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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2)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 9장 1-12절)
서울 등촌동에 가면 실로암안과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은 시각장애인들의 빛을 되찾아주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병원의 설립자는 김선태목사입니다. 실로암 병원은 1986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앞을 못 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준, 김선태 목사는 놀랍게도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 1급임에도 그는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30년 가까이 목회자로서 실로암병원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가 10살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열흘 째 되던 7월 4일, 친구들과 놀러갔다 온 사이에 집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현장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8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뚝섬으로 수박 서리를 하러 갔다가 거기서 불발 수류탄을 만지다 터지는 바람에 같이 있던 8명의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그만 간신히 살아나게 되었지만 완전히 실명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앞을 못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개안수술을 해 준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매일 저주했습니다. 아이고 죽어라, 죽어버려라, 그리고 때렸습니다. 양주에 고모가 계시다는 말을 기억하고 20일 걸려 어렵사리 찾아가 만났는데, 고모 왈, "소는 눈이 있어 일하고, 개도 눈이 있어 집을 지키는데 너는 살 필요도 없다" 박대와 욕설을 들어야했음. 12월 어느 겨울밤에 피난길을 가야 하는데 고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몰래 들음: "저 귀찮은 녀석 양잿물을 먹여서 죽여버리고 가자" 그날 밤에 도망쳐나옴. 말도 못하게 고생함. 고아와 맹인으로서 전쟁통에... 몰래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갔는데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눈 먼 소년 김선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선태 왔네, 성경요절 잘 외웠네, 칭찬을 해줬습니다. 교회에서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중에는 목사가 됩니다.
불행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눈도 보이지 않는 역경의 상황에서 교회 학교 교사의 사랑의 말을 듣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창조 사역이요,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분 예수님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맹인은 눈을 뜨게 됩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지녔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에 이기시고 그 진흙을 눈에 바르시는 방식으로 눈을 뜨게 해준 것은 구약 창세기에서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주심으로 인간을 창조한 내용에 상응합니다. 지금 예수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 곧 창조 사역을 하고 계심을 가리켜줍니다. 새 창조시죠.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삶의 곤궁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죽은 것과 방불한 비극적인 영혼을 침을 뱉은 새로운 진흙으로 새 창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베풀어졌지만 맹인의 눈을 뜬 기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 이래로 처음으로 베풀어진 맹인의 눈 뜬 기적입니다. 물론 이사야 35장에 보면 메시야가 오시는 메시야 시대에 눈 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사역이 메시야 사역임을 알리시려고, 세례요한에게 전하기를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음을 말씀하신 바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역하실 때 수많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바, 오늘 본문에도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뜨려면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다가 집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영적인 눈이 뜨여지려면 참된 빛이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지광성교회 안현수목사님이 쓴 ‘담’이라는 책을 보니까 탈옥수 신창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교정선교를 하시는데요, 언젠가 광주교도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신창원씨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우연히 만나서 인사만 나눈 정도였는데, 그날 설교할 때 해병대 총기 사건으로 인해서 사형수가 되었다가 감옥에서 이분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 앳된 군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 같고 실제로 여러 명이 죽기도 했던 총기사건이었는데 뜻밖에도 범죄의 계기가 된 발단이 자라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한 젊은 청년이 군대에서까지 그러한 고통이 이어지자 우발적으로 총기사건을 벌인 것이었고, 그 말을 듣고 신창원씨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공감하게 되었던 듯합니다. 그 역시 성장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왔던 경험이 발단이 돼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씨가 그와 마찬가지로 총기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그 형제에게 편지를 써서 전해온 것입니다. 그 편지를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 편지에서 신창원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권면과 더불어 자신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어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고생 많으시죠. 예배를 인도하려고 광주에 오신 안현수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신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한 글에서 따뜻한 사랑이 듬뿍 담긴 애정어린 권면과 더불어서 자신의 간증도 들려줍니다.
