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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왕하 13:14-19)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대개는 화목한 가정, 안정된 직장, 건강한 신체, 즐거운 경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 일의 보람 등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Very Good, A+인생이라고 할 만 합니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좋은 인생이란 대개 두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행복(쾌락)과 의미(가치)입니다. 행복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행복과는 달리 의미 혹은 가치는 사회 봉사, 환경 활동, 섬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 등, 참 의미있게 여겨지는 삶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내가 만족한다고 참된 만족이 있는 게 아니라 활동들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때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이 두 축에 끼어든 제3의 '좋은 삶'을 어떤 심리학 교수분들이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풍요', 곧 마음이 풍요로운 삶입니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예를 들어,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커리어(경력)을 쌓는 것, 도전적인 예술에 몰입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학습), 창작해보기 등은 심리적 풍요를 더해주는 경험이 됩니다. 고난이나 역경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이로써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깐은 부정적인 감정이 남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도움이 되는 경험이 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변화무쌍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죠.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통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세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를 경우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1등은 행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약 70%, 2등과 3등은 거의 비슷한데요, 2등은 심리적 풍요(16%),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삶(14%)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분명 심리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는 심리적 풍요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앙만큼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해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되고, 세상을 향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어서 헛된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탐닉을 그치고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심리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위 연구자들의 결론입니다: "심리적 풍요는 우리가 일상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와 함께,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준다." (한겨레신문 2021.9.8.)
개인적으로 심리적 풍요가 충만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를 볼 때에, 저 멀리 솟아있는 산을 볼 때에, 점점 푸르러지고 높아지는 초가을의 하늘을 볼 때에, 아니면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를 만날 때에,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에, 가족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을 지닐 때에, 어려운 일이라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성취의 기쁨을 누릴 때에, 가슴을 적시는 어떤 글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때에,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렇듯 새로운 계절에 들어설 때에, 이 모든 삶의 활동, 일상의 활동, 일상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심리적으로 풍요로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심리적 풍요가 곧 일상을 충만하게,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평가 잣대가 되는 것이죠.
심리적 풍요란 내 안의 감정의 풍요, 정서의 풍성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깊은 슬픔으로, 기쁨도 벅찬 환희로, 사랑도 뜨거운 사랑으로, 연민도 손발의 도움으로 구체화되는 활동으로,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에서 고강도로 펼쳐짐으로 인해서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연구한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구약학자는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성령의 불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로써 성령은 우리를 태우시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불꽃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더럽고 허무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의 불꽃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주십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 나눌 말씀입니다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말 그대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의 강렬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은 우리의 마음의 그만그만함입니다. 그저 그런 마음의 온도를 성령님은 싫어하십니다. 성령의 불로 타오르든지 아니면 말든지!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서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할 때 바로 그점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참으로 무서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고강도의 감정이 내 마음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예배하는 마음이 뜨겁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이 뜨겁고, 기도할 때 마음이 뜨겁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뜨거운 것입니다. 정열,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이 짙게 배어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나이가 많이 들고 병에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요아스가 문병왔습니다. 요아스왕은 엘리사를 보자마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의 위협으로 인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와 지혜와 영감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숱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사였기에 왕조차도 “내 아버지여”라고 그를 불렀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웬만한 국방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아스왕의 아버지였던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의 공격을 받고 북이스라엘이 항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의 국방력을 축소시켜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명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는데, 선대왕의 초라한 국방력을 아들 요아스왕이 그대로 계승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아스왕에게 선지자 엘리사라는 존재는 진정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요아스왕의 눈물은 진심어린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떠나게 된다면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챈 엘리사는 어찌보면 자신의 떠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알려주기 원했던 듯합니다. 엘리사가 떠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떠남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데, 과연 요아스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엘리사는 그점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요아스왕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인가’.
엘리사는 일종의 선지자적 예언 행동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고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엘리사는 요아스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활을 쥔 요아스왕의 손에다가 엘리사가 손을 얹고서 둘이 함께 동쪽으로 난 창을 열고 그곳으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예언적 행동을 하고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실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왕과 함께 동쪽을 향해 쏜 화살은 아람으로부터의 구원의 화살이요, 그 예언적 행동이 가리키는 내용은 요아스왕이 아람을 치되 멸절하기까지 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방금 읽은 17절과 이어지는 18-19절에서 ‘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나카’가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시면,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는 문장은 왕이 아람을 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멸절하도록’이라는 말은 ‘끝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강조되는 말은 ‘끝장을 볼 때까지’입니다. 아람을 진멸할 때까지 이스라엘이 치게 될 거라는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다. 현실에 비추면 일어나기가 불가능해보이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은 극소수로 제한돼 있고, 이제 엘리사마저 떠날 참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아람을 치되 진멸할 때까지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예언적 행동과 그 해석을 통해서 예언하기를 비록 엘리사 자신이 떠나도 요아스왕을 통해서 아람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아스왕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요아스왕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철저한 승리를 믿고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엘리사는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의 근엄함과 무게감을 갖추고서 이 행동과 예언을 주면서 이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요아스왕이 깊이 숙고해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아마 시험일 겁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엘리사는 요아스로 하여금 또다른 화살들을 집게끔 하고서 그 화살로 땅을 내리치라고 명령합니다. ‘땅을 치소소’에 또 히브리어 ‘나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아까 함께 행했던 예언적 행동과 그 의미를 이미 설명했던 엘리사는 요아스왕이 그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고 순종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 아까 사용했던 동사를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 후 이번에는 ‘땅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요아스왕이 치게 될 ‘땅’은 아람 군대를 가리키고, 요아스왕이 예언의 말씀을 믿는다면 화살로 땅을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칠 것을 엘리사는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방금 전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단순히 말로만 동쪽에다가 활을 쏘라고 명령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요아스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함께 활을 쏘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떠나도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이 왕의 손을 통해서 아람을 치게 될 것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려는 선지자의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왕에게 부모처럼 가르쳐주려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화살로 땅을 치라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얹고 땅을 내리치는 게 아니라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으로 의도된 명령이며 시험임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내린 명령으로 보입니다. 요아스왕이 죽음 앞에 서있는 엘리사의 행동과 말의 무게를 헤아려본다면 그리고 엘리사의 행동에 담긴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그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요아스왕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 끄덕이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온전한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까? 땅 곧 아람 군대를 치되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화살이 부러질 때까지 아니면 여러차례 내리쳐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대와는 달리 요아스왕은 아마 힘없이 세 번 내리치고 맙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겠다는 표시로써 그 말씀처럼 화살을 땅에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쳐야 했는데 겨우 세 번은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친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화가 났습니다. 왕의 믿음의 부족, 왕의 행동을 그저 믿음의 부족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이란 삶을 통합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문제이면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아스왕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믿음으로써 삶이 통합되는 것이므로 결국 삶에 임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에 결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요아스왕이 충분히 많이 내리쳤더라면 방금 전에 전달한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아람을 치게 될 터였는데 왕이 세 번만 내리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제한하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요 특별히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감정적 풍요에 연결돼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켜줍니다. 그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그의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그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왕의 믿음의 부족이요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잔잔한 일들이요 거듭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이렇듯 잔잔한 일상에 고강도의 감정을 불어넣읍시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포기치 않으심,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운동력있는 활동하는 지식이요 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이란 결국 믿음의 삶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요 믿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왕과 엘리사는 참으로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사의 삶과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조차, 그를 꺾지 못하는 삶의 불꽃,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 왕에 대한 연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정! 반면에 요아스왕의 형식적 슬픔과, 자신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근시안적 시선, 영혼이 들어가지 못한 행동들, 안일함과 무감각!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인생을 그리고 일상을 그렇게 살아갑시다. 어떻게 살아가자는 겁니까? 열정적으로 뜨겁게! 적극적이되 간절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자연을 대할 때도, 인생을 대할 때도, 우정을 대할 때도, 이웃을 대할 때도, 일을 대할 때도, 기술을 연마할 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볼 때, 교제할 때, 전도할 때, 섬길 때,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것들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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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눈이 밝아진다는 것 (창 21:9-19)
우리는 가끔 이런 경험을 합니다. ‘그때는 안보였는데, 왜 이제는 보일까? 왜 그때 못보았을까? 그런데 왜 이제 그게 보일까?’ 같은 책을 보아도 그때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고요. 새롭게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을 눈을 밝혀주셨을 때 하갈이 곁에 있는 샘물을 보게 되었고 그 샘물을 먹고 아이도 살고 자신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샘물 곁에 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살 길을 이미 찾았는데,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하갈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셨을 때 하갈이 그 샘물을 보게 되어 결국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이죠.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라의 마음이 다급해져서 차라리 그럴 바에야 내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출산해야겠지, 라는 생각에 남편 아브라함을 종용해서 하갈을 취하게 합니다. 본처의 여종을 통해 낳은 자녀를 자신의 자녀로 간주할 수 있는 게 당시 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하갈이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돌변하죠.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제는 사라의 여종이 아닌 거예요. 사라는 말이 아브라함의 본부인이지 가문을 이을 후손을 낳지 못한 수치스런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괜시리 어깨에 힘을 주고 사라의 말도 안듣고 달라진 위상을 뽐내면서 사라를 멸시하자 사라가 격분하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아브라함 탓을 합니다. 당신 때문에 자신이 모욕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받아야 할 모욕을 왜 자신이 받게 되었냐며 아브라함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당신 종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응수합니다. 이에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죠. 더 이상 학대를 참지 못한 하갈은 도망쳐나옵니다.
하갈의 마음이 높아졌던 거겠죠. 사라도 화도 나고 질투심도 나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재가를 받고 하갈을 학대했던 건데, 이전에 이런 대우를 받았어도 하갈은 응당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것인데 이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식을 잉태했는데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해, 이런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던 거겠죠. 그래서 뛰쳐나왔는데 막상 나와보니 이스라엘 남쪽 광야에서 살길이 막막하죠. 뛰쳐나올 때 계산도 하지 않았겠어요? 아브라함이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도 자신을 다시 찾아내지 않겠냐는, 뭐 이런 계산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집을 뛰쳐나와 광야에서 어슬렁거리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묻습니다. 창세기 16장 8절입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집을 뛰쳐나왔지만 정처가 없고 갈곳이 없었던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겁니다. 묻기 이전에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는 부르는 것입니다. 하갈이 사래의 종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죠. 그리고서 여호와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고 명령합니다.
사라의 여종으로 당연히 복종해야 할 터인데 원래 있던 자리에서 괜시리, 본인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부풀어올라서 교만해진 것이겠죠.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로써 하갈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16장 10-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 말씀이 하갈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후손이 번창하리라는 약속도 주셨고 아들 이름도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주시고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 곧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죠. ‘쉐마’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이죠. 하나님이 뭘 들으셨냐면 하갈의 고통의 소리, 적어도 하갈은 억울한 거예요. 모든 일이 사라에서 비롯되고 사라로 말미암았고 사라 때문에 자신이 쫓겨났다는 생각에 얼마나 억울하게 생각되었겠습니까? 본인의 잘못은 생각지도 못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이죠. 자신의 억울함만 크게 생각하기 쉬운데 하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어요.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도망쳐나올 수밖에 없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하나님이 아신 거죠. 이것이 하갈의 하나님 체험이 됩니다. 하갈에게 임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하나님을 일컬어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 자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명명합니다. 창세기 16장 13절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돌보아주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주인의 하나님인가보다, 정도 했을뿐인데 이제 막상 하나님을 체험하고서 자신과 같이 미천한 종조차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서 대략 17년이 경과하고서,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10대 후반, 그리고 이삭이 대략 3세 때 오늘 본문 창세기 21장에서 하갈의 이야기가 또 한 차례 더 나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무렵 이삭과 이스마엘이 놀고 있는 장면을 사라가 우연히 보았는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놀렸는지는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어미가 보기에 썩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사라가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에게는 어찌보면 아브라함의 유산을 전적으로 물려받아야 할 자녀가 이삭인데 아브라함의 마음씨를 보니 이스마엘에게도 상당한 유산을 물려줄 것 같았고, 이래저래 여전히 꼴보기 싫은 하갈도 있었고, 아들 이삭의 잠재적 경쟁자 이스마엘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하여튼 이 사건을 빌미로 사라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하갈과 이스라멜을 이제는 내쫓으라고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한푼의 유산도 나누어줄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이삭에게 전 재산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사라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스마엘도 엄연히 자신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근심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비로소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결정을 하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사라의 말이 외관적으로는 옳았던 거죠. 하나님의 계획과 부합하는 말이었으니까요. 사라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다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욱 중요해서 자신의 감정을 따라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요청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계획과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현실주의자의 면모로 그려집니다. 이상적으로 서로 화해하고 관용하고 이해하고 공존해라, 그러시지 않고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처음에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으려는 사라의 얕은 신앙이나 지금 격분하고서 오직 자신의 아들만을 생각해서 내쫓으라고 하는 사라의 마음을 선하게 보시지는 않으심에도 둘이 같이 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라보다 더 사려깊죠. 아브라함의 근심을 아셨어요. 그래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고 말씀해주시므로 아브라함의 마음의 근심을 덜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는 것이 한결 편안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다시 광야로 내쫓김 당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이제 죽게 되었다면서 본인도 죽게 되고 자식도 죽게 되었는데 차마 자식 죽는 꼴은 못보겠다면서 자녀와 거리를 두고 앉아서 탄식하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물이 떨어진 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죽게 되었다는 절망감이 밀려온 것입니다. 절망감에 털썩 주저앉아 그저 큰 소리로 울기만 했던 하갈에게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십니다.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19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갈은 이미 샘물 곁에 와 있었는데 샘물을 보지 못한 걸까요? 관심사가 시각을 결정합니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절망해버린 거예요. 하늘이 무너졌다 생각한 거예요. 솟아날 구멍이 없다고 지레 겁먹은 거예요. 물이 떨어지자 자신과 아들은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이미 생각해버린 거예요. 그것이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이제는 보는 것이 그 마음의 생각을 입증해주는 것들만 보이는 거예요. 편향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울어지자 그 마음을 지지해주는 시각의 뒷받침입니다.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죽게 될 일만 보이는 겁니다.
절망이 얼마나 무섭고, 부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소망의 가능성이 눈에서 차단되는 겁니다. 아예 보지 못함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해답은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해답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갈은 이미 샘물 곁으로 와 있습니다. 해결책을 얻을 가능성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시각이었다면 진작에 발견했을 것을 부정적인 시각이 막아선 것입니다. 절망으로 인해,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그러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절망이 시각을 왜곡시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시각을 어둡게합니다. 우리는 안된다, 안된다, 뭘 해도 안된다,는 마음의 생각이 진짜 그렇게 이끌어가게 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얼마든지 해결책을 찾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길을 찾게 돼 있습니다. 해답이 분명이 있고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해법이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절망하지만 않는다면, 신앙만 잃지 않는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문제라도 해법이 반드시 우리 가까이에 존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긍정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를 초월해계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룩하시면서 친밀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므로 문제는 해결될 수 있고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려면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시면 우리가 못보던 것을 보게 되는데, 무엇을 결정적으로 보게 됩니까? 모든 문제의 키를 들고 계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우리의 눈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눈이 밝아지면 이미 곁에 와있었음에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가능성이 열리고 해법이 발견됩니다. 삶의 문제의 해결책이 찾아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치 않고 삶을 긍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써 찾아내지 못할 해결책은 없습니다. 절망하기보다 이때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고서 그 하나님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눈을 밝혀달라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 해결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 하나님이 가까이계심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관건은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에 불과한 하갈에게, 하갈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 아브라함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보인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던 하나님이 하갈에게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던 이전의 체험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서 이미 받은 하나님의 말씀도 약속도 내팽겨치고 어둠에 처하게 되고 절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의 눈을 밝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더욱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눈을 밝혀주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하나님에게만 문제 해결의 키가 주어져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눈도 밝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밝혀주셔서 우리가 보아야 할 영역이 무엇일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방의 적군이 자신이 거주한 성읍을 둘러섰을 때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불구하고 자신의 종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엘리사는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신 하나님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미 본 것이었습니다. 어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성경이 봉함되어 있지 않고 열려져야 합니다. 성경이 읽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눈에 밝히 드러나야 합니다.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 극동방송을 들었는데 극동방송의 간증이라고 할 최근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부가 아브가니스탄에서 우리를 도왔던 분들 378명을 무사히 우리나라에 수송한 작전이 있었죠. ‘미라클 작전’이라고 명명된 작전이었습니다. 8월 초부터 준비한 작전이었습니다. 작전이 성공한 후 언론 보도를 접하고서 외교부나 국정원에서 주도면밀하게 어려운 작전을 성공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명의 협력자도 탈출시키지 못한 일본 정부와 비교가 되어서 더욱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부심이 커졌고, 외신도 한국 정부에 대해서 극찬을 했습니다. 탈레반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했고 피란민이 몰리면서 공항 진입 자체가 힘든 상황이어서 독일도 수천명을 공수할 계획으로 항공기를 보냈으나 7명밖에 태우지 못했고, 벨기에도 군용기를 보냈지만 1명도 태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참 운좋게 잘 되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을 은밀하게 추진 중이던 어느 날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목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상황이 너무 안좋으니까 무사히 들어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이 고위관계자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화를 받고서 김장환목사님이 본사에서 근무하는 전 직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하던 일을 멈추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보도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작전 과정에서 상당히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탈레반의 검문에 붙들려서 몇시간동안이나 붙잡혀 있었던 것이죠. 결국 공항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파키스탄을 거쳐서 무사히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작전의 배후에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김장환목사님을 비롯하여 극동방송 전 직원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도착한 후에 이를 위해서 기도해서 그런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향한 이들의 애정이 깊었겠죠. 이들을 위한 생필품 후원을 여러 기업들에게 전화하고해서 단 나흘 만에 1억 5천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후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하갈의 경우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밝혀주셔서 문제의 해결의 샘물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결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에게는 그곳을 벗어날 지혜가 있고 길이 있고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눈이 열리고 눈이 밝아져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서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 해결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살 길을 찾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가까이계심과 함께해주심과 도와주심을 믿고 신뢰하면서 두려움 없이 그리고 걱정 근심 없이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8월2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려면 (시편 16편)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기쁩니까? 오늘 이렇게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함이 기쁨이 됩니까? 예배당에서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기쁩니까? 세상의 친구들도 있지만 같은 교회,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는 지체들로 인해서 기쁩니까? 많은 것을 주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음에 기쁩니까?
