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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21일 동산교회 추수감사주일 설교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 (눅 15장 25-32절)
감사하다는 말이 영어로 ‘Thank you’죠. 감사하다는 단어 ‘Thank’는 공교롭게도 생각하다는 단어 ‘Think’와 참 유사합니다. 우연이겠지만 감사가 생각에서 비롯된 것임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결국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감사는 생각의 결과입니다. 너무 당연합니다. 생각해보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구약의 여러 절기들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특별한 시간으로 허락하신 절기들이 감사의 시간이요 축제의 시간임을 생각했습니다. 창조주께 돌리는 참된 영광, 참된 예배는 결국 감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호흡이 감사요 일상이 감사요 관계가 감사요 존재가 감사요 살아있음이 감사요 인도해주심이 감사요 소망 주심이 감사요 어려움 속에서의 인내가 감사요 환난 가운데서의 성장이 감사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계심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 인해서 감사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시다는 사실로 인해서 감사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급변하는 세상, 짧디 짧은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 허망한 마음 금할 수 없는 인생의 덧없음 앞에서 신음하지 않을 수 없는 인생들이 살아계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안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사랑이신 하나님,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 자체에서 감사가 솟구쳐오릅니다.
누군가에게는 감사가 당연하고 자연스럽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하라는 성경의 말씀을 듣고서 불쾌하게 느낄 수도 있습니다. 감사할 상황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객관적으로 비교해보아도 감사하지 않을 수만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감사하지 못함에 대해서 이해가 될 때가 많고 인간으로서 그런 상황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은 인간적이지 못하도록 보이게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두 아들을 죽인 사람을 양자로 삼은 손양원목사님의 감사의 기도를 들으면 탄복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인간적으로는 거부감이 드는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수님의 비유, ‘탕자의 비유’로 흔히 말해지지만 정확하게는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이야기’로 이해하는 게 좋습니다. 둘째 아들 못지 않게 첫째 아들에게도 이야기의 비중이 있고, 두 아들 못지않게 아버지에게도 예수님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등하게 아버지에게도 그리고 두 아들 각각에게도 예수님의 시선이 쏠려 있는 이야기입니다.
감사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아버지와 둘째 아들은 지금이 감사할 상황입니다. 예상치 못한 너무 기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너무나 사랑했으나 자신의 곁을 오랫동안 떠나있던, 그래서 죽은 줄만 알았던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기뻤고 감사할 상황입니다. 둘째 아들 역시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받아서 그것 가지고 살아보려고 아버지 품을 일찍 떠났다가 저 먼 타국에서 허랑방탕하게 탕진하고서 배고파서 움켜진 배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올 생각을 했지만 염치가 없어서 아들이 아니라 차라리 종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생각하고서 무거운 발걸음을 고향으로 집으로 향했는데 아버지의 예상치 못한 환대와 기쁨과 즉각적으로 아들로 복원됨을 경험하고서 어리둥절할 정도로 감사할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아니겠죠.
세계적으로 어떤 유명한 소설가, 아마 소설 <적과 흑>을 썼던 스탕달로 기억됩니다만 이분이 예수님의 소위 ‘탕자의 비유’가 가장 탁월한 단편소설이라고 말했습니다. 소설가나 문학가들에게 둘째 아들 탕자는 매력적으로 보이나 봅니다. 최근에 어떤 기자가 이어령씨의 인터뷰를 엮어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을 냈는데 거기에 보니까 앙드레 지드라는 소설가가 <탕자, 돌아오다>라는 소설을 읽고 이분이 큰 감동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이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에게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는 장면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겁니다.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열매가 더 달았어요”
이어령씨는 둘째 아들이 훨 낫다는 겁니다. 길 잃은 양이 훨씬 훌륭하다는 거예요. 자신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났고 길을 잃은 양이 되었을 뿐이지, 방구석에만 처박혀서 목자 엉덩이만 따라가는 양 99마리보다 훨씬 훌륭하다는 겁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시키는 대로만 사는 효자보다 스스로 존재해보겠다고 마음 먹고 아버지의 울타리를 박차고 나갔다 돌아온 자식이 더 장하고 측은하게 느껴질 거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어령씨는 주장합니다. “남의 신념대로 살지마라. 방황하라. 길 잃은 양이 돼라!” 문학가로서 상상력을 가미해서 둘째 아들을 높이 추켜 올렸지만 성경 해석가들에게는 예수님의 의도와는 크게 부합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이어령씨는 예전 책에서는 ‘탕자의 비유’를 제법 성경적 의도와 부합하게 해석하기도 했습니다.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불효자의 이야기도, 허랑방탕한 사람의 이야기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그네 된 우리 인생 이야기로 봅니다. ‘나그네’라는 말의 원래 뜻이 밖으로 ‘나간 이’를 뜻하죠.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그렇게 ‘나간 이’ 곧 나그네입니다. 나그네가 되어서 뛰쳐나간 이야기입니다. 아버지 품에서 독립하여 멋지게 살아보려고 떠난 이야기입니다. 익숙해서 싫어진 고향을 떠난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아버지 품이 그리 좋은지 모른 채 아버지의 간섭이 싫게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부담스럽고 마치 내 자유를 앗아가는 듯한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모든 것이 행복할 걸로 생각했으나 막상 떠나보니까 찾아온 것은 궁핍과 허무뿐이었습니다. 새 출발하고자 부푼 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지만 이내 타향살이에 지칠 뿐이었고,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인류의 비참함입니다. 우리 존재를 있게 한 아버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채 멋지게 살아보려고 발버둥쳤으나 결국 남는 건 죽음뿐인 인생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스스로 성공하면 행복할 거라는 신기루에 속아서 사막 같은 인생길을 힘겹게 달음질했지만 참된 안식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점점 아버지의 품이 그리워지고 고향땅이 푸근하게 다가오지만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막막함이 엄습합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되고서야 아버지의 마음을 뒤늦게 깨닫는 철부지 아들과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영원한 아버지십니다. 우리가 돌아가기만 하면 두팔 벌려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둘째 아들은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받아들여줌으로 인해서 은혜와 사랑을 진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 풍성한 은혜와 사랑으로 인해서 감사가 저절로 나왔을 겁니다.
문제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의 입장이 이해되는 면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꼭 그래야 했나는 생각도 듭니다. 이해되는 면은 화가 날만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앉아계신 분들 중에서 맏이이신 분들은 첫째 아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첫째이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부모에게 혼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동생들의 잘못인데 첫째라는 이유로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기도 했을 것이고요,
헨리 나우웬이라는 분을 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카톨릭 예수회 신부로서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영성신학을 가르치셨던 분입니다. 나중에는 교수직을 내려놓고 캐나다 장애인공동체에서 섬기며 사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분입니다. 독실한 카톨릭 가정에서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맏이다 보니 어릴 때부터 순종적이고 충실한 아들이 되어야 한다고 배우며 자랐습니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맏이 특유의 책임감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자랐고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썼습니다.
반면에 그의 동생들은 자유분방했습니다. 형의 한계를 시험하려는 듯이 자유분방했습니다. 그런데도 부모님은 자신에게는 엄격하지만 동생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만 느껴졌습니다. 자신이 했으면 심하게 질책 받을 문제 있는 행동에 대해서도 동생들이 그런 일을 저질러도 부모님이 너그럽게 이해하시는 것을 보고 불공평하고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한번은 동생이 터무니없이 큰 잘못을 저지른 뒤 아버지께 혼나지 않으려고 낱낱이 털어놓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날 아버지는 동생과 깊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을 잘 이해해주었습니다. 나우웬은 아버지와 동생의 친밀함을 보고 너무 부러워 동생을 질투했습니다. 장남인 자신은 끊임없이 착하고 곧게 행동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 보상으로 존중은 얻었지만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부모님의 친밀한 사랑은 늘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느꼈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우웬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그러나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었습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은 차가운 분노입니다. 원망의 가장 큰 문제는 겉으로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고 내면에 은밀하게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난받을 일 없이 떳떳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공의롭고 의로운 원망입니다... 자기의가 강한 사람의 도덕주의적 분노입니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여기며 책임을 다하고 법을 지킨데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억울해하는 사람입니다...원망은 우리 마음의 뜰에서 무성하게 자라며 거침없이 퍼져 나가는 잡초와 같습니다. 그 뿌리가 깊이 박혀 다른 많은 뿌리와 엉키기 때문에 뽑아내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더구나 그냥 잡초가 아니라 독초입니다. 그 독성이 우리의 관계를 해치고, 또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약화시킵니다.”
나우웬은 큰 아들로서 자신의 내면 안에 원망이 들어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 원망의 감정이 어떤 특정한 사건을 계기로 표면에 드러나고 끌어오르게 되면 분노로 표출되는데 오늘 예수님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감정이 바로 그러한 것임을 강조합니다.
돌아온 둘째 아들을 환영하고 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이는 아버지를 보는 첫째 아들은 분노합니다. 아마 동생이 돌아왔다는 사실보다도, 그래서 동생이 이제 결국 자신에게 돌아올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게 될 거라는 것보다도, 그래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가 잔치를 벌이는 송아지조차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보다도,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편애 때문에 더 화가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생각은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릅니다. 동생이 아버지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리고 앞으로 더욱 독차지할 것이라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질투일 수도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탕자를 보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모습에 심한 질투를 느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 아들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모든 면에서 동생보다도 더 훌륭하고 아버지의 더 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첫째 아들의 감정은 복잡한 것처럼 보입니다. 비교의식도 있고 경쟁의식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면 깊은 곳에 원망이 자리잡고 있어서 그것이 분노로 폭발한 것처럼 보입니다. 나우웬은 말합니다. “원망과 감사는 공존할 수 없습니다. 감사는 원망의 반대말입니다. 삶을 선물로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을 원망이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원망은 내가 받아 마땅한 것을 받지 못한다고 나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내 것’과 ‘네 것’을 뛰어넘어 삶의 모든 것이 순전히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진리를 나타냅니다.”
나우웬은 누구나 의식적인 연습을 통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나의 감정과 느낌이 여전히 상처받고 원망에 차 있을 때도 나는 감사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나는 늘 원망과 감사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어두움 속에 나타나셔서 집으로 오라고 부르시며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너의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원망을 극복하고 감사를 선택하는 비결은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온전히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비교하지 않는 풍성한 사랑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누구와도 비교하지 않고 우리를 다 같이 사랑하시는 아버지시오 우리는 다 같이 사랑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면 원망 대신 감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두려움과 질투 그리고 내면 깊은 곳에서 원망이 똬리를 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고 받아들여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들고 하나님을 확고히 신뢰하는데서 감사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무한한 사랑, 영원한 사랑, 풍요한 사랑을 신뢰할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삶이 묻고 나우웬이 답하다>, 크리스 프리쳇 저, 230-9쪽 참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두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고 두 아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는 아버지이십니다. 반면에 오늘 첫째 아들은 본문 29절에 보면,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겨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실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첫째 아들은 동생을 ‘이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아버지의 아들, 당신의 아들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만약 아버지와 둘 사이에서 그를 선택한다면 자신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을 거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만 잃었던 것이 아니라 첫째 아들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자신의 곁을 떠나고 방탕한 삶에 잃어버렸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품을 떠나서 멀리 떨어졌다면 첫째 아들은 원망과 분노로 아버지에게서 이미 멀리 떠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둘째 아들을 받아들여주신 아버지는 첫째 아들 또한 받아들여주십니다. 아버지는 첫째 아들을 ‘아들아’라고 부릅니다. 본문 3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가 이르되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아버지의 풍성하신 사랑은 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나머지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가로막지 못합니다. 형이나 동생이나 아버지의 사랑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한 가족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 모두의 관계를 회복하라는 부르심입니다.
안타깝게도 첫째 아들은 오늘 둘째 아들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지 않은 채 집밖에 서있습니다. 아버지의 집 밖에, 아버지의 참된 풍요로운 사랑 밖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첫째 아들을 향해서 아버지는 집에 들어오라고, 그래서 함께 이 형제자매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서 나누고 누리자고 초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왜 감사하지 못합니까? 오늘 추구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첫째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질투도 있었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오해, 즉 편애한다는 오해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나누지 못하겠다는 욕심과 이기심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진정 감사해야 할 때, 마땅히 감사해야 할 순간에도 감사를 거부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 해를 살면 살수록 목회자로서 저 자신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어떤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알아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감사, 창조주를 향한 감사의 찬양, 선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상황과 관계없는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오늘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므로 하나님으로 인한 감사, 아버지의 풍요로우신 사랑으로 인한 감사로 감사를 회복하시고, 오늘 추수감사주일을 전환점 삼아 남은 생이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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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사랑은 어떻게 싹이 트는가? (살전 4:9)
지난 주일 설교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우리 모두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을 섬기는 형제자매공동체임을 강조했습니다. 형제자매로서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데 이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서 왔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된 자녀들이 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형제자매애(愛)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형제’라는 단어는 317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 ‘자매’라는 단어는 26번 사용되었는데요, ‘형제’라는 단어는 단순히 남자 형제만을 가리키지 않고 ‘형제와 자매’를 의미할 때가 많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교회의 구성원을 가리키는데 ‘형제’가 사용된 것입니다. ‘형제자매’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임을 가리키면서 가족으로서 서로 서로에 대한 칭호였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분은 여러분의 형제요 여자분은 여러분의 자매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교회를 형제자매공동체로 지칭하는 것은 우리가 가족 안에서 형제와 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듯이 교회 안에서 사랑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한 교회 구성원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가 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아끼고 존경하고 우애하고 사랑해야 함을 뜻합니다. 로마서 12장 10절에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한 가족 안에서 진짜 형제임을 깨닫고 사랑하고 먼저 존중하라는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 예수님께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과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 이렇게 되려면 얼마나 놀라운 변화가 필요할까요?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확증해주시는 것은 이렇게 하는 사람은 반드시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우리로 하여금, 집이나 토지, 가족마저도 복음을 따르기 위하여 포기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불의한 재산을 처분하여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도록 우리를 감동시키시기도 하시고, 가족이 예수 믿는 것을 반대할 경우에는 가족 대신 예수를 택할 수 있게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고, 또 가족에게만 베푸는 좁은 사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게도 해주십니다. 이것들이 다 “나(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행하는 믿음의 실천이요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렇게 변화된 사람은 현세에서도 100배나 되돌려 보상을 받습니다.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와 어머니와 자식을 갖게 됩니다. 아버지는 한분 아버지 하나님뿐이므로 100배 보상 받는 항목에 아버지는 없습니다. 100배 많은 자식을 보상으로 받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버릴 항목에는 아내는 없습니다. 괜히 아내 버리지 말라는 거예요. 버리는 항복은 영어로 Or입니다. ‘~나’인데 반해서 100배 돌려받을 항목은 ‘And’입니다. 이것과 그리고 저것도입니다. 포기하는 것은 목록 중에 하나이면 되지만, 얻게 되는 것은 목록에 있는 모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위해 버리는 것보다 믿음으로 인해서 얻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투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100배 돌려받았습니까? 어느 하나를 버렸는데도 이 모든 것을 100배나 돌려받았습니까? 형제자매가 100배나 늘었습니까? 늘었죠. 예수 안에 있는 형제 자매, 교회공동체를 보상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초대교회에서처럼 서로 서로를 형제 자매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믿음 때문에 가족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도 예수님 때문에 형제자매 혈육을 포기할 수는 있지만 예수님을 포기하지 않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100배나 많은 형제자매를 보상으로 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자매공동체로서의 교회입니다.
로마서 14장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형제 사랑에 실패하게 되는 이유에 관해서 한 사례를 말씀해줍니다. 로마 교회 내에 소위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하나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는 형제공동체로서 적합하지 않은 모습이 있었던 듯합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아마 로마교회의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던 이방인들이었을 것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아마 소수의 유대인이었으리라고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는 전부 이방인이고 믿음이 약한 자는 전부 유대인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으나 대개 크게 보아 그렇게 생각하면 90%는 맞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믿음이 강한 자와 믿음이 약한 자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이냐는 논쟁이 있었던 듯합니다. 가령, 고기를 먹는 게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한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우상숭배할 때 신전에서 제물로 사용되던 고기가 시장에 나와서 유통되기 때문에 꺼림칙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의 음식 규정, 그것을 코세르라고 하고 유대인들이 먹는 음식을 코셔 푸드라고 합니다. 상당이 까다롭습니다. 당시에도 로마교회 내 유대인 성도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굉장히 조심스러워했고 양심상 꺼림칙하게 생각했던데 반해서 이방인 성도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 음식 문제뿐 아니라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문제와 절기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두고도 티격태격 싸움이 있었던 듯합니다. 소위 믿음이 강한 자는 규정과 율법에 꼼꼼히 신경을 쓰는 이들을 향해서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자유하게 되어서 그러한 규정에 매이지 않아도 됨에도 그들이 믿음이 약해서 그런다고 멸시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는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방탕한 자들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이요 조심성 없고 사려깊지 못한 이들이요 우상숭배의 가장자리를 왔다갔다 하는 이들이라고 판단합니다. 그러니까 이방 신자들이 유대인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멸시하다’, ‘업신여기다’(한글 개역개정)이고, 유대인 신자들이 이방 신자들을 향해서 하는 말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행해서 일관되게 ‘멸시하다’, ‘업신여기다’ 혹은 ‘판단하다’, ‘비판하다’를 사용합니다.
