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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1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0)
샬롬 (요 20장 19-23절)
오늘 본문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서 주일 이른 아침에 다시 사셔서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이신 예수님처럼 처형당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유대 당국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두려움 가운데 은신처에 숨어 모여 있었던 제자들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절, 21절)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인사라고 말씀드린 이유는 이 샬롬이라는 말이, 정확하게는 ‘샬롬 알레켐(너희에게)’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유대인들의 관례적인 인사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인사가 아님은 ‘샬롬’이라는 말은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는 특별한 강조점과 메시지가 있는 말입니다. 십자가 죽음을 목격하고 그 죽음 앞에서 두려워서 도망가버린, 그리고 자신들도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게 될 약속이나 기원문일 수도 있지만 단순히 지금 ‘너희에게 평강이 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너희에게 평강이 있다’ 혹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로 해석한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나타나심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음이 명백하게 보여졌기 때문에 ‘평강’ 곧 ‘샬롬’이 있고, ‘샬롬’이 있게 되었고, ‘샬롬’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곧 우리의 샬롬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 대신에 죽으셨으나 우리를 의롭다하시기 위해서 다시 사셨다면 그래서 우리가 살아계신 예수님과 생생한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면, 그러면 예수님은 곧 우리의 샬롬이십니다. 우리의 화평이시오 우리의 평강이십니다.
구약성경에서 ‘샬롬’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된 시대의 모습입니다. 만물이 조화롭게 공존하고 평화를 누리는 새롭게 된 세상의 모습입니다. ‘샬롬’에 대한 구약성경의 약속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졌음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영생의 문제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해결해주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누리게 된 샬롬입니다. 그런 점에서 샬롬은 ‘구원의 누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저 공짜로 선물로 얻게 된 구원을 누림이 곧 샬롬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들에게 쓴 편지에서 늘 인사말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혹은 ‘있기를 원한다’라고 편지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이요 그 구원을 누리는 샬롬입니다. 샬롬은 창조의 회복이요 만물의 조화요 관계의 평화로움이요 우리 마음의 내적인 평안입니다. 한마디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구원의 복이 곧 샬롬입니다.
은신처에 모여 있으나 유대 당국자들을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게 되었다”, “너희가 샬롬을 누리게 되었다”라고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달라진 현실을 강조하고 계신 것입니다. 샬롬을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제자들에게 보이십니다. 손은 정확하게는 팔목일 것입니다. 팔목에 못이 박혀서 십자가에 고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경에서는 발도 보이신 것으로 나타나지만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곳은 옆구리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던 말씀에서 이미 죽은 예수님을, 그래서 다리를 부서뜨리지 않고 대신 로마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렀죠. 그때 그 찔린 곳으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왔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덮어주신 예수님의 보혈의 피, 예수님의 육체 안에 집결된 우리의 모든 죄를, 마치 대속죄일날에 지성소에 동물의 피를 가지고 들어간 대제사장이 언약궤 뚜껑 곧 속죄소 위에 그 피를 뿌려 덮어버림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1년간 지은 죄를 속죄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의 육체 안에서 흘러나오는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덮여지고 가려져서 죄 용서함을 받게 하는 피가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요, 아울러 ‘물’이 나왔다 함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 용서함 받은 우리의 심령이 깨끗해져서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가리켜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이 나와서 예수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분 곧 아버지의 영이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 거하심으로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아버지의 권능이 동일하게 우리 가운데도 역사해서 우리 죽을 몸도 살려주실 것임을 보증해주신 성령을 가리켜 ‘물’이라고 표현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를 보고서 지금 자신들에게 나타나신 이분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임을 제자들이 바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로써 제자들은 기뻐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기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것이 단순한 인사말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서 이들에게 임한 구원의 복 곧 샬롬, 다시 말해서 구원이 시작되었고 이 구원을 누릴 수 있게 된 구원의 복이 지금 임했음을 재차 강조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샬롬을 너희가 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 구원의 복을 가지고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십니다. 이 샬롬이 너희에게 있게 되었으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과의 화평이요 사람들과의 화목이요 세상이 줄 수 없는 내면의 평안을 얻었으니 세상에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 큰 복을 증거하라는 사명입니다.