신앙생활뿐 아니라 여러분은 일상을 살아가는 삶이 기쁩니까? 기쁨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시편 16편에서 다윗은 “나의 마음이 기쁘”(9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마음은 기쁩니까? 물론 기쁠 때도 있고 기쁘지 않을 때도 있는 게 우리 인생이고 우리의 마음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좀 특별한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의 가장 주된 특별함은 그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기쁨이요 먼저는 하나님 자신이 누리는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그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에게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누리시는 기쁨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을 바라볼 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자녀들이 살기를 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하나님이 누리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시편 4편 7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무엇을 성취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수확이 많아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어떤 것을 손에 쥐게 되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남보다 우위에 서게 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닙니다. 이러한 기쁨들도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기쁨입니다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요 충만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이러한 기쁨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아까 읽은 본문 11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충만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누리고 계신 기쁨, 너무나 좋은 기쁨, 그래서 그 기쁨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누리고 계신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십니다.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노래 중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기쁨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기쁨이 언제나 하나님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부터 11절까지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있었던 이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므로 누리셨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예수님에게도 기쁨이 있었고,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있던 기쁨으로 충만해지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사랑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사랑의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나눠주셔서 제자들도 사랑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기쁨으로 충만하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오늘 본문 시편 16편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여기서 다윗은 다른 성도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즐거움이 있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의 기쁨도 충만해지는 겁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아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 안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든 사랑이 기쁨을 낳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사물에 대한 사랑이든 일에 대한 사랑이든 자연에 대한 사랑이든 그러한 사랑이 기쁨을 낳습니다. 사랑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사랑 받는 대상은 기쁨을 되돌려줍니다.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이요 일을 사랑하면 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폭넓게 말해서 온갖 종류의 사랑이 온갖 종류의 기쁨을 낳습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을 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사랑합니까? 사랑이라는 말이 좀 거창하게 들린다면 좋아한다는 말로 바꿔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알지 않고 그 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이 기쁜 것이요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는 목회의 일이 기쁜 것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섬김이 기쁨이 됩니다.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힘들어도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에게 요리의 열풍을 가져다준 백종원씨는 잘 아시다시피 사업가입니다. 본인은 외식경영전문가나 요리연구가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상당한 미식가여서 가족 외식을 하면 맛있는 집을 찾아 식당을 7,8번 옮겨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요리 연구를 즐겼습니다. 햄버거를 사다 먹더라도 그냥 먹지 않고 햄버거에 버터를 바르거나 여러 채소를 넣어 최대한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군대에서 간부 식당 관리 장교로 일했습니다. 간부 식당 관리 장교라는 보직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보직인데 보통은 부사관이 간부 전용 식사 공간을 맡아서 운용했는데 본인이 자원한 것입니다. 새로 온 장군이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분이어서 식사 때마다 너무 맛이 없다고 불만을 하더라는 겁니다. 장교였던 그가 “제가 음식 좋아하니까 한번 해볼까요?”라고 말했다가 보직이 바뀌게 되고 간부 전용 식당을 전담하게 된 것입니다. 장군님의 식사를 좀더 맛있게 제공하기 위해서 장군님께 개인 뚝배기를 제안했습니다. 원래는 사발에 퍼주던 순두부찌개,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서 내놓자 인기 폭발! 최고 인기 메뉴가 되었습니다. 식당 운영과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제대를 앞둔 1년 동안은 외박이나 휴가도 안 나가고 그 일에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전역을 앞둔 전역 신고 전날까지 부대 행사 때 뷔페를 차리는 일에 집중했다고 하니, 백종원씨가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고 식당 운영을 좋아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보통 군대에서 말년이 가까울수록 하루라도 더 밖에 나가서 생활하기를 원할텐데, 아예 휴가나 외박도 나가지 않았다니 참으로 요리 사랑이 지극함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에 이걸 배워서 식당을 운영하고 요식업이라는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그 과정이 너무 재밌고 좋아서 열의에 불탄 것입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칭찬도 해주니 더 좋아진 것이겠죠.
이분이 <골목식당>이라는 프로에 나와서 식당을 개업하려거나 운영하려는 분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사람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힘들어도 끝까지 파고들고 견딜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만 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식당 일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견디가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이 몸소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 부모님의 기대도 있고 해서 막연하게나마 ‘큰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려면 건설이나 무역 관련해서 큰 기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사업이 인테리어 회사였습니다. 건축회사 사장님을 꿈꾸고 얼떨결에 시작한 회사였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은 기회가 왔습니다. 목조 주택 건축 자재를 수입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당시 우리나라에 목조 주택 붐이 일면서 자재 수입뿐 아니라 목조 건축 회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사업이 점차 거쳤고 큰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IMF 사태가 터지면서 자재 환율이 두 배로 뛰어서 결국 막대한 빚을 지게 됩니다. 이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 많은 빚을 결국 식당 운영으로 갚게 되고, 그 이후에는 다른 사업에는 눈돌리지 않고 식당 운영에만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깨닫게 된 사실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끝까지 갈 수 있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을 여러분은 좋아하십니까?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없으면 열정이 생기지 않고 일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사랑이 없으면 기쁘지가 않고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되거나 무료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가 기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배 시간이 너무나 지루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이 너무 흡족하셨고 기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 받는 대상,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가장 기쁘셨습니다. 그 기쁨과 만족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장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에 창조된 인간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창조의 기쁨도 결국은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사랑은 창조하고 계속 재창조합니다.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받는 대상을 창조한 것이요, 죄로 인해서 이탈한 그 대상을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고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창조요 구원인 것입니다. 이 좋아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이 사랑하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기쁨이 가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처럼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충만한 기쁨, 영원한 기쁨을 우리도 받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겠죠.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 안에 거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 위한 비결을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의 마음이 기쁘”게 됩니까? 다윗은 그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면 하나님이 나의 오른쪽에 계시게 되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채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앞에 혹은 내 오른쪽에 계시도록 항상 모셔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기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뿐입니다.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로 단순하게 하시고, 여기 이땅에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저는 훌륭한 신학자들의 설교를 읽는 것을 즐겨 하는 편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판넨베르크라는 신학자가 한 권의 설교집을 냈는데, 그 설교집의 제목은 <믿음의 기쁨>입니다. 그 설교집 서문에서 그는 말합니다: “이번의 설교집은 믿음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이 기쁨은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틀림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에 동참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에 우리로 참여케해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기쁨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늘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 또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쁨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흘러넘쳐서 신앙생활도 기쁨으로, 일상의 삶도 기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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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잠잠히 (시 62:1-12절)
3세기 중반 이집트 부근 사막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영성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사막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의 수도 전통에서 보편적으로 권하는 덕목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체험을 했어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에게서 이어져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혼자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사탄의 존재를 느꼈던 그는 어떻게 하면 사탄을 추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악령에게 그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너희를 떠나가게 하느냐? 금식이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사탄도 금식하는데 무슨 금식에 심오한 능력이 있어서 사탄이 떠나겠냐는 것이겠죠. 수도사가 다시 악령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철야기도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잠자지 않는다.” 사탄도 잠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철야를 한다 해도 사탄이 떠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산다.” 세속을 떠나서 수도한답시고 사람들이 없는 사막에까지 나왔지만 이 악령은 오히려 사막에 산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가지고 사탄이 떠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겠죠. 먹지 않고 잠도 안자고 세상과 절연을 하는 등의 수행을 한다 해도 우리 마음의 사탄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악령을 추방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침묵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요동을 친다 해도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사탄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입은 악에 물들기 쉽고, 우리가 내뱉는 말이 거짓에 사로잡히기 쉽고, 말로 인해서 우리가 뜻하지 않게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사막의 수도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감화될 수 있는 한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막의 지혜>, 로완 윌리엄스 저, 77-80쪽에서 발췌)
최근에 대통령후보로 나온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이전에 공직자로 있었을 때엔 달변과 다변이 기자들에게 매력으로 다가갔다고 합니다. 엄정한 공직을 수행하는 근엄하고 좀 다가가기 어려운 일을 하는 분이 소탈하게 말도 많고 재밌게 말도 잘해서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치에 입문하고서 정치인들을 만났을 때도 달변과 다변이 친화력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정제된 언어와 의도성 있는 메시지를 생명으로 하는 대선 주자에게 말이 많음은 오히려 탈이 되었습니다. 반대편에서 ‘1일 1망언’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가령, 언론 인터뷰에서 보여준 실언은 단순한 말실수라기보다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의혹의 눈으로 주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침묵이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늘상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고, 기도도 부르짖어야 할 상황에서는 부르짖는 간구, 통성으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임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설명해주어야 할 때도 있고, 열정적으로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이 보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말을 하고 오해를 풀고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억울하게 가하는 악행에 대해서 폭로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할 때임을 다윗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뜨리고 직위로부터 떨어뜨리려고 공격해오는 원수들은 입으로는 축복하는 것같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 사악한 자들인데, 이러한 위선적이고 배신적인 행태를 다윗이 간파하고도 오히려 침묵을 해야 할 상황임을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윗은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요? 다윗이 침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이!”,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사실을 다윗이 알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이요, 다윗의 삶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출렁입니다. 집채만한 파도라는 현상을 보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하므로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이는 파도에 겁먹고 두려월할 줄 알면서도 파도를 일으킬 능력이 있으신 바람과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른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은 파도를 일으켜 우리를 올라가게도 하시고 내려가게도 하시는 분이신데, 많은 사람들은 파도 자체의 움직임에 따라 일희일비하죠.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다윗은!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에게서 들려오는 말씀을 잠잠히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께 잠잠히 아뢰겠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본문 5절에서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침묵하며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건짐과 구원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고, 소망과 기대도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되니까, 차라리 입을 다물고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압도당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시편 62편의 다윗의 영성과 비슷한 영성, 곧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성을 보여준 구약의 인물이 또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요란하지 않고 잠잠한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고 잠잠히 인내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로 표현되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하루하루의 성실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사람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거나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신 꿈과 비전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억울한 옥살이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기대를 사람을 통해서 잠깐 가져보기도 했었죠.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실제로 해몽한 대로 감옥에서 나가고 직위를 회복한 관원으로 인해서 ‘이제 드디어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구나’는 기대를 잠깐 갖게 되었죠.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사람이 달라지듯 요셉의 은혜를 입은 관원은 막상 감옥문을 나가서는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잠깐의 기대였지만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요셉에게는 이것도 잠시 잠깐일 뿐 요셉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므로 예상보다 길어진 감옥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요셉은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 9-10절을 보시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은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오직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에게만 있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시간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어려움으로부터 구원과 미래의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윗이나 요셉의 영성과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이!”로 집약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같이 여기고 삶의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믿음이었습니다. 마음 중심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추구하였고, 참된 만족과 평안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교부 신학을 종합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찾아가도록 창조하셨고,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참된 만족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인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요새와 같은 피난처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상태는 영혼의 침묵이며 영혼의 고요와 안식입니다. 바깥이 아무리 광풍이 불고 파도가 솟구친다 해도 내 영혼이 잠잠한 것입니다. 영혼이 고요하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힘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내 안은 잠잠하고 고요하게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반석이 되시며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요새가 되시며 내 영혼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혼의 상태는 시편 131편 2절에서 말하는 상태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강풍과 풍랑이 없어서 고요와 안식이 아니라 강풍과 풍랑속에서의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소망이 옴을 확신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므로 풍랑 속에서도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인생이 날마다 순풍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햇빛만 내리쬐면,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전혀 없으면 인생은 사막화될 뿐입니다. 인생에게는 햇빛도 필요하지만 비도 필요한 법입니다.
청년의 때엔 마음이 격동할 때가 많고 쉬이 흔들립니다. 청년의 방랑과 불안이 결혼만 하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혼할 때에도, 또 아기를 키울 때에도, 중년은 중년대로 중년의 위기를 겪고, 노년이 된다는 것은 나이듦의 과정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언제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또 다른 태풍이 밀려오고 그렇게 인생의 풍랑에 고요와 평안을 빼앗기는 게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거듭 밀려오는 파도에 따라 널뛰기를 하는 인생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그리고 요새와 같은 분으로, 피난처로 다가오십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쉽게 흔들리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재물 등 궁극적인 도움이 될 수 없는 헛된 것으로 힘을 삼고 의지하려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시며 피난처이심을 믿고 궁극적 신뢰를 하나님께만 두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해도 우리의 구원의 반석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므로 위기를 극복해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위기는 강풍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리고 강풍이 몰고 오는 파도 자체에 있다기보다 강풍 앞에서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흔들린 채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큰 파도가 와서 여러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위기의 때, 그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의 도움과 구원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잊지 않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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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아래로 (시 57:1-11절)
누구나 살면서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좌절을 맛보고 낙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침체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이 그런 시기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 극심한 무더위로 마음도 몸도 지치기 쉽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여러 가지로 제한과 불편이 많은데다가 무더위까지 겹쳐서 삶이 피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덩달아 침체기에 접어들어 신앙이 힘이 되지 못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중요한 것은 복원력이겠죠.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무너져내리지 않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이 중요한데 신앙생활에서 회복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회복력으로써 다시금 일어서고 활기차게 신앙생활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오늘 시편 57편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카우아이 아이들’이란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1955년에 태어난 698명의 아이들을 40년간 추적 관찰했습니다. 모두가 안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온갖 역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가난, 실업, 알코올 중독 같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698명 중 약 1/3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이렇듯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유능한 성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데이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인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한 가정이라도 할머니가 손자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다면 그 아이는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어서 가정이 풍비박산난 가정이라도 어머니가 자녀에게 변함없는 돌봄과 안정적 관계를 지속하였다면 그 아이는 잘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어린 자녀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기만 하면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실시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일련의 ‘회복력 인자들’을 발견하고 빈도수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회복력 인자들’의 가장 주된 요소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 관계’였고, 그것 외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신앙과 영성 등도 ‘회복력 인자들’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불안한 삶에 답하다>, 빅터 프랭클 저)
삶은 언제나 명암으로 교차됩니다.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쁠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슬픈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를 지날 때에라도 양지로 나아올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좌절의 쓴잔을 겪은 후에라도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충격의 일격으로 쓰러졌을지라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는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회복력 인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관계입니다. 사랑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러한 관계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우리를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시편에는 좌절과 낙심을 딛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서는 신앙인들의 선포로 가득합니다. 시편에서 낙심과 좌절, 실패와 넘어짐, 억울과 분통,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웅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웅덩이’, ‘구덩이’, ‘함정’, ‘스올’, ‘무덤’, ‘수렁’ 등으로 표현된 상황은 비슷합니다. ‘웅덩이’에 빠짐으로, 혹은 ‘구덩이’에 던져넣어짐으로 인해서 ‘무덤’에 내려간 것과 같이, 죽은 것과 방불한 존재가 됩니다. 무력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단절되어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것과 같은 장소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굉장히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것입니다. 어둠에 처하게 되고 낙담이 되고 살아도 산 것같지 않고 죽음에 처한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시편 40편 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웅덩이와 수렁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힙니다. 힘이 쫙 빠져서 그대로 털석 주저앉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도대체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망연자실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혹은 ‘나는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혼자뿐이라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거나, 누군가 나를 속이고 억울하게 만들거나, 왕따를 당한 소외감이거나, 차별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잉여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취급받거나, 이런 종류의 절망이 ‘웅덩이’로 묘사된 상황입니다.
