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 입금하실 때 이름+헌금종류를 기재해 주세요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71장 ▶성시교독 - 23. 시편 43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91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9장 28~37절 ▶설교 - 희생 ▶찬송 - 303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6월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9)
희생 (요 19장 28-37절)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30절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최후의 말씀은 “다 이루었다”, 그리스어(헬라어)로 ‘테텔레스타이’입니다. ‘텔레오’라는 동사의 완료형입니다. 완성을 완료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땅에 보내신 사명 곧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서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죽어야 하는 보냄받은 목적을 온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십자가형을 선고받으면 보통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십자가에 달린 채 며칠이든 한 주든 죽어가는데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서 죄수의 다리를 부러뜨립니다. 다리를 밀고 흉곽을 열어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리를 십자가틀에 밀어서 숨을 내쉬려고 가슴을 들어올려야 하는데 그걸 할 수 없어서 결국 죽게 됩니다. 예수님은 예상보다 일찍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다리를 부러뜨림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유월절 희생양으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뼈가 꺾이면 안되었던 것입니다. 이 또한 예수님을 가리키는 성경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유월절 양은 뼈를 부러뜨리거나 구부러뜨리지 않고 삶아서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철저히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루어졌고 성취되었습니다. 성경 말씀대로 이루어진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이미 죽어있는 예수님을 로마 군병이 무슨 이유인지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습니다. 본문 34절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의학적으로 가능하다고 많은 의사들이 말합니다만 상징적인 의미, 신학적인 의미가 있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육체, 그 육체 안에다가 우리의 죄를 집결시키고 그 육체 안에서 죄의 세력을 폭파시켜버리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피를 흘리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오는 피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 안에 있는 자들을 덮어서 우리를 깨끗케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써 정결케 됩니다.
예수님의 육체에서 피만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물’도 나왔습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한량없이 성령을 부어주셨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육체로부터 성령이 흘러나와 성령께서 믿는 자들에게 충만케 되심을 상징적으로 가리켜줍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흘러나온 피와 물 곧 성령은 이미 요한복음 7장 37-39절에서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예수님의 배, 창에 찔린 옆구리로부터 물 곧 생수의 강이 흘러나와서 믿는 자들의 목마름이 해갈될 것을 약속해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이 성취되는 때는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때는 십자가에 높이 들려 죽으실 때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올 때입니다. ‘생수의 강’이 부어지는 영혼은 갈한 심령의 목마름이 해갈되는 것인데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나는 생명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구원의 강물을 머금게 되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 생명의 역사, 목마름의 해갈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성령께서 우리로 예수님을 믿게 함으로써 이 놀라운 십자가의 공로가 우리의 것이 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체로부터 ‘피와 물’이 흘러나옴으로 인해서 우리가 죄로부터 깨끗케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고 거룩한 성령의 전이 되어서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우리 구원의 보증이요 우리 몸의 부활의 보증이십니다. 로마서 8장 11절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곧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에게는 생명과 구원이 되었던 것입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서 탤런트 김원희씨 간증을 은혜롭게 들었습니다. 이분의 가정이 1남 4녀인데 김원씨가 둘째딸이고 네 딸을 얻은 후에 막내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막내 아들을 낳고서 부모가 덩실덩실 춤을 출 정도로 귀하게 얻고 귀하게 여기고 키운 막내이고, 김원희씨 역시 하도 하도 귀하다고 하니까 귀하게 여기고 자주 업어서 키웠다고 합니다. 이 막내가 다섯 살 때쯤 교통사고를 당해서 머리를 크게 다쳐서 뇌전증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약을 먹기 시작했고 경기를 가끔씩 하게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가끔 경기를 하니까 다른 친구들을 의식하게 되었고 그래서 학교를 가기 싫어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악화되었고 급기야는 정신적인 병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분의 집안이 김원희씨가 어렸을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김원희씨가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서 제대로 신앙생활 시작한 때가 한창 유명해진 2008년이었는데 이때 이후로 동생의 병세는 나날이 악화되었습니다. 완전히 드러눕게 되었고 정신적인 병에다 알 수 없는 통증이 늘 온 몸을 고통스럽게 가격했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고 신음하고 늘상 비명을 질러댈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남동생의 병환과 고통으로 인해서 온 가족 모두가 힘든 시간을 겪게 되었습니다.