형제자매인데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고 진영이 갈려서 서로를 향해서 멸시하고 판단하는 로마교회의 문제를 사도바울은 직접 가보지는 않았으나 들어서 알고 있었던 듯합니다. 그러면 바울의 기본 입장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믿음이 강한 자였고 이방 신자들과 생각이 비슷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두 진영에 대해서 어느 한 쪽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강한 자가 옳고 믿음이 약한 자가 틀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자신과 입장이 비슷한 소위 믿음이 강한 자들을 더욱 엄격하게 책망합니다. 로마서 14장 15절에서 말씀합니다.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풀어서 설명해보면 ‘만일 네 형제나 자매가 네가 먹는 것으로 말미암아 상처를 받는다면, 너는 더 이상 사랑으로 행하지 않는 것이다... 음식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반목하는 두 진영 당사자들에게 서로 상대를 받아들이고 논쟁과 싸움을 그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니까 관용하고 서로 받아들이고 싸움을 그치라고만 했다면 어딘가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집에서 자녀들을 키워보면 형제자매끼리 싸우기도 한단 말이에요. 싸운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형제자매가 아니라거나 그들이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의견 다툼은 언제든 있을 수 있어요. 그저 형제자매니까 서로 관용하고 사랑하라고만 말할 수는 없어요. 바울은 더욱 근본적인 이유를 들어서 형제 사랑을 교훈합니다.
우리가 한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판단하거나 비난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두 진영을 향해서 “너는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너는 또 어찌하여 네 자매를 멸시하느냐?”고 말하면서 이렇게 싸우는 이들에게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내다보라고 권면합니다. 그 미래, 우리가 직면할 미래란 어떤 미래입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석 앞에 설 미래입니다. 엄위하신 하나님께서 심판석에서 우리를 판단하실 것입니다.
현재의 싸움과 다툼과 하나되지 못함과 사랑하지 못함,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모습에 대해서 하나님이 판단하시고 심판하실 날이 있음을 내다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형제 사랑에 관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전부는 아닙니다. 핵심에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그저 위협으로 받아들이라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날에 샅샅이 심판하실 것이니 형제자매로서 각별히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핵심은 신학적인 것입니다.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다투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형제 사랑의 측면에서 바울이 권면하는 핵심은 로마서 14장 4절입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 이것이 결정타입니다. 우리를 소유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님이신데, 우리는 그분 앞에서 심판받고 판단받게 될 터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를 세워주실 권능을 갖고 계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는 말씀은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마지막 날에 우리를 세워주신다는 것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는 소위 새창조를 완성해주시겠다는 것이요, 새창조된 새하늘과 새땅 곧 하나님이 지으시는 회복된 세계 안으로 우리를 부활시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으키심을 받아 새 생명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한 신학자에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부활하면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는 것이 참말입니
까?” 이 질문에 신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만 만나겠어요? 당신이 사랑하지 않았던 사람도 사랑 받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원수가 벗이 될 것입니다.”
참된 화해와 사랑이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야말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진정한 형제와 자매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화해를 가져다주는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능력이 아직 부활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그분의 부활이 우리 부활의 첫열매임을 믿는 우리들 가운데서도 이 부활의 능력이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한 가족이요 형제자매임을 자각하고서 로마서 14장 19-20절 말씀처럼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의 일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는 일입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너무나 기이하고 새로운 공동체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한데 어울려 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서로에게 형제자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인데, 이러한 하나님의 일은 사소한 문제로 인해서 무너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다툼과 분열에 대해서 사도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신학적인 곳에 있었습니다. 부활을 알라는 것입니다. 만물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를 새롭게 일으키셔서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형제자매 가정공동체를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을 기억해보고 그리고서 계속 서로를 향해서 비난할 것인지, 판단할 것인지, 혹은 업신여기거나 멸시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이, 부활의 소망이 현재적으로도 역사하는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참고. 로마서 14장 설명은 책 <성경 읽기는 예술이다>에 수록된 리차드 헤이스의 설교에서 대부분 가져왔습니다)
로마교회와는 달리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는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을 듣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들 자신이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살전 4:9) 이러한 칭찬을 듣고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떻게 해서 형제 사랑에 관해서 칭찬 듣는 교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데살로니가 교회는 어떤 교회입니까? 데살로니가 도시는 그리스 북부 마게도냐 지방의 수도입니다. 지금도 큰 도시입니다. 학폭으로 한국에서 더 이상 선수생활을 할 수 없었던 배구 선수 이재영선수 자매가 간 곳이 데살로니가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의 2차 선교 여행 중, 빌립보에서 이어서 데살로니가로 갔고 거기서 대략 3개월 정도 복음을 전해서 세워진 교회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한 이유는 불가피하게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마 추정하기로 데살로니가전서를 썼던 때는 데살로니가를 떠난 지 6개월 정도 지났을 때 고린도에서 썼을 것입니다.
3개월 밖에 머물지 못하고 핍박 때문에 부랴부랴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야 했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들려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형제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신생교회가 형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신앙은 아주 초보적인 단계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기독교 신앙을 매우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6-7절에서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한 성도들이었고 환난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성령의 기쁨으로 복음의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말씀을 전해준 바울 일행을 그들이 본받은 것이었고 그로써 주님을 본받은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형제 사랑에 있어서 칭찬 듣는 교회, 다른 교회 성도들에게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인 복음, 그 복음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9-10절입니다. “그들이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에 들어갔는지와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지와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 믿은 지 얼마 안된 신생 신자들이었으나 복음의 말씀을 받고서 우상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었고,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요,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른 복음의 신앙으로 굳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재림 신앙, 부활 신앙의 소망을 가지고 환난 가운데서도 꿋꿋하게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울러 복음을 전해준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와 디모데를 본을 받음으로 인해서 결국 주님을 본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복음을 전해준 사람, 먼저 믿은 사람,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사람을 교회에 들어온 사람들은 눈여겨 봅니다. 그리고서 그대로 따라하는 겁니다. 그런데 먼저 믿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니까 새로 들어온 새가족도 당연히 하나님의 사랑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이치입니다.
바울과 그의 동료들은 특별히 데살로니가 지역에서 복음을 전도할 때 어떠한 자세로 했는지 데살로니가전서 2장 7-8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바울은 자기가 유모 노릇을 했다, 유모 같이 봉사했다는 것입니다. 유모가 자녀들을 돌보듯 돌보았다는 것입니다. 또 2장 11절에서는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또한 아버지가 되어서 아버지처럼 자녀에게 권면하고 위로하고 때로는 경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정적입니다. 바울이 전해준 복음을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영적 아버지를 얻은 것이었고, 바울을 통해서 유모가 갓난 아이를 돌보는 돌봄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모임이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형제자매공동체요 하나의 새로운 가족이라는 배움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목회자들과 먼저 믿은 성도들에게서 배우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형제자매로서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이죠. 반면에 로마교회는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 모르지만 현재의 모습은 서로를 향한 판단과 비판, 멸시와 업신여김 속에서 나뉘어져 다투고 있는 모습인데요,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서 주님의 몸이 훼손당하고 있고 교회를 한분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요 형제자매공동체로 세우려는 하나님의 일이 좌초될 위기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겠습니까?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칭찬 듣는 교회가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교회, 서로를 말 그대로 형제자매로 여기는 형제자매애로써 하나되는 교회,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서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직분자들은 직분자로서, 먼저 믿은 성도들은 먼저 믿은 자로서, 새로운 가족 새가족에게 형제 사랑의 본을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서 서로에게 행복을 전달해주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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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1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의 가족 (막 3:31-35)
일상으로의 단계적 회복, ‘위드 코로나’로의 방역정책의 전환 이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11월 첫째 주일입니다. 최근에 또다시 확진자 수가 증가해서 우려도 있습니다만, 그만큼 일상이 소중하기에 코로나 극복 열기가 고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긴 코로나 기간을 통과하면서 심각하게 물은 질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상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왜 누군가를 만나야 하는가?, 가족이란 무엇인가?, 하루 중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터에서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두려움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두려워하는가? 이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본질적 질문도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누구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진정한 예배는 어떤 예배일까?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나누는 교제일까? 등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종종 해보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추구하게 된 본질적 물음입니다.
싱글레이 퍼거슨이라는 신학자는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이 열 세 편의 서신을 교회들에게 보냈다고 말합니다.그는 바울의 서신에서 그리스도인이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을 다음 일곱 가지로 정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 및 교제, 죄의 용서, 과거의 실패에 대한 죄책감 및 수치심의 해소, 죄의 지배 및 어둠의 권세로부터 구원, 하나님의 가족에 속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 영생의 확실한 소망, 예수님처럼 되기를 바라는 새로운 갈망.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56-7쪽) 이것들을 한 마디로 정리하면 죄 용서함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한 가족을 이루어 맏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성장해가는 것, 이것이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이라 할 수 있는 소위 ‘그리스도 사건’, ‘그리스도의 사건’이라 함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셨다는 성육신,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십자가, 인류 역사상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못했는데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리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 승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교회뿐 아니라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그리스도가 대행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과 진행. 이러한 소위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셨던 일은 무엇이고, 무엇을 하시려고 하셨던 것인가, 등의 질문도 해봅니다.
물론 우리를 사랑하심이고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주심, 그리스도 사건은 우리에게는 소위 구원 사건입니다. 구원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분을 믿고 그분을 힘입어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교회로써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요? 이땅에 오신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란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인데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비전은 교회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사복음서에서 교회란 단어는 단 두 곳만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과 18장인데요, 중요성은 단연 16장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울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입술에서 직접 나온 교회에 대한 진술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약속은 단 한번 뿐이지만 그 중요성은 횟수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사도들은 예수님이 세우시겠다는 교회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곳곳에 세웠고, 오늘에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예수님의 교회로 집결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헬라어는 ‘에클레시아’인데요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에서 ‘에클레시아’는 거의 ‘카할’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한 단어였습니다. ‘카할’이라는 단어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집합이나 모임 혹은 회중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교회 곧 ‘에클레시아’는 세속 헬라어의 의미(정치적 결사체로서 민회나 집회 등)보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을 뜻하는 단어로 사용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예수님에게로 모으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예수님의 신부 공동체요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라가는 제자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려는 예수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이 친히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교회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 모이게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새로운 가족을 조성하고자 함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들의 모임, 예수님을 하나님의 맏아들로 세우고 우리는 예수님의 형제자매로서 맏아들을 닮아가므로 하나님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 한 가족으로서 하나님의 사랑을 서로 주고받음으로 사랑으로 굳게 결속하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를 새롭게 창조하시려는 것이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서 내다보신 비전이요 꿈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족은 어떠한 의미가 있습니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족일 것입니다. 가족이 우리 곁을 먼저 떠나는 것이 그토록 슬프고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편하고 친밀하고 소중하고 사랑스럽고 함께 함이 너무 자연스럽고 가족을 위한 생각과 기도가 가장 앞서게 만드는, 바로 가족입니다. 우리의 가족은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결혼하고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를 선물로 받아 부모 자녀로서 이루어집니다. 자녀들은 형제자매를 이룹니다.
이러한 가족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가정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해체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죠. 마가복음 12장 25절입니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한 개인으로서 오직 한 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자녀들은 혈연관계를 뛰어넘어 모두가 서로 형제자매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새로운 가족을 이루게 되는데요, 그 가족이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한 분 하나님을 아버지로, 그리고 아버지의 맏아들이신 아들 예수님을 맏형으로서 닮아가고 따라가는 형제자매 공동체, 아버지와 아들을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 되고 형제자매가 하나 되는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마가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의 형제자매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만나려고 했는데 예수님 주위에 둘러싼 무리로 인해서 밖에 있는 채로 예수님께 보고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33-35절)고 말씀하십니다.
나사렛에서 이곳 가버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온 어머니와 형제자매에게 다소 매몰차게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낯설어보입니다만 마가복음 맥락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당시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찾아온 이유도 예수님을 집으로 데려오려는 것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 21절에 보면,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붙든다’는 말은 체포하다는 뜻입니다. 헤롯이 세례요한을 체포하고 감옥에 가뒀는데 그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가족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정상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집에 데려올 생각으로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의 매몰찬 반응이 이해되는 측면도 있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사로운 감정으로 대했다기보다 가족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 종말론적 공동체는 혈연 중심의 가족을 탈피해서, 그러한 가족은 이땅에서뿐이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체될 것이고, 이땅에서의 가족은 영원한 실체인 참된 가족 하나님의 가족을 가리킬 뿐이고, 이땅에서 가정을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은 가정을 통해서 진정한 가정, 하나님의 가족에서의 친밀한 사랑을 연습하고 훈련하려는 것이었음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가족들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가족 간의 친밀한 사랑,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친밀한 가족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진정한 가족애, 형제자매애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실현해가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닮아감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 사랑, 서로를 섬기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공동체, 이로써 함께 복을 누리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행복해지는 사랑의 공동체, 친밀한 가족 공동체를 이루라고 우리를 한 교회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어제 라디오 극동방송을 운전하다가 들었는데요, 한 성도의 간증이 나왔습니다. 이분이 불교 집안 출신이고 시집 온 남편 집안도 불교 집안 출신인데 아이들이 먼저 교회에 나가게 되고서 이분도 자녀 친구 엄마의 전도 받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이후 복음으로 변화된 분입니다. 네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인데 큰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둘이 사춘기가 찾아왔는데, 둘 다 엄마 말을 너무 안들어서 속상하고 힘들어하던 때에, 극동방송에서 한 목사님의 자녀양육에 관한 특강을 들었는데, 그분이 하신 말씀이 자녀를 부모의 소유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 자녀는 하나님이 부모에게 잠시 기르라고 맡기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말씀에 회개가 되더라는 겁니다. 회개를 하고나니까 자녀들을 대할 때 좀더 여유있어지고 자녀들도 엄마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그렇게 해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간증이었습니다.
영원할 것같은 배우자와의 사랑도 잠깐이요 이땅에서뿐이고 애지중지 기르는 자녀들도 마치 내 것인양 ‘내 새끼’하고 기르지만 자녀들 역시 진정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우리의 가정도 잠깐이면 해체되고서 진정한 가족, 영원한 가족이 드러날 것인데 그 가족이 바로 하나님의 가족, 우리 모두가 형제자매로서 이루어진 형제자매공동체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예수님께서 이루시려는 교회를 향한 꿈과 비전이라면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우리 교회가 진정 가족의 친밀함과 사랑으로 형제자매공동체를 이루고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 가족 문화라는 게 있는가? 가족인가? 아니면 주고 받는 거래의 관계인가? 사랑과 섬김의 관계인가 아니면 무관심인가? 사랑보다는 정죄와 판단인가? 사랑보다는 미움과 싫음인가? 나는 확실히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동산교회에 소속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의 뜻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말미암아 새 창조함을 받아 새로워진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 각자와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결정적입니다. 아울러 우리 자신처럼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인해서 새 창조를 경험한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뚜렷한 정체성이 있는 그리스도인은 동산교회 멤버십을 자랑스러워해야 합니다. 동산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한 가족 구성원이 된 것에 대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 구성원들을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실버세대는 우리의 부모님이고, 다음세대 교회학교는 우리의 자녀들로서 생각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의 부모님을 위한 기도, 교회의 자녀들을 위한 기도는 있습니까? 남녀전도회는 형제자매공동체입니까? 어떠한 소그룹 모임이든 한 분 아버지의 자녀로서 형제자매 사랑으로 모입니까? 코로나 시절에 모이지 못하고 있는 구역 소그룹, 지역별 세대별 모임은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모이기를 귀찮아하고 무관심한 모임, 아예 모이려고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가족 공동체를 이루시려는 게 그분의 비전이요 예수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무슨 유익을 취하려고만 생각하지 가족을 이루려는 생각은 아마 꿈에도 해보지 못했을 분이 많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예수님의 꿈, 하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친밀한 형제자매 공동체가 되므로 하나님의 꿈, 예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장 19-2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권속이라’, the Family of God입니다.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우리는 형제자매가 되어서 함께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로 준비되어가고 있고 자라나고 있습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것입니다. 형제자매로서 함께 성장해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가장 큰 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그분께 기도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제임스 패커라는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기독교를 얼마나 잘 이해하는지 판단하고 싶으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자기 아버지로 모신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알아보라. 만일 그 생각이 그 사람의 예배와 기도, 인생관 전체를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는 그가 기독교를 잘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우리가 교회다>, 싱글레어 퍼거슨 저, 26-7쪽)
우리 모두는 한 분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과 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형제자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입니다. 우리 교회의 모든 모임과 예배는 가족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으로서 무관심하지 말고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극명하게 나타난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을 우리를 위해서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 자기 희생적 사랑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받은 자로서 먼저 믿음의 자녀들 서로에게 이 사랑을 나눕시다. 그리고 한 형제자매공동체로서 함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이기를 힘씁시다.
이러한 비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비전으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가족 같은 친밀함과 따뜻함이 있는 교회로 세워짐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꿈을 이루어드리는, 그래서 우리 모두가 서로의 행복으로 기뻐하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는 우리 동산교회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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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쁨과 즐거움의 복 (사 56:1-8)
제가 몇 주 전에 설교하면서 율법에 대해 깨달은 것을 잠깐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구약성경 특별히 율법의 말씀은 배워서 익히고 암송해서 기억해야 할 말씀이라기보다, 물론 그러한 학습도 어느 정도 필요하겠습니다마는 몸도 알고 있는 너무나 자연스런 자연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어떻게 대접받고 대우받으면 자신이 좋아하는지 배우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압니다. 상대방에게서 사랑 받기를 원하고 친절하게 대우해 주기를 원하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다른 사람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은 바로 그것을 명령하고 있을 뿐입니다.
