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 입금하실 때 이름+헌금종류를 기재해 주세요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84장 ▶성시교독 - 32. 시편 71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91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시편 62편 1~12절 ▶설교 - 잠잠히 ▶찬송 - 384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8월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잠잠히 (시 62:1-12절)
3세기 중반 이집트 부근 사막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영성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사막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의 수도 전통에서 보편적으로 권하는 덕목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체험을 했어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에게서 이어져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혼자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사탄의 존재를 느꼈던 그는 어떻게 하면 사탄을 추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악령에게 그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너희를 떠나가게 하느냐? 금식이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사탄도 금식하는데 무슨 금식에 심오한 능력이 있어서 사탄이 떠나겠냐는 것이겠죠. 수도사가 다시 악령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철야기도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잠자지 않는다.” 사탄도 잠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철야를 한다 해도 사탄이 떠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산다.” 세속을 떠나서 수도한답시고 사람들이 없는 사막에까지 나왔지만 이 악령은 오히려 사막에 산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가지고 사탄이 떠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겠죠. 먹지 않고 잠도 안자고 세상과 절연을 하는 등의 수행을 한다 해도 우리 마음의 사탄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악령을 추방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침묵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요동을 친다 해도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사탄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입은 악에 물들기 쉽고, 우리가 내뱉는 말이 거짓에 사로잡히기 쉽고, 말로 인해서 우리가 뜻하지 않게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사막의 수도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감화될 수 있는 한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막의 지혜>, 로완 윌리엄스 저, 77-80쪽에서 발췌)
최근에 대통령후보로 나온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이전에 공직자로 있었을 때엔 달변과 다변이 기자들에게 매력으로 다가갔다고 합니다. 엄정한 공직을 수행하는 근엄하고 좀 다가가기 어려운 일을 하는 분이 소탈하게 말도 많고 재밌게 말도 잘해서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치에 입문하고서 정치인들을 만났을 때도 달변과 다변이 친화력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정제된 언어와 의도성 있는 메시지를 생명으로 하는 대선 주자에게 말이 많음은 오히려 탈이 되었습니다. 반대편에서 ‘1일 1망언’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가령, 언론 인터뷰에서 보여준 실언은 단순한 말실수라기보다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의혹의 눈으로 주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침묵이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늘상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고, 기도도 부르짖어야 할 상황에서는 부르짖는 간구, 통성으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임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설명해주어야 할 때도 있고, 열정적으로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이 보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말을 하고 오해를 풀고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억울하게 가하는 악행에 대해서 폭로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할 때임을 다윗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뜨리고 직위로부터 떨어뜨리려고 공격해오는 원수들은 입으로는 축복하는 것같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 사악한 자들인데, 이러한 위선적이고 배신적인 행태를 다윗이 간파하고도 오히려 침묵을 해야 할 상황임을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윗은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요? 다윗이 침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이!”,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사실을 다윗이 알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이요, 다윗의 삶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출렁입니다. 집채만한 파도라는 현상을 보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하므로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이는 파도에 겁먹고 두려월할 줄 알면서도 파도를 일으킬 능력이 있으신 바람과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른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은 파도를 일으켜 우리를 올라가게도 하시고 내려가게도 하시는 분이신데, 많은 사람들은 파도 자체의 움직임에 따라 일희일비하죠.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다윗은!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에게서 들려오는 말씀을 잠잠히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께 잠잠히 아뢰겠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본문 5절에서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침묵하며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건짐과 구원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고, 소망과 기대도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되니까, 차라리 입을 다물고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압도당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시편 62편의 다윗의 영성과 비슷한 영성, 곧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성을 보여준 구약의 인물이 또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요란하지 않고 잠잠한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고 잠잠히 인내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로 표현되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하루하루의 성실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사람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거나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신 꿈과 비전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억울한 옥살이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기대를 사람을 통해서 잠깐 가져보기도 했었죠.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실제로 해몽한 대로 감옥에서 나가고 직위를 회복한 관원으로 인해서 ‘이제 드디어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구나’는 기대를 잠깐 갖게 되었죠.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사람이 달라지듯 요셉의 은혜를 입은 관원은 막상 감옥문을 나가서는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잠깐의 기대였지만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요셉에게는 이것도 잠시 잠깐일 뿐 요셉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므로 예상보다 길어진 감옥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요셉은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 9-10절을 보시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은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오직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에게만 있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시간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어려움으로부터 구원과 미래의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윗이나 요셉의 영성과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이!”로 집약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같이 여기고 삶의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믿음이었습니다. 마음 중심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추구하였고, 참된 만족과 평안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교부 신학을 종합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찾아가도록 창조하셨고,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참된 만족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인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요새와 같은 피난처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상태는 영혼의 침묵이며 영혼의 고요와 안식입니다. 바깥이 아무리 광풍이 불고 파도가 솟구친다 해도 내 영혼이 잠잠한 것입니다. 영혼이 고요하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힘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내 안은 잠잠하고 고요하게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반석이 되시며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요새가 되시며 내 영혼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혼의 상태는 시편 131편 2절에서 말하는 상태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강풍과 풍랑이 없어서 고요와 안식이 아니라 강풍과 풍랑속에서의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소망이 옴을 확신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므로 풍랑 속에서도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인생이 날마다 순풍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햇빛만 내리쬐면,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전혀 없으면 인생은 사막화될 뿐입니다. 인생에게는 햇빛도 필요하지만 비도 필요한 법입니다.
청년의 때엔 마음이 격동할 때가 많고 쉬이 흔들립니다. 청년의 방랑과 불안이 결혼만 하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혼할 때에도, 또 아기를 키울 때에도, 중년은 중년대로 중년의 위기를 겪고, 노년이 된다는 것은 나이듦의 과정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언제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또 다른 태풍이 밀려오고 그렇게 인생의 풍랑에 고요와 평안을 빼앗기는 게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거듭 밀려오는 파도에 따라 널뛰기를 하는 인생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그리고 요새와 같은 분으로, 피난처로 다가오십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쉽게 흔들리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재물 등 궁극적인 도움이 될 수 없는 헛된 것으로 힘을 삼고 의지하려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시며 피난처이심을 믿고 궁극적 신뢰를 하나님께만 두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해도 우리의 구원의 반석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므로 위기를 극복해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위기는 강풍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리고 강풍이 몰고 오는 파도 자체에 있다기보다 강풍 앞에서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흔들린 채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큰 파도가 와서 여러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위기의 때, 그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의 도움과 구원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잊지 않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052
0
다음글 |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