은 이땅의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절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인간이 되셔서 아기로 태어나신 날을 축하하는 성탄절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없었을 겁니다.
성탄을 앞둔 오늘 주일예배에 참여하시는 여러분의 심령에 성탄의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어떻게 오셨는가에 대해서 신약성경은 다양하게 예수님의 오심을 증거합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요셉이라는 사람과 정혼한 상태였던 마리아라는 여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출생하셨음을 증거합니다. 특별히 마태복음은 성령으로 잉태되신 아기 예수님을 강조합니다. 반면에 요한복음에서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이 강조됩니다. 사도 바울 서신에서는 하나님이 때가 되었을 때 아들을 이땅에 보내셨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완전한 인간이셨던 예수님께서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실 수 있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으로 묘사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은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인간으로서 모든 것을 겪어보셨기 때문에 우리의 슬픔과 아픔에 공감해주실 수 있는 분이요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계시록 본문도 여자가 낳은 아들을 말씀하고 있는데 메시야로서 이땅에 출생하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다른 성경 본문과는 전혀 다른점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아기로 출생하셨을 때 출생부터 엄청난 사탄의 방해와 시련과 압제와 핍박이 있었음을 증거합니다.
아이를 낳은 여자를 묘사할 때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본문 1절)고 요한은 자신이 본 여자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특별히 구약 교회를 가리킵니다. 머리에 열두 별의 관을 썼다고 했는데 열 두 별의 관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가리킵니다. 특별히 ‘관’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왕노릇에 참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해와 달과 별로 여자의 외모를 그리는 것은 여자가 빛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여자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의 교회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존재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즉 하나님의 눈에 비친 교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메시야 예수를 출산하기 위한 산통입니다. 이러한 교회의 산통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의 후손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을 조성하신 목적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땅에 보내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적에 도달하기까지 이스라엘 역사는 해산의 고통으로 점철된 역사였던 것입니다. 박해로 인한 고통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은 역사를 통해서 많은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은 메시야를 이땅에 보내시기 위해서 겪어야 했던 고난이었습니다.
한편, 용 곧 사탄은 4절에 보니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4절) 했습니다.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다는 것은 사탄이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땅에 던져진 별들은 사탄의 속임수와 유혹에 미혹당한 이스라엘을 가리킵니다. 해산한 아이를 삼키고자 했다는 것은 출생 직후부터 메시야를 없애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비단 출생 직후 뿐 아니라 사탄이 이후의 예수님의 전 생애 속에서 예수님을 핍박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탄생 직후 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려고 했던 계획, 지상 생애 동안에 끊임없이 예수님을 함정과 모함, 고난 가운데로 집어넣으려고 했던 것, 그리고 마침내 저주의 십자가로 예수님을 처형하려고 했던 것 등이 예수님을 삼키려는 사탄의 공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탄에 대해서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3절)라고 묘사합니다. 여기서 일곱 머리와 열 개의 뿔과 일곱 개의 왕관이 상징하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일곱 머리는 사탄이 소유한 지혜를, 일곱 왕관은 세상 나라의 왕권을, 열개의 뿔은 사탄의 권력을 가리킵니다. 사탄을 일컬어 에베소서에서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일컬었을 정도로 사탄은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죽음으로 왕노릇하는 존재입니다.
사탄은 여자가 낳은 아이를 삼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5절) 올려갔습니다. 5절에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고 말씀합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은 만국을 다스릴 메시야를 가리키고 여자가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땅에 인간으로 오신 성육신을 가리키고, 하나님이 그 아이를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데려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이후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높아지심을 가리킵니다. 짧게 요약한 예수님의 생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땅에 인간으로 출생하시고 사탄의 방해와 적대 속에서도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신 사명을 다 이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만주의 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생애입니다.
오늘 계시록 말씀에서 ‘여자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에게 가해지는 사탄의 핍박은 구약 첫 성경책인 창세기 3장 15절의 예언의 말씀을 상기시켜 줍니다. 잘 아시는 말씀이죠.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이 아담을 미혹하여 범죄케 한 사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메시야, 즉 여자가 낳은 아들과 사탄의 후손이 원수가 되어 싸울 것인데 메시야가 네 머리를 상하게 하는 치명상을 입힐 것이고, 사탄은 메시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사탄의 세력을 궤멸했고, 사탄은 예수님을 없애려는 일관된 생각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구속 사역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올라가시자 사탄은 이제 교회를 향해서 집중 공격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광야로 도망했고 거기서 하나님이 “천 이백 육십일 동안” 여자를 보호·양육하셨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여기서 ‘천 이백 육십일’은 다니엘서에서 예언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곧 3년 6개월에 해당되는 기간으로서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교회시대 혹은 신약시대를 가리킵니다.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광야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고 양육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가 광야에서 양육을 받는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구약에서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민족도 출애굽하여 광야로 도망하여 거기서 양육과 연단을 받았습니다. 그와 같이 교회도 광야에서 믿음의 연단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광야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양육하시기 위해서 예비하신 곳이 곧 광야며 광야 같은 인생길인 것입니다. 스데반이 설교에서 말했던 광야교회요 광야학교인 셈입니다. 여자는 광야에서 보호를 받을 뿐 아니라 그곳에서 양육도 받습니다.
이상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의 내용과 의미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영적전쟁과 관련해서 한 가지 교훈을 적용해보려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물질적 세계로만 구성돼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가 더 큰 실체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전부라고 생각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수면 위에 드러나있는 것보다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는 빙하가 더 크듯이 보이지 않는 영적 세계는 보이는 현실 세계보다 더 큰 세계이고 더 큰 영향력이 미치는 곳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세계는 사탄과의 영적 싸움이 치열한 영적 전쟁터입니다. 이땅에서 예수님도 출생부터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치루셨습니다. 메시야의 백성 공동체도 예수님께서 사탄의 핍박과 압제를 받았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광야같은 이땅에 살면서 사탄으로 인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보호하셔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양육시켜주셔서 사탄을 이기게 해주십니다만, 우리의 영적 각성과 깨어있음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미국의 팀 캘러 목사님은 사탄에 맞서기 위한 세 가지 물음을 강조했습니다. 첫째, 적은 누구인가? 둘째, 전쟁이 일어나는 전선은 어디인가? 셋째, 이 전쟁에서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어는 무엇인가? 적은 당연히 사탄입니다. 셋째 질문 우리가 가진 최상의 방어 최상의 공격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사탄의 시험에 말씀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전선은 어디입니까? 사탄의 전선, 사탄의 주요 공격 지점이 어디입니까? 이분은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받으신 복음서의 내용을 가지고서 설명합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광야에서 시험하실 때 거듭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기 직전에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죠. 세례받으실 때 하늘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죠.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분명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서 광야로 금식기도하러 가신 것입니다. 금식기도 끝에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는데, 사탄의 공격 지점이 바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 전 예수님께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확언하셨는데도 사탄은 즉각 그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입니다. 사탄은 예수님께 하나님이 예수님을 아들로 사랑하시고 능력을 주신다는 증거를 가지고 오라고 부추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고 계시고 전폭적인 수용을 받고 계심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공격했듯이 우리도 동일하게 공격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오신 우리의 구원자임을 믿지 못하게 하고,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정체성, 하나님에 의해서 받아들여졌다는 정체성을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은 우리의 정체성을 차의 엔진으로 비유합니다. 차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엔진이요. 엔진이 작동해야 차가 굴러갈 수 있듯이 우리에게는 정체성이 제일로 중요한데, 우리의 정체성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엔진이 작동하려면 연료를 넣어야 하는데 좋은 연료도 있는가 하면 나쁜 연료도 있습니다. 엔진을 망가뜨리는 연료도 있습니다. 나쁜 연료는 두려움, 자신을 입증하려는 욕구, 남에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는 욕구, 자신을 무절제하게 다 표현하려는 욕구 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쁜 연료도 한동안은 우리 삶을 끌고나갈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탈진하게 되고 실망으로 끝나게 됩니다. 탈진과 실망으로 끝나지 않을 좋은 연료는 언제나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우리 인생의 삶의 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도입니다. 이 사실을 언제나 마음에 굳게 붙들고 광야같은 인생길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실망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 않고 탈진하지 않고 힘차게 계속적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정체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목사님이 국민일보에 쓴 좋은 글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인디언들의 이야기 가운데 ‘검은독수리’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검은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둘 곳이 마땅치 않아 들곰 새끼들 틈에 넣어 두었다. 독수리 새끼는 들곰처럼 멀리 날지도 못하고 매일 흙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늘을 보니 검은독수리가 하늘을 훨훨 날고 있었다. 그때 옆에 있던 들곰이 말했다. “너는 꿈도 꾸지 마, 넌 저런 멋있는 새가 될 수 없어.”
검은독수리는 자신이 하늘을 날아볼 생각조차 못하고 들곰처럼 살다가 들곰만큼 날다가 죽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생각이 그 사람을 움직인다. 그러므로 생각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나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내 생각 속에 나를 가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을 포기하면서 사는 사람을 볼 때 안타깝기가 그지없다. 영적으로 높이높이 날 수 있는 엄청난 존재임에도 자신이 처한 환경만 바라보고 검은독수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너무나 많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육체적으로만 산다면 결국 검은독수리처럼 한 번 날아보지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설동욱목사 (국민일보에서 발췌)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을 사탄은 흔들어놓으려 합니다. 우리의 분명한 정체성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잘 나타난 곳이 바로 성육신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여자가 낳은 아들로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이땅에 인간이 되어 오심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탄절을 기뻐해야 할 이유입니다. 성탄절에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아야 할 이유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감격과 기쁨이 성탄절에 더욱 흘러넘쳐야 할 이유입니다. 인간이 되셔서 우리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러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지금도 다스리고 계시고 장차 이땅에 다시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켜주실 것을 기대하는 소망이 성탄절에 더욱 넘쳐야 합니다. 다가오는 성탄절을 맞이하여 이러한 기쁨과 소망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흘러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2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 (사 66장 1-4절)
최근에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았는데요, 재독(在獨)철학자 한병철씨의 철학에세이입니다. ‘리추얼’은 제의, 의식이라는 뜻으로 흔히 종교 제의, 종교 의식, 종교 예전 등에 사용됩니다. ‘리추얼’은 반복하는 특징이 있고 또 공동체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적 영성이라기보다 깔려진 트랙 위를 반복적으로 달리는 것이요, 그것도 공동체가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분이 보기에 현대 사회에는 제의나 의식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전통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삶에 안정화를 가져다주는 제의가 온통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적, 자기애적 숭배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제는 공동체적이고 반복적이고 패턴화된 어떤 형식보다 개인주의적이고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수없이 뻗어나가는 탈형식이 압도한 시대가 되었다는 진단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사람들이 형식을 제거해버렸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이런 말이죠.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마음이 중요하지!’
저자는 ‘리추얼의 종말’을 이미 2018년에 말했는데 코로나 시대가 ‘리추얼의 종말’을 완성했다고 봅니다. 디지털화한 소통, 그래서 소통이 많아진 것 같아 보여도 공동체 없는 소통이요 친밀하게 만드는 소통이라기보다 자기중심성을 뽐내는 소통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이분은 ‘리추얼의 종말’을 좀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분은 독실한 카톨릭신자는 아니지만 카톨릭 미사에 종종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리추얼의 향수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노래와 오르간 연주와 향 연기에 취하면 나를, 나의 자아를 잊게 되죠. 그리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리추얼’ 그러니까 예배 예전도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전통적인 예배 예전에 따라 주일예배를 드립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탈형식화한 예배, 경배와 찬양,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면서 예배자 개인의 감정과 선호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예전의 형식은 답답하게 느껴지고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고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심리적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꼈는지로 예배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직도 예전을 중시하는 종교가 있다면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모든 것이 예전입니다. 새벽모임을 갖는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매일 읽어야 할 성경 본문이 있고 드려야 할 기도문이 매일 있습니다. 기도도 개인 기도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드려왔던 기도문으로 공동체가 함께 기도드립니다. 정형화된 틀로 새해를 맞이하고 1년이 지나 또 그 길로 걸어갑니다. 안식일을 맞이하는 예전도 있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형식화된 규칙이 있습니다. 유대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안전한 길을 평생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역동성과 인격성과 관계성보다는 리추얼이 제공하는, 그러니까 종교 예전, 종교 의식이 완벽하게 셋팅돼 있어서 공간적으로 전 세계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무르게 되고 시간적으로 조상들과 연결된 채 안정감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종교 비판의 핵심이 바로 리추얼, 제의화된 종교, 형식화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선지자 이사야의 이사야서의 결론인 66장도 그렇게 시작하는데요, 제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참으로 신랄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소 도살자나 사람을 죽이는 자 같을 뿐이요,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자는 개의 목을 꺾는 자 같을 뿐이요, 드리는 예물은 부정한 돼지피를 드리는 것과 같을 뿐이요 분향하는 것은 우상에게 복을 구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형식적, 반복적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거부입니다. 제의주의자들은 수많은 제의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으면서 결국에는 “자기의 길을 택”하는 자들입니다. “가증한 것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의미 없는 반복이요 생동감 없는 형식이요 하나님이 아닌 제의 자체가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많이 행해지고 많이 불러져서 익숙해졌을 뿐,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오히려 익숙함을 불러오기보다 낯설음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적 익숙함이 친밀함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빠질 수 있는 흔한 오류입니다. 자주 예배드리고 자주 기도드리고 자주 교회에 출입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고 직분이 커질수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익숙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가장 쉬운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자주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교회에 출퇴근하고 자주 기도하고 하니까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하나님도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마치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이르고, 그 편안함과 안정감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익숙함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함께 동행하기에 걸끄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익숙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감을 빼앗아 갑니다. 3절 끝부분에서 리추얼주의자들 곧 제의주의자들은 결국 “자기의 길을 택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익숙해졌으니까 선택하는데 하나님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의 길’을 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제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추얼이라는 안전판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선택하다’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요, 즉 “자기의 길을 택하며”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4절에서도 ‘선택하다’는 동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선택을 보고서 결정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사용됩니다.