창조주께서 선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창조해주셨으니까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들도 전부 우리에게 유익한 것들입니다. 그 말씀에 순종해서 살면 우리 존재에게 유익이 되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명령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법칙이 율법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이 자연법에 부합한다는 것입니다. 문명화되어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문명화되기 이전에도 인간 본성에 부합한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신명기 10장 12-13절에서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내가 오늘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들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지키라는 것들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면 우리가 행복해진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제정하신 법칙이요 명령이기 때문에 그대로만 살면 복을 얻는 말씀입니다.
행복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세상이 처음 생겨났을 때 사람에게는 행복이 미리 주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행복을 가진 사람은 너무나 오만했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천사들이 회의를 열어 사람에게서 행복을 회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행복을 어디에 감춰 두느냐 하는 것이 천사들의 고민이었습니다. 한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저 바다 속 깊은 곳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다른 천사가 제안했습니다.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숨겨 두면 어떨까요?" 이번에도 역시 천사장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사람의 탐험 정신은 정말 대단해요. 제아무리 높은 산 위에 숨겨 두어도 찾을 거요." 궁리하고 궁리한 끝에 천사장은 결론을 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둡시다.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고 탐험 정신이 강하다 해도 자기 마음속에 행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기는 좀처럼 어려울 테니까." ('행복한동행' 2006년 5월호 (http://www.adventist.or.kr))
이 재밌는 이야기를 기독교적으로 적용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행복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부합한 자연법과 율법에 담아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제정하신 율법을 따라 살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그것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보약이 되어서 진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 체계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하나가 안식일 명령입니다. 십계명 제 4계명이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입니다. 안식일은 창조를 완성하신 후에 창조주 하나님께서 쉬셨음을 피조물인 우리가 따라하는 날입니다. 안식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쉼이고 쉬기 위해서 멈춤이요 그침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일을 그치는 것입니다. 생업을 중단하는 날입니다. 쉬라는 것입니다. 일과 생산을 위해 소비했던 시간을 그치고 비생산적이긴 해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따로 정한 날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묵상하면서 하나님의 쉼을 누립니다. 이것이 창조주가 제정하신 창조의 리듬이요 안식일법입니다.
7일을 한 주간의 사이클로 정하고 마지막날을 안식케 하신 것입니다. 6일간 수고하고 애쓰고 나서 하루를 쉬는 날로 정해야 또 다음 한 주간을 힘있게 맞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인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우리 몸을 너무나 잘 알고 계셔서 우리를 위해 제정하신 율법이 바로 안식일 명령입니다. 6일 일하고 하루 쉬는 사이클은 창조의 리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리듬에 따를 때 몸이 최적화되어서 창조주의 의도대로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기초가 됩니다.
창조주께서 창조를 다 마치신 후에 7일째 되는 토요일에 안식하셨던 것입니다. 일을 그치고 안식하신 그 날을 복을 주셨다, 복 주어 거룩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날이 안식일이요 거룩한 날이 안식일입니다. 하나님처럼 안식하는 날이기 때문에 복이 깃든 날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날을 특별히 선정해서 복을 주셨기 때문에 복을 받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또한 피조물이 자신을 위한 6일간의 삶을 그치고 하나님을 위하여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날입니다. 이처럼 안식일은 복되고 거룩한 날입니다.
오늘 본문 2절에도 안식을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하는 사람,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하나님이 복주신 날이 안식일이니까 안식일을 제대로 지키는 사람에게 복이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어떤 복을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에게 주시려는 걸까요? 본문 6-7절을 보십시오.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게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을 약속해주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려고 하나님의 집에 나아오는 이방인에게도 기쁨의 복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십니다. 심지어 이방인이라도 율법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기쁨을 주실 것을 약속해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이 시대에도 유효합니다. 우리가 창조의 리듬을 따라, 창조주가 정한 시간의 주기에 따라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하나님을 따라 쉬고 하나님의 날인 안식일에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이 기쁨으로 우리의 심령을 복주십니다.
기쁨과 즐거움은 안식일의 가장 주된 특징입니다. 이사야 58장 13절-14절입니다.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하게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기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우리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면, 하나님 안에서 이 안식일에 즐거움을 얻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안식일을 존귀하게 여기고 이 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운 날이라 여기면 하나님이 즐거움의 복을 주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기쁨과 즐거움의 날입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바로 지키면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받습니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을까요? 안식일에 일을 그치고 생업을 중단하고, 이를 위해서 우리는 안식일에 돌아서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6일간 생산적으로 효율적으로 일하며 지내면서 혹시라도 탐욕의 죄를 짓지는 않았는지,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되지 못하고 오로지 자기 유익만을 탐하며 살았는지, 이러한 방향을 그치고 회개하고 돌아서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회개의 멈침이요 회개의 그침입니다. 자신의 결손과 부족만을 채우기 위해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는 날이기도 합니다.
여성신학자 미르바 던의 <안식>이라는 책에 보면, 안식일의 그침에는 일을 그침, 생산과 성취를 그침, 근심과 걱정과 긴장을 그침, 하나님이 되려는 노력을 그침, 우리의 소유를 그침, 우리의 문화 순응을 그침, 단조로움과 무의미를 그침 등의 그침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죄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그치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자신을 위해 살면서 자칫 범했을 수도 있는 모든 죄에서 돌이키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돌아서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그치는 날인데 지난 6일간 쌓였던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고민도, 받았던 스트레스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 미움과 무관심과 질시와 증오도, 일에 대한 중압감과 긴장도, 세상에서 경쟁에 치인 분주한 마음도, 그리고 다음 한 주간에 또 들이닥칠 여러 긴장과 걱정과 두려움 등도 안식일에 다 중단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오늘을 하나님과 함께 즐기는 것입니다. 과거의 사슬을 끊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가 가져올 것으로 지레 겁먹고 있는 모든 것들에서 해방을 받고 자유함을 누리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이 모든 것을 그치고 중단하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안식을 누리는 날입니다. 하나님에게 나아가서 이 모든 얼킨 것들로부터 해방받고 자유를 얻는 날이 안식일입니다. 중단과 그침과 멈춤을 통해서 해방받는 날입니다. 지난 6일간 가슴에 응어리진 것들, 각종 어려움이나 유쾌하지 않은 경험들을 가슴에 품기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들을 용서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그가 대통령 취임식 때 특별히 초대한 손님이 있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자신을 괴롭힌 간수 세 명을 취임식에 초대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감옥의 문을 나서며 내리쬐는 햇볕을 느꼈을 때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전의 고통과 원한을 떨쳐버릴 수 없다면 몸은 감옥에서 나왔어도 영혼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습니다.” 만델라가 시련을 이겨내고 대통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과거의 매임과 얽힘에서 자신의 영혼을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처럼 몸은 자유로워도 마음은 여전히 감옥 안에 있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하버드 인생특강> 장이츠 저, 162-3)
이처럼 안식일은 지난 6일간 아무래도 자신의 모든 것에 집중하고 살았던 시간을 중단하고 시선을 다른 사람에게로,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날입니다. 자신에게로부터 해방받고 하나님에 나아가서 자유를 얻는 날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집중하고 우리의 소유를 더욱 늘리고 우리를 위해 살면 즐거움과 행복을 얻게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은 나를 초월할 때, 나를 벗어날 때, 나에게서 해방받고 다른 사람에게로 나의 시선과 관심을 돌릴 때, 그들을 섬길 때에 오히려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기쁨과 즐거움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바로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날임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여러 안식일 논쟁에 보면 결론이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하셨고, 또 안식일에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질병을 치유해주고 위해서 기도해주는 등의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날임을 예수님은 강조하십니다. 그렇게 될 때 나를 위해 살았을 때보다 오히려 더욱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이렇게 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쁨과 즐거움의 복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와 모인 공동체, 즉 예배와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의 복이 임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을 묵상하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기다리는 것이요 소망하는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을 높이므로 창조의 목적이 달성되고 피조물로서 최고의 가치로 고양되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관심사에 붙잡혀서 그것에 발목잡혀있고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포로가 되어버린, 이 모든 긴장을 풀고, 이 모든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바라보므로 참된 자유와 거룩함을 회복하고 새 힘을 얻습니다.
특별히 주일에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해주시는 영혼의 만나 하나님의 말씀을 공급 받는 시간입니다. 예배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열리는 향연이요 공급받는 영의 양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를 위해 안식일에 특별히 예배를 위해서 따로 시간을 떼어놓는 것입니다. 이날에 우리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 교제를 즐기면서 하루를 온전히 지키고 보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이로써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돈독해지는 겁니다.
안식일에는 예배와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공동체로 모여서 각 지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아는 자들로서 사랑하는 공동체로 모여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고 함께 나눔으로써 우리의 공동체적인 필요가 충족됩니다.
우리는 안식일에 아울러 미래를 내다봅니다. 미래에 우리는 모든 일의 완전한 그침이 있게 될 것이요, 하나님의 목적이 완전히 성취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궁극적인 안식이 있을 것이요, 주님의 얼굴을 뵈옵고 그 앞에서 열리는 영원한 향연과 축제가 있을 것이요,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을 우리는 안식일 예배 때 고취시켜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면서 다가올 더 큰 기쁨을 미리 맛보고 내다보는 것이빈다. 안식일이 마침내 성취될 때 우리의 연약함은 영원히 그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안에 영원히 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나라와 주권을 완전하게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임재 가운데 끝없는 기쁨의 향연과 축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안식일에 하나님의 특별한 임재의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안식일을 복주어 거룩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들만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유대인 성경학자인 체바트라는 분은 성경적 안식일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31장 13절입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어떠한 표징이 된다는 말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된 표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일이 아니고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은 이 모든 안식일의 의미를 계승하고 거기다가 예수님이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부활의 기쁨이 덧붙여진 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을 거룩하게 지킵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안식일의 기본적인 의미를 계승해서 그침과 쉼, 하나님을 바라봄, 자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주위에게로 다른 사람에게로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예배하고 공동체로 모여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첫 창조의 완성된 안식일이 우리의 죄로 인해 첫 창조가 얼룩져버렸기에 새 창조가 시작된 부활하신 주일에 이렇게 모여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축하고 구원을 축하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의 시작과 더불어 한 주간을 시작하면서 새 창조의 완성을 소망하며 고대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킴으로써 기쁨과 즐거움의 복을 오늘 주일에, 매 주일에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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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2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복을 허락 받은 성도 (대상 4:9-10)
여러분이 생각하는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나름 괜찮은 삶입니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과분한 은총을 감사하며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너무 고통스럽다’, 혹은 ‘내 삶은 왜 이리 험난한가’는 생각뿐입니까? 타고난 게 적어서 굴곡진 인생을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고백입니까? 이쯤하면 남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은 삶을 살고 있다고 자부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는 재능이나 재물이나 기회는 소위 균등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똑같이 주시지 않으십니다.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별 주름없이 성장하고 자라서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특별한 어려움 없이 복을 누리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정 안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받고 성장하고 자라서도 자신이 이룬 가정에서 자녀에게 그 고통을 대물림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환경과 여건과 처지와 환경은 다 달라도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언제나 자녀인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에게 복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자라온 환경이 다 다르고 교육수준이나 경제적 여건이 다 다르고 재능도 다를지라도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관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9-11절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짧은 본문에 나오는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 오늘 본문 이외에 알려진 바는 하나도 없습니다. 야베스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해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몰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잘 읽혀지지 않는 성경책 중의 하나인 역대기상에 그것도 짧은 두 절에만 야베스라는 사람이 등장하기 때문에 성경을 잘 읽지 않는 사람에게 야베스는 알려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미국의 한 목사님이 쓴 책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 때문에 야베스의 이름이 잘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정보만 가지고서 많은 내용을 확신 있게 설교할 수는 없습니다만, 그에 관해서 확실한 사실은 그가 험난한 삶, 고통으로 점철된 삶을 어느 시점까지 살았다는 겁니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에 성경을 기록한 지금에까지 야베스는 자신의 형제들이나 일가
친척에서 존귀하고 고귀하게 여겨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야베스라는 이름 자체도 그의 어머니가 난산으로 낳아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고통 혹은 수고를 뜻하는 단어에서 철자 순서를 바꿔서 이름 붙인 야베스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죠. 야베스를 출산할 때 순조롭지 못한 듯합니다. 고통이 많았던 듯합니다. 난산으로 가까스로 아이를 출산하게 되어서 고통 중에 수고로이 출산했다고 해서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을 정도였다면, 난산으로 태어난 아이에게 혹시 건강상의 문제나 타고난 신체적 결함이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확한 정보가 나타나 있지 않아서 단정지을 수 없지만 출생부터가 순조롭지 못한 출생이었고 그의 이름에 고통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닌 인생이었음은 분명합니다.
그 사실을 뒷받침해주려는 듯,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9절에 한 번 나오고 10절에도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라는 이름이 그렇게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점에서 야베스라는 단어에도 고통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9절을 보십시오.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이르되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었더라” 여기서 ‘수고로이’에 고통 혹은 수고로움을 뜻하는 단어가 쓰였습니다. 직역해보면 고통 가운데 출산했다는 것입니다. 고통 가운데 출산해서 낳은 아들이어서 이름을 고통이라는 단어를 두 번째 세 번째 자음 순서를 바꿔서 야베스라고 한 것입니다.
10절에도 고통이라는 단어가 한 번 더 나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여기서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의 ‘근심’이 고통을 뜻하는 같은 단어입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환난(원래 단어의 뜻은 ‘악’)에서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히브리인들의 악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는 직역해보면 “나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악에서부터 나를 지켜주소서”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악이라는 것은 고통을 가져오는 근원입니다. 고통을 가져오는 모든 것은 악이요 선은 결코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좋은 것은 고통이 없는 것이요 안좋은 것이 고통을 가져다주는 거라는 생각입니다. 고통은 악한 것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선한 세계에서는 결코 고통이 일어날 수 없는데 인간이 악을 선택하므로 고통이 찾아온다는 생각입니다.
고통이라는 이름을 연상시키는 야베스의 삶은 출생부터 고통이었고 난산의 후유증으로 아마 고통스런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던 듯합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고통이 자신의 인생에서 숙명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절한 인생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 가지 타고난 신체적 결함과 불편함이 있었을 수도 있고 난산으로 인해서 타고난 건강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이런 저런 고통 속에서 처절하게 살아야 했던 인생이었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오다가 어느 시점에서 인생의 전환점이 될만한 일생일대의 한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는 기도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신체적 결함과 병약함 때문인지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도우시는 힘을 의지처로 삼아 살아가던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절망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아야겠다는 심정으로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이 특별한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그날 처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유가 어찌 되었던 간에 그가 더 이상 고통스런 인생으로 살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각오로 하나님께 기도로 승부수를 띄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처절한 인생의 고통만큼이나 처절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제발 복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복을 간구하였습니다. 자신의 인생은 왜 이리 고달픈지, 고통스런 삶을 살아오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번 뿐인 인생을 이처럼 남다른 고통으로 고통당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소원으로 몸부림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이라고 번역을 했는데요. 그 처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보니까 “진정, 참으로 주께서 나에게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통으로 점철된 인생이었던 만큼 ‘복’의 울림이 더 크게 다가오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복을 명사로도 사용하고 동사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을 복주시옵소서”, “복으로 복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더 이상 고통이 끝났으면 하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우리가 야베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알지는 못하지만 오늘 짧은 본문을 가지고서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야베스의 기도는 현실의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간절하고도 처절한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그간 너무 고통스럽게 지내왔다는 겁니다. 고통 속에서 아마 하나님을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의지하고 살아온 인생일 수도 있고, 그러한 신앙을 가지고 살다가 정 안되겠다 싶어서 일생일대의 기도를 신뢰하는 하나님께 드린 것일 수도 있고,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내 인생을 좀 고쳐달라고 처음으로 기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어쩌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도 내 인생은 특별히 심하게 고통스러운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살만하다는 사람들에게 해당된다기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인생을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다는 절박한 외침을 하늘을 향해 외칠 수밖에 없는 분들이 일차적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강하거나 약하거나 그것이 중요하다기보다 믿든 잘 믿지 않든 하늘을 향해서 하나님을 향해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인생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야베스가 그런 삶을 여태껏 살았던 겁니다. 그러다가 더 이상 안되겠다는 겁니다. 더 이상 이런 고통스런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겁니다. 다행히 야베스는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아니하고 평소 의뢰하던 하나님이든 아니면 그날따라 처음 불렀던 하나님이든 하나님께 간절히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간절함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고서는 이 고통을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다는 생각이 중요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져서 인생을 살아가는데 내 인생을 돌아보니까 다른 사람보다 적게 주어져서 소위 이 고통을 당하고 지내는데 하나님께서 복 주시지 않으면 내 인생은 더 나아질 수도 없다는 인식에서 드리는 기도의 간절함이 우리의 기도에는 늘 필요하다는 겁니다. 모든 것이 은혜요 선물로 받고서 살아가는 인생으로서, 우리는 호흡도 하나님께 받고 인생의 모든 기회와 재능도 하나님께 받고서 살아가는데, 남들보다 너무 적게 받아서 상대적으로 들 받아서 소위 고통속에 지내야하는 인생에 대해서 누구에게 외칠 수 있겠습니까? 주신 하나님께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제발 나에게 복좀 달라는 것입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제게도 복을 좀 나눠달라는 겁니다. 복으로 나에게 복달라는 것입니다.
