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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3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8)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2) (요 19장 1-16절)
지난 시간에 이어서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라는 제목으로 설교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빌라도가 진리 앞에서 그리고 자신의 양심에 있어서 고뇌했고, 고뇌의 결과 진리와 양심을 따르려는 마음과, 다른 한편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유대인의 압력과 여론의 요청, 그러니까 로마의 총독으로서 식민지 국가인 유대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하려면 무시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 앞에서 갈팡질팡하는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을 생각해보았습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듯 이것도 만족시키고 저것도 충족시키려는 분주한 빌라도의 움직임이 로마 총독 관정에 들어오지 않으려는 유대인과 관정에서 심문 받고 있는 예수님 사이를 부단히 오가는 빌라도의 모습으로 상징되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다른 성경에 비해서 참으로 많이 나오는데 요한복음의 ‘세상’의 전형적인 예,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사람들이 바로 ‘유대인’, 정확하게는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세상의 대표자들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진리이시죠. 유월절 절기를 앞두고 더럽혀지지 않으려고, 만약 더럽혀지면 정상적으로 유월절 절기에 참여할 수 없는 곤란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은 이방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기를 꺼린 것입니다. 세심하게 유월절에 더렵혀지지 않으려는 세상의 대표자들인 유대인들은 그러나 참된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주장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예수님을 오가며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 타협하고 절충해보고자 이리저리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빌라도에게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은 가차없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요 18:37b). 예수님은 보다 분명한 입장과 요청하시는 겁니다. 진리에 속할 것을 도전하시는 겁니다. 참된 진리이신 주님을 빌라도가 심문하고 있는 게 아니라 예수님은 빌라도의 양심에 오히려 도전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따라 올바른 판단과 판결을 해야할 것 아니냐, 언제까지 세상과 나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려느냐, 양심을 따라 양심에 확신하는 바에 거해야 하지 않겠느냐, 진리에 속한 자는 나의 도전을 받고 응전하고 내 음성을 듣느니라, 이렇게 빌라도를 도전하고 계십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무죄석방!’, ‘고발 근거 없음!’ 판결을 내리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습니다. 세상의 만만치 않은 유혹, 그것은 바로 빌라도에게는 식민통치의 관리자요 통치자인 그의 지배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많은 민중이 그를 따르고 유대의 종교와 정치 실력자들의 지지를 무시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 뚜렷한 입장, 곧 진리에 속할 것을 요청하는 예수님의 도전에 대해서 빌라도는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꼼수가 유월절 명절이 되면 특별사면 형식으로 죄수를 석방하는 전례였습니다. 명백한 범죄자로 인정되는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을 후보로 올려놓고 누구를 석방하면 좋겠느냐고 유대인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세상에 속한 유대인들은 예수 대신에 바라바를 석방해달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빌라도는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로마 군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어떻게든 석방시키려고 했던 빌라도가 돌연 예수님을 채찍질하라고 명한 것이 의아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것 또한 예수님을 피투성이로 만들어서 대중들의 십자가형 요청을 무마시키려는 꼼수였습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반역죄목을 씌우려는 유대인들에게 무력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들의 고발이 근거 없음을 은연중에 드러내보이고, 아울러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대중들의 완악한 마음을 꺾고 예수님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도 만족시키고 자신의 양심의 부담도 덜어내려는 양다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채찍질에 상한 예수님을 유대인들에게 보이고서 빌라도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요 19:4b)고 말합니다. 이번에도 빌라도의 노력이 실패합니다. 유대인들은 더욱 강경하게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칩니다. 빌라도 또한 그럴 수 없다고 맞섭니다. 그럴만한 죄를 찾지 못했다고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대답합니다.
이에 유대인들은 전략을 바꿉니다. 빌라도로 하여금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압력을 가하려고 또다른 논리를 들이댑니다.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님을 고발하고 그런 죄목을 씌운 이유가 로마법에 따라 반란자로 규정돼 십자가형을 선고 받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것이 통하지 않자 유대인들에게 있는 고유한 법과 관습을 들어서 빌라도를 압박하려고 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자신들 고유의 종교법에 따르면 이 예수가 신성모독을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방불한 신적 존재임을 주장하므로 신성모독죄를 저질렀으므로 우리 종교법에 따르면 이러한 자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빌라도는 받아들입니다. 빌라도에게 꽂힌 말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미신에 사로잡혔던 세속적 로마인이었던 빌라도, 여느 로마 관리들처럼 말입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반신반인, 반절은 하나님이고 반절은 인간인 신인(神人), 그리스 신화에 자주 나오고 로마 신화에도 나오는 그러한 신인이 아닐까, 혹시 아닐까라는 미신적 생각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이 만약 그러한 분이시라면, 안그래도 심문할 때 보여지는 비굴하지 않고 당당한 모습, 그리고 자신을 설득하려고 도전해오는 듯한 말도 이미 들은 바가 있었던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대인들의 표현에 두려움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신성모독을 표현하려고 했던 반면에 받아들이는 빌라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의 채찍질 행동에 대해서 두려워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대면하고서 빌라도는 예수님이 혹시 신적인 기원이 있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으로 “너는 어디로부터냐?”(9절)고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해서 대답을 하시지는 않습니다.
빌라도는 두려운 마음에 어떻게든 예수님을 석방시키려고는 하지만 결국 유대인들에게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에 굴복하고 맙니다.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위태위태한 줄타기를 하던 빌라도, 세상과 진리를 절충해보고자 노력 하던 빌라도, 법대로 판결이라는 진리에 입각하고 양심에 따른 판결을 해야 한다는 마음 한편의 주장과 다른 한편의 주장, 세상의 요구와 압력과 유혹이 제시하는 여론의 지지와 효율적인 통치와 유대 실력자들과의 관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양자를 만족시키고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던 그의 노력이 결국에는 세상에 굴복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노회한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빌라도에게 꺼낸 카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유대 고유의 관습법, 종교법을 존중하여 예수를 사형에 처할 것을 호소했으나 빌라도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다시 압력을 넣고 있습니다. 빌라도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로마 황제가 아니겠습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발당한 사람을 죄 없다고 판결을 내리고 석방한다면 그것은 가이사의 충신으로서 할 일이 아니라는 은근한 압력이요 협박입니다. 여기서 ‘가이사의 충신’은 직역하면 ‘가이사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고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가 만약 로마 황제를 대항해서 반역한 ‘유대인의 왕’을 석방시켰다, 하는 말을 황제가 알게 된다면 당신 자리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을 것 같냐고 은근히 협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특별히 유대 당국자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전형적인 세상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황제를 대항한 유대인의 왕이라고 주장한 사실이 있는지, 그럴 의도가 있었던 것인지 등은 따져물으려 하지 않고 예수님이 자기를 왕이라 했다고 단정하고서 그러한 사람을 풀어주면 당신 역시 로마 황제의 반역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비약적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만, 이 주장이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들어가면 의심 많은 황제였던 그는 빌라도에 대한 신임을 거둬들일 수도 있는 폭발력 있는 이슈를 지금 유대인들이 제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목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서 빌라도로 하여금 십자가형을 선고하도록 거듭 끈질기게 빌라도에게 압력을 넣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빌라도가 흔들립니다. 만약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유대인들이 로마 황제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상소를 올리면 빌라도 자신의 입지와 위상과 지위가 흔들릴 수도 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빌라도는 결국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빌라도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빌라도가 예수님께 십가형을 내리려고 정식적으로 재판석에 앉은 것입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조롱하면서 그들에게 예수님을 “너희 왕이로다”(14절)고 말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청하면서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세상에 속한 전형적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은 완전히 세상입니다. 세상으로서 그들은 죄없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므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저주를 받아서 나무에 달려 죽었다라고 보여주고자 어떻게든 십자가형을 받게 하려고 했고 결국 뜻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했지만 그 과정에서 결국에는 그들이 섬김다고 생각했던 참되고 유일하신 왕이신 하나님을 부인하기에 이릅니다. 유대인의 참된 왕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뿐이시고 그렇게 고백했던 그들이 자기들에게 참된 왕은 로마 황제 가이사뿐이라고 고백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참 끈질기게 우리를 뒤쫓고 우리를 따라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육박전을 해야 합니다. 세상과 맨몸으로 맞붙어 싸워야 합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진리 사이를 오가며 어떻게든 절충해보고자 했으나, 어찌보면 끝까지 양심에 따라 진리에 따라 예수님을 석방시키려 노력했으나 세상이 가한 일격을 맞고 결국 세상에 굴복합니다. 자신의 입지, 자신의 위상,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세상의 압력에 굴복하고 맙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신이 진리에 속한 자가 아님을 입증했습니다.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임을 입증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선택은 달라야겠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이땅에 보내주신 구원자요 통치자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등극하셔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우주만물을 다스리시는 분임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를 믿는 사람들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빌라도의 선택이 아니라 고뇌와 갈등 속에서 악수를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세상이냐 예수님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위상이나 입지나 이익이냐 아니면 양심과 진리에 따라 옳다고 확신하는 것이냐 선택의 갈림길에서 옳다고 믿는 바를 선택하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선택하는 것이고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세상은 그러나 참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옵니다. 죄는 참 끈적끈적하게 우리에게 달라붙으려고 합니다. 마귀 사탄은 참 교묘하게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악된 세상에서 우리가 지지 않고 어떻게 예수님을 선택하여 승리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양심에 옳다고 확신한 바를 여러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선택할 수 있을까요? 세상의 흐름과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진리에 속한 자임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22-23절입니다.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가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정죄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있는 믿음이 있고 신념이 있고 회복된 양심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양심과 신념과 원칙에 따라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며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꺼려지지만 자신의 이익 때문에, 마지못한 망설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내려놓을 수 없는 위상과 지위 때문에 결국 믿음과 신념과 확신과 양심을 저버리고 행동하는 것은 다 죄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빌라도처럼 실패하지 않고 세상의 유혹과 압력에 직면해서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예수님의 주권과 통치를 믿는 믿음을 따라 선택하며 행동할 수 있을까요? 손해보더라도 진리를 따라 양심을 지키는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지위와 위상과 권한을 지키기 위해서 세상에 굴복하고 진리를 저버립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해야겠죠. 언제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야하겠죠. 예수님이 왕으로 다스리심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선택해야겠죠, 예수님 때문이라면 희생도 해야 하고 손해도 보아야 하고 양보도 해야 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세상과 직면한 빌라도, 결국 세상을 선택하는 빌라도와 다르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서 온전히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주님이 보십니다. 우리의 판단을 주님이 저울에 재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이 예수님을 증언하고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고 세상의 유혹에 넘어지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저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세상에 속했다, 아니면 저 사람은 우리와 다르게 예수님께 혹은 진리에 속한 자들임을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바로 알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 그리고 그들을 통해서 믿게 될 교회를 위해 기도하신 이유를 우리는 빌라도의 사례를 통해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존재하는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도 세상 한복판에 임한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서 감추어질 수 없는 산 위에 있는 동네요 세상의 소금이요 빛으로 부름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셨습니까? 저들을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주시고, 저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심겨져서 거룩한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서 거룩한 자녀답게 세상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들어간 교회 곧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하나가 된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의 하나됨 곧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됨에 동참해서 하나님 안에 있게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어서 세상과 마주서서 세상에 나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굳게 붙들고 세상에 나가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이 보낸 사람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들임을 알게 될 것을 내다보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기도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세상을 향한 우리의 진리의 증언이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으로 악을 이기고 진리로 거짓을 이기고 양심을 따라 행동하므로 예수님께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자임을 진리에 속한 분의 음성을 듣는 자임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이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씨가 있는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언하시고 입증하시고 승리하시는, 그렇게 세상 속에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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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2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7)
빌라도의 고뇌와 실패 (1) (요 18장 28-40절)
우리는 지난 주일에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기도하시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뚜렷한 교회다운 정체성을 가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의 씨가 들어가서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전적으로 속한 거룩성을 지닌 교회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가 된 것같이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일체를 이루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듯 교회의 뚜렷한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 거룩한 말씀을 받은 교회가 되기를 원하신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향해 보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세상에 파송을 받은 것처럼 우리들도 세상에 파송하시려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이어야 하니까 아버지의 말씀인 진리로 거룩해져야 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교회가 되어야 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를 위해서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세상에 파송하십니다. 교회 문밖을 나서자마자 우리는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뚜렷한 정체성 곧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 오늘 예배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에서 세상에 나아가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녀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점 줄어들고 축소되고 결국에는 사라집니다. 요한일서 2장 15-17절에 보면,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세상을 향한 사랑이 줄어들고 사라져버립니다. 하나님으로 충만은 결국 세상의 축소로 이어지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상으로 파송받게 될 준비가 마쳐지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사명자로 쓰임받게 됩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 자체로 세상에 충격을 주고 마주선 세상을 향해서 증거하게 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작은 씨앗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세상에서 누룩처럼 퍼뜨릴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지 못하고,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령당하지 못하면, 세상에 나아가도 선한 영향력이 되지 못하고 세상에 굴복하게 됩니다.
뚜렷한 정체성을 지니지 못한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에서는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온전히 진리를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을 선택하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서, 즉 예수님에 대해서 중립적인 태도란 있을 수 없음을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빌라도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교훈을 줍니다.
물론 빌라도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을 식민통치하려고 로마 제국에서 파송한 총독입니다. 재판 심문 과정을 통해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지만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결국 세상을 선택하게 되는 전형적인 한 예로 빌라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소위 유대인들과는 다른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정확하게 말하면 유대 당국자나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적대적인 세상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입니다. 한결같이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상입니다. 반면에 빌라도는 예수님에 대해서 비교적 중립적인 사람입니다. 로마제국의 총독으로서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 예수님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진리이신 예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만,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진리를 회피하고 우회하려다가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맙니다.
우리는 다음주까지 두 번에 걸쳐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 그러나 결국 실패한 사례를 생각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서 세상에 파송받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진리이신 예수님을 세상에서도 선택하여야 하는데 진리에 대해 우물쭈물하거나 진리를 회피하거나 어정쩡하게 세상과 타협하려고 할 때 중립적으로 남아있으려 하나 결국에는 세상에 정복당하고 굴복하게 된다는 생생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향해서 기대하시는 바가 아님을 분명히 깨닫고 어떠한 입장과 태도를 가지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 사명을 이루어야 할지 스스로를 점검해보고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빌라도의 고뇌와 갈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로마법을 시행하고 법대로 판결을 내려야하는데 그렇다면 양심 상 예수님은 무죄인데, 그래서 무죄를 내려야만 하지만 고려해야 할 요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고발한 유대 당국자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압력과 시중 여론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폭발력 있는 여론이 들끓 수도 있는 반란의 씨앗이 잠재된 폭풍 전야와도 같은 유월절 축제가 시작되기 전날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관리자요 통치자로서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지닌 유대 당국자와 종교지도자의 압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정치 사법 입법의 자치기구였던 산헤드린에서 예수님을 신성모독으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로마법상 합법적으로 사형, 특별히 식민지배를 받는 유대인에게 십자가형을 내리려면 총독의 재판과 판결이 있어야 했기에 그들은 예수님을 이른 새벽에 총독 빌라도의 관정으로 예수님을 끌고 왔던 것입니다.
로마법상, 종교적인 이유로는 십자가형을 내릴 수 없기에 그들은 정치적인 반란범으로 예수를 몰고 가려고 로마 황제의 통치에 반역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예수님을 총독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로마 황제가 내려준 분봉왕이 아니면서도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예수가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로마 제국의 반란범이라는 고소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할 때 제일 먼저 물었던 질문이 그래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빌라도의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된 것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의 팔레스타인 식민 통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존중하려는 정책을 폈습니다. 특별히 식민 통치에 위협이 되지 않으면 종교적인 이유로 가령, 신성모독자에게 종교법을 시행하여 돌을 던져 죽이는 행위도 용인할 정도로 유대 종교의 고유성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유월절이라는 절기였고 예수님은 이미 많은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지로 예루살렘에 입성했고, 성전에서 공개적인 가르침을 통해서 유대 종교지도자와의 첨예한 갈등을 빌라도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산헤드린도 로마 제국의 허락 없이 감히 예수님을 죽일 수 없었고, 또한 그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신성모독자로 투석형에 처하려고 하기보다 저주받은 자로서 나무에 달아 죽이는 형, 곧 로마제국의 법으로 십자가형을 선고받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빌라도에게로 데려온 것입니다.
