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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2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7)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1) (요 18장 28-40절)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하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뚜렷한 교회다운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들어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속한 거룩성을 지닌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가 된 것같이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일체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뚜렷한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송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에 파송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이어야 하니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해져야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교회 문밖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뚜렷한 정체성 곧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 오늘 예배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세상에 나아가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점 줄어들고 축소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세상을 향한 사랑이 줄어들고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으로 충만은 결국 세상의 축소로 이어지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받게 될 준비가 마쳐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명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 자체로 세상에 충격을 주고 마주선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씨앗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세상에서 누룩처럼 퍼뜨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령당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아가도 선한 영향력이 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선택하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서, 즉 예수님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란 있을 수 없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물론 빌라도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식민통치하려고 로마 제국에서 파송한 총독입니다. 재판 심문 과정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지만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선택하게 되는 전형적인 한 예로 빌라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소위 유대인들과는 다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인 세상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진리를 회피하고 우회하려다가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다음주까지 두 번에 걸쳐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 그러나 결국 실패한 사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에 파송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세상에서도 선택하여야 하는데 진리에 대해 우물쭈물하거나 진리를 회피하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때 중립적으로 남아있으려 하나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굴복하게 된다는 생생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이루어야 할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로마법을 시행하고 법대로 판결을 내려야하는데 그렇다면 양심 상 예수님은 무죄인데, 그래서 무죄를 내려야만 하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압력과 시중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폭발력 있는 여론이 들끓 수도 있는 반란의 씨앗이 잠재된 폭풍 전야와도 같은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관리자요 통치자로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유대 당국자와 종교지도자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정치 사법 입법의 자치기구였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로마법상 합법적으로 사형, 특별히 식민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 십자가형을 내리려면 총독의 재판과 판결이 있어야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른 새벽에 총독 빌라도의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왔던 것입니다.
로마법상, 종교적인 이유로는 십자가형을 내릴 수 없기에 그들은 정치적인 반란범으로 예수를 몰고 가려고 로마 황제의 통치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내려준 분봉왕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가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로마 제국의 반란범이라는 고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제일 먼저 물었던 질문이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식민 통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려는 정책을 폈습니다. 특별히 식민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으면 종교적인 이유로 가령, 신성모독자에게 종교법을 시행하여 돌을 던져 죽이는 행위도 용인할 정도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월절이라는 절기였고 예수님은 이미 많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성전에서 공개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유대 종교지도자와의 첨예한 갈등을 빌라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도 로마 제국의 허락 없이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신성모독자로 투석형에 처하려고 하기보다 저주받은 자로서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 곧 로마제국의 법으로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데려온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이면서 다소 간접적인 대답은 본문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걸로 보면 자신이 왕임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인데 반해서, 그러나 분명하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알송달쏭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다시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이어지는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의 나라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보냄을 받은 분이고 이땅에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진리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주시는 진리요 이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빌라도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당시 유대인들도 오해했습니다. 세상 나라와의 경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메시야도 정치적인 왕으로서 메시야가 아닌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메시야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고유한 가치와 작동 원리와 특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나라의 것들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세상 관점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세상의 범주와 가치체계를 가지고 교회를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호주 시드니에서 목회하시는 윤치영목사님이라는 분이 나오셔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증했습니다. 이분이 2004년에 전도사 시절에 경험한 일인데요 자신이 섬기던 청소년 아이의 가정 문제 곧 자녀와 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다가 그만 현지 문화 차이로 인해서 구치소에 들어가고 재판 과정을 거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이 총 2년 동안이었습니다. 죄목은 여자 학생에 대해서 납치, 강도, 폭행이었습니다. 현지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는데 목회자가 교회에 데려가려고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거짓 뉴스였습니다. 목회자이니까 감옥에서도 성경을 읽고 같은 방에 있게 된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많은 죄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다는 원통함이 풀리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쌓여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는 앞으로 하나님의 ‘하’자도 부르지 않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로 원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왜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는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감옥에 나와서 깨닫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분이 원래 믿는 집안 4대째 믿는 집안에서 목회자가 되었고, 호주장로교회가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이분의 증조할머니가 거의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분이셨는데, 이분이 또한 호주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한 신앙의 집안 출신 목회자인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감옥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쉬웠다고 말합니다. 죄를 말하면 다 자신이 죄인임을 순순히 인정하더라는 겁니다. 감옥 밖에서는 복음을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감옥에서는 죄를 짓고 들어왔으니까 죄인임을 쉽게 인정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깨달은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임하고 펼쳐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러니까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으로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그가 있던 감옥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1시간이 넘는 구체적인 간증은 굉장히 은혜로웠고 제게도 도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유튜브에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의 특성으로 헤아릴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어서 그런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비밀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윤치영목사님이 깨달은 대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통로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렇게 십자가의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써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나라를 향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진리의 말씀으로 참되고 유일하신 진리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것이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도전하신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절 하반절)라고 빌라도에게 도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려야하는 빌라도에게 진리로 판결해야 하는 그의 양심을 일깨우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되묻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진리탐구를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진리에 속한 자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회피하려던 이유는 예수님을 선택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유대 당국자들의 압력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통치자로서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전하게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로 대표되는 세상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내 나라는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 그러니까 왕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는 말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반란범이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진리를 선택할 용기를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회피하였고 회피할 뿐 아니라 진리를 직면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해서 양심도 안정을 찾고 나중에 혹시라는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무죄한 자에게 사형 판결이라는)를 갖지 않게 하려고 유대 당국자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본문 38절부터 40절까지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38-40절)
빌라도는 양심상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를 무죄석방할 정도로 용기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명백한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게 하면 유대 당국자들이 혹시 예수님을 선택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러한 제안을 합니다. 이러한 꼼수도 실패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볼 말씀입니다만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줍니다. 다음 시간에 요한복음 19장을 본문으로 해서 빌라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안전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고 실패하는가를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마주섰을 때 처음에는 고뇌하고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세상과 직면하면 고뇌하기도 하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진리를 증언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소리 곧 세상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인가, 내 이익과 안전 때문에 양심을 버릴 것인가, 하는 고뇌요 갈등입니다.
진리에는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우회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어정쩡하게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나란히 걸어가려고 하다가는 결국 세상에 굴복당하고 양심을 저버리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고 굴복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해주시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사명을,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시는 그렇게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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