제의의 반복적 익숙함이라는 패턴에 빠져서 안정감에 도취된 채 ‘자기의 길’을 택하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전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한 제의주의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유혹당하고 미끄러져서 파탄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유혹과 파멸을 선택하시는 겁니까? 우리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들이 먼저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말하여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현 국회의원 중에 김진표의원이 있습니다. 경력이 화려합니다.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역임했고, 5선 의원으로서 민주당 원내대표도 역임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장로이며 국가조찬기도회장도 역임했습니다. 이분이 국민일보의 신설 코너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이라는 코너에 첫 번째로 글을 기고 했습니다. 이분에게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분은 정치인으로서 매일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의 순간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큰 힘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자신의 인생에 나침반이 된 계기는 2002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재정경제부 차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먼저 직속 상관인 진념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게 상의를 드렸더니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정부 수석 차관이면 다음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재경부 장관 0순위다. 떠나는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설사 정권이 재창출된다 하더라도 당신을 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의 지지율은 10%대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다 한사코 말렸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 중에 기도하면서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든 확신은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로 간구하면서 옳은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남보다 빠르게 차관이 된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고, 존경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돼 ‘2002 한·일 월드컵’ 청와대 대응팀장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월드컵은 큰 성과를 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봤지만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선 직후 노 대통령 당선인은 인사차 청와대를 찾았습니다. 김 대통령은 다음 정부에서 일할 좋은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처음엔 사양하시다가 딱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진표 당시 국무조정실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노 당선인의 제안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직하게 되었고, 이후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맡아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2004년 정계에 진출해 17대부터 현 21대까지 수원지역 국회의원에 5번이나 당선됐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구하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답을 주십니다. 언제나 선택할 때는 눈앞의 유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인가를 살펴야 합니다.”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때 기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성전 제의 뒤에 숨어서 거기서 안정감을 얻고 언제나 자기의 길을 선택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의주의자들이 수많은 예배와 제의와 성전에서의 섬김을 하면서 얻게된 익숙함과 편안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자기의 길을 선택함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평일 새벽예배나 수요예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에 꾸준히 참여했던 성도님들은 아마도 많은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힘든 일인지 느꼈을 겁니다. 이것이 리추얼, 제의, 반복적인 예배 형식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러한 제의중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를 빼앗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반복적인 제의가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빠져서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착각입니다. 내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영광 받지 못하신다는 생각이죠. 내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내가 뭔가를 하나님께 준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은 뭐를 아쉬어 하는 분,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은 뭐 아쉬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는 잘못된 생각에 이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빠진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땅이 하나님의 발판, 혹은 발등상이라는 말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하나님이 원수들의 목을 짓밟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복자 왕이 정복당한 왕의 목을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거민들의 목을 밟고 계시다는 것은 땅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위한다고, 가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제의요 예배인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는 제의주의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지는 2절에서, 참된 예배, 참된 경건, 참된 영성, 참된 하나님 섬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을 주목하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내려보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돌보아주시는지 말씀해주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둘째, 심령에 통회함이 있는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자,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굽어보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목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다보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들을 돌보시냐면 소위 세상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충족적 자기 만족에 겨운 사람들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빈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심령에 통회함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쓰인 단어가 마음에 장애가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다리를 절며, 가령 사울의 아들, 그러니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었죠, 그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것처럼 마음에 장애를 가진 자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마음이 깨진 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두들겨 맞아서 쓰러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들겨 맞아서 쓰러져있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떠는 자입니다.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까봐 두려워하며 떠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경건을 점검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의미 없는 반복이 되거나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안전판이 되는 신앙, 곧 제의주의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보다는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신앙인지, 아니면 겸비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며 주복하시며 돌보시는 은총이 함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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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105장
▶성시교독 - 49. 시편 108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84장
▶기도 - 허일 장로
▶성경봉독 - 시편 127, 128편
▶설교 -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
▶찬송 - 413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12월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이 세우시는 집 (시 127,128편)
가정은 매우 소박하지만 인간 행복의 주된 요소입니다. 가정은 분명 소박한 행복입니다만 가정을 빼고 인간의 행복을 논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나 가정이 건강해야 사회가 건강하고 나라가 건강해진다고 생각합니다. 가정이 사회의 기초임을 인정합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바로 그 뜻일 것입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잘돼야 만사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이토록 소중한 가정이지만 가정이란 단어에서 느껴지는 소박함이 가정을 소박하다고 느껴지게 만들어서 가정을 소홀히여기고 성공을 추구하던 시대도 있었고 가정 중심의 사람이 작게 느껴지게 만들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가정을 세우고 가정을 지키고 가정을 유지하는데 비용과 희생이 많이 드니까 아예 포기하는 젊은이들도 생겨났고, 바람은 있으나 현실적 여건이 어려워 가정을 이룰 꿈도 꾸지 못하는 분들도 많아졌습니다.
202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가구수가 664만 3,354가구로서 비율이 31.7%에 이르렀습니다. 젊은이들의 결혼 기피와 가정의 파괴와 이혼 증가, 특별히 황혼 이혼의 증가와 수명 연장과 고령화 등으로 인해서 1인가구의 비율이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가정이 행복의 주된 요소였을 뿐 아니라 대가족 가정 체제가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었습니다. 반면 오늘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법률과 치안과 경제적 안정과 의료 발달과 건강보험체계가 고대 이스라엘의 가정의 역할을 대체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음이 전세계적인 유행병, 코로나의 창궐로 입증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고대 이스라엘보다 보다 안전한 체계가 구축되었다고 생각되던 현대사회 역시 여전히 전염병에 취약하고 자연재해와 인재(人災)에 취약하고 불안정한 체제임을 우리는 오늘 코로나 시대에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7편과 128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이 관건이요 우리 인생의 참된 복임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이 있는 인생이어야 헛된 인생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써도 성취가 없는 헛된 인생으로 전락할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지 않으시면 아무리 세우려 해도 세워지지 않는 게 인생입니다.
127편과 128편은 내용적으로 이어지고 표현면에서도 두 시편을 함께 읽을 수 있는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데요 특별히 127편 마지막 절 5절은 “복되도다”(원어로는 “복있는 사람”)으로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이란...” 즉 화살통에 화살이 가득한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128편을 시작할 때 그 ‘복있는’이라는 단어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128편 1절에서 복 있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다, 이렇게 응답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127편과 128편은 복 있는 인생은 어떠한 사람인가를 다루고 있는데요, 복 있는 인생이란 가정이든 일이든 사회관계든 신앙생활이든 사회적 섬김과 봉사든 성취가 있고 열매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성취와 열매, 수고의 결실이 있어야 헛된 인생이 아닌 복된 인생입니다.
그러면 헛되지 않고 내실 있고 결실이 있는 인생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인생 다 살아놓고 헛되다 말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요? 오늘 시편 말씀은 바로 그 점을 오늘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편 127편의 저자로 표기돼 있는 솔로몬이라는 사람은 이 비결을 알았음에도 인생을 헛되게 마감했죠. 그가 인생 말년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전도서에서 인생에 대해서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라고 거듭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짙은 후회가 담긴 표현으로 생각됩니다만,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후세에게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서 전도서를 썼던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헛된 인생길을 살아서 후회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지혜를 따라 살라는 권면입니다.
시편 127편에서 솔로몬은 전도서의 지혜를 다시 들려주는 듯합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물론 여기 시편 1절에서 ‘헛되다’는 말과 전도서의 ‘헛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다른 단어입니다만, 의미는 비슷합니다. 내실이 없고 결실이 없다는 점에서 헛되다는 것입니다. 수고를 했는데도 결실이 없고 잠자지 않고 애써서 깨어 있었는데도 임무 완수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노력한 만큼 꼭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노력과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만 노력과 수고로만 결과를 산출해내지는 못합니다. 인생이라는 건축을 해야 하는 우리 인생들이 세우고 그것을 지켜내려면 수많은 수고와 노력이 뒤따르겠죠. 남의 일이어서 그 수고와 노력을 자신의 일처럼 깨닫지 못할 뿐이지만 자신이 수고하고 노력하고 애써서 겨우 이루어가는 성취를 경험한 사람은 남의 세움에 대해서 가볍게 말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속에는 얼마나 큰 수고와 땀방울과 좌절과 넘어짐과 포기와 애씀이 있었을지 우리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최근에 분당우리교회 이찬수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요, 이분이 교회를 개척하고서 20년 정도 되었을 때 하셨던 설교였습니다. 분당우리교회라 함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교회요, 단 기간에 큰 성장을 경험한 교회요, 그분의 아버지 역시 목회자였는데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40일 금식기도 중에 돌아가셨는데 아들이 목사가 되어서 아버지가 못 누린 은혜와 열매의 결실을 이루어가고 있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어려움 없이 큰 성장을 이룬 교회로만 대충 알고 있는데, 이분의 고백이 지난 20년간 숱한 어려움, 말도 못하는 어려움, 아마 자신의 입으로 말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고통과 어려움을 이야기하시는 것을 듣고 ‘그러면 그렇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쉽게 되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무리 로또에 당첨이 된다 해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피나는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을 잘 지키지 못해서 인생을 망친 예를 우리는 종종 언론보도를 통해서 접하게 됩니다.
솔로몬이 무엇을 말하려는 겁니까? 우리가 세우려는 집, 인생이라는 집, 신앙생활이라는 집, 일의 성취라는 집, 행복의 기초로서의 가정, 하여튼 무슨 집이든 세워지려면 피나는 노력과 수고와 애씀이 있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우리는 그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또 필요하다는 것입니까? 아니, 또 필요하다기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가 되어버리는, 인생 전체를 헛되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그것이 없으면 어떠한 집도 세워지지 않음은 물론이고 수고가 컸던 만큼 헛되다는 미련과 후회를 크게 일으키는 것,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 손길과 개입이 없으면 어떠한 것도 든든하게 세워질 수 없습니다!
127편 1절이 바로 그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지 않으시면 결코 집이 세워질 수 없고 하나님이 지키지 않으시면 아무리 파수꾼이 애써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세우고 지켜내려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하나님의 개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집’은 반드시 가정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집’은 도시, 성전, 왕국 등을 뜻하며 사용되기도 합니다. 여기서 집은 가정을 포함해서 사회생활과 신앙생활 전반, 일의 성취, 인생의 세움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물론 이어지는 논의의 강조점은 가정에 있음은 분명합니다만 가정에만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어지는 시편 127편 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제가 신대원 다닐 때 구약 시편을 가르쳐주셨던 김정우교수님은 이 절을 다음과 같이 해석합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사람은 열심히 일하여 필요한 양식을 준비하지만, 주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단잠을 잘 것이다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걱정근심을 버리고 단잠을 자더라도 주님께서는 그에게 필요한 것을 넉넉히 채워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신약성경 마태복음 6장 34절에 비추어서 해석할 것을 요청합니다. 어떤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일을 하고 소득을 얻고 일의 성취를 크든 작든 경험하려면 애를 쓰고 노력해야겠죠. 일찍 일어나고 늦은 저녁까지 일해야 그나마 소득이 주어지겠죠. 노력의 당연한 결과로서 한 데나리온을 얻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20장 말씀처럼 하루 종일 수고해서 한 데나리온을 얻을 수도 있고 고용이 늦게 되는 여러 조건을 지닌 사람의 경우에는 오후 5시에 일터에 들어가 겨우 1시간 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한 데나리온을 얻을 수도 있겠죠. 하여튼 이 모든 소득은 결국 주인이 주시는 것 아니겠습니까? 누구든 수고하고 애써야만 ‘떡’을 먹게 돼 있죠. 그래서 ‘수고의 떡’이라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해서 떡을 먹게 됨 역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내일 일을 염려하기보다 걱정근심 버리고 단잠을 잘 수 있음은 내일에 주실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하게 놔두고 오늘의 괴로움과 수고는 그 날로 족하다고 여기고 내일도 동일하게 주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신뢰하면서 단잠에 이르게 되는 겁니다.
이러한 신앙, 즉 하나님의 손길과 개입이 관건이라는 것, 우리가 집을 세우려면 또 그 집을 지켜내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데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신뢰함인데요, 시편 128편에서는 그러한 믿음을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구체화시키고 있습니다.
128편 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원문 순서를 따르면, ‘복 있도다’로 시작하여서 복 있는 사람이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인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란 그의 길을 걷는 자 즉 주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자이다, 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세워주시고 그의 집을 지켜주시는 사람인데요, 그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편 1편을 반복해서 듣게 됨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1편 1-3절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여기서 행복한 사람의 모습을 간결하게 요약해 줍니다. 우선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는 사람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으로 쉽게 번역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복 있는 사람이란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면 집이 세워질 수 없고 집을 지켜낼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요, 참된 믿음은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나타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을 말 그대로 하나님으로 인정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28편 2절을 보십시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손이 수고해서 먹는다는 것은 수고의 대가를 얻을 뿐만 아니라 그 얻은 것들로 인해서 누리게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일한 보상으로서 소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의 보람과 성취를 얻고 그래서 온 집이 누리게 되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의 모습이요 복 있는 사람이 누리는 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해야 하니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아니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5장에서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신 말씀을 오늘 시편 말씀과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시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집도 세울 수 없고, 하나님이 지켜주지 않으시면 우리는 어떠한 집도 지켜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그러한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 그래서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과 하나님 경외심을 가진 사람이 진정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어떠한 어려움도 결국에는 복이 되는 복된 인생입니다.
안산제일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고훈목사님이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시골교회를 섬기는 K목사는 교통사고 후 목을 움직이지 못하는 장애를 입었습니다. 그런 몸으로 승합차를 운전하며 먼 데 교인들을 실어와 예배드리고 또 실어다주며 교회를 25년 동안 지켜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주일예배 뒤 교인들을 싣고 시골길을 달리다 정신장애가 있는 무당의 손녀딸을 치었습니다. 사실은 치었다기보다 열살 된 그 아이가 뛰어들었단 말이 옳습니다. 무당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몸도 건강치 못한 목사가 무슨 운전을 한다고….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교회로 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아이가 머리를 심하게 다쳤는데 더 큰 장애를 입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과 수천만원의 합의금을 준비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아이는 넉 달 만에 퇴원했습니다. 그런데 무당 할머니가 합의금을 안 받겠단답니다. 왜냐 하면 정신장애인 아이가 교통사고 후 정신이 온전하게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 아이가 전도된 것은 물론이고 친구들이 보상금에 쓰라고 갖다준 돈은 교육관 건축자금에 보탰습니다. K목사는 그 후로 지금까지 그곳을 지키는 가운데 기도를 계속하며 목회하고 있습니다.”
(http://cyw.pe.kr/xe/index.php?category=374706&document_srl=309977&mid=a39에서 발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참으로 어려운 코로나 시절을 더 추워진 겨울과 함께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해야 합니다. 세워주실 수 있는 권능이 주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주님을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시는 복된 사람이 되시므로 주님이 세우시는 집,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 주님이 세우시는 일터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1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욥 42:1-6)
여러분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나요? 자기에 대한 인식(self image)이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적인가요? 여러분이 살아온 인생은 누구에게 꺼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대체적으로 긍정적인가요, 아니면 부정하고 싶고 지워버리고 싶을 정도로 부정적인가요?
욥이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인 욥기서를 보면 처음에 욥은 모자람이 없는,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경건하고 가정생활에 있어서도 모범적이고 경제적 측면에서도 부족함이 없는, 뭐 하나 모자랄 게 없는 풍요로운 삶이었습니다. 너무나 안정된 삶이었습니다. 선망의 대상이 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하루 아침에 재산을 잃고 가족을 잃고 급기야 자신의 몸에 욕창까지 들어 기왓장으로 몸을 긁어야 하는 비극을 온몸으로 겪게 됩니다. 곁에 있어주었던 아내도 떠나고 고통의 참혹함 속에서 친구들이 위로하기 위해서 욥을 찾지만 그들도 위로해주기는커녕 신앙논쟁으로 욥의 마음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극심한 고통과 재난과 홀로됨 속에서 처절한 외로움과 억울함과 이해할 수 없는 답답함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절규가 친구들과의 논쟁 가운데 욥의 입에서 쉴새없이 쏟아져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관계 가운데서 형성되었던 욥의 높은 자존감은, 아마 그 자존감은 하나님께서 욥의 둘레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된 자존감이었을 겁니다. 자존감이 낮아질래야 낮아질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욥의 삶을 축복해주셔서 인생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셨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았기 때문에 욥의 자기 인식은 굉장히 긍정적이었고 건강했을 것입니다.