빌라도의 심문,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질문에 대한 직접적이면서 다소 간접적인 대답은 본문 36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내 나라’라고 말씀하시는 걸로 보면 자신이 왕임을 인정하고 선언한 것인데 반해서, 그러나 분명하게 유대인의 왕이라고 대답하지 않고 알송달쏭하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다시 직접적으로 묻습니다. 이어지는 37절을 보십시오.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의 나라죠.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의 왕으로 보냄을 받은 분이고 이땅에서 진리를 증언함으로써 이땅에 하나님나라를 세우려고 하시는 것이죠. 예수님이 증거하시는 진리는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주시는 진리요 이 진리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 곧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빌라도가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를 당시 유대인들도 오해했습니다. 세상 나라와의 경쟁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고, 메시야도 정치적인 왕으로서 메시야가 아닌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도 메시야에 대해서도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 나라와 다르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고유한 가치와 작동 원리와 특성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 나라의 것들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는 분들이 더러 있는 듯합니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하나님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세상 관점으로 평가하고 판단하고 세상의 범주와 가치체계를 가지고 교회를 생각하는 분들도 더러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오래
믿어도 성경을 많이 읽었어도 하나님나라가 무엇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듯합니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호주 시드니에서 목회하시는 윤치영목사님이라는 분이 나오셔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간증했습니다. 이분이 2004년에 전도사 시절에 경험한 일인데요 자신이 섬기던 청소년 아이의 가정 문제 곧 자녀와 어머니와의 갈등을 해결하려다가 그만 현지 문화 차이로 인해서 구치소에 들어가고 재판 과정을 거치고 감옥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이 총 2년 동안이었습니다. 죄목은 여자 학생에 대해서 납치, 강도, 폭행이었습니다. 현지 언론에도 대서특필되었는데 목회자가 교회에 데려가려고 납치하고 폭행했다는, 대중의 흥미를 자극하는 거짓 뉴스였습니다. 목회자이니까 감옥에서도 성경을 읽고 같은 방에 있게 된 죄수에게 복음을 전했고 실제로 많은 죄수들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령의 역사도 경험했습니다만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왔다는 원통함이 풀리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도 쌓여져갔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제는 앞으로 하나님의 ‘하’자도 부르지 않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로 원망이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도 없는데 왜 감옥에서 꺼내주지 않는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중에 감옥에 나와서 깨닫게 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였다고 고백합니다. 이분이 원래 믿는 집안 4대째 믿는 집안에서 목회자가 되었고, 호주장로교회가 부산과 경상남도에서 선교활동을 했는데 이분의 증조할머니가 거의 처음 복음을 받아들인 분이셨는데, 이분이 또한 호주에 와서 목회를 하고 있으니까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한 신앙의 집안 출신 목회자인데도 하나님의 나라를 바로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였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감옥에서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감옥의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는 쉬웠다고 말합니다. 죄를 말하면 다 자신이 죄인임을 순순히 인정하더라는 겁니다. 감옥 밖에서는 복음을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데 그 이유 중의 하나가 자신의 죄인됨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감옥에서는 죄를 짓고 들어왔으니까 죄인임을 쉽게 인정하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깨달은 하나님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른 심지어 감옥 안에서도 임하고 펼쳐질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그러니까 십자가의 아가페 사랑으로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써만 드러나는 하나님의 나라, 그렇게 그가 있던 감옥 공동체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입니다. 1시간이 넘는 구체적인 간증은 굉장히 은혜로웠고 제게도 도전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유튜브에서 직접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나라의 특성으로 헤아릴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어서 그런지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비밀로 남아있는 듯합니다. 윤치영목사님이 깨달은 대로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통해서 드러나는 통로는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그렇게 십자가의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로써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셨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러한 부름은 하나님나라를 향한 사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요 십자가의 희생적 사랑으로 이 세상을 향해서 살아가라는 부르심입니다.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께서 이러한 진리의 말씀으로 참되고 유일하신 진리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증언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명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알게 하시는 것이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도전하신 진리입니다.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37절 하반절)라고 빌라도에게 도전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심문하고 판결을 내려야하는 빌라도에게 진리로 판결해야 하는 그의 양심을 일깨우려고 도전하시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되묻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기를 원하는 진리탐구를 위한 질문이라기보다 진리에 속한 자는 자신의 음성을 듣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보다 회피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회피하려던 이유는 예수님을 선택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고 유대 당국자들의 압력과 여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통치자로서 위험한 선택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전하게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로 대표되는 세상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미련과 사랑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 내 나라는 세상 나라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말, 그러니까 왕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왕이 아니라는 말에 빌라도는 예수님이 로마제국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고 반란범이라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고발이 사실이 아님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진리를 선택할 용기를 갖고 있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진리를 회피하였고 회피할 뿐 아니라 진리를 직면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해서 양심도 안정을 찾고 나중에 혹시라는 법적으로 문제될 소지(무죄한 자에게 사형 판결이라는)를 갖지 않게 하려고 유대 당국자들에게 제안을 합니다.
본문 38절부터 40절까지 보겠습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38-40절)
빌라도는 양심상 예수님에게는 죄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지만 그를 무죄석방할 정도로 용기가 있지는 못했습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 그러니까 유대인들과 타협하려고 합니다. 명백한 강도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서 선택하게 하면 유대 당국자들이 혹시 예수님을 선택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러한 제안을 합니다. 이러한 꼼수도 실패합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 볼 말씀입니다만 빌라도는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들에게 넘겨줍니다. 다음 시간에 요한복음 19장을 본문으로 해서 빌라도 구체적으로 자신의 이익과 안전 때문에 진리를 저버리고 실패하는가를 이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빌라도는 세상과 마주섰을 때 처음에는 고뇌하고 갈등했지만 결국에는 넘어지고 실패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때 세상과 직면하면 고뇌하기도 하고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을 선택할 것인가, 진리를 증언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유대인들의 소리 곧 세상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인가, 내 이익과 안전 때문에 양심을 버릴 것인가, 하는 고뇌요 갈등입니다.
진리에는 중립적 입장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에는 우회로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과 어정쩡하게 타협할 수는 없습니다. 세상과 나란히 걸어가려고 하다가는 결국 세상에 굴복당하고 양심을 저버리게 되는 선택을 하게 됩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말씀과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우리는 세상에서 넘어지고 굴복당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해주시고 성령으로 충만케해주시고 진리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됨으로 인해서 세상에서 예수님을 증거하고 하나님나라를 드러내는 사명을, 오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이루시는 그렇게 성공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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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다름에서 비롯되는 비교우위
▶찬송 - 447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5월1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6)
다름에서 비롯되는 비교 우위 (요 17장 20-26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 불리는 장입니다. 예수님은 우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들을 영화롭게 해주심으로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곧 있을 십자가 죽음 곧 자신의 십자가 들림으로써 구원 사역을 완수하여 자신도 영화롭게 되고 아버지도 영화롭게 되기를 기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아서 이땅에 보냄받으셨는데, 이러한 권세는 모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고, 또 믿는 자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알도록,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 즉 아버지가 보내신 자이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아버지의 친밀한 관계를 알고 그 관계에 동참하려는 목적으로 영생을 주셨음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즉 권세보다는 영생이요, 영생보다는 하나님을 알고 아들 예수님을 알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살펴본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제자들에게서 곧 떠날 터인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들은 세상에 남을 것이기에 세상의 죄악에서 순전하게 보전되기를 위해서, 그리고 아버지께서 주신 진리의 말씀으로써 그 진리로 거룩하게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서 아버지께 딱 달라붙어 있고, 그들이 비록 세상에 살더라도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 곧 거룩성을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하신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제자들의 심령에 떨어질 때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거룩한 씨앗이 됨을 예수님은 아셨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말씀으로써 제자들이 거룩해지도록 기도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세상으로 파송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파송을 받아 세상에 보냄을 받으신 것처럼 예수님이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송하시려고 하시는데, 세상에서 사명을 감당하려면 제자들이 우선적으로 거룩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지녀야 하기에 그렇게 기도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도 아버지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의 내용이 무엇일까에 대해서 살짝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요한복음 17장 20-26절 말씀은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의 마지막 단락으로써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될 사람들,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워질 교회, 즉 오고 오는 교회들, 그러니까 이 자리에 앉아있는 여러분들까지도 포함하여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드리는 대제사장의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교회를 위한 기도요 오늘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사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그러니까 사도적 전승으로 오늘에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 곧 오고 오는 교회를 위한 기도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이 우리가 되셔서 하나가 되신 것처럼, 이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가 우리(We)라 불릴 수 있도록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니다. 수직적으로는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의 하나됨이요, 수평적으로는 서로 서로의 하나됨입니다. 이 기도는 지난 주에 살펴본 말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 17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주셨고 그 진리의 말씀으로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되어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상태 그것이 곧 거룩입니다. 완전히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죠. 지금 교회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내용도 그와 같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 편에 서도록 기도하시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귐과 연합과 하나됨과 같이 교회가 아버지와 아들과 하나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겁니다. 제자들을 위해 기도할 때보다 여기서 추가된 것은 여기에는 수평적 차원 또한 있다는 점입니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하나가 되어서, 교회가 하나 되는 것도 진리 안에서 말씀 안에서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고, 하나된 교회가 온전히 예수님 편에 붙고 아버지 편에 붙어서, 아버지와 아들과 교회라는 공동연합전선을 이루어 세상의 대척점에 서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교회의 교회다움, 교회의 뚜렷한 정체성, 교회의 거룩성,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온전히 하나된 거룩성을 위해 기도하시는 겁니다. 즉 교회의 다름을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의 구별을 위한 기도입니다. 세상과의 다름이요 세상과 구별된 교회를 위한 기도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이 주신 말씀으로써,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로써 온전히 하나가 되면 그러면 교회는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가 일체를 이루어 하나가 되면 세상과 분명히 대립되어 존재하게 되는데요, 그렇게 될 때 세상에 대해 어떠한 발언을 하게 됩니다. 세상을 향해 증언하게 됩니다. 세상이 알게 됩니다. 무엇을 알게 됩니까? 예수님이 아버지가 보내신 분임을, 그러니까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오신 분임을 세상이 알게 됩니다. 아들이 세상에 주신 도전이죠. 아들이 세상에 미친 충격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보여주고,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선언하시고 세상에 도전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워낙 아버지의 뜻과 일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철저히 의존된 것을 세상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온전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과 하나됨을 보여줄 때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그리고 교회가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고 예수님께 보냄을 받아 파송받은 공동체임을 세상이 알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에 도전하는 것이요 교회가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적으로 예수님께,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해서 충만해질 때 세상이 교회란 곳이 세상과 다르구나, 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요, 교회는 예수님이 보내신 기관이요 예수님은 창조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임을 세상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거듭 강조합니다. 예배가 소중하고 예배 시간이 중요합니다. 예배 때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죠.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을 점점 닮아가는 겁니다.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말씀의 씨앗이 우리의 심령에 들어오면 그 거룩한 씨앗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게 되어 거룩해집니다. 뚜렷한 교회다운 정체성이 생겨나는 것이요 이점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완전히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 편에 선 교회가 되어가는 겁니다. 이단이 가져가서 그렇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 괜찮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과 일체를 이룬,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한 교회, 또한 예수님의 교회, 예수님과 일체를 이루는 교회! 그렇게 세상과 대립되어 서있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한국경제에서 삼성전자가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높죠. 예전에는 삼성전자가 세계적 반열에 오른 기업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턴가 세계적으로 내로라 하는 브랜드가 되어 있어서 저 자신도 놀란 적이 있는데요. 최근에 그 의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성전자의 신화를 썼던 주역 중의 한 사람이 황창규라는 사람입니다. 삼성전자에서 반도체 개발 총책임을 맡았던 주역으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을 지냈고 이후에 KT 회장도 역임한 분입니다. 이분이 반도체를 전공하고 미국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박사 후 과정으로 스탠포드 대학원에 연구원으로 들어가서 최첨단 반도체 산업을 익힐 수 있었고 직접 개발에 참여하기도 한 엔지니어입니다. 스탠포드 연구원 시절 당시 반도체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미국의 인텔사에 반도체 개발 관련 컨설팅에도 참여했고, 그때 반도체의 주도권이 미국에서 일본으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일본 기업들도 컨설팅해주기도 했습니다. 학자의 길을 걸으려던 그에게 삼성전자에 합류하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1988년에 ‘기술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이건희회장의 특명에 따라 세계의 고급 한인 인재를 영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을 때 삼성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것입니다. 미국의 유수 대학 교수 초빙 제의를 받은 상태여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생각해보겠다고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일본의 반도체 기업이 주최하는 세미나에 초청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게 되었고 일본의 주요 반도체 기업이 ㅇ요청해서 컨설팅도 진행하였습니다. 일본 일정 마지막 날에 히타치연구소 부소장과 식사하던 중 그분이 물었습니다. 한국의 반도체 기술 수준이 어떤 지를 물었습니다. 한국인이지만 미국생활을 오랫동안 해서 솔직히 잘 몰라서 되물었습니다. 당신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는데 그 일본인 부소장의 말이 “솔직히 삼성전자가 반도체 제품을 만들고는 있지만 수준 미달입니다. 일본의 기초 기술이나 응용 기술을 따라오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마 한참 동안은 따라오기 어려울 겁니다.” 이 대답을 듣고 속에 분노와 오기가 생겨났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 삼성전자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임원급 제안이었지만 그는 삼성전자에서 오랫동안 롱런하려고 직급을 낮추어 부장으로 입사했고 결국 3년 후에 임원이 되고 나중에는 반도체 개발을 총괄하는 사장이 된 것입니다.