야베스가 처한 고통스런 환경은 만성적인 고통인 듯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훈련하시고 다듬으시려고 어떤 특정 기간에 특정 사건으로 고통을 허락하시는 것과 달리 야베스의 고통은 운명과도 같은 고통처럼 보입니다. 타고난 고통일 수도 있고요 계속 지속되는 고통으로서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이었던 듯합니다. 하나님이 막아서서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 그대로 남은 인생도 고통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상황에서 그는 제발 복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외쳤던 것입니다.
복달라는 기도를 어떻게 구체적으로 펼쳐나가고 있습니까? 구체적으로 세 가지 간구를 야베스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첫째,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입니다. 여러 신체적 한계나 건강의 병약함과 경제적인 제한 때문에 삶의 영역이 넓지 못한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삶의 바운더리, 나의 지역을 넓혀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인생 끝나면 너무 인생이 아까우니까, 매일 보는 사람 또 보고 걸어가는 곳 또 걸어다녀야 하는 인생이 아니라 이제는 좀더 많은 사람들을 접하고 보다 큰 세계로 진출하고 큰 꿈을 꾸고 또 그 꿈을 이뤄달라는 기도가 아닐까요?
둘째,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주님의 손길이 함께 하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손길은 도움의 손길이요 나와 함께 할 때 목자되신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하시고 인도하시는 손길입니다. 늘 주님이 함께 하는 인생, 주님의 도우심으로 인도함 받는 인생이 되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셋째,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나로 악에서부터 지켜주셔서 더 이상 나를 고통스럽지 않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해달라는 겁니다. 그 고통이 육체적 고통일 수도 있고 정신적 고통일 수도 있고 경제적 고통일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고통일 수도 있고 외로움의 고통일 수도 있고 병으로 인한 고통일 수도 있는 바, 온갖 고통으로 인해서 고통스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자신을 악에서부터 환난에서부터 지켜달라는 기도입니다.
한마디로 지금과 같은 고통스런 상황을 계속하다가는 아무런 소망도 없는 절망뿐이어서 더 이상 이렇게는 살아갈 수가 없으니, 이 고통을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제발 만복의 근원 하나님께서 복을 달라는 간절한 기도, 배수진을 치고서 드리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유재석이라는 연예인, 지금은 너무나 유명하고 잘나가는 그이지만 그분이 한동안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개그맨으로 나왔는데 좀 썰렁했던 기억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메뚜기 복장을 입고 나와서 개그를 하는데 별로 안웃겼던 기억뿐입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때부턴가 개그맨으로서뿐 아니라 엠씨나 여러 방면으로 굉장히 유명해졌습니다. 별명이 ‘유느님’이죠. 좋은 일도 많이 하고. 이분이 91년도에 데뷔했습니다. 그후 10년 가까운 무명생활이었습니다. 2000년도부터 이름이 좀 알려지기 시작했는데요. 2000년에 TV 프로그램인 ‘박상원의 아름다운 TV 얼굴’이라는 프로에서 셀프카메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가 데비 10년 차인 2000년까지 받은 상을 소개하며 셀프카메라는 시작하는데요, 받은 상이 별 볼일 없는 상 3가지 뿐이고 그중 하나는 대학 개교 30주년 기념으로 졸업생들에게 준 상도 포함돼 있습니다. 10년 가까운 무명 생활 동안 경제적인 어려움은 차치하더라도 자신에 대한, 주변의 편견 가득한 시선에 의해서 자괴감을 느꼈습니다. 가끔씩 주변 사람들이 농담삼아 ‘연예인이 왜 TV에 안나오냐’는 말이 가슴에 큰 상처가 됐습니다. 개그맨 동기가 김용만 김국진 남희석 등인데 이들은 이미 유명해졌습니다. 그들이 TV에 나올 때마다 티브이를 껐다고 합니다. 안보았습니다. 너무나 친한데 그들은 뜨는데, 바쁘게 TV에 나오는데 나는 뭔가, 이런 생각 때문에 티브이로 그들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에게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개인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카메라 앞에만 서면 울렁증도 있었고 악조건에 콤플렉스가 많았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눈 팔지 않고 그저 하루 하루 열심히 살았고, 그때에 참 많이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이분의 종교는 기독교는 아닌데 하여튼 잠자기 전에 꼭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방송도 잘 안되고 하는 일마다 어긋나고 그랬을 때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한 번만 단 한번만 개그맨으로서 기회를 주시면 제 소원이 나중에 이루어졌을 때 지금 마음과 달라지고 초심을 잃고 이 모든 것이 나 혼자 이룬 것이라고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한다면 그때는 이 세상 누구보다 더 큰 엄청난 아픔을 줘도 나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하시냐고 단 한마디라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왜 이렇게 기도했냐면 주변에서 많은 사람이 스타가 되고 몰락한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뜨고 나서 변했다는 사람을 많이 보았는데 정말 그런 사람이 안되리라고 기도를 하고 스스로 다짐을 한 것입니다.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겸손하고 노력하고 솔직하고 성실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노력하겠습니다. 뭐 이런 내용의 셀프 카메라였습니다.
이 셀프카메라을 찍은 이후 유재석씨는 소위 엄청 떴습니다. 수많은 연예인 상을 석권했고 지금은 국민연예인이라고 유느님이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여다본, 너무 짧아서 배경과 구체적인 상황과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야베스의 기도’가 간절함과 배수진을 치고서 이제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각오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더 이상 고통스런 삶이 아니라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는 삶으로의 전환점이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일생일대의 기도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소위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을 바꾸는 기도라고 할까요, 숙명을 그저 받아들이기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극복하고자 하는 몸부림의 기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기도의 시점 이후의 야베스의 삶은 “야베스는 그의 형제보다 귀중한 자라”(9절)고 평가받는 삶이었습니다. 개천에서 용난 것일 수 있고, 그의 형제들, 주변의 사람들보다 복을 받아 누리는 두드러지게 남다른 삶이었던 듯합니다. 이전에는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어서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 도드라졌던데 반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으로 말미암아 존귀함이 두드러지는 복된 삶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야베스의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본문 10절 마지막 부분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그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복이었습니다. 그는 복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 복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복으로 자신을 복주시라고 간절히 기도했던 것입니다. 여태까지 그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 너무나 컸고, 앞으로도 이 고통으로 인해서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그때, 그는 자신의 삶의 전환점을 가능케해주실 유일한 분이 바로 하나님임을 깨달았고 그 하나님께 더 이상 고통이 없도록 복을 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복달라는 간구를 허락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너무나 좋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이 자신이 복이요 임마누엘이 복이요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복입니다.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그 모든 소유에 임한 복은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실 때, 우리의 삶의 지경이 넓어지고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은, 고통을 가져다주는 온갖 악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 복을 누리시므로 더 이상 삶이 온갖 쓰디쓴 고통으로 가득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허락받은 성도로서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주시는 온갖 좋은 복을 누리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10월1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임한 복 (삼하 6:1-15)
기독교 선교 역사를 살펴보면 복음이 들어가는 민족이나 나라는 복을 받게 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복음이 들어오고서 여러 가지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생상태가 개선되었고, 여러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아졌고, 여성의 인권이 신장되었고, 성실과 근면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창조주 하나님, 성경적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민족과 나라가 복을 받는 이유는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고, 온갖 좋은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복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약 1:17)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복이시고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복이십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화가 됩니까? 복입니까? 화입니까? 어느 때는 복이고 또 어느 때는 우리에게 화가 됩니까?
우리는 사무엘상 4-6장에 나오고 또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법궤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그저 복이 되시거나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언제나 복이라고 말하기를 주저하게 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화가 되었고 재앙이 된 보도가 법궤 이야기의 주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궤는 법궤 혹은 언약궤나 증거궤로도 불립니다. 언약을 증거하는, 언약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간에 체결되었음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언약궤요 증거궤입니다. 이 언약궤가 언약을 맺고 율법을 주실 때 제작하도록 하나님께 명령 받았기 때문에 법궤라고도 불립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법궤라는 명칭으로 통일해서 지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4-6장의 법궤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해보겠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 이스라엘과 블레셋과 전쟁이 있었는데요,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크게 패했습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전쟁에서 패배한 주요 원인으로 꼽은 것이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블레셋에 패배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이후 또 전쟁을 앞두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이번에는 전쟁에 참여하실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실로에 있는 성막 안에 안치된 법궤를 앞세우고 전쟁에 참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곧 법궤가 전쟁터에 나가는 걸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법궤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증거로 하나님께서 성막에 만들어 두게 하신 것이니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와 동일시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거겠죠.
결과는 어떻게 됐습니까? 더욱 크게 전쟁에서 패배했고, 그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홈니와 비느하스가 전사했고, 법궤도 빼앗겼고, 아들의 전사 소식과 법궤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 제사장도 목이 부러져 죽었고, 그의 며느리 곧 비느하스의 아내도 출산하다가 이 비극적 소식을 듣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엘리의 며느리가 죽어가면서 막 출산한 자신의 아들 이름을 무엇으로 지었습니까? ‘이가봇’ 즉 ‘영광이 없다’, 그러니까 ‘영광이 떠나갔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죠. 며느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게서 떠났다고 한 것입니다.
법궤가 간다고 하나님이 따라가겠습니까? 법궤를 빼앗겼다고 하나님이 떠났겠습니까? 하나님이 법궤에 종속됩니까? 아니면 법궤가 하나님에게 종속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사람들로 확신시켜주시기 위해서 법궤를 이스라엘 성막 가운데 두신 것뿐입니다. 전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강제하기 위해서 강제로 법궤를 끌고간 이스라엘 지도자의 어리석음이 두 번째 전쟁에서 대패를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결국 법궤도 블레셋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법궤가 블레셋에 가서 위력을 나타내었습니다. 다곤 신전에서 신상들을 밤새 쓰러뜨렸고 법궤가 옮겨가는 블레셋 도시마다 잇따른 재앙이 나타나자 결국 블레셋은 법궤를 토해내게 됩니다. 법궤를 빼앗은지 7개월만의 일입니다. 법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다 올려놓고 소를 자유롭게 가게 하였더니 그 수레가 결국 이스라엘 땅으로 가게 되어서 법궤가 반환됩니다. 그때 가게 된 곳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 지역이었습니다.
법궤가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죠. 하나님의 귀환이자 하나님의 영광의 회복으로 간주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해서 법궤를 가까이 들여다보다가 무려 70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게 됩니다. 벧세메스 마을 사람들은 “이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그를 우리에게서 누구에게로 올라가시게 할까 하고”라고 한탄하면서 이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를 고민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아무리 화를 가져온 법궤라도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모실 수 있을까?’를 생각함이 당연할 터인데 이들은 무섭게, 혹은 부담스럽게만 생각되어서 법궤를 어디로 보낼 것인가만을 궁리했던 것입니다.
이제는 핑퐁게임, 폭탄 돌리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법궤는 벧세메스에서 기럇여아림 지역의 사람들에게로 보내지게 되었고, 그 지역 사람들의 결정에 의해 기럇여아림에 사는 아비나답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법궤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아비나답은 레위인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제사장처럼 세워서 법궤를 지키고 섬기게 합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모시게 된 법궤는 이후 사무엘 시대와 초대왕 사울왕 통치 기간까지 합치면, 그리고 다윗왕의 헤브론 시대까지 지나면 최소 60-7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계속 아비나답의 집에 머물게 됩니다.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과 아마 그의 손자였을 웃사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법궤는 아비나답집 사람들의 섬김을 받습니다.
그리고서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은 사울을 이어 유다의 왕이 된 다윗이 정권을 잡고 유다의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고 정권이 어느 정도 안정될 무렵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법궤를 떠올리게 됩니다. 법궤를 새로운 수도요 자신의 왕궁이 있었던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고자 결심하고 대대적으로 국가 정책 이벤트로 기획하였습니다.
이렇듯 중요한 국가 행사를 다윗은 평소와 달리 하나님께 묻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서 실행합니다. 다윗에게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었던 듯합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있어야 자신의 정권의 정당성도 보장 받을 수 있고 국가가 하나로 통일되는데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기여를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주님을 향한 충심으로 법궤를 떠올리고 지극 정성으로 자신 곁에 두고서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 복합적인 요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분명한 것은 다윗이 하나님께 사전에 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평소 다윗과는 다른 모습입니다. 성대한 국가 이벤트로 기획했지만 치밀한 준비는 없었습니다. 특히 율법에서 법궤를 어떻게 운반하라고 했는지를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기려고 할 때 그 집안의 손자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두 사람 웃사와 아효가 새 수레를 마련하고 소가 이끄는 그 수레에 법궤를 앉히고 그 둘이 수레 앞뒤에서 수레를 통제했습니다. 아비나답 사람들이나 다윗조차도 율법을 모르니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반환했을 때처럼 수레로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국가적으로 성대한 이벤트를 준비한 다윗은 궤가 나올 때에 여러 악기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잘 진행되던 이벤트가 결국 사달이 났습니다.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수레를 끌던 소들이 뛰기 시작했고, 수레가 떨어질 것을 염려한 웃사가 법궤를 손으로 붙들었다가 그만 즉사하게 된 것입니다.
비극적이고 꺼림칙한 일, 웃사의 죽음을 경험하고서 다윗은 화가 났습니다. 아마 하나님께 화가 났던 모양입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냐면, 본문 8절에 “여호와께서 웃사를 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 곳을 베레스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다윗이 왜 화가 났을까요? 자신이 생각하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한 목적이 하나님 때문에 달성되지 못하고 목표를 이루지 못해서일 수도 있고, 법궤가 떨어질까봐 법궤를 붙든 것은 불가피했는데 이를 용납하지 않고 손에 댔다는 이유로 즉결 처분한 하나님에 대해서 못마땅한 생각이 들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유다의 왕으로서 전쟁에 능했던 다윗이 하고자 했던 일이 틀어져서, 그 틀어짐이 하나님이 막은 것으로 생각되어서 화가 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왕이 되고서 참전하는 전쟁마다 백전백승을 거두었던 다윗이 기고만장하여서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이후 다윗이 화를 가라앉히자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그 날에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로 오리요 하고”
다윗은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을 포기합니다. 대신 법궤를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가져가게 하는데요, 가드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보면 종전에 법궤가 있던 기럇여아림보다 더 먼 곳입니다. 가드 사람 오벳에돔은 역대기에 보면 레위인으로 나옵니다. 다윗이 평소 알고 있던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레위인 중에서 추천 받아서 강제로 법궤를 떠안게 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런 와중에 어느 누구도 법궤를 떠맡으려고 자원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누가 법궤를 맡으려고 하겠습니까? 법궤가 하나님의 임재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지만 여태껏 보니까 그 임재와 함께 하심이 복이라기보다 오히려 화가 된 경우가 많다보니 누가 선뜻 나서서 법궤를 섬기려 하겠습니까? 오벧에돔이 자발적으로 나섰다기보다 다윗이 강제적으로 명령해서 그 집으로 법궤를 모신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법궤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본문 11-1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오벧에돔의 온 집과 모든 소유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어떠한 복인지, 왜 복을 받게 된 것인지, 그들이 어떻게 법궤를 섬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습니다.
법궤를 모심으로 인해서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다윗은 다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법궤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법궤를 모실 기대와 기쁨이 다윗에게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다시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다윗은 웃사의 사건이라는 실패를 교훈 삼아서 아마 율법을 확인했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수레에 끌어가는 대신에 레위 사람들로 직접 메어가게 했습니다.
구약 민수기에 보면 하나님이 법궤를 어떻게 운반할 것인지를 율법으로 말씀하고 계시는데요, 레위인 중에서 특정 지파 사람들로 채로 엮어서 법궤를 운송하게 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법입니다. 구약 율법은 하나님이 괜히 엄한 것을 정해서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지게 하신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법궤를 수레에 끌든 사람이 메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에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셨죠. 무엇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까? 무엇이 구약성경의 본체입니까? 하나님이 법을 정해서 그 법을 따르라고 우리에게 강제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괜히 지키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해서 하나님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하시고 인간을 눌러버리려는 겁니까? 그건 아니죠. 무엇이 율법입니까? 우리 자신이 너무 잘 알잖아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본능처럼 너무나 사랑하는 우리는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대해주었으면 하는지 분명히 압니다. 그 알고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을 대하라는 것이 율법의 본령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율법, 하나님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을 대할 때나 연약한 이웃들을 대할 때나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냐면, 내가 대접 받고 싶은 그대로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율법이 참으로 생뚱맞은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법궤를 운송할 때나 법궤를 모실 때 어떻게 대하라고 하셨냐면 수레에 끌어가지 말고 사람이 직접 메라고 하셨단 말이에요. 이것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라는 말씀이에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무겁게 여기고 하나님을 정성스럽게 대하라는 의중입니다. 그러니 이 법이 중요한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하나님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성공적으로 도착했고, 예루살렘성에 이를 때에 모든 백성이 환호하며 기쁘게 맞아들였습니다.
