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 입금하실 때 이름+헌금종류를 기재해 주세요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105장 ▶성시교독 - 50. 시편 116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69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이사야 66장 1~4절 ▶특송-김성진 지휘자 ▶설교 -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 ▶찬송 - 325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12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 (사 66장 1-4절)
최근에 <리추얼의 종말>이라는 책을 보았는데요, 재독(在獨)철학자 한병철씨의 철학에세이입니다. ‘리추얼’은 제의, 의식이라는 뜻으로 흔히 종교 제의, 종교 의식, 종교 예전 등에 사용됩니다. ‘리추얼’은 반복하는 특징이 있고 또 공동체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개인적, 관계적 영성이라기보다 깔려진 트랙 위를 반복적으로 달리는 것이요, 그것도 공동체가 함께 달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분이 보기에 현대 사회에는 제의나 의식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전통적이고 공동체적이고 삶에 안정화를 가져다주는 제의가 온통 사라지고 오직 자기 중심적, 자기애적 숭배가 대신 자리를 잡았다는 겁니다. 이제는 공동체적이고 반복적이고 패턴화된 어떤 형식보다 개인주의적이고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수없이 뻗어나가는 탈형식이 압도한 시대가 되었다는 진단입니다. 진정성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사람들이 형식을 제거해버렸다는 겁니다. 한 마디로 이런 말이죠.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마음이 중요하지!’ 저자는 ‘리추얼의 종말’을 이미 2018년에 말했는데 코로나 시대가 ‘리추얼의 종말’을 완성했다고 봅니다. 디지털화한 소통, 그래서 소통이 많아진 것 같아 보여도 공동체 없는 소통이요 친밀하게 만드는 소통이라기보다 자기중심성을 뽐내는 소통으로 전락했다는 겁니다. 이분은 ‘리추얼의 종말’을 좀 안타깝게 바라보시는 것 같습니다. 이분은 독실한 카톨릭신자는 아니지만 카톨릭 미사에 종종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리추얼의 향수를 그리워하면서 말입니다. 이분의 말입니다: “노래와 오르간 연주와 향 연기에 취하면 나를, 나의 자아를 잊게 되죠. 그리고 아름다운 공동체를 경험합니다.” 기독교 예배에서 ‘리추얼’ 그러니까 예배 예전도 중요성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전통적인 예배 예전에 따라 주일예배를 드립니다만, 많은 교회들이 탈형식화한 예배, 경배와 찬양, 성령의 임재를 강조하면서 예배자 개인의 감정과 선호를 더욱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예배 예전의 형식은 답답하게 느껴지고 개인적으로 은혜를 받고 감정적으로 고양되어 심리적 카타르시스와 해방감을 느꼈는지로 예배의 방향이 달라졌습니다. 아직도 예전을 중시하는 종교가 있다면 바로 유대교입니다. 유대교는 모든 것이 예전입니다. 새벽모임을 갖는 정통파 유대교 회당에서 매일 읽어야 할 성경 본문이 있고 드려야 할 기도문이 매일 있습니다. 기도도 개인 기도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드려왔던 기도문으로 공동체가 함께 기도드립니다. 정형화된 틀로 새해를 맞이하고 1년이 지나 또 그 길로 걸어갑니다. 안식일을 맞이하는 예전도 있고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형식화된 규칙이 있습니다. 유대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이 마련해주신 안전한 길을 평생 걸어가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역동성과 인격성과 관계성보다는 리추얼이 제공하는, 그러니까 종교 예전, 종교 의식이 완벽하게 셋팅돼 있어서 공간적으로 전 세계 유대교 공동체 안에 머무르게 되고 시간적으로 조상들과 연결된 채 안정감을 누리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종교 비판의 핵심이 바로 리추얼, 제의화된 종교, 형식화된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선지자 이사야의 이사야서의 결론인 66장도 그렇게 시작하는데요, 제의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참으로 신랄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소 도살자나 사람을 죽이는 자 같을 뿐이요, 어린양을 희생제물로 드리는 자는 개의 목을 꺾는 자 같을 뿐이요, 드리는 예물은 부정한 돼지피를 드리는 것과 같을 뿐이요 분향하는 것은 우상에게 복을 구하는 자와 같다는 것입니다. 의미 없는 형식적, 반복적 제의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거부입니다. 제의주의자들은 수많은 제의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으면서 결국에는 “자기의 길을 택”하는 자들입니다. “가증한 것을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의미 없는 반복이요 생동감 없는 형식이요 하나님이 아닌 제의 자체가 안정감을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많이 행해지고 많이 불러져서 익숙해졌을 뿐, 친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오히려 익숙함을 불러오기보다 낯설음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무한히 크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복적 익숙함이 친밀함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빠질 수 있는 흔한 오류입니다. 자주 예배드리고 자주 기도드리고 자주 교회에 출입하고 교회 일에 헌신하고 직분이 커질수록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 익숙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오류에 빠지기 가장 쉬운 사람이 바로 목회자입니다. 