이후 이분이 주도한 반도체 기술 발전과 개발이 거의 삼성전자가 신화를 기록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94년에 세계 최초로 256M D램을 개발했고, 이후 플래시 메모리에 도전했습니다. 플래시 메모리는 모바일 시대 스마트폰의 보급과 더불어 폭발적인 수요가 예측되는 신 사업이었는데, 당시 플래시 메모리의 최강자는 일본의 도시바였습니다. 거의 세계의 50% 가까운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황창규사장이 내다보기에 앞으로는 모바일 시대가 된다, 플래시 메모리는 모바일 시장이 성장할수록 그 수요가 폭발적이 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예측하고 모바일 시장을 대비하여 후발주자로서 도시바를 따라잡기 위해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던 중에 뜻하지 않은 도시바측의 제안을 받습니다. 삼성전자와 기술 교류를 제안한 것입니다. 삼성전자가 도시바에 D램 기술을 전주해주면 도시바에서도 삼성전자에 플래시 기술을 전수해주겠다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업계 최고 기업의 제안이어서 삼성전자가 받아들이면 분명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삼성전자가 거절했지만 1년이 지나서 또다시 도시바의 제안이 있었고 이건희회장도 다각도로 검토하고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곧 제안을 받아들이려고 하던 차에 황창규사장이 일본에서 이건희회장을 만나서 지금은 도시바에 1-2년 뒤져있지만 우리가 독자적으로 개발해서 플래시 메모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보여주었고, 독자 개발이 성공적으로만 이루어지면 앞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할 미래 모바일 시장에서 삼성전자가 주도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이건희회장을 설득한 것입니다. 긴 설득을 듣고서 이건희 회장이 한마디 했습니다. “해볼만한가?” 단독 개발로 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치고 나갈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고 황창규사장은 망설임 없이 “플래시 메모리는 미래 반도체 산업의 핵심입니다. 일부 기술만 보완하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도시바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 예측이 적중했습니다. 몇 개월 후 그러니까 2001년에 세계 최고의 집적도를 자랑하는 1G 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했고, 그 성공으로써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서 제안을 거절한 후 1년만에 도시바를 따라잡고 세계 1위가 되어서 지금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플래시 메모리 개발 이후에 삼성전자의 세계적 수준의 기업으로의 도약은 이후 애플사의 제품에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하고서부터입니다. 애플이 출시한 제품들, 가령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아이팟에는 플래시 메모리를 탑재하지 않아서 삼성전자가 보기에 기술적으로 결함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 제품에 플래시 메모리가 들어가면 성능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플에 제안을 해서 협상을 했고 결국에는 삼성의 플래시 메모리 반도체를 부품으로 사용하게 되어서 애플의 성장과 더불어 삼성전자도 급성장해서 세계적 기업으로 오를 수 있었던 것! 그렇게 애플과 삼성이 함께 새 시대를 연 것이죠. 이른바 ‘모바일-스마트 시대’입니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신화를 썼던 황창규사장이 특별히 고마워하는 것은 그룹 회장이었던 이건희회장의 전폭적인 신뢰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전적인 재량을 준 것, 자신의 설득에 대해서 올바른 판단을 내린 것, 이러한 위임과 신뢰관계 속에서 삼성전자의 신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룹 회장의 지지와 신뢰, 그와의 일치(?) 속에서 이뤄낸 성과라는 것입니다. 잘은 모릅니다만, 그룹 회장 곁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하는 말들은 그룹 회장, 우리나라 재벌 회장, 삼성에서 이건의 회장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라고 흔히 말해집니다. 이것이 옳고 바람직하냐의 여부를 떠나서 현실이 그와 같은데, 그러한 존재가 자신을 인정해주고 마음껏 실력을 발휘하도록 재량을 주고 지지해주니까 소위 일체를 이루어서 일하게 되니까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고 일치되면 일치될수록, 그러니까 교회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면 충만해질수록, 성도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속한 거룩성으로 무장하면 무장할수록 세상에 대한 발언력과 영향력과 증거력이 강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은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려고 제자들을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심은 교회를 세상에 보내려고, 교회가 세상 속에 있게 하려고 교회가 먼저 하나님과 일체를 이루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고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 안에 있게 됨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다름, 교회의 구별 곧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에게 속한 교회의 거룩한 정체성이 뚜렷해질 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도 잘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결국 세상이 교회를 보면서 알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하나가 되시고 온전히 일체를 이루시며 사시자 세상이 도전을 받고 세상이 충격을 받고 세상이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을 보게 되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 형상을 보게 되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 것과 같이 교회가 예수님이 아버지에게 일치된 것처럼 예수님과 온전히 포도나무 가지처럼 딱 달라붙고 온전한 일체를 이루고 그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온전히 하나가 되면 결국에 세상이 보게 되는 것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구나’, ‘교회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구나’, 우리를 보고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들이구나’라고 세상이 알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곧 우리의 정체성이요 정체성이 곧 사명으로 연결되는 지점입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비교 우위는 세상과 다름입니다. 세상과 구별됨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전적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정체성이 곧 사명이 되고 결국 세상을 향해 도전하게 되고 세상에 충격파를 던지게 되고 그렇게 전도가 되고 선교가 되는 사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받고서 거룩해질 때, 그 진리로 자유함이 생기고 여유가 생기고, 복음의 말씀을 듣고서 생명으로 충만해지고 영생의 확신과 소망으로 가득 찰 때, 세상은 우리에게서 어떠한 생명력과 여유와 죽음을 극복하고 두려움을 뛰어넘는 평강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히 받고 확신함으로 말미암아 사랑받는 자녀로서 어떤 든든한 배경을 지니고 안정감을 가지고 여유가 있고 참된 만족을 알고 사랑 안에서 살아갈 때 세상이 ‘너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로 오늘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벗어날 때 가능해질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듣고서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서 거룩해진 능력을 힘입고 세상을 향해서 나갈 때, 교회나 세상이나 추상적인 어떤 덩어리로 볼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 듣고 예배하고서 가정으로 돌아가보니 가정에도 세상이 있는 겁니다. 안믿는 배우자가 곁에 있는 거예요. 직장에 나가보니까 거기에도 세상이 있는데 안믿는 동료들이 많아요.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친하지만 거기도 또한 세상인 거예요. 말씀 듣고 거룩한 정체성이 뚜렷해지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 진리로 자유하고 거룩해진 자녀, 하나님의 생명으로 활력과 긍정적 기운이 가득찬 자녀로서 우리를 보게 되는 세상이 곁에 와있는 거죠. 그렇게 세상에 우뚝선 하나님나라의 사역자로 하나님의 동역자로 하나님을 대리하고 하나님을 나타내보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의 다름과 구별과 말씀에서 비롯되는 거룩성 자체가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비교 우위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하고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고 전도의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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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교독 - 98. 어버이 중리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569장
▶기도 - 김영택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7장 14~19절
▶설교 - 예수님의 중보기도
▶찬송 - 540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5월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5)
예수님의 중보 기도 (요 17장 14-19절)
‘살아 있는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일본의 기업가 이나모리 가즈오의 책 <왜 일하는가>에 보면, 이분이 전자부품 제조업체인 교세라(교토 세라믹)를 창업하고서 어떻게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켰는지, 그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들려줍니다. 이분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분은 아니지만 일을 할 때 마치 신의 소명을 받아서 사명을 감당하는 것처럼 너무나 성실하게 치열하게 일을 한 분입니다. 교세라를 창업하기 전에 무너져가는 중소기업에 취업한 20대 초반 때일입니다. 텔레비전 브라운관에 쓰이는 전자 부품을 대기업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품을 개발하는 일을 했는데 거듭 실패했습니다. 제품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원하는 부품을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끈적끈적한 점성이 있는 물질을 첨가해야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민감한 전자 부품에 불순물이 섞이게 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물질을 사용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골똘히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문제의 해결 방법을 찾게 됩니다. 여느 날과 같이 어떤 점성 물질을 첨가해야 원하는 형태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 생각하면서 실험실을 걷고 있었는데, 무언가 발에 걸려 미끄러질 뻔했습니다. 무심코 발밑을 보니 실험에 사용하던 왁스가 신발에 붙어 있었습니다. “대체 누구야! 여기에 왁스를 흘린 사람이!”라고 소리를 치려던 바로 그 순간에 머릿속에 번뜩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이거다!’, ‘유레카!’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그 왁스를 섞어서 제품을 만들어보았더니 완벽한 형태의 부품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만들어진 그 형태를 고온으로 구우면 왁스는 모두 타버려서 부품에는 불순물이 조금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랜 기간 고민하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분의 표현대로 말하면 ‘신의 계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 이분이 교세라를 세우고서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니다: “신이 도와주고 싶어 할만큼 한결같이 일에 전념하게. 그러면 아무리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분명 신은 손을 내밀 것이고, 반드시 성공할 수 있다네.” 이러한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자세가 오늘의 교세라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교세라를 창업한 지 10년쯤 되었을 때 당시 세계적인 컴퓨터 제조회사인 IBM으로부터 기존보다 성능이 월등히 높은 부품 제작을 주문 받았습니다. 다른 경쟁사들은 IBM이 제시한 기준의 부품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내저을 때 이분은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대답하고서 제품 개발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후발주자요 신생기업이었던 교세라는 기술력이나 시설설비에 있어서 IBM이 요구하는 부품을 만들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수주 받은 20만개의 부품을 갖은 고생을 다해 만들고 시제품을 보냈지만 20만개의 제품 모두 불량이라는 도장이 찍힌 채 되돌아왔습니다. 사내의 분위기가 ‘더 이상은 무리다!’는 생각이 지배했습니다. 개발팀 직원들의 사기가 완전히 꺾였고 불가능한 과업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홀로 회사에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퇴근하기 전에 사무실을 둘러보던 때에, 어디에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젊은 기술자가 제품을 구워내는 화로 앞에서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제품이 나오지 않고, 온갖 방책을 다 써봐도 소용이 없자 허탈감에 의기소침해서 울게 된 것입니다. 경영자로서 그는 직원을 위로하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밤은 이만 돌아가게나. 내일 더 좋은 제품을 만들어봐야 하지 않겠나.” 이렇게 위로했지만 그 직원은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자네, 제품을 만들며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나?” 생뚱맞게 느껴진 직원은 “네?”, 이분이 이어서 말합니다: “부품이 만들어지는 순간순간 ‘잘 구워지게 해주세요’ 라고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냐는 말일세.” 이 말에 그의 눈이 휘둥그래졌습니다. 깜짝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옷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그는 대답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장님. 다시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는 퇴근하지 않고 다시 작업장으로 향했고, 그 다음 날부터 기술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차례차례 해결해나가기 시작했고, 다른 경쟁사들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IBM이 요구하던 높은 수준의 부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분이 책에서 자신이 우연히 그 직원에게 던진 말, “신께 간절히 기도를 드렸냐”는 말을 부연 설명합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뒤 이제는 신께 빌며 천명을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다고 자신할 만큼, 당신은 당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는가? 몸이 부서질 만큼 제품 하나하나에 영혼이 스며들게 했는가? 그렇게 까지 강렬하게 염원하며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쏟아냈을 때, 비로소 신이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다네.”
이분은 일본인 특유의 장인정신과 일본인 특유의 다신교적 종교성을 가지고서 일에 임하는 분입니다만,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특별히 기도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해준다고 생각됩니다. 기도는 손쉬운 해결책이 아닙니다. 특별히 간절한 기도는 자신의 힘을 다해 수고한 끝에 한계에 도달하고 자신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나오는 게 바로 간절한 기도입니다. 간절한 기도를 할 수 있으려면 우선 본인 자신이 최선을 노력을 다해야 하고 한계를 절감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누군가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원하는 기도 응답을 받으면 기도해주신 덕분이라고 감사의 말을 합니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서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응답해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기도하는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언제든 응답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에서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의 중보 기도를 말씀합니다.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는 얼마나 간절할까를 생각해봅니다. 로마서 8장 맥락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이 기도하는, 우리를 위한 간구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시도록 드리는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여러 가지 인생의 어려움, 곧 ‘현재의 고난’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끝까지 이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의 보좌 앞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믿음 안에서 효력 있게 역사하도록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반면에,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서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지난 주일부터 살펴보기 시작한 요한복음 17장은 교회 전통에서 흔히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렀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예수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신을 위하여 드린 간구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곁에 있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핵심은 세상에 속하지 않은 뚜렷한 정체성, 말씀 받고 형성된 세상과 구별된 거룩함, 예수를 믿고 하나님께 속한, 그러나 세상에 파송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 감당을 위해서 무엇보다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본문의 일관된 내용은 제자들이 세상과 구별되도록, 그러나 세상 속으로 보냄을 받도록 드리는 기도입니다.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오늘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무엇일까를 추측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세상, 그러니까 코스모스, 창조주를 반역하고 돌아서서 자체의 방식으로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가던 세상에 속했던 우리가 ‘아버지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 말씀을 받게 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들 곧 성도, 거룩한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이, 그리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사탄이 얼마나 우리를 미워하겠습니까. 자신의 소유물이 탈취당하고 빼앗김으로 인해서 우리를 향한 적대감과 미움이 생겨난 것이겠죠. 이미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말씀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고, 말씀대로 산다고 세상이 칭찬해주고 박수쳐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미움과 박해와 소외가 뒤따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뚜렷해질수록 그리합니다.
이어지는 15절입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에 들림으로써 세상을 떠나실 것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에 그대로 남아서 예수님을 대신해서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나가야 것이니까 분명하고 뚜렷한 정체성이 필요한 것입니다. 세상에 남아서, 특별히 세상에 파송 받아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세상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으나 세상에서 살아가고 세상을 향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하니, 우려가 되는 것이 세상에 동화되고 세상에 빠져버리고 세상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도 거의 같은 간구가 실려 있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보다 적극적인 기도가 이어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악에 빠지지 않고 세속에 물들지 않고 세상을 닮아가지 않는 소극적 차원에 그치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거룩하다는 상태는 하나님께 속한 상태,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드려진 상태, 하나님이 점령한 상태, 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 점점 지워지고 하나님으로 가득채워져 있는 상태, 점점 하나님을 닮아가는 모습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해지려면 진리의 말씀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면 세상과 구별되고 세상과 달라지고 우리 안의 세상이 점점 지워지고 하나님의 것으로 채워짐으로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성도로서 보다 뚜렷한 정체성,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소속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성도로서 세상에 살아가기 위해서 더욱 거룩함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거룩해지는 비결은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적용하고 실천하고 말씀 붙들고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셔서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성령님을 의지하며 그분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점점 거룩해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으로 빚어져가므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가는 것이고,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정기적으로 교회에 모여 예배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고 바라보는 것이죠.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충만해지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닮아가는 것이죠. 특별히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말씀 붙잡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렇듯 예배가 중요하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게 중요하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의지하며 성령과 동행함이 곧 우리의 구원이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더욱 거룩에 힘쓰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말씀을 귀담아 듣고 실천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은 우리는 다시 세상에 나아가서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소속된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죠. 세상에서 할 일 곧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함이 더더욱 필요한 것입니다. 이어지는 18절에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보냄 받기 위해 오늘 모인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배하는 것도 거룩한 능력을 덧입기 위함인데, 세상에 가서 살아야하니까 거룩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거룩한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가다보면 세상의 미움도 받고 박해도 받고 손해도 겪고 어려움을 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세상에 있으니까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참된 진리이신, 성육신하여서 이땅에 오신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를 믿고 주님으로 모시고 그분이 보내신 진리의 영이신 성령 받고, 또한 진리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지난 주일 설교처럼 세상 권세보다는 영생이요, 영생보다는 하나님 앎이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즉 그가 보내신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와 사귐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영생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영원히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와 관계와 친밀한 사귐의 관계, 곧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우리가 동참하여 이를 영원토록 지속하는 것, 이것이 영생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목적이라고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또한 거룩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의 속성으로 채워진 것, 하나님과 연합한 것! 이것이 곧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 세상에서 건짐받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되는 것, 다른 복음서와 비교해서 특별히 강조되는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성육신 신학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리가 구체적인 세상 한복판에 삶으로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세상에 나아가서 살다보면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말씀의 원리가 삶에 구현되었는지, 우리 또한 말씀의 성육신 신학대로 들은 말씀을 세상에서 살아냈는지에 더욱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예배 후에 다시 세상에 보냄을 받고 파송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상에 파송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하라고 파송받는 것입니까? 우선 살라고, 거기서 일하라고 파송 받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우리가 하는 어떠한 일이든 하나님의 새창조에 기여하는 것이라야 마지막 심판의 불, 곧 정화의 불을 통과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쌓은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공든 탑이라고 해도 불에 타서 없어질 지푸라기로 지어진 사상누각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파송받는 것은 세상에서 살라고 세상에서 일하며 살라는 것이요, 우리의 일은 하나님의 새창조에 이바지하는 일일 것입니다. 상거래를 하든, 남의 수하에서 일을 하든, 아니면 기업을 운영하든, 아이들을 가르치든, 기업 이윤을 위해서 기여하든, 가정에서 주부로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헌신하든, 아니면 저처럼 주님의 몸된 교회를 목양하든 어떠한 일을 하든 오늘 설교 서두에서 말씀드린 일본의 기업가가 늘 일을 하면서 마음에 품었던 생각이나 열정과 자세, 그것보다 더욱 큰 능력을 우리는 할 수 있는 바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도움과 능력을 우리는 의지하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자주 듣고 마음속에 담고 몸에 익히고 말씀의 원리가 성육신되어서, 다시 말해서 육화되어서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는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간절한 기도는 최선의 노력을 다한 후에 가능한 것입니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서 치열한 열정과 헌신적인 삶을 살아간 후에야 진정 간절한 기도가 가능해지는 이치를 깨닫고 세상에서 열심히 성실하게 치열하게 사시기를, 그럼으로써 삶이 간절한 기도가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든든한 배경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최선의 노력을 다해! 결과는 내가 책임져줄게!” 이것이 우리의 든든한 배경이 되는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중보 기도입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거기서 힘을 얻고, 예수님의 중보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적실할 것인지를 믿고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당당하게 자신감 있게 치열하게 성실하게 세상에 나아가서 일하시고 살아가시고 예수님을 증거하시는 증인된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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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5월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4)
영생과 권세 (요 17장 1-5절)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흔히 ‘대제사장의 기도’라 불리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먼저는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서 제자들을 위해서, 이뿐 아니라 오고 오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1-5절은 예수님이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고 아버지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들림으로써 사명을 온전히 이루고서 원래 아버지와 함께 계셔서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십자가의 잔을 기꺼이 받아 마심으로 죽기까지 온전히 복종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자신이 영화롭게 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영화롭게 됨으로 말미암아 아들을 통해 또한 아버지께서도 영화롭게 되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영화롭게 해달라는 기도 중간에 들어있는 2절과 3절은 아들에게 주신 권세와 그 권세를 주신 목적이 영생인데, 또한 영생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기도 중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만민을 다스리는 왕으로 세우셔서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함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누구도 아니고, 이 세상의 어떤 왕도 아닌,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목적이 만민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만민 통치를 예수님께 맡기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짐으로써, 십자가에서 믿는 자들에게 자신을 살을 나누어주고 자신의 피를 나누어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 누구에게라도 영생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심입니다.
요한복음은 아버지와 아들의 창세 전 협약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협약을 맺었는데요, 아버지는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고 아들은 그 권세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는 종노릇으로써, 즉 자기를 비우는 십자가의 희생으로써, 곧 내려놓으심으로써 세상 통치가 전혀 이루어내지 못한 영생을 만민에게 주시려는 것입니다. 통치자에게 권력이 주어진 목적이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생명을 증진시키는데 있는데, 세상 권력자들은 권력을 쥐고 누리려고만 했지 그 권력으로 사람을 살리는 희생과 나눔을 한 사람도 이루어내지 못했는데, 참된 왕, 유일하신 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으로써 영생을 선물로 주심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신 것입니다. 같은 사상을 오늘 요한복음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고 서술하고 있다면, 그러니까 창세 전에 아버지와 아들이 협약을 맺어서 이미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반해서 빌립보서 2장에서는 아래서 위로 올려다보고 서술하고 있는 듯합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하나님이 보내신 과업을 이루셨고, 그 결과로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5절 이하의 말씀을 읽지는 않겠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겸손하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사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셔서, 그 결과로써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과 같은 사상을 말씀하는 겁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것이 창세 전에 결정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서 빌립보서는 십자가 복종 이후 부활과 승천으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만유의 주로 다스리시는 예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세워서 권세를 주고 주어진 권세를 가지고서 희생하고 나눔으로써 밑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땅에 이루어지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이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함이요 우리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기를 하나님은 기대하십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조그만 권세라도 주어졌다면, 어떤 지위라도 주어졌다면, 어떤 권한이 주어졌다면, 어떤 직분이 주어졌다면, 어떤 책임이 주어졌다면, 영향을 미칠 사람이 몇이라도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들을 주신 목적이 그들의 영생입니다. 생명을 증진시키라는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명을 분명히 아셨습니다. 만민 통치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맡기신 영혼들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은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를 통해서 영생이 사람들에게 주어지려면 우리의 희생과 헌신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짐이 필요한 법입니다.
