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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2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3)
조금 있으면 (요 16장 16-24절)
한수산이라는 소설가가 쓴 산문집을 보니까 한 영화 이야기가 나옵니다. <보이후드>라는 영화인데요 한 소년의 성장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주인공 소년이 홀로서기를 위해서 집을 떠나려 합니다. 소년의 어머니는 여러 이유로 고단하고 척박한 삶을 살아야 했던 분인데 곁에 있던 아들마저 자신을 떠나 이제 집을 나가려는 것입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어머니가 내뱉는 말입니다: ‘나에게 이제 남은 건 내 장례식밖에 없구나’ 그런 어머니에게 아들이 대답합니다: “엄마는 왜 40년을 앞당기고 그러세요.” 나이를 보면 앞으로도 40년은 더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한 말이겠죠. 마지막 대사는 아들을 향해 어머니가 큰 소리로 외치는 말입니다: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앞에 놓인 인생길에 뭐가 더 있을 줄 알고 계속 걸어왔는데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죠. 별 것 없는 인생이라는 말이겠죠.
내일이나 내년에는 뭔가 더 달라지고 뭔가가 더 있을 줄 알고 달려온 인생인데 막상 와보니 별 것 없더라는 거죠. 오랜 인생 끝에 인생의 뒤안길에서 허망하게 뒤돌아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 바로 “난 뭐가 더 있을 줄 알았다!”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현 생애 가운데서 이 말은 아마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인에게는 분명이 뭔가가 더 있습니다! 죽음을 맞이함과 더불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은 영광입니다. ‘영광의 소망’이 우리에게는 있습니다. 죽음 이후, 어떻게 될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죽고서 다시 이땅으로 돌아온 사람도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경험했으나 죽음 이후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에둔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죽음과 더불어 부활로 제자들을 다시 찾아올 거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십시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내일이면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기에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할 테지만 또 조금 있으면, 그러니까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난, 부활한 나를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을 다시 보게 될 때 제자들은 기뻐할 거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경험하고서는 깊은 근심과 절망에 빠지겠지만,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서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더 자세하게 설명하십니다. 본문 21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메시야의 고난과 이로 인한 제자들의 근심을 여자의 해산하는 과정으로 비유하십니다. 해산을 앞둔 산모의 심정은 근심이요 다가올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지만 해산의 진통을 겪고서 막상 아이를 출산하고 나면 생명을 얻은 기쁨으로 말미암아 해산의 고통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해산의 고통으로 출생한 옥동자와 같은 자녀들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서 기뻐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지는 22절에서 재차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만난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근심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마음에서 벗어나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죽음 앞에서 죽음으로 인해 근심, 그러나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 앞에 있게 됨으로 인한 기쁨,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요, 제자들이 곧 경험하게 될 일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러니까 근심과 기쁨, 이것이 임종을 앞두고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마음이요 믿음입니다. 누구나 죽음 앞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 때문에, 임종을 앞두고 처음 가는 길이어서 근심뿐이겠지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찬란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음을 믿고 임종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섰을 때 의로우신 재판관이 입혀주실 의의 옷,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기대하며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유재석씨가 진행하는 유퀴즈라는 프로그램에 김범석이라는 서울대학병원 종양내과 의사가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은 많은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암병원의 의사로서 많은 환자들의 임종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진행자가 물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환자?”를 물었습니다. 이분이 일하는 병원에는 임종방이 있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운 환자들이 죽음을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1인실을 개조한 방인데 거기에는 스피커가 있습니다. 