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1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임한 복 (삼하 6:1-15)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민족이나 나라는 복을 받게 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서 여러 가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생상태가 개선되었고, 여러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고, 성실과 근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 성경적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민족과 나라가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고, 온갖 좋은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복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화가 됩니까? 복입니까? 화입니까? 어느 때는 복이고 또 어느 때는 우리에게 화가 됩니까? 우리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고 또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법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그저 복이 되시거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언제나 복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화가 되었고 재앙이 된 보도가 법궤 이야기의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법궤 혹은 언약궤나 증거궤로도 불립니다. 언약을 증거하는,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체결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언약궤요 증거궤입니다. 이 언약궤가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실 때 제작하도록 하나님께 명령 받았기 때문에 법궤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법궤라는 명칭으로 통일해서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6장의 법궤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는데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으로 꼽은 것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블레셋에 패배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후 또 전쟁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번에는 전쟁에 참여하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실로에 있는 성막 안에 안치된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참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법궤가 전쟁터에 나가는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성막에 만들어 두게 하신 것이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더욱 크게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법궤도 빼앗겼고, 아들의 전사 소식과 법궤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도 출산하다가 이 비극적 소식을 듣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의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막 출산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었습니까?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 그러니까 ‘영광이 떠나갔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죠. 며느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법궤가 간다고 하나님이 따라가겠습니까? 법궤를 빼앗겼다고 하나님이 떠났겠습니까? 하나님이 법궤에 종속됩니까? 아니면 법궤가 하나님에게 종속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람들로 확신시켜주시기 위해서 법궤를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두신 것뿐입니다.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강제하기 위해서 강제로 법궤를 끌고간 이스라엘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두 번째 전쟁에서 대패를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가서 위력을 나타내었습니다. 다곤 신전에서 신상들을 밤새 쓰러뜨렸고 법궤가 옮겨가는 블레셋 도시마다 잇따른 재앙이 나타나자 결국 블레셋은 법궤를 토해내게 됩니다. 법궤를 빼앗은지 7개월만의 일입니다.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올려놓고 소를 자유롭게 가게 하였더니 그 수레가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가게 되어서 법궤가 반환됩니다. 그때 가게 된 곳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지역이었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죠. 하나님의 귀환이자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으로 간주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해서 법궤를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무려 70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라고 한탄하면서 이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화를 가져온 법궤라도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실 수 있을까?’를 생각함이 당연할 터인데 이들은 무섭게, 혹은 부담스럽게만 생각되어서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만을 궁리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핑퐁게임, 폭탄 돌리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 지역의 사람들에게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 지역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처럼 세워서 법궤를 지키고 섬기게 합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모시게 된 법궤는 이후 사무엘 시대와 초대왕 사울왕 통치 기간까지 합치면, 그리고 다윗왕의 헤브론 시대까지 지나면 최소 60-7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계속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과 아마 그의 손자였을 웃사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법궤는 아비나답집 사람들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은 사울을 이어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정권을 잡고 유다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떠올리게 됩니다. 법궤를 새로운 수도요 자신의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결심하고 대대적으로 국가 정책 이벤트로 기획하였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국가 행사를 다윗은 평소와 달리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서 실행합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합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어야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도 보장 받을 수 있고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는데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을 향한 충심으로 법궤를 떠올리고 지극 정성으로 자신 곁에 두고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사전에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소 다윗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대한 국가 이벤트로 기획했지만 치밀한 준비는 없었습니다. 특히 율법에서 법궤를 어떻게 운반하라고 했는지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 그 집안의 손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마련하고 소가 이끄는 그 수레에 법궤를 앉히고 그 둘이 수레 앞뒤에서 수레를 통제했습니다. 아비나답 사람들이나 다윗조차도 율법을 모르니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반환했을 때처럼 수레로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국가적으로 성대한 이벤트를 준비한 다윗은 궤가 나올 때에 여러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잘 진행되던 이벤트가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고, 수레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붙들었다가 그만 즉사하게 된 것입니다.