이후에 극심한 고통과 재난 가운데서 오로지 병든 몸둥아리만 남게 되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자신의 평온한 인생에 들이닥쳐 온통 혼돈과 불안으로 몰아넣은 비극을 이해할 수 없었던 욥은 하나님께 절규하지 않을 수 없었고 친구들의 몰아붙임에 저항하면서 스스로 무너져내릴 수밖에 없었고, 자존감은 바닥을 기게 되었을 것입니다. 더 버틸 힘도 상실해버렸습니다.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고 죽음을 찬미하면서 다만 하나님께 호소하기를 자신에게 나타나셔서 이 현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말처럼 자신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 이러한 비극이 들이닥쳤다면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알게 해달라고 말할 정도로 욥은 하나님 앞에서 무죄를 적극적으로 항변했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서 갓난아기로 태어난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과 공급으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울타리로 둘러친 복된 인생이 되었음을 모든 것을 상실한 후 욥은 깨달았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이시고 취한 자도 여호와이시다는 주옥 같은 신앙고백과 신실함을 견지하던 그도 결국에는 마지막 남은 신앙과 경건의 유산도 다 상실해버리고 비참함 가운데서 절규하며 원망하며 탄식하게 됩니다.
친구들과의 지리한 논쟁 가운데 군데군데 주옥같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지만 결정적으로는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인생 가운데 일어난 일들을 해석해주고 설명해주어야만 사태가 해결될 수 있음을 욥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욥은 친구들과의 소모적 논쟁에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해석해주심과 설명해주심 그리고 판결해주심을 간절히 구했던 것입니다.
이윽고 하나님이 욥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해주십니다만 그 대답은 욥이 물었던 질문과는 무관한 동문서답인 것처럼 보이고 오히려 하나님이 욥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를 몰아붙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반문이 계속되고 그 질문 앞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욥의 모습을 비쳐줄 뿐입니다.
하나님은 욥을 위로해주기는커녕 완전한 백기투항을 요구하시는 것처럼 비쳐집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시는 말씀은 언뜻보면 욥을 책망하시고 그에게 윽박지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가운데 욥의 자존감은 더욱 낮아져서 더 이상 낮은 곳으로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 처하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욥에게 속사포처럼 쏟아붓는 반문들을 하나님의 윽박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책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도 그냥 받아들이라는 강요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인간은 너무나 어리석고 깨닫기에는 지혜가 모자라고 하도 작아서 크신 하나님을 담을 수 없기 때문에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라는 책망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욥에게 들이닥친 재난과 고통의 무게를 하나님은 헤아려주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도 그러한 시각을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도 고통 가운데 쏟아내었던 자신의 말들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자연의 위엄과 인간의 이해할 수도 없는 창조주의 섭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니까 욥이 다소 주눅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 찾아와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보다는 하나님의 크심에 압도당해서 뭔가 뜻이 있으시겠지,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원인 때문에 비롯된 것이겠지, 라며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3절만 보면 욥이 괜히 문제제기했다가 본전도 못찾았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만 이후 4-5절을 보면 조금 다른 모습이 보입니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4-5절) 본전도 못찾은 문제제기, 하나님께 절규하고 부르짖었으나 대답 대신 책망을 들은 것 같은데 욥은 조금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묻고 요청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께서 알게 해주실 거라는 기대감이 담겨 있습니다. 극심한 재난과 고통에 대해서 “무엇 때문에?”, “왜?”를 물었는데 돌아온 대답은 그 이유에 대해서 대답해주기는커녕 그렇다고 위로해주기는커녕 한 마디로 하나님의 대답은 “너는 누구냐?”라는 거였는데요, ‘너는 한없이 작고 보잘 것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니냐? 그러한 너가 어찌 나의 행사를 이해하겠느냐?’, 뭐 이런 대답으로 들리는데 욥은 오히려 하나님이 알게 해주실 거라는 기대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욥의 오랜 요구와 절규 끝에 드디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하신 첫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욥기 38장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폭풍우 가운데에서 욥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하나님의 대답을 구했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욥의 대답을 구하고 있습니다. 욥은 ‘무엇 때문에?’, ‘왜 내게 이 고통이?’를 물었는데 하나님의 반문은 ‘너는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우리는 나에게 어려움이 찾아오고 이해할 수 없는 극심한 재난이 들이닥치고 고통이 찾아오면 ‘하나님 왜 접니까? why me?’를 묻는데 하나님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why not me?’, ‘왜 너만 예외가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입니다. 너 역시 특별할 것 없는 인생일 뿐이요 진흙에 불과한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인생입니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여러분 자신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하나님에게 우리는 어떠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의 윽박과 억압과 강요 앞에서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는 미천한 존재이기는 하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우리, 그래서 우리의 진정한 자존감이 되어야 하는 우리의 위상은 과연 무엇입니까? 벌레만도 못한 존재입니까? 이해할 수 없는 인생길을 아무 것도 모른채 걸어가면서도 그래서 하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절규하며 질문했는데, 그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답해줄 의무가 없는 하찮은 존재에 불과합니까?
4-5절을 보면 왜 하나님의 그러한 반문이 오히려 욥에게 대답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단서를 찾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크심을 체험하고 한없이 작고 나약한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발견함과 동시에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질문하지 말아야지, 어차피 이해할 수도 없을텐데 물어서 뭣 하겠어, 라고 풀이 죽기보다 욥은 크신 하나님 체험과 한없이 작은 자신의 발견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묻겠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지금 욥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체험으로 인해서 자신의 한없이 작음과 연약함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께 더욱 적극적으로 나아가서 묻겠다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반문에 대해서 욥이 찾은 대답은 미천하고 부족하고 한없이 작은 자신이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파트너,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하나님의 사명자, 협력자라는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물을 수 있는 존재,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존재, 하나님의 대화상대자, 하나님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하나님의 파트너라는 자기 인식을 욥이 지금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그에게 반문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이 욥을 대화상대자로 하나님의 의중을 전달할 자로 그를 격상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고 그렇게 형성되었던 경건한 신앙생활로도 나름 괜찮은 삶, 다른 사람에게 선망이 되는 인생, 높은 자존감을 유지하며 살아왔던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의 삶의 둘레에 든든한 울타리를 쳐주셨기 때문이었음을 모든 것을 상실한 후에 욥은 깨닫게 되지 않았을까요? 이제 모든 것을 잃고 친구들의 몰아붙임과 심지어 하나님의 책망과 윽박과 같은 음성에 주득 들어서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는 바닥에까지 처한 욥의 깨달음은 오히려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특권이었고 그 결과 자신의 위상이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대화상대자요 하나님께 질문하는 자요 하나님의 대답을 기대할 수 있는 자라는 자기 인식, 자신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깨달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이 대답이 된 것은 아닐까요? 비록 여전히 욥은 자신에게 들이닥친 고통과 재난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해도 말입니다.
마지막 6절의 번역과 해석이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여기서 ‘회개한다’고 번역한 동사는 히브리어로 ‘나함’인데요 ‘~을 슬프게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회개한다’고 번역했는데요, 무엇을 회개하냐면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말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만, ‘티끌과 재’라는 표현이 자존감이 바닥에 처한, 욥이 극심한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 자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전형적으로 표현한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욥기 30장 19절에서 “하나님이 나를 진흙 가운데 던지셨고 나를 티끌과 재 같게 하셨구나”라고 욥이 탄식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처한 상황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티끌과 재’ 같다는 것입니다. 잉여인간, 살 가치도 없는데 호흡이 주어진, 아무 쓸모도 없고 있어야 할 이유도 없는 비천한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그렇다면 ‘티끌과 재’ 위에서 회개한다는 말은 ‘티끌과 재’라고 스스로 생각했던 자기 인식, 자신에 대한 생각을 거둬들이고 생각을 달리하겠다라고 번역해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자신이 무가치하다고, 살아갈 이유가 없다고, 극심한 절망과 고통 가운데 탄식하며 바닥에 처한 자존감을 드러내주는 그러한 표현이었고 생각이었는데 그런 생각을 이제는 달리하겠다는 결단의 표현으로도 해석 가능합니다. 욥기를 전공한 어떤 복음주의 학자는 6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저의 마련한 말들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에 대한 저의 생각을 달리하겠습니다"(안근조교수, 두란노주석)
하도 인생이 어려우니까, 이해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니까, 너무 고통스럽고 절망감을 떨쳐버릴 수 없으니까, 모든 것을 상실했으니까, 신앙이 있어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티끌과 재’에 불과한, 살아갈 가치도 없고 아무런 쓸모도 없다고 인생 전체를 부정해버렸던 욥이 하나님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말씀 가운데서 비록 대답은 듣지 못했어도 하나님의 크심을 경험했고 하나님을 눈으로 뵈옵는 체험을 했고, 동시에 자신의 보잘 것 없음과 나약함과 지극히 작음을 경험함과 동시에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반문에 대해서 스스로 깨닫게 된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요 이해할 수 없는 존재요 내 인생에 들이닥친 일들을 해석할 수도 없는 어리석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해주시고 질문을 하면 대답하기 위해서 찾아와주시는 크신 하나님의 파트너요 대화상대자요 하나님의 벗이구나’는 깨달음을 욥이 얻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아무리 인생에 풍파가 찾아오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인생을 해석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티끌과 재’라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이요 다짐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욥은 이전과 이후과 분명히 다른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자신의 인생에 든든한 울타리가 다 사라졌어도 ‘너는 누구냐?’는 하나님의 물음 앞에 저는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피조물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대화상대자요 하나님의 일의 협력자요 하나님의 파트너요 하나님의 벗입니다, 인생에 풍파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만 어떠한 어려움이 찾아와서 자신을 비천에 처하게 한다고 할지라도 저를 더 이상 ‘티끌과 재’라는 부정적 이미지와 자존감에 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는 결연한 다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 욥을 하나님은 완전히 복원시켜주셨습니다. 더 큰 축복으로 그의 인생을 회복시켜주셨습니다. 하나님의 크심과 자신의 작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동반자로 여겨주시고 파트너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오히려 감사한 욥을 하나님은 완전히 복구시켜주시고 더 큰 축복으로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정체성이요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이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복시켜주시는 방식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벗이라고 인정되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아닙니까? 아브라함이 절대적 순종의 사람으로 믿음의 조상으로만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창세기 22장 때문일 것입니다.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 그가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절대적인 순종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의 벗으로 인정된 것일까요? 그것도 이유이겠지만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당돌하기까지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교 성경학자인 존 레벤슨 하바드대학교 신학자는 구약성경의 가장 놀라운 특징 중의 하나로 인간이 하나님과 논쟁할 수 있고 그 논쟁에서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아브라함의 도전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의는 죄인과 의인을 동일시하려는, 심판하려는 하나님의 행동이 하나님답지 못하다, 불의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펴면서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이 50명이 있으면 어떠하시겠냐고 협상을 벌입니다. 그 수가 45명, 30명, 20명, 열명까지 내려가다가 하나님이 그 제안들을 받아들이니까 결국 아브라함이 포기하죠.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문제제기하면서 했던 조심스런 표현이 바로 ‘티끌과 재’입니다. 창세기 18장 27절입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 굉장히 예의 바르고 조심스런 모습입니다. 하나님 경외가 담겨 있는 표현입니다. 결코 불경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사에 대해서 동의할 수 없고 이의제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의심하고 하나님께 질문하고 하나님과 논쟁하고 하나님의 입장을 철회하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려는 것입니다.
욥은 비참과 고통과 절망과 극심히 낮은 자존감 가운데서 자신을 ‘티끌과 재’라고 말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따지고 들면서 그럼에도 자신을 ‘티끌과 재’로 여기는 겸손함으로 주님께 아뢰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의 미래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한없이 나약하고 보잘 것 없고 연약한 ‘티끌과 재’가 아닙니까? 그러한 우리들을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에 동참시키려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동반자요 파트너로 삼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참여하도록 허락하셔서 구원에 이르게 하셨을 뿐 아니라 이땅에서도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의 동역자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명자요 동역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격과 은총을 깨닫고 여러분의 일상이 하나님께 동행하시고 하나님과 의논하시고 하나님께 질문하시고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주역으로서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임 받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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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21일 동산교회 추수감사주일 설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눅 15장 25-32절)
감사하다는 말이 영어로 ‘Thank you’죠.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공교롭게도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참 유사합니다. 우연이겠지만 감사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구약의 여러 절기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시간으로 허락하신 절기들이 감사의 시간이요 축제의 시간임을 생각했습니다. 창조주께 돌리는 참된 영광, 참된 예배는 결국 감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흡이 감사요 일상이 감사요 관계가 감사요 존재가 감사요 살아있음이 감사요 인도해주심이 감사요 소망 주심이 감사요 어려움 속에서의 인내가 감사요 환난 가운데서의 성장이 감사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인해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시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짧디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허망한 마음 금할 수 없는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에서 감사가 솟구쳐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감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서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보아도 감사하지 않을 수만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감사하지 못함에 대해서 이해가 될 때가 많고 인간으로서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하도록 보이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목사님의 감사의 기도를 들으면 탄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로 흔히 말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 아들 못지 않게 첫째 아들에게도 이야기의 비중이 있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등하게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두 아들 각각에게도 예수님의 시선이 쏠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지금이 감사할 상황입니다. 예상치 못한 너무 기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사랑했으나 자신의 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감사할 상황입니다.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것 가지고 살아보려고 아버지 품을 일찍 떠났다가 저 먼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서 배고파서 움켜진 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지만 염치가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종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생각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집으로 향했는데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환대와 기쁨과 즉각적으로 아들로 복원됨을 경험하고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감사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겠죠.