옷 잘 차려입고 교회에 가면 교회에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집안, 딸들도 다 이쁘고 잘 키우고 남 부러울 것 없다고 여겨졌지만 집에만 오면 남동생으로 인해서 늘 전쟁 같은 집안이 되었습니다. 네 딸들은 시집가서 벗어났지만 가끔 친정에 오면 '오 주여!'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습니다. 여전히 남동생은 계속 더 아프고 더 전쟁같은 나날, 그러다보니 딸들 생각에 "얘만 없으면, 얘만 안 아픈면 우리 키우느라 고생한 부모님이 여행도 다니고 노년을 편하게 보내실텐데...“ 하면서 남동생에 대해서 오히려 원망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병간호만 하면서 늙어가는 부모님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입니다. 남동생에 대한 그런 생각, 부모를 힘들게 하는 남동생에 대한 그런 마음이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만난 후부터 남동생이 우리에게 원망이나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특별히 딸들에게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것이 있었는데 다들 공통적으로 남동생만 아니면 우리 자매들이 구원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이러한 마음을 너나 할 것 없이 동시에 주셨습니다. 이쁘게 잘 자라 좋은 집안에 시집가고 어려움 없이 지내던 자매들이 남동생으로 인해서 그래도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고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는 가끔 친정집에 가면 여전히 전쟁통이지만 남동생을 더욱 안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남동생을 볼 때마다 우리가 맞아야 할 온갖 화살을 대신 맞고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해주고 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딸들이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다가 우리가 부모의 짐을 나눠지자, 고난을 함께 지자, 이 십자가를 함께 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니는 요리를 잘하니까 음식 준비해서 늘상 부모님에게 공수해주고 두 동생은 수족이 되어서 부모님 병원 갈 때나 어디 갈 때, 그리고 동생이 병원갈 때 운전해서 모시고 다니고 김원희씨 자신은 틈틈히 가서 남동생 목욕도 시켜주는 등 부모의 무거운 짐을 네 딸들이 나눠서 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희생이 사랑임을 압니다. 오직 희생만이 참된 사랑임을 압니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말뿐임을 누구나 압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하셨는데,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십자가 희생은 마치 종이 되어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는 지극한 섬김으로써 제자들을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은 순수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족을 위해서 곧잘 희생합니다. 특별히 부모는 자녀를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희생하면서 자녀를 키웁니다.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고 희생을 합니다. 자녀를 그저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므로 자녀를 위해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녀도 노년의 부모에게 사랑으로 보답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일을 하지 못하는 부모를 봉양하거나 병든 부모를 수발하는 것 등으로 자녀도 희생합니다. 희생으로써 사랑의 보답을 하는 것이죠.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되어서 수명이 연장되고 그러다보니 병든 부모를 봉양하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는 가정도 많이 있습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온전히 부모를 돌보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실인 듯합니다. 그래서 많은 자녀들이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후회하고 죄송스럽게 여깁니다.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만큼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책하고 심지어 자신이 너무 이기적이었다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현직 의사의 글을 보니까 자신의 환자를 간호하던 한 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딸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픈 아버지의 간병을 전담한 딸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그래서 딸은 본업을 그만두고 아버지 간병에 전념했습니다. 의사인 자신이 보기에도 아버지 못지않게 딸도 많이 지쳐보였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훗날 딸은 자신이 이기적이었다며 자책했습니다. 아버지보다 본인의 일을 우선했던 것, 아버지를 제때 제때 챙기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자책했습니다.
의사인 자신이 보기에 그 딸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누구보다도 더 이타적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의사생활 경험을 통해서 보건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오랜기간 하려면 스스로를 돌보기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챙기지 않으면 몸도 마음도 지치기가 쉽고, 그러고 나면 그 누구도 돌볼 여력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의사는 자신의 경험을 들려줍니다. 몇 년 전 한 환자가 응급실에서 막 올라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회진을 돌면서 환자의 상황과 앞으로의 치료 계획을 설명해주었고, 미안하지만 내일부터 휴가여서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보호자가 말하더라는 겁니다. “아니, 의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아픈 환자를 놔두고 휴가를 갈 수 있습니까? 당신이 그러고도 의사입니까?” 이기적이라는 것이죠.