사람의 감각 중에서 끝까지 남는 것이 청각인데 죽음을 앞둔 환자라도 들으실 수 있으니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라 당부를 하고, 평소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으라고 스피커를 둔 것입니다.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 느끼면서 임종을 맞이하라는 것이죠. 어느 날 한 임종방을 들어섰는데 스피커에서 계속 트로트가 나와서 의아했다고 합니다. 당시 한창 유행하던 트롯트 ‘땡뻘’이라는 노래가 나오더라는 거예요. 좀 이상했습니다. 굉장히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가 나는 노래인데, 꼭 이런 음악을 틀어놓은 이유가 있나, 속으로 생각해보았답니다. 이 환자는 30년 동안 영세 양말공장을 운영하시고 직접 양말을 만드셨고, 이 일로 자녀 셋을 부양해서 공부시키고 박사까지 만드신 분이었습니다. 평소 트롯트를 좋아해서 그 음악을 들으면서 일했다고 합니다. 이런 설명을 듣고서 들려오는 '땡뻘' 가사를 들으니 땡뻘 가사가 그토록 슬픈지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난 이제 지쳤어요 땡뻘 기다리다 지쳤어요 땡뻘 혼자서는 이 밤이 너무나 추워요" 노래 가사를 듣고 환자를 보니 그분이 오랫동안 지치신 것 같아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양말공장 운영하면서 얼마나 지쳤을까, 그때가 겨울이었는데 가시는 길이 춥게 느껴졌습니다. 고단했던 환자분의 삶이 눈에 잡힌 것입니다. 가족들은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음악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고된 인생길에 지치고 게다가 오랜 투병생활에 더욱 지치고 그런 모습으로 죽음 앞에 서있는 환자였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임종이 그리 다르지 않은 게 삶의 현실인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맞이하는 죽음은 물론 여느 사람들처럼 근심으로 맞이하겠으나 죽음 후에는 근심이 기쁨으로 급격히 변화될 것을 믿고 소망하면서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위르겐 몰트만이라는 신학자가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이분이 1926년 생이니까 올해로 95세이신데 자신의 마지막 책이라고 생각하고서 낸 책입니다. 죽음을 가까이 둔 노 신학자가 죽음에 대한 생각과 영생의 소망에 대해서 쓴 얇은 신학책입니다. 이분은 아마 20세기에 신학계와 많은 목회자들에게 저술로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분 중의 한 분일 것입니다. 이분이 1964년에 <희망의 신학>이라는 책을 내고서 일약 세계적 신학자의 반열에 올랐는데요, 그 이후에도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에게 좋은 영향을 준 분입니다. 물론 여느 독일 신학자처럼 성경비평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개혁주의 정통파 신학자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많은 복음주의권 교회에도 좋은 영향을 주는 내용을 많이 말한 분입니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놀란 것은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즉시로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성도가 죽으면 몸은 부활하기까지 해체와 부패의 과정을 거치고 영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 품안에서 복락을 누리게 될 것이고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는 종말의 끝에 성도의 이름을 부를 때 영광스런 몸의 부활을 덧입게 될 것이 성경의 가르침인데, 이분은 성도의 죽음 직후에 죽는 순간에 몸의 부활을 바로 경험하게 될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근거 사례로 제시한 것에서 성경적 근거는 미흡하였지만 여러 신학자들의 발언을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가령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1945년 4월 9일에 나치의 한 수용소에서 처형되기 위해 끌려나갔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서 작별했는데요, “이것은 마지막이지만, 나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시작이다”는 말도 인용하고,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의 말, “눈을 뜨는 즉시 당신은 부활할 것입니다.” 루터는 성도가 죽고 나면 깊은 잠에 빠진 것과 같을 터인데 예수님이 부활시켜주실 때 바로 눈을 뜨고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루터의 말을 더 인용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시간 계산이 존재하기 않기 때문에 천년도 마치 하루와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첫 인간 아담은 마지막 날 이전에 태어난 인간과 동일하게 가까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길이에 따라서 시간을 보시지 않고 시간을 가로질러 보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단 한 번에 일어났다.” 이 노 신학자가 보시기에 신학에서 소위 ‘중간상태’ 이론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고찰해보면 옳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이분의 주장을 접하고 제가 좀 놀랐던 것은 저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장례식에서 설교하면서도 종종 이런 내용을 이야기한 적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말한 것인데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성도가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을 부인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시간 경험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시공간에 갇혀 있는 시간입니다. 그때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로 그리고 미래로 일방향으로 흘러가는 시간인데요, 그러나 사람이 죽으면 시공간 내에서 경험하는 시간이라기보다 영원한 현재와 같은, 빛되신 하나님의 시간속으로 들어가는 거라고 생각해보면, 죽음 직후에 곧바로 부활의 몸을 입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입니다.