불가피하게 우리 인생,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종종 우리를 찾아오는데요,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웅덩이’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웅덩이’에서 끄집어내고 건져내셔서 웅덩이에 빠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웅덩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잘못된 장소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닙니다. 빨리 빠져나와야 할 장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떤 장소에 거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시편 57편 6절에 ‘웅덩이’가 나옵니다. 다행히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오히려 웅덩이를 판 다윗의 원수들이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고, 그러면 어디에 거하기를 그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다행히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던 다윗은 자신이 마땅이 있어야 할 곳, 하나님의 자녀들이 머물러야 할 곳인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보호를 받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날개’라는 이미지는 아마 암탉이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끌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는 안전함과 보호하심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평안함과 기쁨과 안식 또한 가리킵니다. 시편 17편 7-8절에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라고 노래하며, 시편 61편 4절에서는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이처럼 ‘주의 날개 아래’는 피난처요 안전한 곳이요 보호를 입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주의 장막과 같은 곳으로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얻는 장소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는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웅덩이’와 여러 차례 나오는 ‘주의 날개’가 함께 나오는 유일한 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지만, ‘웅덩이’에 빠져버린 상황에 처한 이들도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옮겨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절망감과 무능감의 환경에서 완전한 안전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여전히 ‘웅덩이’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가능케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다는 결단은 이미 자신을 가두고 있는 웅덩이의 능력이 파괴되었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웅덩이에 빠져있는 상황일지라도 거기서 기도하면 도우셔서 주의 날개 아래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저 참고)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1절에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의 이곳 저곳으로 피신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웅덩이’와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을 굳게 정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또 9절에서도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상황이 찬양할 상황이 아니고 상황이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찬양하기로, 감사하기로, 마음을 굳게 확정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결심하고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굳은 각오와 결심이 아니면 이런 상황,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사와 찬양을 결심하고 실행함으로써 ‘웅덩이’에서 빠져나와 이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미리 감사함으로 ‘웅덩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거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각각 따로 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미리 감사하고 찬양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기도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기도를 주제로 한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기도란 사람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럼 누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자신이 가난하고 온갖 좋은 것이 없는 지 알게 된 사람만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게 기도다라고 기도를 정의하고 기도에 관한 긴 논의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필요를 알게 된 사람은 자기 밖으로 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요, 기도를 하게 되면 소위 ‘교환’이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교환’이라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비참함 대신에 모든 행복을, 우리의 궁핍함 대신에 모든 부요함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보화들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으로 배우게 되고 그분의 빛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칼빈의 말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아버지는 기꺼이 그분의 모든 풍요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셨기에 모든 것을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그분에게서 퍼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께서 그 ‘넘쳐흐르는 샘’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요, 우리에게 온갖 보화와 하늘의 보물을 주시는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시오, 그리고 우리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 부요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합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기도의 결과로서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모든 좋은 선물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고마워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는 죄로 보았습니다. 기도를 진정으로 기도가 되게 하려면 기도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칼뱅이 보기에 기도와 감사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므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칼뱅은 시편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시편을 일컬어 ‘영혼의 해부도’라고 불렀고 자신이 시편에서 큰 위안과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시편에서 그는 기도를 배웠고 시편의 기도의 핵심에 감사와 찬양이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서 다윗이 웅덩이와 같은 처절한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릴 때 감사와 찬양을 마음으로 결단하고 확정한 후에 실제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웅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더 깊이 웅덩이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윗은 전능하신 주님의 그늘 아래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과 안심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웅덩이’가 곧바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신순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나이 9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전맹입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이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25년 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JP 모건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서울맹인학교에 다니던 15살 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님의 추천을 받고 그분이 자신의 미국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 집에 거하면서 미국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미국인 가정의 부부가 이후 그의 양부모가 되어서 그를 보살펴주었고, 거기서 그는 처음에는 미국맹인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반 고등학교로 진로를 바꿔 공부했고, 이후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와 MIT에서 공부한 후 증권사에 취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최근에 에세이집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작년과 올해 언론에서 많이 등장한 단어가 ‘깜깜이’ 확진자라는 말인데,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해서 그 단어를 쓰지 않겠다는 뉴스가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 단어를 뉴스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 단어를 시각장애인과 연관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는 44년간 빛도 보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의 세계가 깜깜하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빛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분에게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왜 시련이 없었겠습니까.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첨단 경제의 현장에서 일하는데 왜 좌절이 없었겠습니까. 웅덩이와 같은 시련과 좌절과 낙심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빛이 되어주셔서 그를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로 그를 덮어주셨기 때문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깜깜이로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에 부른 찬송가 가사와도 같습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찬송가 84장 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웅덩이에 빠져버렸습니까?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얼른 빠져나와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건져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품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겠다고 마음에 굳게 확정짓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령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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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1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굳게 믿지 아니하면 (사 7장 1-9절)
믿음을 지키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찌보면 교회의 민낯을 보았다고 할까요, 거기에는 오해도 있고 언론에서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도 분명 있지만, 신앙생활이란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우리로 고민하게 합니다. 코로나가 다시 수도권에서 4차 유행에 접어들었고,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합니다. 수도권의 교회들은 현장에서 예배가 극히 제한되었고, 작년에 우리 교회도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울러 국민 중 종교가 없는 인구가 60%에 이르렀고, 많은 국민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찬사를 받기보다 별종 취급을 받고 있고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인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수도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전체 인구 중 15%선도 곧 붕괴되리라 예측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도 각 개인의 삶에서 여러 가지 위기와 어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언제나 그랬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쉽게 느껴질 만한 상황도 제법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안팎의 여러 위협과 위기 가운데서 성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전부 들어간 전 인격적인 결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을 절대자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격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기쁜 소식과 성경 교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요, 매일의 삶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뢰요 동의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 동의, 의지가 제가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7장 본문은 유다왕 아하스왕 초기에 있었던 선지자 이사야와 아하스왕 사이의 대화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이 왕이 되자마자 아람(시리아 혹은 수리아)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유다 아하스왕의 통치 초기에 북이스라엘 베가왕과 아람 르신왕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쳤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남하하는 앗수를 제국의 위협에 맞서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는데, 유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스왕을 폐위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공격해온 것입니댜. 이러한 위태한 상황에서 아하스왕은 두려움으로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렸고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마음 상태가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왕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왕이 자신들과 연합하여 반앗수르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아하스왕이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자 그를 제거하고 대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유다가 크게 불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계속 불에 탈 수도 없고 단지 연기만 조금 내는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영장의 모닥불이 꺼진 뒤 불가에 남아있는 다 타버린 통나무 끄트머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나무는 연기를 계속 피우지만 그곳에는 참 불길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외부 세력의 위협 앞에서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하는데 우리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두려워서 떠는 아하스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고 말씀해주셨듯이 동일한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보다 앗수르에 의존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앗수르 동맹에 의지하여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 7-8절에 보면,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어려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도움만이 진정한 도움임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구하기보다 더 손쉬운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본문 7-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모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유다왕 아하스를 안심시킵니다. 아울러 아람의 핵심은 수도 다메섹에 있고, 다메섹의 핵심은 왕 르신에게 있고, 에브라임의 핵심은 사마리아에 있고, 사마리아의 핵심은 왕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왕을 세우고 폐위하는 권한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라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이 이미 이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겠죠. 그리고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만약 아하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만약 그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임박한 상황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고요한 확신 속에서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믿음으로 굳게 설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믿는다’와 ‘굳게 선다’는 각각의 동사는 모두 믿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멘’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동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아멘’합니다만, ‘아멘’이 믿다라는 뜻의 ‘아만’에서 온 것입니다. ‘아만’은 원래 뜻이 어디어디에 토대를 두는, 확고한 토대를 두는 것으로서 믿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안에 확고히 서있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고 붙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굳게 믿는다’는 동사는 ‘아만’의 강조형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라는 뜻을 강조했다는 의미로 ‘굳게 믿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만’ 자체도 굳건한 토대, 확고한 토대를 두니까 믿는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더 강조해서 굳게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굳게 선다’는 ‘아만’ 동사의 수동형태입니다. 굳게 믿지 못하면 확립되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그래서 굳게 설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단단히 유지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굳게 마음 먹고 믿음을 결단하지 못하면 흔들리고 요동치다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때때로 우리에게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굳게 서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때 믿음은 평상 시의 믿음과는 다른 단호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척박한 상황은 굳은 믿음을 요청합니다. 난세가 영웅을 불러오듯이 어려운 상황은 굳은 믿음을 필요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고 흐느적거리다가 쓰러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징표를 주시겠다는 것이니, 그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징표를 붙잡고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 이사야 7장 11-1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왕에게 믿음을 굳게 세워주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있는 듯이 경건한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조를 구하지 않는 명분으로 자신이 마치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는 쪽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조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한 것은 그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편이 더욱 유리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징조 구하기를 거절한 아하스왕을 책망하면서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란 너무나 유명한 이사야 7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했습니다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징조’를 약속하심으로써 아하스왕이 믿음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곧 한 여인이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인데, 아마 이 아들은 아하스에게 주실 아들일 것입니다만, 이름을 임나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뜻으로 이름지으면, 그 아이가 크기 전에 얼마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지금 아하스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6절입니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하스왕은 앗수르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왕이 도모하는 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고, 얼마 못돼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니까 이로써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심을 알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주신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징조는 비단 아하스왕에게만 주신 징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으로서 이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이땅에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실 것임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굳게 설 수 있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사람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돈을, 또 건강을,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고 우리가 설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믿음은 독생자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9·11 테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관, 소방관,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총동원됐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흙더미를 헤쳤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던 중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손 하나가 나왔습니다.
워낙 많은 시체가 있었기 때문에 손 하나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형상을 본 구조대원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어가면서 무엇이 그렇게도 소중하기에 끝까지 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잘라진 굳은 손가락을 펴보았더니 거기엔 다름 아닌 어린 아이의 작은 손이 들어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의 손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그 손을 붙잡고 있다가 함께 잘려진 것입니다.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 집행 전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르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1서 4장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주시며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다. (국민일보에서 발췌)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징조로 삼아 끝까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굳게 서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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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1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3)
인생의 정답 (요 21장 15-25절)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보이십니다. 세 번째 나타남의 목적은 사도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2주 전에 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1장 1-14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와의 추억, 베드로의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건을 떠올리도록 예수님께서 연출하셨습니다. 첫 번 째는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거의 초기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를 재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차례 뵈었던 베드로가 고향 갈릴리로 돌아와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갔는데 예전처럼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을 다시 재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의 부르심이 물고기 잡는 생계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임을 일깨워주시는 겁니다. 두 번째 연상되는 사건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던 기적을 떠올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생하고 주려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떡과 물고기로 아침상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다시 물고기 잡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임을 안심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억은 베드로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 숯불 앞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던 시간입니다. 그때도 이날처럼 숯불 앞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마음속의 문제, 실패와 낭패와 좌절과 트라우마로 여전히 남아있는 응어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쓰임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쓰디 쓴 기억을 연상시키는 숯불 앞에서의 아침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트라우마와 상처의 늪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시 실패의 자리로 베드로를 이끌고 들어가십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동일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세우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자신만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고 맹세하고 자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 모름을 입증하려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겁니다. 다시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그때의 실패가 마음속에서 너무나 깊이 파인 상처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을 취하는 일에 쓰임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일으켜세우고자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묻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도 이날 아침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깨닫게 됩니다. 알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로 알게 해주십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만, 이날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치명적인 실수와 실패로 엎어져있는 자신을 찾아와주시고 아침상을 손수 준비해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베드로가 느끼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느낀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이해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였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동일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니까 베드로는 고민이 되겠죠. 예수님이 이제는 내 말을 안믿으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절)라고 거의 동일하게 세 번째도 대답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가 느꼈을 법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실패의 자리, 그래서 엎드러져있는 자리에서 그를 치유하고 일으켜세워서 회복시키려는 사랑입니다. 너는 ‘버린 카드야!’, 이러지 않으시고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에서 넘어져 있을지라도 사랑을 나누면 사랑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지금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고 동일한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베드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치유하고서 회복시키는 사랑을 베드로가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찾으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실패의 자리에서 끌어올리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곧 베드로에게 너무나 큰 사랑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지금 베드로는 치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진실한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손에 장을 지진다’고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를 과시해도 상황에 따라 여지없이 무너지기도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부인한 것도 아님을 아십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되내이면서도 겁나서 부인한 것도 아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적 수준을 알고 이해하고 계십니다.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심은 베드로를 이제는 못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대답의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다짐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실패와 상처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중에 베드로 자신이 쓴 베드로전후서에 보면 자신의 상처나 실패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그 과거가 베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한 표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 밖에 전해지는 글 중에서 ‘베드로 행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베드로 행전은 2세기에 작성된 문서입니다만 4세기나 돼서서야 최종 형태로 완성된 베드로의 행적에 관한 모임집입니다. 이 이야기들 중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상상이나 전설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보여주는 베드로의 마지막 순교에 관해서 감동적으로 들려줍니다. ‘베드로 행전’ 35장에 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에게 강권합니다. 앞으로 계속 주님의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탈영병처럼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베드로가 설득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떠나게 됩니다.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아무도 나와 함께 떠나지 말고, 나 혼자 변장을 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로마 성문을 몰래 나서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로마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틴어로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대답하십니다. 베드로가 다시 묻습니다. “주님, 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렇다. 베드로야.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간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자신이 마땅 짊어지어야 할 십자가임을 깨닫고서 베드로는 주님을 찬양하며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네로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도록 요청해서 그렇게 순교를 합니다.
이를 보건데 베드로는 오늘의 치유와 회복,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서는 다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처럼 십자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내다보시며 의미심장한 예언의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본문 18-1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요,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사랑이고, 그의 형편과 처지와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사랑이요, 결국에는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사용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그러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로 소명을 받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명은 목양의 사명, 교회의 리더십의 사명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참 감동적입니다.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자신의 양떼를 맡기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서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떼를 위탁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의 사명입니다.
지난 설교 때 ‘사람을 낚는 어부’를 좀 크게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꼭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존중, 생명 존중, 하나님의 사랑 실천하여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직업활동을 통해서든 아니면 직업이나 생계나 밥벌이와는 별개든, 우리는 어찌하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영혼 존,중 생명 존중 가치관으로 무장해서 ‘사람이 언제나 먼저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섬김과 사랑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사람을 낚는 어부’임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은 특별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서 이루어갈 터인데 그 사명은 목양자의 사명 선교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사명이 주어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확인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물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누구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무엇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오늘 예수님의 질문,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로 번역하면 다시 물고기 잡으러 온 베드로에게 먹고 살기 위한 그물이나 배, 그것으로 잡은 물고기 등을 가리키고서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겁니다. 남달리 주님을 향한 열정을 그동안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맞고 쓰러져있는 베드로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세우시려고 베드로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요, 그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생의 정답’입니다. ‘인생의 정답’이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삶을 이해하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정답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거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명을 받아서 우리 모두를 부르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사명 감당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정답이요 우리가 나아갈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관건은 주님 사랑에 모아집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직접 그 앞에서 들은 베드로의 대답은 진짜로 자신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주님에게서 듣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님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존중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서 그에게 사명을 위탁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재차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환난 날에 주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맛보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므로 주님 사랑을 깨달아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8편 1절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인생의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환난 날에 건지심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진정한 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이렇듯 주님을 독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걸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아울러 주님 사랑이라는 마음은 정적인 것이죠. 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야 함.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제자가 되는 삶이어야 함을 아울러 깨닫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알렉산더 클락크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한 원주민이 사자에게 물려서 빈사지경에 처했습니다.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여서 거의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그를 선교사는 몇 달 동안 지극 정성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그 원주민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클락크 선교사는 자신이 일하던 아프리카 선교본부로 돌아왔습니다. 한 3개월 정도 후에 살아났던 원주민이 선교사를 수소문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말하더랍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법을 아시지요? 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당신 것입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당신 것입니다. 제 자녀들도 제 가축도 전부 당신 것이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에서 발췌)
선교사가 그렇다고 이 말대로 이 사람의 것을 어떻게 처분하고 소유했겠습니까마는, 참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원주민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이를 향해 ‘나의 것은 당신 것’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정답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도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랑이요 참으로 거룩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베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주님을 따라가시므로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답을 알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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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4일 동산교회 맥추감사주일 설교
감사하라! (골 3장 15-17절)
오늘 맥추감사주일에 ‘감사하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골로새서 본문에는 한글 성경으로 ‘감사’라는 말이 세 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15절에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 다음 16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마지막 17절에는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첫째, 여러분은 감사하는 자입니까? 성경의 기준대로 하면 범사에 감사하는 자입니까? 모든 일에, 모든 상황에서도 항상 감사하는 자입니까? 이 질문에 “네”라고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저 자신도 자신이 없습니다.
