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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4)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장 38-44절)
여러분은 어떠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까? <유명인들의 유언 모음집>이라는 책에 여러 유명 인사들의, 숨지기 직전 마지막 말이 실려 있습니다. 평소 성향이나 고집이 마지막 순간에도 여실히 작동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공리주의자 벤담은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력해야 한다. 하인들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들을 내보내라. 어린아이들에게는 건전하지 못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이 시점에서 그들은 유용성이 떨어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김으로써 공리주의자의 면모를 끝까지 발휘했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했고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모가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나님과 싸웠는데?”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괴테는 죽을 때 “좀더 빛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헤일이라는 미군은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군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전에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은 “잘 있거라, 모든 사람들아”(Bye, everyone)라고 했고, 마더 테레사는 “이제 더 이상 숨쉴 수가 없구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저, 176ff)
죽음이란 누구나 거쳐야 할 문이면서도 인생의 한계를 보여주는 커다란 벽입니다. 예술이나 학문도 결국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여러 방면으로 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은 흔히 <부활>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연주 시간이 90분에 이를 정도로 긴 교향곡이고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5악장에는 합창까지 들어간 대곡이요 대서사시입니다. 원래 이곡은 부활을 주제로 해서 작곡하려고 의도되지 않고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한 곡이었습니다.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곡을 작곡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작곡했던 오페라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연주회 후 말러는 많은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걸 자신의 방에 가득 진열했습니다. 그 뒤, 꿈을 꾸었는데 꽃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자신이 죽어서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후 한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고 이를 계기로 죽음과 관련된 ‘장례식’이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을 기반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 것입니다.
교향곡을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작곡해나가면서 말러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그리고 청중과 관객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이 곡을 작곡하는 기간 동안 잇따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아버지가 2월에 어머니가 10월에 돌아가셨고 곧이어 여동생마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곡하는 기간이 길어졌는데 그 기간 내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작곡을 하고 드디어 마지막악장 제5악장 작곡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친한 친구였고 음악 동료였던 한 유명한 지휘자의 죽음이 있었고 장례식에 갖다가 거기서 한 합창곡을 듣게 되는데, '부활'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일어나라, 자, 일어나라 나의 죽음이여. 고요의 찰나 이후에 영원한 삶! 영원한 삶! 그것이 너를 부른다! 너는 씨뿌려져 다시 소생할 것이니! 농부가 와서 볏단을 수확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은 자를 위해.”라는 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이었습니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서, 그리고 교향곡 작곡 내내 자신에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의 제5악장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15분은 장엄한 합창이 펼쳐집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하리라, 짧은 안식 후에. 나의 죽은 육신은 부활하리라! 그대를 부른 이는 그대를 불멸의 삶으로 인도하리라.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수확의 신이 성큼 가버리면 우리는 볏단과도 같이 죽어 하나로 맺으리라! 오 믿음을 가지라, 내 영혼이여 그대가 잃은 것,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대가 갈구하던 모든 것이 모두 그대 것이다! 사랑한 것, 싸워 쟁취한 것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은가! 오 믿음을 가지라, 그대의 탄생은 헛되지 않다. 그대의 존재, 고통 모두 헛되지 않음을 믿으라! 피조물은 멸하기 마련이고 멸한 것은 다시 부활하기 마련이다!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부활할 준비를 갖추라! 오, 모든 사물에 스며있는 고통! 모든 것을 멸하는 죽음. 이제 그 망령에서 벗어나 그것마저 내 손아귀에 넣었다. 쟁취한 날개를 달고 타는 듯한 사랑의 열망 속에서 어느 누구의 시선도 미칠 수 없는 빛을 향해 치솟아오르리! 내가 받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리!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 부활하리라, 내 영혼이여! 너는 일순간 다시 부활하리라! 그대가 받은 고통 그것이 그대를 하나님에게 인도하리라!” (유튜브 ‘알기 쉬운 클래식 사전’ 영상 참고)
곡 자체도 장엄하고 오케스트라도 웅장한 연주에다가 합창곡은 대서사시와 같은 대작입니다. 이번 연휴 때 반복해서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도 큰 감동과 어떤 고양을 맛보았습니다. 유대인이었고 오스트리아 출생인 구스타프 말러는 나중에 카톨릭신자가 됩니다만, 이 교향곡은 기독교 토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온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긴 하지만 휴머니즘의 극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를,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진 기독교신앙인 부활신앙에서 찾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기보다 휴머니즘의 극치, 이것이 또한 인본주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부활이 있다는 믿음만 있지 그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부활을 가져다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면 무식한 목사가 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정한 부활신앙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전체는 참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문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통해서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아니라 이 기적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신앙은 또한 무엇인지, 아울러 부활생명은 무엇이며 부활생명을 지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해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종교 문화권에서 바리새파의 영향을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역시 마지막 때 있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에 대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지금은 아니고요, 누구나 그렇듯이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는 당대 유대인의 통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물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단순히 부활이 역사의 끝에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관건입니다. 단순히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믿는 게 중요하지 않고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 바른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단순히 부활이 가능하다, 혹은 부활이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원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고,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가리키고 있고, 아울러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참의로 의미심장합니다. 부활이 먼저 나오고 부활 이후에 생명, 부활생명만이 우리에게는 참된 생명,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부활 이후의 부활생명만이 참된 생명이 되십니다. 