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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2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복을 허락 받은 성도 (대상 4:9-10)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나름 괜찮은 삶입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은총을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너무 고통스럽다’, 혹은 ‘내 삶은 왜 이리 험난한가’는 생각뿐입니까? 타고난 게 적어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까? 이쯤하면 남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재능이나 재물이나 기회는 소위 균등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주시지 않으십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별 주름없이 성장하고 자라서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고 성장하고 자라서도 자신이 이룬 가정에서 자녀에게 그 고통을 대물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과 처지와 환경은 다 달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라온 환경이 다 다르고 교육수준이나 경제적 여건이 다 다르고 재능도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관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9-11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 이외에 알려진 바는 하나도 없습니다. 야베스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읽혀지지 않는 성경책 중의 하나인 역대기상에 그것도 짧은 두 절에만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에게 야베스는 알려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 때문에 야베스의 이름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보만 가지고서 많은 내용을 확신 있게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에 관해서 확실한 사실은 그가 험난한 삶,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어느 시점까지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에 성경을 기록한 지금에까지 야베스는 자신의 형제들이나 일가 친척에서 존귀하고 고귀하게 여겨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 자체도 그의 어머니가 난산으로 낳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통 혹은 수고를 뜻하는 단어에서 철자 순서를 바꿔서 이름 붙인 야베스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죠. 야베스를 출산할 때 순조롭지 못한 듯합니다. 고통이 많았던 듯합니다. 난산으로 가까스로 아이를 출산하게 되어서 고통 중에 수고로이 출산했다고 해서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을 정도였다면, 난산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혹시 건강상의 문제나 타고난 신체적 결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한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아서 단정지을 수 없지만 출생부터가 순조롭지 못한 출생이었고 그의 이름에 고통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 인생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려는 듯,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9절에 한 번 나오고 10절에도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야베스라는 단어에도 고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수고로이’에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직역해보면 고통 가운데 출산했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출산해서 낳은 아들이어서 이름을 고통이라는 단어를 두 번째 세 번째 자음 순서를 바꿔서 야베스라고 한 것입니다.
10절에도 고통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여기서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의 ‘근심’이 고통을 뜻하는 같은 단어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환난(원래 단어의 뜻은 ‘악’)에서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인들의 악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는 직역해보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악에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악이라는 것은 고통을 가져오는 근원입니다.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것은 악이요 선은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고통이 없는 것이요 안좋은 것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고통은 악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세계에서는 결코 고통이 일어날 수 없는데 인간이 악을 선택하므로 고통이 찾아온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야베스의 삶은 출생부터 고통이었고 난산의 후유증으로 아마 고통스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던 듯합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고통이 자신의 인생에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인생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타고난 신체적 결함과 불편함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난산으로 인해서 타고난 건강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일생일대의 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기도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신체적 결함과 병약함 때문인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을 의지처로 삼아 살아가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이 특별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유가 어찌 되었던 간에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런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로 승부수를 띄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처절한 인생의 고통만큼이나 처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제발 복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픈지, 고통스런 삶을 살아오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번 뿐인 인생을 이처럼 남다른 고통으로 고통당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원으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그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니까 “진정, 참으로 주께서 나에게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던 만큼 ‘복’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복을 명사로도 사용하고 동사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을 복주시옵소서”,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더 이상 고통이 끝났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야베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짧은 본문을 가지고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야베스의 기도는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하고도 처절한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간 너무 고통스럽게 지내왔다는 겁니다. 고통 속에서 아마 하나님을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의지하고 살아온 인생일 수도 있고,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정 안되겠다 싶어서 일생일대의 기도를 신뢰하는 하나님께 드린 것일 수도 있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인생을 좀 고쳐달라고 처음으로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도 내 인생은 특별히 심하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인생을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절박한 외침을 하늘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일차적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 믿든 잘 믿지 않든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야베스가 그런 삶을 여태껏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런 고통스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다행히 야베스는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아니하고 평소 의뢰하던 하나님이든 아니면 그날따라 처음 불렀던 하나님이든 하나님께 간절히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이 고통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다른 사람보다 적게 주어져서 소위 이 고통을 당하고 지내는데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은 더 나아질 수도 없다는 인식에서 드리는 기도의 간절함이 우리의 기도에는 늘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선물로 받고서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우리는 호흡도 하나님께 받고 인생의 모든 기회와 재능도 하나님께 받고서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너무 적게 받아서 상대적으로 들 받아서 소위 고통속에 지내야하는 인생에 대해서 누구에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주신 하나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제발 나에게 복좀 달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제게도 복을 좀 나눠달라는 겁니다. 복으로 나에게 복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처한 고통스런 환경은 만성적인 고통인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다듬으시려고 어떤 특정 기간에 특정 사건으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과 달리 야베스의 고통은 운명과도 같은 고통처럼 보입니다. 타고난 고통일 수도 있고요 계속 지속되는 고통으로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던 듯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서서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 그대로 남은 인생도 고통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는 제발 복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복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세 가지 간구를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첫째,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여러 신체적 한계나 건강의 병약함과 경제적인 제한 때문에 삶의 영역이 넓지 못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삶의 바운더리,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인생 끝나면 너무 인생이 아까우니까, 매일 보는 사람 또 보고 걸어가는 곳 또 걸어다녀야 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보다 큰 세계로 진출하고 큰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뤄달라는 기도가 아닐까요?