기준을 좀 낮추어서 감사할 때가 더 많으면 감사하는 자라고 인정을 해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짜증내거나 화내거나 불평하거나 부정적인 말을 내뱉거나, 이러한 것들보다 양적으로 감사할 때가 더 많으면 감사하는 자라고 인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감사하는 자입니까? 그래도 자신이 없습니까?
감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새뮤얼 라이보비치라는 유대인 변호사가 있습니다. 이분은 평생 사형수들을 무료로 변호해준 분으로 유명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을 이분이 변호해서 무기징역이나 그 이하로 감형을 받은 사람이 무려 7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형수들에게 생명을 되찾는 귀한 일을 한 이 분이 한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평생 무료 변호를 통해 78명의 사형수를 죽음으로부터 건져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로부터도 다음 두 단어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 두 단어는 ‘Thank you’입니다” 감사한다고 말을 할 법도 한데, 그 78명의 사형수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감사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덧붙여서 말합니다. “극악무도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은 남이 자신을 도와주었다고 고맙다고 느끼지 않을뿐더러 행여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해도 고맙다고 얘기하는 것에 익숙하지 못합니다.” (<감사>, 이찬수 저에서 발췌)
여기에 앉은 거의 모든 분들은 그래도 ‘저는 가끔은 누군가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종종 할 것입니다. 저 사형수들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겠죠,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감사에 인색한 사람일 수는 있지 않을까요?
감사하는 마음만 있으면 됐지 꼭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할까요? 성경은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5장 4절입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 누추한 말, 어리석은 말, 희롱의 말은 유익이 되지 못하는 말들을 가리킵니다. 불필요한 말이기도 하고 남을 깎아내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적인 농담도 포함합니다. 이러한 말들을 입에 담는 것도 거룩한 성도의 본분에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의 입술에 가장 적합하고 마땅히 해야 할 말이 무엇이냐면, 바로 감사하는 말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말을 하려면 감사하는 말을 하겠다고 결단하고 감사를 선택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이려면, 또한 탐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과욕 부리지 말고 자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없는 것에 집중하고 없는 것을 생각하고 내게는 없다는 사실 때문에 낙심하고 슬퍼하는 인생이 아니라 있는 것,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헬렌 켈러라는 분은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한 심한 장애를 지닌 여인입니다. 이분이 미국의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 꼽힐 정도로 훌륭하고 선한 영향을 미친 위인으로 칭송받는 분입니다. 타고난 장애로 인해서 평생 제한되고 불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이분은 오히려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떻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냐면 이분의 말에 답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많은 것이 주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어떤 것들이 없는지 생각하며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감사>, 이찬수 저에서 발췌)
반면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어진 수없이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감사하기보다 자신에게 없는 몇가지를 찾아내고 거기에 집중하여 시간을 허비하고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이 많은 사람이지는 않으십니까?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라는 찬송가는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고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1절 가사입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세상 풍파에 시달려 낙심하게 되었을 때라도, 낙심하게 되어서 원망과 불평을 말하고 싶을 지라도, 마음을 다잡고 강력한 결단과 의지력으로 그동안 자신이 받은 복,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런 상황에서도 오히려 감사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입니다. 2절 가사입니다.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까마귀가 있었는데 그는 늘 먹을 것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육장에서 잘 먹어서 살이 토실토실하게 찐 비둘기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 걱정 없이 잘 먹여주니까 비둘기둘이 살이 찐 것이었습니다. 까마귀는 비둘기를 부러워하여 자신의 몸을 비둘기처럼 희게 만든 후에 사육장에 몰래 들어가서 비둘기 무리와 함께 살았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고 비둘기 행세를 한동안 하다가, 그만 자신도 모르게 까마귀 소리를 내게 되었고, 그 소리를 들은 비둘기 무리들에 의해서 쫓김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비둘기 사육장에서 잘 먹으며 살다가 졸지에 쫓겨난 까마귀는 자신의 동료 까마귀에게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까마귀들은 몸 색깔이 다른 그를 까마귀로 알아보지 못하고 자기 무리에서 그를 쫓아냈습니다.
이 짧은 이야기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탐욕은 우리 인생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우리에게 이미 주어져 있는 것조차도 잃게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있는 것들로 자족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로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우리는 감사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선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합니다. 감사를 표현하고 감사하기로 결단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입니다. 설령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 해도 감사를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선택하고 표현하면 감사가 또다른 감사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감사가 풍성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아울러,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주어진 것에 감사할 줄 아는 자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탐욕을 절제하고 과욕을 멀리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이 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은 이어지는 16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씀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습니까? 저절로 생겨나거나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은 게 바로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풍성히 거할 때 생겨나는 마음입니다. 보통 ‘감사하는 마음’은 감사할 만한 상황에 처해서, 만족할 만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원하는 것을 성취해서 마음이 흡족할 때 생겨난다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풍성하게 거할 때 생겨난다고 말씀합니다.
최하진 선교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은 카이스트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스탠포드 대학에서 포스트 닥터 과정을 거친 소위 전도유망한 공학자였습니다. 우연히 참여하게 된 해외 자원봉사를 계기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부르심을 받아서 자신의 커리아만을 위한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을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로 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그리고서 중국으로 가서 교수로 활동하면서 중국의 대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제자훈련을 해서 선교활동을 펼치게 됩니다. 복음을 통해서 변화되는 대학생들을 경험하고서 더 이른 시기 청소년기에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바른 교육이 시행되면 중국과 세계를 변화시키는 하나님나라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바라보고서 대학교수의 사역을 내려놓고 청소년 교육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한 결심을 구체화하기 위해서 세워진 학교가 하얼빈에 있는 만방국제학교입니다. 이분이 <자녀를 빛나게 하는 디톡스 교육>이라는 책을 냈는데, ‘디톡스’란 독을 제거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학생들에게 있는 독을 빼내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함을 역설합니다. 그래서 그는 학생들에게 있는 독들을 분류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어떻게 그 독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디톡스할 수 있을 것인지를 연구해서 내놓은 책이 바로 이책입니다.
이분은 우리 몸을 들어서 쉽게 설명합니다. 우리 몸의 장에는 유익균과 유해균이 공존하는데, 유익균과 유해균은 서로 적이 되어 싸우기보다,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각각 다른 종류의 먹이를 먹고 산다는 것입니다. 가공음식이나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으면 장내 세균이 유해균으로 가득해질 것이고, 반면에 채소나 과일, 발효음식 등을 자주 먹으면 장내 유익균이 많아져서 건강한 몸을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장에도 해독, 즉 ‘디톡스’가 필요한데, 디톡스를 하는 방법은 유익균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대게 장내 균 중에서 유익균이 85%, 유해균이 15% 정도를 유지하는 사람인데, 유해균이 15%를 초과하면 면역력이 저하되고, 그 결과 각종 질병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몸 건강에 좋은 음식을 먹어야 유익균이 많아지듯이 우리의 마음에도 좋은 음식을 먹어야 유익균이 많아집니다. 몸을 위한 디톡스푸드가 발효음식이나 채소와 과일이듯이, 마음을 위한 디톡스푸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 풍성히 거하면 비로소 우리의 마음에 유익균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유해균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부정적’이라는 유해균입니다. ‘부정적 태도’가 우리 마음에 가장 안좋은 해를 끼치는 가장 대표적인 유해균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우리의 마음에 유익균이 많아지게 되는데, 가장 큰 유익균, 슈퍼 유익균이 바로 감사라고 강조합니다. 감사는 슈퍼 유산균입니다. 유산균이 풍부한 장을 갖게 되면 변비가 사라지고 얼굴의 찡그림도 사라지고 각종 질변에 대한 면역력이 증가하여 체력이 놀랍도록 좋아집니다.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야말로 마음 건강의 기초요 감사는 ‘내면의 만병통치약’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분은 감사에도 세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 감사는 영어로 If 감사입니다. ‘만약에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건적인 감사죠. 어떤 조건이 갖추어주면 하게 되는 감사입니다. 가령, 학생들 중에서 ‘만약 내가 이번 기말 시험을 잘 보게 되면 감사할 거야’라는 감사입니다. 이것 또한 감사는 감사입니다. 다만 조건이 갖추어질 때 감사하겠다는 조건부적 감사요 나의 유익을 위한 조건적인 감사입니다. 두 번째 감사는 영어로 Because 감사입니다. ‘ 때문에 감사’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주어지거나 어떤 이익을 얻게 되었을 때 드리는 제한적인 감사입니다. 가령, ‘이번 기말 시험에 높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감사입니다. 세 번째 감사는 영어로 In spite of 감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감사’입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하겠다는 결심이요 선택입니다. 가령, ‘비록 시험을 잘 못 보았지만 감사합니다. 이번 기회를 통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하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분이 섬기는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의도적으로 감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감사일기를 쓰게 하는 등 감사훈련을 많이 시킨다고 합니다. 감사 훈련은 ‘생각의 훈련’이요 부정적 관점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관점을 바꾸는 훈련이기도 합니다. 학생들 마음에 있는 독을 제거하는 디톡스 과정의 가장 강력한 방법이요 핵심 방법이 바로 감사 훈련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안좋은 독들을 제거하는 디톡스가 꼭 필요한데, 그래야 우리의 마음이 건강해지는데, 그 디톡스과정의 핵심이 바로 감사요,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건강해집니다.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으로만 우리가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 디톡스푸드,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울 때 생겨나는 마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표현은 헬라어 본문을 직역하면 “은혜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찬양하라”입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을 가리킵니다. 거저 주어진 것들이 바로 은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아는 자만이 감사를 압니다. 선물에 대한 감사입니다. 그래서 은혜로 찬양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의역한 것이고 잘 한 번역이라 생각됩니다.
누가 찬양을 좋아합니까? 하나님 찬양을 좋아하는 사람은 은혜를 아는 사람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찬양하는 시간이 너무나 좋은 거예요. 왜냐 은혜에 대한 감격과 감사가 있어 감사 찬양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복된 심령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라면,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라면 보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 보답이 바로 감사하는 마음이요 감가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은혜를 입으면 또한 은혜를 갚으려 하는 것이고, 또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면 그래야 보답을 받게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합니다. 히브리서 13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찬송의 제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이름을 증언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맺어야 할 입술의 열매가 바로 감사 찬송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 안에 거하기를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모든 말이나 어떤 일을 하든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힘입어 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도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힘입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고의 감사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감사인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우리가 진정으로 감사할 수 있게 됨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맥추감사절을 맞이해서 우리의 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흘러넘치기를 축원드립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따라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실제 삶의 생활방식이 되도록 훈련하고 다짐하고 결심하고 어떠한 경우에라도 감사하는 자가 되시기를 선택하고 결단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려면, 감사하는 말을 해야 함이 당연하고, 감사하는 말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겠죠. 감사하는 마음이란 자족하는 마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는 마음이요, 이러한 감사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할 때 가능한 것임을 기억하시고, 그러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서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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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2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1)
믿는 자가 됩시다! (요 20장 24-31절)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보여줍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마지막 한 주간, 특별히 십자가 고난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요한복음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 세 복음서를 이미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쓴 독특함에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의 깊은 묵상과 성찰이 담긴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가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면모를 독창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해석하면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가 예수님의 인간됨 즉 인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에 관한 목격담을 보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맨 첫부분에서부터 요한은 어떠한 사실을 강조합니까?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 곧 로고스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주시며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위대한 선언과 더불어 요한복음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볼 21장 말씀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이 실질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결론을 뭐라고 내립니까? 요한복음 서두에서 선언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결론을 내리며 마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했습니까? 뭐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시고 창조주로서 우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 생명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세 개의 복음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관점으로 기술된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바로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켜져야 믿는 자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와 거의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서 메시야는 원래 뜻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은 메시야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는 거의 같은 뜻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들, 아버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버지의 계시자,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가 된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인간적 존재인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와 달리 신적인 존재,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하나님 되심이 강조되는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메시야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임을 믿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믿음이 왜 중요하냐면, 이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 이름 안에 있는 생명을 누가 얻게 됩니까?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가 생명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오늘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도마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으나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를 출입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들었으나 도마처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변화된 도마처럼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시는 오늘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도마가 갖게 된 온전한 믿음은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들어서 누적되고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믿음에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도마가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전의 역사가 없었다면 이러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사도 바울처럼 한방에 올 때도 있습니다. 급격한 회심이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전부 그릇되었음을 한 번에 깨닫는 결정적 순간을 겪고서 사울이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도마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마가 지난 3년간 예수님에게 감화되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 드디어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 참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참 믿음, 온전한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고향 땅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 믿음의 표현임은 분명합니다만, 의롭다함을 얻게 된 믿음의 순간이 이후에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다시 약속을 주실 때에 구원 얻는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자녀가 없었던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아브라함을 고향땅에서 끌어내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한 명의 아들만 약속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참으로 믿지 못할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 믿지 못할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겨우 한 명의 자녀도 아직 주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순간이 구원 얻는 믿음, 의롭다함을 얻게 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겨난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도마에게도 바로 그러한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참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한 당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한 몸을 보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나름 어떠한 믿음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고, 이후에 열 제자가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니까 도마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우리가 보통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도마도 지난 주일에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다른 제자들처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마의 기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믿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도마는 자신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소외감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한 마음이 들어서 제자들의 말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도마의 말 그대로 열 제자들을 못 믿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이 말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의 말을 들으시고 한 주 후에 동일하게 주일 저녁에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이때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7절을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도저히 못 믿겠다고 하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못박힌 손을 보고 실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보라고 자신의 몸, 십자가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몸을 도마에게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요청에 응하신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니까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시므로 도마의 믿음을 도전하시고 계십니다.
