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 입금하실 때 이름+헌금종류를 기재해 주세요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621장 ▶성시교독 - 37. 시편 91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82장 ▶기도 - 김영택 장로 ▶성경봉독 - 열왕기하 13장 14~19절 ▶설교 -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찬송 - 490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9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왕하 13:14-19)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대개는 화목한 가정, 안정된 직장, 건강한 신체, 즐거운 경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 일의 보람 등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Very Good, A+인생이라고 할 만 합니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좋은 인생이란 대개 두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행복(쾌락)과 의미(가치)입니다. 행복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행복과는 달리 의미 혹은 가치는 사회 봉사, 환경 활동, 섬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 등, 참 의미있게 여겨지는 삶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내가 만족한다고 참된 만족이 있는 게 아니라 활동들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때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이 두 축에 끼어든 제3의 '좋은 삶'을 어떤 심리학 교수분들이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풍요', 곧 마음이 풍요로운 삶입니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예를 들어,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커리어(경력)을 쌓는 것, 도전적인 예술에 몰입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학습), 창작해보기 등은 심리적 풍요를 더해주는 경험이 됩니다. 고난이나 역경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이로써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깐은 부정적인 감정이 남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도움이 되는 경험이 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변화무쌍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죠.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통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세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를 경우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1등은 행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약 70%, 2등과 3등은 거의 비슷한데요, 2등은 심리적 풍요(16%),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삶(14%)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분명 심리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는 심리적 풍요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앙만큼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해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되고, 세상을 향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어서 헛된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탐닉을 그치고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심리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위 연구자들의 결론입니다: "심리적 풍요는 우리가 일상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와 함께,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준다." (한겨레신문 2021.9.8.) 개인적으로 심리적 풍요가 충만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를 볼 때에, 저 멀리 솟아있는 산을 볼 때에, 점점 푸르러지고 높아지는 초가을의 하늘을 볼 때에, 아니면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를 만날 때에,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에, 가족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을 지닐 때에, 어려운 일이라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성취의 기쁨을 누릴 때에, 가슴을 적시는 어떤 글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때에,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렇듯 새로운 계절에 들어설 때에, 이 모든 삶의 활동, 일상의 활동, 일상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심리적으로 풍요로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심리적 풍요가 곧 일상을 충만하게,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평가 잣대가 되는 것이죠.
심리적 풍요란 내 안의 감정의 풍요, 정서의 풍성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깊은 슬픔으로, 기쁨도 벅찬 환희로, 사랑도 뜨거운 사랑으로, 연민도 손발의 도움으로 구체화되는 활동으로,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에서 고강도로 펼쳐짐으로 인해서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연구한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구약학자는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성령의 불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로써 성령은 우리를 태우시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불꽃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더럽고 허무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의 불꽃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주십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 나눌 말씀입니다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말 그대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의 강렬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은 우리의 마음의 그만그만함입니다. 그저 그런 마음의 온도를 성령님은 싫어하십니다. 성령의 불로 타오르든지 아니면 말든지!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서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할 때 바로 그점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참으로 무서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고강도의 감정이 내 마음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예배하는 마음이 뜨겁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이 뜨겁고, 기도할 때 마음이 뜨겁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뜨거운 것입니다. 정열,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이 짙게 배어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나이가 많이 들고 병에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요아스가 문병왔습니다. 요아스왕은 엘리사를 보자마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의 위협으로 인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와 지혜와 영감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숱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사였기에 왕조차도 “내 아버지여”라고 그를 불렀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웬만한 국방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아스왕의 아버지였던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의 공격을 받고 북이스라엘이 항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의 국방력을 축소시켜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명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는데, 선대왕의 초라한 국방력을 아들 요아스왕이 그대로 계승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아스왕에게 선지자 엘리사라는 존재는 진정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요아스왕의 눈물은 진심어린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떠나게 된다면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챈 엘리사는 어찌보면 자신의 떠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알려주기 원했던 듯합니다. 엘리사가 떠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떠남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데, 과연 요아스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엘리사는 그점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요아스왕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인가’.