김옥라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감리교의 여성 장로님이십니다. 1918년생이니까 올해로 103세십니다. 이분이 최근에 CBS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서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자신의 막내 아들이 65세인데 막내 아들보다 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정말로 젊어 보였고, 굉장히 건강하고 말씀도 잘하셨습니다.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 건강 비결을 물으니 감사하게 사는 것, 몸을 계속 움직이고 열심히 일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도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분이 자신의 전 생애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독특한 삶을 한 평생을 전쟁을 몸소 겪으며 살았다고 말합니다. 초등학교 시절 만주사변을 겪었고, 대학시절은 일본에 유학가서 사셨는데 한참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때 남자는 전쟁터로 끌려가고 여자는 당시 대학생으로서 전쟁 물자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게 되는 전쟁국가에서 군수 물자를 만들기도 했고, 일본에서 원자탄이 떨어진 것도 경험했습니다. 돌아와서는 결혼하고는 곧 한국전쟁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이처럼 이분의 삶에는 생명보다는 죽음이, 온통 전쟁의 고통과 죽음을 머리에 이고 가까이 두고 사셨던 것입니다. 이분이 1981년에 세계여성감리교여성연합회에서 아시아인으로서 최초로 회장에 당선되었습니다. 이분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후보에 올랐지만 계속 거절했다고 합니다. 본인은 영어도 잘 못하고 세계 회장이 될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본 것이죠. 그러나 선출이 되었습니다. 얼떨결에 회장에 당선된 것입니다. 당선되고서 단상에 올라와서 소감을 말하라고 했는데, 준비되 되어있지 않고 당황도 돼서 머리가 하얗게 되었습니다. 단상에 올라가서 보니 세계 각국에서 온 여성 회원 300여명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망설이던 차에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한 성경구절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네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 너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이다” 그 구절을 말하고서 나는 이것밖에 지금은 할말이 없다고 말하고 내려왔고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이 대회가 하와이에서 열렸는데 대회 후에 미국 LA에 사는 아들 집으로 곧바로 갔습니다. 성경책을 펴놓고 밥 세끼 주는 것 먹는 것 외에는 그 방에서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회장 자격이 없는데 왜 저를 세계 회장 시켰나요? 하나님 무슨 목적이 있으신가요? 무슨 열매를 맺기를 원하시나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열흘 되던 날, 하나님이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칠판이 보이고 그 칠판에 자신의 일생, 그때 이분이 60여세였는데, 그동안의 산 일생을 적어놓은 칠판이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이어지기를, “지금까지 세계 회장은 유럽이나 미국 사람만 했다, 그러나 너는 한국사람으로서 여러 전쟁을 겪었고 전쟁통에 고생을 많이 했다. 지금도 전쟁을 겪고 고통을 겪는 여성들이 세계에는 많이 있다. 네 경험을 세계 여성에게 알려주고 전쟁 중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가를 말하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 응답을 받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서 감리교여성회 본부가 있는 뉴욕에 가서 열심히 해서 그 단체를 유엔 NGO에 가입시켜서 임기동안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 여선교회가 총 70여국에 조직돼 있는데 이중 40개국을 방문해서 귀한 간증과 하나님의 역사를 전쟁으로 고통받는 여성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전쟁이라는 것이 말이 전쟁이지 국가간에 합법적으로 사람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나라 한국전쟁 때도 한 300만명이 죽지 않았습니까? 죽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이 전쟁터인데, 그러한 전쟁을 여러차례 몸소 겪은 여인을 하나님께서 들어쓰셔서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증거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분에게 언제나 든든한 우군이었던 남편이 1990년에 질병 치료 차 일본으로 가서 수술받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장례를 치루고도 "죽음이 무엇이길래"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앉아있는데 자신이 땅속으로 쭉 내려가는 기분, 몸이 땅에 쑥 꺼지는 느낌이 들더랍니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너나 할 것 없이 사람은 다 죽는데 이 죽음을 탁상에 올려놓고 공론에 부치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나서 여러 사람을 모아서 삶과 죽음에 대해서 의논하려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이 모임의 목적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 죽음 준비 교육을 하라고, 믿음 안에서 죽음을 극복하고 죽음의 슬픔을 치유하라고 만들게 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고 이분은 김수환추기경의 말로 대답했습니다. “관문을 넘는 것이 죽음이다. 관문을 넘은 뒤에 일은 그 다음은 읽어보지 않은 책과 같다” 그 후의 일은 하나님만 아신다는 것입니다! 관문은 우리가 넘고 그 다음은 하나님 손에 달려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생각하니 죽음이 무섭지가 않다고 말합니다. 고난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는 질문에 전쟁으로 인한 고난뿐이었고, 그 고난도 생명의 하나님께서 극복하게 하셨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장수의 축복을 주신 이유를 묻자, 본인도 많이 생각하기를 ‘왜 나한테 장소의 축복을 주셨을까?’ 자신도 하나님께 묻는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오래 살게 하십니까.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데 무슨 뜻이 있냐고 하나님께 종종 묻는데, 요새 깨달은 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해서 하나님을 더 알라고 생명을 연장시켜주신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읽고 성경을 연구하는 즐거움으로 지내고 계십니다. 밤낮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일을 합니다. 성경을 좀더 깊이 알라고 이 시간을 연장시켜주신다고 생각합니다. 배우면 배울수록 꿀송이보다 단 말씀!
이분은 전쟁통에서 살아왔는데 전쟁을 겪은 그것이 곧 그의 사명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 사명은 생명을 위한 사명이었습니다! 어떻게 살아났고 무엇을 증언해야 하는가, 감리교여성회장으로서! 예수님의 사명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창세 전에 아들에게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이유도 모든 사람을 생명으로, 영생으로 이끌라는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워주심은, 그리고 우리를 사용하시기를 원하시는 곳은 죽음이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생명을 선포하고 증언하고, 많은 사람을 그리스도께 인도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려는 것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7장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3절은 2절과 같은 문법 구조입니다. 만민을 다스릴 권세를 주신 것은 영생을 주시려는 목적이라고 2절에서 말씀하였고 3절에서는 영생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려고 우리에게 영생을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권세보다 영생이요 영생보다 하나님 앎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아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 즉 보내고 보냄 받은 아버지와 아들 관계를 아는 것, 아버지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 보냄 받은 그리스도는 보내신 분과 완전히 일치되어서 하나로 움직이셨고, 온전히 복종하셨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셨고, 이땅에 보냄을 받은 사명을 완수하셨습니다. 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 관계를 알고 그 관계에 동참하는 바로 거기에 영생이 있고, 영생을 주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란 영원토록 사는 것이라기보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주어지는 게 바로 우리의 영생입니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어서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영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귐과 연합과 하나됨을 알게 하고 우리로 그 하나됨에 동참하게 하려고 영생이 필요한 것입니다.
보냄 받은 예수님은 만민 통치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서 백성들에게 영생을 주셨습니까?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살과 피를 백성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그러한 희생으로써, 만민을 영생으로 이끄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위해서 우리의 희생과 헌신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권세와 권한과 장점과 지위와 관계 등 모든 것을 동원해서 생명을 살리고 생명을 증진시키는데 헌신해야 할, 우리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우리의 최우선적 열정과 관심이 집중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우리가 예수 믿어 예수님과 하나 되어 참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이요 영생입니다. 아들은 보냄 받은 자로서 보내신 아버지에게 복종하셨습니다. 자기를 비우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온전히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사명을 이루는 삶 곧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삶에 헌신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짊어짐으로써 맡기신 사명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희생과 나눔을 통해서 영혼 살리는데 앞장서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권세보다 영생, 영생보다 하나님 앎, 즉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하나님을 더욱 힘써 알아가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온전히 하나가 되었고, 아들의 온전한 복종과 희생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처럼,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 아버지와 보냄 받은 아들을 알기 위해서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들의 순종,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 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속적 관심에 사로잡혀서, 그리고 이기적 욕망에 사로잡혀서 권세를 제일로 좋아합니다. 권세 얻기를 원하고 지위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권세가 목적이 아니라 지위가 목적이 아니라 이것들은 수단이요, 이것들을 통해서 이루어가야 할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영생, 사람들의 생명 증진입니다.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려면 십자가를 지려는 희생적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속적이지 않고 경건하고 종교적인 사람은 세속 권세보다도 오히려 내세의 생명이나 영생을 더욱 원합니다. 그래서 영생 얻기를 원하고 죽음 이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궁금해하면서 내세에서도 안전한 생명을 이어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영생 자체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영생을 주시는 다른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앎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 관계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주님의 사랑이 내 생명보다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심지어 사망조차 끊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중요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어린이들은 생명력! 이 생명을 좌절시키고 실망시키고 실족시키면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여하튼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데 우리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서 이를 위해서 자기를 비우고 희생하고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영생을 주신 목적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더욱 알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힘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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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2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3)
조금 있으면 (요 16장 16-24절)
한수산이라는 소설가가 쓴 산문집을 보니까 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이후드>라는 영화인데요 한 소년의 성장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주인공 소년이 홀로서기를 위해서 집을 떠나려 합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여러 이유로 고단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분인데 곁에 있던 아들마저 자신을 떠나 이제 집을 나가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어머니가 내뱉는 말입니다: ‘나에게 이제 남은 건 내 장례식밖에 없구나’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이 대답합니다: “엄마는 왜 40년을 앞당기고 그러세요.” 나이를 보면 앞으로도 4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겠죠. 마지막 대사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큰 소리로 외치는 말입니다: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앞에 놓인 인생길에 뭐가 더 있을 줄 알고 계속 걸어왔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별 것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겠죠.
내일이나 내년에는 뭔가 더 달라지고 뭔가가 더 있을 줄 알고 달려온 인생인데 막상 와보니 별 것 없더라는 거죠. 오랜 인생 끝에 인생의 뒤안길에서 허망하게 뒤돌아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바로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 생애 가운데서 이 말은 아마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이 뭔가가 더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함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될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고서 다시 이땅으로 돌아온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했으나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둔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죽음과 더불어 부활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내일이면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기에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테지만 또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때 제자들은 기뻐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하고서는 깊은 근심과 절망에 빠지겠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서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메시야의 고난과 이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을 여자의 해산하는 과정으로 비유하십니다. 해산을 앞둔 산모의 심정은 근심이요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해산의 진통을 겪고서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말미암아 해산의 고통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해산의 고통으로 출생한 옥동자와 같은 자녀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22절에서 재차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근심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마음에서 벗어나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으로 인해 근심,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앞에 있게 됨으로 인한 기쁨,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요, 제자들이 곧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러니까 근심과 기쁨, 이것이 임종을 앞두고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 때문에, 임종을 앞두고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근심뿐이겠지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의로우신 재판관이 입혀주실 의의 옷,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김범석이라는 서울대학병원 종양내과 의사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많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암병원의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물었습니다. 이분이 일하는 병원에는 임종방이 있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이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1인실을 개조한 방인데 거기에는 스피커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끝까지 남는 것이 청각인데 죽음을 앞둔 환자라도 들으실 수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라 당부를 하고,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으라고 스피커를 둔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 느끼면서 임종을 맞이하라는 것이죠. 어느 날 한 임종방을 들어섰는데 스피커에서 계속 트로트가 나와서 의아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트롯트 ‘땡뻘’이라는 노래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좀 이상했습니다. 굉장히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가 나는 노래인데, 꼭 이런 음악을 틀어놓은 이유가 있나, 속으로 생각해보았답니다. 이 환자는 30년 동안 영세 양말공장을 운영하시고 직접 양말을 만드셨고, 이 일로 자녀 셋을 부양해서 공부시키고 박사까지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평소 트롯트를 좋아해서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일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서 들려오는 '땡뻘' 가사를 들으니 땡뻘 가사가 그토록 슬픈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뻘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뻘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나 추워요" 노래 가사를 듣고 환자를 보니 그분이 오랫동안 지치신 것 같아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양말공장 운영하면서 얼마나 지쳤을까,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가시는 길이 춥게 느껴졌습니다. 고단했던 환자분의 삶이 눈에 잡힌 것입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된 인생길에 지치고 게다가 오랜 투병생활에 더욱 지치고 그런 모습으로 죽음 앞에 서있는 환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임종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게 삶의 현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물론 여느 사람들처럼 근심으로 맞이하겠으나 죽음 후에는 근심이 기쁨으로 급격히 변화될 것을 믿고 소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분이 1926년 생이니까 올해로 95세이신데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하고서 낸 책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둔 노 신학자가 죽음에 대한 생각과 영생의 소망에 대해서 쓴 얇은 신학책입니다. 이분은 아마 20세기에 신학계와 많은 목회자들에게 저술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분 중의 한 분일 것입니다. 이분이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내고서 일약 세계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그 이후에도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좋은 영향을 준 분입니다. 물론 여느 독일 신학자처럼 성경비평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정통파 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복음주의권 교회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내용을 많이 말한 분입니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놀란 것은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성도가 죽으면 몸은 부활하기까지 해체와 부패의 과정을 거치고 영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 품안에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는 종말의 끝에 성도의 이름을 부를 때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덧입게 될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몸의 부활을 바로 경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근거 사례로 제시한 것에서 성경적 근거는 미흡하였지만 여러 신학자들의 발언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가령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1945년 4월 9일에 나치의 한 수용소에서 처형되기 위해 끌려나갔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서 작별했는데요, “이것은 마지막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는 말도 인용하고,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말, “눈을 뜨는 즉시 당신은 부활할 것입니다.” 루터는 성도가 죽고 나면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을 터인데 예수님이 부활시켜주실 때 바로 눈을 뜨고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루터의 말을 더 인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 계산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천년도 마치 하루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첫 인간 아담은 마지막 날 이전에 태어난 인간과 동일하게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길이에 따라서 시간을 보시지 않고 시간을 가로질러 보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단 한 번에 일어났다.” 이 노 신학자가 보시기에 신학에서 소위 ‘중간상태’ 이론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고찰해보면 옳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분의 주장을 접하고 제가 좀 놀랐던 것은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설교하면서도 종종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한 것인데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도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시간 경험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시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입니다. 그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인데요,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시공간 내에서 경험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영원한 현재와 같은, 빛되신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죽음 직후에 곧바로 부활의 몸을 입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 개념에 따라 그렇게 사변을 해본 것이죠. 맞을 수도 있고 맞이 않을 수도 있는데, 하여튼 죽음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 성경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관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이 별로 의미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오늘 주어진 말씀을 ‘조금 있으면’ 다 좋아질 거라고, 비록 지금은 근심이 가득하지만 이제 곧 이어서 얼마 안돼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거라고 설교하고 싶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배격했던 평안이 없으면서도 다 잘 될 거야, 평안할 거야, 라고 선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에 부합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본인에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실은 근심의 때가 있는가 하면 기쁨의 때가 있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러한 것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병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진실에 부합할 듯합니다.