법궤가 예루살렘에 옴이 하나님이 오심이요 하나님의 오심이 곧 복이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법궤는 화가 아니라 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은 거북한 것이나 부담스러운 것이라기보다 우리에게 복이요 기쁨이요 평강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빼앗겼던 법궤가 어떻게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는지 그 긴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에 관해서 네가지 영적인 교훈을 얻게 됩니다. 네가지 교훈을 간략히 제시하고서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 곧 임마누엘이 인생의 최고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근원이시오 만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첫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서 그를 복주셨던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복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를 복주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구원해주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상속받게 해주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나 함께하심이 복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제대로 대접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처럼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려 하기보다 자신의 신전에 또 하나의 신으로 추가하려고 하는 경우나, 법궤가 자신의 마을에 들어옴을 보고서 호기심으로 들여다보려고 했던 벧세메스 사람들이나, 하나님이 정하신 법보다 인간의 편의를 앞세우고 법궤를 운송하려 했던 아비나답집의 사람들이나, 처음 다윗처럼 자신의 정권의 안정과 정당성 확보라는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 한다면, 또한 1차 전쟁에서 패하고서 법궤를 전쟁터로 가져오기로 결정했던 이스라엘 지도자의 경우도 다윗과 같은 생각으로 그랬던 것이겠죠. 마치 하나님을 가져다놓으면 복은 따라오니까 복 받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잘못된 생각! 그러니까 이는 하나님이 복이신데 복과 하나님을 분리시키고서 복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이 필요하다는 이런 생각이겠죠. 이러한 것들은 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대접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때에는 법궤를 모심이 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화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60-7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법궤를 모시고 섬겼던 아비나답집 사람들보다도 단 3개월을 모셨던 오벧에돔의 집에 복이 임한 것은 무슨 차이 때문일까를 생각해봅니다. 정식 제사장으로 임명하고 성별해서 법궤를 오랫동안 섬겼는데도 복을 받았다는 보도는 한줄도 없고 어떻게 섬겼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단 3개월을 섬겼는데 얼마나 복을 받았던지 하나님이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문이 다윗의 귀에 들어갈 정도로 복을 받은 오벧에돔의 집에는 무슨 차이가 있었던 걸까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복을 사모하고 복을 앙모하고 복을 추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최고의 복으로 알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려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요 시편 73편 말씀처럼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인생에게 복이 되는 그러한 복입니다.
오늘 우리도 예배하러 주일에 모였습니다. 매주 모여서 예배하고 심지어 수요일에도 예배하고 새벽에도 예배합니다. 목회자는 수많은 예배에 참여하고 예배를 인도하고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을 가까이 모시고 하나님을 상대합니다. 그러면 엄청난 복을 받아야 할텐데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한 연수가 얼마나 되셨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얼마나 복을 받으셨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누리는 복을 받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벧에돔은 법궤를 기꺼이 떠안았다기보다 그에게 맡겨진 사명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그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모시는 것과 같이 지극 정성으로 법궤를 섬기고 하나님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많은 사람에게 화가 되었던 법궤를 생각해보고 정말 두려운 마음으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법궤를 떠안게 되었을 때 오벧에돔이 ‘나와 우리 온 집이 축복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다! 이 기회를 꼭 살려서 복을 받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자신도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고 자신의 집안에 화가 미칠 수도 있다는 두려운 생각해 어떻게든 지극 정성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모시고 섬겼더니 그 결과로서 그 온 집과 모든 소유가 눈에 띄는 엄청난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주체와 객체를 뒤집어도 안됩니다. 우선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는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아가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복 자체가 되시듯이 우리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존개가 됩니다!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것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우리가 누려야 할 복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그리고 아브라함처럼 복 덩어리가 된다는 겁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와 함께 하든지 내가 들어가서 그들에게 혹은 그곳에게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곳 여의동에 있어서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우리 이웃에게 복이 되고 있습니까? 내가 들어간 직장에서 나 때문에 직장이 복을 받는 복이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은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그곳에서 그들에게 복이 되는 존재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오벧에돔의 온 집안과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듯이 이러한 복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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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기도
▶경배찬송 - 383장
▶성시교독 - 41. 시편 97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400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스가랴 4장 1~10절
▶설교 -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찬송 - 183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2021년 10월10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슥 4:1-10)
오늘 본문 스가랴 4장에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였던 스룹바벨에게 주님이 주신 사명이 있었습니다. 그 사명은 무너진 성전을 다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의 주도로 그 일을 천신만고 끝에 다시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그 어려움, 그 장애물을 오늘 본문에서는 “큰 산”으로 비유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의 역사일수록 어려움은 더욱 크기 마련입니다. 장애물은 더욱 크기 마련입니다. 웬만한 허들 정도의 장애물이어서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는 게 아니라 큰 산과 같아서 도무지 어떻게 해볼 수 없을 것 같은 큰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 시작한 일,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셔서 시작한 일, 주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시작한 일인데 예상치 못한 큰 장애물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스룹바벨에게,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뜻이라면 더욱 확신을 가지고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뛰어들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어떠한 큰 장애물을 도중에 만난다 해도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고 뜻하신 일이고 나에게 그러한 마음을 주셔서 시작하게 하신 일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장애물들을 제거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산은 무엇입니까? 이 큰 산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룰 때 막아 선 큰 장애물을 가리키는 것이지, 내가 원하고 내가 욕망하고 내 뜻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직면한 장애물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오해가 없어야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주를 위해 살기로 결심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섬김의 일을 기쁨으로 시작하다가 그만 육체의 질병이라는 큰 산 앞에 막히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나누어주어야겠다고 크게 결심하고서 헌금을 계획하거나 자선 기부와 구제를 계획했다가 갑작스런 경제적 위기라는 큰 산 앞에 가로막히기도 합니다. 배우자를 위해 기도하던 청년이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배우자라는 확신을 가지고 믿음의 가정을 세우겠다는 비전을 꿈꾸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가 부부간의 갈등이라는 큰 산 앞에 좌절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주를 위해 시간을 드리겠다고 결심하고 복음 전도와 기도생활을 정한 시간에 하려고 하나님께 서원했다가 하던 사업이 너무 잘돼서 그만 너무 바쁘게 되어서 시간을 따로 떼어내기가 어려운 큰 산 앞에 포기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직장복음화라는 사명을 주셔서 옆에 있는 직장 동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하다가 그만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말미암아 퇴직 위기에 처하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의 스룹바벨의 경우에는 총독이었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해서 성전 재건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치지도자로서 성전 재건을 계획하고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성전 재건을 다시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큰 산과 같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선 포로 상태에서 고국으로 돌아온 이래로 이스라엘 국가 경제가 너무나 피폐해져서 경제적 여력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동원해서 성전 재건 공사를 진행해야 하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패배주의가 팽배했습니다. 삶도 버겁고 힘든데 성전 공사가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도 있었고, 이전 성전의 위용과 영광에 비해서 초라한 성전을 짓고 있는데 대한 의미 축소도 있어서 동력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이 스룹바벨이 직면한 큰 산이었습니다. 어렵게 다시 시작하는 발걸음을 떼었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진전하기가 너무나 버거운 상황이었습니다. 큰 산 앞에 서있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 스룹바벨에게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떤 상황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기로 헌신하고 결단하고서 이제는 내 인생의 주님이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결심하였다면, 그래서 늘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나를 향한 주님의 계획을 구하고, 나를 통해서 이루실 주님 주실 사명을 구하면서 사명자로 살기로 헌신하였다면 주님의 사명을 이루어갈 때 우리 앞에 놓인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이 평지가 될 것을 우리가 믿고 확신하며 돌파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격려를 받습니다. 다시 시작할 용기를 얻습니다. 힘이 불쑥 생겨납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큰 산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웠는데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다면 지금까지 전해드린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에게 무엇이 문제인지를 깨달을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주를 위한 열정이 없고 주께 자신을 드리는, 소위 헌신되어 있지 못하고, 예수를 믿음이 이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삶임을 의미하지 못한 채 자신의 뜻만을 펼쳐나가는데 예수님이 도와달라고만 하는 신앙이라면 오늘 주시는 말씀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제는 주를 위해 사려는 분들이나, 직장에서든 가정에서든 이웃과의 관계에서든 누구를 만나든 주님이 기뻐하시는 복음 전도에 힘쓰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하면서 주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사명자로 자신을 드리려는 분들에게만 오늘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산은 무엇입니까? 혹은 누구입니까? 직장 상사입니까? 경제적 어려움입니까? 자녀 문제입니까? 건강입니까? 은사 부족입니까? 뜻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없음입니까? 교만입니까? 걱정입니까? 두려움입니까? 불신입니까? 여러분 자신입니까?
그 무엇이라도 혹은 그 누구라도, 큰 산도 평지가 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십시오. 믿음대로 될 것입니다. 관건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야로 주님과 동행하면서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사명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 시대에 지금 이 상황에서 나를 불러주신 이유를 분명히 깨닫고 사명자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인생의 우선순위로 두고서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드러나기만을 염원하시고 추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앞에 놓인 어떠한 큰 장애물이라도 큰 산이 평지가 될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보내신 성령이, 주님의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스가랴 4장 6-7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힘으로도 재물로도 내 능력으로도 안되도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는 가능합니다. 성전 재건이라는 막중한 사명이 큰 산 앞에 놓인 여러 어려움 때문에 표류하는 듯 보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시는,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는 일곱 영이신 성령의 능력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가 여전한 상황에서 우리 앞에 놓인 큰 산 중의 하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겪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위협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신앙 성장을 위해 열심을 다하기 원하는 자에게, 그리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로 서고자 하는 자에게, 복음 전도의 열매를 맺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자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랑의 공동체를 위해 성도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하는 분에게, 주님이 주신 사업을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서 많은 땀을 흘리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이 모든 선한 일들이 큰 산 앞에 가로막혀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오래 기다려왔습니다. 이제는 기다리기보다 돌파해나가야 할 시점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될 거라는 말씀을 굳게 붙들고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돌파해나가야 합니다. 주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이제는 행동해야 할 때이고 추진해야 할 때이고 시도하기로 결단해야 할 때입니다.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고서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까요?
본문 9-10절을 보십시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 재차 스룹바벨을 통해서 성전 재건의 역사가 마치게 될 것임을 말씀해주십니다.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있는 다림줄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다림줄은 건물을 세울 때, 가령 벽돌을 쌓고 돌을 쌓아올릴 때 수평이나 수직 여부를 가늠하는 데 사용하는 추 달린 줄입니다. 줄에 납이나 돌로 된 추를 매달아 사용했습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놓여 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그가 정확하고 올바르고 견고하게 이끌고 있고 앞으로도 이끌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성전 재건 역사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던 이들도 결국에는 스룹바벨이 성전 재건을 진두지휘, 이끌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하게 될 것입니니다.
또다른 의미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다림줄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영육을 판단하시며 심판하실 때 그 기준으로 삼으시는 말씀의 기준을 상징합니다.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다는 것은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성전 재건의 사명을 완수할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으로 지배를 받아서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될 것임을 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선지자 아모스도 환상 중에 ‘다림줄’을 보았습니다. 아모스 7장 7-8절입니다.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가지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다시는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여기서 다림줄은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 그 말씀을 따른 심판을 가리킵니다.
성전 재건을 시작하고 마치게 될, 비록 지금은 큰 산이 장애물처럼 가로막혀 있어서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는 스룹바벨에게, 하나님께서는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요. 이 말씀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이 공사가 완공될 수 있게 될 거라는 말씀일 뿐 아니라 공사 도중 생겨나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오직 말씀을 붙잡고, 구체적인 말씀의 지침을 따라 대처해나가면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게 될 것임을 암시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나아갈 때 구체적으로 어려움을 돌파하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늘 손에 쥐고 그 말씀에서 문제 해결의 지혜를 찾고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늘 귀 기울이는 자세로 큰 산 앞에 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듣게 되고, 돌파할 용기를 얻고 격려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방법과 문제 해결의 길도 말씀을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돌파해나갈 수 있고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큰 산은 무엇일까요?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생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내 자신을 하나님께 헌신되었을 때, 그래도 여전히 큰 산은 우리를 가로막을 때가 많습니다. 외적인 상황이 문제될 때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대개는 자기 자신 안에 있을 때가 더 많습니다. 자신 안에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이 있어서 하나님께 쓰임받지 못하는 것이요, 자신의 문제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수 없게 되는 것이요, 자신이 온전히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주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큰 산을 찾기보다 자신 안에서 먼저 큰 산을 찾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큰 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림줄로 삼고 그 말씀을 손에 쥐고서 문제 해결을 도모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칼로 삼아서 그 칼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 말씀의 칼로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시편 149편 5-6절에서 하나님의 백성 곧 성도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그들의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지어다 그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성도들의 입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들의 손에는 두 날 가진 칼이 있도다, 라는 말씀은 무엇을 뜻할까요? 전통적으로 교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과 아울러 하나님의 양날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의 칼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 자신 안에 있는 죄와의 싸움, 자신의 마음에 깃든 악과의 싸움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외과 의사가 병든 부분을 칼로 도려내고 수술하듯이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여전히 변화되지 못한 자신 안의 문제들을 하나님의 수술용 칼인 말씀의 검을 손에 들고 해결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있는 어둠의 문제, 여전히 그모습 그대로로 살아가는 변화되지 못하는 삶, 내면에 있는 악,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지 못한 채 변죽만 올리는 성도의 삶에 대해서 과감하게 메스를 들이대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칼을 양손에 쥐고서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적은 외부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내부에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적, 해결해야 할 ‘큰 산’은 오히려 상황에 놓여져있다기보다 자신 안에 있는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손에 양날의 검을 쥐고서 자신과의 싸움에 임해야 되는 이유는 그래야 자기가 부정되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어서 진정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삶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크게 여기거나 최고로 여기는 부풀려진 마음을 버리고서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참된 자유를 얻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백성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싸움을 위해서 우리에게 거룩한 말씀 성경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직 이 말씀을 다림줄로 손에 쥐고서, 오직 이 말씀 곧 양날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서 우리를 변화시켜나아갈 때 그것이 곧 우리 안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되는 확실한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의 음성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을 누가 들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분들, 주님을 위해 헌신된 분들, 주님께 쓰임받기를 열망하는 분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내 남은 생을 드리리라고 각오하는 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큰 산이 평지가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정말 말씀대로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큰 산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겁도 내지 말고 안된다고 주저앉지도 말고 이 선한 마음을 주시고 우리 안에서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결국에는 이루어주실 줄 믿고 당당하게 용기있게 돌파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 곧 다림줄을 손에 쥐는 것이요 양날의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쥐고서 그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켜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의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그 말씀 안에서 문제 해결의 지혜를 찾고 무엇보다도 결국 자신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큰 산이 바깥에 있기보다 자신의 문제임을 깨닫고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서 탁월한 외과 의사이신 하나님께서 그 수술용 칼로 자신을 온전히 변화시켜나아갈 것임을 신뢰하고 자신이 변화될 때만 자신 안에 있는 큰 산이 평지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여러분 앞에 놓인 큰 장애물과 같은 큰 산이 평지가 되는 축복이 여러분의 심령에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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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3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 (시 123:1-4)
우리 기독교에서 은혜라는 말은 사랑이라는 말과 더불어서 가장 자주 듣고 자주 사용하는, 기독교의 가장 주된 특징을 나타내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인데요, 하나님의 사랑이 구체화되어 우리에게 임할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종종 부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곧 은혜라고 말합니다. 즉 ‘은혜’라는 말은 고대나 지금이나 ‘선물’이라는 말로 받아들일 때 가장 근접하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은혜는 선물입니다.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주신 선물이 곧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선물로, 은혜로 주신 것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여러분이 없지 않고 있다는 사실, 존재자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도 선물입니다.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니까요. 창조가 선물입니다. 호흡이 선물입니다. 살아있음이 선물입니다. 또 무엇이 있을까요? 생명이 선물이라면 가정도 선물이겠죠.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이룬 가정, 그리고 가정의 선물로 주어진 자녀들, 이렇게 이루어진 가정 자체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구원이 선물이죠. 구원은 순전히 은혜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추구하지도 못하고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순전히 은혜로, 거저 선물로 주신 구원입니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셔서 구원에 이르게 해주신 구원의 은혜요 구원이라는 선물입니다. 우리 각자 구원이 선물이라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렇게 모인 교회도 선물입니다. 예수님이 피흘려 사셔서 머리로서 다스리시는 교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이렇듯 우리 삶은 은혜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 주어진 인생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123편의 시편 저자도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반복적으로 여러차례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하나님께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님께 미리 말해두는 거예요. 몇 달 후에 혹은 며칠 후에 자신의 생일이 되면 무엇 무엇을 선물로 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구하는 선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선물을 달라고는 하지 않지만, 자녀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은혜를 달라고, 곧 선물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자녀니까 아빠에게 선물 달라고 미리 요청을 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만, 우리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선물 달라고 하면 그것은 구걸이 되겠죠.
보통 선물이라고 하면 선물을 주는 사람이 선물을 받는 누군가에게 주기를 기뻐해서 선물을 골라서 주는 겁니다. 선물 받는 사람이 이런 선물을 달라고 요구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 자녀들은 부모에게 기꺼이 선물을 요청하기도 합니다만, 선물을 주는 부모가 들어줄 수도 있고 형편이 안돼서 들어주기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입니다. 주는 사람이 선물을 결정해서 주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은혜도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뭘 콕 집어서 달라고 하기보다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특정하지 않고 선물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우리가 늘상 기도해야 할 제목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소서”입니다. 이것은 상황과 관계없이 피조물로서 그리고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하나님 아버지께 드려야 할 마땅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에 의존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늘상 하나님께 선물 달라고 간청해야 할 입장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이러한 우리의 입장, 우리의 처지,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위치를 바로 알고 드리는 기도의 본령이요 겸손한 기도요 최고의 기도요 늘상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은혜를 베풀어주소서, 라는 기도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에게 드리는 아주 적절한 기도입니다. 우리의 위치와 처지를 바로 깨닫고 드리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란 것은 더 이상 자신 안에 갇혀 있지 않기로 결단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 하나님의 선물을 구하는 기도는 기도의 본령에 속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꼭 기도해야 할 본질적인 내용입니다.