세계적으로 어떤 유명한 소설가, 아마 소설 <적과 흑>을 썼던 스탕달로 기억됩니다만 이분이 예수님의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가나 문학가들에게 둘째 아들 탕자는 매력적으로 보이나 봅니다. 최근에 어떤 기자가 이어령씨의 인터뷰를 엮어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보니까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탕자, 돌아오다>라는 소설을 읽고 이분이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열매가 더 달았어요”
이어령씨는 둘째 아들이 훨 낫다는 겁니다. 길 잃은 양이 훨씬 훌륭하다는 거예요.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고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뿐이지,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목자 엉덩이만 따라가는 양 99마리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시키는 대로만 사는 효자보다 스스로 존재해보겠다고 마음 먹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온 자식이 더 장하고 측은하게 느껴질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령씨는 주장합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문학가로서 상상력을 가미해서 둘째 아들을 높이 추켜 올렸지만 성경 해석가들에게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크게 부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어령씨는 예전 책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제법 성경적 의도와 부합하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효자의 이야기도, 허랑방탕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그네 된 우리 인생 이야기로 봅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원래 뜻이 밖으로 ‘나간 이’를 뜻하죠.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간 이’ 곧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뛰쳐나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독립하여 멋지게 살아보려고 떠난 이야기입니다. 익숙해서 싫어진 고향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품이 그리 좋은지 모른 채 아버지의 간섭이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마치 내 자유를 앗아가는 듯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걸로 생각했으나 막상 떠나보니까 찾아온 것은 궁핍과 허무뿐이었습니다. 새 출발하고자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지만 이내 타향살이에 지칠 뿐이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채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인 인생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스스로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사막 같은 인생길을 힘겹게 달음질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점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지고 고향땅이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엄습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철부지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두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둘째 아들은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받아들여줌으로 인해서 은혜와 사랑을 진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문제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면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 했나는 생각도 듭니다. 이해되는 면은 화가 날만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맏이이신 분들은 첫째 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첫째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부모에게 혼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동생들의 잘못인데 첫째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요,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을 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로서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나중에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장애인공동체에서 섬기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독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맏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고 충실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그의 동생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형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이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했으면 심하게 질책 받을 문제 있는 행동에 대해서도 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도 부모님이 너그럽게 이해하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동생이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지른 뒤 아버지께 혼나지 않으려고 낱낱이 털어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동생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을 잘 이해해주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동생의 친밀함을 보고 너무 부러워 동생을 질투했습니다. 장남인 자신은 끊임없이 착하고 곧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보상으로 존중은 얻었지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부모님의 친밀한 사랑은 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우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었습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은 차가운 분노입니다. 원망의 가장 큰 문제는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난받을 일 없이 떳떳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롭고 의로운 원망입니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의 도덕주의적 분노입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 법을 지킨데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입니다...원망은 우리 마음의 뜰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거침없이 퍼져 나가는 잡초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깊이 박혀 다른 많은 뿌리와 엉키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냥 잡초가 아니라 독초입니다. 그 독성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나우웬은 큰 아들로서 자신의 내면 안에 원망이 들어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원망의 감정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고 끌어오르게 되면 분노로 표출되는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감정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는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아마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동생이 이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게 될 거라는 것보다도,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송아지조차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보다도,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더 화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독차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모든 면에서 동생보다도 더 훌륭하고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첫째 아들의 감정은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교의식도 있고 경쟁의식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면 깊은 곳에 원망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분노로 폭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원망의 반대말입니다. 삶을 선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원망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내 것’과 ‘네 것’을 뛰어넘어 삶의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나우웬은 누구나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의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받고 원망에 차 있을 때도 나는 감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늘 원망과 감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두움 속에 나타나셔서 집으로 오라고 부르시며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극복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비결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비교하지 않는 풍성한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우리를 다 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오 우리는 다 같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두려움과 질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는데서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 풍요한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묻고 나우웬이 답하다>, 크리스 프리쳇 저, 230-9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이십니다. 반면에 오늘 첫째 아들은 본문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겨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실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 당신의 아들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약 아버지와 둘 사이에서 그를 선택한다면 자신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잃었던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곁을 떠나고 방탕한 삶에 잃어버렸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 떨어졌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아버지에게서 이미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을 받아들여주신 아버지는 첫째 아들 또한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은 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머지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형이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모두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오늘 둘째 아들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집밖에 서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아버지의 참된 풍요로운 사랑 밖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함께 이 형제자매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누고 누리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오늘 추구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첫째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질투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즉 편애한다는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겠다는 욕심과 이기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정 감사해야 할 때, 마땅히 감사해야 할 순간에도 감사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살면 살수록 목회자로서 저 자신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창조주를 향한 감사의 찬양,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상황과 관계없는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오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므로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 아버지의 풍요로우신 사랑으로 인한 감사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전환점 삼아 남은 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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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사랑은 어떻게 싹이 트는가? (살전 4:9)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 모두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자녀들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애(愛)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317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매’라는 단어는 26번 사용되었는데요, ‘형제’라는 단어는 단순히 남자 형제만을 가리키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데 ‘형제’가 사용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가리키면서 가족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분은 여러분의 형제요 여자분은 여러분의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형제자매공동체로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듯이 교회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우애하고 사랑해야 함을 뜻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진짜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하고 먼저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필요할까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확증해주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집이나 토지, 가족마저도 복음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기도 하시고,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할 경우에는 가족 대신 예수를 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가족에게만 베푸는 좁은 사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도 해주십니다. 이것들이 다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현세에서도 100배나 되돌려 보상을 받습니다.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뿐이므로 100배 보상 받는 항목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100배 많은 자식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항목에는 아내는 없습니다. 괜히 아내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버리는 항복은 영어로 Or입니다. ‘~나’인데 반해서 100배 돌려받을 항목은 ‘And’입니다. 이것과 그리고 저것도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목록 중에 하나이면 되지만, 얻게 되는 것은 목록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 버리는 것보다 믿음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100배 돌려받았습니까? 어느 하나를 버렸는데도 이 모든 것을 100배나 돌려받았습니까? 형제자매가 100배나 늘었습니까? 늘었죠. 예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교회공동체를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처럼 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가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형제자매 혈육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를 보상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자매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로마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에 관해서 한 사례를 말씀해줍니다. 로마 교회 내에 소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형제공동체로서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아마 로마교회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아마 소수의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전부 이방인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전부 유대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나 대개 크게 보아 그렇게 생각하면 90%는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논쟁이 있었던 듯합니다. 가령, 고기를 먹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할 때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던 고기가 시장에 나와서 유통되기 때문에 꺼림칙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 그것을 코세르라고 하고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코셔 푸드라고 합니다. 상당이 까다롭습니다. 당시에도 로마교회 내 유대인 성도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했고 양심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던데 반해서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음식 문제뿐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문제와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두고도 티격태격 싸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소위 믿음이 강한 자는 규정과 율법에 꼼꼼히 신경을 쓰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게 되어서 그러한 규정에 매이지 않아도 됨에도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멸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방탕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요 조심성 없고 사려깊지 못한 이들이요 우상숭배의 가장자리를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멸시하다’, ‘업신여기다’(한글 개역개정)이고,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행해서 일관되게 ‘멸시하다’, ‘업신여기다’ 혹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를 사용합니다.
형제자매인데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고 진영이 갈려서 서로를 향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로마교회의 문제를 사도바울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본 입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고 이방 신자들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 진영에 대해서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옳고 믿음이 약한 자가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을 더욱 엄격하게 책망합니다. 로마서 14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풀어서 설명해보면 ‘만일 네 형제나 자매가 네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다면, 너는 더 이상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반목하는 두 진영 당사자들에게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논쟁과 싸움을 그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니까 관용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싸움을 그치라고만 했다면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집에서 자녀들을 키워보면 형제자매끼리 싸우기도 한단 말이에요. 싸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라거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 다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어요. 그저 형제자매니까 서로 관용하고 사랑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어요. 바울은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들어서 형제 사랑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향해서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너는 또 어찌하여 네 자매를 멸시하느냐?”고 말하면서 이렇게 싸우는 이들에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미래, 우리가 직면할 미래란 어떤 미래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설 미래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석에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싸움과 다툼과 하나되지 못함과 사랑하지 못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날이 있음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에 관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핵심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저 위협으로 받아들이라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에 샅샅이 심판하실 것이니 형제자매로서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신학적인 것입니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투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 사랑의 측면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핵심은 로마서 14장 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님이신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심판받고 판단받게 될 터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를 세워주실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말씀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세워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소위 새창조를 완성해주시겠다는 것이요, 새창조된 새하늘과 새땅 곧 하나님이 지으시는 회복된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부활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한 신학자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 참말입니
까?” 이 질문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겠어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벗이 될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진정한 형제와 자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를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아직 부활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형제자매임을 자각하고서 로마서 14장 19-20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너무나 기이하고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신학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알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셔서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형제자매 가정공동체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해보고 그리고서 계속 서로를 향해서 비난할 것인지, 판단할 것인지, 혹은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소망이 현재적으로도 역사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고. 로마서 14장 설명은 책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에 수록된 리차드 헤이스의 설교에서 대부분 가져왔습니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이러한 칭찬을 듣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해서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 도시는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금도 큰 도시입니다. 학폭으로 한국에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배구 선수 이재영선수 자매가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이어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서 대략 3개월 정도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추정하기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던 때는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고린도에서 썼을 것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하고 핍박 때문에 부랴부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야 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형제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신생교회가 형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7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었고 환난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전해준 바울 일행을 그들이 본받은 것이었고 그로써 주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 사랑에 있어서 칭찬 듣는 교회,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 그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된 신생 신자들이었으나 복음의 말씀을 받고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른 복음의 신앙으로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재림 신앙, 부활 신앙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와 디모데를 본을 받음으로 인해서 결국 주님을 본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해준 사람, 먼저 믿은 사람,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눈여겨 봅니다. 그리고서 그대로 따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니까 새로 들어온 새가족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치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특별히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 어떠한 자세로 했는지 데살로니가전서 2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자기가 유모 노릇을 했다, 유모 같이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자녀들을 돌보듯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2장 11절에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영적 아버지를 얻은 것이었고, 바울을 통해서 유모가 갓난 아이를 돌보는 돌봄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형제자매공동체요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배움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목회자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죠. 반면에 로마교회는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판단과 비판, 멸시와 업신여김 속에서 나뉘어져 다투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서 주님의 몸이 훼손당하고 있고 교회를 한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요 형제자매공동체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일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서로를 말 그대로 형제자매로 여기는 형제자매애로써 하나되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직분자들은 직분자로서, 먼저 믿은 성도들은 먼저 믿은 자로서, 새로운 가족 새가족에게 형제 사랑의 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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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 마가복음 3장 31~35절
▶설교 - 하나님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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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의 가족 (막 3:31-35)
일상으로의 단계적 회복, ‘위드 코로나’로의 방역정책의 전환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1월 첫째 주일입니다. 최근에 또다시 확진자 수가 증가해서 우려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일상이 소중하기에 코로나 극복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긴 코로나 기간을 통과하면서 심각하게 물은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상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두려워하는가?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질적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진정한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나누는 교제일까?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해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추구하게 된 본질적 물음입니다.
싱글레이 퍼거슨이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열 세 편의 서신을 교회들에게 보냈다고 말합니다.그는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교제, 죄의 용서,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 및 수치심의 해소, 죄의 지배 및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영생의 확실한 소망,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새로운 갈망.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56-7쪽)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한 가족을 이루어 맏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해가는 것, 이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이라 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십자가, 인류 역사상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 승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교회뿐 아니라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진행. 이러한 소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시려고 하셨던 것인가, 등의 질문도 해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심이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 그리스도 사건은 우리에게는 소위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힘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로써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요?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비전은 교회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복음서에서 교회란 단어는 단 두 곳만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인데요, 중요성은 단연 16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직접 나온 교회에 대한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은 단 한번 뿐이지만 그 중요성은 횟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곳곳에 세웠고, 오늘에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회로 집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인데요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는 거의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단어였습니다. ‘카할’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합이나 모임 혹은 회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교회 곧 ‘에클레시아’는 세속 헬라어의 의미(정치적 결사체로서 민회나 집회 등)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님에게로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예수님의 신부 공동체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려는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모이게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가족을 조성하고자 함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모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로 세우고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서 맏아들을 닮아가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음으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내다보신 비전이요 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일 것입니다. 가족이 우리 곁을 먼저 떠나는 것이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편하고 친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함께 함이 너무 자연스럽고 가족을 위한 생각과 기도가 가장 앞서게 만드는,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의 가족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선물로 받아 부모 자녀로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들은 형제자매를 이룹니다.
이러한 가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해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마가복음 12장 25절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한 개인으로서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버지의 맏아들이신 아들 예수님을 맏형으로서 닮아가고 따라가는 형제자매 공동체,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고 형제자매가 하나 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나려고 했는데 예수님 주위에 둘러싼 무리로 인해서 밖에 있는 채로 예수님께 보고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5절)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렛에서 이곳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자매에게 다소 매몰차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어보입니다만 마가복음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당시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도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붙든다’는 말은 체포하다는 뜻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뒀는데 그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집에 데려올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반응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했다기보다 가족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 종말론적 공동체는 혈연 중심의 가족을 탈피해서, 그러한 가족은 이땅에서뿐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체될 것이고, 이땅에서의 가족은 영원한 실체인 참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킬 뿐이고, 이땅에서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가정을 통해서 진정한 가정, 하나님의 가족에서의 친밀한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려는 것이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가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가족 간의 친밀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친밀한 가족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애, 형제자매애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실현해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 서로를 섬기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공동체, 이로써 함께 복을 누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해지는 사랑의 공동체, 친밀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라고 우리를 한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어제 라디오 극동방송을 운전하다가 들었는데요, 한 성도의 간증이 나왔습니다. 이분이 불교 집안 출신이고 시집 온 남편 집안도 불교 집안 출신인데 아이들이 먼저 교회에 나가게 되고서 이분도 자녀 친구 엄마의 전도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복음으로 변화된 분입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인데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둘이 사춘기가 찾아왔는데, 둘 다 엄마 말을 너무 안들어서 속상하고 힘들어하던 때에, 극동방송에서 한 목사님의 자녀양육에 관한 특강을 들었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자녀를 부모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잠시 기르라고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에 회개가 되더라는 겁니다. 회개를 하고나니까 자녀들을 대할 때 좀더 여유있어지고 자녀들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영원할 것같은 배우자와의 사랑도 잠깐이요 이땅에서뿐이고 애지중지 기르는 자녀들도 마치 내 것인양 ‘내 새끼’하고 기르지만 자녀들 역시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의 가정도 잠깐이면 해체되고서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이 드러날 것인데 그 가족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이루어진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교회를 향한 꿈과 비전이라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 교회가 진정 가족의 친밀함과 사랑으로 형제자매공동체를 이루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 가족 문화라는 게 있는가? 가족인가? 아니면 주고 받는 거래의 관계인가? 사랑과 섬김의 관계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사랑보다는 정죄와 판단인가? 사랑보다는 미움과 싫음인가?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동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새 창조함을 받아 새로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서 새 창조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정체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동산교회 멤버십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동산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한 가족 구성원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을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버세대는 우리의 부모님이고, 다음세대 교회학교는 우리의 자녀들로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부모님을 위한 기도, 교회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는 있습니까? 남녀전도회는 형제자매공동체입니까? 어떠한 소그룹 모임이든 한 분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 사랑으로 모입니까? 코로나 시절에 모이지 못하고 있는 구역 소그룹, 지역별 세대별 모임은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모이기를 귀찮아하고 무관심한 모임, 아예 모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게 그분의 비전이요 예수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슨 유익을 취하려고만 생각하지 가족을 이루려는 생각은 아마 꿈에도 해보지 못했을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친밀한 형제자매 공동체가 되므로 하나님의 꿈, 예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라’, the Family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어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준비되어가고 있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로서 함께 성장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제임스 패커라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판단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아보라. 만일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예배와 기도, 인생관 전체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가 기독교를 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26-7쪽)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모임과 예배는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으로서 무관심하지 말고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 자기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먼저 믿음의 자녀들 서로에게 이 사랑을 나눕시다. 그리고 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함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씁시다.
이러한 비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비전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가족 같은 친밀함과 따뜻함이 있는 교회로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의 행복으로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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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쁨과 즐거움의 복 (사 56:1-8)
제가 몇 주 전에 설교하면서 율법에 대해 깨달은 것을 잠깐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약성경 특별히 율법의 말씀은 배워서 익히고 암송해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기보다, 물론 그러한 학습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습니다마는 몸도 알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런 자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떻게 대접받고 대우받으면 자신이 좋아하는지 배우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압니다. 상대방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하고 친절하게 대우해 주기를 원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것을 명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주께서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창조해주셨으니까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들도 전부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우리 존재에게 유익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법칙이 율법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연법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문명화되어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문명화되기 이전에도 인간 본성에 부합한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키라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법칙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만 살면 복을 얻는 말씀입니다.
