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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2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1)
믿는 자가 됩시다! (요 20장 24-31절)
네 개의 복음서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생애를 보여줍니다. 네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예수님의 생애 중에서 마지막 한 주간, 특별히 십자가 고난당하심과 죽음과 부활에 초점을 맞추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요한복음만의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 세 복음서를 이미 알고 있었을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오랜 세월이 지나서 쓴 독특함에 있습니다. 긴 시간 동안의 깊은 묵상과 성찰이 담긴 요한복음은 다른 세 복음서가 주목하지 않았던 예수님의 면모를 독창적으로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생애와 가르침을 해석하면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복음서가 예수님의 인간됨 즉 인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에 관한 목격담을 보도하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의 측면에서 예수님의 생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맨 첫부분에서부터 요한은 어떠한 사실을 강조합니까? 요한복음 1장 1-3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말씀 곧 로고스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이 태초부터 계셨고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창조주시며 하나님 자신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위대한 선언과 더불어 요한복음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결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주에 볼 21장 말씀은 요한복음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복음이 실질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면서 결론을 뭐라고 내립니까? 요한복음 서두에서 선언했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결론을 내리며 마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도마의 고백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도마가 예수님께 뭐라고 말했습니까? 뭐라고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까?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28절)
예수님이 내 인생의 주님이시고 창조주로서 우주의 주인이실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신앙이 바로 구원에 이르는 신앙, 생명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 세 개의 복음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관점으로 기술된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바로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불러일으켜져야 믿는 자에게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믿고 생명을 얻게 하려고 요한복음을 썼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와 거의 같은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서 메시야는 원래 뜻이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분은 메시야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공관복음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메시야는 거의 같은 뜻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들, 아버지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아버지의 계시자,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가 된 아들이라는 뜻으로서 인간적 존재인 메시야 혹은 그리스도와 달리 신적인 존재,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는 하나님 되심이 강조되는 표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요 메시야일 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임을 믿게 하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 믿음이 왜 중요하냐면, 이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고 생명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 그 이름 안에 있는 생명을 누가 얻게 됩니까?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가 생명과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요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뿐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그 믿음에 생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갖지 못했던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오늘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도마였지만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믿음을 갖지 못했으나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이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들 중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를 출입하여 예수님에 대해서 수많은 말들을 들었으나 도마처럼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한 분이 계시다면, 변화된 도마처럼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을 소유하시는 오늘 이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도마가 갖게 된 온전한 믿음은 오랜 시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들어서 누적되고 축적된 결과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믿음에는 결정적 순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도마가 바로 그러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이전의 역사가 없었다면 이러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결정적 순간은 사도 바울처럼 한방에 올 때도 있습니다. 급격한 회심이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전부 그릇되었음을 한 번에 깨닫는 결정적 순간을 겪고서 사울이 바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 도마에게 일어난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도마가 지난 3년간 예수님에게 감화되어서 예수님을 따라다닌 것이 분명하지만 오늘 드디어 구원에 이르는 온전한 믿음, 참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을 맞이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참 믿음, 온전한 믿음,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고향 땅을 떠나게 되었던 것이 믿음의 표현임은 분명합니다만, 의롭다함을 얻게 된 믿음의 순간이 이후에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말씀하시고 다시 약속을 주실 때에 구원 얻는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자녀가 없었던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는 약속으로 아브라함을 고향땅에서 끌어내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시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한 명의 아들만 약속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 하늘의 별과 같이 셀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참으로 믿지 못할 약속을 주시고 계십니다. 이 믿지 못할 약속을 받은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서 겨우 한 명의 자녀도 아직 주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약속을 믿는 믿음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순간이 구원 얻는 믿음, 의롭다함을 얻게 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생겨난 순간입니다. 아브라함의 생애에서 결정적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도마에게도 바로 그러한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참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 보았듯이 부활하신 주님이 부활한 당일 저녁에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부활한 몸을 보이셨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때 도마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를 제외한 열 제자들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면 그분이 어떠한 분이신가에 대해서 나름 어떠한 믿음이 형성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도마는 없었고, 이후에 열 제자가 도마에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니까 도마는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본문 25절을 보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우리가 보통 도마를 ‘의심 많은 도마’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만약 도마도 지난 주일에 그 자리에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다른 제자들처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도마의 기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자리에 없었다는데 있었습니다. 물론 다른 열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고 하니까 믿어줄 수도 있었겠지만 아마 도마는 자신만 그 자리에 없었다는 소외감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분한 마음이 들어서 제자들의 말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도마의 말 그대로 열 제자들을 못 믿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이 말을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의 말을 들으시고 한 주 후에 동일하게 주일 저녁에 다시 제자들을 찾으셨습니다. 이때에는 도마도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27절을 보겠습니다.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도저히 못 믿겠다고 하니까, 도마가 예수님의 못박힌 손을 보고 실증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보지 않고서는,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겠다라고 말하니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보라고 자신의 몸, 십자가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한 몸을 도마에게 보이시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도마의 요청에 응하신 이유는 그렇게 하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하니까 도마에게 믿음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예수님은 도마에게 말씀하시므로 도마의 믿음을 도전하시고 계십니다.