독일의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가 63세에 소천하셨는데요, 그가 임종했을 때 그의 책상에는 죽음을 앞두고 그가 써놓은 쪽지가 있었습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이 말은 참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한 이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그리고 진짜로 거지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저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면서 하나님 앞에 어떠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습니까?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간주하고 있습니까?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시편 저자는 자신을 종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심지어 남종보다도 더욱 비천한 여종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주인의 손길만을 바라본다고 고백합니다. 종에게 주인의 손길이란 무엇을 뜻할까요? 종이 주의 깊게 바라보는, 결코 놓쳐서는 안되는 주인의 손길이란 종에게 무엇을 가리킬까요? 자신에게 먹을 것을 던져주는 손길일 수도 있고요, 형벌을 혹은 매질을 그치게 하는 손길이기도 하고요, 주인이 내리는 명령을 금세 캐치하기 위해서, 즉 주인의 지극히 작은 몸짓에도 주목하기 위해서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것이기도 할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종은 주인에게 자신의 소원을 감히 말할 수도 없고, 주인이 알아서 베풀어주는 대로 받아서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자신을 정당하게 대접해주지 않았다고 불평조차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억울한 일을 당할 때에도 자신이 발언하기보다 주인이 자신을 변호하고 옹호해주기를 기다려야 했던 존재가 바로 종이었습니다. 이처럼 종의 생사여탈권이 주인에게 달려 있었고, 종의 모든 필요와 명예가 주인에게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오직 주인의 손, 주인의 배려를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언제나 눈길이 주인의 손에 쏠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늘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할 때, 오직 하나님의 선물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 지녀야 할 바른 자세와 태도입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서 오직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종임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신약에 이르면, 주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로 종종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여리고에서 나오실 때 수많은 군중 가운데서 예수님께 소리쳤던 눈 못보는 맹인이요 구걸하는 거지였던 바디메오입니다. 그는 눈을 못보았기 때문에 오늘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는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들리는 말을 들었는데 나사렛 사람 예수시란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소문으로 알고 있었던 바디메오는 그것이 자신의 인생에 찾아온, 다시 올 수 없는 기회임을 포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큰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막 10:47) 큰 소리를 지르자 많은 사람들이 맹인 주제에 거지 주제에 하면서 그를 제지했습니다. 조용하라는 것이겠죠. 바디메오는 이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쩌면 자신의 인생에서 눈을 뜰 수 있는 최고의 기회, 예수님께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인생의 최고의 선물을 받을 절호의 기회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크게 소리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막 10:48) 거지이자 눈 못보는 자신의 처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던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 부름으로써 그분을 메시야로 인정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바로 깨닫고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시편 저자가 자신을 종으로 비하시키고서까지, 그리고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해드리고서, 오직 자신은 하나님의 관대한 처분에 내맡긴 채 하나님께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한 것과 다르지 않은 기도입니다. 바디메오 역시 오직 주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거지로서 또 눈 못보는 자로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구하는 기도나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나 오로지 주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하는 기도로서 같은 기도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디메오를 주목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호소해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할 때,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할 때 주님은 우리를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디메오를 부르셨죠. 소리치는 이를 데리고 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에게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고 바디메오는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막 10:51)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디메오의 믿음을 보시고 즉각적으로 선포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니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르니라”(막 10:52)
이처럼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는 ‘불쌍히 여겨주소서’라는 기도와 본질이 같은 기도요 기도의 본령에 가장 충실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인생이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과 그분의 처분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선물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요 오직 은혜뿐임을 고백하는 기도입니다. 그 일반적인 간구를 들으시는 주님은 더욱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선물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응답해주시면서 또한 더욱 구체적인 간구를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가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하는 맥락은 무엇입니까? 그가 어떠한 상황에 처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물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이 상황을 들여다보면 구체적으로 무슨 선물을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어떠한 도움의 선물을 구하고 있는지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하나님께 구하는 선물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추측해볼 수 있는 단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의 멸시, 심한 멸시, 비웃음과 조롱을 시편 저자가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어떤 이유로 멸시요 비웃음이요 조롱일까요? 아마 하나님 때문일 겁니다. 믿음 때문일 겁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때문일 겁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이유일 겁니다. 악한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가려고 하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오늘 시편 저자가 이러한 상황에서 구하는 은혜, 받고 싶은 선물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신앙을 하찮게 여기고 무시하고 요새 시대에 아직도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유물과 같은 존재로 비웃을 때, 조롱할 때, 하나님을 구하기보다 어떻게 머리를 써서 일확천금을 노릴 것인가를 도모하는 이때,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고자 하는 선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증거,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 비웃음과 멸시와 무시와 신앙에 대한 조롱을 들으면서 우리 영혼은 마음이 상하고 참담함까지 느끼고, 때때로 믿음에 대한 회의에 빠지기까지 하는 이러한 상황에서 종의 심정으로 여종의 심정으로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길을 간절히 바라보는 것은 손을 들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과 나타나심, 그분의 영광이 우리 눈에 보여지는 그러한 은혜를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예배 때 임한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의 상한 심령을 어루만져 주시고 위로해주시는 손길이 아닐까요? 무신론적 경향과 분위기가 가득한 세상에서, 그래서 세상에서 살아갈 때 믿음을 가진 자이지만 때때로 그러한 분위기에 젖어서 하나님 없는 인생을 어느 때는 생각해보기도 하는 우리에게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주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심을 눈에 보이도록 증거해주시고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주시고 많은 사람들로 보게 해달라는 간절한 마음이 아닐까요?
본문 1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그것도 아주 간절히! 종과 여종의 비통한 심정으로 절박한 마음으로 주인의 처분의 손을 간절히 바라보면서, 그러한 자세와 태도로 하늘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바라봄은 시편 121편 1-2절의 내용과 비슷하면서도 그것을 능가합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눈을 들어 산을 보고서 그 산을 지으신 여호와에게로 시편 121편 저자가 나아갔다면 오늘 시편 123편 저자는 바로 직선으로 눈을 들어 하나님을 향해서 나아갑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봅니다.
오늘 시편 123편의 기도는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 구체적으로, 신앙에 대한 비웃음과 믿는 자에 대한 멸시가 가득하고 교회를 사회의 한 코너에서 아주 작은 부분만을 차지하도록 허락하는, 그것도 마음씨를 넓혀서 선대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코로나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증거되고 하나님이 우리 교회 공동체와 함께하심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살아있음을 교회를 통해 증거하기를 원하는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는 예배 가운데 주의 영광이 나타나고, “주여, 주의 일이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던 하박국의 간구와도 일맥 상통하는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 3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의 이러한 부흥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는 하박국 2장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 그가 드린 간구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슨 응답을 받았기에 이후로 수년 내에 하나님의 일하심이 눈에 띄게 나타나게 해달라고, 즉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겁니까? 하박국 2장에서 어떤 응답을 받았을까요? 그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다보면 비록 더디게 보일지라도 반드시 응하게 될 것이니까 이 믿음으로 살아가라는 응답이었습니다. 기다림이라는 응답을 받고서 하박국 선지자는 더욱 간절하게 이어서 또한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손으로 하시는 일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부흥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성도의 이러한 기도, 은혜를 베풀어달라는 기도, 하나님의 역사가 수년 내에 나타나게 해달라는 이러한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간구한 기도, 사람들의 비웃음과 조롱과 멸시에 대해서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보여달라고 했던 이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기다리다보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응답을 듣고서 드렸던 이러한 기도는 어떻게 응답되었을까요?
구약 성도들의 이러한 기도에 대해서 하나님은 어떠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을까요? 어떤 선물을 주셨을까요? 구약 성도들이 간절히 고대했던 선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러한 구약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는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로 응답되었던 바 그 최고의 선물이, 그 최고의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육신으로 나타난 것이요 하나님의 행하심의 절정이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가까이 임한 하나님나라 그 자체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은혜를 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호소하면서 하나님께 선물을 달라고 요청하는 자세로 오늘 예배를 드릴 때에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은혜는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에게 임한 은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분을 더욱 알아가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그분의 신실한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무한한 가치를 깨닫고 보화이신 그분에게서 풍성한 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예수님께 붙들리고 헌신하여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합하여져서 그분이 주시는 더욱 큰 은혜를 갈망하며 구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정리하고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늘상 하나님께 드려야 할 기도는 무엇입니까? 오늘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는 무슨 기도를 드려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해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달라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에 의지해서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선물 달라고, 그렇게 우리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기도요, 늘상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어떠한 자세로 드려야 할까요? 나는 오직 종이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손길, 주님의 손길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존재요 영적으로 거지요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응답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 더욱 큰 선물, 최고의 선물을 주셨고, 또한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고 그분께 나아가며 그분의 발앞에 엎드려서 그분의 가르침을 받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라가는 제자가 되기로 다짐함으로써 더욱 큰 은혜, 우리 인생의 최고의 선물을 누리며 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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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26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인생이라는 시험 (출 15:22-27)
자녀들 보니까 학교에서 시험을 치루는데 제가 학교 다닐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풍경입니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도 시험을 치룹니다. 받아쓰기 시험을 봅니다. 물론 시험문제를 미리 주죠. 받아써야 할 문장을 미리 알려주고 숙제도 내줘서 몇 번씩 쓰게 한 후에 다음날에 학교에서 받아쓰기 시험을 치룹니다. 중고등학생들은 학기 중간에 중간고사 시험을 보고 학기말에 기말고사 시험을 치룹니다. 수업을 잘 들었는지, 배운 내용을 잘 숙지했는지를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해마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루는 날 당일에 시험이 끝난 후 이번 시험에서 수학은 어려웠지만 국어는 평이했다 등의 난이도에 대한 해설이 뒤따릅니다. 수험생이 시험을 볼 때 잘 못보았다고 좌절했다가도 이번 수능 시험이 어려웠다는 평가가 나오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합니다. 나만 어려운 게 아니라 모두 어려웠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의외로 잘 보았을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변별력이 있으려면 시험의 난이도가 있어야겠죠. 어렵게 출제된 문제라야 실력을 잘 가려낼 수 있겠죠. 시험은 그래서 어렵게 출제될 때 시험다운 겁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생들을 시험하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하나님이 출제하시는 시험은 시련이라는 다소 변별력 있게 어려운 문제로 출제됩니다. 시험이 시련으로 측정될 때가 많습니다. 인생에 어려움이 닥치고 시련이 몰아치는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시험 곧 Testing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의 실력이 100점인지 아니면 50점인지, 아니면 빵점인지, 시련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의 우열이 드러나고 믿음에 대해서 시험평가가 냉정하게 이루어지는 겁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문제는 주로 어려운 인생의 시련을 허락하셔서 그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하는지, 대학수능시험이 사지선다 혹은 오지선다 주로 객관식 문항이듯이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지 지켜보시는 시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것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선택할 것인지, 즉 그 사람의 믿음을 측정하는 겁니다. 그래서 믿음의 시험을 통과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 아니면 시험에 떨어질 것인지, 시험 결과가 말해줄 겁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을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광야체험, 출애굽 이후의 광야생활은 인생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주로 시험을 치루는 무대인데요, 광야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을 치루었고, 물론 대다수가 시험에서 낙방해서 광야에서 머물다 죽음을 맞이했죠. 반면에 시험에서 통과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땅에 들어갔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도 광야에서 시험을 치루셨습니다. 물론 이 시험은 사탄이 넘어뜨리고 미혹시키고 유혹하는 시험이었으나 그 시험조차도 성령의 이끄심으로 광야에서 수행된 시험이었습니다.
이처럼 광야같은 인생길에서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사람들인데요, 이 시험은 시련이라는 혹독한 상황, 광야라는 무대 위에서 시련이라는 혹독한 상황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하나님이 출제하신 시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의 죄된 욕망에 이끌려, 그리고 그 욕망을 자극하는 사탄의 미혹과 유혹에 따라 시험을 당하기도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든 아니면 사탄의 유혹이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시험을 치룬다는 것이요, 그 시험은 주로 시련의 맥락에서, 인생의 험한 풍파속에서 치루는 시험이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믿음으로 반응할 것인지, 우리의 믿음을 테스트하는 시험입니다.
어떤 시험문제든 정답이 있습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우리에게도 시험문제에 정답이 있습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인생의 정답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출애굽기 15장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의 앞으로의 광야 여정 전체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스라엘의 광야 체험은 인생 전체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 광야 전체의 축소판이 오늘 마라의 쓴 물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만 집중해서 보아도 우리 인생 전체의 시험이 무엇이고,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에서 어떻게 통과할 수 있는지를 이 작은 사건을 통해서 조망해볼 수 있는 광야생활 전체를 축소한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 마라의 쓴 물 사건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신 사건으로 기술합니다. 혹독한 시련에 처하게 하시고서 그들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혹독한 시련이라 함은 사흘간 광야길을 걸었는데도 물을 전혀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드디어 물을 만났는데 물이 짜고 써서 마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가혹한 상황입니까? 우리가 아무리 광야 같은 인생길이라고 하더라도 이와같은 혹독한 상황에 처하는 경우는 흔하지 않습니다. 거의 드물게 일어날 정도의 혹독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상황에서 믿음의 변별력 있는 시험을 치룬 것입니다. 믿음의 실력이 그대로 드러나는 시험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총 4가지 시험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이 시험에 통과하면 인생의 정답을 아는 것입니다. 이대로만 살면 인생 잘 사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이 되는 시험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출제하신 문제인데요 총 4가지 문제로서 어렵지 않은, 머리로 풀 때는 어렵지 않은, 기초 실력을 갖춘 분들이라면 누구나 정답을 선택할 수 있는 문제지만, 실제로 삶으로 실천하려고 할 때엔 실천적으로 정답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는 난이도가 제법 있는 문제입니다.
첫 번째 시험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인생의 혹독함, 혹은 쓰디 쓴 마라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두 개 중에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1번. 원망과 불평 2번. 기도. 정답은? 2번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택한 것은 1번이었습니다. 모세만 2번 정답을 선택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백성들은 이 상황에서 모세를 원망했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겨우 이른 오아시스였는데 마실 수 없는 물이라, 얼마나 실망이 됐겠습니까?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고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모세의 선택은 2번 기도였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모세는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모세는 시험에 통과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번 문제에서 틀렸습니다.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는 머리로 푸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식으로 정답을 선택하는 문제가 아니라 삶으로 정답을 살아내는 문제입니다. 이와 같은 혹독한 상황, 쓰디 쓴 상황에 여러분이 처하게 될 때 이것은 분명한 인생의 시험입니다. 광야에서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입니다. 이때 여러분은 원망과 불평, 혹은 누구누구의 탓을 하며 반응할 때가 많습니까, 아니면 조용히 기도의 자리로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합니까? 1번 문제만 정답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인생 문제의 절반 정도는 해결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으면서도 어려울 때 기도의 자리로 나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시험이 그러겠지만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 문제는 시련의 상황 가운데서 믿음의 반응을 요청하는 시험문제입니다. 믿음의 시험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은 주로 원망하거나 불평합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누구누구의 탓, 심지어 하나님 탓을 하고 사람들 붙잡고 불평합니다. 반면에 믿음이 견고한 분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니까 하나님께 기도하러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니까 그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갑니다.
이 문제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쉬우면서도 어렵죠? 정답을 알면서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두 번째 시험 문제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누구를 바라보아야 할까요? 1.다른 사람 2.자기 자신 3.하나님. 정답은 3번입니다. 요새 라디오 프로그램을 들어보면 문제를 내는데 누구라도 정답을 맞출 수 있도록 쉽게 내던데 하나님이 내시는 시험도 쉽게 정답을 알 수 있는 시험 문제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어려운 인생의 시련이 닥쳤을 때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아까 1번 문제에서 보았듯이 그 쓰디 쓴 인생의 고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간다는 것이요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셨던 일을 기억해본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셨는데 그것은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그 나무를 쓴 물에 넣었더니 마실 수 있는 물로 바꿔주신 것입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여기서 ‘한 나무’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시켜주었을까요? 하나님께서 물에 관한 기적을 베풀 때 모세의 나무 지팡이를 활용하셨던 것을 떠올리게 하지 않았을까요? 가령 애굽에서 열 재앙을 내렸을 때 첫 번째 재앙, 나일강의 물을 피로 바꾸는 기적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지팡이로 나일 강을 치라고 명하셨죠. 이뿐 아니라 홍해를 건넌 기적 때에도 하나님께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려고 모세에게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번에는 쓴 물을 단물로 바꾸어주시려고 한 나무를 지정하시고 그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셨는데, 이 나무는 모세의 손에 들렸던 지팡이와 연관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즉 이 나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행하셨던 과거의 일을 떠올리게 하여서 지금 혹독한 시련의 상황에서도 오직 그러한 하나님만 바라보도록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쓴 물을 단 물로 바꿔주실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나무를 통해서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우리 신약의 백성들은 오늘 본문에서 문제 해결의 방법이 된 나무를 볼 때 무엇을 떠올리게 됩니까? 나무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변화시켜주셨고,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마시게 하셨는데,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온갖 ‘쓴물’을 ‘단물’로 바꿔주실 수 있는 분이신데, 하나님은 한 나무를 사용하셔서 우리 인생에게 그러한 기적을 베풀어주셨던 바, 그 나무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우리로 생각나게 합니다.
