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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1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3)
인생의 정답 (요 21장 15-25절)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보이십니다. 세 번째 나타남의 목적은 사도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2주 전에 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1장 1-14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와의 추억, 베드로의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건을 떠올리도록 예수님께서 연출하셨습니다. 첫 번 째는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거의 초기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를 재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차례 뵈었던 베드로가 고향 갈릴리로 돌아와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갔는데 예전처럼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을 다시 재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의 부르심이 물고기 잡는 생계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임을 일깨워주시는 겁니다. 두 번째 연상되는 사건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던 기적을 떠올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생하고 주려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떡과 물고기로 아침상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다시 물고기 잡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임을 안심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억은 베드로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 숯불 앞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던 시간입니다. 그때도 이날처럼 숯불 앞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마음속의 문제, 실패와 낭패와 좌절과 트라우마로 여전히 남아있는 응어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쓰임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쓰디 쓴 기억을 연상시키는 숯불 앞에서의 아침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트라우마와 상처의 늪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시 실패의 자리로 베드로를 이끌고 들어가십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동일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세우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자신만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고 맹세하고 자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 모름을 입증하려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겁니다. 다시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그때의 실패가 마음속에서 너무나 깊이 파인 상처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을 취하는 일에 쓰임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일으켜세우고자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묻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도 이날 아침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깨닫게 됩니다. 알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로 알게 해주십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만, 이날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치명적인 실수와 실패로 엎어져있는 자신을 찾아와주시고 아침상을 손수 준비해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베드로가 느끼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느낀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이해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였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동일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니까 베드로는 고민이 되겠죠. 예수님이 이제는 내 말을 안믿으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절)라고 거의 동일하게 세 번째도 대답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가 느꼈을 법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실패의 자리, 그래서 엎드러져있는 자리에서 그를 치유하고 일으켜세워서 회복시키려는 사랑입니다. 너는 ‘버린 카드야!’, 이러지 않으시고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에서 넘어져 있을지라도 사랑을 나누면 사랑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지금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고 동일한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베드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치유하고서 회복시키는 사랑을 베드로가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찾으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실패의 자리에서 끌어올리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곧 베드로에게 너무나 큰 사랑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지금 베드로는 치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진실한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손에 장을 지진다’고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를 과시해도 상황에 따라 여지없이 무너지기도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부인한 것도 아님을 아십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되내이면서도 겁나서 부인한 것도 아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적 수준을 알고 이해하고 계십니다.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심은 베드로를 이제는 못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대답의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다짐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실패와 상처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중에 베드로 자신이 쓴 베드로전후서에 보면 자신의 상처나 실패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그 과거가 베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한 표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 밖에 전해지는 글 중에서 ‘베드로 행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베드로 행전은 2세기에 작성된 문서입니다만 4세기나 돼서서야 최종 형태로 완성된 베드로의 행적에 관한 모임집입니다. 이 이야기들 중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상상이나 전설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보여주는 베드로의 마지막 순교에 관해서 감동적으로 들려줍니다. ‘베드로 행전’ 35장에 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에게 강권합니다. 앞으로 계속 주님의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탈영병처럼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베드로가 설득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떠나게 됩니다.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아무도 나와 함께 떠나지 말고, 나 혼자 변장을 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로마 성문을 몰래 나서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로마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틴어로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대답하십니다. 베드로가 다시 묻습니다. “주님, 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렇다. 베드로야.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간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자신이 마땅 짊어지어야 할 십자가임을 깨닫고서 베드로는 주님을 찬양하며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네로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도록 요청해서 그렇게 순교를 합니다.
이를 보건데 베드로는 오늘의 치유와 회복,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서는 다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처럼 십자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내다보시며 의미심장한 예언의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본문 18-1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요,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사랑이고, 그의 형편과 처지와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사랑이요, 결국에는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사용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그러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로 소명을 받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명은 목양의 사명, 교회의 리더십의 사명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참 감동적입니다.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자신의 양떼를 맡기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서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떼를 위탁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의 사명입니다. 지난 설교 때 ‘사람을 낚는 어부’를 좀 크게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꼭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존중, 생명 존중, 하나님의 사랑 실천하여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직업활동을 통해서든 아니면 직업이나 생계나 밥벌이와는 별개든, 우리는 어찌하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영혼 존,중 생명 존중 가치관으로 무장해서 ‘사람이 언제나 먼저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섬김과 사랑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사람을 낚는 어부’임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은 특별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서 이루어갈 터인데 그 사명은 목양자의 사명 선교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사명이 주어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확인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물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누구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무엇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오늘 예수님의 질문,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로 번역하면 다시 물고기 잡으러 온 베드로에게 먹고 살기 위한 그물이나 배, 그것으로 잡은 물고기 등을 가리키고서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겁니다. 남달리 주님을 향한 열정을 그동안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맞고 쓰러져있는 베드로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세우시려고 베드로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요, 그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생의 정답’입니다. ‘인생의 정답’이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삶을 이해하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정답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거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명을 받아서 우리 모두를 부르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사명 감당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정답이요 우리가 나아갈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관건은 주님 사랑에 모아집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직접 그 앞에서 들은 베드로의 대답은 진짜로 자신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주님에게서 듣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님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존중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서 그에게 사명을 위탁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재차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환난 날에 주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맛보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므로 주님 사랑을 깨달아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8편 1절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인생의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환난 날에 건지심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진정한 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이렇듯 주님을 독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걸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아울러 주님 사랑이라는 마음은 정적인 것이죠. 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야 함.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제자가 되는 삶이어야 함을 아울러 깨닫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알렉산더 클락크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한 원주민이 사자에게 물려서 빈사지경에 처했습니다.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여서 거의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그를 선교사는 몇 달 동안 지극 정성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그 원주민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클락크 선교사는 자신이 일하던 아프리카 선교본부로 돌아왔습니다. 한 3개월 정도 후에 살아났던 원주민이 선교사를 수소문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말하더랍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법을 아시지요? 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당신 것입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당신 것입니다. 제 자녀들도 제 가축도 전부 당신 것이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에서 발췌)
선교사가 그렇다고 이 말대로 이 사람의 것을 어떻게 처분하고 소유했겠습니까마는, 참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원주민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이를 향해 ‘나의 것은 당신 것’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정답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도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랑이요 참으로 거룩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베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주님을 따라가시므로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답을 알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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