엘리사는 일종의 선지자적 예언 행동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고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엘리사는 요아스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활을 쥔 요아스왕의 손에다가 엘리사가 손을 얹고서 둘이 함께 동쪽으로 난 창을 열고 그곳으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예언적 행동을 하고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실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왕과 함께 동쪽을 향해 쏜 화살은 아람으로부터의 구원의 화살이요, 그 예언적 행동이 가리키는 내용은 요아스왕이 아람을 치되 멸절하기까지 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방금 읽은 17절과 이어지는 18-19절에서 ‘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나카’가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시면,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는 문장은 왕이 아람을 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멸절하도록’이라는 말은 ‘끝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강조되는 말은 ‘끝장을 볼 때까지’입니다. 아람을 진멸할 때까지 이스라엘이 치게 될 거라는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다. 현실에 비추면 일어나기가 불가능해보이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은 극소수로 제한돼 있고, 이제 엘리사마저 떠날 참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아람을 치되 진멸할 때까지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예언적 행동과 그 해석을 통해서 예언하기를 비록 엘리사 자신이 떠나도 요아스왕을 통해서 아람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아스왕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요아스왕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철저한 승리를 믿고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엘리사는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의 근엄함과 무게감을 갖추고서 이 행동과 예언을 주면서 이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요아스왕이 깊이 숙고해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아마 시험일 겁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엘리사는 요아스로 하여금 또다른 화살들을 집게끔 하고서 그 화살로 땅을 내리치라고 명령합니다. ‘땅을 치소소’에 또 히브리어 ‘나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아까 함께 행했던 예언적 행동과 그 의미를 이미 설명했던 엘리사는 요아스왕이 그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고 순종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 아까 사용했던 동사를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 후 이번에는 ‘땅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요아스왕이 치게 될 ‘땅’은 아람 군대를 가리키고, 요아스왕이 예언의 말씀을 믿는다면 화살로 땅을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칠 것을 엘리사는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방금 전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단순히 말로만 동쪽에다가 활을 쏘라고 명령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요아스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함께 활을 쏘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떠나도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이 왕의 손을 통해서 아람을 치게 될 것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려는 선지자의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왕에게 부모처럼 가르쳐주려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화살로 땅을 치라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얹고 땅을 내리치는 게 아니라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으로 의도된 명령이며 시험임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내린 명령으로 보입니다. 요아스왕이 죽음 앞에 서있는 엘리사의 행동과 말의 무게를 헤아려본다면 그리고 엘리사의 행동에 담긴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그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요아스왕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 끄덕이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온전한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까? 땅 곧 아람 군대를 치되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화살이 부러질 때까지 아니면 여러차례 내리쳐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대와는 달리 요아스왕은 아마 힘없이 세 번 내리치고 맙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겠다는 표시로써 그 말씀처럼 화살을 땅에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쳐야 했는데 겨우 세 번은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친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화가 났습니다. 왕의 믿음의 부족, 왕의 행동을 그저 믿음의 부족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이란 삶을 통합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문제이면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아스왕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믿음으로써 삶이 통합되는 것이므로 결국 삶에 임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에 결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요아스왕이 충분히 많이 내리쳤더라면 방금 전에 전달한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아람을 치게 될 터였는데 왕이 세 번만 내리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제한하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요 특별히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감정적 풍요에 연결돼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켜줍니다. 그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그의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그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왕의 믿음의 부족이요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잔잔한 일들이요 거듭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이렇듯 잔잔한 일상에 고강도의 감정을 불어넣읍시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포기치 않으심,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운동력있는 활동하는 지식이요 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이란 결국 믿음의 삶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요 믿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왕과 엘리사는 참으로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사의 삶과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조차, 그를 꺾지 못하는 삶의 불꽃,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 왕에 대한 연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정! 반면에 요아스왕의 형식적 슬픔과, 자신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근시안적 시선, 영혼이 들어가지 못한 행동들, 안일함과 무감각!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인생을 그리고 일상을 그렇게 살아갑시다. 어떻게 살아가자는 겁니까? 열정적으로 뜨겁게! 적극적이되 간절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자연을 대할 때도, 인생을 대할 때도, 우정을 대할 때도, 이웃을 대할 때도, 일을 대할 때도, 기술을 연마할 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볼 때, 교제할 때, 전도할 때, 섬길 때,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것들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024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