행복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에게는 행복이 미리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오만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사들이 회의를 열어 사람에게서 행복을 회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어디에 감춰 두느냐 하는 것이 천사들의 고민이었습니다. 한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저 바다 속 깊은 곳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른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이번에도 역시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탐험 정신은 정말 대단해요. 제아무리 높은 산 위에 숨겨 두어도 찾을 거요."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천사장은 결론을 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둡시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탐험 정신이 강하다 해도 자기 마음속에 행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좀처럼 어려울 테니까." ('행복한동행' 2006년 5월호 (http://www.adventist.or.kr))
이 재밌는 이야기를 기독교적으로 적용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부합한 자연법과 율법에 담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보약이 되어서 진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체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하나가 안식일 명령입니다. 십계명 제 4계명이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안식일은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셨음을 피조물인 우리가 따라하는 날입니다. 안식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쉼이고 쉬기 위해서 멈춤이요 그침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생업을 중단하는 날입니다. 쉬라는 것입니다. 일과 생산을 위해 소비했던 시간을 그치고 비생산적이긴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따로 정한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쉼을 누립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리듬이요 안식일법입니다.
7일을 한 주간의 사이클로 정하고 마지막날을 안식케 하신 것입니다. 6일간 수고하고 애쓰고 나서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해야 또 다음 한 주간을 힘있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율법이 바로 안식일 명령입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사이클은 창조의 리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리듬에 따를 때 몸이 최적화되어서 창조주의 의도대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창조주께서 창조를 다 마치신 후에 7일째 되는 토요일에 안식하셨던 것입니다. 일을 그치고 안식하신 그 날을 복을 주셨다,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날이 안식일이요 거룩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처럼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에 복이 깃든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날을 특별히 선정해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자신을 위한 6일간의 삶을 그치고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안식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이 복주신 날이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려는 걸까요?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게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을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려고 하나님의 집에 나아오는 이방인에게도 기쁨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율법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리듬을 따라, 창조주가 정한 시간의 주기에 따라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따라 쉬고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이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을 복주십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안식일의 가장 주된 특징입니다. 이사야 58장 13절-14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 안에서 이 안식일에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고 이 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운 날이라 여기면 하나님이 즐거움의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바로 지키면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안식일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6일간 생산적으로 효율적으로 일하며 지내면서 혹시라도 탐욕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탐하며 살았는지, 이러한 방향을 그치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회개의 멈침이요 회개의 그침입니다. 자신의 결손과 부족만을 채우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성신학자 미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에 보면, 안식일의 그침에는 일을 그침, 생산과 성취를 그침, 근심과 걱정과 긴장을 그침,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 우리의 소유를 그침, 우리의 문화 순응을 그침,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 등의 그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치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자신을 위해 살면서 자칫 범했을 수도 있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돌아서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그치는 날인데 지난 6일간 쌓였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도, 받았던 스트레스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미움과 무관심과 질시와 증오도,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도, 세상에서 경쟁에 치인 분주한 마음도, 그리고 다음 한 주간에 또 들이닥칠 여러 긴장과 걱정과 두려움 등도 안식일에 다 중단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슬을 끊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가져올 것으로 지레 겁먹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해방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그치고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얼킨 것들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를 얻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중단과 그침과 멈춤을 통해서 해방받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 각종 어려움이나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을 가슴에 품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 때 특별히 초대한 손님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힌 간수 세 명을 취임식에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감옥의 문을 나서며 내리쬐는 햇볕을 느꼈을 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전의 고통과 원한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몸은 감옥에서 나왔어도 영혼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만델라가 시련을 이겨내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과거의 매임과 얽힘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버드 인생특강> 장이츠 저, 162-3)
이처럼 안식일은 지난 6일간 아무래도 자신의 모든 것에 집중하고 살았던 시간을 중단하고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에 나아가서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하고 우리의 소유를 더욱 늘리고 우리를 위해 살면 즐거움과 행복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나를 초월할 때, 나를 벗어날 때, 나에게서 해방받고 다른 사람에게로 나의 시선과 관심을 돌릴 때, 그들을 섬길 때에 오히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바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날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안식일 논쟁에 보면 결론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고, 또 안식일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질병을 치유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등의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날임을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나를 위해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이렇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쁨과 즐거움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모인 공동체, 즉 예배와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임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이요 소망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므로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고 피조물로서 최고의 가치로 고양되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붙잡혀서 그것에 발목잡혀있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 모든 긴장을 풀고, 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참된 자유와 거룩함을 회복하고 새 힘을 얻습니다.
특별히 주일에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해주시는 영혼의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열리는 향연이요 공급받는 영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에 특별히 예배를 위해서 따로 시간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교제를 즐기면서 하루를 온전히 지키고 보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로써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예배와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공동체로 모여서 각 지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아는 자들로서 사랑하는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적인 필요가 충족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아울러 미래를 내다봅니다. 미래에 우리는 모든 일의 완전한 그침이 있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안식이 있을 것이요,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앞에서 열리는 영원한 향연과 축제가 있을 것이요,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을 우리는 안식일 예배 때 고취시켜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다가올 더 큰 기쁨을 미리 맛보고 내다보는 것이빈다. 안식일이 마침내 성취될 때 우리의 연약함은 영원히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영원히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주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 끝없는 기쁨의 향연과 축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유대인 성경학자인 체바트라는 분은 성경적 안식일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표징이 된다는 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일이 아니고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은 이 모든 안식일의 의미를 계승하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기쁨이 덧붙여진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의 기본적인 의미를 계승해서 그침과 쉼, 하나님을 바라봄,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위에게로 다른 사람에게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예배하고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첫 창조의 완성된 안식일이 우리의 죄로 인해 첫 창조가 얼룩져버렸기에 새 창조가 시작된 부활하신 주일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축하고 구원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시작과 더불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새 창조의 완성을 소망하며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오늘 주일에, 매 주일에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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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2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복을 허락 받은 성도 (대상 4:9-10)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나름 괜찮은 삶입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은총을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너무 고통스럽다’, 혹은 ‘내 삶은 왜 이리 험난한가’는 생각뿐입니까? 타고난 게 적어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까? 이쯤하면 남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재능이나 재물이나 기회는 소위 균등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주시지 않으십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별 주름없이 성장하고 자라서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고 성장하고 자라서도 자신이 이룬 가정에서 자녀에게 그 고통을 대물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과 처지와 환경은 다 달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라온 환경이 다 다르고 교육수준이나 경제적 여건이 다 다르고 재능도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관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9-11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 이외에 알려진 바는 하나도 없습니다. 야베스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읽혀지지 않는 성경책 중의 하나인 역대기상에 그것도 짧은 두 절에만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에게 야베스는 알려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 때문에 야베스의 이름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보만 가지고서 많은 내용을 확신 있게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에 관해서 확실한 사실은 그가 험난한 삶,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어느 시점까지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에 성경을 기록한 지금에까지 야베스는 자신의 형제들이나 일가
친척에서 존귀하고 고귀하게 여겨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 자체도 그의 어머니가 난산으로 낳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통 혹은 수고를 뜻하는 단어에서 철자 순서를 바꿔서 이름 붙인 야베스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죠. 야베스를 출산할 때 순조롭지 못한 듯합니다. 고통이 많았던 듯합니다. 난산으로 가까스로 아이를 출산하게 되어서 고통 중에 수고로이 출산했다고 해서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을 정도였다면, 난산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혹시 건강상의 문제나 타고난 신체적 결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한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아서 단정지을 수 없지만 출생부터가 순조롭지 못한 출생이었고 그의 이름에 고통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 인생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려는 듯,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9절에 한 번 나오고 10절에도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야베스라는 단어에도 고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수고로이’에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직역해보면 고통 가운데 출산했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출산해서 낳은 아들이어서 이름을 고통이라는 단어를 두 번째 세 번째 자음 순서를 바꿔서 야베스라고 한 것입니다.
10절에도 고통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여기서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의 ‘근심’이 고통을 뜻하는 같은 단어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환난(원래 단어의 뜻은 ‘악’)에서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인들의 악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는 직역해보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악에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악이라는 것은 고통을 가져오는 근원입니다.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것은 악이요 선은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고통이 없는 것이요 안좋은 것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고통은 악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세계에서는 결코 고통이 일어날 수 없는데 인간이 악을 선택하므로 고통이 찾아온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야베스의 삶은 출생부터 고통이었고 난산의 후유증으로 아마 고통스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던 듯합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고통이 자신의 인생에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인생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타고난 신체적 결함과 불편함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난산으로 인해서 타고난 건강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일생일대의 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기도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신체적 결함과 병약함 때문인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을 의지처로 삼아 살아가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이 특별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유가 어찌 되었던 간에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런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로 승부수를 띄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처절한 인생의 고통만큼이나 처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제발 복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픈지, 고통스런 삶을 살아오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번 뿐인 인생을 이처럼 남다른 고통으로 고통당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원으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그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니까 “진정, 참으로 주께서 나에게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던 만큼 ‘복’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복을 명사로도 사용하고 동사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을 복주시옵소서”,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더 이상 고통이 끝났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야베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짧은 본문을 가지고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야베스의 기도는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하고도 처절한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간 너무 고통스럽게 지내왔다는 겁니다. 고통 속에서 아마 하나님을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의지하고 살아온 인생일 수도 있고,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정 안되겠다 싶어서 일생일대의 기도를 신뢰하는 하나님께 드린 것일 수도 있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인생을 좀 고쳐달라고 처음으로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도 내 인생은 특별히 심하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인생을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절박한 외침을 하늘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일차적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 믿든 잘 믿지 않든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야베스가 그런 삶을 여태껏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런 고통스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다행히 야베스는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아니하고 평소 의뢰하던 하나님이든 아니면 그날따라 처음 불렀던 하나님이든 하나님께 간절히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이 고통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다른 사람보다 적게 주어져서 소위 이 고통을 당하고 지내는데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은 더 나아질 수도 없다는 인식에서 드리는 기도의 간절함이 우리의 기도에는 늘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선물로 받고서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우리는 호흡도 하나님께 받고 인생의 모든 기회와 재능도 하나님께 받고서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너무 적게 받아서 상대적으로 들 받아서 소위 고통속에 지내야하는 인생에 대해서 누구에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주신 하나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제발 나에게 복좀 달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제게도 복을 좀 나눠달라는 겁니다. 복으로 나에게 복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처한 고통스런 환경은 만성적인 고통인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다듬으시려고 어떤 특정 기간에 특정 사건으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과 달리 야베스의 고통은 운명과도 같은 고통처럼 보입니다. 타고난 고통일 수도 있고요 계속 지속되는 고통으로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던 듯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서서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 그대로 남은 인생도 고통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는 제발 복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복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세 가지 간구를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첫째,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여러 신체적 한계나 건강의 병약함과 경제적인 제한 때문에 삶의 영역이 넓지 못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삶의 바운더리,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인생 끝나면 너무 인생이 아까우니까, 매일 보는 사람 또 보고 걸어가는 곳 또 걸어다녀야 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보다 큰 세계로 진출하고 큰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뤄달라는 기도가 아닐까요?
둘째,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도움의 손길이요 나와 함께 할 때 목자되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고 인도하시는 손길입니다. 늘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도함 받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나로 악에서부터 지켜주셔서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그 고통이 육체적 고통일 수도 있고 정신적 고통일 수도 있고 경제적 고통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고통일 수도 있고 외로움의 고통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한 고통일 수도 있는 바, 온갖 고통으로 인해서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악에서부터 환난에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지금과 같은 고통스런 상황을 계속하다가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절망뿐이어서 더 이상 이렇게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이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발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서 복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 배수진을 치고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유재석이라는 연예인, 지금은 너무나 유명하고 잘나가는 그이지만 그분이 한동안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개그맨으로 나왔는데 좀 썰렁했던 기억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메뚜기 복장을 입고 나와서 개그를 하는데 별로 안웃겼던 기억뿐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때부턴가 개그맨으로서뿐 아니라 엠씨나 여러 방면으로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별명이 ‘유느님’이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분이 91년도에 데뷔했습니다. 그후 10년 가까운 무명생활이었습니다. 2000년도부터 이름이 좀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2000년에 TV 프로그램인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이라는 프로에서 셀프카메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데비 10년 차인 2000년까지 받은 상을 소개하며 셀프카메라는 시작하는데요, 받은 상이 별 볼일 없는 상 3가지 뿐이고 그중 하나는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들에게 준 상도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가까운 무명 생활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 가득한 시선에 의해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가끔씩 주변 사람들이 농담삼아 ‘연예인이 왜 TV에 안나오냐’는 말이 가슴에 큰 상처가 됐습니다. 개그맨 동기가 김용만 김국진 남희석 등인데 이들은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그들이 TV에 나올 때마다 티브이를 껐다고 합니다. 안보았습니다. 너무나 친한데 그들은 뜨는데, 바쁘게 TV에 나오는데 나는 뭔가, 이런 생각 때문에 티브이로 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카메라 앞에만 서면 울렁증도 있었고 악조건에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고, 그때에 참 많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분의 종교는 기독교는 아닌데 하여튼 잠자기 전에 꼭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도 잘 안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그랬을 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한 번만 단 한번만 개그맨으로서 기회를 주시면 제 소원이 나중에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이룬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때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큰 엄청난 아픔을 줘도 나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냐고 단 한마디라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했냐면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스타가 되고 몰락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뜨고 나서 변했다는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안되리라고 기도를 하고 스스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겸손하고 노력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의 셀프 카메라였습니다.
이 셀프카메라을 찍은 이후 유재석씨는 소위 엄청 떴습니다. 수많은 연예인 상을 석권했고 지금은 국민연예인이라고 유느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여다본, 너무 짧아서 배경과 구체적인 상황과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야베스의 기도’가 간절함과 배수진을 치고서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이 아니라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삶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일생일대의 기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을 바꾸는 기도라고 할까요, 숙명을 그저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기도의 시점 이후의 야베스의 삶은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9절)고 평가받는 삶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난 것일 수 있고, 그의 형제들, 주변의 사람들보다 복을 받아 누리는 두드러지게 남다른 삶이었던 듯합니다. 이전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 도드라졌던데 반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말미암아 존귀함이 두드러지는 복된 삶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야베스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본문 10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복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으로 자신을 복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너무나 컸고, 앞으로도 이 고통으로 인해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가능케해주실 유일한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달았고 그 하나님께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복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달라는 간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너무나 좋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자신이 복이요 임마누엘이 복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그 모든 소유에 임한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온갖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 복을 누리시므로 더 이상 삶이 온갖 쓰디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허락받은 성도로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0월1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임한 복 (삼하 6:1-15)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민족이나 나라는 복을 받게 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서 여러 가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생상태가 개선되었고, 여러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고, 성실과 근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 성경적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민족과 나라가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고, 온갖 좋은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복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화가 됩니까? 복입니까? 화입니까? 어느 때는 복이고 또 어느 때는 우리에게 화가 됩니까?
