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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5)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요 12장 1-11절)
10년 전에 소천하신 여류 소설가 고 박완서씨의 따님이 어머니의 글 중에서 골라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짧은 글의 제목이 ‘사랑의 입김’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할머니로서 손자를 곁에 두고 보면서 아이가 다치거나 곤충에게 물렸을 때 물린 자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호호, 호호’하면서 상처에 입김을 불어준 일을 매개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여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입김을 자주 받았던 것입니다. 넘어지거나 다쳤을 때 빨간 소독약도 귀했던 시절이라 약 제대로 못 발라봤지만, 그때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저 입김을 ‘호오, 호오’ 불어주셨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다쳤을 때만이 아니라 감자나 고구마나 밤을 화롯불에 꺼내서 껍질을 벗겨주시면서도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식혀주셨습니다. 국이나 찌개도 그렇게 식혀주셔서 먹기에 적당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온 집 안에 서려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면,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에 문을 들어서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집안 전체가 썰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직감이요 마음의 느낌이지만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급식을 줍니다만 예전에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죠. 학교에서 먹는 도시락에도 음식 곳곳에 어머니의 입김이 서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작가는 말합니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옴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입김을 통해 경험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완성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입김이요 하나님의 숨결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입김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 가운데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처럼 사랑할 수 있었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말씀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집에서 잔치식사 중이신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던 것입니다. 이 잔치 자리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마리아의 오빠였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의 기적 이후에 배설된 잔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되는 가롯 유다가 이 여인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삼백 데나리온, 당시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되는 큰 가격이 나가는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구제할 수 있을텐데, 왜 쓸데없이 낭비하느냐는 비난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본문 7-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은 더욱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자들을 편애하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난한 자, 어려움에 처한 자, 육신이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마땅하겠죠. 그런데 예수님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구제나 이웃사랑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 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간에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착복하거나 그 구제와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하시고 옳다 인정하심은 자신에게 좋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이웃사랑도 가능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가리키는 상징을 읽어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다소 직관적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까 통찰한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그 발 앞에서 즐겨 들었던 마리아이다보니 예수님께서 예고한 죽음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캐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성의 직관으로서, 사랑하는 예수님이 떠나실 것 같은 직감에 이끌려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제 한 주 후에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임을 인정하시고 마리아의 행위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는 이성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직감과 느낌에 따른 것이든, 혹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미리 알았든 아니면 몰랐든,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마리아의 전심을 담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 없는 예배, 예수님 사랑 없는 기도, 예수님 사랑 없는 찬양, 예수님 사랑 없는 구제, 예수님 사랑 없는 전도, 예수님 사랑 없는 성실, 예수님 사랑 없는 종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너무나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을 이야기한 것입니다만 사랑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있고 이웃 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고 그 사랑의 역동적인 운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누가 말했느냐면 어거스틴입니다. 고백록과 신의 도성으로 너무나 유명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근원하고 하나님께 원천을 두지 않은 인간의 사랑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원천을 두지 않는 인간적 사랑은 두 가지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사랑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 자신을 그 사람에게 완전히 묶어 두게 되며, 우리 자신의 모든 기대와 환상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이 두가지는 사랑의 왜곡이요 파괴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를 떨쳐버리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을 왜곡됨 없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원천으로 하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덧붙여 말합니다: “사랑은 부분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뿐이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므로 무엇이든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향한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교회 사랑이든, 가족 사랑이든, 진정한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로완 윌리엄스 저 참고)
그래서 유다는 틀렸고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지만, 유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관건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상식을 초월하고 결코 계산되어질 수 없는 이례적인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마리아는 이토록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마리아에게는 특별한 상황이란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게 된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에 더욱 확실히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깨달을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래서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공통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처했을 때,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서 수렁에서 건져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안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참 힘들다고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나는 왜 그런가’라고 신세타령을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우한 환경이,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이, 무겁고 힘든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무대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수많은 찬양의 시들은 그냥 감사찬송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억울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끌어올려진 보배와 같은 하나님 사랑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움 속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찬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해도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유지되려면 늘 고통에 처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한때 어렵고 힘들 때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힘든 것도 아니고 역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의 연속이고 뭐 큰 이슈가 없는 인생이다보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게 되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마리아가 처한 비극과 절망과 견줄만한 큰 고통은 없었다 해도 크고 작은 삶의 어려움이 있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상황이고 늘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신실하고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되지 않은, 복음의 진리에 기초한, 그렇게 형성된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둘째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직관으로든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서든 아니면 상황의 흐름을 분석한 것이든, 어떤 이유로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지했습니다. 비록 잔치 석상이었어도 예수님에게 깃든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 죽음과 떠남과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리아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 전부터, 나를 지으시기 전부터, 나를 향했고, 그 사랑이 결국 나를 찾아냈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감격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 하나님이 나와 함께함으로 말미암은 참된 생명을 주셨다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과 생명을 생각해보면 나를 향한 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값없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깊이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잘 아시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요한은 말했고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요한일서 5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오직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때문에 가능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새롭게 들어야 할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예수님 사랑, 그 사랑을 이례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넘치는 사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가 주님 발 아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귀담아 들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도 베다니 이들 자매의 집에 오셨는데, 그때 마르다는 분주하게 예수님이 잡수실 음식 장만하는데 매우 바빴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눅 10:3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불평이 당연히 생겼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동생 마리아에게 명하셔서 나좀 도와 달라고 하세요, 라고 하소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의 신앙과 마리아의 신앙을 비교한 것도 아니고, 마리아의 신앙이 더욱 우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다의 은사와 마리아의 은사가 다른 것일 수도 있고, 마르다는 섬김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데 반해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서 기쁨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추구하는 영성의 색깔이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선택입니다. 마르다가 선택한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갈급해서 모처럼 주님이 오셨는데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그 발을 머리털로 씻겼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향한 겸손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고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관건은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의 관건은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특별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일상적으로 더욱 객관적인 십자가에서 쏟아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깊이 묵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늘 귀기울여 듣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알고 생생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가운데 우리가 더욱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일만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빚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탕감해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계산되지 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죽을때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함께 나누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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