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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3)
예수의 음성 (요 10장 1-16절)
개신교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카톨릭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안내할 중개자 혹은 그 관계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끊임없이 찾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CBS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에서 ‘카톨릭은 이단인가요?’라는 주제를 가지고 개신교 신학자와 카톨릭 신부님이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의 하부 주제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개신교는 어떠한 중개자도 필요하지 않은데 반해서 카톨릭은 역사상 성인들이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도움을 힘입어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소위 마리아숭배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 신부님의 주장은 마리아한테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고 마리아한테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사님께 기도 부탁을 하듯이 마리아의 도움, 신부의 도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간섭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지만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나치게 한 인간인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교리의 문제를 지적받았습니다. 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무염시태교리나 마리아 역시 예수님처럼 승천했다는, 정확하게는 승천 받았다는 피승천교리 등을 지적하자 이스라엘 성지의 중요성, 성지에 가보면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알기 위한 성모의 중요성,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교리의 근거와 출처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때부터의 전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개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는 신구약성경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황으로부터 지금의 교황에까지 전승으로 내려와 시행되는 예식이나 제도에 대해서 우리 개신교회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면 시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하는데 왜 마리아의 도움을 구하는가, ‘예수님이 어려우신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신부님은 80-90%는 예수님께 직접, 나머지는 예수님의 어머니께 기도하는 편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마리아의 도우심이라고 한정을 합니다. 고해성사 역시 같은 이유로 시행된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신부를 통해서!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위치는 영적 리더의 위치입니다. 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양과의 직접적 관계를 중개하는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맨 앞에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일컬어 양이라고 비유합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양은 공동체생활을 합니다. 떼를 지어서 있어야 안전합니다. 양 무리는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소몰이를 하듯이 뒤에서 몰아가는 게 아니라 양 무리는 앞에서 인도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역할을 목자가 합니다. 목자는 양 무리를 낮 동안에 인도해서 꼴을 먹이는데,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목초지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자의 인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풀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로 돌아와서 목자는 우리에서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목자의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양이라고 비유하고 자신은 양 우리의 문이요 양을 인도하는 목자로 비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자신을 비유하신 이유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에 들어가야 거기서 꼴을 먹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우리에서 편안한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양들이 우리에 출입하는 입구의 관문이 되십니다. 이 출입구를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양들이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라야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됨을 가리킵니다.
양이 거친 광야에서 이리저리 지내다가 우리라는 안식처로 돌아와서 부족한 꼴을 보충해서 먹고 공동체가 안전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쉼을 얻는 그림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예수님 자신을 양의 문이라 비유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이렇듯 양들이 양 우리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살찌우고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양의 문으로 이땅에 오신 이유는 양들이 예수님을 출입구 삼아서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양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과의 직접적 교제 속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과 양식을 얻어 양의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양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안전할 수 있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더욱 풍성한 신앙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동료가 없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당부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서 우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한 주간 거친 세상에서 살다가 핍절해진 영혼을 가지고서 공동체로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주일에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림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꼴을 얻게 됩니다. 다시금 생명을 얻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풍성한 생명을 예배를 통해서 누리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얻게 되는 꼴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양들은 불가피하게 안전한 우리를 떠나 풀을 찾아 광야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돌아갈 우리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 나가서 살고 세상에서 사명을 이루어야 할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주님 못자국 만져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한 우리로 돌아와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부족한 꼴도 보충받고 참된 쉼과 안식을 통해서 힘을 얻고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산교회가 양 우리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이 우리에서 다시 풍성한 생명을 보충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없는 인생은 표류하게 돼 있습니다. 고된 사회생활, 직장생활, 각박한 인간관계에서 지치고 힘든 영혼이 가정이라는 우리, 교회라는 우리, 주님 품이라는 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지쳐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 관심과 정욕과 쾌락에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전남대 의대 정신과 교수이신 이무석 교수님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이 있는 사람은 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 의사들의 96%가 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둘째,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안정감이 높아진다.’ 무한신뢰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요 대대의 거처가 되시는 산과 같은 하나님, 예수 안에서 들어와 안식하는 우리가 있다는 생각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셋째, ‘낮은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된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자신은 아무 쓸데 없다고 내가 없어져야 다른 사람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넷째, ‘좋은 신앙은 성숙한 인격을 갖도록 도움을 준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할수록 믿음만 깊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예수님 닮은 성품이 되어갑니다. 마지막 다섯째, ‘허무함과 우울감을 극복하게 해준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이가 먹고 신체가 약해지면, 그리고 그럼에 따라 살아가는 환경이 예전만 못해지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절망감과 허무감을 갖게 될 것이지만, 영생을 소망하는 믿음의 백성들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기에 허무함과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장환 저)
신명기 10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앙은 여러분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거친 광야생활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된 자는 말 그대로 우리에 들어간 것과 같은데요, 우리는 또한 우리(We)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우리입니다. 양들의 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외적 환경과 처한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척박해져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생각해 불안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보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로 들어간 양들은 그곳에서 꼴을 얻고 쉼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비유할 뿐 아니라 선한 목자로도 비유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는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양을 인도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본적인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목자이실 뿐 아니라 선한 목자이셔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리셨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 대신에 다른 누구의 인도를 받는다면 참된 꼴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 아무리 훌륭한 멘토,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해도 이들의 도움이 아무리 선하게 영향을 준다 해도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활동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킴은 달을 보라는 것인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목양활동은 양들이 예수님을 더욱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직접 인도할 수 있는 믿음을 세워가는 목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설교도 결국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양들이 예수님의 직접적 인도 아래서 선한 목자가 주시는 유익을 누리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목자가 되어주시고 있습니까? 그분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인도자로 신뢰하십니까? 그분에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평안하십니까? 두렵지 않고 안전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소리에 귀기울이고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유혹하고 제공하는 세상적 유혹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제공하시는 유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음성을 우리가 날마다 시마다 듣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서 얻게 되는 꼴도 예수의 음성이요 목자가 제공하는 꼴도 예수의 음성입니다.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음성으로 자신의 양들을 인도해가십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인 줄 아는 고로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양들의 시력이 고도 근시라고 합니다. 목자를 보지는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게 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정신과 마인드를 아십니까? 예수님의 가치관을 아십니까? 살면서 듣게 되는 수많은 주장과 선전과 목소리들 속에서 여러분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해낼 수 있습니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인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산비탈에서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꼴을 얻지 못한 채 영혼이 파리해져가게 됩니다. 영혼의 참된 생명력은 상실해가고 세상적 생명력으로 충만해져서 잠시 잠깐은 의기충전할 수 있어도 결국 시들해져가는 인생이 되고맙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 시간에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서 우리는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뇌가 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무살 청춘 때 고뇌가 찾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을 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런 고뇌할 틈도 얻지 못한 채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고서 고뇌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마지막 고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폭풍과도 같은 고뇌의 시간속에서 어떤 이는 인생 선배의 조언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지혜를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책에서 해답을 얻으려고도 하고 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확신있게 선언하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너희 양들의 우리의 입구 곧 양의 문이라고. 양의 문이 되실 뿐 아니라 너희 양들을 직접 인도하는 목자라고.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르는 성공적인 항해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가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즐겨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함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닌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우리 양들이 안전하게 편안하게 여유있게 생명력넘치게 그 안에서 꼴을 넘치도록 주시는 양 우리의 문이 되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음성을 따라살아가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만족과 풍성한 생명을 해가 거듭될수록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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