세상으로의 파송과 세상에서의 사명 감당을 위해서 예수님은 이어서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본문 22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누가복음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지금 예수님 자신이 내신 숨 곧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기보다 오순절 성령 강림을 약속한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이나 호흡이나 숨이나 바람이나 같은 단어 프뉴마이기 때문에 앞으로 오순절날에 성령이 임하게 될 터이니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만 말씀하신 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로 인해서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물이 흘러나온 것처럼 예수님으로 인해서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서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실 성령을 받게 될 것이요, 그 성령은 처음 창조와 같이 하나님의 생기 곧 하나님의 호흡을 영혼들에게 부어주시는 것과 같아서 처음 창조를 다시 하는 재창조가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증거하는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임을 누가가 말했다면 여기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전도의 결과로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받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마지막으로 23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이 예수님처럼 즉각적인 죄 용서하는 권능을 부여하시겠다는 말씀이라기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는 복음 전도를 통해서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즉각적으로 예수님의 보혈로 공로가 덧입혀져서 죄 용서함을 받게 될 것이요 반대로 예수님을 거절하는 자에게는 죄 용서함의 혜택이 돌아가지 않게 될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한마디로 복음 전도의 결과로서의 죄 용서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본문 말씀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 인생이 얻게 된 구원의 은혜와, 구원의 복 곧 샬롬을 우리가 얻게 되었고 누리게 되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샬롬의 큰 복을 얻은 우리가 이 복을 세상과 나누기 위해서 세상을 향해서 나아갈 때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함을 아울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생생하게 마음에 와닿는 성도들도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은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갖고 있지만 여전히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늘 감사하는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 감격하면서 살아가지만 가끔씩 인생에 찾아오는 풍파로 인해서, 내가 원하던 꿈을 이루지 못함으로 인해서, 적절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함으로 인해서, 앞으로 어떻게 미래를 맞이해야 할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혹시 선택을 잘못해서 낭패를 당하고 큰 손해를 겪게 되고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게 되지는 않을지 두려움에 떨 때가 많은, 우리는 그토록 연약한 인생입니다.
예수님은 그럴 수도 있는 가능성을 말씀하신 것이요, 대원칙을 말씀하셨을 뿐, 언제나 그렇듯 이론과 실제는 결코 같지 않은 것일까요? 이 가능성을 실제로 손에 넣으려면 늘 성령 충만해야 하고 늘 기도에 힘써야 하는 것일까요? 아마 그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씀에 공감하는 성도들도 적지 않을 텐데요 주로 나이가 많이 들고 신앙연륜이 깊은 성도들은 세상사에 별 미련도 없고 인생이 별 것 없다는 사실을 진작 알았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셔서 죽고 나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해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와, 영생의 축복, 부활의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부활의 샬롬이 크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젊은 분들은 신앙이 이게 전부야, 이게 샬롬이야, 그래도 나는 취직을 해야 되겠다,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을 해야겠다, 내가 원하는 꿈을 이뤄야 내 마음에 평정이 찾아지고 정말로 내가 복을 누리고 있다고 인정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이 또한 사실입니다. 죄로부터 구원이나 죽음으로부터 구원이나, 이로써 얻게 된 하나님과의 화평이나 사람들과의 화목이나, 마음의 평안만 가져다주는 신앙은 젊은이들에게 별로 매력적으로 다가가기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서 들은 김남준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이분이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지만 사춘기 시절에 큰 질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네 가지 질문이었는데,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교회를 다녔으나 이 네가지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춘기 시절 어린 나이에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교회에 더 이상 다니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남들과는 다른 비상한 이례적 경험인데 이를 이해할 수 있는 그만의 삶의 환경이 있었습니다. 본인의 성향 탓도 조금 있었으나 환경도 크게 작용한 듯합니다. 부모님이 이분이 어렸을 때 이혼했고, 어머니가 자신이 5학년 때 한참 예민할 때 자신을 떠났습니다. 근본 신뢰에 대한 큰 상실감을 경험했습니다. 이후 할머니집에서 잠깐 키워지다가 이후에는 새엄마에게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가 된 이후에는 의지할 게 없으니 내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책을 안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먼저는 문학책을 읽었는데 거기서 자신과 비슷한 많은 인물을 만났습니다. 자신만 유별나다고 생각했는데 문학 작품 속에서 자신과 비슷한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공감은 하는데 대답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동안은 철학책을 탐독했습니다. 이분이 말하기를 예수 믿는 게 힘들다고들 많이 이야기하는데 무신론자로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무신론자의 삶이란 결국,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영원을 탐내지 말라, 현재를 즐겨라’는 주장으로 요약이 되는데, 이게 무신론자! 완전한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자유, 무시무시한 자유입니다. 모든 것 버렸지만 결코 자유롭지 않고 너무 힘들어 결국에는 19살에 자살을 시도하게 됩니다. 미친 듯 빠진 철학에도 답을 찾지 못해 결국 실망하여 갈 길이 없다는 생각에 자살을 선택한 것입니다. 약물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으나 3일만에 깨어났습니다. 