전도서 3장에서 지혜자는 인생의 다양한 때를 말합니다. 가령 기쁠 때와 슬플 때를 말합니다. 다양한 인생의 때를 말하고서 전도서 3장 11절에서 전도자는 소위 ‘영원한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물론 사람이 답답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어느 때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것이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는 확신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말씀은 세상만사의 기한과 때에 대한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구약학자는 이 구절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 구절을 좀 쉽게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달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해 아래 세상에서 살면서도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라고 조금 아쉽고 조금 안타까워도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가 되면 아름답게 되도록 다듬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해설은 구약학자 왕대일의 전도서 강해책에서 그대로 발췌한 내용임을 알립니다)
우리 인생에는 어제의 근심이 있더라도 오늘에는 기쁨이 찾아올 수 있고 또 내일에는 다시 근심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무쌍, 예측불가의 인생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근심할지라도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기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비결,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뵈올 때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근심을 벗어나 기쁨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뵈올 때입니다.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오늘처럼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뵈옵는 것이 바로 예배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본문 23-24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뵈옵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뵐 때 우리는 근심이 사라지고 근심이 오히려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구하는 것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더욱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순간에 ‘조금 있으면’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지금은 근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예배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뵈옵는 자리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때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뵈옵는 것이요,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받게 될 것임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뵈옵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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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부활절 설교)
사망과 음부의 열쇠 (계 1장 9-20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서론입니다. 사도 요한이 어떻게 해서 소아시아 7교회에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도 요한이 선지자로서 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고 밧모라는 섬에 일종의 유배를 당한 상황입니다. 거기서 주일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을 때 그 영광에 압도되어서 죽은 자 같이 되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진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손길로 그 위에 얹으시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영광스런 주님의 환상에 압도되어서 주님의 발앞에 바짝 엎드릴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요한이 핍박 받고 유배당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었었지만 지금은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역사를 주관하시고 요한 자신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니까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의 핍박과 압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한에게 유일한 주권자가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당하고 있는 핍박과 어려운 상황은 이미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우리는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성도의 삶이요, 이미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셨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길을 제시해주셨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의 생애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님에 대한 같은 신앙을 가진 자로서 자기 자신도 너희의 형제이고 너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 특별히 십자가 고난, 그리고 그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통치에 동참하여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성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환난이 예수 안에서 받게 된 환난이요 이미 예수님이 받으신 환난이요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므로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환난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환난과 고통을 잘 참고 인내함으로써 예수님의 은밀하고도 역설적인 왕노릇에 동참하고 있는 자 곧 성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주님으로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성도에게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위로요 우리의 심판이시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었다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전체 삶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죽음이요 죽고 결산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죽음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우리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이전의 죄악된 삶이 다 결산되었고 옛사람의 죄악을 청산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덩달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는 극이 세례식입니다. 짧은 드라마요 퍼포먼스가 곧 세례식입니다. 부활주일에 세례식을 갖는 교회 전통이 그래서 옹호가 됩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전에 먼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단강에서 물에 잠기셨습니다. 원래 ‘세례’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물에 잠기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잠겨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동방교회에서 혼돈의 물에 갇혀 죽음에 이른 것으로 봅니다. 혼돈의 물, 구약성경 전반에서 물은 혼돈과 암흑의 세력이나 심판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물은 특히 노아 홍수에서 물로써 심판하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혼돈의 물, 흑암의 물, 죽음의 물, 심판의 물에 잠김으로써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는 “내가 받는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는 이유가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길인데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야로서 왕권을 얻으면 자신들을 예수님의 왕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실 때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7-38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 곧 고난의 잔, 죽음의 쓴 잔을 말씀하고서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죄인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아울러 하나님께 처절하게 버림받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내다보면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돈과 죽음과 흑암과 심판의 물에 푹 잠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세례였던 것입니다. 물에 잠긴 예수님이 따시 물 위로 올라오신 것은 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내다보며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물밖으로 나오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독생자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부활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 빠지는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점철되고 죄악으로 누적된 삶, 총체적인 나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지, 우리 혼자 죽는 것이라면 영원한 멸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해서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게 하려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빠진 물이 그저 심판의 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물이 됩니다. 노아의 홍수의 물이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구원의 방주를 그 위에 뛰우는 구원의 물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노아의 가족 8명에게는 그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물이었던 바, 그들이 노아의 방주 구원의 방주에 타고 물 위에 띄움을 받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더 이상 심판의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에게는 구원하는 물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그 물은 곧 세례를 가리키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고 깨끗해져서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주가 물을 타고 가다가 결국 아라랏산에 걸려서 정박하고 그들이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아서 구원에 이른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계신 어린양의 보좌 앞까지 인도되어 완성에 이르는 구원과 같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란 것이 공동체 입문의식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입문의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오신 하늘 아버지의 음성처럼 우리가 세례받을 때 들려오는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이후 평생의 삶에 걸쳐서 하나님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전 여정 동안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변화되어가는 계속되는 세례의 과정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셔서 죄인의 대표로서 물에 빠져 죽으신 것이요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시므로 물에서 걸어나오신 것이라면, 우리의 세례는 예수님과 합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하나되기 위하여 받는 세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고 죽으심과 합했기 때문에 그의 다시 사심에 합해서 부활에 이르게 됨으로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처한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서 그 이유를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부활하셔서 이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 이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에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죽음과 인생의 지옥행의 키를 쥐고 계시다는 뜻도 물론 포함돼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심지어 예수님이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오셨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극심한 죽음의 고통, 마치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온몸으로 받으실 정도로 육신적 정신적 형벌과 고통을 받으시고서 지옥에서 생환해나오신 것이 곧 그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 이를 근거로 지옥강하, 지옥에 내려가심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실제 4세기경부터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들어갔고 이후에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여러 논란도 있었지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은 사도신경의 조항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가 들어가는 게 맞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역사적으로 지옥 강하가 빠져 있습니다만, 종교개혁가들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심을 고백하고서 사흘 만에 부활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존 칼빈과 우리 교단의 신학인 개혁신학은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물리적 공간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전후에 극심한 영적 고통을 받으심으로 해석하며 지옥 강하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통해서 드러난 극심한 고통, 곧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 고통이나 혹은 장사지내고서 사흘 간 죽음에 머문 기간에 받은 죽음의 고통이 지옥강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으로 고통과 사망을 몸소 겪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과 같은 인생의 모든 혹독한 고통을 영적으로도 겪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사망의 열쇠뿐 아니라 지옥의 열쇠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영역뿐 아니라 지옥의 영역 또한 주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것이요, 죽음에게 종노릇하는 인생에게 생명의 소망을 주실 뿐 아니라, ‘내 삶이 지옥같다’고 탄식하고 절규하는 인생들에게 먼저 자신이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통과 하나님의 버림받음을 경험한 자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환난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심을 알려주시려고 자신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9년에 “죽음을 준비하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너는 지옥과 영원한 고통을 네 자신 안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천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는 너 때문에 지옥에 갔고, 영원히 저주를 받은 자처럼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너를 보고 너 자신 안에서 너를 보지 마라... 그는 지옥의 문을 부숴버렸고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이끌어내셨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마치 지옥에 내려가신 것처럼 고통을 받으셨던 바,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지옥의 고통과 같은, 마치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찾아와주셔서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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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0)
왜 기쁨이 아니라 근심인가? (요 14장 25-31절)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근심한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걱정할 일도 없겠죠. 걱정을 하고 신경이 쓰인다면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뭔가 평소 같지 않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면 부모로서 신경이 쓰입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이의 표정이 이토록 어두운 걸까, 부모로서 걱정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의 얼굴 표정에 민감하고 관심이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죠.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를 도와주고 싶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려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라는 바른 교회론을 지닌 성도라면 교회 안의 지체들을 향해서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다른 성도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고 아픈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과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한 몸된 교회의 지체를 함께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근심할 일도 많아집니다. 신경 쓸 사람이 많아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래도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근심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은 내 자신이 버림받을까봐, 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까봐, 내 자신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할까봐, 내 자신이 창피를 당하까봐, 내 자신이 불편할까봐,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내 자신의 생존과 생명이 위협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다른 누구보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 대부분은 바로 나 자신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온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자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받게 될 고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근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근심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인격에 반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두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이유 있는 근심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어난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는 더 큰 이유는 자신들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였더라면 자신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장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아버지의 집에 가서 너희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갔다가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와서 미리 예비한 거처에서, 즉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너희를 데리러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추가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예수님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고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스런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크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의 미션 곧 사명을 완수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했습니다만,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에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 그러니까 아버지께로 감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기보다 기뻐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뒤덮은 근심과 두려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이요, 어떤 신학자가 예리하게 말했듯이, 제자들에게는 소유하는 사랑이 있었을 뿐 베푸는 사랑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니까 소유하려는 사랑이요 집착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으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마음이 편안하고 좋으니까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떠나감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완수하고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제자들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이게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소유하려는 사랑만 있었지, 베푸는 사랑,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손해와 어려움도 감수하려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한석봉 어머니가 글씨 공부를 위해서 절에서 수학하던 석봉이 돌아왔을 때 “아이구 내 새끼”, 반가워했습니까?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하고 절에 들어갔는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석봉이 10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석봉의 어머니는 자식이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 품에 안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내보냈지 않았습니까. 불을 끄게 해서 자신은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게 해서 불을 켜서 보니까 글씨가 아직 삐뚤빼뚤 부족함을 깨닫게 하고서 즉시 돌려보냈죠. 자식을 사랑하는 홀어머니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식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팔아서 뒷바라지할 정도인데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자식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모정이 있었음에도 더 큰 사랑은 오히려 글쓰기 연마를 위해서 자식을 절로 돌려보낸 것이죠. 이 이야기가 월출산 아래 있는 영암 구림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죠. 그래서 석봉이 원래 개성 사람인데 글씨 공부를 위해서 스승의 고향 전남 영암의 한 절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이 정설입니다. 하여튼 이것이 어머니의 더 큰 사랑입니다. 자식을 조금만 사랑했으면 품에 안으려 했을 테지만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떠나보내주는 어머니의 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의 유익에 반하는 것이어도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포기하고 희생하고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냐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곧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었다면 제자들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지금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자기중심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떠남과 죽으심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곁에 두려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평가와 진단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에 대해서 지금 제자들이 기뻐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장해서 적용해보면 우리 안에 아가페 사랑이 없어서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 없고 자기애가 가득해서,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고 자기중심성으로 가득차서 기쁨이 없고 대신 근심과 두려움뿐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한 제자들의 현주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게는 아가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무한히 흘러넘쳐서 받게 되는 아가페 사랑,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순종에서 드러나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 그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입니다.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내어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으로서 진정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인생의 가장 큰 고통 앞에서도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도 잠깐 근심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을 선택하고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을 확신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볼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계속되는 설교가 이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을 말씀하시고서 ‘나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9-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가페 사랑이 예수님 안에 흘러들어왔고 예수님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기쁨, ‘내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서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 자기중심적으로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이 기뻐하셨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 사랑과 기쁨은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기쁨입니다. 환경에 빼앗길 수 있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조건에 좌우되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누릴 수 있는 절대적 기쁨입니다. 상황에 따라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예수님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실 때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절대적 기쁨의 비결을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금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희생적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으로서 결코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그저 내어주고 베푸는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사랑이 제자들의 심령에 흘러들어와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 절대적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심지어 기둥 같이 여겨지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절대적 기쁨이요 절대적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들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고 받고 누리는 사람은 절대적 기쁨을 소유하고 누릴 뿐 아니라 또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작별하면서 유산으로 남겨주시는 것이 평안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평안 곧 “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기중심성과 자기애를 강화시켜주므로 우리에게 임하는 평안입니다. 자기의 재산이 많아졌거나,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많아지므로, 혹은 지위가 올라가고 명성이 드높아지므로, 또는 비난이 아니라 칭송을 들으므로 자기중심성과 자기애에 보탬이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얻게 되는 평안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주시는 예수님의 평안은 절대적 평안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기를 강화시켜주고 지탱시켜주는 평안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절대적 평안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평화요 그래서 얻게 되는 내적 평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의 평안, 내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인데요, 이 평안도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부어주실 때, 제자들이 얻고 누리게 될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후에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깨닫게 될 말씀, 곧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그러니까 절대적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할 때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상황에 좌우되는 기쁨이 아닌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요한복음 14장과 이어지는 15장에서 거듭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참혹한 고통을 내다보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면서 그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우리 자신의 평안, 우리 자신의 사랑, 우리 자신의 기쁨이 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우리에게 나의 평안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들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동 감화, 성령의 충만한 은혜,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절실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이때 비로소 우리는 절대적 사랑,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님의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처음 세 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곧 아가페 사랑, 절대적 기쁨, 평화 곧 평안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누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과 절대적 평안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넘치시므로 말미암아 어떠한 형편과 상황과 조건 아래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을,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주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으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기쁨과 예수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21년 3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9)
상호 내주 (요 14장 15-23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방식은 ‘상호 내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므로 온전히 하나되시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신다 함은 서로를 향한 온전한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됨을 일컫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의 띠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고 온전히 하나가 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상호 내주로 이루어집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써 삼위일체를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호 내주를 이루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상호 내주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근심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 자신을 믿을 것을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이 근심에 휩싸여 있음을 보시고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 곳이 있도록, 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러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처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요 지금도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거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할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온전히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내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의 마음 속에, 개별 신자의 각각의 마음 속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로 번역한 단어와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한 단어가 같습니다. 예수님을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뜻은 법정에서 증인이든 대리인이든 변호사든 조언자든 상담자든 법률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마치 법정에 서는 것과 같은데요, 그 법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도와서 변호해주시고 어느 때는 보증도 서주시고 대리인 역할을 맡아주시는 대언자 곧 보혜사가 예수님, 의로우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보혜사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로 지칭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이땅에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거처를 잡으시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말하는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알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정확하게는 나 자신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호 내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으로 인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의 상호 내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가 곧 구원입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 삼위일체를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상호 내주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혜사 성령을 너희가 각각 마음 속에 받으면 아들과 아버지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알게 될 것이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내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알게 될 뿐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 관계처럼 아들과 개별 신자 각각이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어주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이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은 예수님의 떠남, 십자가의 죽음이 아버지의 집 안에다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시려는 것이었다면, 지금 오늘의 말씀은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의 마음 속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 죽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가 거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거룩해져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 죽음의 효력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상호 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을 보내어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굳게 믿으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게 않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화염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요 서로 사랑함으로써 상호 내주하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호 내주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함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함이 곧 아버지를 사랑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와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아버지의 음성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면 그 자체로 입증되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버지”로 자연스레 입증되기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일치되게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는 서로 사랑하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문제는 상호 내주를 위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녀로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로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주십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예수님이 내 안에 분명하게 계심이 드러나는 것이요,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실천할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뚜렷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겠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도 함께 설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도 구원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일방적 통보요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은혜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의 우리의 참여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로 존귀하게 여기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파트너인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둠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격상됨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서 자녀 삼아주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거처가 조성되어 거주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안에 거처 삼으셔서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요 서로 사랑함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개별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고 상호 내주를 이룸으로써 성도들 간에 사랑 안에서 하나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상호 내주를 사랑으로써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에 상대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관심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부에서 있었던 사랑이 세상을 향한 운동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운동에 참여해서 서로를 향해 공간을 내어주고 공간을 차지하고 상호 내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상호 내주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머물러 있고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위대한 선교도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전도와 선교적 발걸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내주를 이루는 것인데요, 그 첫 걸음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주고 받는 사랑이요, 그 사랑 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상호 내주를 위한 사랑의 운동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또다시 설명될 필요가 있고 또 다시 설명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기 위함도 아니요, 우리의 구원을 우리가 너무 쉽게 의심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깊고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가 계속 오가고 있는 우리는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랑의 확신 가운데 든든하게 서 계심으로 인해서 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선교적 전도적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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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8)
가장 큰 능력 (요 14장 1-14절)
최근 CBS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서울 오륜교회 김은호목사님이 출연해서 자신의 목회 여정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 된 순간이 언제였나요?” 대답합니다. 성도들의 임종 예배 때라고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임종예배를 위해서 병실 문에 들어서면 가족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환자들 중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얼굴빛이 흑갈빛으로 변해 있고,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둘러선 가족들에게도 슬픔이 가득합니다. 먼저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부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서 간단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이 영혼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셨고,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이땅을 떠날 수 있다는 영광스런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환자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얼굴빛이 변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별의 슬픔 또한 사라집니다. 복음을 전하고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합니다. “지금 눈을 감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의식이 없는 분도 있지만 복음을 듣고서 확신을 가짐을 어떤 이는 말로 혹은 눈빛으로 또 고개 끄덕임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 “성도님, 잠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요.”라고 이별하고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받습니다. “목사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이 순간이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된 때라고 말합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확신시키고자 성도의 마지막 순간에도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교회를 섬기면서 참으로 많은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임종예배뿐 아니라 성도의 부모님의 임종예배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연락을 받고 갔지만 미처 신앙을 갖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계신 분을 위한 임종예배도 있었습니다.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저 역시 복음을 전했는데, 임종이 가까운 분들 중에서 한 사람도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꼭 임종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죽음이 가까이 온 분들은 병상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도의 임종예배 때는 주로 누가복음 23장 4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를 드리며 섬기신 분들의 임종 순간에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된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공고히 해가는 게 성도이니까 임종의 순간에도 예수님과 온전히 합해서 온전히 일치해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죽음도 예수님처럼 맞이하고 죽자는 것입니다. 온전히 아버지 품에, 아버지 손에 맡기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멎으신 예수님처럼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고, 찬송가 가사처럼 “숨질 때에까지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3절)라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 영생을 얻는 것, 내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확신은 예수님과의 연합,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그렇게 부부의 하나됨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합해서 온전히 하나됨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과 말씀과 같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과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즉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니까 우리가 어찌하든지 예수님과 합해서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연합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은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예수님의 고별 강화, 혹은 고별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아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식사를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사이에 제자들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당국자가 보낸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가 됩니다.