둘째,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도움의 손길이요 나와 함께 할 때 목자되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고 인도하시는 손길입니다. 늘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도함 받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나로 악에서부터 지켜주셔서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그 고통이 육체적 고통일 수도 있고 정신적 고통일 수도 있고 경제적 고통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고통일 수도 있고 외로움의 고통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한 고통일 수도 있는 바, 온갖 고통으로 인해서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악에서부터 환난에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지금과 같은 고통스런 상황을 계속하다가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절망뿐이어서 더 이상 이렇게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이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발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서 복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 배수진을 치고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유재석이라는 연예인, 지금은 너무나 유명하고 잘나가는 그이지만 그분이 한동안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개그맨으로 나왔는데 좀 썰렁했던 기억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메뚜기 복장을 입고 나와서 개그를 하는데 별로 안웃겼던 기억뿐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때부턴가 개그맨으로서뿐 아니라 엠씨나 여러 방면으로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별명이 ‘유느님’이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분이 91년도에 데뷔했습니다. 그후 10년 가까운 무명생활이었습니다. 2000년도부터 이름이 좀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2000년에 TV 프로그램인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이라는 프로에서 셀프카메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데비 10년 차인 2000년까지 받은 상을 소개하며 셀프카메라는 시작하는데요, 받은 상이 별 볼일 없는 상 3가지 뿐이고 그중 하나는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들에게 준 상도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가까운 무명 생활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 가득한 시선에 의해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가끔씩 주변 사람들이 농담삼아 ‘연예인이 왜 TV에 안나오냐’는 말이 가슴에 큰 상처가 됐습니다. 개그맨 동기가 김용만 김국진 남희석 등인데 이들은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그들이 TV에 나올 때마다 티브이를 껐다고 합니다. 안보았습니다. 너무나 친한데 그들은 뜨는데, 바쁘게 TV에 나오는데 나는 뭔가, 이런 생각 때문에 티브이로 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카메라 앞에만 서면 울렁증도 있었고 악조건에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고, 그때에 참 많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분의 종교는 기독교는 아닌데 하여튼 잠자기 전에 꼭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도 잘 안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그랬을 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한 번만 단 한번만 개그맨으로서 기회를 주시면 제 소원이 나중에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이룬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때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큰 엄청난 아픔을 줘도 나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냐고 단 한마디라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했냐면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스타가 되고 몰락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뜨고 나서 변했다는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안되리라고 기도를 하고 스스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겸손하고 노력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의 셀프 카메라였습니다. 이 셀프카메라을 찍은 이후 유재석씨는 소위 엄청 떴습니다. 수많은 연예인 상을 석권했고 지금은 국민연예인이라고 유느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여다본, 너무 짧아서 배경과 구체적인 상황과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야베스의 기도’가 간절함과 배수진을 치고서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이 아니라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삶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일생일대의 기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을 바꾸는 기도라고 할까요, 숙명을 그저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기도의 시점 이후의 야베스의 삶은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9절)고 평가받는 삶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난 것일 수 있고, 그의 형제들, 주변의 사람들보다 복을 받아 누리는 두드러지게 남다른 삶이었던 듯합니다. 이전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 도드라졌던데 반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말미암아 존귀함이 두드러지는 복된 삶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야베스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본문 10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복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으로 자신을 복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너무나 컸고, 앞으로도 이 고통으로 인해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가능케해주실 유일한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달았고 그 하나님께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복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달라는 간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너무나 좋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자신이 복이요 임마누엘이 복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그 모든 소유에 임한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온갖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 복을 누리시므로 더 이상 삶이 온갖 쓰디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허락받은 성도로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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