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1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굳게 믿지 아니하면 (사 7장 1-9절)
믿음을 지키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찌보면 교회의 민낯을 보았다고 할까요, 거기에는 오해도 있고 언론에서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도 분명 있지만, 신앙생활이란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우리로 고민하게 합니다. 코로나가 다시 수도권에서 4차 유행에 접어들었고,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합니다. 수도권의 교회들은 현장에서 예배가 극히 제한되었고, 작년에 우리 교회도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울러 국민 중 종교가 없는 인구가 60%에 이르렀고, 많은 국민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찬사를 받기보다 별종 취급을 받고 있고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인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수도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전체 인구 중 15%선도 곧 붕괴되리라 예측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도 각 개인의 삶에서 여러 가지 위기와 어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언제나 그랬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쉽게 느껴질 만한 상황도 제법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안팎의 여러 위협과 위기 가운데서 성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전부 들어간 전 인격적인 결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을 절대자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격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기쁜 소식과 성경 교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요, 매일의 삶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뢰요 동의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 동의, 의지가 제가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7장 본문은 유다왕 아하스왕 초기에 있었던 선지자 이사야와 아하스왕 사이의 대화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이 왕이 되자마자 아람(시리아 혹은 수리아)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유다 아하스왕의 통치 초기에 북이스라엘 베가왕과 아람 르신왕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쳤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남하하는 앗수를 제국의 위협에 맞서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는데, 유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스왕을 폐위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공격해온 것입니댜. 이러한 위태한 상황에서 아하스왕은 두려움으로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렸고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마음 상태가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왕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왕이 자신들과 연합하여 반앗수르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아하스왕이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자 그를 제거하고 대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유다가 크게 불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계속 불에 탈 수도 없고 단지 연기만 조금 내는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영장의 모닥불이 꺼진 뒤 불가에 남아있는 다 타버린 통나무 끄트머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나무는 연기를 계속 피우지만 그곳에는 참 불길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외부 세력의 위협 앞에서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하는데 우리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두려워서 떠는 아하스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고 말씀해주셨듯이 동일한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보다 앗수르에 의존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앗수르 동맹에 의지하여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 7-8절에 보면,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어려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도움만이 진정한 도움임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구하기보다 더 손쉬운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본문 7-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모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유다왕 아하스를 안심시킵니다. 아울러 아람의 핵심은 수도 다메섹에 있고, 다메섹의 핵심은 왕 르신에게 있고, 에브라임의 핵심은 사마리아에 있고, 사마리아의 핵심은 왕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왕을 세우고 폐위하는 권한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라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이 이미 이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겠죠. 그리고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만약 아하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만약 그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임박한 상황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고요한 확신 속에서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믿음으로 굳게 설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믿는다’와 ‘굳게 선다’는 각각의 동사는 모두 믿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멘’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동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아멘’합니다만, ‘아멘’이 믿다라는 뜻의 ‘아만’에서 온 것입니다. ‘아만’은 원래 뜻이 어디어디에 토대를 두는, 확고한 토대를 두는 것으로서 믿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안에 확고히 서있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고 붙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굳게 믿는다’는 동사는 ‘아만’의 강조형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라는 뜻을 강조했다는 의미로 ‘굳게 믿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만’ 자체도 굳건한 토대, 확고한 토대를 두니까 믿는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더 강조해서 굳게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굳게 선다’는 ‘아만’ 동사의 수동형태입니다. 굳게 믿지 못하면 확립되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그래서 굳게 설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단단히 유지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굳게 마음 먹고 믿음을 결단하지 못하면 흔들리고 요동치다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때때로 우리에게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굳게 서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때 믿음은 평상 시의 믿음과는 다른 단호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척박한 상황은 굳은 믿음을 요청합니다. 난세가 영웅을 불러오듯이 어려운 상황은 굳은 믿음을 필요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고 흐느적거리다가 쓰러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징표를 주시겠다는 것이니, 그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징표를 붙잡고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 이사야 7장 11-1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왕에게 믿음을 굳게 세워주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있는 듯이 경건한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조를 구하지 않는 명분으로 자신이 마치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는 쪽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조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한 것은 그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편이 더욱 유리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징조 구하기를 거절한 아하스왕을 책망하면서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란 너무나 유명한 이사야 7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했습니다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징조’를 약속하심으로써 아하스왕이 믿음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곧 한 여인이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인데, 아마 이 아들은 아하스에게 주실 아들일 것입니다만, 이름을 임나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뜻으로 이름지으면, 그 아이가 크기 전에 얼마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지금 아하스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6절입니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하스왕은 앗수르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왕이 도모하는 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고, 얼마 못돼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니까 이로써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심을 알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주신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징조는 비단 아하스왕에게만 주신 징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으로서 이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이땅에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실 것임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굳게 설 수 있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사람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돈을, 또 건강을,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고 우리가 설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믿음은 독생자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9·11 테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관, 소방관,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총동원됐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흙더미를 헤쳤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던 중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손 하나가 나왔습니다.
워낙 많은 시체가 있었기 때문에 손 하나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형상을 본 구조대원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어가면서 무엇이 그렇게도 소중하기에 끝까지 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잘라진 굳은 손가락을 펴보았더니 거기엔 다름 아닌 어린 아이의 작은 손이 들어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의 손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그 손을 붙잡고 있다가 함께 잘려진 것입니다.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 집행 전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르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1서 4장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주시며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다. (국민일보에서 발췌)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징조로 삼아 끝까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굳게 서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186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