고별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핵심적으로 가르치시고자 하는 말씀은 스승의 떠남에 임박해서 혼란에 빠지고 동요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키고 예수님의 떠남으로 인해서 그들이 얻게 될 더 큰 유익,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혼란스럽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 중 한 명 가롯 유다는 이미 뛰쳐나갔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조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겪으실 하나님의 버림과 하나님의 진노 받을 것을 내다보시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 12:27)라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스승이 동요하니 제자들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지막 식사 자리라고 예감된 자리에서 배신할 제자가 뛰쳐나가고 수석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도 뒤숭숭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뒤숭숭하고 불안하고 스승의 임박한 죽음 예고가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어야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지낼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지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뿐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어서 안심하자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임종의 때에 마지막 호흡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셨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아버지의 집에서 거할 곳을 마련하는 것임을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상황에 맞게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유치원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가 생생하게 와닿도록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것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근심이 가중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마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떠남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처’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동사 ‘거하다’, 가령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등에서 사용된 ‘거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혹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떠남과 죽음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인데 아버지의 집에 너희들을 위한 거할 곳을 마련하고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와서 너희를 그 거처로 영접하여 너희도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효력과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영원한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 안에 우리가 거하게 해주시겠다는 구원의 확신이요 내세에 대한 확신을 비유로써 제자들에게 쉽게 안심시키려고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이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려는 길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길, 예수님이 떠나서 가시려는 길은 목적지가 아버지 품입니다. 아버지 품속에서 독생하지 예수님께서 아버지 품속으로 되돌아가시려는 길입니다. 그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함은 당연하겠죠. 제자 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방금 읽은 6절의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의심을 품기로 유명한 도마가 예수님께서 물었던 것입니다.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6절입니다. 그 길,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나있는 길, 하나님에게로 난 길, 하나님 품속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있는 그 길은 바로 예수 자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소유하면 바로 아버지 품속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을 알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길을 알고 싶어하고 도를 알고 싶어하고 삶의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다 길(Way)입니다만,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께로 나있는 길, 그 길 자체가 되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진리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해주시는 진리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거룩한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의 신앙개념의 확립이나 신앙사상의 발전이나 믿음의 견고한 터전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도 생각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을 성령으로 확립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지만 온전히 사랑의 연합 가운데서 하나이심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시고 그래서 또한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이 구원이요 그렇다고 해서 구별과 구분이 말소되지 않은 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지만 온전히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구별됩니다. 자기를 아들로서 자기를 비움으로써 아버지와 구별됩니다. 아버지에게 복종함으로써 아들로서 구별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피조물로 창조주와 구별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복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별됨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에 결국 성령이라는 인격이 계시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일치되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론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결국 같은 내용이라고 말하는 신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원래부터 계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활동인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결국 같은 말이라는 이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결국 우리 구원을 위한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같다’는 신학명제를 제 자신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한 자신을 믿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 되어야 할지 예수님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온전히 하나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이요 그래서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진정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요 절대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믿음의 능력이요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능력입니다. 기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3-14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음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어제 우연히 차를 타고 오다가 극동방송을 들었는데 김장환목사님이 진행하는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게스트로 개원의협회장이고 산부인과 의사회장이신 김동석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분이 이제 곧 있을 의사협회장에 출마하시려고 하는 분이라는 소개였습니다. 이분의 아내가 사랑의교회 이혜옥집사인데요, 이분이 1990년대 초부터 사랑의교회에 출석하시고 구역모임 다락방에도 참여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런데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의사 부인이요 살기 좋은 강남에, 자녀들도 잘 자라주고 있어서 참 행복한 여자라고들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허전함과 늘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이 뭘까 알려고 생각도 하고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2007년에 ‘아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서 참된 평안이 찾아왔고 모든 관계들이 달라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말씀의 능력대로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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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7)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요 13장 1-13절)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때는 십자가에 들리는 순간입니다. 십자가 들림 자체가, 십자가 죽음 자체가 인자가 영광을 얻으시는 때입니다. 보통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과 치욕과 극심한 고통의 형벌이어서 명예나 인정이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멉니다.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말은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람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무한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인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알려질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영광스럽게 빛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므로 아들이 또한 영광스럽게 된 사건입니다. 아들이 십자가를 짊어지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셨고 아들 또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의 관점에서 보면 수치와 치욕과 극심한 고통뿐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므로 아들이 영예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어떠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가 잘 되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고 형통해져서 그리고 내가 상을 받았기 때문에 상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얻은 영예가 하나님에게 더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람의 영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비록 힘들고 감당하기 버겁고 무거워서 내려놓고 싶은 짐과 같은 험한 십자가를 우리가 붙들고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자기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십자가가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 감화와 능력이 없이 우리가 어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 가령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라고 말하며 가치관의 변화가 나타날 때, 혹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줄 때,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할 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갈 때,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이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영광 얻으려면 십자가를 짊어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불명예요 수치요 인정받지 못한 죽음이지 결코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한다, 내가 양보한다, 내가 용서한다, 내가 죽는다’, 이것은 결코 사람에게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를 거스르는 게 십자가이면서 동시에 십자가는 인류 역사 현상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정점입니다. 인간 역사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폭력도 불사하는 죄악의 역사입니다. 자신이 희생하고 양보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는 역사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보다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역사에서는 늘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형성한 역사를 집약해주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침으로써 십자가는 인류 역사 전체를 요약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인류 역사를 거슬러 나타난 인류 역사의 전환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극명한 나타남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크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구현해내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에게도 보여진 적이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반향을 일으켰던 전무후무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 충만하게 흘러넘치지 않았던들 예수님을 십자가를 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충만하게 흘러 넘쳐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는 전형적인 노예 형벌로 알려졌고 시행되었습니다. 자유민의 몇배에 달하는 제국의 노예들이 당시 로마경제체제를 이끌고 가는 주역이었고 소수의 자유민이 다수의 노예들을 통제하는 수단 중의 하나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공포와 두려움이 노예들을 “꼼짝 마!” 했던 것입니다. 수시로 대규모로 노예들을 십자가에 달아 무자비하게 죽임으로써 노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통제하고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때문에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 되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빌립보서 2장 7-8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단순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종의 죽음, 노예의 죽음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싯구, “애비는 종이었다”처럼 예수님은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낮춰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죽음 또한 십자가에서 죽어 노예 형벌을 받고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노예로서의 불명예로운 죽음이요 수치스런 죽음이요, 인간의 죄악된 폭력이 집약된 역사의 정점이요, 역사 현상이라 불리는 모든 인간의 죄악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가 한 점에 모아짐이요, 이와 동시에 역사에서 전혀 일어난 적이 없고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자기 비움과 낮아짐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극명한 표출입니다. 십자가가 비록 사람의 영광은 아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절)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은 알지 못할지라도 이 후에는 깨닫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래서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인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험한 십자고 붙들고 짊어지고 가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필연성,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시연해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하나의 행동을 선택해서 제자들에게 시연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발씻음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 선택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표출이요 종이 받은 형벌이요 인류 역사에서 언제든 흔히 나타났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을 선택한 데서 예수님의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은 당시 노예가 하는 일이었고 유대 문헌에 보면 유대인으로서 노예인 자에게는 주인의 발을 씻기게 해서는 안된다는 랍비의 가르침이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노예의 일입니다. 특별히 이방 노예의 일입니다. 십자가가 누구라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인 것처럼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은 충격적 사건입니다.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이요 감동이었고 십자가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감격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성도들을 데리고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단기선교를 진행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대다수가 회교도이지만 발리섬만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들입니다.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을 한 400명 모았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주가되는 기독교 드라마를 보여줬습니다. 25분간 굉장히 감동적인 음악드라마를 보여주었는데 그 드라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연출한 장면도 있었습니다.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6학년 아이들, 13세 정도 된 아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는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음악극을 보여주고서 이 아이들 400명에게 단기선교대원들이 세족식을 하는데 물론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았지만 발을 씻어줬습니다. 세 시간 동안 400명을 한 사람씩 다 씻어줬는데 발을 씻어줄 때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이 아니라 극과 극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을 전했던 것입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저층민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발이 다 부르터 있는데, 그 발, 가장 천한 발을 씻어주는 것, 힌두교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발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던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아이들에게 실제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김회권목사의 요한복음 설교 중에서 인용)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식사 전에, 그러니까 다음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의 시연을 통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 지금은 다 이해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의미를 제자들의 기억에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 분명한 것처럼 제자들의 발씻음도 제자들에게 낯선 충격이요 일어나선 안될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내발을 씻으시나이까”(6절)고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는 말씀은 베드로 네가 나한테 받을 분깃이 없다, 받을 유산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얻게 되는 유익, 그가 얻을 분깃, 그가 상속받을 하나님나라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아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가르쳐주심으로써 십자가의 유익,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의 구원을 베드로에게 주시려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성격이 괄괄하고 화끈한 베드로가 발만 씻겨주실 것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드로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목욕을 한 자들이니까, 그러니까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므로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고 발을 씻을 필요는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소위 세속식의 두 번째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성격과 의미를 생생하게 예시해준 사건이 발씻음이요 두 번째 의미는 목욕한 자가 돌아다니다보면 발이 더러워지니까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어도 발을 씻을 필요가 생기듯이, 우리가 죄 용서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사람이 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죄악된 육체 안에서 역사하는 옛사람이 저지른 죄악이 늘 있기 마련이어서 그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 발을 씻김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함 받아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일서 1장 8-9절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발이 계속적으로 씻겨져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 세 번째 이유는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실천을 교훈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 13-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는 본보기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을 십자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실제로 행하신 이유는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의 구체적 예시오, 이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을 실천해보임으로써 제자들 역시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종이 되셔서 종의 형벌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데,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구체적은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종노릇은 일반인에게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일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주와 선생이 혹은 주인이 종노릇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었고 이후에는 제자들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죄악된 인간 역사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제자들만이 그 사랑으로써 행할 수 있는 사랑의 종노릇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고 무거운 짐도 짊어지려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노릇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종노릇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종노릇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할 수도 없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종노릇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는 것입니다.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분이 최근 에세이집을 내고서 한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까 그는 국제적 구호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 회장을 맡아 6년 넘게 노인급식소에서 직접 섬김을 실천하고, 그들을 위한 빵공장과 양로원 등 4곳에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매주 월·목요일 오전시간은 아마추어 요리사로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합니다. 이러한 섬김을 실천하게 된 계기는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나가라. 나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듣고서입니다. “직접 몸으로 뛰는 나눔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라는 빌문에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행위가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서울역 앞에서 알코올중독자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면서 제가 몰랐던 세계를 접했죠.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굉장한 행복감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서 점점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됐어요.” 이분은 강조합니다. “조금 더 안락한 사람들이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여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께 굴복하고 그분께 경배를 올려드리는 게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무력하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 앞에 왜 꿇어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까? 그분께 우리가 설복당하고 굴복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기꺼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내어드리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게 아닙니까? 세상의 많은 권력자와 통치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설령 총칼로 나를 굴복시켜 그 앞에서 우리로 굽신거리게 할지라도 마음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어린양께 기꺼이 복종하여 그분 앞에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에 굴복당해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턴의 실낙원에서 마귀는 가장 자주 “나는 굴복할 수 없다! 나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마귀의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하고 예수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의 발을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발을 씻겨주어라!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사랑의 종노릇을 실천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세상을 향한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요즈음입니다. 비록 십자가의 깊은 진리와 의미를 우리는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의 신앙적 과제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지음 받은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넘치므로 그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때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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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6)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요 12장 23-28;37-43절)
최근에 홍정욱씨가 <50>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냈습니다. 작년에 만 50세가 되어서 50개의 에피소드로 에세이집을 출판했습니다. 이분이 오래 전에 <7막 7장>이라는 책을 내고 유명해졌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사업가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소위 촉망받는 젊은피였고, 지금도 선거 때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호출되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이분은 인생의 목적이 하늘의 소명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소명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주어진 소명을 다함으로써 세상을 떠날 때 ‘내게 주어진 이 귀한 인생, 정말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위대한 비밀은 내 인생에 부여된 독특하고 은밀한 비전을 읽어내는 것, 존재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극소수가 되는 것이다”라고 또한 말합니다. 이분이 보기에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극소수에 불과한데, 자신은 하나님의 소명 곧 존재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인 소명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고 이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하나님이 나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시는 삶, 이것이 일반적인 소명입니다. 반면에 홍정욱씨가 생각하는 소명은 본인에게 특수한 소명, 그러니까 일반적인 소명이 자신에게 특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소명을 말한 듯합니다. 그것을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고 일단 찾게 되었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느낌을 책을 읽으며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삶이요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됨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소명을 의식하고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막는 장애물이 사람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못하고 대개는 사람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을 얻고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 영광을 보시는 걸까요?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까요?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을 해석하는데 중요합니다. ‘영광’이 가장 처음 나오는 데가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서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습니다. 말씀의 육화, 혹은 말씀의 화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서 걸어다니고 눈에 띄게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는 영광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들만이 가진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고스란히 그대로 반영하고 반사하고 드러낸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 그리고 아들이 그대로 드러낸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진리’는 보통 생각하듯이 사랑과 공의, 은혜는 사랑이고 진리는 정의, 은혜와 진리가 함께 가야 한다, 사랑과 정의를 함께 그 인격 안에 지니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고 그 인간 육신 안에 감쳐진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는데 그 영광이 곧 ‘은혜와 진리’라는 말씀인데, ‘은혜와 진리’는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언약을 체결한 직후에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를 제외하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시겠다고 모세에게 통고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중재의 기도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졌고, 하나님께서 진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사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전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문제에 대해서 모세가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거듭 중재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청합니다. 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기도의 응답이 출애굽기 34장 5-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할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바위 틈에 있는 모세를 덮었다가 지나가면 덮었던 손을 거두어서 하나님의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기보다 들려주셨습니다. 그 들려주신 하나님의 영광의 내용이 바로 방금 전에 읽은 출애굽기 34장 5-6절입니다. 한 마디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가시적인 영광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의 영광스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빛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빛나는 성품이란 곧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와 진실’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멧’입니다. 헤세드는 언약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고, 에멧은 언약을 지키고 언약에 충성하고 언약에 신실함을 뜻합니다. ‘인자와 진실’ 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인자와 진실’이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곧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난 성품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의 빛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의 광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영광스럽고 빛나게 하는 것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빛나는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장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여러차례 나옵니다. 12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에 들림 곧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십자가 들림 자체를 영광 받으시는 사건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이나 승천으로 영광을 받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이것이 흔히 다른 신약성경에서 부각되는 점인데 반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 들림 자체, 십자가 죽음 자체가 곧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때요 하나님이 영광을 보시는 때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가 곧 영광이라는 것인데요, 십자가에서 곧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사건이요, 예수님 자신에게도 십자가 들림 자체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수치와 모욕과 치욕과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는 때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순간이요 주의 영광이 계시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건임을 요한복음은 강조합니다.
보통 십자가라 함은 너무 저주스럽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고통스런 형벌이라 사람들의 대화거리로 올리는 일도 피할 정도로 혐오스런 형벌이었던 당시 시대의 현실에 비추면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강조는 지극히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땅에 자신을 보내셨다는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땅에 자신을 파송하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목적을 이룰 때가 가까웠음을 아셨습니다. 즉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될 때가 이르렀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바로 이를 위하여 온 것이고 바로 그때가 이르렀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가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때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2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때 곧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영광스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곧 들이닥칠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왜 영광입니까? 십자가 들림 자체가 왜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때입니까? 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건입니까? 오히려 십자가는 수치요 모욕이요 고통이요 치욕이요 입에 담기도 어려운 형벌인데 왜 십자가가 영광입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빛나는 성품, 하나님의 속성의 광채가 우리의 마음에 빛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성품 곧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곧 십자가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향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이 곧 십자가이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두 구절을 뽑아서 인용합니다. 인용하고서 이 말씀 두 개가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두 구절은 바로 이사야 53장, 너무나 유명한 고난받는 종에 관한 구절 하나와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을 때 보게 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사야가 듣게 된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구절입니다. 우선 본문 요한복음 12장 38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우리가 고난주간 때 많이 읽는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에 대한 기록 중에서 53장 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예수님,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고통가운데 죽으시는 예수님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서 또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는데 이번에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소명환상 대목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이사야가 보고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그를 하나님께서 제단 숯불로 입술을 정결케하시고서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대목입니다. 본문 39-4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전할 메시지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강팍하게 말들고 오히려 사람의 눈을 감게 하고 그 결과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심판의 말씀이 될 거라는 사명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인용하고서 요한은 본문 41절에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본 여호와의 보좌 환상이 곧 영광스런 주님을 본 것이요 그래서 주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고난받아 십자가 들리는 고난받는 종과 관련해서 주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해석한데 요한의 해석의 심오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자체에도 보면 고난받는 종이 들리는 사건을 높이 받들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예수님도 그리고 요한도 알았던 것입니다.(사 52:13) 십자가 들림이 곧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사건이요, 십자가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가장 빛나고 영광스런 성품이 십자가에서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곧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사랑이라는 속성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자기를 내어주시고 희생하신, 친구를 얻기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받은 본래의 소명과 목적을 이루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고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영광을 보시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때,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드러나는 것만이 하나님의 가장 빛나는 영광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십자가가 인간적으로는 수치요 모욕이요 희생이요 포기요 비움이요 양보요 죽음이요 고통이요 치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영광인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수치요 모욕이요 희생이요 포기요 비움이요 양보요 죽음이요 고통이요 치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사람의 영광을 구합니다.