도마는 굳이 예수님의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려고도, 그리고 예수님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려고도 하지 않고서 구원 얻는 참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왜냐면 이로써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심이 그에게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굳이 손을 넣어보지 않아도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이 보여졌기 때문입니다.
이 순간이 도마의 믿음에 있어서 결정적 순간입니다. 도마는 구원 얻는 참 믿음, 생명 얻는 온전한 믿음, 예수님께 대한 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대한 도마의 신앙고백은 무엇입니까? 본문 28절입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이 창조주로서 자신의 주님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자신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즉 예수님의 이름 안에 있는 생명을 가져다주는 구원 얻는 믿음입니다. 도마는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회심하고서 온전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도마에게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 자신을 나타내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심을 확인하게 되니까 부활하신 분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 단순히 인간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표적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심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표적입니다.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적으로 그치지 않고 그 기적 너머에 어떠한 의미와 깨달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더 깊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9절에서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오늘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한 것이 구원 얻는 믿음임을 확인케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심을 믿는 믿음일 뿐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이 단순한 인간에 그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일한 분임을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예수 믿는 자들이요 그리스도인입니다. 여기에 앉아 있는 모든 분들이 이러한 믿음, 구원 얻는 믿음, 생명 얻는 참 믿음,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계신 줄 믿습니다. 아브라함처럼, 혹은 도마처럼 이러한 믿음을 갖게 된 결정적 순간이 여러분에게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주님이시오 내 인생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주님이시오 죽었다가 다시 사신 참 하나님이심을 믿게 된 결정적 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친히 뵙고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의 도전을 받고 감화를 받아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몸소 뵙지 못한 채로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본문 2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고 믿어서 너의 믿음이 높은 질의 믿음이 아니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보고 믿는 믿음이 보지 않고 믿는 믿음보다 열등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보고 믿든 들어서 믿든 믿음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합니다. 믿음을 갖는데 있어서 체험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체험이 제공될 것이요 말씀 듣는 것만으로도 믿음을 갖는데 충분하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말씀이 들려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뵈올 수 있었던 도마를 포함한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오히려 믿음이 쉬웠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몸소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 갖기도 쉬웠을 겁니다. 반면에 오늘 우리와 같은 경우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뵐 수가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보좌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믿음에 이르는 것이 더 어렵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복되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갖는 것인데 믿음이 가장 큰 복인데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자체로도 복되는데, 믿음 갖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가진 자라면 더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도마의 무엇을 은근히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을 책망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기적을 보아야 믿겠다는 믿음, 기적을 보고서야 강화되는 믿음, 일일이 기적이 있어야 믿음이 가능한 그러한 태도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은 분명합니다. 도마가 다른 열 제자들이 전해주는 말,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을 자신들이 만났다는 말을 믿지 못한 것을 책망하고 있다기보다 기적이 있어야 진정한 믿음이 가능하다는 태도를 책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도마는 봄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이후의 그리스도인들은 보지 않고도 믿음을 갖게 되는 상황에 불가피하게 처하게 되었고 그래서 믿음 갖기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참 믿음, 온전한 믿음에 이르게 되었음이 얼마나 큰 복임을 강조하시는 겁니다. 일상에서는 믿음을 형성해가지 못하고 특별한 일이 벌어져야만 믿음이 성장해가는 그러한 자세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드럽게 책망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 믿음이고 온전한 믿음이어서 구원얻는데 충분하다고 할지라도 믿음은 계속적으로 자라가야 합니다. 믿음 성장을 위해서 체험은 중요합니다. 말씀체험, 성령체험, 은혜체험, 하나님경험, 삶속에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온갖 고난과 고통의 바다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 그리고 계속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는 자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신학자에게 가장 큰 영예는 ‘교회의 신학자’로 불리는 것입니다. 카톨릭에서 ‘교회의 신학자’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일 것입니다. 그의 방대한 저서 ‘신학대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톨릭뿐 아니라 많은 개신교 신학자들도 넘어야 할 큰 산입니다. ‘신학대전’은 그러나 완성되지 못한 책입니다. 어떤 특별한 경험이 그에게 있어서 저술이 중단되었던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50이 되기 전 해에 좀 일찍 죽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 해에 신비로운 신앙체험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날이 1273년 12월 6일 수요일 미사를 집전하던 때에 미사 중간 갑자기 어떤 것에 의해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가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고 무엇인가를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신비로운 신앙체험이 그에게 큰 충격이고 그를 크게 변화시켰습니다. 그 체험이 있기 전까지 무려 15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계속 저술해오고 있던 ‘신학대전’은 이 충격으로 인해서 중단됩니다. ‘신학대전 제3부 고해성사’를 쓰던 중이었는데, 여기서 멈추게 된 것입니다. 저술이 중단됨을 안 그의 비서가 아퀴나스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당신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세상을 깨우치려고 시작한 그 같은 대작을 왜 치워두고 계십니까?” 아퀴나스는 “레기날드, 난 할 수가 없네. 내가 본 것과 내게 계시된 것에 비교해볼 때 내가 쓴 모든 것은 지푸라기처럼 여겨지네” 이것이 전해지는 아퀴나스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체험의 진가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믿는 자가 되라고 도전하십니다. 신앙체험을 통해서 더 큰 믿음을 사모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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