도마는 굳이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려고도, 그리고 예수님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려고도 하지 않고서 구원 얻는 참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왜냐면 이로써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이 그에게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손을 넣어보지 않아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이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 도마의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 순간입니다. 도마는 구원 얻는 참 믿음, 생명 얻는 온전한 믿음,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도마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본문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자신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즉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도마에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심을 확인하게 되니까 부활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단순히 인간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표적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으로 그치지 않고 그 기적 너머에 어떠한 의미와 깨달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이 구원 얻는 믿음임을 확인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을 믿는 믿음일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에 그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이 이러한 믿음,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계신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혹은 도마처럼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주님이시오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게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뵙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의 도전을 받고 감화를 받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몸소 뵙지 못한 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고 믿어서 너의 믿음이 높은 질의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보고 믿는 믿음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보다 열등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보고 믿든 들어서 믿든 믿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갖는데 있어서 체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체험이 제공될 것이요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갖는데 충분하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말씀이 들려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 있었던 도마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믿음이 쉬웠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몸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갖기도 쉬웠을 겁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와 같은 경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에 이르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인데 믿음이 가장 큰 복인데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복되는데, 믿음 갖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도마의 무엇을 은근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믿음, 기적을 보고서야 강화되는 믿음, 일일이 기적이 있어야 믿음이 가능한 그러한 태도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마가 다른 열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만났다는 말을 믿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있다기보다 기적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책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마는 봄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갖게 되는 상황에 불가피하게 처하게 되었고 그래서 믿음 갖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 믿음,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음이 얼마나 큰 복임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일상에서는 믿음을 형성해가지 못하고 특별한 일이 벌어져야만 믿음이 성장해가는 그러한 자세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드럽게 책망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고 온전한 믿음이어서 구원얻는데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은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 성장을 위해서 체험은 중요합니다. 말씀체험, 성령체험, 은혜체험, 하나님경험,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온갖 고난과 고통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계속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자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신학자에게 가장 큰 영예는 ‘교회의 신학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교회의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일 것입니다. 그의 방대한 저서 ‘신학대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톨릭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넘어야 할 큰 산입니다. ‘신학대전’은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책입니다. 어떤 특별한 경험이 그에게 있어서 저술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이 되기 전 해에 좀 일찍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해에 신비로운 신앙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이 1273년 12월 6일 수요일 미사를 집전하던 때에 미사 중간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고 무엇인가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신앙체험이 그에게 큰 충격이고 그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그 체험이 있기 전까지 무려 15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계속 저술해오고 있던 ‘신학대전’은 이 충격으로 인해서 중단됩니다. ‘신학대전 제3부 고해성사’를 쓰던 중이었는데, 여기서 멈추게 된 것입니다. 저술이 중단됨을 안 그의 비서가 아퀴나스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을 깨우치려고 시작한 그 같은 대작을 왜 치워두고 계십니까?” 아퀴나스는 “레기날드, 난 할 수가 없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해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이것이 전해지는 아퀴나스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체험의 진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신앙체험을 통해서 더 큰 믿음을 사모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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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1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0)
샬롬 (요 20장 19-23절)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주일 이른 아침에 다시 사셔서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은신처에 숨어 모여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 21절)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이 샬롬이라는 말이, 정확하게는 ‘샬롬 알레켐(너희에게)’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관례적인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가 아님은 ‘샬롬’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특별한 강조점과 메시지가 있는 말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죽음 앞에서 두려워서 도망가버린, 그리고 자신들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게 될 약속이나 기원문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지금 ‘너희에게 평강이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너희에게 평강이 있다’ 혹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로 해석한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음이 명백하게 보여졌기 때문에 ‘평강’ 곧 ‘샬롬’이 있고, ‘샬롬’이 있게 되었고, ‘샬롬’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샬롬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에 죽으셨으나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 다시 사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과 생생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면, 그러면 예수님은 곧 우리의 샬롬이십니다. 우리의 화평이시오 우리의 평강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시대의 모습입니다. 만물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평화를 누리는 새롭게 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샬롬’에 대한 구약성경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해결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 샬롬입니다.
그런 점에서 샬롬은 ‘구원의 누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공짜로 선물로 얻게 된 구원을 누림이 곧 샬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쓴 편지에서 늘 인사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혹은 ‘있기를 원한다’라고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이요 그 구원을 누리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창조의 회복이요 만물의 조화요 관계의 평화로움이요 우리 마음의 내적인 평안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구원의 복이 곧 샬롬입니다.
은신처에 모여 있으나 유대 당국자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 “너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다”라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달라진 현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샬롬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십니다. 손은 정확하게는 팔목일 것입니다. 팔목에 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발도 보이신 것으로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곳은 옆구리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말씀에서 이미 죽은 예수님을, 그래서 다리를 부서뜨리지 않고 대신 로마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죠. 그때 그 찔린 곳으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 예수님의 육체 안에 집결된 우리의 모든 죄를, 마치 대속죄일날에 지성소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 대제사장이 언약궤 뚜껑 곧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려 덮어버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간 지은 죄를 속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덮여지고 가려져서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피가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요, 아울러 ‘물’이 나왔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 용서함 받은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져서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가리켜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 나와서 예수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곧 아버지의 영이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의 권능이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도 역사해서 우리 죽을 몸도 살려주실 것임을 보증해주신 성령을 가리켜 ‘물’이라고 표현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서 지금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이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임을 제자들이 바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것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이들에게 임한 구원의 복 곧 샬롬, 다시 말해서 구원이 시작되었고 이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된 구원의 복이 지금 임했음을 재차 강조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샬롬을 너희가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구원의 복을 가지고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이 샬롬이 너희에게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과의 화평이요 사람들과의 화목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얻었으니 세상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 큰 복을 증거하라는 사명입니다.
세상으로의 파송과 세상에서의 사명 감당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어서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예수님 자신이 내신 숨 곧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기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약속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나 호흡이나 숨이나 바람이나 같은 단어 프뉴마이기 때문에 앞으로 오순절날에 성령이 임하게 될 터이니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인해서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물이 흘러나온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받게 될 것이요, 그 성령은 처음 창조와 같이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호흡을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는 것과 같아서 처음 창조를 다시 하는 재창조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임을 누가가 말했다면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결과로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즉각적인 죄 용서하는 권능을 부여하시겠다는 말씀이라기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음 전도를 통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공로가 덧입혀져서 죄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요 반대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죄 용서함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복음 전도의 결과로서의 죄 용서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 인생이 얻게 된 구원의 은혜와, 구원의 복 곧 샬롬을 우리가 얻게 되었고 누리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의 큰 복을 얻은 우리가 이 복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함을 아울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생하게 마음에 와닿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 감격하면서 살아가지만 가끔씩 인생에 찾아오는 풍파로 인해서, 내가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서, 앞으로 어떻게 미래를 맞이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혹시 선택을 잘못해서 낭패를 당하고 큰 손해를 겪게 되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 때가 많은, 우리는 그토록 연약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이요, 대원칙을 말씀하셨을 뿐, 언제나 그렇듯 이론과 실제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일까요? 이 가능성을 실제로 손에 넣으려면 늘 성령 충만해야 하고 늘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공감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을 텐데요 주로 나이가 많이 들고 신앙연륜이 깊은 성도들은 세상사에 별 미련도 없고 인생이 별 것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죽고 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영생의 축복, 부활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샬롬이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젊은 분들은 신앙이 이게 전부야, 이게 샬롬이야, 그래도 나는 취직을 해야 되겠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겠다, 내가 원하는 꿈을 이뤄야 내 마음에 평정이 찾아지고 정말로 내가 복을 누리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또한 사실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이나, 이로써 얻게 된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사람들과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안만 가져다주는 신앙은 젊은이들에게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서 들은 김남준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이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사춘기 시절에 큰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이었는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교회를 다녔으나 이 네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어린 나이에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에 더 이상 다니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비상한 이례적 경험인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그만의 삶의 환경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성향 탓도 조금 있었으나 환경도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부모님이 이분이 어렸을 때 이혼했고, 어머니가 자신이 5학년 때 한참 예민할 때 자신을 떠났습니다. 근본 신뢰에 대한 큰 상실감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할머니집에서 잠깐 키워지다가 이후에는 새엄마에게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된 이후에는 의지할 게 없으니 내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안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는 문학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자신과 비슷한 많은 인물을 만났습니다. 자신만 유별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 작품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하는데 대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동안은 철학책을 탐독했습니다. 이분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게 힘들다고들 많이 이야기하는데 무신론자로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무신론자의 삶이란 결국,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영원을 탐내지 말라, 현재를 즐겨라’는 주장으로 요약이 되는데, 이게 무신론자! 완전한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자유, 무시무시한 자유입니다. 모든 것 버렸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고 너무 힘들어 결국에는 19살에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미친 듯 빠진 철학에도 답을 찾지 못해 결국 실망하여 갈 길이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약물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3일만에 깨어났습니다. 다락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새어머니가 이상하니까 할머니에게 연락해서 할머니집으로 옮겨지고 계속 잠들어서 잔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독한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3일만에 깨어나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주르륵 눈물부터 흘렸는데, ‘다시 살아야하는구나’는 생각에 눈물이 난 것입니다. 살아나서 어차피 대학은 갈 수도 없고 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루는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새벽녘에 집을 나왔는데 넓은 벌판이 보니는 서울 변두리였는데,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새벽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의 평안함을 주는 은은한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들어섰을 때 풍금소리가 들렸습니다. 찬송가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의 풍금소리가 들렸는데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처음에는 답을 얻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서 답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난 누구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순간 아 비로소 내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랑받고 있는 자녀구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 나도 만들고 세상도 만들고 이 세상 안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결국은 이 모든 의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찾아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은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 질문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질문이 네가지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가 모든 질문에 대답이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거라고. 거기서 모든 존재의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사회자가 이분께 질문했습니다. 19살 때 좌절하고 절망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서 지금도 좌절과 절망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떠한 절망의 순간이 와도 생을 포기하지 말아라. 왜냐면 인간은 살려고 태어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다. 절망의 끝에서 벼랑을 바라보지 말고 벼랑을 타고 내려갈 사다리를 찾으려하지 말고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벗어날 수 있으니까, 모든 인생은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 날개를 달아주실 하나님을 찾아라!” 이분의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자신이 목회자가 되고서 숱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경험한 것으로서 이후에도 많은 시련과 혹독한 고통의 순간을 지나야 했는데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서 달아주시는 날개가 꼭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찾고 만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축소되고 위축되는 경험을 했던 분이 두려움을 어떻게 조금씩 극복해나가는가를 자신의 경험에 따라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두려움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공포증입니다. 분명한 유형의 두려움입니다.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요소들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이분에게는 사방이 트인 높은 곳에 가면 갑자기 나타나는 고소공포증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트라우마입니다. 안좋은 일이나 큰 사고나 사건을 겪은 후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앞으로도 그런 두려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요, 안좋았던 기억으로 인해서 촉발된 공포심이요 상처입니다. 이분에게는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떤 도로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면 운전하기가 힘든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마지막 두려움은 실존적 두려움입니다. 미묘하고 정확히 규정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한 세상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 등의 두려움입니다. 이분에게는 자신의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를 겪었는데 자신의 어머니도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으로 형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분이 자신에게 있는 두려움이라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문서적도 읽고 전문상담도 받고 차근차근 이 문제에 직면해서 풀어나가고자 할 때 상당한 진전을 경험했습니다. 먼저는 건강한 두려움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란 쉽지 않지만 그 두려움에 대해서 비합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억제하는 법을 하나씩 터득해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상실로 인한 두려움을 이겨내었고 교통사고 트라우마도 거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예측으로 인한 건강한 두려움은 남았고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그 두려움도 상당 부분 해결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의 두려움의 문제라고 성경이 말한다면 그 두려움은 세 번째 두려움 곧 실존적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명백하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게 될 샬롬이 그 두려움에 대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아울러 모든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도 복음이 치료해줄 수 있느냐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인류 일반에게 주신 일반은총으로 인해서 상담치료나 약물치료와 전문가의 도움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진전될 수 있음을 아울러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샬롬을 선포했고 자신의 부활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샬롬의 복이 임하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인해서 또한 거룩하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어서 참된 평강을 누리고 이 샬롬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그렇게 샬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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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71장
▶성시교독 - 23. 시편 43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91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9장 28~37절
▶설교 - 희생
▶찬송 - 303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6월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9)
희생 (요 19장 28-37절)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 그리스어(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텔레오’라는 동사의 완료형입니다. 완성을 완료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는 보냄받은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으면 보통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린 채 며칠이든 한 주든 죽어가는데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다리를 밀고 흉곽을 열어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십자가틀에 밀어서 숨을 내쉬려고 가슴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없어서 결국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상보다 일찍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희생양으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뼈가 꺾이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성경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유월절 양은 뼈를 부러뜨리거나 구부러뜨리지 않고 삶아서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졌고 성취되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이미 죽어있는 예수님을 로마 군병이 무슨 이유인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의학적으로 가능하다고 많은 의사들이 말합니다만 상징적인 의미,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육체, 그 육체 안에다가 우리의 죄를 집결시키고 그 육체 안에서 죄의 세력을 폭파시켜버리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덮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의 육체에서 피만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물’도 나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주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육체로부터 성령이 흘러나와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충만케 되심을 상징적으로 가리켜줍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성령은 이미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의 배, 창에 찔린 옆구리로부터 물 곧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믿는 자들의 목마름이 해갈될 것을 약속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때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는 십자가에 높이 들려 죽으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올 때입니다. ‘생수의 강’이 부어지는 영혼은 갈한 심령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것인데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강물을 머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 목마름의 해갈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써 이 놀라운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옴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로부터 깨끗케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요 우리 몸의 부활의 보증이십니다. 로마서 8장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생명과 구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서 탤런트 김원희씨 간증을 은혜롭게 들었습니다. 이분의 가정이 1남 4녀인데 김원씨가 둘째딸이고 네 딸을 얻은 후에 막내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막내 아들을 낳고서 부모가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귀하게 얻고 귀하게 여기고 키운 막내이고, 김원희씨 역시 하도 하도 귀하다고 하니까 귀하게 여기고 자주 업어서 키웠다고 합니다. 이 막내가 다섯 살 때쯤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전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고 경기를 가끔씩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끔 경기를 하니까 다른 친구들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학교를 가기 싫어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정신적인 병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분의 집안이 김원희씨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김원희씨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제대로 신앙생활 시작한 때가 한창 유명해진 2008년이었는데 이때 이후로 동생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었습니다. 완전히 드러눕게 되었고 정신적인 병에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늘 온 몸을 고통스럽게 가격했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신음하고 늘상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남동생의 병환과 고통으로 인해서 온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을 겪게 되었습니다.
옷 잘 차려입고 교회에 가면 교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집안, 딸들도 다 이쁘고 잘 키우고 남 부러울 것 없다고 여겨졌지만 집에만 오면 남동생으로 인해서 늘 전쟁 같은 집안이 되었습니다. 네 딸들은 시집가서 벗어났지만 가끔 친정에 오면 '오 주여!'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전히 남동생은 계속 더 아프고 더 전쟁같은 나날, 그러다보니 딸들 생각에 "얘만 없으면, 얘만 안 아픈면 우리 키우느라 고생한 부모님이 여행도 다니고 노년을 편하게 보내실텐데...“ 하면서 남동생에 대해서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병간호만 하면서 늙어가는 부모님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에 대한 그런 생각, 부모를 힘들게 하는 남동생에 대한 그런 마음이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만난 후부터 남동생이 우리에게 원망이나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딸들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있었는데 다들 공통적으로 남동생만 아니면 우리 자매들이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이러한 마음을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주셨습니다. 이쁘게 잘 자라 좋은 집안에 시집가고 어려움 없이 지내던 자매들이 남동생으로 인해서 그래도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가끔 친정집에 가면 여전히 전쟁통이지만 남동생을 더욱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남동생을 볼 때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온갖 화살을 대신 맞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주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딸들이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우리가 부모의 짐을 나눠지자, 고난을 함께 지자, 이 십자가를 함께 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요리를 잘하니까 음식 준비해서 늘상 부모님에게 공수해주고 두 동생은 수족이 되어서 부모님 병원 갈 때나 어디 갈 때, 그리고 동생이 병원갈 때 운전해서 모시고 다니고 김원희씨 자신은 틈틈히 가서 남동생 목욕도 시켜주는 등 부모의 무거운 짐을 네 딸들이 나눠서 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희생이 사랑임을 압니다. 오직 희생만이 참된 사랑임을 압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말뿐임을 누구나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희생은 마치 종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지극한 섬김으로써 제자들을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곧잘 희생합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자녀를 키웁니다.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희생을 합니다. 자녀를 그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므로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노년의 부모에게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부모를 봉양하거나 병든 부모를 수발하는 것 등으로 자녀도 희생합니다. 희생으로써 사랑의 보답을 하는 것이죠.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되어서 수명이 연장되고 그러다보니 병든 부모를 봉양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가정도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온전히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실인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하고 죄송스럽게 여깁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고 심지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현직 의사의 글을 보니까 자신의 환자를 간호하던 한 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픈 아버지의 간병을 전담한 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딸은 본업을 그만두고 아버지 간병에 전념했습니다. 의사인 자신이 보기에도 아버지 못지않게 딸도 많이 지쳐보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딸은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며 자책했습니다. 아버지보다 본인의 일을 우선했던 것, 아버지를 제때 제때 챙기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했습니다.
의사인 자신이 보기에 그 딸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이타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생활 경험을 통해서 보건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오랜기간 하려면 스스로를 돌보기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가 쉽고, 그러고 나면 그 누구도 돌볼 여력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의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몇 년 전 한 환자가 응급실에서 막 올라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회진을 돌면서 환자의 상황과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설명해주었고, 미안하지만 내일부터 휴가여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보호자가 말하더라는 겁니다. “아니, 의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아픈 환자를 놔두고 휴가를 갈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입니까?” 이기적이라는 것이죠.