이분이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었던 계기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어머니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시고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천사 같은 마음에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고 기독교에 궁금중이 생겨 옥중에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부터 읽었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으나 성경을 끝까지 보기로 결심했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신약성경에서 좋은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죄도 없이 십자가의 극악무도한 형을 받게 되는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고 숨을 거둔 장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계속 반복하여 예수님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과 같은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 청송교도소 독방이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악하고 파렴치한 삶을 살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것이며, 그 헌신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천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신창원씨는 무기징역에다가 22년 6개월형이 추가되어 당시 26년째 수감생활하던 중에 쓴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맹인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다고 생각되면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절)하고서 스스로 찔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고 하십니다. 맹인임을 깨달으면 보게 되는 것이요 본다고 하면 그대로 맹인으로 남게 되는 역설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임을 깨달은 동시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써 말씀하신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을 생각해보십시오. 세리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아파했다는 이유로 그는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우리의 약점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콤플렉스가,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열등감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을 나타내는 주요한 통로가 됩니다.
길에서 구걸하던 타고난 맹인을 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각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딱한 맹인을 보고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되는 모양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도대체 왜 이렇게 이가 고생을 하게 된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맹인을 보고서 제자들이 떠올린 질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혹은 부모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이 비참함, 이 고통, 이 맹인이라는 처지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 역시 제자들처럼 맹인의 비참한 현실을 보셨습니다. 그 비참한 현실을 보고서 제자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미래로 가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할 동기가 되고 이유가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일이 그의 고통 때문에 나타날 수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 사역이요 생명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의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의 재창조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고 죽은 것과 방불한 절망의 처지에 놓인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 썼습니다만, 제가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형석박사님의 이야기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이분이 올해 102세이신데 아직까지도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스무 살을 넘겼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어머니가 가지실 정도로 약한 분이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백세가 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역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역전의 원리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오히려 지혜롭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으로 보게 되고, 콤플렉스가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의 강점이 되고, 열등감이 있어서 오히려 성장하게 되고, 우월감이 있는 사람은 그 우월감 때문에 결국에는 열등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대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 마음과 열망과 노력 때문에 오히려 끝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지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나라에서는 종의 자리로 끌어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심에 사로잡혀 채움에만 온통 에너지를 쏟는 자는 오히려 비워지게 될 것이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오히려 자기를 비우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에서는 비움이 곧 채움이요 낮아짐이 곧 높아짐이요, 약점이 곧 강점이요 약함이 곧 강함이요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신의 장점이 되는 역전의 원리, 역설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렇게 말하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히려 감사하시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러한 약함과 부족함과 콤플렉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의 창조 사역이요 공동의 생명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 동안은 낮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빛의 사명을 감당할 동안은 낮입니다. 지금은 낮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대낮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빛으로 쫓아내고 전혀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표현된 것이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실로암에 가야 눈을 뜨게 되니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됨이요, 그래서 맹인조차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봄으로 인해서, 누구의 죄 때문이냐를 생각하던 제자와 달리 예수님의 시각으로 맹인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약함의 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망하고 기대하고,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고통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현장임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사명자가 되어 그 일에 나 자신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예전 TV를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낚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대물 낚시에 끌려서 강원도에 살던 사람이 제주도 서귀포로 이주하여서 거기서 유유자적 낚시꾼으로 살아가면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큰 잿방어 잡으면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참 행복한 살고 계심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인생을 폄하하고픈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서 솔직히 자연을 좋아하는 제 자신이지만 하나도 안 부럽고 제 입장에서 오히려 사명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때론 무거운 짐진 것 같은 부담이지만 오히려 더욱 좋다는 나름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눈을 뜨고서 발견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우리, 다시 눈을 감아버리면 안되겠죠. 보아야겠죠. 무엇을 보아야겠습니까? 날 때부터 맹인된 처지의 불우와 고통과 아픔을 보아야겠습니다.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러한 고통과 아픔과 말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보고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될 터이지만,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생명 사역, 새창조 사역에 쓰임받는 사명자로 서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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