자주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교회에 출퇴근하고 자주 기도하고 하니까 모든 것이 익숙해지고 하나님도 익숙해지고 그 익숙함이 마치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다는 착각에 이르고, 그 편안함과 안정감이 내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고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익숙함은 하나님을 편안하게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더 이상 부담스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함께 동행하기에 걸끄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익숙함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감을 빼앗아 갑니다. 3절 끝부분에서 리추얼주의자들 곧 제의주의자들은 결국 “자기의 길을 택하며”,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익숙해졌으니까 선택하는데 하나님을 고려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수 있게 되어버렸습니다. ‘자기의 길’을 택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제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리추얼이라는 안전판에 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의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3절에서 ‘선택하다’는 동사가 사용되었는데요, 즉 “자기의 길을 택하며”라고 말하고 있는데요, 4절에서도 ‘선택하다’는 동사가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그 선택을 보고서 결정하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사용됩니다. 제의의 반복적 익숙함이라는 패턴에 빠져서 안정감에 도취된 채 ‘자기의 길’을 택하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엄중한 경고를 전합니다. 본문 4절입니다.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한 제의주의자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선택은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입니다. 그들로 하여금 유혹당하고 미끄러져서 파탄에 이르도록 하나님이 선택하시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임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들의 유혹과 파멸을 선택하시는 겁니까? 우리의 선택에 따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우리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그들이 먼저 ‘자기의 길’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불러도 대답하지 않았고, 하나님이 말하여도 듣지 않았고 하나님의 목전에서 악을 행했기 때문입니다. 현 국회의원 중에 김진표의원이 있습니다. 경력이 화려합니다. 경제부총리와 교육부총리를 역임했고, 5선 의원으로서 민주당 원내대표도 역임했습니다. 수원중앙침례교회 장로이며 국가조찬기도회장도 역임했습니다. 이분이 국민일보의 신설 코너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이라는 코너에 첫 번째로 글을 기고 했습니다. 이분에게 나침반이 된 성경말씀은 로마서 8장 28절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분은 정치인으로서 매일 중요한 문제를 선택해야 하는데 선택의 순간마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이 큰 힘이 된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씀이 자신의 인생에 나침반이 된 계기는 2002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재정경제부 차관 시절이었습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연락을 주셨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으로 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고민이 됐습니다. 먼저 직속 상관인 진념 부총리 겸 재경부 장관에게 상의를 드렸더니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정부 수석 차관이면 다음 정권을 누가 잡더라도 재경부 장관 0순위다. 떠나는 대통령을 모신다고 하면 설사 정권이 재창출된다 하더라도 당신을 쓰겠느냐”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해 12월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 정부의 지지율은 10%대였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다 한사코 말렸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 중에 기도하면서 바로 이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때 마음에 든 확신은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로 간구하면서 옳은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정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은 남보다 빠르게 차관이 된 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었고, 존경하는 대통령을 모시고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겠다는 각오였습니다.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이 돼 ‘2002 한·일 월드컵’ 청와대 대응팀장을 맡았습니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월드컵은 큰 성과를 냈고,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김 대통령의 지지율도 급상승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될 것으로 봤지만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대선 직후 노 대통령 당선인은 인사차 청와대를 찾았습니다. 김 대통령은 다음 정부에서 일할 좋은 인재를 추천해 달라는 요청에 처음엔 사양하시다가 딱 한 사람을 추천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김진표 당시 국무조정실장이었습니다. 그래서 노 당선인의 제안으로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부위원장을 겸직하게 되었고, 이후 참여정부 초대 경제부총리를 맡아 경제 개혁을 추진했고, 2004년 정계에 진출해 17대부터 현 21대까지 수원지역 국회의원에 5번이나 당선됐습니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사람의 능력은 보잘것없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로 구하면 반드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답을 주십니다. 언제나 선택할 때는 눈앞의 유불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맞는 길인가를 살펴야 합니다.”로 글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때 기도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확신을 주시고 평강을 주시고 말씀을 주십니다. 