인간의 죄성이요 피조물의 한계라 할 수 있고요, 진정한 영원한 생명은 십자가 죽음에서 죽고 이후에 부활에서만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 기존의 생명을 연장시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생명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기존의 생명이 죽고, 그리고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만이 참된 생명 부활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부활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은 부활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을 받아 이미 시작된 부활한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고서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성령을 따라 살아가므로 부활생명을 오늘 여기서도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도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게 되어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여느 유대인의 무덤처럼 동굴에 매장을 했고 동굴 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도전합니다. 이어지는 4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재차 도전합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 놓았고 예수님께서 우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를 간절하게 하셔서 기도 응답을 강청한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를 하셨고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확신하고서 이곳에 온 것이었고 지금은 단지 기도를 들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하는 것일 뿐이고, 이렇게 함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굳은 신뢰관계 안으로 그들도 들어와서 곧 아들 예수님을 믿고 그 관계로 들어오기를 바라시면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신뢰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참된 부활신앙을 가지면 즉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그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듯이 우리에게도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우리 자신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생명을 믿을 뿐 아니라 이미 시작된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미 시작한 부활생명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생명을 이미 얻은 자로서, 다시 말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활생명을 지금 여기서도 살아가는 것일까요?
최근에 기독교방송인 GoodTV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목사님과 올해로 102세가 되신 김형석박사님의 대담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 공히 강조한 것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으려면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죽고 다시 사는, 혹은 거듭나는 갱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거듭나는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영, 이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재생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화신으로서 예수님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형석박사님이 한 일본인 선교사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섬기는 선교사들 모임에 참가하고 왔는데 일본교회에서 온 일본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교회 수도 적고 목회자 수도 적어서 선교사 파송이 드문 일본교회에서 파송한 일본인 선교사여서 관심을 갖고 어떻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동경에 살았는데 예전에 태평양전쟁 때 동경에 하도 폭격이 많아서 지방으로 피신 갔다고 합니다. 생소한 지방에 가서 살았는데 이웃의 한 가정에서 처음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분들이 일본 국적을 가진 조선인 가정이었는데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동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이 가정이 말하기를 "동경으로 가시더라도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후 동경에 돌아와서 바쁘게 살다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십자가를 보고서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는 그 말이 생각이 나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어서 선교사가 되어서 동남아시아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 확신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 확신 가운데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서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톨스토이가 맨 마지막에 쓴 소설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 중 하나의 작품입니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쓸 때 제목을 어떻게 할지를 고심하고,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부활’인데 어떤 점에서 부활인가, 궁금중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소설의 처음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만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 트는 풀을 모두 뽑아 버렸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버렸어도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러시아의 긴 겨울을 지나서 겨울의 암흑을 뚫고 찾아온 봄의 생명력을 언급함으로써 ‘부활’이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서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부활한다는 건데요, 여기서 부활은 몸의 부활이라기보다 어떠한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의 부활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부활생명입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부활생명을 얻어서 전혀 새롭고 전혀 다른 부활의 삶을 이땅에서 살게 되었듯이,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통과하고 이전에 모든 것과 결별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땅에서 전혀 새롭게 다시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에게 ‘부활’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러시아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물려받은 대지주인 젊은 영주입니다. 이전에 남들도 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일뿐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전혀 죄책감이나 죄의식없이 했던 행동 때문에 한 연약하고 무력한 여인이 이후 타락한 삶과 파멸의 삶을 살게 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계기였습니다. 오래 해 전에 자신에게 피해를 입었던 여인, 그러나 이 영주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던 한 사건을 우연히 죄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면서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양심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고 도덕에 대한 상대적인 차원, 여느 영주라도 그럴 수 있다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각성의 계기, 부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죄책감과 채무의식 때문에 이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재판 받고 유죄 판결 받아 시베리아로 이송되게 된 여인을 구명하고자 각방으로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구명 노력 과정을 통해서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회의 부조리를 몸소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또한 사회적 각성과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어서 이 영주의 부활이 더욱 심화됩니다. 그리고 소설 맨 마지막에 성경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진정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결국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소설의 맨 마지막은 여인을 따라 시베리아를 따라갔던 영주가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옴으로 끝납니다. 고향 마을에서 전혀 새로운 인생, 부활의 삶,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이 끝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자는 그 신앙과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마지막 때 “나사로야”라고 나사로의 이름이 불려질 때 부활한 것처럼 우리의 이름이 불려질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나사로처럼 부활생명을 얻게 된 자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죽고 부활생명을 얻게 되었던 바, 지금 여기에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자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산다는 것은, 더욱이 오늘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생명이란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곁에 있는 분들을 위하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부활생명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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