그런 말을 듣고서 휴가를 가니까 찜찜한 마음을 덜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오게 된 가족과 오게 된 휴가여서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내고 말 그대로 잘 쉬다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 발령받고서 처음 5년 동안은 휴가도 못갔고 모처럼 가족과 보낸 휴가여서 말 그대로 잘 쉬다가 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병원 일이라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자신이 너무 지쳐있었음을 비로소 거기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도 몸도 많이 지쳐있었음을 회복하고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휴가지에서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지쳐서 평온하지 못하다보니 자신이 주변을 괴롭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들에게 불친절해지고 인턴들에게 자주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충분히 자고 충분히 쉬었고 휴가에서 복귀한 후에도 제 시간에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병원 생활과 자신의 생활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니 몸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이 얼굴이 좋아보인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사람 관계에서 여유가 생겼고, 환자를 진료할 때 집중력도 늘었고 판단력도 좋아졌습니다. 결론을 얻기를 자신이 환자들에게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 잘했던 때는 자신이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말합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야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할 때에는 정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그러니까 늘 남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고서는 결국에는 이타적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돌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남을 돌볼 수 있는 여력도 생겨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발췌한 것임, 김범석 저)
이것이 어찌보면 인간 사랑의 한계, 우리의 희생의 한계치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어느 정도 자신을 지켜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안내 방송으로 늘 나오는 것이 있죠. 비상사태가 되면 누구보다도 본인이 우선 산소마스크를 쓰고 그 다음에 아이에게 씌워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아이를 먼저 생각해서 아이에게 먼저 씌워주려다가 잘 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우선 산소 마스크를 쓰는 게 옳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피 한방물 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해서 다 쏟으신 완전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을 받고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화목 제물로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더 이상 죄로 인한 적대관계 원수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관계로 회복하시기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고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어지는 요한일서 구절, 요한일서 4장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야겠죠. 하나님 사랑, 가족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동료 사랑 등 사랑하며 살아야겠죠. 사랑은 언제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희생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요 희생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미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짐을 나눠지고 가정의 짐을 나눠지고 자녀의 짐을 나눠지고 직장 동료의 짐을 나눠지고, 이로써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오늘은 마침 현충일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와 같이 민주화되고 산업화를 이루게 된데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이와 같은 번영과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일본 식민지배를 받을 때 독립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한국전쟁의 참화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이 나라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설립 이후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교회의 짐을 나눠지고 십자가를 지는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우리 교회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희생, 이 큰 희생이야말로 우리의 작은 희생의 원동력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희생에 늘 감사하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경축하며 기뻐하며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 찬송 올려드리고 하루 하루를 기쁘게 감사하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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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2)
▶찬송 - 46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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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635장
■2021년 5월3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8)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2) (요 19장 1-16절)
지난 시간에 이어서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빌라도가 진리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 고뇌했고, 고뇌의 결과 진리와 양심을 따르려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유대인의 압력과 여론의 요청, 그러니까 로마의 총독으로서 식민지 국가인 유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려면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듯 이것도 만족시키고 저것도 충족시키려는 분주한 빌라도의 움직임이 로마 총독 관정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유대인과 관정에서 심문 받고 있는 예수님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빌라도의 모습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에 비해서 참으로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세상’의 전형적인 예,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정확하게는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상의 대표자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리이시죠.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만약 더럽혀지면 정상적으로 유월절 절기에 참여할 수 없는 곤란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기를 꺼린 것입니다. 세심하게 유월절에 더렵혀지지 않으려는 세상의 대표자들인 유대인들은 그러나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예수님을 오가며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타협하고 절충해보고자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에게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은 가차없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b). 예수님은 보다 분명한 입장과 요청하시는 겁니다. 진리에 속할 것을 도전하시는 겁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빌라도가 심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양심에 오히려 도전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따라 올바른 판단과 판결을 해야할 것 아니냐, 언제까지 세상과 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려느냐, 양심을 따라 양심에 확신하는 바에 거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에 속한 자는 나의 도전을 받고 응전하고 내 음성을 듣느니라, 이렇게 빌라도를 도전하고 계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무죄석방!’, ‘고발 근거 없음!’ 판결을 내리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세상의 만만치 않은 유혹, 그것은 바로 빌라도에게는 식민통치의 관리자요 통치자인 그의 지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민중이 그를 따르고 유대의 종교와 정치 실력자들의 지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뚜렷한 입장, 곧 진리에 속할 것을 요청하는 예수님의 도전에 대해서 빌라도는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꼼수가 유월절 명절이 되면 특별사면 형식으로 죄수를 석방하는 전례였습니다. 명백한 범죄자로 인정되는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후보로 올려놓고 누구를 석방하면 좋겠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라도는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든 석방시키려고 했던 빌라도가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명한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예수님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서 대중들의 십자가형 요청을 무마시키려는 꼼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죄목을 씌우려는 유대인들에게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고발이 근거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보이고, 아울러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완악한 마음을 꺾고 예수님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만족시키고 자신의 양심의 부담도 덜어내려는 양다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이고서 빌라도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9:4b)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빌라도의 노력이 실패합니다. 유대인들은 더욱 강경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빌라도 또한 그럴 수 없다고 맞섭니다. 그럴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대답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전략을 바꿉니다. 빌라도로 하여금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또다른 논리를 들이댑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런 죄목을 씌운 이유가 로마법에 따라 반란자로 규정돼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것이 통하지 않자 유대인들에게 있는 고유한 법과 관습을 들어서 빌라도를 압박하려고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자신들 고유의 종교법에 따르면 이 예수가 신성모독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방불한 신적 존재임을 주장하므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으므로 우리 종교법에 따르면 이러한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빌라도는 받아들입니다. 빌라도에게 꽂힌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혔던 세속적 로마인이었던 빌라도, 여느 로마 관리들처럼 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반신반인, 반절은 하나님이고 반절은 인간인 신인(神人), 그리스 신화에 자주 나오고 로마 신화에도 나오는 그러한 신인이 아닐까, 혹시 아닐까라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만약 그러한 분이시라면, 안그래도 심문할 때 보여지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 그리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도전해오는 듯한 말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대인들의 표현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신성모독을 표현하려고 했던 반면에 받아들이는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채찍질 행동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면하고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혹시 신적인 기원이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너는 어디로부터냐?”(9절)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에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던 빌라도, 세상과 진리를 절충해보고자 노력 하던 빌라도, 법대로 판결이라는 진리에 입각하고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한편의 주장과 다른 한편의 주장, 세상의 요구와 압력과 유혹이 제시하는 여론의 지지와 효율적인 통치와 유대 실력자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그의 노력이 결국에는 세상에 굴복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노회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꺼낸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유대 고유의 관습법, 종교법을 존중하여 예수를 사형에 처할 것을 호소했으나 빌라도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다시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로마 황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사람을 죄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 석방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의 충신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은근한 압력이요 협박입니다.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직역하면 ‘가이사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가 만약 로마 황제를 대항해서 반역한 ‘유대인의 왕’을 석방시켰다, 하는 말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당신 자리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은근히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 당국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전형적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황제를 대항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는지,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등은 따져물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를 왕이라 했다고 단정하고서 그러한 사람을 풀어주면 당신 역시 로마 황제의 반역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비약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이 주장이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들어가면 의심 많은 황제였던 그는 빌라도에 대한 신임을 거둬들일 수도 있는 폭발력 있는 이슈를 지금 유대인들이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거듭 끈질기게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흔들립니다. 만약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상소를 올리면 빌라도 자신의 입지와 위상과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빌라도는 결국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빌라도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가형을 내리려고 정식적으로 재판석에 앉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너희 왕이로다”(14절)고 말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청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완전히 세상입니다. 세상으로서 그들은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므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라고 보여주고자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받게 하려고 했고 결국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그들이 섬김다고 생각했던 참되고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유대인의 참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고 그렇게 고백했던 그들이 자기들에게 참된 왕은 로마 황제 가이사뿐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참 끈질기게 우리를 뒤쫓고 우리를 따라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육박전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맨몸으로 맞붙어 싸워야 합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절충해보고자 했으나, 어찌보면 끝까지 양심에 따라 진리에 따라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세상이 가한 일격을 맞고 결국 세상에 굴복합니다. 자신의 입지, 자신의 위상,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달라야겠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주신 구원자요 통치자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빌라도의 선택이 아니라 고뇌와 갈등 속에서 악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냐 예수님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상이나 입지나 이익이냐 아니면 양심과 진리에 따라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세상은 그러나 참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옵니다. 죄는 참 끈적끈적하게 우리에게 달라붙으려고 합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묘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가 지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선택하여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양심에 옳다고 확신한 바를 여러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흐름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자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22-23절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고 신념이 있고 회복된 양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양심과 신념과 원칙에 따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꺼려지지만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마지못한 망설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려놓을 수 없는 위상과 지위 때문에 결국 믿음과 신념과 확신과 양심을 저버리고 행동하는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빌라도처럼 실패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과 압력에 직면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믿음을 따라 선택하며 행동할 수 있을까요? 손해보더라도 진리를 따라 양심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지위와 위상과 권한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굴복하고 진리를 저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겠죠. 언제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하겠죠.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선택해야겠죠, 예수님 때문이라면 희생도 해야 하고 손해도 보아야 하고 양보도 해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직면한 빌라도, 결국 세상을 선택하는 빌라도와 다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온전히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의 판단을 주님이 저울에 재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세상에 속했다, 아니면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게 예수님께 혹은 진리에 속한 자들임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믿게 될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이유를 우리는 빌라도의 사례를 통해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도 세상 한복판에 임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감추어질 수 없는 산 위에 있는 동네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저들을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거룩한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서 거룩한 자녀답게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들어간 교회 곧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하나가 된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에 동참해서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서 세상과 마주서서 세상에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붙들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알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진리의 증언이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고 양심을 따라 행동하므로 예수님께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는 자임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씨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입증하시고 승리하시는,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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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2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7)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1) (요 18장 28-40절)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하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뚜렷한 교회다운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들어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속한 거룩성을 지닌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가 된 것같이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일체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뚜렷한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송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에 파송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이어야 하니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해져야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교회 문밖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뚜렷한 정체성 곧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 오늘 예배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세상에 나아가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점 줄어들고 축소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세상을 향한 사랑이 줄어들고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으로 충만은 결국 세상의 축소로 이어지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받게 될 준비가 마쳐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명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 자체로 세상에 충격을 주고 마주선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씨앗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세상에서 누룩처럼 퍼뜨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령당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아가도 선한 영향력이 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선택하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서, 즉 예수님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란 있을 수 없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물론 빌라도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식민통치하려고 로마 제국에서 파송한 총독입니다. 재판 심문 과정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지만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선택하게 되는 전형적인 한 예로 빌라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소위 유대인들과는 다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인 세상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진리를 회피하고 우회하려다가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다음주까지 두 번에 걸쳐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 그러나 결국 실패한 사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에 파송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세상에서도 선택하여야 하는데 진리에 대해 우물쭈물하거나 진리를 회피하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때 중립적으로 남아있으려 하나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굴복하게 된다는 생생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이루어야 할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로마법을 시행하고 법대로 판결을 내려야하는데 그렇다면 양심 상 예수님은 무죄인데, 그래서 무죄를 내려야만 하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압력과 시중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폭발력 있는 여론이 들끓 수도 있는 반란의 씨앗이 잠재된 폭풍 전야와도 같은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관리자요 통치자로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유대 당국자와 종교지도자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정치 사법 입법의 자치기구였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로마법상 합법적으로 사형, 특별히 식민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 십자가형을 내리려면 총독의 재판과 판결이 있어야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른 새벽에 총독 빌라도의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왔던 것입니다.
로마법상, 종교적인 이유로는 십자가형을 내릴 수 없기에 그들은 정치적인 반란범으로 예수를 몰고 가려고 로마 황제의 통치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내려준 분봉왕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가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로마 제국의 반란범이라는 고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제일 먼저 물었던 질문이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식민 통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려는 정책을 폈습니다. 특별히 식민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으면 종교적인 이유로 가령, 신성모독자에게 종교법을 시행하여 돌을 던져 죽이는 행위도 용인할 정도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월절이라는 절기였고 예수님은 이미 많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성전에서 공개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유대 종교지도자와의 첨예한 갈등을 빌라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도 로마 제국의 허락 없이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신성모독자로 투석형에 처하려고 하기보다 저주받은 자로서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 곧 로마제국의 법으로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데려온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이면서 다소 간접적인 대답은 본문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걸로 보면 자신이 왕임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인데 반해서, 그러나 분명하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알송달쏭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다시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이어지는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의 나라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보냄을 받은 분이고 이땅에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진리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주시는 진리요 이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빌라도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당시 유대인들도 오해했습니다. 세상 나라와의 경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메시야도 정치적인 왕으로서 메시야가 아닌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메시야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고유한 가치와 작동 원리와 특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나라의 것들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세상 관점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세상의 범주와 가치체계를 가지고 교회를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호주 시드니에서 목회하시는 윤치영목사님이라는 분이 나오셔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증했습니다. 이분이 2004년에 전도사 시절에 경험한 일인데요 자신이 섬기던 청소년 아이의 가정 문제 곧 자녀와 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다가 그만 현지 문화 차이로 인해서 구치소에 들어가고 재판 과정을 거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이 총 2년 동안이었습니다. 죄목은 여자 학생에 대해서 납치, 강도, 폭행이었습니다. 현지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는데 목회자가 교회에 데려가려고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거짓 뉴스였습니다. 목회자이니까 감옥에서도 성경을 읽고 같은 방에 있게 된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많은 죄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다는 원통함이 풀리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쌓여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는 앞으로 하나님의 ‘하’자도 부르지 않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로 원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왜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는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감옥에 나와서 깨닫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분이 원래 믿는 집안 4대째 믿는 집안에서 목회자가 되었고, 호주장로교회가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이분의 증조할머니가 거의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분이셨는데, 이분이 또한 호주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한 신앙의 집안 출신 목회자인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감옥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쉬웠다고 말합니다. 죄를 말하면 다 자신이 죄인임을 순순히 인정하더라는 겁니다. 감옥 밖에서는 복음을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감옥에서는 죄를 짓고 들어왔으니까 죄인임을 쉽게 인정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깨달은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임하고 펼쳐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러니까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으로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그가 있던 감옥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1시간이 넘는 구체적인 간증은 굉장히 은혜로웠고 제게도 도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유튜브에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의 특성으로 헤아릴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어서 그런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비밀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윤치영목사님이 깨달은 대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통로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렇게 십자가의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써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나라를 향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진리의 말씀으로 참되고 유일하신 진리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것이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도전하신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절 하반절)라고 빌라도에게 도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려야하는 빌라도에게 진리로 판결해야 하는 그의 양심을 일깨우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되묻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진리탐구를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진리에 속한 자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회피하려던 이유는 예수님을 선택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유대 당국자들의 압력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통치자로서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전하게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로 대표되는 세상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내 나라는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 그러니까 왕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는 말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반란범이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진리를 선택할 용기를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회피하였고 회피할 뿐 아니라 진리를 직면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해서 양심도 안정을 찾고 나중에 혹시라는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무죄한 자에게 사형 판결이라는)를 갖지 않게 하려고 유대 당국자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본문 38절부터 40절까지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38-40절)
빌라도는 양심상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를 무죄석방할 정도로 용기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명백한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게 하면 유대 당국자들이 혹시 예수님을 선택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러한 제안을 합니다. 이러한 꼼수도 실패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볼 말씀입니다만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줍니다. 다음 시간에 요한복음 19장을 본문으로 해서 빌라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안전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고 실패하는가를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마주섰을 때 처음에는 고뇌하고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세상과 직면하면 고뇌하기도 하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진리를 증언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소리 곧 세상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인가, 내 이익과 안전 때문에 양심을 버릴 것인가, 하는 고뇌요 갈등입니다.