다락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는데 새어머니가 이상하니까 할머니에게 연락해서 할머니집으로 옮겨지고 계속 잠들어서 잔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독한 외로움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3일만에 깨어나서도 슬픔을 이기지 못해 주르륵 눈물부터 흘렸는데, ‘다시 살아야하는구나’는 생각에 눈물이 난 것입니다. 살아나서 어차피 대학은 갈 수도 없고 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루는 새벽까지 공부하다가 새벽녘에 집을 나왔는데 넓은 벌판이 보니는 서울 변두리였는데,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새벽 종소리가 들렸습니다. 마음의 평안함을 주는 은은한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스스로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교회에 들어섰을 때 풍금소리가 들렸습니다. 찬송가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의 풍금소리가 들렸는데 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평화로움을 느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자 처음에는 답을 얻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속에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고 나중에 신학을 공부하고서 답을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난 누구인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순간 아 비로소 내가 하나님께 지음 받은, 사랑받고 있는 자녀구나,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까?’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세상은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나님이 나도 만들고 세상도 만들고 이 세상 안에서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결국은 이 모든 의미들이 하나님 안에서 찾아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은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이 질문도 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질문이 네가지지만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가 모든 질문에 대답이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고백합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알게 된 거라고. 거기서 모든 존재의 문제의 해답을 얻게 되었습니다. 끝으로 사회자가 이분께 질문했습니다. 19살 때 좌절하고 절망해서 죽음을 선택했던 자신의 모습에 비추어서 지금도 좌절과 절망을 겪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어떠한 절망의 순간이 와도 생을 포기하지 말아라. 왜냐면 인간은 살려고 태어났고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희망이다. 절망의 끝에서 벼랑을 바라보지 말고 벼랑을 타고 내려갈 사다리를 찾으려하지 말고 벼랑 끝에서 날개를 달아주시는 하나님을 찾아라, 그러면 벗어날 수 있으니까, 모든 인생은 벼랑 끝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니까 날개를 달아주실 하나님을 찾아라!” 이분의 대답입니다. 이 대답은 자신이 목회자가 되고서 숱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경험한 것으로서 이후에도 많은 시련과 혹독한 고통의 순간을 지나야 했는데 그 벼랑 끝에서 하나님께서 달아주시는 날개가 꼭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찾고 만나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에 대하여>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두려움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이 축소되고 위축되는 경험을 했던 분이 두려움을 어떻게 조금씩 극복해나가는가를 자신의 경험에 따라 저술한 책입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두려움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공포증입니다. 분명한 유형의 두려움입니다. 자기 바깥에 존재하는 요소들로 인한 두려움입니다. 이분에게는 사방이 트인 높은 곳에 가면 갑자기 나타나는 고소공포증이었습니다. 두 번째 유형은 트라우마입니다. 안좋은 일이나 큰 사고나 사건을 겪은 후 몸과 마음에 남아있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앞으로도 그런 두려움이 다시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요, 안좋았던 기억으로 인해서 촉발된 공포심이요 상처입니다. 이분에게는 교통사고로 인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어떤 도로 환경이나 상황을 만나면 운전하기가 힘든 고통이 뒤따랐습니다. 마지막 두려움은 실존적 두려움입니다. 미묘하고 정확히 규정하기 힘들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상실에 대한 두려움, 불확실한 세상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불안 등의 두려움입니다. 이분에게는 자신의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여러 가지 정신적 문제를 겪었는데 자신의 어머니도 갑자기 자신의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마음과 두려움으로 형태로 구체화되었습니다.
이분이 자신에게 있는 두려움이라는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 전문서적도 읽고 전문상담도 받고 차근차근 이 문제에 직면해서 풀어나가고자 할 때 상당한 진전을 경험했습니다. 먼저는 건강한 두려움도 있고, 그러나 무엇보다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란 쉽지 않지만 그 두려움에 대해서 비합리적 반응을 보이는 것을 경계하고 억제하는 법을 하나씩 터득해갔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상실로 인한 두려움을 이겨내었고 교통사고 트라우마도 거의 해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고소공포증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합리적인 예측으로 인한 건강한 두려움은 남았고 그것을 미리 예상하고 대처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그 두려움도 상당 부분 해결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인생의 두려움의 문제라고 성경이 말한다면 그 두려움은 세 번째 두려움 곧 실존적 두려움일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대해서 성경은 명백하게 부활하신 예수님과 그분이 보내신 성령으로 인해서 우리가 얻게 될 샬롬이 그 두려움에 대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됩니다. 아울러 모든 공포증이나 트라우마도 복음이 치료해줄 수 있느냐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긍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인류 일반에게 주신 일반은총으로 인해서 상담치료나 약물치료와 전문가의 도움과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해서 진전될 수 있음을 아울러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두려움에 떠는 제자들에게 샬롬을 선포했고 자신의 부활로 인해서 제자들에게 샬롬의 복이 임하였음을 강조하였습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만남과 교제로 인해서 또한 거룩하신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덧입어서 참된 평강을 누리고 이 샬롬을 세상 사람들과 나누는, 그렇게 샬롬이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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