나무에 달린 그리스도,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리가 떠올릴 수만 있다면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분이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음을 기억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가 겪는 어려움과 고통이라는 쓴 물을 하나님께서 능히 단 물로 바꿔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로마서 8장 32절의 말씀과 같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우리는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물이 없어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과거 내 인생에게 행하셨던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모든 죄악을 해결해주신 하나님의 행하심을 기억해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쓴 문제를 능히 해결해주실 수 있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 번째 시험 문제입니다. 어려운 상황을 당했을 때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심을 기억하고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것뿐 아니라 더욱 구체적으로 우리는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자신의 경험에 의지해서 해결책을 찾는다 2.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했는지를 살펴보고서 대다수 사람들이 걸어간 길로 그들을 따라간다 3.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는다. 정답은 물론 3번이겠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 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심은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신 것으로 해석하고 있는데요, 이 시험은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서 한 시험으로 제시됩니다. 25절 뒷부분을 보시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다가 우리가 나아가야할 인생의 방향과 삶의 지침과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구체적인 법령 곧 법도와, 그리고 판례 혹은 여러 가지 사례 즉 율례로써 성경에 제시해주셨습니다.
특별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쓰디 쓴 인생의 고통에 직면했을 때 우리는 더욱 말씀에 집중해서 문제 해결의 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이 상황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인가?’ 등의 구체적인 질문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어려움이라는 시험은 우리가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붙들 수 있느냐의 시험입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손해를 각오하고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할 수 있느냐의 시험입니다. 말씀하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목자되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느냐의 믿음의 시험인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말씀에서 길을 찾아야 합니다. 말씀에서 빛을 발견해야 합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고 말씀합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의 암흑 가운데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내 발을 인도하시고 내 길을 이끄시는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과 같은 것이 바로 성경 말씀입니다. 늘 이 말씀을 가까이하고 배우고 익히고 적용하므로 문제 해결의 길을 성경에서 찾아가는 겁니다.
우리가 평소에는 말씀을 생각하고 말씀의 원리를 따라 선택하고 말씀을 인생의 기준으로 삼고 살려고 애쓰다가도,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내팽겨치고 인간적 지혜와 자신의 얕은 경험에 의존해서 문제 해결의 길을 찾으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인생의 시련의 때에는 더욱 말씀을 의지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끝까지 신실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하느냐를 보시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시험 문제입니다. 쓰디 쓴 인생의 고통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고통의 현장 즉 마라의 쓴물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아니면 결국에 우리를 이끄실 엘림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현재의 고통에 집중해야 할까요? 아니면 고통 이후에 우리를 인도해가실 끝을 바라보아야 할까요? 신앙생활의 결국은 마라의 쓴 물이 아니라 엘림의 안식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누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마라의 쓴 물을 지나서 아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엘림이라는 너무나 좋은 오아시스가 있음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경의 약속은 그와 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신 미래와 종말은 결국은 엘림입니다. 생명수로 가득차 있어서 물 샘이 충분하고 많은 나무들이 물가에 뿌리를 내려 번성하는 엘림이 우리의 결국입니다. 마라의 쓴 물이 끝이 아니라 오아시스 엘림이 우리 인생의 끝입니다.
현실 문제에 치여서 함몰되어 한없이 깊은 늪에 빠져가는 인생이 아니라 거기서 헤어나오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결국에 주시려고 하는 것은 마라의 쓴 물이 아니라 엘림의 오아시스임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은 광야 같은 인생길로서 하나님의 거대한 시험을 치루는 무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 전체를 시험하시는데요, 특별히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물이 없는 고통과 같은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무엇을 시험하심입니까? 우리가 그러할 때에도 원망과 불평으로 지샐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할 것인가, 또한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것들을 기억하고 지금에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우리가 문제의 해결책을 과연 성경 말씀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 귀를 기울임으로써 문제 해결의 길을 발견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결국에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험에서 다 통과하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하늘과 새땅에 이르시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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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기도는 사랑입니다 (마 5:43-48)
여러분은 주로 무엇을 기도하십니까? 주로 누구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내용에 따라 누구를 사랑하는지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자신을 위해 많이 기도하고, 여기서 더 확장되면 사랑하는 사람들, 특별히 가족을 위해 기도합니다. 자신을 가장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요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믿음이 있어서 기도를 한다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누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좀 특별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냐면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합니다. 원수라도 사랑하면 위해서 기도하게 돼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한 특징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기도는 사랑의 행위라는 겁니다.
옥한흠목사님의 설교 <사랑하면 기도한다>에 보면, 기도에 대해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기도란, 하나님을 만나고 싶고 하나님과 함께 하고 싶고 무엇이라도 하나님과 나누고 싶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내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 그러한 하나님 앞에 앉는 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인데, 먼저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나도 하나님을 사랑해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심을 확신하는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아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니까 내가 무엇을 말하고 무슨 감정을 토로해도 기꺼이 들으시는 분이라는 확신 속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기꺼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처럼 사랑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더 이상 거래가 되지 않습니다. 주고 받는 거래! ‘내 기도에 응답해주세요. 내가 이렇게 저렇게 했으니까 꼭 응답해주세요’, ‘내 기도를 들어주시면 내가 이렇게, 저렇게 하겠습니다’. 서원 기도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인생의 어려운 순간에 다급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거래와 같은 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그 기도도 받으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응답해주십니다. 그러나 이런 거래가 기도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기도의 본질은 전능하실 뿐 아니라 너무나 좋으신 하나님, 놀라운 무궁한 사랑으로 나를 품어주신 하나님이 내 음성과 간구를 귀울여주시는 그 하나님이 너무나 좋아서 그분 앞에 앉고 싶어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가 교제하며 대화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기도의 본질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날마다 달라고 하는 떼를 쓰는 기도냐 아니면 주님을 사랑해서 하나님과 마음을 나누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것을 기뻐하느냐, 우리 자신의 기도를 돌아볼 일입니다.
옥한흠목사님은 권면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면 할수록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도가 되면 우리가 '무슨 말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까?'는 고민 안해도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서 격식을 따지거나 무슨 대화를 나눌까 고민하지 않겠죠. 무엇을 말해야 할 까, 큰 고민이 안됩니다. 사랑의 관계니까 그렇습니다. 무엇을 말해도 들어줄 거니까, 왜 못하냐는 것이죠.
우리가 기도할 때 초기에 겪는 어려움 중의 하나는 할 말이 없다는 것인데요, 그것은 결국 사랑이 없어서라고 진단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기도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해결됩니다. 무엇이든 듣고 싶어하고 무엇이든 말하고 싶어하고 다 들어주는 것, 나를 사랑하는 하나님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 속의 안좋은 것들을 다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뭐든지! 그래서 이분은 기도란 예비 타이어(스페어 타이어)가 아니라 핸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예비 타이어는 펑크 날 때만 기도하는 것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겨야 기도하고 불이 나야 기도하는 것이죠. 그러나 핸들은 차만 타면 늘 붙잡고 움직이듯이, 이렇게 내 손 안에 핸들과 같이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께 꺼내놓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늘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를 말씀하시면서 특별히 우리가 기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대상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 44절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 고상한 명령, 인간적 감정을 거스르는 예수님의 말씀 앞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수 있을까요? 신약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가르치시지만 구약에 아까 말씀드린 시편의 기도를 보면 가령 시편 109편과 같은 소위 저주시를 보면 예수님의 명령과는 전혀 반대로 행하는 것처럼 보이는 기도자들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가하고, 억울한 일을 행하고,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부당하게 나의 것들을 빼앗은 악한 사람들에 대해서 어마어마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께 그들의 악행을 다 아뢰고 복수해주시고 이 원수를 갚아달라고, 저주하며 드리는 기도입니다. 구약 시편에는 소위 저주시라고 분류할 수 있는 기도문이 더러 있습니다. 이러한 저주의 기도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명령하신 원수를 사랑하고 심지어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는 명령이 모순돼 보이는 듯합니다. 이러한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은 구약의 저주시 시편을 거쳐야 예수님의 명령, 바울 사도의 명령을 실천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뿐 아니라 사도 바울도 로마서 12장 14절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고 말씀하며, 또 12장 19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명령을 우리가 순종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시편의 저주시를 거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편의 기도>라는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원수 갚음의 시편이 부담이 되는 사람들을 위해, 그 이상의 길이 있다. 그것은 십자가의 길로서, 다른 사람을 향해 사랑을 가질 만큼 자유롭게 되기 위해, 우리 자신 안에 분노와 비통과 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은 제일 좋은 길을 안다. (그것은 더욱 좋은 것, 사랑이다.)... 나는 원수 갚음의 시편 이상의 길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길은 그것을 통과하는 길이지, 그것을 우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 우리가 당한 일이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고 끔찍하고 억울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저주하고자 하는 마음,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 이런 마음이 간혹 생길 때가 있습니다. 그럴 일을 겪을 때,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억울함을 꾹 누르고 참아야 하겠습니까? 시편의 기도자들은 그것조차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들고 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거침없이 다 토로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말들이 원수에게 직접 쏟아놓으면 그것이 저주가 되지만, 선하신 하나님께 쏟아놓으면 탄원이 되는 것입니다. 부르짖는 탄원이 됩니다. 그렇게 한동한 하나님께 쓰디 쓴 감정을 토로하면 그 마음의 아픈 감정과 고통스런 소리를 하나님이 다 들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마음을 누그러뜨러주시고 변화시켜주시고 치료해주시고 단잠주시고 원수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도 주시고 억울한 일도 풀어주십니다. 내 속을 다 털어놓고 이야기할 대상이 이땅에 어디 있겠습니까?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것이 가능합니다! 내 이야기 다 들어줄 사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우리 마음에 있는 어떤 것들이라도 있는 대로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어떠한 말에도 들어줄 용의가 있는 그토록 나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십니다.
저주 기도에도 기능이 있습니다. 어떤 기능이 있냐면 우선 카타르시스 기능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있고 그 말하는 것을 말이 되든 안되든 감정이 정제돼 있든 아니면 날 것이든 무엇이든 다 말할 수 있는 한 장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말들을 들을 용의를 지닌 한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 쏟아붓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정적인 정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쏟아붓다 보면 자신이 당한 고통과 억울함과 분노의 감정의 깊이와 강도를 발견하는 자기 발견의 행위가 됩니다. 말은 무척이나 위험천만하고 거친 것들이지만 그것이 생각만큼 위험하지 않음을 곧 발견하게 되는데, 직접 원수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도 아니고 원수를 찾아가 해코지 하며 복수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않으면 그 마음 속의 응어리와 문제가 무척이나 커보이지만 그래서 그 마음을 지닌 것만으로도 괴롭고 스스로 정죄를 당하게 되지만, 일단 하나님께 말해지면 그 강도가 약화됩니다. 아울러 원수 갚음이 더 이상 나의 마음에 남아있지 않게 되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옮겨갑니다. 하나님께로 옮겨가면 자신은 좀 자유롭게 됩니다. 그래서 저주시의 구조를 보면 처음에는 엄청나게 표현하고 쏟아붓고 그리고 나서 이런 모든 고통과 분노를 하나님께 맡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섭리와 처분에 맡기는, 소위 이양하게 됩니다. 많이 아뢰고 낱낱이 아뢰고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나님께 양도하는 것도 충분하고 더욱 많이, 모든 것을 이양하고 양도할 수 있게 되고, 그러면 자유롭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행하실 것을 확신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고백, 고통의 표현,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맡김. 양도해드림, 이런 두 단계를 거치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제 복수가, 원수 갚음이라는 공이 하나님께로 돌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를 갚으시는가? 하나님에게도 난처한 일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실 것인가? 그것을 알기 위해서 브루거만은 우선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를 어떻게 갚으시는가를 구약성경에서 찾아봅니다. 두 가지 사례를 듭니다. 하나는 노아 홍수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불법을 행하는 피조물을 향해서 심판을 결심하십니다. 복수를 결심하십니다. 분노 가운데서가 아니라 비통과 슬픔 가운데서 그런 결심을 하십니다. 그래서 홍수로 심판하십니다. 홍수 심판 후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결정적인 변화는 어디서 일어납니까? 인간의 생각은 여전히 악하고 그 이후에도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하나님의 마음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복수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처음 마음은 창 6장 5-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이후에 홍수 심판 후 변화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창세기 8장 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그들이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 원수가 되었다 할지라도 원수 갚는 것을 참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자신의 마음 안으로 수용해서 간직하기로 결심하신 것입니다.
또 호세아 선지서에도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의 변화가 엿보입니다. 호세아 11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에 대한 격정적인 하나님의 토로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8-9절에서 하나님은 자신 안에 일어난 분노를 속으로 거둡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에게 합당하게 보응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그들을 그대로 수용하기로 결심합니다.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 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 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있는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 11:8-9) 하나님의 마음 안으로 분노와 원수 갚음이 들어가서 내면화될 뿐이요, 밖으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는 오직 사랑과 불쌍히 여김만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신이 원수 갚음의 고통을 짊어지시기 때문에 온전한 사랑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원수 갚음을 처리했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일어난 분노와 복수하고자 하는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셨는지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오늘 본문의 말씀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을 분석하고서 이제 신약의 명령에 이르게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명령하시고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타는 복수심을 안으로 받아들이고 밖으로는 온 피조물을 향해서 호의와 연민을 보이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도 원수 사랑의 명령과 그들을 위해서 오히려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명실상부(名實相符)라는 말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명실상부’, ‘이름과 실질이 딱 맞아 떨어진다’, 이름과 실제가 서로 부합한다는 뜻으로 알려진 것과 실제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만 되면 명실상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 45절을 보십시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에 대해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주석했습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는 조건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오직 은혜로 거저 받은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자녀 된 우리가 본받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선하심과 자비하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호의가 풍성한 하나님이십니다. 심지어 악인에게도 호의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은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45절) 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비교해보면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상대방을 적대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호의를 지닌 사람들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웃’만을 사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에게만 친하게 지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하나님께 칭찬들을 만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누구나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닮은 성향이라기보다 죄인의 대명사인 세리나 이방인들도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4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은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돼 있습니다. 원수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면 그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어가는 길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합니다. 기도는 사랑입니다. 원수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경지는 너무 높아서 쳐다볼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추석을 앞둔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가족과 일가친척을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시죠? 이번 추석 명절에 만나게 될 자손들, 친척들 사랑하시죠? 자주 만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 있죠. 그 사랑 안에서 그들을 마음에 품고 늘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와있는,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라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되면 기도하는 대상은 그 사랑을 받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화목할 수 있습니다. 늘 이러한 기도로 하나님께 나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셔서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을 누구와도 누리며 나눌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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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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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교독 - 37. 시편 9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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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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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12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 (왕하 13:14-19)
여러분은 자신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좋은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대개는 화목한 가정, 안정된 직장, 건강한 신체, 즐거운 경험,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 일의 보람 등을 다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Very Good, A+인생이라고 할 만 합니다. 서구 철학 전통에서 좋은 인생이란 대개 두개의 축으로 구성됩니다: 행복(쾌락)과 의미(가치)입니다. 행복은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 만족한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행복과는 달리 의미 혹은 가치는 사회 봉사, 환경 활동, 섬김, 세상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것 등, 참 의미있게 여겨지는 삶의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내가 만족한다고 참된 만족이 있는 게 아니라 활동들이 의미 있게 받아들여질 때 진정한 만족이 있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최근에 이 두 축에 끼어든 제3의 '좋은 삶'을 어떤 심리학 교수분들이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심리적 풍요', 곧 마음이 풍요로운 삶입니다. 새롭고 다채로운 경험으로 가득찬 삶입니다. 예를 들어,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커리어(경력)을 쌓는 것, 도전적인 예술에 몰입하는 것,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학습), 창작해보기 등은 심리적 풍요를 더해주는 경험이 됩니다. 고난이나 역경의 경험도 소중한 자산이 됩니다. 이로써 자신이나 주변 세계를 이해하는데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잠깐은 부정적인 감정이 남더라도 나중에는 결국 도움이 되는 경험이 됩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다채로운 경험을 통해 변화무쌍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죠. 변화무쌍한 삶을 경험하기 위해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보통은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나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이 세가지 중에서 한 가지만 고를 경우 어떤 삶을 택할 것인가를 물었는데 1등은 행복이라고 대답한 사람이 약 70%, 2등과 3등은 거의 비슷한데요, 2등은 심리적 풍요(16%), 마지막으로 의미 있는 삶(14%)을 택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입각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분명 심리적 풍요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생명’에는 심리적 풍요도 포함될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신앙만큼 자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자신의 죄에 대해 슬퍼하게 되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경을 가지고 고민하게 되고, 무엇보다도 십자가를 통해서 창조주요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누리게 되고, 세상을 향한 소명을 발견하게 되어서 헛된 세상의 썩어질 것에 대한 탐닉을 그치고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꿈꾸고 소망하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한 심리적 풍요를 누리는 사람이 됩니다.
위 연구자들의 결론입니다: "심리적 풍요는 우리가 일상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와 함께, 우리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해준다." (한겨레신문 2021.9.8.)
개인적으로 심리적 풍요가 충만하게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습니다. 길가의 가로수를 볼 때에, 저 멀리 솟아있는 산을 볼 때에, 점점 푸르러지고 높아지는 초가을의 하늘을 볼 때에, 아니면 깊은 우정을 나누는 친구를 만날 때에, 슬픔을 당한 이웃에게 위로의 말을 건넬 때에, 가족을 바라보는 사랑의 시선을 지닐 때에, 어려운 일이라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성취의 기쁨을 누릴 때에, 가슴을 적시는 어떤 글을 읽을 때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때에,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찬양할 때에, 이렇듯 새로운 계절에 들어설 때에, 이 모든 삶의 활동, 일상의 활동, 일상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여러분에게 심리적으로 풍요로운 반응을 일으키고 있습니까? 심리적 풍요가 곧 일상을 충만하게,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평가 잣대가 되는 것이죠.