진리에는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우회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어정쩡하게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나란히 걸어가려고 하다가는 결국 세상에 굴복당하고 양심을 저버리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고 굴복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해주시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사명을,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시는 그렇게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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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1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6)
다름에서 비롯되는 비교 우위 (요 17장 20-26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 불리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주심으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곧 있을 십자가 죽음 곧 자신의 십자가 들림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수하여 자신도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도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서 이땅에 보냄받으셨는데, 이러한 권세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또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 즉 아버지가 보내신 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그 관계에 동참하려는 목적으로 영생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권세보다는 영생이요, 영생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아들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서 곧 떠날 터인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들은 세상에 남을 것이기에 세상의 죄악에서 순전하게 보전되기를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써 그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서 아버지께 딱 달라붙어 있고, 그들이 비록 세상에 살더라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곧 거룩성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제자들의 심령에 떨어질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거룩한 씨앗이 됨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써 제자들이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으로 파송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파송을 받아 세상에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려고 하시는데,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거룩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녀야 하기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도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살짝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복음 17장 20-26절 말씀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의 마지막 단락으로써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워질 교회, 즉 오고 오는 교회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까지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교회를 위한 기도요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그러니까 사도적 전승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곧 오고 오는 교회를 위한 기도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가 되셔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가 우리(We)라 불릴 수 있도록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수직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의 하나됨이요, 수평적으로는 서로 서로의 하나됨입니다. 이 기도는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 17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셨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 그것이 곧 거룩입니다. 완전히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죠. 지금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도 그와 같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 편에 서도록 기도하시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귐과 연합과 하나됨과 같이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보다 여기서 추가된 것은 여기에는 수평적 차원 또한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도 진리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된 교회가 온전히 예수님 편에 붙고 아버지 편에 붙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라는 공동연합전선을 이루어 세상의 대척점에 서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 교회의 뚜렷한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온전히 하나된 거룩성을 위해 기도하시는 겁니다. 즉 교회의 다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의 구별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과의 다름이요 세상과 구별된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써,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써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가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면 세상과 분명히 대립되어 존재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될 때 세상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증언하게 됩니다. 세상이 알게 됩니다. 무엇을 알게 됩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가 보내신 분임을,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임을 세상이 알게 됩니다. 아들이 세상에 주신 도전이죠. 아들이 세상에 미친 충격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여주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고 세상에 도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워낙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철저히 의존된 것을 세상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과 하나됨을 보여줄 때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고 예수님께 보냄을 받아 파송받은 공동체임을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요 교회가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적으로 예수님께,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해서 충만해질 때 세상이 교회란 곳이 세상과 다르구나, 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 교회는 예수님이 보내신 기관이요 예수님은 창조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세상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거듭 강조합니다. 예배가 소중하고 예배 시간이 중요합니다. 예배 때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는 겁니다.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면 그 거룩한 씨앗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 거룩해집니다. 뚜렷한 교회다운 정체성이 생겨나는 것이요 이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 편에 선 교회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단이 가져가서 그렇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괜찮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과 일체를 이룬,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 또한 예수님의 교회,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는 교회! 그렇게 세상과 대립되어 서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높죠. 예전에는 삼성전자가 세계적 반열에 오른 기업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세계적으로 내로라 하는 브랜드가 되어 있어서 저 자신도 놀란 적이 있는데요. 최근에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신화를 썼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황창규라는 사람입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개발 총책임을 맡았던 주역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을 지냈고 이후에 KT 회장도 역임한 분입니다. 이분이 반도체를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 후 과정으로 스탠포드 대학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서 최첨단 반도체 산업을 익힐 수 있었고 직접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 엔지니어입니다. 스탠포드 연구원 시절 당시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미국의 인텔사에 반도체 개발 관련 컨설팅에도 참여했고, 그때 반도체의 주도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일본 기업들도 컨설팅해주기도 했습니다. 학자의 길을 걸으려던 그에게 삼성전자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88년에 ‘기술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이건희회장의 특명에 따라 세계의 고급 한인 인재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입니다. 미국의 유수 대학 교수 초빙 제의를 받은 상태여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생각해보겠다고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반도체 기업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고 일본의 주요 반도체 기업이 ㅇ요청해서 컨설팅도 진행하였습니다. 일본 일정 마지막 날에 히타치연구소 부소장과 식사하던 중 그분이 물었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어떤 지를 물었습니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생활을 오랫동안 해서 솔직히 잘 몰라서 되물었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일본인 부소장의 말이 “솔직히 삼성전자가 반도체 제품을 만들고는 있지만 수준 미달입니다. 일본의 기초 기술이나 응용 기술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마 한참 동안은 따라오기 어려울 겁니다.” 이 대답을 듣고 속에 분노와 오기가 생겨났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삼성전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임원급 제안이었지만 그는 삼성전자에서 오랫동안 롱런하려고 직급을 낮추어 부장으로 입사했고 결국 3년 후에 임원이 되고 나중에는 반도체 개발을 총괄하는 사장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분이 주도한 반도체 기술 발전과 개발이 거의 삼성전자가 신화를 기록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4년에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했고, 이후 플래시 메모리에 도전했습니다. 플래시 메모리는 모바일 시대 스마트폰의 보급과 더불어 폭발적인 수요가 예측되는 신 사업이었는데, 당시 플래시 메모리의 최강자는 일본의 도시바였습니다. 거의 세계의 5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황창규사장이 내다보기에 앞으로는 모바일 시대가 된다, 플래시 메모리는 모바일 시장이 성장할수록 그 수요가 폭발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예측하고 모바일 시장을 대비하여 후발주자로서 도시바를 따라잡기 위해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에 뜻하지 않은 도시바측의 제안을 받습니다. 삼성전자와 기술 교류를 제안한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도시바에 D램 기술을 전주해주면 도시바에서도 삼성전자에 플래시 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업계 최고 기업의 제안이어서 삼성전자가 받아들이면 분명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삼성전자가 거절했지만 1년이 지나서 또다시 도시바의 제안이 있었고 이건희회장도 다각도로 검토하고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곧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차에 황창규사장이 일본에서 이건희회장을 만나서 지금은 도시바에 1-2년 뒤져있지만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플래시 메모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고, 독자 개발이 성공적으로만 이루어지면 앞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미래 모바일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주도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건희회장을 설득한 것입니다. 긴 설득을 듣고서 이건희 회장이 한마디 했습니다. “해볼만한가?” 단독 개발로 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치고 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고 황창규사장은 망설임 없이 “플래시 메모리는 미래 반도체 산업의 핵심입니다. 일부 기술만 보완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 예측이 적중했습니다. 몇 개월 후 그러니까 2001년에 세계 최고의 집적도를 자랑하는 1G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했고, 그 성공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서 제안을 거절한 후 1년만에 도시바를 따라잡고 세계 1위가 되어서 지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플래시 메모리 개발 이후에 삼성전자의 세계적 수준의 기업으로의 도약은 이후 애플사의 제품에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고서부터입니다. 애플이 출시한 제품들, 가령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아이팟에는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하지 않아서 삼성전자가 보기에 기술적으로 결함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 제품에 플래시 메모리가 들어가면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플에 제안을 해서 협상을 했고 결국에는 삼성의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부품으로 사용하게 되어서 애플의 성장과 더불어 삼성전자도 급성장해서 세계적 기업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 그렇게 애플과 삼성이 함께 새 시대를 연 것이죠. 이른바 ‘모바일-스마트 시대’입니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신화를 썼던 황창규사장이 특별히 고마워하는 것은 그룹 회장이었던 이건희회장의 전폭적인 신뢰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전적인 재량을 준 것, 자신의 설득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 이러한 위임과 신뢰관계 속에서 삼성전자의 신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룹 회장의 지지와 신뢰, 그와의 일치(?) 속에서 이뤄낸 성과라는 것입니다. 잘은 모릅니다만, 그룹 회장 곁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그룹 회장, 우리나라 재벌 회장, 삼성에서 이건의 회장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흔히 말해집니다. 이것이 옳고 바람직하냐의 여부를 떠나서 현실이 그와 같은데, 그러한 존재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도록 재량을 주고 지지해주니까 소위 일체를 이루어서 일하게 되니까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고 일치되면 일치될수록,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성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성으로 무장하면 무장할수록 세상에 대한 발언력과 영향력과 증거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려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심은 교회를 세상에 보내려고, 교회가 세상 속에 있게 하려고 교회가 먼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안에 있게 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다름, 교회의 구별 곧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이 뚜렷해질 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결국 세상이 교회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온전히 일체를 이루시며 사시자 세상이 도전을 받고 세상이 충격을 받고 세상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형상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과 같이 교회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일치된 것처럼 예수님과 온전히 포도나무 가지처럼 딱 달라붙고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온전히 하나가 되면 결국에 세상이 보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구나’,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구나’,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구나’라고 세상이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요 정체성이 곧 사명으로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비교 우위는 세상과 다름입니다. 세상과 구별됨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이 곧 사명이 되고 결국 세상을 향해 도전하게 되고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게 되고 그렇게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되는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받고서 거룩해질 때, 그 진리로 자유함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영생의 확신과 소망으로 가득 찰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어떠한 생명력과 여유와 죽음을 극복하고 두려움을 뛰어넘는 평강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확신함으로 말미암아 사랑받는 자녀로서 어떤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안정감을 가지고 여유가 있고 참된 만족을 알고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세상이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오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벗어날 때 가능해질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거룩해진 능력을 힘입고 세상을 향해서 나갈 때, 교회나 세상이나 추상적인 어떤 덩어리로 볼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 듣고 예배하고서 가정으로 돌아가보니 가정에도 세상이 있는 겁니다. 안믿는 배우자가 곁에 있는 거예요. 직장에 나가보니까 거기에도 세상이 있는데 안믿는 동료들이 많아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친하지만 거기도 또한 세상인 거예요. 말씀 듣고 거룩한 정체성이 뚜렷해지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진리로 자유하고 거룩해진 자녀, 하나님의 생명으로 활력과 긍정적 기운이 가득찬 자녀로서 우리를 보게 되는 세상이 곁에 와있는 거죠. 그렇게 세상에 우뚝선 하나님나라의 사역자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을 대리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다름과 구별과 말씀에서 비롯되는 거룩성 자체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교 우위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전도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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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63장
▶성시교독 - 98. 어버이 중리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569장
▶기도 - 김영택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7장 14~19절
▶설교 - 예수님의 중보기도
▶찬송 - 540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5월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5)
예수님의 중보 기도 (요 17장 14-19절)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의 기업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 <왜 일하는가>에 보면, 이분이 전자부품 제조업체인 교세라(교토 세라믹)를 창업하고서 어떻게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는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이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은 아니지만 일을 할 때 마치 신의 소명을 받아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처럼 너무나 성실하게 치열하게 일을 한 분입니다. 교세라를 창업하기 전에 무너져가는 중소기업에 취업한 20대 초반 때일입니다.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쓰이는 전자 부품을 대기업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품을 개발하는 일을 했는데 거듭 실패했습니다.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원하는 부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끈적끈적한 점성이 있는 물질을 첨가해야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민감한 전자 부품에 불순물이 섞이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물질을 사용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골똘히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여느 날과 같이 어떤 점성 물질을 첨가해야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실험실을 걷고 있었는데, 무언가 발에 걸려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무심코 발밑을 보니 실험에 사용하던 왁스가 신발에 붙어 있었습니다. “대체 누구야! 여기에 왁스를 흘린 사람이!”라고 소리를 치려던 바로 그 순간에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이거다!’, ‘유레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왁스를 섞어서 제품을 만들어보았더니 완벽한 형태의 부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진 그 형태를 고온으로 구우면 왁스는 모두 타버려서 부품에는 불순물이 조금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분의 표현대로 말하면 ‘신의 계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이분이 교세라를 세우고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신이 도와주고 싶어 할만큼 한결같이 일에 전념하게. 그러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분명 신은 손을 내밀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네.” 이러한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자세가 오늘의 교세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세라를 창업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당시 세계적인 컴퓨터 제조회사인 IBM으로부터 기존보다 성능이 월등히 높은 부품 제작을 주문 받았습니다. 다른 경쟁사들은 IBM이 제시한 기준의 부품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내저을 때 이분은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서 제품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후발주자요 신생기업이었던 교세라는 기술력이나 시설설비에 있어서 IBM이 요구하는 부품을 만들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수주 받은 20만개의 부품을 갖은 고생을 다해 만들고 시제품을 보냈지만 20만개의 제품 모두 불량이라는 도장이 찍힌 채 되돌아왔습니다. 사내의 분위기가 ‘더 이상은 무리다!’는 생각이 지배했습니다. 개발팀 직원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불가능한 과업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홀로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퇴근하기 전에 사무실을 둘러보던 때에,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젊은 기술자가 제품을 구워내는 화로 앞에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제품이 나오지 않고, 온갖 방책을 다 써봐도 소용이 없자 허탈감에 의기소침해서 울게 된 것입니다. 경영자로서 그는 직원을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이만 돌아가게나. 내일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위로했지만 그 직원은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자네, 제품을 만들며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나?” 생뚱맞게 느껴진 직원은 “네?”, 이분이 이어서 말합니다: “부품이 만들어지는 순간순간 ‘잘 구워지게 해주세요’ 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냐는 말일세.” 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는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는 퇴근하지 않고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고, 그 다음 날부터 기술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차례차례 해결해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경쟁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IBM이 요구하던 높은 수준의 부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분이 책에서 자신이 우연히 그 직원에게 던진 말,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냐”는 말을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 이제는 신께 빌며 천명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자신할 만큼,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는가? 몸이 부서질 만큼 제품 하나하나에 영혼이 스며들게 했는가? 그렇게 까지 강렬하게 염원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을 때, 비로소 신이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다네.”
이분은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과 일본인 특유의 다신교적 종교성을 가지고서 일에 임하는 분입니다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준다고 생각됩니다. 기도는 손쉬운 해결책이 아닙니다. 특별히 간절한 기도는 자신의 힘을 다해 수고한 끝에 한계에 도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나오는 게 바로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본인 자신이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하고 한계를 절감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원하는 기도 응답을 받으면 기도해주신 덕분이라고 감사의 말을 합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응답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기도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든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말씀합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로마서 8장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기도하는, 우리를 위한 간구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도록 드리는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여러 가지 인생의 어려움, 곧 ‘현재의 고난’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효력 있게 역사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반면에,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지난 주일부터 살펴보기 시작한 요한복음 17장은 교회 전통에서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드린 간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핵심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뚜렷한 정체성, 말씀 받고 형성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속한, 그러나 세상에 파송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의 일관된 내용은 제자들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그러나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도록 드리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무엇일까를 추측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 그러니까 코스모스, 창조주를 반역하고 돌아서서 자체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세상에 속했던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 말씀을 받게 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들 곧 성도, 거룩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그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이 얼마나 우리를 미워하겠습니까. 자신의 소유물이 탈취당하고 빼앗김으로 인해서 우리를 향한 적대감과 미움이 생겨난 것이겠죠. 이미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고 세상이 칭찬해주고 박수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움과 박해와 소외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해질수록 그리합니다.