우리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고 또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법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그저 복이 되시거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언제나 복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화가 되었고 재앙이 된 보도가 법궤 이야기의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법궤 혹은 언약궤나 증거궤로도 불립니다. 언약을 증거하는,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체결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언약궤요 증거궤입니다. 이 언약궤가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실 때 제작하도록 하나님께 명령 받았기 때문에 법궤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법궤라는 명칭으로 통일해서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6장의 법궤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는데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으로 꼽은 것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블레셋에 패배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후 또 전쟁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번에는 전쟁에 참여하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실로에 있는 성막 안에 안치된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참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법궤가 전쟁터에 나가는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성막에 만들어 두게 하신 것이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더욱 크게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법궤도 빼앗겼고, 아들의 전사 소식과 법궤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도 출산하다가 이 비극적 소식을 듣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의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막 출산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었습니까?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 그러니까 ‘영광이 떠나갔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죠. 며느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법궤가 간다고 하나님이 따라가겠습니까? 법궤를 빼앗겼다고 하나님이 떠났겠습니까? 하나님이 법궤에 종속됩니까? 아니면 법궤가 하나님에게 종속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람들로 확신시켜주시기 위해서 법궤를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두신 것뿐입니다.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강제하기 위해서 강제로 법궤를 끌고간 이스라엘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두 번째 전쟁에서 대패를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가서 위력을 나타내었습니다. 다곤 신전에서 신상들을 밤새 쓰러뜨렸고 법궤가 옮겨가는 블레셋 도시마다 잇따른 재앙이 나타나자 결국 블레셋은 법궤를 토해내게 됩니다. 법궤를 빼앗은지 7개월만의 일입니다.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올려놓고 소를 자유롭게 가게 하였더니 그 수레가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가게 되어서 법궤가 반환됩니다. 그때 가게 된 곳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지역이었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죠. 하나님의 귀환이자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으로 간주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해서 법궤를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무려 70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라고 한탄하면서 이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화를 가져온 법궤라도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실 수 있을까?’를 생각함이 당연할 터인데 이들은 무섭게, 혹은 부담스럽게만 생각되어서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만을 궁리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핑퐁게임, 폭탄 돌리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 지역의 사람들에게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 지역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처럼 세워서 법궤를 지키고 섬기게 합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모시게 된 법궤는 이후 사무엘 시대와 초대왕 사울왕 통치 기간까지 합치면, 그리고 다윗왕의 헤브론 시대까지 지나면 최소 60-7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계속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과 아마 그의 손자였을 웃사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법궤는 아비나답집 사람들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은 사울을 이어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정권을 잡고 유다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떠올리게 됩니다. 법궤를 새로운 수도요 자신의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결심하고 대대적으로 국가 정책 이벤트로 기획하였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국가 행사를 다윗은 평소와 달리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서 실행합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합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어야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도 보장 받을 수 있고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는데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을 향한 충심으로 법궤를 떠올리고 지극 정성으로 자신 곁에 두고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사전에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소 다윗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대한 국가 이벤트로 기획했지만 치밀한 준비는 없었습니다. 특히 율법에서 법궤를 어떻게 운반하라고 했는지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 그 집안의 손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마련하고 소가 이끄는 그 수레에 법궤를 앉히고 그 둘이 수레 앞뒤에서 수레를 통제했습니다. 아비나답 사람들이나 다윗조차도 율법을 모르니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반환했을 때처럼 수레로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국가적으로 성대한 이벤트를 준비한 다윗은 궤가 나올 때에 여러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잘 진행되던 이벤트가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고, 수레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붙들었다가 그만 즉사하게 된 것입니다.
비극적이고 꺼림칙한 일, 웃사의 죽음을 경험하고서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냐면,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왜 화가 났을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목적이 하나님 때문에 달성되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법궤가 떨어질까봐 법궤를 붙든 것은 불가피했는데 이를 용납하지 않고 손에 댔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한 하나님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유다의 왕으로서 전쟁에 능했던 다윗이 하고자 했던 일이 틀어져서, 그 틀어짐이 하나님이 막은 것으로 생각되어서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왕이 되고서 참전하는 전쟁마다 백전백승을 거두었던 다윗이 기고만장하여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후 다윗이 화를 가라앉히자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가져가게 하는데요, 가드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보면 종전에 법궤가 있던 기럇여아림보다 더 먼 곳입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은 역대기에 보면 레위인으로 나옵니다. 다윗이 평소 알고 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레위인 중에서 추천 받아서 강제로 법궤를 떠안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와중에 어느 누구도 법궤를 떠맡으려고 자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법궤를 맡으려고 하겠습니까?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지만 여태껏 보니까 그 임재와 함께 하심이 복이라기보다 오히려 화가 된 경우가 많다보니 누가 선뜻 나서서 법궤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오벧에돔이 자발적으로 나섰다기보다 다윗이 강제적으로 명령해서 그 집으로 법궤를 모신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법궤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오벧에돔의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떠한 복인지, 왜 복을 받게 된 것인지, 그들이 어떻게 법궤를 섬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법궤를 모심으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법궤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법궤를 모실 기대와 기쁨이 다윗에게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다윗은 웃사의 사건이라는 실패를 교훈 삼아서 아마 율법을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수레에 끌어가는 대신에 레위 사람들로 직접 메어가게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법궤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를 율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레위인 중에서 특정 지파 사람들로 채로 엮어서 법궤를 운송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구약 율법은 하나님이 괜히 엄한 것을 정해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끌든 사람이 메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죠. 무엇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까? 무엇이 구약성경의 본체입니까? 하나님이 법을 정해서 그 법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강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괜히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시고 인간을 눌러버리려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무엇이 율법입니까? 우리 자신이 너무 잘 알잖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본능처럼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분명히 압니다. 그 알고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 율법의 본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 하나님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나 연약한 이웃들을 대할 때나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냐면, 내가 대접 받고 싶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참으로 생뚱맞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운송할 때나 법궤를 모실 때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냐면 수레에 끌어가지 말고 사람이 직접 메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고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대하라는 의중입니다. 그러니 이 법이 중요한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성공적으로 도착했고, 예루살렘성에 이를 때에 모든 백성이 환호하며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옴이 하나님이 오심이요 하나님의 오심이 곧 복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법궤는 화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은 거북한 것이나 부담스러운 것이라기보다 우리에게 복이요 기쁨이요 평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빼앗겼던 법궤가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긴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해서 네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네가지 교훈을 간략히 제시하고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이 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오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서 그를 복주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복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나 함께하심이 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대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려 하기보다 자신의 신전에 또 하나의 신으로 추가하려고 하는 경우나, 법궤가 자신의 마을에 들어옴을 보고서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려고 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정하신 법보다 인간의 편의를 앞세우고 법궤를 운송하려 했던 아비나답집의 사람들이나, 처음 다윗처럼 자신의 정권의 안정과 정당성 확보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또한 1차 전쟁에서 패하고서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로 결정했던 이스라엘 지도자의 경우도 다윗과 같은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겠죠. 마치 하나님을 가져다놓으면 복은 따라오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생각! 그러니까 이는 하나님이 복이신데 복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서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이런 생각이겠죠.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대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에는 법궤를 모심이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60-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법궤를 모시고 섬겼던 아비나답집 사람들보다도 단 3개월을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한 것은 무슨 차이 때문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정식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성별해서 법궤를 오랫동안 섬겼는데도 복을 받았다는 보도는 한줄도 없고 어떻게 섬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 3개월을 섬겼는데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하나님이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문이 다윗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집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복을 사모하고 복을 앙모하고 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요 시편 73편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인생에게 복이 되는 그러한 복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하러 주일에 모였습니다. 매주 모여서 예배하고 심지어 수요일에도 예배하고 새벽에도 예배합니다. 목회자는 수많은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복을 받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한 연수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얼마나 복을 받으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는 복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기꺼이 떠안았다기보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지극 정성으로 법궤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에게 화가 되었던 법궤를 생각해보고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법궤를 떠안게 되었을 때 오벧에돔이 ‘나와 우리 온 집이 축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꼭 살려서 복을 받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신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자신의 집안에 화가 미칠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해 어떻게든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섬겼더니 그 결과로서 그 온 집과 모든 소유가 눈에 띄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주체와 객체를 뒤집어도 안됩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복 자체가 되시듯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존개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가 누려야 할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복 덩어리가 된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내가 들어가서 그들에게 혹은 그곳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 여의동에 있어서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우리 이웃에게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들어간 직장에서 나 때문에 직장이 복을 받는 복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곳에서 그들에게 복이 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듯이 이러한 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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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 스가랴 4장 1~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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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1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슥 4:1-10)
오늘 본문 스가랴 4장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그 일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그 어려움, 그 장애물을 오늘 본문에서는 “큰 산”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역사일수록 어려움은 더욱 크기 마련입니다. 장애물은 더욱 크기 마련입니다. 웬만한 허들 정도의 장애물이어서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산과 같아서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큰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일,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시작한 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인데 예상치 못한 큰 장애물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스룹바벨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뜻이라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뛰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큰 장애물을 도중에 만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뜻하신 일이고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셔서 시작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장애물들을 제거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산은 무엇입니까? 이 큰 산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때 막아 선 큰 장애물을 가리키는 것이지, 내가 원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 뜻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직면한 장애물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해가 없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의 일을 기쁨으로 시작하다가 그만 육체의 질병이라는 큰 산 앞에 막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어주어야겠다고 크게 결심하고서 헌금을 계획하거나 자선 기부와 구제를 계획했다가 갑작스런 경제적 위기라는 큰 산 앞에 가로막히기도 합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던 청년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배우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가정을 세우겠다는 비전을 꿈꾸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가 부부간의 갈등이라는 큰 산 앞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를 위해 시간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고 복음 전도와 기도생활을 정한 시간에 하려고 하나님께 서원했다가 하던 사업이 너무 잘돼서 그만 너무 바쁘게 되어서 시간을 따로 떼어내기가 어려운 큰 산 앞에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직장복음화라는 사명을 주셔서 옆에 있는 직장 동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하다가 그만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퇴직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스룹바벨의 경우에는 총독이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해서 성전 재건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치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계획하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큰 산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포로 상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래로 이스라엘 국가 경제가 너무나 피폐해져서 경제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성전 재건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패배주의가 팽배했습니다. 삶도 버겁고 힘든데 성전 공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도 있었고, 이전 성전의 위용과 영광에 비해서 초라한 성전을 짓고 있는데 대한 의미 축소도 있어서 동력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스룹바벨이 직면한 큰 산이었습니다. 어렵게 다시 시작하는 발걸음을 떼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진전하기가 너무나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큰 산 앞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스룹바벨에게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헌신하고 결단하고서 이제는 내 인생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였다면, 그래서 늘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구하고, 나를 통해서 이루실 주님 주실 사명을 구하면서 사명자로 살기로 헌신하였다면 주님의 사명을 이루어갈 때 우리 앞에 놓인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이 평지가 될 것을 우리가 믿고 확신하며 돌파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격려를 받습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힘이 불쑥 생겨납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웠는데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전해드린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주를 위한 열정이 없고 주께 자신을 드리는, 소위 헌신되어 있지 못하고, 예수를 믿음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임을 의미하지 못한 채 자신의 뜻만을 펼쳐나가는데 예수님이 도와달라고만 하는 신앙이라면 오늘 주시는 말씀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사려는 분들이나,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이웃과의 관계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전도에 힘쓰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하면서 주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사명자로 자신을 드리려는 분들에게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산은 무엇입니까? 혹은 누구입니까? 직장 상사입니까? 경제적 어려움입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건강입니까? 은사 부족입니까? 뜻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없음입니까? 교만입니까? 걱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불신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그 무엇이라도 혹은 그 누구라도, 큰 산도 평지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관건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불러주신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사명자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인생의 우선순위로 두고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기만을 염원하시고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놓인 어떠한 큰 장애물이라도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주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스가랴 4장 6-7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힘으로도 재물로도 내 능력으로도 안되도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는 가능합니다. 성전 재건이라는 막중한 사명이 큰 산 앞에 놓인 여러 어려움 때문에 표류하는 듯 보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일곱 영이신 성령의 능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여전한 상황에서 우리 앞에 놓인 큰 산 중의 하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겪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성장을 위해 열심을 다하기 원하는 자에게,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서고자 하는 자에게,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분에게, 주님이 주신 사업을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땀을 흘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이 모든 선한 일들이 큰 산 앞에 가로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오래 기다려왔습니다. 이제는 기다리기보다 돌파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거라는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돌파해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이고 추진해야 할 때이고 시도하기로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요?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재차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 재건의 역사가 마치게 될 것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다림줄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다림줄은 건물을 세울 때, 가령 벽돌을 쌓고 돌을 쌓아올릴 때 수평이나 수직 여부를 가늠하는 데 사용하는 추 달린 줄입니다. 줄에 납이나 돌로 된 추를 매달아 사용했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놓여 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그가 정확하고 올바르고 견고하게 이끌고 있고 앞으로도 이끌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전 재건 역사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던 이들도 결국에는 스룹바벨이 성전 재건을 진두지휘, 이끌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니다.
또다른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림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영육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그 기준으로 삼으시는 말씀의 기준을 상징합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전 재건의 사명을 완수할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으로 지배를 받아서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임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도 환상 중에 ‘다림줄’을 보았습니다. 아모스 7장 7-8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다림줄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그 말씀을 따른 심판을 가리킵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마치게 될, 비록 지금은 큰 산이 장애물처럼 가로막혀 있어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스룹바벨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요.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 공사가 완공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씀일 뿐 아니라 공사 도중 생겨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오직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말씀의 지침을 따라 대처해나가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게 될 것임을 암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손에 쥐고 그 말씀에서 문제 해결의 지혜를 찾고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늘 귀 기울이는 자세로 큰 산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듣게 되고, 돌파할 용기를 얻고 격려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과 문제 해결의 길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돌파해나갈 수 있고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큰 산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되었을 때, 그래도 여전히 큰 산은 우리를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외적인 상황이 문제될 때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개는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자신 안에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이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요, 자신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요, 자신이 온전히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큰 산을 찾기보다 자신 안에서 먼저 큰 산을 찾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큰 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로 삼고 그 말씀을 손에 쥐고서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삼아서 그 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씀의 칼로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49편 5-6절에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전통적으로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과 아울러 하나님의 양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 자신의 마음에 깃든 악과의 싸움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외과 의사가 병든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수술하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자신 안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수술용 칼인 말씀의 검을 손에 들고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의 문제, 여전히 그모습 그대로로 살아가는 변화되지 못하는 삶, 내면에 있는 악,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지 못한 채 변죽만 올리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칼을 양손에 쥐고서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적은 외부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 해결해야 할 ‘큰 산’은 오히려 상황에 놓여져있다기보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손에 양날의 검을 쥐고서 자신과의 싸움에 임해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자기가 부정되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크게 여기거나 최고로 여기는 부풀려진 마음을 버리고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참된 자유를 얻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싸움을 위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직 이 말씀을 다림줄로 손에 쥐고서, 오직 이 말씀 곧 양날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서 우리를 변화시켜나아갈 때 그것이 곧 우리 안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되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분들, 주님을 위해 헌신된 분들, 주님께 쓰임받기를 열망하는 분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내 남은 생을 드리리라고 각오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큰 산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겁도 내지 말고 안된다고 주저앉지도 말고 이 선한 마음을 주시고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이루어주실 줄 믿고 당당하게 용기있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 곧 다림줄을 손에 쥐는 것이요 양날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서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의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그 말씀 안에서 문제 해결의 지혜를 찾고 무엇보다도 결국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큰 산이 바깥에 있기보다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서 탁월한 외과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그 수술용 칼로 자신을 온전히 변화시켜나아갈 것임을 신뢰하고 자신이 변화될 때만 자신 안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장애물과 같은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축복이 여러분의 심령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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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 (시 123:1-4)
우리 기독교에서 은혜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더불어서 가장 자주 듣고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의 가장 주된 특징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인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되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종종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곧 은혜라고 말합니다. 즉 ‘은혜’라는 말은 고대나 지금이나 ‘선물’이라는 말로 받아들일 때 가장 근접하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선물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선물로, 은혜로 주신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존재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선물입니다.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니까요. 창조가 선물입니다. 호흡이 선물입니다. 살아있음이 선물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생명이 선물이라면 가정도 선물이겠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룬 가정, 그리고 가정의 선물로 주어진 자녀들,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이 선물이죠.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추구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순전히 은혜로, 거저 선물로 주신 구원입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신 구원의 은혜요 구원이라는 선물입니다. 우리 각자 구원이 선물이라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렇게 모인 교회도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피흘려 사셔서 머리로서 다스리시는 교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은 은혜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3편의 시편 저자도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러차례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몇 달 후에 혹은 며칠 후에 자신의 생일이 되면 무엇 무엇을 선물로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하는 선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선물을 달라고는 하지 않지만,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곧 선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녀니까 아빠에게 선물 달라고 미리 요청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선물 달라고 하면 그것은 구걸이 되겠죠.