현대 물리학자들이 말하는 시간 개념에 따라 그렇게 사변을 해본 것이죠. 맞을 수도 있고 맞이 않을 수도 있는데, 하여튼 죽음은 누구도 겪어보지 못한 것이라 성경이 살아있는 자들을 위하여 살아 있는 자들의 관점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더 이상의 말을 하는 것이 별로 의미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여튼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와서 오늘 주어진 말씀을 ‘조금 있으면’ 다 좋아질 거라고, 비록 지금은 근심이 가득하지만 이제 곧 이어서 얼마 안돼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거라고 설교하고 싶지만,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배격했던 평안이 없으면서도 다 잘 될 거야, 평안할 거야, 라고 선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이 상황에 부합한 삶의 현실 속에서 하나님이 본인에게 말씀하시는 분도 있을 수 있는 줄 압니다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현실은 근심의 때가 있는가 하면 기쁨의 때가 있고 전도서의 말씀처럼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그러한 것들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병행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욱 진실에 부합할 듯합니다.
전도서 3장에서 지혜자는 인생의 다양한 때를 말합니다. 가령 기쁠 때와 슬플 때를 말합니다. 다양한 인생의 때를 말하고서 전도서 3장 11절에서 전도자는 소위 ‘영원한 복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물론 사람이 답답해하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어느 때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다 알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정해놓으셨습니다. 오직 알 수 있는 것이 한가지뿐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는 확신입니다.
전도서 3장 11절 말씀은 세상만사의 기한과 때에 대한 말씀의 결론입니다. 어떤 구약학자는 이 구절을 ‘영원한 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씀 구절을 좀 쉽게 다시 읽어보면,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만드셨다. 더욱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깨달을 수는 없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아름답게 되도록 우리 인생을 이끌어가십니다. 게다가 하나님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심어놓으셨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셨습니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해 아래 세상에서 살면서도 해 위에 계시는 하나님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조금 부족하고 조금 모자라고 조금 아쉽고 조금 안타까워도 하나님은 마침내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가 되면 아름답게 되도록 다듬고 계시는 것입니다. (*전도서 해설은 구약학자 왕대일의 전도서 강해책에서 그대로 발췌한 내용임을 알립니다) 우리 인생에는 어제의 근심이 있더라도 오늘에는 기쁨이 찾아올 수 있고 또 내일에는 다시 근심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무쌍, 예측불가의 인생을 우리는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죽음 앞에서 근심할지라도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것이기에 근심이 기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비결, 근심이 기쁨으로 변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뵈올 때 기쁨이 찾아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근심을 벗어나 기쁨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비결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뵈올 때입니다. 주님을 뵙는다는 것은 오늘처럼 이렇게 성도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주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주님을 뵈옵는 것이 바로 예배요 기도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를 말씀하십니다. 본문 23-24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뵈옵는 시간입니다. 예수님을 뵐 때 우리는 근심이 사라지고 근심이 오히려 기쁨으로 변할 것이고, 특별히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구할 때 구하는 것을 받게 됨으로 인해서 더욱 기쁨이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의 순간에 ‘조금 있으면’ 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지금은 근심하고 있다고 해도 우리는 예배로 기도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으니까 ‘조금 있으면’ 근심이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임을 믿고 예배의 자리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뵈옵는 자리요,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때 살아계셔서 지금도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뵈옵는 것이요, 이뿐 아니라 예수님께 구하는 것을 받게 될 것임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이 변하여 오히려 기쁨이 될 것입니다. 오늘 주님을 뵈옵는 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한 복된 심령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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