영광이라 함은 보통 명예, 인정, 칭송, 찬란하게 빛남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명예, 타인에게서 인정받음, 칭송을 자신의 영광 삼아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가 영광임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고 크게 드러난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기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기보다 소위 사람의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43절에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러분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십자가가 살아 있습니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바로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받고 누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는 십자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십자가, 내가 대신 무거운 짐을 짊어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안식을 주는 십자가, 내가 대신 희생함으로써 몸담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는 십자가, 내가 포기하고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편케 하는 십자가, 내가 비록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케 하는 십자가, 이러한 십자가가 곧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이 얻으시는 영광이요 동시에 우리가 누릴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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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5)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요 12장 1-11절)
10년 전에 소천하신 여류 소설가 고 박완서씨의 따님이 어머니의 글 중에서 골라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짧은 글의 제목이 ‘사랑의 입김’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할머니로서 손자를 곁에 두고 보면서 아이가 다치거나 곤충에게 물렸을 때 물린 자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호호, 호호’하면서 상처에 입김을 불어준 일을 매개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여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입김을 자주 받았던 것입니다. 넘어지거나 다쳤을 때 빨간 소독약도 귀했던 시절이라 약 제대로 못 발라봤지만, 그때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저 입김을 ‘호오, 호오’ 불어주셨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다쳤을 때만이 아니라 감자나 고구마나 밤을 화롯불에 꺼내서 껍질을 벗겨주시면서도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식혀주셨습니다. 국이나 찌개도 그렇게 식혀주셔서 먹기에 적당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온 집 안에 서려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면,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에 문을 들어서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집안 전체가 썰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직감이요 마음의 느낌이지만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급식을 줍니다만 예전에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죠. 학교에서 먹는 도시락에도 음식 곳곳에 어머니의 입김이 서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작가는 말합니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옴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입김을 통해 경험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완성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입김이요 하나님의 숨결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입김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 가운데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처럼 사랑할 수 있었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말씀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집에서 잔치식사 중이신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던 것입니다. 이 잔치 자리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마리아의 오빠였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의 기적 이후에 배설된 잔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되는 가롯 유다가 이 여인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삼백 데나리온, 당시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되는 큰 가격이 나가는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구제할 수 있을텐데, 왜 쓸데없이 낭비하느냐는 비난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본문 7-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은 더욱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자들을 편애하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난한 자, 어려움에 처한 자, 육신이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마땅하겠죠. 그런데 예수님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구제나 이웃사랑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 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간에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착복하거나 그 구제와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하시고 옳다 인정하심은 자신에게 좋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이웃사랑도 가능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가리키는 상징을 읽어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다소 직관적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까 통찰한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그 발 앞에서 즐겨 들었던 마리아이다보니 예수님께서 예고한 죽음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캐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성의 직관으로서, 사랑하는 예수님이 떠나실 것 같은 직감에 이끌려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제 한 주 후에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임을 인정하시고 마리아의 행위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는 이성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직감과 느낌에 따른 것이든, 혹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미리 알았든 아니면 몰랐든,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마리아의 전심을 담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 없는 예배, 예수님 사랑 없는 기도, 예수님 사랑 없는 찬양, 예수님 사랑 없는 구제, 예수님 사랑 없는 전도, 예수님 사랑 없는 성실, 예수님 사랑 없는 종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너무나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을 이야기한 것입니다만 사랑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있고 이웃 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고 그 사랑의 역동적인 운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누가 말했느냐면 어거스틴입니다. 고백록과 신의 도성으로 너무나 유명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근원하고 하나님께 원천을 두지 않은 인간의 사랑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원천을 두지 않는 인간적 사랑은 두 가지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사랑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 자신을 그 사람에게 완전히 묶어 두게 되며, 우리 자신의 모든 기대와 환상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이 두가지는 사랑의 왜곡이요 파괴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를 떨쳐버리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을 왜곡됨 없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원천으로 하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덧붙여 말합니다: “사랑은 부분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뿐이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므로 무엇이든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향한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교회 사랑이든, 가족 사랑이든, 진정한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로완 윌리엄스 저 참고)
그래서 유다는 틀렸고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지만, 유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관건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상식을 초월하고 결코 계산되어질 수 없는 이례적인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마리아는 이토록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마리아에게는 특별한 상황이란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게 된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에 더욱 확실히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깨달을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래서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공통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처했을 때,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서 수렁에서 건져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안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참 힘들다고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나는 왜 그런가’라고 신세타령을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우한 환경이,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이, 무겁고 힘든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무대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수많은 찬양의 시들은 그냥 감사찬송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억울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끌어올려진 보배와 같은 하나님 사랑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움 속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찬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해도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유지되려면 늘 고통에 처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한때 어렵고 힘들 때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힘든 것도 아니고 역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의 연속이고 뭐 큰 이슈가 없는 인생이다보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게 되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마리아가 처한 비극과 절망과 견줄만한 큰 고통은 없었다 해도 크고 작은 삶의 어려움이 있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상황이고 늘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신실하고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되지 않은, 복음의 진리에 기초한, 그렇게 형성된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둘째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직관으로든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서든 아니면 상황의 흐름을 분석한 것이든, 어떤 이유로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지했습니다. 비록 잔치 석상이었어도 예수님에게 깃든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 죽음과 떠남과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리아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 전부터, 나를 지으시기 전부터, 나를 향했고, 그 사랑이 결국 나를 찾아냈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감격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 하나님이 나와 함께함으로 말미암은 참된 생명을 주셨다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과 생명을 생각해보면 나를 향한 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값없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깊이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잘 아시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요한은 말했고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요한일서 5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오직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때문에 가능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새롭게 들어야 할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예수님 사랑, 그 사랑을 이례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넘치는 사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가 주님 발 아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귀담아 들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도 베다니 이들 자매의 집에 오셨는데, 그때 마르다는 분주하게 예수님이 잡수실 음식 장만하는데 매우 바빴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눅 10:3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불평이 당연히 생겼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동생 마리아에게 명하셔서 나좀 도와 달라고 하세요, 라고 하소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의 신앙과 마리아의 신앙을 비교한 것도 아니고, 마리아의 신앙이 더욱 우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다의 은사와 마리아의 은사가 다른 것일 수도 있고, 마르다는 섬김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데 반해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서 기쁨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추구하는 영성의 색깔이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선택입니다. 마르다가 선택한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갈급해서 모처럼 주님이 오셨는데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그 발을 머리털로 씻겼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향한 겸손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고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관건은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의 관건은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특별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일상적으로 더욱 객관적인 십자가에서 쏟아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깊이 묵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늘 귀기울여 듣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알고 생생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가운데 우리가 더욱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일만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빚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탕감해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계산되지 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죽을때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함께 나누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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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4)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장 38-44절)
여러분은 어떠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까? <유명인들의 유언 모음집>이라는 책에 여러 유명 인사들의, 숨지기 직전 마지막 말이 실려 있습니다. 평소 성향이나 고집이 마지막 순간에도 여실히 작동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공리주의자 벤담은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력해야 한다. 하인들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들을 내보내라. 어린아이들에게는 건전하지 못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이 시점에서 그들은 유용성이 떨어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김으로써 공리주의자의 면모를 끝까지 발휘했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했고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모가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나님과 싸웠는데?”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괴테는 죽을 때 “좀더 빛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헤일이라는 미군은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군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전에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은 “잘 있거라, 모든 사람들아”(Bye, everyone)라고 했고, 마더 테레사는 “이제 더 이상 숨쉴 수가 없구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저, 176ff)
죽음이란 누구나 거쳐야 할 문이면서도 인생의 한계를 보여주는 커다란 벽입니다. 예술이나 학문도 결국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여러 방면으로 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은 흔히 <부활>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연주 시간이 90분에 이를 정도로 긴 교향곡이고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5악장에는 합창까지 들어간 대곡이요 대서사시입니다. 원래 이곡은 부활을 주제로 해서 작곡하려고 의도되지 않고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한 곡이었습니다.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곡을 작곡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작곡했던 오페라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연주회 후 말러는 많은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걸 자신의 방에 가득 진열했습니다. 그 뒤, 꿈을 꾸었는데 꽃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자신이 죽어서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후 한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고 이를 계기로 죽음과 관련된 ‘장례식’이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을 기반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 것입니다.
교향곡을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작곡해나가면서 말러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그리고 청중과 관객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이 곡을 작곡하는 기간 동안 잇따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아버지가 2월에 어머니가 10월에 돌아가셨고 곧이어 여동생마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곡하는 기간이 길어졌는데 그 기간 내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작곡을 하고 드디어 마지막악장 제5악장 작곡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친한 친구였고 음악 동료였던 한 유명한 지휘자의 죽음이 있었고 장례식에 갖다가 거기서 한 합창곡을 듣게 되는데, '부활'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일어나라, 자, 일어나라 나의 죽음이여. 고요의 찰나 이후에 영원한 삶! 영원한 삶! 그것이 너를 부른다! 너는 씨뿌려져 다시 소생할 것이니! 농부가 와서 볏단을 수확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은 자를 위해.”라는 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이었습니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서, 그리고 교향곡 작곡 내내 자신에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의 제5악장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15분은 장엄한 합창이 펼쳐집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하리라, 짧은 안식 후에. 나의 죽은 육신은 부활하리라! 그대를 부른 이는 그대를 불멸의 삶으로 인도하리라.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수확의 신이 성큼 가버리면 우리는 볏단과도 같이 죽어 하나로 맺으리라! 오 믿음을 가지라, 내 영혼이여 그대가 잃은 것,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대가 갈구하던 모든 것이 모두 그대 것이다! 사랑한 것, 싸워 쟁취한 것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은가! 오 믿음을 가지라, 그대의 탄생은 헛되지 않다. 그대의 존재, 고통 모두 헛되지 않음을 믿으라! 피조물은 멸하기 마련이고 멸한 것은 다시 부활하기 마련이다!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부활할 준비를 갖추라! 오, 모든 사물에 스며있는 고통! 모든 것을 멸하는 죽음. 이제 그 망령에서 벗어나 그것마저 내 손아귀에 넣었다. 쟁취한 날개를 달고 타는 듯한 사랑의 열망 속에서 어느 누구의 시선도 미칠 수 없는 빛을 향해 치솟아오르리! 내가 받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리!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 부활하리라, 내 영혼이여! 너는 일순간 다시 부활하리라! 그대가 받은 고통 그것이 그대를 하나님에게 인도하리라!” (유튜브 ‘알기 쉬운 클래식 사전’ 영상 참고)
곡 자체도 장엄하고 오케스트라도 웅장한 연주에다가 합창곡은 대서사시와 같은 대작입니다. 이번 연휴 때 반복해서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도 큰 감동과 어떤 고양을 맛보았습니다.
유대인이었고 오스트리아 출생인 구스타프 말러는 나중에 카톨릭신자가 됩니다만, 이 교향곡은 기독교 토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온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긴 하지만 휴머니즘의 극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를,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진 기독교신앙인 부활신앙에서 찾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기보다 휴머니즘의 극치, 이것이 또한 인본주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부활이 있다는 믿음만 있지 그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부활을 가져다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면 무식한 목사가 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정한 부활신앙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전체는 참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문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통해서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아니라 이 기적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신앙은 또한 무엇인지, 아울러 부활생명은 무엇이며 부활생명을 지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해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종교 문화권에서 바리새파의 영향을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역시 마지막 때 있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에 대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지금은 아니고요, 누구나 그렇듯이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는 당대 유대인의 통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물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단순히 부활이 역사의 끝에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관건입니다. 단순히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믿는 게 중요하지 않고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 바른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단순히 부활이 가능하다, 혹은 부활이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원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고,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가리키고 있고, 아울러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참의로 의미심장합니다. 부활이 먼저 나오고 부활 이후에 생명, 부활생명만이 우리에게는 참된 생명,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부활 이후의 부활생명만이 참된 생명이 되십니다. 인간의 죄성이요 피조물의 한계라 할 수 있고요, 진정한 영원한 생명은 십자가 죽음에서 죽고 이후에 부활에서만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 기존의 생명을 연장시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생명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기존의 생명이 죽고, 그리고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만이 참된 생명 부활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부활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은 부활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을 받아 이미 시작된 부활한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고서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성령을 따라 살아가므로 부활생명을 오늘 여기서도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도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게 되어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여느 유대인의 무덤처럼 동굴에 매장을 했고 동굴 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도전합니다. 이어지는 4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재차 도전합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 놓았고 예수님께서 우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를 간절하게 하셔서 기도 응답을 강청한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를 하셨고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확신하고서 이곳에 온 것이었고 지금은 단지 기도를 들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하는 것일 뿐이고, 이렇게 함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굳은 신뢰관계 안으로 그들도 들어와서 곧 아들 예수님을 믿고 그 관계로 들어오기를 바라시면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신뢰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참된 부활신앙을 가지면 즉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그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듯이 우리에게도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우리 자신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생명을 믿을 뿐 아니라 이미 시작된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미 시작한 부활생명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생명을 이미 얻은 자로서, 다시 말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활생명을 지금 여기서도 살아가는 것일까요?
최근에 기독교방송인 GoodTV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목사님과 올해로 102세가 되신 김형석박사님의 대담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 공히 강조한 것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으려면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죽고 다시 사는, 혹은 거듭나는 갱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거듭나는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영, 이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재생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화신으로서 예수님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형석박사님이 한 일본인 선교사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섬기는 선교사들 모임에 참가하고 왔는데 일본교회에서 온 일본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교회 수도 적고 목회자 수도 적어서 선교사 파송이 드문 일본교회에서 파송한 일본인 선교사여서 관심을 갖고 어떻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동경에 살았는데 예전에 태평양전쟁 때 동경에 하도 폭격이 많아서 지방으로 피신 갔다고 합니다. 생소한 지방에 가서 살았는데 이웃의 한 가정에서 처음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분들이 일본 국적을 가진 조선인 가정이었는데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동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이 가정이 말하기를 "동경으로 가시더라도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후 동경에 돌아와서 바쁘게 살다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십자가를 보고서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는 그 말이 생각이 나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어서 선교사가 되어서 동남아시아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 확신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 확신 가운데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서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톨스토이가 맨 마지막에 쓴 소설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 중 하나의 작품입니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쓸 때 제목을 어떻게 할지를 고심하고,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부활’인데 어떤 점에서 부활인가, 궁금중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소설의 처음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만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 트는 풀을 모두 뽑아 버렸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버렸어도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러시아의 긴 겨울을 지나서 겨울의 암흑을 뚫고 찾아온 봄의 생명력을 언급함으로써 ‘부활’이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서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부활한다는 건데요, 여기서 부활은 몸의 부활이라기보다 어떠한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의 부활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부활생명입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부활생명을 얻어서 전혀 새롭고 전혀 다른 부활의 삶을 이땅에서 살게 되었듯이,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통과하고 이전에 모든 것과 결별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땅에서 전혀 새롭게 다시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에게 ‘부활’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러시아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물려받은 대지주인 젊은 영주입니다. 이전에 남들도 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일뿐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전혀 죄책감이나 죄의식없이 했던 행동 때문에 한 연약하고 무력한 여인이 이후 타락한 삶과 파멸의 삶을 살게 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계기였습니다. 오래 해 전에 자신에게 피해를 입었던 여인, 그러나 이 영주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던 한 사건을 우연히 죄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면서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양심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고 도덕에 대한 상대적인 차원, 여느 영주라도 그럴 수 있다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각성의 계기, 부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죄책감과 채무의식 때문에 이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재판 받고 유죄 판결 받아 시베리아로 이송되게 된 여인을 구명하고자 각방으로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구명 노력 과정을 통해서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회의 부조리를 몸소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또한 사회적 각성과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어서 이 영주의 부활이 더욱 심화됩니다. 그리고 소설 맨 마지막에 성경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진정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결국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소설의 맨 마지막은 여인을 따라 시베리아를 따라갔던 영주가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옴으로 끝납니다. 고향 마을에서 전혀 새로운 인생, 부활의 삶,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이 끝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자는 그 신앙과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마지막 때 “나사로야”라고 나사로의 이름이 불려질 때 부활한 것처럼 우리의 이름이 불려질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나사로처럼 부활생명을 얻게 된 자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죽고 부활생명을 얻게 되었던 바, 지금 여기에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자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산다는 것은, 더욱이 오늘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생명이란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곁에 있는 분들을 위하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부활생명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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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28장
▶성시교독 - 6. 시편 10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99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0장 1~16절
▶특송 - 이현상 지휘자
▶설교 - 예수의 음성
▶찬송 - 528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2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3)
예수의 음성 (요 10장 1-16절)
개신교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카톨릭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안내할 중개자 혹은 그 관계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끊임없이 찾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CBS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에서 ‘카톨릭은 이단인가요?’라는 주제를 가지고 개신교 신학자와 카톨릭 신부님이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의 하부 주제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개신교는 어떠한 중개자도 필요하지 않은데 반해서 카톨릭은 역사상 성인들이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도움을 힘입어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소위 마리아숭배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 신부님의 주장은 마리아한테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고 마리아한테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사님께 기도 부탁을 하듯이 마리아의 도움, 신부의 도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간섭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지만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나치게 한 인간인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교리의 문제를 지적받았습니다. 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무염시태교리나 마리아 역시 예수님처럼 승천했다는, 정확하게는 승천 받았다는 피승천교리 등을 지적하자 이스라엘 성지의 중요성, 성지에 가보면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알기 위한 성모의 중요성,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교리의 근거와 출처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때부터의 전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개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는 신구약성경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황으로부터 지금의 교황에까지 전승으로 내려와 시행되는 예식이나 제도에 대해서 우리 개신교회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면 시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하는데 왜 마리아의 도움을 구하는가, ‘예수님이 어려우신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신부님은 80-90%는 예수님께 직접, 나머지는 예수님의 어머니께 기도하는 편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마리아의 도우심이라고 한정을 합니다. 고해성사 역시 같은 이유로 시행된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신부를 통해서!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위치는 영적 리더의 위치입니다. 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양과의 직접적 관계를 중개하는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맨 앞에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일컬어 양이라고 비유합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양은 공동체생활을 합니다. 떼를 지어서 있어야 안전합니다. 양 무리는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소몰이를 하듯이 뒤에서 몰아가는 게 아니라 양 무리는 앞에서 인도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역할을 목자가 합니다. 목자는 양 무리를 낮 동안에 인도해서 꼴을 먹이는데,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목초지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자의 인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풀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로 돌아와서 목자는 우리에서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목자의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양이라고 비유하고 자신은 양 우리의 문이요 양을 인도하는 목자로 비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자신을 비유하신 이유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에 들어가야 거기서 꼴을 먹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우리에서 편안한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양들이 우리에 출입하는 입구의 관문이 되십니다. 이 출입구를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양들이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라야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됨을 가리킵니다.