보통 선물이라고 하면 선물을 주는 사람이 선물을 받는 누군가에게 주기를 기뻐해서 선물을 골라서 주는 겁니다. 선물 받는 사람이 이런 선물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기꺼이 선물을 요청하기도 합니다만, 선물을 주는 부모가 들어줄 수도 있고 형편이 안돼서 들어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입니다. 주는 사람이 선물을 결정해서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은혜도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콕 집어서 달라고 하기보다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특정하지 않고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늘상 기도해야 할 제목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입니다. 이것은 상황과 관계없이 피조물로서 그리고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할 마땅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상 하나님께 선물 달라고 간청해야 할 입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입장, 우리의 처지,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바로 알고 드리는 기도의 본령이요 겸손한 기도요 최고의 기도요 늘상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라는 기도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드리는 아주 적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위치와 처지를 바로 깨닫고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것은 더 이상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기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는 기도는 기도의 본령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도해야 할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63세에 소천하셨는데요, 그가 임종했을 때 그의 책상에는 죽음을 앞두고 그가 써놓은 쪽지가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이 말은 참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진짜로 거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간주하고 있습니까?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심지어 남종보다도 더욱 비천한 여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인의 손길만을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종에게 주인의 손길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종이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주인의 손길이란 종에게 무엇을 가리킬까요? 자신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는 손길일 수도 있고요, 형벌을 혹은 매질을 그치게 하는 손길이기도 하고요, 주인이 내리는 명령을 금세 캐치하기 위해서, 즉 주인의 지극히 작은 몸짓에도 주목하기 위해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은 주인에게 자신의 소원을 감히 말할 수도 없고, 주인이 알아서 베풀어주는 대로 받아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을 정당하게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도 자신이 발언하기보다 주인이 자신을 변호하고 옹호해주기를 기다려야 했던 존재가 바로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종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달려 있었고, 종의 모든 필요와 명예가 주인에게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오직 주인의 손, 주인의 배려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눈길이 주인의 손에 쏠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녀야 할 바른 자세와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주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로 종종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오실 때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예수님께 소리쳤던 눈 못보는 맹인이요 구걸하는 거지였던 바디메오입니다. 그는 눈을 못보았기 때문에 오늘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들리는 말을 들었는데 나사렛 사람 예수시란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소문으로 알고 있었던 바디메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임을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큰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들이 맹인 주제에 거지 주제에 하면서 그를 제지했습니다. 조용하라는 것이겠죠. 바디메오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눈을 뜰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예수님께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8) 거지이자 눈 못보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바로 깨닫고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편 저자가 자신을 종으로 비하시키고서까지,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해드리고서, 오직 자신은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에 내맡긴 채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한 것과 다르지 않은 기도입니다. 바디메오 역시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거지로서 또 눈 못보는 자로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나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나 오로지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하는 기도로서 같은 기도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디메오를 주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를 부르셨죠. 소리치는 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바디메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 10:51)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와 본질이 같은 기도요 기도의 본령에 가장 충실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과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요 오직 은혜뿐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그 일반적인 간구를 들으시는 주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물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응답해주시면서 또한 더욱 구체적인 간구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맥락은 무엇입니까? 그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물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이 상황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으로 무슨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떠한 도움의 선물을 구하고 있는지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선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멸시, 심한 멸시, 비웃음과 조롱을 시편 저자가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멸시요 비웃음이요 조롱일까요? 아마 하나님 때문일 겁니다. 믿음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일 겁니다. 악한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시편 저자가 이러한 상황에서 구하는 은혜,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신앙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요새 시대에 아직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유물과 같은 존재로 비웃을 때, 조롱할 때,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어떻게 머리를 써서 일확천금을 노릴 것인가를 도모하는 이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비웃음과 멸시와 무시와 신앙에 대한 조롱을 들으면서 우리 영혼은 마음이 상하고 참담함까지 느끼고, 때때로 믿음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까지 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종의 심정으로 여종의 심정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은 손을 들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나타나심, 그분의 영광이 우리 눈에 보여지는 그러한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배 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손길이 아닐까요? 무신론적 경향과 분위기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믿음을 가진 자이지만 때때로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서 하나님 없는 인생을 어느 때는 생각해보기도 하는 우리에게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눈에 보이도록 증거해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많은 사람들로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아닐까요?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종과 여종의 비통한 심정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주인의 처분의 손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그러한 자세와 태도로 하늘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바라봄은 시편 121편 1-2절의 내용과 비슷하면서도 그것을 능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고서 그 산을 지으신 여호와에게로 시편 121편 저자가 나아갔다면 오늘 시편 123편 저자는 바로 직선으로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오늘 시편 123편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구체적으로, 신앙에 대한 비웃음과 믿는 자에 대한 멸시가 가득하고 교회를 사회의 한 코너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도록 허락하는, 그것도 마음씨를 넓혀서 선대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있음을 교회를 통해 증거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예배 가운데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여, 주의 일이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하박국의 간구와도 일맥 상통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의 이러한 부흥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하박국 2장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그가 드린 간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슨 응답을 받았기에 이후로 수년 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에 띄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즉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까? 하박국 2장에서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다보면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응하게 될 것이니까 이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응답이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응답을 받고서 하박국 선지자는 더욱 간절하게 이어서 또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도의 이러한 기도,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역사가 수년 내에 나타나게 해달라는 이러한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한 기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달라고 했던 이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기다리다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응답을 듣고서 드렸던 이러한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구약 성도들의 이러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을까요? 어떤 선물을 주셨을까요? 구약 성도들이 간절히 고대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구약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로 응답되었던 바 그 최고의 선물이, 그 최고의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요 하나님의 행하심의 절정이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가까이 임한 하나님나라 그 자체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자세로 오늘 예배를 드릴 때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에게 임한 은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그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가치를 깨닫고 보화이신 그분에게서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예수님께 붙들리고 헌신하여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합하여져서 그분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를 갈망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늘상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는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의지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물 달라고,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요, 늘상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어떠한 자세로 드려야 할까요? 나는 오직 종이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손길, 주님의 손길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요 영적으로 거지요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 더욱 큰 선물, 최고의 선물을 주셨고, 또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의 발앞에 엎드려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로 다짐함으로써 더욱 큰 은혜,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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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교독 - 39. 시편 9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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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623장
▶기도 - 송재덕 장로
▶성경봉독 - 출애굽기 15장 22~27절
▶설교 - 인생이라는 시험
▶찬송 - 320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9월2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인생이라는 시험 (출 15:22-27)
자녀들 보니까 학교에서 시험을 치루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풍경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도 시험을 치룹니다. 받아쓰기 시험을 봅니다. 물론 시험문제를 미리 주죠. 받아써야 할 문장을 미리 알려주고 숙제도 내줘서 몇 번씩 쓰게 한 후에 다음날에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치룹니다. 중고등학생들은 학기 중간에 중간고사 시험을 보고 학기말에 기말고사 시험을 치룹니다. 수업을 잘 들었는지, 배운 내용을 잘 숙지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루는 날 당일에 시험이 끝난 후 이번 시험에서 수학은 어려웠지만 국어는 평이했다 등의 난이도에 대한 해설이 뒤따릅니다. 수험생이 시험을 볼 때 잘 못보았다고 좌절했다가도 이번 수능 시험이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모두 어려웠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잘 보았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변별력이 있으려면 시험의 난이도가 있어야겠죠. 어렵게 출제된 문제라야 실력을 잘 가려낼 수 있겠죠. 시험은 그래서 어렵게 출제될 때 시험다운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생들을 시험하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출제하시는 시험은 시련이라는 다소 변별력 있게 어려운 문제로 출제됩니다. 시험이 시련으로 측정될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아치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시험 곧 Testing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의 실력이 100점인지 아니면 50점인지, 아니면 빵점인지, 시련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의 우열이 드러나고 믿음에 대해서 시험평가가 냉정하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문제는 주로 어려운 인생의 시련을 허락하셔서 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 대학수능시험이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 주로 객관식 문항이듯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지켜보시는 시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것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것인지, 즉 그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아니면 시험에 떨어질 것인지, 시험 결과가 말해줄 겁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광야체험,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주로 시험을 치루는 무대인데요, 광야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치루었고, 물론 대다수가 시험에서 낙방해서 광야에서 머물다 죽음을 맞이했죠. 반면에 시험에서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치루셨습니다. 물론 이 시험은 사탄이 넘어뜨리고 미혹시키고 유혹하는 시험이었으나 그 시험조차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에서 수행된 시험이었습니다.
이처럼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사람들인데요, 이 시험은 시련이라는 혹독한 상황, 광야라는 무대 위에서 시련이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된 욕망에 이끌려, 그리고 그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의 미혹과 유혹에 따라 시험을 당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든 아니면 사탄의 유혹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험을 치룬다는 것이요, 그 시험은 주로 시련의 맥락에서, 인생의 험한 풍파속에서 치루는 시험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믿음으로 반응할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시험입니다.
어떤 시험문제든 정답이 있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우리에게도 시험문제에 정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인생의 정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5장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앞으로의 광야 여정 전체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인생 전체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 광야 전체의 축소판이 오늘 마라의 쓴 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만 집중해서 보아도 우리 인생 전체의 시험이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에서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는지를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 조망해볼 수 있는 광야생활 전체를 축소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마라의 쓴 물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사건으로 기술합니다.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하시고서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이라 함은 사흘간 광야길을 걸었는데도 물을 전혀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드디어 물을 만났는데 물이 짜고 써서 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혹한 상황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고 하더라도 이와같은 혹독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거의 드물게 일어날 정도의 혹독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황에서 믿음의 변별력 있는 시험을 치룬 것입니다. 믿음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총 4가지 시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인생의 정답을 아는 것입니다. 이대로만 살면 인생 잘 사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제하신 문제인데요 총 4가지 문제로서 어렵지 않은, 머리로 풀 때는 어렵지 않은, 기초 실력을 갖춘 분들이라면 누구나 정답을 선택할 수 있는 문제지만, 실제로 삶으로 실천하려고 할 때엔 실천적으로 정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난이도가 제법 있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시험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혹독함, 혹은 쓰디 쓴 마라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1번. 원망과 불평 2번. 기도. 정답은? 2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한 것은 1번이었습니다. 모세만 2번 정답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백성들은 이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했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겨우 이른 오아시스였는데 마실 수 없는 물이라, 얼마나 실망이 됐겠습니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의 선택은 2번 기도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모세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시험에 통과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번 문제에서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는 머리로 푸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으로 정답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으로 정답을 살아내는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혹독한 상황, 쓰디 쓴 상황에 여러분이 처하게 될 때 이것은 분명한 인생의 시험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원망과 불평, 혹은 누구누구의 탓을 하며 반응할 때가 많습니까, 아니면 조용히 기도의 자리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1번 문제만 정답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생 문제의 절반 정도는 해결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어려울 때 기도의 자리로 나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시험이 그러겠지만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는 시련의 상황 가운데서 믿음의 반응을 요청하는 시험문제입니다. 믿음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주로 원망하거나 불평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누구누구의 탓, 심지어 하나님 탓을 하고 사람들 붙잡고 불평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견고한 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니까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 문제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우면서도 어렵죠? 정답을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두 번째 시험 문제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1.다른 사람 2.자기 자신 3.하나님. 정답은 3번입니다. 요새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어보면 문제를 내는데 누구라도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쉽게 내던데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도 쉽게 정답을 알 수 있는 시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어려운 인생의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까 1번 문제에서 보았듯이 그 쓰디 쓴 인생의 고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을 기억해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는데 그것은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쓴 물에 넣었더니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여기서 ‘한 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시켜주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물에 관한 기적을 베풀 때 모세의 나무 지팡이를 활용하셨던 것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요? 가령 애굽에서 열 재앙을 내렸을 때 첫 번째 재앙,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는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라고 명하셨죠. 이뿐 아니라 홍해를 건넌 기적 때에도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려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려고 한 나무를 지정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셨는데, 이 나무는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즉 이 나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셨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여서 지금 혹독한 시련의 상황에서도 오직 그러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나무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 신약의 백성들은 오늘 본문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된 나무를 볼 때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마시게 하셨는데,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한 나무를 사용하셔서 우리 인생에게 그러한 기적을 베풀어주셨던 바, 그 나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로 생각나게 합니다.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리가 떠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쓴 물을 하나님께서 능히 단 물로 바꿔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물이 없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내 인생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쓴 문제를 능히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시험 문제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했을 때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심을 기억하고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뿐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2.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고서 대다수 사람들이 걸어간 길로 그들을 따라간다 3.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는다. 정답은 물론 3번이겠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심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이 시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서 한 시험으로 제시됩니다. 25절 뒷부분을 보시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다가 우리가 나아가야할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지침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법령 곧 법도와, 그리고 판례 혹은 여러 가지 사례 즉 율례로써 성경에 제시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쓰디 쓴 인생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더욱 말씀에 집중해서 문제 해결의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 등의 구체적인 질문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어려움이라는 시험은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 수 있느냐의 시험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해를 각오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느냐의 시험입니다. 말씀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믿음의 시험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암흑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발을 인도하시고 내 길을 이끄시는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과 같은 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늘 이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우고 익히고 적용하므로 문제 해결의 길을 성경에서 찾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선택하고 말씀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애쓰다가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팽겨치고 인간적 지혜와 자신의 얕은 경험에 의존해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생의 시련의 때에는 더욱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끝까지 신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느냐를 보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험 문제입니다. 쓰디 쓴 인생의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고통의 현장 즉 마라의 쓴물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결국에 우리를 이끄실 엘림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현재의 고통에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고통 이후에 우리를 인도해가실 끝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신앙생활의 결국은 마라의 쓴 물이 아니라 엘림의 안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라의 쓴 물을 지나서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엘림이라는 너무나 좋은 오아시스가 있음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의 약속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와 종말은 결국은 엘림입니다. 생명수로 가득차 있어서 물 샘이 충분하고 많은 나무들이 물가에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엘림이 우리의 결국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끝이 아니라 오아시스 엘림이 우리 인생의 끝입니다.