그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의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는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반복적으로 시행되는 성전 제의 뒤에 숨어서 거기서 안정감을 얻고 언제나 자기의 길을 선택했고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제의주의자들이 수많은 예배와 제의와 성전에서의 섬김을 하면서 얻게된 익숙함과 편안함이 하나님과 친밀해짐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선택이 자기의 길을 선택함이었으면서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한 주간 코로나로 인해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온라인 예배를 드렸고 평일 새벽예배나 수요예배도 드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고 수요예배에 꾸준히 참여했던 성도님들은 아마도 많은 답답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배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영적으로 힘든 일인지 느꼈을 겁니다. 이것이 리추얼, 제의, 반복적인 예배 형식의 중요성입니다. 그러나 자칫하면 이러한 제의중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의 역동적 관계를 빼앗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반복적인 제의가 가져다주는 안정감에 빠져서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놓쳐버리고, 마치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처럼 착각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는 착각입니다. 내가 예배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영광 받지 못하신다는 생각이죠. 내가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생각이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내가 뭔가를 하나님께 준다고 착각하고 하나님은 뭐를 아쉬어 하는 분, 하나님이 그러시는 것은 뭐 아쉬어서 그러시는 것 같다는 잘못된 생각에 이릅니다. 이러한 잘못된 생각에 빠진 신앙인들에게 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땅이 하나님의 발판, 혹은 발등상이라는 말은 고대 근동세계에서 하나님이 원수들의 목을 짓밟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복자 왕이 정복당한 왕의 목을 밟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땅의 거민들의 목을 밟고 계시다는 것은 땅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나를 위한다고, 가당치 않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필요로 해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제의요 예배인데, 예배를 드리면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필요로 한다고 착각하는 제의주의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어지는 2절에서, 참된 예배, 참된 경건, 참된 영성, 참된 하나님 섬김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사람을 주목하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내려보시는지, 어떠한 사람을 돌보아주시는지 말씀해주십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 부분을 공동번역에서는 다음과 같이 번역했습니다: “내가 굽어보는 사람은 억눌려 그 마음이 찢어지고 나의 말을 송구스럽게 받는 사람이다” 여기서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째,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둘째, 심령에 통회함이 있는 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 떠는 자,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고 굽어보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주목하신다는 것이요 하나님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다보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사람들을 돌보시냐면 소위 세상에서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충족적 자기 만족에 겨운 사람들이 아니라 채워지지 않은 마음의 빈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들입니다. 심령에 통회함이 있다는 것은 여기에 쓰인 단어가 마음에 장애가 있는 자를 가리킵니다. 이 단어가 다리를 절며, 가령 사울의 아들, 그러니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리를 절었죠, 그에게 사용된 단어입니다.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것처럼 마음에 장애를 가진 자입니다. 마음이 상한 자입니다. 마음이 깨진 자입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는 ‘두들겨 맞아서 쓰러진’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두들겨 맞아서 쓰러져있는 상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며 떠는 자입니다. 말씀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질까봐 두려워하며 떠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겠습니까? 우리의 신앙을 우리의 경건을 점검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의 예배와 기도가 의미 없는 반복이 되거나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을 제거해주는 안전판이 되는 신앙, 곧 제의주의자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결국에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보다는 자기의 길을 선택하는 신앙인지, 아니면 겸비한 마음으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서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두려워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돌보시는 사람은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이 통회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임을 기억하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며 주복하시며 돌보시는 은총이 함께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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