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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사랑은 어떻게 싹이 트는가? (살전 4:9)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 모두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자녀들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애(愛)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317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매’라는 단어는 26번 사용되었는데요, ‘형제’라는 단어는 단순히 남자 형제만을 가리키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데 ‘형제’가 사용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가리키면서 가족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분은 여러분의 형제요 여자분은 여러분의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형제자매공동체로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듯이 교회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우애하고 사랑해야 함을 뜻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진짜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하고 먼저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필요할까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확증해주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집이나 토지, 가족마저도 복음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기도 하시고,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할 경우에는 가족 대신 예수를 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가족에게만 베푸는 좁은 사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도 해주십니다. 이것들이 다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현세에서도 100배나 되돌려 보상을 받습니다.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뿐이므로 100배 보상 받는 항목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100배 많은 자식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항목에는 아내는 없습니다. 괜히 아내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버리는 항복은 영어로 Or입니다. ‘~나’인데 반해서 100배 돌려받을 항목은 ‘And’입니다. 이것과 그리고 저것도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목록 중에 하나이면 되지만, 얻게 되는 것은 목록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 버리는 것보다 믿음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100배 돌려받았습니까? 어느 하나를 버렸는데도 이 모든 것을 100배나 돌려받았습니까? 형제자매가 100배나 늘었습니까? 늘었죠. 예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교회공동체를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처럼 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가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형제자매 혈육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를 보상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자매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로마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에 관해서 한 사례를 말씀해줍니다. 로마 교회 내에 소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형제공동체로서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아마 로마교회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아마 소수의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전부 이방인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전부 유대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나 대개 크게 보아 그렇게 생각하면 90%는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논쟁이 있었던 듯합니다. 가령, 고기를 먹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할 때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던 고기가 시장에 나와서 유통되기 때문에 꺼림칙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 그것을 코세르라고 하고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코셔 푸드라고 합니다. 상당이 까다롭습니다. 당시에도 로마교회 내 유대인 성도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했고 양심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던데 반해서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음식 문제뿐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문제와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두고도 티격태격 싸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소위 믿음이 강한 자는 규정과 율법에 꼼꼼히 신경을 쓰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게 되어서 그러한 규정에 매이지 않아도 됨에도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멸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방탕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요 조심성 없고 사려깊지 못한 이들이요 우상숭배의 가장자리를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멸시하다’, ‘업신여기다’(한글 개역개정)이고,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행해서 일관되게 ‘멸시하다’, ‘업신여기다’ 혹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를 사용합니다.
형제자매인데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고 진영이 갈려서 서로를 향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로마교회의 문제를 사도바울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본 입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고 이방 신자들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 진영에 대해서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옳고 믿음이 약한 자가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을 더욱 엄격하게 책망합니다. 로마서 14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풀어서 설명해보면 ‘만일 네 형제나 자매가 네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다면, 너는 더 이상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반목하는 두 진영 당사자들에게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논쟁과 싸움을 그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니까 관용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싸움을 그치라고만 했다면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집에서 자녀들을 키워보면 형제자매끼리 싸우기도 한단 말이에요. 싸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라거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 다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어요. 그저 형제자매니까 서로 관용하고 사랑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어요. 바울은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들어서 형제 사랑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향해서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너는 또 어찌하여 네 자매를 멸시하느냐?”고 말하면서 이렇게 싸우는 이들에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미래, 우리가 직면할 미래란 어떤 미래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설 미래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석에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싸움과 다툼과 하나되지 못함과 사랑하지 못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날이 있음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에 관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핵심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저 위협으로 받아들이라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에 샅샅이 심판하실 것이니 형제자매로서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신학적인 것입니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투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 사랑의 측면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핵심은 로마서 14장 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님이신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심판받고 판단받게 될 터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를 세워주실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말씀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세워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소위 새창조를 완성해주시겠다는 것이요, 새창조된 새하늘과 새땅 곧 하나님이 지으시는 회복된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부활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한 신학자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 참말입니 까?” 이 질문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겠어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벗이 될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진정한 형제와 자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를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아직 부활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형제자매임을 자각하고서 로마서 14장 19-20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너무나 기이하고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신학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알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셔서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형제자매 가정공동체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해보고 그리고서 계속 서로를 향해서 비난할 것인지, 판단할 것인지, 혹은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소망이 현재적으로도 역사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고. 로마서 14장 설명은 책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에 수록된 리차드 헤이스의 설교에서 대부분 가져왔습니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이러한 칭찬을 듣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해서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 도시는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금도 큰 도시입니다. 학폭으로 한국에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배구 선수 이재영선수 자매가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이어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서 대략 3개월 정도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추정하기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던 때는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고린도에서 썼을 것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하고 핍박 때문에 부랴부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야 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형제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신생교회가 형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7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었고 환난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전해준 바울 일행을 그들이 본받은 것이었고 그로써 주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 사랑에 있어서 칭찬 듣는 교회,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 그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된 신생 신자들이었으나 복음의 말씀을 받고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른 복음의 신앙으로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재림 신앙, 부활 신앙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와 디모데를 본을 받음으로 인해서 결국 주님을 본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해준 사람, 먼저 믿은 사람,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눈여겨 봅니다. 그리고서 그대로 따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니까 새로 들어온 새가족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치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특별히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 어떠한 자세로 했는지 데살로니가전서 2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자기가 유모 노릇을 했다, 유모 같이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자녀들을 돌보듯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2장 11절에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영적 아버지를 얻은 것이었고, 바울을 통해서 유모가 갓난 아이를 돌보는 돌봄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형제자매공동체요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배움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목회자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죠. 반면에 로마교회는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판단과 비판, 멸시와 업신여김 속에서 나뉘어져 다투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서 주님의 몸이 훼손당하고 있고 교회를 한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요 형제자매공동체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일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서로를 말 그대로 형제자매로 여기는 형제자매애로써 하나되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직분자들은 직분자로서, 먼저 믿은 성도들은 먼저 믿은 자로서, 새로운 가족 새가족에게 형제 사랑의 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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