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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0)
왜 기쁨이 아니라 근심인가? (요 14장 25-31절)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근심한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걱정할 일도 없겠죠. 걱정을 하고 신경이 쓰인다면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뭔가 평소 같지 않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면 부모로서 신경이 쓰입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이의 표정이 이토록 어두운 걸까, 부모로서 걱정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의 얼굴 표정에 민감하고 관심이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죠.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를 도와주고 싶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려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라는 바른 교회론을 지닌 성도라면 교회 안의 지체들을 향해서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다른 성도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고 아픈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과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한 몸된 교회의 지체를 함께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근심할 일도 많아집니다. 신경 쓸 사람이 많아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래도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근심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은 내 자신이 버림받을까봐, 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까봐, 내 자신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할까봐, 내 자신이 창피를 당하까봐, 내 자신이 불편할까봐,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내 자신의 생존과 생명이 위협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다른 누구보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 대부분은 바로 나 자신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온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자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받게 될 고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근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근심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인격에 반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두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이유 있는 근심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어난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는 더 큰 이유는 자신들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였더라면 자신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장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아버지의 집에 가서 너희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갔다가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와서 미리 예비한 거처에서, 즉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너희를 데리러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추가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예수님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고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스런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크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의 미션 곧 사명을 완수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했습니다만,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에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 그러니까 아버지께로 감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기보다 기뻐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뒤덮은 근심과 두려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이요, 어떤 신학자가 예리하게 말했듯이, 제자들에게는 소유하는 사랑이 있었을 뿐 베푸는 사랑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니까 소유하려는 사랑이요 집착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으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마음이 편안하고 좋으니까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떠나감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완수하고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제자들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이게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소유하려는 사랑만 있었지, 베푸는 사랑,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손해와 어려움도 감수하려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한석봉 어머니가 글씨 공부를 위해서 절에서 수학하던 석봉이 돌아왔을 때 “아이구 내 새끼”, 반가워했습니까?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하고 절에 들어갔는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석봉이 10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석봉의 어머니는 자식이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 품에 안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내보냈지 않았습니까. 불을 끄게 해서 자신은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게 해서 불을 켜서 보니까 글씨가 아직 삐뚤빼뚤 부족함을 깨닫게 하고서 즉시 돌려보냈죠. 자식을 사랑하는 홀어머니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식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팔아서 뒷바라지할 정도인데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자식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모정이 있었음에도 더 큰 사랑은 오히려 글쓰기 연마를 위해서 자식을 절로 돌려보낸 것이죠. 이 이야기가 월출산 아래 있는 영암 구림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죠. 그래서 석봉이 원래 개성 사람인데 글씨 공부를 위해서 스승의 고향 전남 영암의 한 절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이 정설입니다. 하여튼 이것이 어머니의 더 큰 사랑입니다. 자식을 조금만 사랑했으면 품에 안으려 했을 테지만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떠나보내주는 어머니의 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의 유익에 반하는 것이어도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포기하고 희생하고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냐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곧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었다면 제자들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지금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자기중심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떠남과 죽으심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곁에 두려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평가와 진단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에 대해서 지금 제자들이 기뻐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장해서 적용해보면 우리 안에 아가페 사랑이 없어서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 없고 자기애가 가득해서,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고 자기중심성으로 가득차서 기쁨이 없고 대신 근심과 두려움뿐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한 제자들의 현주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게는 아가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무한히 흘러넘쳐서 받게 되는 아가페 사랑,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순종에서 드러나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 그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입니다.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내어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으로서 진정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인생의 가장 큰 고통 앞에서도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도 잠깐 근심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을 선택하고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을 확신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볼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계속되는 설교가 이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을 말씀하시고서 ‘나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9-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가페 사랑이 예수님 안에 흘러들어왔고 예수님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기쁨, ‘내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서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 자기중심적으로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이 기뻐하셨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 사랑과 기쁨은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기쁨입니다. 환경에 빼앗길 수 있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조건에 좌우되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누릴 수 있는 절대적 기쁨입니다. 상황에 따라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예수님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실 때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절대적 기쁨의 비결을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금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희생적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으로서 결코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그저 내어주고 베푸는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사랑이 제자들의 심령에 흘러들어와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 절대적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심지어 기둥 같이 여겨지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절대적 기쁨이요 절대적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들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고 받고 누리는 사람은 절대적 기쁨을 소유하고 누릴 뿐 아니라 또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작별하면서 유산으로 남겨주시는 것이 평안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평안 곧 “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기중심성과 자기애를 강화시켜주므로 우리에게 임하는 평안입니다. 자기의 재산이 많아졌거나,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많아지므로, 혹은 지위가 올라가고 명성이 드높아지므로, 또는 비난이 아니라 칭송을 들으므로 자기중심성과 자기애에 보탬이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얻게 되는 평안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주시는 예수님의 평안은 절대적 평안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기를 강화시켜주고 지탱시켜주는 평안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절대적 평안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평화요 그래서 얻게 되는 내적 평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의 평안, 내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인데요, 이 평안도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부어주실 때, 제자들이 얻고 누리게 될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후에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깨닫게 될 말씀, 곧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그러니까 절대적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할 때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상황에 좌우되는 기쁨이 아닌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요한복음 14장과 이어지는 15장에서 거듭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참혹한 고통을 내다보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면서 그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우리 자신의 평안, 우리 자신의 사랑, 우리 자신의 기쁨이 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우리에게 나의 평안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들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동 감화, 성령의 충만한 은혜,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절실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이때 비로소 우리는 절대적 사랑,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님의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처음 세 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곧 아가페 사랑, 절대적 기쁨, 평화 곧 평안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누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과 절대적 평안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넘치시므로 말미암아 어떠한 형편과 상황과 조건 아래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을,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주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으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기쁨과 예수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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