양이 거친 광야에서 이리저리 지내다가 우리라는 안식처로 돌아와서 부족한 꼴을 보충해서 먹고 공동체가 안전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쉼을 얻는 그림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예수님 자신을 양의 문이라 비유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이렇듯 양들이 양 우리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살찌우고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양의 문으로 이땅에 오신 이유는 양들이 예수님을 출입구 삼아서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양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과의 직접적 교제 속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과 양식을 얻어 양의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양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안전할 수 있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더욱 풍성한 신앙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동료가 없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당부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서 우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한 주간 거친 세상에서 살다가 핍절해진 영혼을 가지고서 공동체로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주일에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림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꼴을 얻게 됩니다. 다시금 생명을 얻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풍성한 생명을 예배를 통해서 누리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얻게 되는 꼴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양들은 불가피하게 안전한 우리를 떠나 풀을 찾아 광야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돌아갈 우리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 나가서 살고 세상에서 사명을 이루어야 할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주님 못자국 만져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한 우리로 돌아와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부족한 꼴도 보충받고 참된 쉼과 안식을 통해서 힘을 얻고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산교회가 양 우리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이 우리에서 다시 풍성한 생명을 보충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없는 인생은 표류하게 돼 있습니다. 고된 사회생활, 직장생활, 각박한 인간관계에서 지치고 힘든 영혼이 가정이라는 우리, 교회라는 우리, 주님 품이라는 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지쳐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 관심과 정욕과 쾌락에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전남대 의대 정신과 교수이신 이무석 교수님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이 있는 사람은 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 의사들의 96%가 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둘째,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안정감이 높아진다.’ 무한신뢰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요 대대의 거처가 되시는 산과 같은 하나님, 예수 안에서 들어와 안식하는 우리가 있다는 생각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셋째, ‘낮은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된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자신은 아무 쓸데 없다고 내가 없어져야 다른 사람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넷째, ‘좋은 신앙은 성숙한 인격을 갖도록 도움을 준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할수록 믿음만 깊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예수님 닮은 성품이 되어갑니다. 마지막 다섯째, ‘허무함과 우울감을 극복하게 해준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이가 먹고 신체가 약해지면, 그리고 그럼에 따라 살아가는 환경이 예전만 못해지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절망감과 허무감을 갖게 될 것이지만, 영생을 소망하는 믿음의 백성들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기에 허무함과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장환 저)
신명기 10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앙은 여러분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거친 광야생활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된 자는 말 그대로 우리에 들어간 것과 같은데요, 우리는 또한 우리(We)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우리입니다. 양들의 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외적 환경과 처한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척박해져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생각해 불안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보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로 들어간 양들은 그곳에서 꼴을 얻고 쉼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비유할 뿐 아니라 선한 목자로도 비유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는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양을 인도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본적인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목자이실 뿐 아니라 선한 목자이셔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리셨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 대신에 다른 누구의 인도를 받는다면 참된 꼴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 아무리 훌륭한 멘토,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해도 이들의 도움이 아무리 선하게 영향을 준다 해도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활동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킴은 달을 보라는 것인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목양활동은 양들이 예수님을 더욱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직접 인도할 수 있는 믿음을 세워가는 목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설교도 결국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양들이 예수님의 직접적 인도 아래서 선한 목자가 주시는 유익을 누리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목자가 되어주시고 있습니까? 그분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인도자로 신뢰하십니까? 그분에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평안하십니까? 두렵지 않고 안전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소리에 귀기울이고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유혹하고 제공하는 세상적 유혹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제공하시는 유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음성을 우리가 날마다 시마다 듣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서 얻게 되는 꼴도 예수의 음성이요 목자가 제공하는 꼴도 예수의 음성입니다.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음성으로 자신의 양들을 인도해가십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인 줄 아는 고로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양들의 시력이 고도 근시라고 합니다. 목자를 보지는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게 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정신과 마인드를 아십니까? 예수님의 가치관을 아십니까? 살면서 듣게 되는 수많은 주장과 선전과 목소리들 속에서 여러분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해낼 수 있습니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인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산비탈에서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꼴을 얻지 못한 채 영혼이 파리해져가게 됩니다. 영혼의 참된 생명력은 상실해가고 세상적 생명력으로 충만해져서 잠시 잠깐은 의기충전할 수 있어도 결국 시들해져가는 인생이 되고맙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 시간에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서 우리는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뇌가 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무살 청춘 때 고뇌가 찾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을 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런 고뇌할 틈도 얻지 못한 채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고서 고뇌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마지막 고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폭풍과도 같은 고뇌의 시간속에서 어떤 이는 인생 선배의 조언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지혜를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책에서 해답을 얻으려고도 하고 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확신있게 선언하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너희 양들의 우리의 입구 곧 양의 문이라고. 양의 문이 되실 뿐 아니라 너희 양들을 직접 인도하는 목자라고.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르는 성공적인 항해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가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즐겨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함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닌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우리 양들이 안전하게 편안하게 여유있게 생명력넘치게 그 안에서 꼴을 넘치도록 주시는 양 우리의 문이 되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음성을 따라살아가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만족과 풍성한 생명을 해가 거듭될수록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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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찬송 - 21장
▶성시교독 - 5. 시편 8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28장
▶기도 - 배태열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9:1~12
▶특송 - '시편 23편' 1부 지휘자: 김성진
▶설교 - 하나님이 하시는 일
▶찬송 - 445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1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2)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 9장 1-12절)
서울 등촌동에 가면 실로암안과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은 시각장애인들의 빛을 되찾아주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병원의 설립자는 김선태목사입니다. 실로암 병원은 1986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앞을 못 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준, 김선태 목사는 놀랍게도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 1급임에도 그는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30년 가까이 목회자로서 실로암병원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가 10살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열흘 째 되던 7월 4일, 친구들과 놀러갔다 온 사이에 집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현장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8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뚝섬으로 수박 서리를 하러 갔다가 거기서 불발 수류탄을 만지다 터지는 바람에 같이 있던 8명의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그만 간신히 살아나게 되었지만 완전히 실명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앞을 못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개안수술을 해 준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매일 저주했습니다. 아이고 죽어라, 죽어버려라, 그리고 때렸습니다. 양주에 고모가 계시다는 말을 기억하고 20일 걸려 어렵사리 찾아가 만났는데, 고모 왈, "소는 눈이 있어 일하고, 개도 눈이 있어 집을 지키는데 너는 살 필요도 없다" 박대와 욕설을 들어야했음. 12월 어느 겨울밤에 피난길을 가야 하는데 고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몰래 들음: "저 귀찮은 녀석 양잿물을 먹여서 죽여버리고 가자" 그날 밤에 도망쳐나옴. 말도 못하게 고생함. 고아와 맹인으로서 전쟁통에...
몰래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갔는데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눈 먼 소년 김선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선태 왔네, 성경요절 잘 외웠네, 칭찬을 해줬습니다. 교회에서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중에는 목사가 됩니다.
불행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눈도 보이지 않는 역경의 상황에서 교회 학교 교사의 사랑의 말을 듣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창조 사역이요,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분 예수님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맹인은 눈을 뜨게 됩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지녔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에 이기시고 그 진흙을 눈에 바르시는 방식으로 눈을 뜨게 해준 것은 구약 창세기에서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주심으로 인간을 창조한 내용에 상응합니다. 지금 예수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 곧 창조 사역을 하고 계심을 가리켜줍니다. 새 창조시죠.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삶의 곤궁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죽은 것과 방불한 비극적인 영혼을 침을 뱉은 새로운 진흙으로 새 창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베풀어졌지만 맹인의 눈을 뜬 기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 이래로 처음으로 베풀어진 맹인의 눈 뜬 기적입니다. 물론 이사야 35장에 보면 메시야가 오시는 메시야 시대에 눈 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사역이 메시야 사역임을 알리시려고, 세례요한에게 전하기를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음을 말씀하신 바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역하실 때 수많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바, 오늘 본문에도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뜨려면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다가 집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영적인 눈이 뜨여지려면 참된 빛이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지광성교회 안현수목사님이 쓴 ‘담’이라는 책을 보니까 탈옥수 신창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교정선교를 하시는데요, 언젠가 광주교도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신창원씨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우연히 만나서 인사만 나눈 정도였는데, 그날 설교할 때 해병대 총기 사건으로 인해서 사형수가 되었다가 감옥에서 이분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 앳된 군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 같고 실제로 여러 명이 죽기도 했던 총기사건이었는데 뜻밖에도 범죄의 계기가 된 발단이 자라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한 젊은 청년이 군대에서까지 그러한 고통이 이어지자 우발적으로 총기사건을 벌인 것이었고, 그 말을 듣고 신창원씨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공감하게 되었던 듯합니다. 그 역시 성장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왔던 경험이 발단이 돼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씨가 그와 마찬가지로 총기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그 형제에게 편지를 써서 전해온 것입니다. 그 편지를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 편지에서 신창원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권면과 더불어 자신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어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고생 많으시죠. 예배를 인도하려고 광주에 오신 안현수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신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한 글에서 따뜻한 사랑이 듬뿍 담긴 애정어린 권면과 더불어서 자신의 간증도 들려줍니다.
이분이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었던 계기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어머니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시고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천사 같은 마음에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고 기독교에 궁금중이 생겨 옥중에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부터 읽었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으나 성경을 끝까지 보기로 결심했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신약성경에서 좋은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죄도 없이 십자가의 극악무도한 형을 받게 되는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고 숨을 거둔 장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계속 반복하여 예수님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과 같은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 청송교도소 독방이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악하고 파렴치한 삶을 살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것이며, 그 헌신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천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신창원씨는 무기징역에다가 22년 6개월형이 추가되어 당시 26년째 수감생활하던 중에 쓴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맹인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다고 생각되면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절)하고서 스스로 찔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고 하십니다. 맹인임을 깨달으면 보게 되는 것이요 본다고 하면 그대로 맹인으로 남게 되는 역설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임을 깨달은 동시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써 말씀하신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을 생각해보십시오. 세리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아파했다는 이유로 그는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우리의 약점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콤플렉스가,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열등감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을 나타내는 주요한 통로가 됩니다.
길에서 구걸하던 타고난 맹인을 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각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딱한 맹인을 보고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되는 모양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도대체 왜 이렇게 이가 고생을 하게 된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맹인을 보고서 제자들이 떠올린 질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혹은 부모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이 비참함, 이 고통, 이 맹인이라는 처지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 역시 제자들처럼 맹인의 비참한 현실을 보셨습니다. 그 비참한 현실을 보고서 제자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미래로 가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할 동기가 되고 이유가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일이 그의 고통 때문에 나타날 수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 사역이요 생명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의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의 재창조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고 죽은 것과 방불한 절망의 처지에 놓인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 썼습니다만, 제가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형석박사님의 이야기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이분이 올해 102세이신데 아직까지도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스무 살을 넘겼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어머니가 가지실 정도로 약한 분이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백세가 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역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역전의 원리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오히려 지혜롭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으로 보게 되고, 콤플렉스가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의 강점이 되고, 열등감이 있어서 오히려 성장하게 되고, 우월감이 있는 사람은 그 우월감 때문에 결국에는 열등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대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 마음과 열망과 노력 때문에 오히려 끝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지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나라에서는 종의 자리로 끌어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심에 사로잡혀 채움에만 온통 에너지를 쏟는 자는 오히려 비워지게 될 것이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오히려 자기를 비우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에서는 비움이 곧 채움이요 낮아짐이 곧 높아짐이요, 약점이 곧 강점이요 약함이 곧 강함이요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신의 장점이 되는 역전의 원리, 역설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렇게 말하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히려 감사하시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러한 약함과 부족함과 콤플렉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의 창조 사역이요 공동의 생명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 동안은 낮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빛의 사명을 감당할 동안은 낮입니다. 지금은 낮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대낮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빛으로 쫓아내고 전혀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표현된 것이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실로암에 가야 눈을 뜨게 되니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됨이요, 그래서 맹인조차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봄으로 인해서, 누구의 죄 때문이냐를 생각하던 제자와 달리 예수님의 시각으로 맹인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약함의 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망하고 기대하고,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고통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현장임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사명자가 되어 그 일에 나 자신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예전 TV를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낚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대물 낚시에 끌려서 강원도에 살던 사람이 제주도 서귀포로 이주하여서 거기서 유유자적 낚시꾼으로 살아가면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큰 잿방어 잡으면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참 행복한 살고 계심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인생을 폄하하고픈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서 솔직히 자연을 좋아하는 제 자신이지만 하나도 안 부럽고 제 입장에서 오히려 사명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때론 무거운 짐진 것 같은 부담이지만 오히려 더욱 좋다는 나름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눈을 뜨고서 발견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우리, 다시 눈을 감아버리면 안되겠죠. 보아야겠죠. 무엇을 보아야겠습니까? 날 때부터 맹인된 처지의 불우와 고통과 아픔을 보아야겠습니다.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러한 고통과 아픔과 말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보고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될 터이지만,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생명 사역, 새창조 사역에 쓰임받는 사명자로 서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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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배찬송 - 21장
▶성시교독 - 4. 시편 5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47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8장 28~36절
▶특송 - '나는 예배자입니다' 1부 지휘자: 김한나
▶설교 - 자 유
▶찬송 - 510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1월2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1)
자유 (요 8장 28-36절)
코로나 시대에 여러 자유가 제약당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누구와 만나는 일도 금지당하고 있고 지난 한 달 넘게 예배의 자유도 행사하지 못했다가 오늘 제한된 인원이 모여 현장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밖에 외출을 할 때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의무도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의 제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못하는 소위 코로나 시대입니다.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지 못하고 살아온지 이제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좀 적응이 되십니까, 아니면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꿈꿉니다. 생존이 보장되고 나서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이 많으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되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속박에서도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이 되어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도 합니다. 신체적 자유를 위함입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예전에 한 카드 회사의 광고 문구가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동안 자유를 희생한 채 열심히 회사에서 일해온 당신, 이제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여행을 가서 자유롭게 돈을 쓰라는, 마음껏 카드를 긁으라는 독려의 광고 문구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여행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유는 ‘~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무거운 부담과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꿈꾸는 겁니다. 갓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지만 가끔은 양육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도 들 것입니다. 갓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전체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라고 하는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은 빚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원합니다. 늘 일을 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의 짐을 떠안고 있는 분들은 가끔은 일탈을 꿈꿉니다. 다람쥣 체바퀴 같은 직장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더 이상 시간과 사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꿀 때도 있습니다. 신체에 장애를 지닌 분들은 가끔 꿈속에서라도 몸의 기능이 온전해져서 마음껏 원하는 것들을 신체로써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질병을 가끔은 병마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요즈음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감염병의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그런 날이 올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려고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가정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놀림받아왔던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는 말 그대로 자신의 기존의 모든 옷들을 벗는 것입니다. ‘~로부터’ 벗어나기는 자신을 둘러싼 기존의 주위 환경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로부터의 자유’를 모든 영역에 걸쳐서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결국 자기 홀로 남게 되어야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만 홀로 남게 되면 진정 자유롭게 되는 것일까요?
‘~로부터’의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유임에는 분명합니다만, 마지막에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자아의 굴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문제가 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일컬어 성경에서 그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중심성으로 꽉 들어찬 자아에 하나님이 들어올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소용 없습니다.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를 외면할 정도로 자기 중심성에 고착이 된 상태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추구하는 자아의 굴레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결국 죄로부터의 자아의 해방을 뜻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라는 본연의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한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 자아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자신의 생명이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는데만 온통 집중하는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이 인간 본연의 자아가 되어버린 것인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존재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된 존재입니다.
언제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2절)라고 표현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면 몸이 결국 죽어야 합니다. 죄의 몸이 죽어야 더 이상 우리의 몸이 죄가 역사하는 통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인데, 우리 옛사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 십자가 위에서 함께 못박혀 죽으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삶은 죽어야만 끝납니다. 죄인이 죽어버리면 죄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바로 그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성경의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죄에게 종노릇하던 인생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아아 우리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될 때에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굽니까?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죄의 본질인 자아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기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진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으로 인해서, 그 이전에는 온갖 것들이 함께 모여 결국 자기중심성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던 인생이 이제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벗어나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롬 6:4)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삶에서 점차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새로운 삶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 말씀드린 이유는 시작이 있으면 완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가 점차 그 자유를 더욱 크게 향유하게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까지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가 있을 것인데, 바로 그날을 모든 피조물이 소망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의 자유에 모든 피조물이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의 자유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우리가 얻게 될 영광의 자유는 말 그대로 너무나 영광스런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동참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죄로부터의 자유가 완성이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지를 짓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온통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영광스런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동참하게 되는 자유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자유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홀로 한 분이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못하실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완전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만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선물로 또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광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우리가 얻었고 또한 앞으로 더욱 얻게 될 자유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유를 더욱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 절대자, 일종의 유일무이한 독보적 존재로서의 자유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실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면 긍정할 수 없겠죠.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기보다, 본성상 흘러넘치는 사랑을 위하는 자유요, 본성에 일치하는 자유로서 선을 위한 자유입니다. ‘~로부터 자유’, 혹은 ‘벗어버리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껴안는 자유요, 선을 위해 고통당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굳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 인간을 창조하셔셔 고통을 껴안게 되신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랑의 파트너로서 인간을 창조하시므로 고통을 떠안으신 것입니다. 고통의 위험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자신의 언약의 파트너로 삼아주셔서 언약에 있어서 불충성하고 불신실한 인간의 배신의 위험을 기꺼이 껴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다 벗어버려서 홀로 남게 되어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을 자처해서 짊어지는 흘러넘치는 사랑의 본성에 일치하는 자유입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굳이 인간을 창조하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언약의 파트너, 사랑의 대상으로 정하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위해 만물을 갱신하고 새하늘과 새땅을 조성하여주시는 자유요, 인생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어 시작된 자유인으로의 삶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유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의 부르심을 입은 우리,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처럼 이제는 죄의 종, 죄의 종노릇한데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자아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증진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발전시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 우리가 증진시켜나아가야 할 자유, 최종적으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할 자유, 그것은 자아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벗어버리고 벗어나려는 자유가 아니라 껴안고 기꺼이 짊어지려는 자유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벗어버리고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기꺼이 껴안고,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섬기고, 선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본문이 바로 지금까지 장황하게 논의한 바로 그러한 설명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유는 결코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홀로 남게 된 자유, 기존의 자리와 환경과 사람에서 벗어나서 얻게 되는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유는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강화시켜서 결국 우리를 죄의 종으로 사로잡히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들의 이 말도 로마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따져들면 진실이 희박한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자유를 행사해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들, 오직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강화시키고 돋보이게 하는 것들, 내가 다행히도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보유하고 있어서 자유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히려 죄 짓는 것이요, 죄를 짓는 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죄를 짓는 차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죄의 종이 되어버린다는 진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죄의 종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은 것이요 또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절)고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므로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셨고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28-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이땅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사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를 향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무엇이든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상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희
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함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유 곧 선을 위한 자유, 벗어나거나 벗어버리는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기꺼이 껴안고 보듬고 짊어지는 진정한 자유를 따라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예수님을 너무나 기뻐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충만한 교통 속에서 이땅을 사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자유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나님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본문 31-32절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유인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로서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고 이 자유를 증진시켜 나아가야 할 책임을 떠안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동참하기까지 이러한 자유의 확산, 자유의 방향을 추구해야 할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가서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마땅히 누려야 할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이를, 영광의 자유를 소망하며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나눔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