비극적이고 꺼림칙한 일, 웃사의 죽음을 경험하고서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냐면,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왜 화가 났을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목적이 하나님 때문에 달성되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법궤가 떨어질까봐 법궤를 붙든 것은 불가피했는데 이를 용납하지 않고 손에 댔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한 하나님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유다의 왕으로서 전쟁에 능했던 다윗이 하고자 했던 일이 틀어져서, 그 틀어짐이 하나님이 막은 것으로 생각되어서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왕이 되고서 참전하는 전쟁마다 백전백승을 거두었던 다윗이 기고만장하여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후 다윗이 화를 가라앉히자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가져가게 하는데요, 가드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보면 종전에 법궤가 있던 기럇여아림보다 더 먼 곳입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은 역대기에 보면 레위인으로 나옵니다. 다윗이 평소 알고 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레위인 중에서 추천 받아서 강제로 법궤를 떠안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와중에 어느 누구도 법궤를 떠맡으려고 자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법궤를 맡으려고 하겠습니까?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지만 여태껏 보니까 그 임재와 함께 하심이 복이라기보다 오히려 화가 된 경우가 많다보니 누가 선뜻 나서서 법궤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오벧에돔이 자발적으로 나섰다기보다 다윗이 강제적으로 명령해서 그 집으로 법궤를 모신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법궤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오벧에돔의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떠한 복인지, 왜 복을 받게 된 것인지, 그들이 어떻게 법궤를 섬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법궤를 모심으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법궤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법궤를 모실 기대와 기쁨이 다윗에게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다윗은 웃사의 사건이라는 실패를 교훈 삼아서 아마 율법을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수레에 끌어가는 대신에 레위 사람들로 직접 메어가게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법궤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를 율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레위인 중에서 특정 지파 사람들로 채로 엮어서 법궤를 운송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구약 율법은 하나님이 괜히 엄한 것을 정해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끌든 사람이 메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죠. 무엇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까? 무엇이 구약성경의 본체입니까? 하나님이 법을 정해서 그 법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강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괜히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시고 인간을 눌러버리려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무엇이 율법입니까? 우리 자신이 너무 잘 알잖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본능처럼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분명히 압니다. 그 알고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 율법의 본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 하나님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나 연약한 이웃들을 대할 때나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냐면, 내가 대접 받고 싶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참으로 생뚱맞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운송할 때나 법궤를 모실 때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냐면 수레에 끌어가지 말고 사람이 직접 메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고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대하라는 의중입니다. 그러니 이 법이 중요한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성공적으로 도착했고, 예루살렘성에 이를 때에 모든 백성이 환호하며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옴이 하나님이 오심이요 하나님의 오심이 곧 복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법궤는 화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은 거북한 것이나 부담스러운 것이라기보다 우리에게 복이요 기쁨이요 평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빼앗겼던 법궤가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긴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해서 네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네가지 교훈을 간략히 제시하고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이 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오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서 그를 복주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복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나 함께하심이 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대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려 하기보다 자신의 신전에 또 하나의 신으로 추가하려고 하는 경우나, 법궤가 자신의 마을에 들어옴을 보고서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려고 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정하신 법보다 인간의 편의를 앞세우고 법궤를 운송하려 했던 아비나답집의 사람들이나, 처음 다윗처럼 자신의 정권의 안정과 정당성 확보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또한 1차 전쟁에서 패하고서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로 결정했던 이스라엘 지도자의 경우도 다윗과 같은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겠죠. 마치 하나님을 가져다놓으면 복은 따라오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생각! 그러니까 이는 하나님이 복이신데 복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서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이런 생각이겠죠.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대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에는 법궤를 모심이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60-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법궤를 모시고 섬겼던 아비나답집 사람들보다도 단 3개월을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한 것은 무슨 차이 때문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정식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성별해서 법궤를 오랫동안 섬겼는데도 복을 받았다는 보도는 한줄도 없고 어떻게 섬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 3개월을 섬겼는데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하나님이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문이 다윗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집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복을 사모하고 복을 앙모하고 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요 시편 73편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인생에게 복이 되는 그러한 복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하러 주일에 모였습니다. 매주 모여서 예배하고 심지어 수요일에도 예배하고 새벽에도 예배합니다. 목회자는 수많은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복을 받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한 연수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얼마나 복을 받으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는 복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기꺼이 떠안았다기보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지극 정성으로 법궤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에게 화가 되었던 법궤를 생각해보고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법궤를 떠안게 되었을 때 오벧에돔이 ‘나와 우리 온 집이 축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꼭 살려서 복을 받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신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자신의 집안에 화가 미칠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해 어떻게든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섬겼더니 그 결과로서 그 온 집과 모든 소유가 눈에 띄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주체와 객체를 뒤집어도 안됩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복 자체가 되시듯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존개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가 누려야 할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복 덩어리가 된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내가 들어가서 그들에게 혹은 그곳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 여의동에 있어서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우리 이웃에게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들어간 직장에서 나 때문에 직장이 복을 받는 복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곳에서 그들에게 복이 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듯이 이러한 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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