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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3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8)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2) (요 19장 1-16절)
지난 시간에 이어서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빌라도가 진리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 고뇌했고, 고뇌의 결과 진리와 양심을 따르려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유대인의 압력과 여론의 요청, 그러니까 로마의 총독으로서 식민지 국가인 유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려면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듯 이것도 만족시키고 저것도 충족시키려는 분주한 빌라도의 움직임이 로마 총독 관정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유대인과 관정에서 심문 받고 있는 예수님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빌라도의 모습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에 비해서 참으로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세상’의 전형적인 예,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정확하게는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상의 대표자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리이시죠.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만약 더럽혀지면 정상적으로 유월절 절기에 참여할 수 없는 곤란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기를 꺼린 것입니다. 세심하게 유월절에 더렵혀지지 않으려는 세상의 대표자들인 유대인들은 그러나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예수님을 오가며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타협하고 절충해보고자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에게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은 가차없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b). 예수님은 보다 분명한 입장과 요청하시는 겁니다. 진리에 속할 것을 도전하시는 겁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빌라도가 심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양심에 오히려 도전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따라 올바른 판단과 판결을 해야할 것 아니냐, 언제까지 세상과 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려느냐, 양심을 따라 양심에 확신하는 바에 거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에 속한 자는 나의 도전을 받고 응전하고 내 음성을 듣느니라, 이렇게 빌라도를 도전하고 계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무죄석방!’, ‘고발 근거 없음!’ 판결을 내리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세상의 만만치 않은 유혹, 그것은 바로 빌라도에게는 식민통치의 관리자요 통치자인 그의 지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민중이 그를 따르고 유대의 종교와 정치 실력자들의 지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뚜렷한 입장, 곧 진리에 속할 것을 요청하는 예수님의 도전에 대해서 빌라도는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꼼수가 유월절 명절이 되면 특별사면 형식으로 죄수를 석방하는 전례였습니다. 명백한 범죄자로 인정되는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후보로 올려놓고 누구를 석방하면 좋겠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라도는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든 석방시키려고 했던 빌라도가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명한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예수님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서 대중들의 십자가형 요청을 무마시키려는 꼼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죄목을 씌우려는 유대인들에게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고발이 근거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보이고, 아울러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완악한 마음을 꺾고 예수님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만족시키고 자신의 양심의 부담도 덜어내려는 양다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이고서 빌라도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9:4b)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빌라도의 노력이 실패합니다. 유대인들은 더욱 강경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빌라도 또한 그럴 수 없다고 맞섭니다. 그럴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대답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전략을 바꿉니다. 빌라도로 하여금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또다른 논리를 들이댑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런 죄목을 씌운 이유가 로마법에 따라 반란자로 규정돼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것이 통하지 않자 유대인들에게 있는 고유한 법과 관습을 들어서 빌라도를 압박하려고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자신들 고유의 종교법에 따르면 이 예수가 신성모독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방불한 신적 존재임을 주장하므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으므로 우리 종교법에 따르면 이러한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빌라도는 받아들입니다. 빌라도에게 꽂힌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혔던 세속적 로마인이었던 빌라도, 여느 로마 관리들처럼 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반신반인, 반절은 하나님이고 반절은 인간인 신인(神人), 그리스 신화에 자주 나오고 로마 신화에도 나오는 그러한 신인이 아닐까, 혹시 아닐까라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만약 그러한 분이시라면, 안그래도 심문할 때 보여지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 그리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도전해오는 듯한 말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대인들의 표현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신성모독을 표현하려고 했던 반면에 받아들이는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채찍질 행동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면하고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혹시 신적인 기원이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너는 어디로부터냐?”(9절)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에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던 빌라도, 세상과 진리를 절충해보고자 노력 하던 빌라도, 법대로 판결이라는 진리에 입각하고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한편의 주장과 다른 한편의 주장, 세상의 요구와 압력과 유혹이 제시하는 여론의 지지와 효율적인 통치와 유대 실력자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그의 노력이 결국에는 세상에 굴복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노회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꺼낸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유대 고유의 관습법, 종교법을 존중하여 예수를 사형에 처할 것을 호소했으나 빌라도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다시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로마 황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사람을 죄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 석방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의 충신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은근한 압력이요 협박입니다.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직역하면 ‘가이사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가 만약 로마 황제를 대항해서 반역한 ‘유대인의 왕’을 석방시켰다, 하는 말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당신 자리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은근히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 당국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전형적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황제를 대항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는지,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등은 따져물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를 왕이라 했다고 단정하고서 그러한 사람을 풀어주면 당신 역시 로마 황제의 반역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비약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이 주장이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들어가면 의심 많은 황제였던 그는 빌라도에 대한 신임을 거둬들일 수도 있는 폭발력 있는 이슈를 지금 유대인들이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거듭 끈질기게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흔들립니다. 만약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상소를 올리면 빌라도 자신의 입지와 위상과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빌라도는 결국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빌라도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가형을 내리려고 정식적으로 재판석에 앉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너희 왕이로다”(14절)고 말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청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완전히 세상입니다. 세상으로서 그들은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므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라고 보여주고자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받게 하려고 했고 결국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그들이 섬김다고 생각했던 참되고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유대인의 참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고 그렇게 고백했던 그들이 자기들에게 참된 왕은 로마 황제 가이사뿐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참 끈질기게 우리를 뒤쫓고 우리를 따라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육박전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맨몸으로 맞붙어 싸워야 합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절충해보고자 했으나, 어찌보면 끝까지 양심에 따라 진리에 따라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세상이 가한 일격을 맞고 결국 세상에 굴복합니다. 자신의 입지, 자신의 위상,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달라야겠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주신 구원자요 통치자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빌라도의 선택이 아니라 고뇌와 갈등 속에서 악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냐 예수님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상이나 입지나 이익이냐 아니면 양심과 진리에 따라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세상은 그러나 참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옵니다. 죄는 참 끈적끈적하게 우리에게 달라붙으려고 합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묘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가 지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선택하여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양심에 옳다고 확신한 바를 여러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흐름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자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22-23절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고 신념이 있고 회복된 양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양심과 신념과 원칙에 따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꺼려지지만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마지못한 망설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려놓을 수 없는 위상과 지위 때문에 결국 믿음과 신념과 확신과 양심을 저버리고 행동하는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빌라도처럼 실패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과 압력에 직면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믿음을 따라 선택하며 행동할 수 있을까요? 손해보더라도 진리를 따라 양심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지위와 위상과 권한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굴복하고 진리를 저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겠죠. 언제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하겠죠.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선택해야겠죠, 예수님 때문이라면 희생도 해야 하고 손해도 보아야 하고 양보도 해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직면한 빌라도, 결국 세상을 선택하는 빌라도와 다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온전히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의 판단을 주님이 저울에 재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세상에 속했다, 아니면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게 예수님께 혹은 진리에 속한 자들임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믿게 될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이유를 우리는 빌라도의 사례를 통해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도 세상 한복판에 임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감추어질 수 없는 산 위에 있는 동네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저들을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거룩한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서 거룩한 자녀답게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들어간 교회 곧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하나가 된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에 동참해서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서 세상과 마주서서 세상에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붙들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알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진리의 증언이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고 양심을 따라 행동하므로 예수님께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는 자임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씨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입증하시고 승리하시는,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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