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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21일 동산교회 추수감사주일 설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눅 15장 25-32절)
감사하다는 말이 영어로 ‘Thank you’죠.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공교롭게도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참 유사합니다. 우연이겠지만 감사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구약의 여러 절기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시간으로 허락하신 절기들이 감사의 시간이요 축제의 시간임을 생각했습니다. 창조주께 돌리는 참된 영광, 참된 예배는 결국 감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흡이 감사요 일상이 감사요 관계가 감사요 존재가 감사요 살아있음이 감사요 인도해주심이 감사요 소망 주심이 감사요 어려움 속에서의 인내가 감사요 환난 가운데서의 성장이 감사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인해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시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짧디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허망한 마음 금할 수 없는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에서 감사가 솟구쳐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감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서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보아도 감사하지 않을 수만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감사하지 못함에 대해서 이해가 될 때가 많고 인간으로서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하도록 보이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목사님의 감사의 기도를 들으면 탄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로 흔히 말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 아들 못지 않게 첫째 아들에게도 이야기의 비중이 있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등하게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두 아들 각각에게도 예수님의 시선이 쏠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지금이 감사할 상황입니다. 예상치 못한 너무 기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사랑했으나 자신의 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감사할 상황입니다.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것 가지고 살아보려고 아버지 품을 일찍 떠났다가 저 먼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서 배고파서 움켜진 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지만 염치가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종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생각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집으로 향했는데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환대와 기쁨과 즉각적으로 아들로 복원됨을 경험하고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감사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겠죠.
세계적으로 어떤 유명한 소설가, 아마 소설 <적과 흑>을 썼던 스탕달로 기억됩니다만 이분이 예수님의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가나 문학가들에게 둘째 아들 탕자는 매력적으로 보이나 봅니다. 최근에 어떤 기자가 이어령씨의 인터뷰를 엮어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보니까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탕자, 돌아오다>라는 소설을 읽고 이분이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열매가 더 달았어요”
이어령씨는 둘째 아들이 훨 낫다는 겁니다. 길 잃은 양이 훨씬 훌륭하다는 거예요.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고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뿐이지,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목자 엉덩이만 따라가는 양 99마리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시키는 대로만 사는 효자보다 스스로 존재해보겠다고 마음 먹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온 자식이 더 장하고 측은하게 느껴질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령씨는 주장합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문학가로서 상상력을 가미해서 둘째 아들을 높이 추켜 올렸지만 성경 해석가들에게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크게 부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어령씨는 예전 책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제법 성경적 의도와 부합하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효자의 이야기도, 허랑방탕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그네 된 우리 인생 이야기로 봅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원래 뜻이 밖으로 ‘나간 이’를 뜻하죠.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간 이’ 곧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뛰쳐나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독립하여 멋지게 살아보려고 떠난 이야기입니다. 익숙해서 싫어진 고향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품이 그리 좋은지 모른 채 아버지의 간섭이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마치 내 자유를 앗아가는 듯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걸로 생각했으나 막상 떠나보니까 찾아온 것은 궁핍과 허무뿐이었습니다. 새 출발하고자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지만 이내 타향살이에 지칠 뿐이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채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인 인생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스스로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사막 같은 인생길을 힘겹게 달음질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점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지고 고향땅이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엄습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철부지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두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둘째 아들은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받아들여줌으로 인해서 은혜와 사랑을 진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문제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면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 했나는 생각도 듭니다. 이해되는 면은 화가 날만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맏이이신 분들은 첫째 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첫째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부모에게 혼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동생들의 잘못인데 첫째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요,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을 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로서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나중에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장애인공동체에서 섬기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독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맏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고 충실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그의 동생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형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이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했으면 심하게 질책 받을 문제 있는 행동에 대해서도 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도 부모님이 너그럽게 이해하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동생이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지른 뒤 아버지께 혼나지 않으려고 낱낱이 털어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동생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을 잘 이해해주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동생의 친밀함을 보고 너무 부러워 동생을 질투했습니다. 장남인 자신은 끊임없이 착하고 곧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보상으로 존중은 얻었지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부모님의 친밀한 사랑은 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우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었습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은 차가운 분노입니다. 원망의 가장 큰 문제는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난받을 일 없이 떳떳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롭고 의로운 원망입니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의 도덕주의적 분노입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 법을 지킨데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입니다...원망은 우리 마음의 뜰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거침없이 퍼져 나가는 잡초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깊이 박혀 다른 많은 뿌리와 엉키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냥 잡초가 아니라 독초입니다. 그 독성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나우웬은 큰 아들로서 자신의 내면 안에 원망이 들어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원망의 감정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고 끌어오르게 되면 분노로 표출되는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감정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는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아마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동생이 이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게 될 거라는 것보다도,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송아지조차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보다도,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더 화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독차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모든 면에서 동생보다도 더 훌륭하고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첫째 아들의 감정은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교의식도 있고 경쟁의식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면 깊은 곳에 원망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분노로 폭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원망의 반대말입니다. 삶을 선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원망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내 것’과 ‘네 것’을 뛰어넘어 삶의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나우웬은 누구나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의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받고 원망에 차 있을 때도 나는 감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늘 원망과 감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두움 속에 나타나셔서 집으로 오라고 부르시며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극복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비결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비교하지 않는 풍성한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우리를 다 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오 우리는 다 같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두려움과 질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는데서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 풍요한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묻고 나우웬이 답하다>, 크리스 프리쳇 저, 230-9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이십니다. 반면에 오늘 첫째 아들은 본문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겨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실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 당신의 아들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약 아버지와 둘 사이에서 그를 선택한다면 자신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잃었던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곁을 떠나고 방탕한 삶에 잃어버렸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 떨어졌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아버지에게서 이미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을 받아들여주신 아버지는 첫째 아들 또한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은 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머지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형이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모두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오늘 둘째 아들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집밖에 서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아버지의 참된 풍요로운 사랑 밖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함께 이 형제자매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누고 누리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오늘 추구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첫째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질투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즉 편애한다는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겠다는 욕심과 이기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정 감사해야 할 때, 마땅히 감사해야 할 순간에도 감사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살면 살수록 목회자로서 저 자신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창조주를 향한 감사의 찬양,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상황과 관계없는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오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므로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 아버지의 풍요로우신 사랑으로 인한 감사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전환점 삼아 남은 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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