그런 말을 듣고서 휴가를 가니까 찜찜한 마음을 덜어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어차피 오게 된 가족과 오게 된 휴가여서 마음의 무거움을 덜어내고 말 그대로 잘 쉬다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대학병원에 발령받고서 처음 5년 동안은 휴가도 못갔고 모처럼 가족과 보낸 휴가여서 말 그대로 잘 쉬다가 왔다고 합니다. 그동안 열심히 일했고 병원 일이라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자신이 너무 지쳐있었음을 비로소 거기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도 몸도 많이 지쳐있었음을 회복하고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휴가지에서 깨달은 사실은 자신이 지쳐서 평온하지 못하다보니 자신이 주변을 괴롭게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들에게 불친절해지고 인턴들에게 자주 짜증을 내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충분히 자고 충분히 쉬었고 휴가에서 복귀한 후에도 제 시간에 퇴근을 했습니다. 그러자 많은 게 달라졌습니다. 병원 생활과 자신의 생활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고 적절한 휴식을 취하니 몸이 편안해졌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사람들이 얼굴이 좋아보인다고 말하기 시작했고 사람 관계에서 여유가 생겼고, 환자를 진료할 때 집중력도 늘었고 판단력도 좋아졌습니다. 결론을 얻기를 자신이 환자들에게 인간적으로나 업무적으로 잘했던 때는 자신이 푹 자고 푹 쉬고 스스로 편안했던 때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의사는 말합니다. 사람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기적이어야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할 때에는 정말 그렇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타적이기만 하려다가, 그러니까 늘 남들을 위해서 희생만 하고서는 결국에는 이타적일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보지 못하면 다른 사람도 돌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돌 볼 수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남을 돌볼 수 있는 여력도 생겨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에서 발췌한 것임, 김범석 저)
이것이 어찌보면 인간 사랑의 한계, 우리의 희생의 한계치라고 생각됩니다. 인간의 사랑은 어느 정도 자신을 지켜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안내 방송으로 늘 나오는 것이 있죠. 비상사태가 되면 누구보다도 본인이 우선 산소마스크를 쓰고 그 다음에 아이에게 씌워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아이를 사랑한다고 아이를 먼저 생각해서 아이에게 먼저 씌워주려다가 잘 되지 않으면 둘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에 본인이 우선 산소 마스크를 쓰는 게 옳다는 것이죠.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피 한방물 물 한방울까지 우리를 위해서 다 쏟으신 완전한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을 받고서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한일서 4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화목 제물로 죽으신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화목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를 더 이상 죄로 인한 적대관계 원수관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관계로 회복하시기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랑이 있고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죽음으로써 우리가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적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어지는 요한일서 구절, 요한일서 4장 11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우리도 사랑하며 살아야겠죠. 하나님 사랑, 가족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동료 사랑 등 사랑하며 살아야겠죠. 사랑은 언제나 희생으로 나타납니다. 자기 희생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이요 희생이 없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미 새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새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4-15)
이것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서로의 짐을 나눠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짐을 나눠지고 가정의 짐을 나눠지고 자녀의 짐을 나눠지고 직장 동료의 짐을 나눠지고, 이로써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희생입니다. 희생이 없으면 사랑도 없습니다.
오늘은 마침 현충일입니다. 오늘 우리나라가 이와 같이 민주화되고 산업화를 이루게 된데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이와 같은 번영과 안정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일본 식민지배를 받을 때 독립선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독립을 이룰 수 있었고, 한국전쟁의 참화속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이 나라가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설립 이후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눈물로 기도하고 교회의 짐을 나눠지고 십자가를 지는 신앙인들이 있었기에 우리 교회가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희생, 이 큰 희생이야말로 우리의 작은 희생의 원동력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적 죽음으로써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 희생에 늘 감사하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우리에게 생명이 있음을 경축하며 기뻐하며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 찬송 올려드리고 하루 하루를 기쁘게 감사하며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희생을 본받아 우리도 자기 십자가를 지는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094
0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