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9)
상호 내주 (요 14장 15-23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방식은 ‘상호 내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므로 온전히 하나되시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신다 함은 서로를 향한 온전한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됨을 일컫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의 띠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고 온전히 하나가 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상호 내주로 이루어집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써 삼위일체를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호 내주를 이루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상호 내주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근심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 자신을 믿을 것을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이 근심에 휩싸여 있음을 보시고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 곳이 있도록, 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러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처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요 지금도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거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할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온전히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내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의 마음 속에, 개별 신자의 각각의 마음 속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로 번역한 단어와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한 단어가 같습니다. 예수님을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뜻은 법정에서 증인이든 대리인이든 변호사든 조언자든 상담자든 법률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마치 법정에 서는 것과 같은데요, 그 법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도와서 변호해주시고 어느 때는 보증도 서주시고 대리인 역할을 맡아주시는 대언자 곧 보혜사가 예수님, 의로우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보혜사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로 지칭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이땅에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거처를 잡으시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말하는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알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정확하게는 나 자신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호 내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으로 인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의 상호 내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가 곧 구원입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 삼위일체를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상호 내주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혜사 성령을 너희가 각각 마음 속에 받으면 아들과 아버지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알게 될 것이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내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알게 될 뿐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 관계처럼 아들과 개별 신자 각각이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어주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이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은 예수님의 떠남, 십자가의 죽음이 아버지의 집 안에다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시려는 것이었다면, 지금 오늘의 말씀은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의 마음 속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 죽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가 거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거룩해져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 죽음의 효력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상호 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을 보내어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굳게 믿으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게 않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화염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요 서로 사랑함으로써 상호 내주하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호 내주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함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함이 곧 아버지를 사랑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와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아버지의 음성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면 그 자체로 입증되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버지”로 자연스레 입증되기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일치되게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는 서로 사랑하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문제는 상호 내주를 위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녀로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로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주십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예수님이 내 안에 분명하게 계심이 드러나는 것이요,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실천할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뚜렷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겠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도 함께 설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도 구원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일방적 통보요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은혜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의 우리의 참여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로 존귀하게 여기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파트너인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둠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격상됨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서 자녀 삼아주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거처가 조성되어 거주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안에 거처 삼으셔서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요 서로 사랑함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개별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고 상호 내주를 이룸으로써 성도들 간에 사랑 안에서 하나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상호 내주를 사랑으로써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에 상대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관심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부에서 있었던 사랑이 세상을 향한 운동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운동에 참여해서 서로를 향해 공간을 내어주고 공간을 차지하고 상호 내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상호 내주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머물러 있고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위대한 선교도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전도와 선교적 발걸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내주를 이루는 것인데요, 그 첫 걸음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주고 받는 사랑이요, 그 사랑 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상호 내주를 위한 사랑의 운동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또다시 설명될 필요가 있고 또 다시 설명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기 위함도 아니요, 우리의 구원을 우리가 너무 쉽게 의심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깊고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가 계속 오가고 있는 우리는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랑의 확신 가운데 든든하게 서 계심으로 인해서 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선교적 전도적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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