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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아래로 (시 57:1-11절)
누구나 살면서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좌절을 맛보고 낙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침체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이 그런 시기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 극심한 무더위로 마음도 몸도 지치기 쉽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여러 가지로 제한과 불편이 많은데다가 무더위까지 겹쳐서 삶이 피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덩달아 침체기에 접어들어 신앙이 힘이 되지 못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중요한 것은 복원력이겠죠.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무너져내리지 않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이 중요한데 신앙생활에서 회복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회복력으로써 다시금 일어서고 활기차게 신앙생활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오늘 시편 57편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카우아이 아이들’이란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1955년에 태어난 698명의 아이들을 40년간 추적 관찰했습니다. 모두가 안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온갖 역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가난, 실업, 알코올 중독 같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698명 중 약 1/3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이렇듯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유능한 성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데이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인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한 가정이라도 할머니가 손자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다면 그 아이는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어서 가정이 풍비박산난 가정이라도 어머니가 자녀에게 변함없는 돌봄과 안정적 관계를 지속하였다면 그 아이는 잘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어린 자녀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기만 하면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실시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일련의 ‘회복력 인자들’을 발견하고 빈도수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회복력 인자들’의 가장 주된 요소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 관계’였고, 그것 외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신앙과 영성 등도 ‘회복력 인자들’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불안한 삶에 답하다>, 빅터 프랭클 저)
삶은 언제나 명암으로 교차됩니다.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쁠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슬픈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를 지날 때에라도 양지로 나아올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좌절의 쓴잔을 겪은 후에라도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충격의 일격으로 쓰러졌을지라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는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회복력 인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관계입니다. 사랑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러한 관계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우리를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시편에는 좌절과 낙심을 딛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서는 신앙인들의 선포로 가득합니다. 시편에서 낙심과 좌절, 실패와 넘어짐, 억울과 분통,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웅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웅덩이’, ‘구덩이’, ‘함정’, ‘스올’, ‘무덤’, ‘수렁’ 등으로 표현된 상황은 비슷합니다. ‘웅덩이’에 빠짐으로, 혹은 ‘구덩이’에 던져넣어짐으로 인해서 ‘무덤’에 내려간 것과 같이, 죽은 것과 방불한 존재가 됩니다. 무력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단절되어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것과 같은 장소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굉장히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것입니다. 어둠에 처하게 되고 낙담이 되고 살아도 산 것같지 않고 죽음에 처한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시편 40편 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웅덩이와 수렁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힙니다. 힘이 쫙 빠져서 그대로 털석 주저앉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도대체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망연자실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혹은 ‘나는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혼자뿐이라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거나, 누군가 나를 속이고 억울하게 만들거나, 왕따를 당한 소외감이거나, 차별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잉여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취급받거나, 이런 종류의 절망이 ‘웅덩이’로 묘사된 상황입니다.
불가피하게 우리 인생,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종종 우리를 찾아오는데요,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웅덩이’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웅덩이’에서 끄집어내고 건져내셔서 웅덩이에 빠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웅덩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잘못된 장소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닙니다. 빨리 빠져나와야 할 장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떤 장소에 거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시편 57편 6절에 ‘웅덩이’가 나옵니다. 다행히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오히려 웅덩이를 판 다윗의 원수들이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고, 그러면 어디에 거하기를 그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다행히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던 다윗은 자신이 마땅이 있어야 할 곳, 하나님의 자녀들이 머물러야 할 곳인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보호를 받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날개’라는 이미지는 아마 암탉이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끌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는 안전함과 보호하심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평안함과 기쁨과 안식 또한 가리킵니다. 시편 17편 7-8절에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라고 노래하며, 시편 61편 4절에서는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이처럼 ‘주의 날개 아래’는 피난처요 안전한 곳이요 보호를 입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주의 장막과 같은 곳으로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얻는 장소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는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웅덩이’와 여러 차례 나오는 ‘주의 날개’가 함께 나오는 유일한 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지만, ‘웅덩이’에 빠져버린 상황에 처한 이들도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옮겨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절망감과 무능감의 환경에서 완전한 안전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여전히 ‘웅덩이’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가능케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다는 결단은 이미 자신을 가두고 있는 웅덩이의 능력이 파괴되었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웅덩이에 빠져있는 상황일지라도 거기서 기도하면 도우셔서 주의 날개 아래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저 참고)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1절에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의 이곳 저곳으로 피신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웅덩이’와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을 굳게 정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또 9절에서도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상황이 찬양할 상황이 아니고 상황이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찬양하기로, 감사하기로, 마음을 굳게 확정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결심하고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굳은 각오와 결심이 아니면 이런 상황,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사와 찬양을 결심하고 실행함으로써 ‘웅덩이’에서 빠져나와 이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미리 감사함으로 ‘웅덩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거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각각 따로 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미리 감사하고 찬양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기도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기도를 주제로 한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기도란 사람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럼 누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자신이 가난하고 온갖 좋은 것이 없는 지 알게 된 사람만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게 기도다라고 기도를 정의하고 기도에 관한 긴 논의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필요를 알게 된 사람은 자기 밖으로 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요, 기도를 하게 되면 소위 ‘교환’이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교환’이라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비참함 대신에 모든 행복을, 우리의 궁핍함 대신에 모든 부요함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보화들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으로 배우게 되고 그분의 빛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칼빈의 말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아버지는 기꺼이 그분의 모든 풍요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셨기에 모든 것을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그분에게서 퍼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께서 그 ‘넘쳐흐르는 샘’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요, 우리에게 온갖 보화와 하늘의 보물을 주시는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시오, 그리고 우리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 부요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합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기도의 결과로서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모든 좋은 선물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고마워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는 죄로 보았습니다. 기도를 진정으로 기도가 되게 하려면 기도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칼뱅이 보기에 기도와 감사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므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칼뱅은 시편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시편을 일컬어 ‘영혼의 해부도’라고 불렀고 자신이 시편에서 큰 위안과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시편에서 그는 기도를 배웠고 시편의 기도의 핵심에 감사와 찬양이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서 다윗이 웅덩이와 같은 처절한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릴 때 감사와 찬양을 마음으로 결단하고 확정한 후에 실제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웅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더 깊이 웅덩이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윗은 전능하신 주님의 그늘 아래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과 안심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웅덩이’가 곧바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신순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나이 9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전맹입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이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25년 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JP 모건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서울맹인학교에 다니던 15살 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님의 추천을 받고 그분이 자신의 미국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 집에 거하면서 미국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미국인 가정의 부부가 이후 그의 양부모가 되어서 그를 보살펴주었고, 거기서 그는 처음에는 미국맹인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반 고등학교로 진로를 바꿔 공부했고, 이후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와 MIT에서 공부한 후 증권사에 취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최근에 에세이집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작년과 올해 언론에서 많이 등장한 단어가 ‘깜깜이’ 확진자라는 말인데,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해서 그 단어를 쓰지 않겠다는 뉴스가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 단어를 뉴스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 단어를 시각장애인과 연관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는 44년간 빛도 보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의 세계가 깜깜하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빛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분에게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왜 시련이 없었겠습니까.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첨단 경제의 현장에서 일하는데 왜 좌절이 없었겠습니까. 웅덩이와 같은 시련과 좌절과 낙심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빛이 되어주셔서 그를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로 그를 덮어주셨기 때문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깜깜이로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에 부른 찬송가 가사와도 같습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찬송가 84장 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웅덩이에 빠져버렸습니까?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얼른 빠져나와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건져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품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겠다고 마음에 굳게 확정짓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령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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