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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도는 사랑입니다 (마 5:43-48)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주로 누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에 따라 누구를 사랑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여기서 더 확장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특별히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기도를 한다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 특별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냐면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면 위해서 기도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특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라는 겁니다.
옥한흠목사님의 설교 <사랑하면 기도한다>에 보면, 기도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하나님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먼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감정을 토로해도 기꺼이 들으시는 분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기꺼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더 이상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주고 받는 거래! ‘내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했으니까 꼭 응답해주세요’,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서원 기도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거래와 같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거래가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놀라운 무궁한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신 하나님이 내 음성과 간구를 귀울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그분 앞에 앉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하며 대화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날마다 달라고 하는 떼를 쓰는 기도냐 아니면 주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느냐, 우리 자신의 기도를 돌아볼 일입니다.
옥한흠목사님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되면 우리가 '무슨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까?'는 고민 안해도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격식을 따지거나 무슨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지 않겠죠. 무엇을 말해야 할 까, 큰 고민이 안됩니다. 사랑의 관계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들어줄 거니까, 왜 못하냐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초기에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결국 사랑이 없어서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무엇이든 듣고 싶어하고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하고 다 들어주는 것,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안좋은 것들을 다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뭐든지! 그래서 이분은 기도란 예비 타이어(스페어 타이어)가 아니라 핸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예비 타이어는 펑크 날 때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야 기도하고 불이 나야 기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핸들은 차만 타면 늘 붙잡고 움직이듯이, 이렇게 내 손 안에 핸들과 같이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께 꺼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우리가 기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대상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고상한 명령,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시지만 구약에 아까 말씀드린 시편의 기도를 보면 가령 시편 109편과 같은 소위 저주시를 보면 예수님의 명령과는 전혀 반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자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고, 억울한 일을 행하고,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당하게 나의 것들을 빼앗은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다 아뢰고 복수해주시고 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저주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구약 시편에는 소위 저주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기도문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기도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 모순돼 보이는 듯합니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은 구약의 저주시 시편을 거쳐야 예수님의 명령, 바울 사도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며, 또 12장 19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시편의 저주시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의 기도>라는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원수 갚음의 시편이 부담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이상의 길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로서, 다른 사람을 향해 사랑을 가질 만큼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 자신 안에 분노와 비통과 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제일 좋은 길을 안다. (그것은 더욱 좋은 것, 사랑이다.)... 나는 원수 갚음의 시편 이상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은 그것을 통과하는 길이지, 그것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우리가 당한 일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끔찍하고 억울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저주하고자 하는 마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간혹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일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억울함을 꾹 누르고 참아야 하겠습니까? 시편의 기도자들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들고 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거침없이 다 토로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말들이 원수에게 직접 쏟아놓으면 그것이 저주가 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 쏟아놓으면 탄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탄원이 됩니다. 그렇게 한동한 하나님께 쓰디 쓴 감정을 토로하면 그 마음의 아픈 감정과 고통스런 소리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마음을 누그러뜨러주시고 변화시켜주시고 치료해주시고 단잠주시고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주시고 억울한 일도 풀어주십니다. 내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이땅에 어디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내 이야기 다 들어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것들이라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어떠한 말에도 들어줄 용의가 있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저주 기도에도 기능이 있습니다. 어떤 기능이 있냐면 우선 카타르시스 기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그 말하는 것을 말이 되든 안되든 감정이 정제돼 있든 아니면 날 것이든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들을 들을 용의를 지닌 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적인 정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쏟아붓다 보면 자신이 당한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의 깊이와 강도를 발견하는 자기 발견의 행위가 됩니다. 말은 무척이나 위험천만하고 거친 것들이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음을 곧 발견하게 되는데, 직접 원수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찾아가 해코지 하며 복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마음 속의 응어리와 문제가 무척이나 커보이지만 그래서 그 마음을 지닌 것만으로도 괴롭고 스스로 정죄를 당하게 되지만, 일단 하나님께 말해지면 그 강도가 약화됩니다. 아울러 원수 갚음이 더 이상 나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로 옮겨가면 자신은 좀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저주시의 구조를 보면 처음에는 엄청나게 표현하고 쏟아붓고 그리고 나서 이런 모든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처분에 맡기는, 소위 이양하게 됩니다. 많이 아뢰고 낱낱이 아뢰고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도 충분하고 더욱 많이, 모든 것을 이양하고 양도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자유롭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행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고백, 고통의 표현,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맡김. 양도해드림, 이런 두 단계를 거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수가, 원수 갚음이라는 공이 하나님께로 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를 갚으시는가? 하나님에게도 난처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실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브루거만은 우선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시는가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봅니다. 두 가지 사례를 듭니다. 하나는 노아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피조물을 향해서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복수를 결심하십니다. 분노 가운데서가 아니라 비통과 슬픔 가운데서 그런 결심을 하십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홍수 심판 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결정적인 변화는 어디서 일어납니까? 인간의 생각은 여전히 악하고 그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처음 마음은 창 6장 5-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후에 홍수 심판 후 변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그들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원수 갚는 것을 참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자신의 마음 안으로 수용해서 간직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또 호세아 선지서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가 엿보입니다. 호세아 1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 대한 격정적인 하나님의 토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9절에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일어난 분노를 속으로 거둡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합당하게 보응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분노와 원수 갚음이 들어가서 내면화될 뿐이요, 밖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오직 사랑과 불쌍히 여김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원수 갚음의 고통을 짊어지시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 갚음을 처리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일어난 분노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분석하고서 이제 신약의 명령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명령하시고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복수심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밖으로는 온 피조물을 향해서 호의와 연민을 보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원수 사랑의 명령과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명실상부’, ‘이름과 실질이 딱 맞아 떨어진다’,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한다는 뜻으로 알려진 것과 실제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만 되면 명실상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가 본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호의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악인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45절)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지닌 사람들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웃’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만 친하게 지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께 칭찬들을 만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성향이라기보다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나 이방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원수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경지는 너무 높아서 쳐다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추석을 앞둔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일가친척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시죠? 이번 추석 명절에 만나게 될 자손들, 친척들 사랑하시죠?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죠.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을 마음에 품고 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있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라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면 기도하는 대상은 그 사랑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늘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누구와도 누리며 나눌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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