현실 문제에 치여서 함몰되어 한없이 깊은 늪에 빠져가는 인생이 아니라 거기서 헤어나오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국에 주시려고 하는 것은 마라의 쓴 물이 아니라 엘림의 오아시스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광야 같은 인생길로서 하나님의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무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시험하시는데요, 특별히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물이 없는 고통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무엇을 시험하심입니까? 우리가 그러할 때에도 원망과 불평으로 지샐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것인가, 또한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것들을 기억하고 지금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가 문제의 해결책을 과연 성경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문제 해결의 길을 발견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결국에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에서 다 통과하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땅에 이르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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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도는 사랑입니다 (마 5:43-48)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주로 누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에 따라 누구를 사랑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여기서 더 확장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특별히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기도를 한다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 특별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냐면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면 위해서 기도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특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라는 겁니다.
옥한흠목사님의 설교 <사랑하면 기도한다>에 보면, 기도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하나님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먼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감정을 토로해도 기꺼이 들으시는 분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기꺼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더 이상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주고 받는 거래! ‘내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했으니까 꼭 응답해주세요’,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서원 기도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거래와 같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거래가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놀라운 무궁한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신 하나님이 내 음성과 간구를 귀울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그분 앞에 앉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하며 대화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날마다 달라고 하는 떼를 쓰는 기도냐 아니면 주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느냐, 우리 자신의 기도를 돌아볼 일입니다.
옥한흠목사님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되면 우리가 '무슨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까?'는 고민 안해도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격식을 따지거나 무슨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지 않겠죠. 무엇을 말해야 할 까, 큰 고민이 안됩니다. 사랑의 관계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들어줄 거니까, 왜 못하냐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초기에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결국 사랑이 없어서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무엇이든 듣고 싶어하고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하고 다 들어주는 것,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안좋은 것들을 다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뭐든지! 그래서 이분은 기도란 예비 타이어(스페어 타이어)가 아니라 핸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예비 타이어는 펑크 날 때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야 기도하고 불이 나야 기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핸들은 차만 타면 늘 붙잡고 움직이듯이, 이렇게 내 손 안에 핸들과 같이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께 꺼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우리가 기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대상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고상한 명령,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시지만 구약에 아까 말씀드린 시편의 기도를 보면 가령 시편 109편과 같은 소위 저주시를 보면 예수님의 명령과는 전혀 반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자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고, 억울한 일을 행하고,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당하게 나의 것들을 빼앗은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다 아뢰고 복수해주시고 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저주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구약 시편에는 소위 저주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기도문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기도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 모순돼 보이는 듯합니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은 구약의 저주시 시편을 거쳐야 예수님의 명령, 바울 사도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며, 또 12장 19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시편의 저주시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의 기도>라는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원수 갚음의 시편이 부담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이상의 길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로서, 다른 사람을 향해 사랑을 가질 만큼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 자신 안에 분노와 비통과 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제일 좋은 길을 안다. (그것은 더욱 좋은 것, 사랑이다.)... 나는 원수 갚음의 시편 이상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은 그것을 통과하는 길이지, 그것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우리가 당한 일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끔찍하고 억울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저주하고자 하는 마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간혹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일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억울함을 꾹 누르고 참아야 하겠습니까? 시편의 기도자들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들고 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거침없이 다 토로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말들이 원수에게 직접 쏟아놓으면 그것이 저주가 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 쏟아놓으면 탄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탄원이 됩니다. 그렇게 한동한 하나님께 쓰디 쓴 감정을 토로하면 그 마음의 아픈 감정과 고통스런 소리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마음을 누그러뜨러주시고 변화시켜주시고 치료해주시고 단잠주시고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주시고 억울한 일도 풀어주십니다. 내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이땅에 어디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내 이야기 다 들어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것들이라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어떠한 말에도 들어줄 용의가 있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저주 기도에도 기능이 있습니다. 어떤 기능이 있냐면 우선 카타르시스 기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그 말하는 것을 말이 되든 안되든 감정이 정제돼 있든 아니면 날 것이든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들을 들을 용의를 지닌 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적인 정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쏟아붓다 보면 자신이 당한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의 깊이와 강도를 발견하는 자기 발견의 행위가 됩니다. 말은 무척이나 위험천만하고 거친 것들이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음을 곧 발견하게 되는데, 직접 원수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찾아가 해코지 하며 복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마음 속의 응어리와 문제가 무척이나 커보이지만 그래서 그 마음을 지닌 것만으로도 괴롭고 스스로 정죄를 당하게 되지만, 일단 하나님께 말해지면 그 강도가 약화됩니다. 아울러 원수 갚음이 더 이상 나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로 옮겨가면 자신은 좀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저주시의 구조를 보면 처음에는 엄청나게 표현하고 쏟아붓고 그리고 나서 이런 모든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처분에 맡기는, 소위 이양하게 됩니다. 많이 아뢰고 낱낱이 아뢰고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도 충분하고 더욱 많이, 모든 것을 이양하고 양도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자유롭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행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고백, 고통의 표현,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맡김. 양도해드림, 이런 두 단계를 거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수가, 원수 갚음이라는 공이 하나님께로 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를 갚으시는가? 하나님에게도 난처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실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브루거만은 우선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시는가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봅니다. 두 가지 사례를 듭니다. 하나는 노아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피조물을 향해서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복수를 결심하십니다. 분노 가운데서가 아니라 비통과 슬픔 가운데서 그런 결심을 하십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홍수 심판 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결정적인 변화는 어디서 일어납니까? 인간의 생각은 여전히 악하고 그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처음 마음은 창 6장 5-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후에 홍수 심판 후 변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그들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원수 갚는 것을 참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자신의 마음 안으로 수용해서 간직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또 호세아 선지서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가 엿보입니다. 호세아 1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 대한 격정적인 하나님의 토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9절에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일어난 분노를 속으로 거둡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합당하게 보응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분노와 원수 갚음이 들어가서 내면화될 뿐이요, 밖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오직 사랑과 불쌍히 여김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원수 갚음의 고통을 짊어지시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 갚음을 처리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일어난 분노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분석하고서 이제 신약의 명령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명령하시고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복수심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밖으로는 온 피조물을 향해서 호의와 연민을 보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원수 사랑의 명령과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명실상부’, ‘이름과 실질이 딱 맞아 떨어진다’,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한다는 뜻으로 알려진 것과 실제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만 되면 명실상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가 본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호의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악인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45절)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지닌 사람들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웃’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만 친하게 지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께 칭찬들을 만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성향이라기보다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나 이방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원수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경지는 너무 높아서 쳐다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추석을 앞둔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일가친척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시죠? 이번 추석 명절에 만나게 될 자손들, 친척들 사랑하시죠?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죠.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을 마음에 품고 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있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라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면 기도하는 대상은 그 사랑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늘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누구와도 누리며 나눌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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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왕하 13:14-19)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대개는 화목한 가정, 안정된 직장, 건강한 신체, 즐거운 경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 일의 보람 등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Very Good, A+인생이라고 할 만 합니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좋은 인생이란 대개 두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행복(쾌락)과 의미(가치)입니다. 행복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행복과는 달리 의미 혹은 가치는 사회 봉사, 환경 활동, 섬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 등, 참 의미있게 여겨지는 삶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내가 만족한다고 참된 만족이 있는 게 아니라 활동들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때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이 두 축에 끼어든 제3의 '좋은 삶'을 어떤 심리학 교수분들이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풍요', 곧 마음이 풍요로운 삶입니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예를 들어,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커리어(경력)을 쌓는 것, 도전적인 예술에 몰입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학습), 창작해보기 등은 심리적 풍요를 더해주는 경험이 됩니다. 고난이나 역경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이로써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깐은 부정적인 감정이 남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도움이 되는 경험이 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변화무쌍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죠.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통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세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를 경우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1등은 행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약 70%, 2등과 3등은 거의 비슷한데요, 2등은 심리적 풍요(16%),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삶(14%)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분명 심리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는 심리적 풍요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앙만큼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해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되고, 세상을 향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어서 헛된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탐닉을 그치고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심리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위 연구자들의 결론입니다: "심리적 풍요는 우리가 일상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와 함께,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준다." (한겨레신문 2021.9.8.)
개인적으로 심리적 풍요가 충만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를 볼 때에, 저 멀리 솟아있는 산을 볼 때에, 점점 푸르러지고 높아지는 초가을의 하늘을 볼 때에, 아니면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를 만날 때에,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에, 가족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을 지닐 때에, 어려운 일이라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성취의 기쁨을 누릴 때에, 가슴을 적시는 어떤 글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때에,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렇듯 새로운 계절에 들어설 때에, 이 모든 삶의 활동, 일상의 활동, 일상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심리적으로 풍요로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심리적 풍요가 곧 일상을 충만하게,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평가 잣대가 되는 것이죠.
심리적 풍요란 내 안의 감정의 풍요, 정서의 풍성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깊은 슬픔으로, 기쁨도 벅찬 환희로, 사랑도 뜨거운 사랑으로, 연민도 손발의 도움으로 구체화되는 활동으로,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에서 고강도로 펼쳐짐으로 인해서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연구한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구약학자는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성령의 불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로써 성령은 우리를 태우시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불꽃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더럽고 허무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의 불꽃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주십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 나눌 말씀입니다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말 그대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의 강렬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은 우리의 마음의 그만그만함입니다. 그저 그런 마음의 온도를 성령님은 싫어하십니다. 성령의 불로 타오르든지 아니면 말든지!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서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할 때 바로 그점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참으로 무서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고강도의 감정이 내 마음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예배하는 마음이 뜨겁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이 뜨겁고, 기도할 때 마음이 뜨겁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뜨거운 것입니다. 정열,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이 짙게 배어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나이가 많이 들고 병에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요아스가 문병왔습니다. 요아스왕은 엘리사를 보자마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의 위협으로 인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와 지혜와 영감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숱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사였기에 왕조차도 “내 아버지여”라고 그를 불렀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웬만한 국방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아스왕의 아버지였던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의 공격을 받고 북이스라엘이 항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의 국방력을 축소시켜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명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는데, 선대왕의 초라한 국방력을 아들 요아스왕이 그대로 계승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아스왕에게 선지자 엘리사라는 존재는 진정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요아스왕의 눈물은 진심어린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떠나게 된다면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챈 엘리사는 어찌보면 자신의 떠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알려주기 원했던 듯합니다. 엘리사가 떠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떠남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데, 과연 요아스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엘리사는 그점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요아스왕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인가’.
엘리사는 일종의 선지자적 예언 행동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고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엘리사는 요아스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활을 쥔 요아스왕의 손에다가 엘리사가 손을 얹고서 둘이 함께 동쪽으로 난 창을 열고 그곳으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예언적 행동을 하고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실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왕과 함께 동쪽을 향해 쏜 화살은 아람으로부터의 구원의 화살이요, 그 예언적 행동이 가리키는 내용은 요아스왕이 아람을 치되 멸절하기까지 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방금 읽은 17절과 이어지는 18-19절에서 ‘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나카’가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시면,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는 문장은 왕이 아람을 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멸절하도록’이라는 말은 ‘끝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강조되는 말은 ‘끝장을 볼 때까지’입니다. 아람을 진멸할 때까지 이스라엘이 치게 될 거라는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다. 현실에 비추면 일어나기가 불가능해보이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은 극소수로 제한돼 있고, 이제 엘리사마저 떠날 참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아람을 치되 진멸할 때까지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예언적 행동과 그 해석을 통해서 예언하기를 비록 엘리사 자신이 떠나도 요아스왕을 통해서 아람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아스왕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요아스왕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철저한 승리를 믿고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엘리사는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의 근엄함과 무게감을 갖추고서 이 행동과 예언을 주면서 이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요아스왕이 깊이 숙고해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아마 시험일 겁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엘리사는 요아스로 하여금 또다른 화살들을 집게끔 하고서 그 화살로 땅을 내리치라고 명령합니다. ‘땅을 치소소’에 또 히브리어 ‘나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아까 함께 행했던 예언적 행동과 그 의미를 이미 설명했던 엘리사는 요아스왕이 그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고 순종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 아까 사용했던 동사를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 후 이번에는 ‘땅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요아스왕이 치게 될 ‘땅’은 아람 군대를 가리키고, 요아스왕이 예언의 말씀을 믿는다면 화살로 땅을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칠 것을 엘리사는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방금 전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단순히 말로만 동쪽에다가 활을 쏘라고 명령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요아스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함께 활을 쏘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떠나도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이 왕의 손을 통해서 아람을 치게 될 것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려는 선지자의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왕에게 부모처럼 가르쳐주려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화살로 땅을 치라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얹고 땅을 내리치는 게 아니라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으로 의도된 명령이며 시험임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내린 명령으로 보입니다. 요아스왕이 죽음 앞에 서있는 엘리사의 행동과 말의 무게를 헤아려본다면 그리고 엘리사의 행동에 담긴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그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요아스왕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 끄덕이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온전한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까? 땅 곧 아람 군대를 치되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화살이 부러질 때까지 아니면 여러차례 내리쳐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대와는 달리 요아스왕은 아마 힘없이 세 번 내리치고 맙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겠다는 표시로써 그 말씀처럼 화살을 땅에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쳐야 했는데 겨우 세 번은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친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화가 났습니다. 왕의 믿음의 부족, 왕의 행동을 그저 믿음의 부족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이란 삶을 통합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문제이면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아스왕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믿음으로써 삶이 통합되는 것이므로 결국 삶에 임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에 결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요아스왕이 충분히 많이 내리쳤더라면 방금 전에 전달한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아람을 치게 될 터였는데 왕이 세 번만 내리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제한하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요 특별히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감정적 풍요에 연결돼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켜줍니다. 그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그의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그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왕의 믿음의 부족이요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잔잔한 일들이요 거듭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이렇듯 잔잔한 일상에 고강도의 감정을 불어넣읍시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포기치 않으심,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운동력있는 활동하는 지식이요 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이란 결국 믿음의 삶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요 믿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왕과 엘리사는 참으로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사의 삶과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조차, 그를 꺾지 못하는 삶의 불꽃,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 왕에 대한 연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정! 반면에 요아스왕의 형식적 슬픔과, 자신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근시안적 시선, 영혼이 들어가지 못한 행동들, 안일함과 무감각!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인생을 그리고 일상을 그렇게 살아갑시다. 어떻게 살아가자는 겁니까? 열정적으로 뜨겁게! 적극적이되 간절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자연을 대할 때도, 인생을 대할 때도, 우정을 대할 때도, 이웃을 대할 때도, 일을 대할 때도, 기술을 연마할 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볼 때, 교제할 때, 전도할 때, 섬길 때,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것들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