이어지는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들림으로써 세상을 떠나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그대로 남아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나가야 것이니까 분명하고 뚜렷한 정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서, 특별히 세상에 파송 받아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세상에서 살아가고 세상을 향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 우려가 되는 것이 세상에 동화되고 세상에 빠져버리고 세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도 거의 같은 간구가 실려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보다 적극적인 기도가 이어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악에 빠지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닮아가지 않는 소극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거룩하다는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상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려진 상태, 하나님이 점령한 상태,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점 지워지고 하나님으로 가득채워져 있는 상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해지려면 진리의 말씀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면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과 달라지고 우리 안의 세상이 점점 지워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짐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보다 뚜렷한 정체성,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소속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성도로서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거룩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거룩해지는 비결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실천하고 말씀 붙들고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점 거룩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으로 빚어져가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것이고,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바라보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충만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닮아가는 것이죠. 특별히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붙잡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배가 중요하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과 동행함이 곧 우리의 구원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더욱 거룩에 힘쓰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속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세상에서 할 일 곧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냄 받기 위해 오늘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것도 거룩한 능력을 덧입기 위함인데, 세상에 가서 살아야하니까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거룩한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세상의 미움도 받고 박해도 받고 손해도 겪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세상에 있으니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이신, 성육신하여서 이땅에 오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를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보내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 받고, 또한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난 주일 설교처럼 세상 권세보다는 영생이요, 영생보다는 하나님 앎이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즉 그가 보내신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와 사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영생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와 관계와 친밀한 사귐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우리가 동참하여 이를 영원토록 지속하는 것, 이것이 영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목적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또한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의 속성으로 채워진 것, 하나님과 연합한 것!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 세상에서 건짐받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것,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특별히 강조되는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가 구체적인 세상 한복판에 삶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서 살다보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말씀의 원리가 삶에 구현되었는지, 우리 또한 말씀의 성육신 신학대로 들은 말씀을 세상에서 살아냈는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예배 후에 다시 세상에 보냄을 받고 파송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라고 파송받는 것입니까? 우선 살라고, 거기서 일하라고 파송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의 새창조에 기여하는 것이라야 마지막 심판의 불, 곧 정화의 불을 통과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쌓은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공든 탑이라고 해도 불에 타서 없어질 지푸라기로 지어진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파송받는 것은 세상에서 살라고 세상에서 일하며 살라는 것이요,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새창조에 이바지하는 일일 것입니다. 상거래를 하든, 남의 수하에서 일을 하든, 아니면 기업을 운영하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기업 이윤을 위해서 기여하든, 가정에서 주부로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헌신하든, 아니면 저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목양하든 어떠한 일을 하든 오늘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일본의 기업가가 늘 일을 하면서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나 열정과 자세, 그것보다 더욱 큰 능력을 우리는 할 수 있는 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움과 능력을 우리는 의지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자주 듣고 마음속에 담고 몸에 익히고 말씀의 원리가 성육신되어서, 다시 말해서 육화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간절한 기도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가능한 것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서 치열한 열정과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 후에야 진정 간절한 기도가 가능해지는 이치를 깨닫고 세상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치열하게 사시기를, 그럼으로써 삶이 간절한 기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최선의 노력을 다해! 결과는 내가 책임져줄게!” 이것이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힘을 얻고,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적실할 것인지를 믿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치열하게 성실하게 세상에 나아가서 일하시고 살아가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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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63장
▶성시교독 - 96. 어린이 주일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80장
▶기도 - 배태열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7장 1~5절
▶설교 - 영생과 권세
▶찬송 - 433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5월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4)
영생과 권세 (요 17장 1-5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흔히 ‘대제사장의 기도’라 불리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서 제자들을 위해서, 이뿐 아니라 오고 오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들림으로써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서 원래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심으로 죽기까지 온전히 복종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자신이 영화롭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화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통해 또한 아버지께서도 영화롭게 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 중간에 들어있는 2절과 3절은 아들에게 주신 권세와 그 권세를 주신 목적이 영생인데, 또한 영생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셔서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왕도 아닌,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만민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만민 통치를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짐으로써, 십자가에서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살을 나누어주고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 누구에게라도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 전 협약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협약을 맺었는데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아들은 그 권세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종노릇으로써, 즉 자기를 비우는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곧 내려놓으심으로써 세상 통치가 전혀 이루어내지 못한 영생을 만민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통치자에게 권력이 주어진 목적이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생명을 증진시키는데 있는데, 세상 권력자들은 권력을 쥐고 누리려고만 했지 그 권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희생과 나눔을 한 사람도 이루어내지 못했는데, 참된 왕, 유일하신 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으로써 영생을 선물로 주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같은 사상을 오늘 요한복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서술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협약을 맺어서 이미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서 빌립보서 2장에서는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고 서술하고 있는 듯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과업을 이루셨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을 읽지는 않겠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겸손하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사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그 결과로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과 같은 사상을 말씀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 창세 전에 결정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서 빌립보서는 십자가 복종 이후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유의 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세워서 권세를 주고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서 희생하고 나눔으로써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땅에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요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조그만 권세라도 주어졌다면, 어떤 지위라도 주어졌다면, 어떤 권한이 주어졌다면, 어떤 직분이 주어졌다면, 어떤 책임이 주어졌다면, 영향을 미칠 사람이 몇이라도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주신 목적이 그들의 영생입니다. 생명을 증진시키라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만민 통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맡기신 영혼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해서 영생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려면 우리의 희생과 헌신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이 필요한 법입니다.
김옥라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감리교의 여성 장로님이십니다. 1918년생이니까 올해로 103세십니다. 이분이 최근에 CBS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서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의 막내 아들이 65세인데 막내 아들보다 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젊어 보였고, 굉장히 건강하고 말씀도 잘하셨습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건강 비결을 물으니 감사하게 사는 것, 몸을 계속 움직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독특한 삶을 한 평생을 전쟁을 몸소 겪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만주사변을 겪었고, 대학시절은 일본에 유학가서 사셨는데 한참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남자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여자는 당시 대학생으로서 전쟁 물자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전쟁국가에서 군수 물자를 만들기도 했고, 일본에서 원자탄이 떨어진 것도 경험했습니다. 돌아와서는 결혼하고는 곧 한국전쟁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처럼 이분의 삶에는 생명보다는 죽음이, 온통 전쟁의 고통과 죽음을 머리에 이고 가까이 두고 사셨던 것입니다. 이분이 1981년에 세계여성감리교여성연합회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후보에 올랐지만 계속 거절했다고 합니다. 본인은 영어도 잘 못하고 세계 회장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이죠. 그러나 선출이 되었습니다. 얼떨결에 회장에 당선된 것입니다. 당선되고서 단상에 올라와서 소감을 말하라고 했는데, 준비되 되어있지 않고 당황도 돼서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서 보니 세계 각국에서 온 여성 회원 300여명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던 차에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한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너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그 구절을 말하고서 나는 이것밖에 지금은 할말이 없다고 말하고 내려왔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 대회가 하와이에서 열렸는데 대회 후에 미국 LA에 사는 아들 집으로 곧바로 갔습니다. 성경책을 펴놓고 밥 세끼 주는 것 먹는 것 외에는 그 방에서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회장 자격이 없는데 왜 저를 세계 회장 시켰나요? 하나님 무슨 목적이 있으신가요? 무슨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열흘 되던 날, 하나님이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칠판이 보이고 그 칠판에 자신의 일생, 그때 이분이 60여세였는데, 그동안의 산 일생을 적어놓은 칠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이어지기를, “지금까지 세계 회장은 유럽이나 미국 사람만 했다, 그러나 너는 한국사람으로서 여러 전쟁을 겪었고 전쟁통에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전쟁을 겪고 고통을 겪는 여성들이 세계에는 많이 있다. 네 경험을 세계 여성에게 알려주고 전쟁 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말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응답을 받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서 감리교여성회 본부가 있는 뉴욕에 가서 열심히 해서 그 단체를 유엔 NGO에 가입시켜서 임기동안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여선교회가 총 70여국에 조직돼 있는데 이중 40개국을 방문해서 귀한 간증과 하나님의 역사를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말이 전쟁이지 국가간에 합법적으로 사람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한국전쟁 때도 한 300만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죽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전쟁터인데, 그러한 전쟁을 여러차례 몸소 겪은 여인을 하나님께서 들어쓰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분에게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었던 남편이 1990년에 질병 치료 차 일본으로 가서 수술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장례를 치루고도 "죽음이 무엇이길래"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앉아있는데 자신이 땅속으로 쭉 내려가는 기분, 몸이 땅에 쑥 꺼지는 느낌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은 다 죽는데 이 죽음을 탁상에 올려놓고 공론에 부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나서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의논하려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의 목적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죽음 준비 교육을 하라고, 믿음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의 슬픔을 치유하라고 만들게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분은 김수환추기경의 말로 대답했습니다. “관문을 넘는 것이 죽음이다. 관문을 넘은 뒤에 일은 그 다음은 읽어보지 않은 책과 같다” 그 후의 일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관문은 우리가 넘고 그 다음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생각하니 죽음이 무섭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고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전쟁으로 인한 고난뿐이었고, 그 고난도 생명의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장수의 축복을 주신 이유를 묻자, 본인도 많이 생각하기를 ‘왜 나한테 장소의 축복을 주셨을까?’ 자신도 하나님께 묻는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오래 살게 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데 무슨 뜻이 있냐고 하나님께 종종 묻는데, 요새 깨달은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하나님을 더 알라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즐거움으로 지내고 계십니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을 합니다. 성경을 좀더 깊이 알라고 이 시간을 연장시켜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꿀송이보다 단 말씀!
이분은 전쟁통에서 살아왔는데 전쟁을 겪은 그것이 곧 그의 사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명은 생명을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났고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가, 감리교여성회장으로서! 예수님의 사명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이유도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영생으로 이끌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심은,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죽음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고 증언하고,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절은 2절과 같은 문법 구조입니다.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은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이라고 2절에서 말씀하였고 3절에서는 영생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권세보다 영생이요 영생보다 하나님 앎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즉 보내고 보냄 받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아는 것,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보냄 받은 그리스도는 보내신 분과 완전히 일치되어서 하나로 움직이셨고, 온전히 복종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이땅에 보냄을 받은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관계를 알고 그 관계에 동참하는 바로 거기에 영생이 있고, 영생을 주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란 영원토록 사는 것이라기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주어지는 게 바로 우리의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영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귐과 연합과 하나됨을 알게 하고 우리로 그 하나됨에 동참하게 하려고 영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냄 받은 예수님은 만민 통치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살과 피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러한 희생으로써, 만민을 영생으로 이끄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위해서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권세와 권한과 장점과 지위와 관계 등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증진시키는데 헌신해야 할,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우리의 최우선적 열정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우리가 예수 믿어 예수님과 하나 되어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아들은 보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아버지에게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명을 이루는 삶 곧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삶에 헌신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맡기신 사명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희생과 나눔을 통해서 영혼 살리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세보다 영생, 영생보다 하나님 앎,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아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고, 아들의 온전한 복종과 희생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와 보냄 받은 아들을 알기 위해서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들의 순종,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속적 관심에 사로잡혀서, 그리고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권세를 제일로 좋아합니다. 권세 얻기를 원하고 지위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권세가 목적이 아니라 지위가 목적이 아니라 이것들은 수단이요, 이것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야 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영생, 사람들의 생명 증진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려면 십자가를 지려는 희생적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속적이지 않고 경건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세속 권세보다도 오히려 내세의 생명이나 영생을 더욱 원합니다. 그래서 영생 얻기를 원하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하면서 내세에서도 안전한 생명을 이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생 자체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앎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주님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심지어 사망조차 끊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생명력! 이 생명을 좌절시키고 실망시키고 실족시키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여하튼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이를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고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영생을 주신 목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더욱 알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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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2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3)
조금 있으면 (요 16장 16-24절)
한수산이라는 소설가가 쓴 산문집을 보니까 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이후드>라는 영화인데요 한 소년의 성장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주인공 소년이 홀로서기를 위해서 집을 떠나려 합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여러 이유로 고단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분인데 곁에 있던 아들마저 자신을 떠나 이제 집을 나가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어머니가 내뱉는 말입니다: ‘나에게 이제 남은 건 내 장례식밖에 없구나’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이 대답합니다: “엄마는 왜 40년을 앞당기고 그러세요.” 나이를 보면 앞으로도 4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겠죠. 마지막 대사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큰 소리로 외치는 말입니다: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앞에 놓인 인생길에 뭐가 더 있을 줄 알고 계속 걸어왔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별 것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겠죠.
내일이나 내년에는 뭔가 더 달라지고 뭔가가 더 있을 줄 알고 달려온 인생인데 막상 와보니 별 것 없더라는 거죠. 오랜 인생 끝에 인생의 뒤안길에서 허망하게 뒤돌아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바로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 생애 가운데서 이 말은 아마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이 뭔가가 더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함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될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고서 다시 이땅으로 돌아온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했으나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둔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죽음과 더불어 부활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내일이면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기에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테지만 또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때 제자들은 기뻐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하고서는 깊은 근심과 절망에 빠지겠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서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메시야의 고난과 이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을 여자의 해산하는 과정으로 비유하십니다. 해산을 앞둔 산모의 심정은 근심이요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해산의 진통을 겪고서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말미암아 해산의 고통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해산의 고통으로 출생한 옥동자와 같은 자녀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22절에서 재차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근심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마음에서 벗어나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으로 인해 근심,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앞에 있게 됨으로 인한 기쁨,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요, 제자들이 곧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러니까 근심과 기쁨, 이것이 임종을 앞두고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 때문에, 임종을 앞두고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근심뿐이겠지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의로우신 재판관이 입혀주실 의의 옷,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김범석이라는 서울대학병원 종양내과 의사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많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암병원의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물었습니다. 이분이 일하는 병원에는 임종방이 있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이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1인실을 개조한 방인데 거기에는 스피커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끝까지 남는 것이 청각인데 죽음을 앞둔 환자라도 들으실 수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라 당부를 하고,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으라고 스피커를 둔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 느끼면서 임종을 맞이하라는 것이죠. 어느 날 한 임종방을 들어섰는데 스피커에서 계속 트로트가 나와서 의아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트롯트 ‘땡뻘’이라는 노래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좀 이상했습니다. 굉장히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가 나는 노래인데, 꼭 이런 음악을 틀어놓은 이유가 있나, 속으로 생각해보았답니다. 이 환자는 30년 동안 영세 양말공장을 운영하시고 직접 양말을 만드셨고, 이 일로 자녀 셋을 부양해서 공부시키고 박사까지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평소 트롯트를 좋아해서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일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서 들려오는 '땡뻘' 가사를 들으니 땡뻘 가사가 그토록 슬픈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뻘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뻘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나 추워요" 노래 가사를 듣고 환자를 보니 그분이 오랫동안 지치신 것 같아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양말공장 운영하면서 얼마나 지쳤을까,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가시는 길이 춥게 느껴졌습니다. 고단했던 환자분의 삶이 눈에 잡힌 것입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된 인생길에 지치고 게다가 오랜 투병생활에 더욱 지치고 그런 모습으로 죽음 앞에 서있는 환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임종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게 삶의 현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물론 여느 사람들처럼 근심으로 맞이하겠으나 죽음 후에는 근심이 기쁨으로 급격히 변화될 것을 믿고 소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분이 1926년 생이니까 올해로 95세이신데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하고서 낸 책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둔 노 신학자가 죽음에 대한 생각과 영생의 소망에 대해서 쓴 얇은 신학책입니다. 이분은 아마 20세기에 신학계와 많은 목회자들에게 저술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분 중의 한 분일 것입니다. 이분이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내고서 일약 세계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그 이후에도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좋은 영향을 준 분입니다. 물론 여느 독일 신학자처럼 성경비평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정통파 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복음주의권 교회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내용을 많이 말한 분입니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놀란 것은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성도가 죽으면 몸은 부활하기까지 해체와 부패의 과정을 거치고 영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 품안에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는 종말의 끝에 성도의 이름을 부를 때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덧입게 될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몸의 부활을 바로 경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근거 사례로 제시한 것에서 성경적 근거는 미흡하였지만 여러 신학자들의 발언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가령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1945년 4월 9일에 나치의 한 수용소에서 처형되기 위해 끌려나갔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서 작별했는데요, “이것은 마지막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는 말도 인용하고,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말, “눈을 뜨는 즉시 당신은 부활할 것입니다.” 루터는 성도가 죽고 나면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을 터인데 예수님이 부활시켜주실 때 바로 눈을 뜨고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루터의 말을 더 인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 계산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천년도 마치 하루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첫 인간 아담은 마지막 날 이전에 태어난 인간과 동일하게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길이에 따라서 시간을 보시지 않고 시간을 가로질러 보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단 한 번에 일어났다.” 이 노 신학자가 보시기에 신학에서 소위 ‘중간상태’ 이론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고찰해보면 옳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분의 주장을 접하고 제가 좀 놀랐던 것은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설교하면서도 종종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한 것인데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도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시간 경험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시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입니다. 그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인데요,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시공간 내에서 경험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영원한 현재와 같은, 빛되신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죽음 직후에 곧바로 부활의 몸을 입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 개념에 따라 그렇게 사변을 해본 것이죠. 맞을 수도 있고 맞이 않을 수도 있는데, 하여튼 죽음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 성경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관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이 별로 의미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오늘 주어진 말씀을 ‘조금 있으면’ 다 좋아질 거라고, 비록 지금은 근심이 가득하지만 이제 곧 이어서 얼마 안돼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거라고 설교하고 싶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배격했던 평안이 없으면서도 다 잘 될 거야, 평안할 거야, 라고 선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에 부합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본인에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실은 근심의 때가 있는가 하면 기쁨의 때가 있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러한 것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병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진실에 부합할 듯합니다.
전도서 3장에서 지혜자는 인생의 다양한 때를 말합니다. 가령 기쁠 때와 슬플 때를 말합니다. 다양한 인생의 때를 말하고서 전도서 3장 11절에서 전도자는 소위 ‘영원한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물론 사람이 답답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어느 때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것이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는 확신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말씀은 세상만사의 기한과 때에 대한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구약학자는 이 구절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 구절을 좀 쉽게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달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해 아래 세상에서 살면서도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라고 조금 아쉽고 조금 안타까워도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가 되면 아름답게 되도록 다듬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해설은 구약학자 왕대일의 전도서 강해책에서 그대로 발췌한 내용임을 알립니다)
우리 인생에는 어제의 근심이 있더라도 오늘에는 기쁨이 찾아올 수 있고 또 내일에는 다시 근심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무쌍, 예측불가의 인생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근심할지라도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기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비결,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뵈올 때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근심을 벗어나 기쁨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뵈올 때입니다.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오늘처럼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뵈옵는 것이 바로 예배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본문 23-24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뵈옵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뵐 때 우리는 근심이 사라지고 근심이 오히려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구하는 것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더욱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순간에 ‘조금 있으면’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지금은 근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예배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뵈옵는 자리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때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뵈옵는 것이요,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받게 될 것임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뵈옵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