심리적 풍요란 내 안의 감정의 풍요, 정서의 풍성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슬픔도 깊은 슬픔으로, 기쁨도 벅찬 환희로, 사랑도 뜨거운 사랑으로, 연민도 손발의 도움으로 구체화되는 활동으로, 이러한 감정들이 마음에서 고강도로 펼쳐짐으로 인해서 사물에 대한 생각이나 사람에 대한 마음이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분이십니다. 그것을 구약성경의 선지자를 연구한 아브라함 헤셀이라는 구약학자는 그의 책 <예언자들>에서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이라고 명명했습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령은 성령의 불로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불로써 성령은 우리를 태우시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불꽃을 불러일으키십니다. 우리의 더럽고 허무하고 하나님에게 반역한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감정, 하나님의 정열의 불꽃을 우리 안에서 일으켜주십니다. 돌아오는 수요일에 나눌 말씀입니다만, 빌립보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 안에서 마음의 소원을 두고 일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꽃 같은 마음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말 그대로 스파크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내 마음의 강렬한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뜨겁지도 차겁지도 않은 우리의 마음의 그만그만함입니다. 그저 그런 마음의 온도를 성령님은 싫어하십니다. 성령의 불로 타오르든지 아니면 말든지! 요한계시록 3장 15-16절에서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할 때 바로 그점을 책망하셨습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참으로 무서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마음이 뜨겁다는 것은 고강도의 감정이 내 마음 안에서 펄펄 끓어오르는 상태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뜨겁고, 예배하는 마음이 뜨겁고, 말씀대로 순종하는 마음이 뜨겁고, 기도할 때 마음이 뜨겁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마음이 뜨거운 것입니다. 정열, 열정, 적극성, 간절함, 치열함이 짙게 배어있는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엘리사가 나이가 많이 들고 병에 들어 죽음이 임박했을 때 당시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요아스가 문병왔습니다. 요아스왕은 엘리사를 보자마자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14절)라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선지자 엘리사는 아람의 위협으로 인해서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구해낸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사의 기도와 지혜와 영감으로 인해서 북이스라엘은 숱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엘리사였기에 왕조차도 “내 아버지여”라고 그를 불렀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여”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는 웬만한 국방력을 넘어선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게다가 요아스왕의 아버지였던 여호아하스왕 때에 아람의 공격을 받고 북이스라엘이 항복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아람왕은 북이스라엘의 국방력을 축소시켜놓았습니다. 열왕기하 13장 7절에 보면, “아람 왕이 여호아하스의 백성을 멸절하여 타작 마당의 티끌 같이 되게 하고 마병 오십 명과 병거 열 대와 보명 만 명 외에는 여호아하스에게 남겨두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는데, 선대왕의 초라한 국방력을 아들 요아스왕이 그대로 계승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요아스왕에게 선지자 엘리사라는 존재는 진정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
요아스왕의 눈물은 진심어린 눈물이었고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 떠나게 된다면 자신의 나라가 어떻게 될지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인 눈물이었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챈 엘리사는 어찌보면 자신의 떠남이 문제의 본질이 아님을 알려주기 원했던 듯합니다. 엘리사가 떠남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의 떠남이 더욱 중요한 문제인데, 과연 요아스왕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엘리사는 그점을 생각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요아스왕이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왕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을 지닐 수 있게 될 것인가’.
엘리사는 일종의 선지자적 예언 행동을 통해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주고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엘리사는 요아스왕에게 활과 화살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활을 쥔 요아스왕의 손에다가 엘리사가 손을 얹고서 둘이 함께 동쪽으로 난 창을 열고 그곳으로 화살을 쏘았습니다. 이러한 선지자의 예언적 행동을 하고서 예언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이르되 동쪽 창을 여소서 하여 곧 열매 엘리사가 이르되 쏘소서 하는지라 곧 쏘매 엘리사가 이르되 이는 여호와를 위한 구원의 화실 곧 아람에 대한 구원의 화살이니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 선지자가 왕과 함께 동쪽을 향해 쏜 화살은 아람으로부터의 구원의 화살이요, 그 예언적 행동이 가리키는 내용은 요아스왕이 아람을 치되 멸절하기까지 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방금 읽은 17절과 이어지는 18-19절에서 ‘치다’라는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동사 ‘나카’가 반복적으로 사용됩니다. 다시 17절을 보시면, “왕이 아람 사람을 멸절하도록 아벡에서 치리이다 하니라”는 문장은 왕이 아람을 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것임을 뜻합니다. ‘멸절하도록’이라는 말은 ‘끝이 날 때까지’, ‘끝장을 볼 때까지’라는 뜻입니다. 강조되는 말은 ‘끝장을 볼 때까지’입니다. 아람을 진멸할 때까지 이스라엘이 치게 될 거라는 믿기 어려운 예언입니다. 현실에 비추면 일어나기가 불가능해보이는 예언입니다.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은 극소수로 제한돼 있고, 이제 엘리사마저 떠날 참인데, 어떻게 이스라엘이 아람을 치되 진멸할 때까지 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선지자는 예언적 행동과 그 해석을 통해서 예언하기를 비록 엘리사 자신이 떠나도 요아스왕을 통해서 아람에게 완전한 승리를 가져다주실 것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요아스왕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냐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약속을 붙드는 믿음입니다.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순종하느냐, 요아스왕에게 달린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철저한 승리를 믿고 전쟁터에 나아가 승리할 것인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하면서 의심하고 믿지 않고 순종하지 못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엘리사는 죽음 앞에 있는 사람의 근엄함과 무게감을 갖추고서 이 행동과 예언을 주면서 이것들의 중요성에 대해서 요아스왕이 깊이 숙고해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서 요아스왕을 시험합니다.
이것은 시험입니다. 아마 시험일 겁니다. 본문 18절을 보십시오. “또 이르되 화살들을 집으소서 곧 집으매 엘리사가 또 이스라엘 왕에게 이르되 땅을 치소서 하는지라 이에 세 번 치고 그친지라” 엘리사는 요아스로 하여금 또다른 화살들을 집게끔 하고서 그 화살로 땅을 내리치라고 명령합니다. ‘땅을 치소소’에 또 히브리어 ‘나카’ 동사가 사용됩니다.
아까 함께 행했던 예언적 행동과 그 의미를 이미 설명했던 엘리사는 요아스왕이 그 예언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고 순종할 것인가를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험하기 위해서 아까 사용했던 동사를 다시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람 군대를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달한 후 이번에는 ‘땅을 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히 요아스왕이 치게 될 ‘땅’은 아람 군대를 가리키고, 요아스왕이 예언의 말씀을 믿는다면 화살로 땅을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칠 것을 엘리사는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방금 전에는 선지자 엘리사가 단순히 말로만 동쪽에다가 활을 쏘라고 명령만 한 게 아니라 직접 요아스왕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고 함께 활을 쏘았습니다. 비록 자신이 떠나도 하나님의 구원의 화살이 왕의 손을 통해서 아람을 치게 될 것임을 생생하게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주려는 선지자의 간절함이었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어린아이와 같은 왕에게 부모처럼 가르쳐주려는 선지자의 마음입니다. 그리고서 이번에는 화살로 땅을 치라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함께 손을 얹고 땅을 내리치는 게 아니라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어떻게 하는지 보려고 명령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험으로 의도된 명령이며 시험임을 알아차리기를 기대하면서 내린 명령으로 보입니다. 요아스왕이 죽음 앞에 서있는 엘리사의 행동과 말의 무게를 헤아려본다면 그리고 엘리사의 행동에 담긴 그의 의도를 볼 수 있다면 그의 행동이 어떠해야 할 것인지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받은 자로서 요아스왕은 그 약속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단순히 머리로 끄덕이는 정도의 믿음이 아니라 믿기 때문에 철저한 순종으로 이어지는 온전한 믿음이어야 했습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되 철저히 순종함을 보여주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그러한 믿음을 보여주어야 했습니까? 땅 곧 아람 군대를 치되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화살이 부러질 때까지 아니면 여러차례 내리쳐야 했던 것입니다.
엘리사의 기대와는 달리 요아스왕은 아마 힘없이 세 번 내리치고 맙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치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철저하게 믿고 순종하겠다는 표시로써 그 말씀처럼 화살을 땅에 내리치되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쳐야 했는데 겨우 세 번은 끝장을 볼 때까지 내리친 것으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화가 났습니다. 왕의 믿음의 부족, 왕의 행동을 그저 믿음의 부족이라 단정지을 수 있는 이유는 약속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믿음이란 삶을 통합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믿음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믿음의 문제이면서 삶의 문제인 것입니다. 요아스왕이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확신이 부족함은 물론이거니와 그 믿음으로써 삶이 통합되는 것이므로 결국 삶에 임하는 그의 기본적인 자세와 태도에 결격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본문 19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사람이 노하여 이르되 왕이 대여섯 번을 칠 것이니이다 그리하였더면 왕이 아람을 진멸하기까지 쳤으리이다 그런즉 이제는 왕이 아람을 세 번만 치리이다 하니라” 요아스왕이 충분히 많이 내리쳤더라면 방금 전에 전달한 예언의 말씀처럼 끝장을 볼 때까지 아람을 치게 될 터였는데 왕이 세 번만 내리쳤기 때문에 아람을 세 번만 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의 말씀을 제한하고 수정하고 있습니다.
요아스왕에게 믿음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요 특별히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감정적 풍요에 연결돼 있지 못한 상태를 가리켜줍니다. 그의 기본적인 마음의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그의 믿음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그 어느 것에도 미치지 못한 어린아이와 같은 왕의 믿음의 부족이요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에 있어서 부족함을 여실히 보여주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일상의 소소한 일들은 잔잔한 일들이요 거듭 반복되는 일상입니다. 이렇듯 잔잔한 일상에 고강도의 감정을 불어넣읍시다. 하나님을 아는 믿음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파토스, 하나님의 정열, 하나님의 열정, 하나님의 열심, 하나님의 적극성, 하나님의 포기치 않으심, 하나님의 간절함, 하나님의 치열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 살아있는, 운동력있는 활동하는 지식이요 힘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자로서 삶을 살아갑시다. 믿음이란 결국 믿음의 삶입니다.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자와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요 믿기 때문에 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라는 측면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아스왕과 엘리사는 참으로 대비됩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보십시오. 엘리사의 삶과 삶에 임하는 자세와 태도, 심지어 죽을 때까지조차, 그를 꺾지 못하는 삶의 불꽃,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 왕에 대한 연민,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열정! 반면에 요아스왕의 형식적 슬픔과, 자신 앞에 놓인 위기만을 보는 근시안적 시선, 영혼이 들어가지 못한 행동들, 안일함과 무감각!
우리의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루하루의 일상입니다.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인생을 그리고 일상을 그렇게 살아갑시다. 어떻게 살아가자는 겁니까? 열정적으로 뜨겁게! 적극적이되 간절하게! 그리고 치열하게!
자연을 대할 때도, 인생을 대할 때도, 우정을 대할 때도, 이웃을 대할 때도, 일을 대할 때도, 기술을 연마할 때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대할 때,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예배할 때, 기도할 때, 말씀볼 때, 교제할 때, 전도할 때, 섬길 때,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것들이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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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5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눈이 밝아진다는 것 (창 21:9-19)
우리는 가끔 이런 경험을 합니다. ‘그때는 안보였는데, 왜 이제는 보일까? 왜 그때 못보았을까? 그런데 왜 이제 그게 보일까?’ 같은 책을 보아도 그때는 이해가 안되었는데 이제는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고요. 새롭게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있을 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하갈을 눈을 밝혀주셨을 때 하갈이 곁에 있는 샘물을 보게 되었고 그 샘물을 먹고 아이도 살고 자신도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미 샘물 곁에 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였는지 아니면 우연이었는지는 몰라도 살 길을 이미 찾았는데, 그것을 미처 보지 못하고 있는 하갈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하갈의 눈을 밝혀주셨을 때 하갈이 그 샘물을 보게 되어 결국 살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이죠. 하나님이 약속해주신 자녀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한 사라의 마음이 다급해져서 차라리 그럴 바에야 내 여종을 통해서 자녀를 출산해야겠지, 라는 생각에 남편 아브라함을 종용해서 하갈을 취하게 합니다. 본처의 여종을 통해 낳은 자녀를 자신의 자녀로 간주할 수 있는 게 당시 법이었으니까요. 그래서 결국 하갈이 아이를 출산하게 되는데, 그 아이가 아브라함의 장자인 이스마엘입니다.
하갈이 아이를 임신하자마자 돌변하죠. 자신이 생각하기에 이제는 사라의 여종이 아닌 거예요. 사라는 말이 아브라함의 본부인이지 가문을 이을 후손을 낳지 못한 수치스런 여인일 뿐이었습니다. 하갈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괜시리 어깨에 힘을 주고 사라의 말도 안듣고 달라진 위상을 뽐내면서 사라를 멸시하자 사라가 격분하죠.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화풀이를 합니다. 아브라함 탓을 합니다. 당신 때문에 자신이 모욕을 받는다고 말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받아야 할 모욕을 왜 자신이 받게 되었냐며 아브라함을 원망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당신 종이니까 당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응수합니다. 이에 사라가 하갈을 학대하죠. 더 이상 학대를 참지 못한 하갈은 도망쳐나옵니다.
하갈의 마음이 높아졌던 거겠죠. 사라도 화도 나고 질투심도 나고 그래서 아브라함의 재가를 받고 하갈을 학대했던 건데, 이전에 이런 대우를 받았어도 하갈은 응당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것인데 이제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자식을 잉태했는데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해, 이런 생각에 참을 수가 없었던 거겠죠. 그래서 뛰쳐나왔는데 막상 나와보니 이스라엘 남쪽 광야에서 살길이 막막하죠. 뛰쳐나올 때 계산도 하지 않았겠어요? 아브라함이 뱃속의 아이 때문이라도 자신을 다시 찾아내지 않겠냐는, 뭐 이런 계산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집을 뛰쳐나와 광야에서 어슬렁거리는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죠. 여호와의 사자가 하갈에게 묻습니다. 창세기 16장 8절입니다.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 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집을 뛰쳐나왔지만 정처가 없고 갈곳이 없었던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가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겁니다. 묻기 이전에 분명하게 해두는 것은 “사래의 여종 하갈아”라는 부르는 것입니다. 하갈이 사래의 종임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죠. 그리고서 여호와의 사자는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창 16:9)고 명령합니다.
사라의 여종으로 당연히 복종해야 할 터인데 원래 있던 자리에서 괜시리, 본인이 임신했다는 이유로 부풀어올라서 교만해진 것이겠죠. 원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비와 긍휼로써 하갈을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소망을 주시는 말씀을 주십니다. 창세기 16장 10-11절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이 말씀이 하갈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후손이 번창하리라는 약속도 주셨고 아들 이름도 하나님께서 손수 지어주시고 아들 이름을 ‘이스마엘’ 곧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뜻이죠. ‘쉐마’라는 동사가 사용됩니다. ‘쉐마’는 들으라는 뜻이죠. 하나님이 뭘 들으셨냐면 하갈의 고통의 소리, 적어도 하갈은 억울한 거예요. 모든 일이 사라에서 비롯되고 사라로 말미암았고 사라 때문에 자신이 쫓겨났다는 생각에 얼마나 억울하게 생각되었겠습니까? 본인의 잘못은 생각지도 못하는 게 어리석은 인간이죠. 자신의 억울함만 크게 생각하기 쉬운데 하갈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을 들으셨어요. 임신한 몸으로 집에서 도망쳐나올 수밖에 없던 한 여인의 기구한 사연을 하나님이 아신 거죠. 이것이 하갈의 하나님 체험이 됩니다. 하갈에게 임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갈은 하나님을 일컬어 자신을 돌보시는 하나님, 자신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살피시는 하나님으로 명명합니다. 창세기 16장 13절입니다.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돌보아주심을 경험한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자신의 주인의 하나님인가보다, 정도 했을뿐인데 이제 막상 하나님을 체험하고서 자신과 같이 미천한 종조차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있고서 대략 17년이 경과하고서, 그러니까 이스마엘이 10대 후반, 그리고 이삭이 대략 3세 때 오늘 본문 창세기 21장에서 하갈의 이야기가 또 한 차례 더 나옵니다. 이삭이 젖을 뗄 무렵 이삭과 이스마엘이 놀고 있는 장면을 사라가 우연히 보았는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놀리는 거예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놀렸는지는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뭔가 어미가 보기에 썩 유쾌하지 않은 장면을 사라가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라에게는 어찌보면 아브라함의 유산을 전적으로 물려받아야 할 자녀가 이삭인데 아브라함의 마음씨를 보니 이스마엘에게도 상당한 유산을 물려줄 것 같았고, 이래저래 여전히 꼴보기 싫은 하갈도 있었고, 아들 이삭의 잠재적 경쟁자 이스마엘을 제거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하여튼 이 사건을 빌미로 사라는 다시 아브라함에게, 이제는 더욱 분명하게 요구합니다. 하갈과 이스라멜을 이제는 내쫓으라고 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 이삭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므로” 한푼의 유산도 나누어줄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이삭에게 전 재산이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번에는 사라의 말을 순순히 들어줄 수 없었습니다. 이스마엘도 엄연히 자신의 친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근심하면서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시자 아브라함은 비로소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낼 결정을 하게 됩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 사라의 말이 외관적으로는 옳았던 거죠. 하나님의 계획과 부합하는 말이었으니까요. 사라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다기보다 자신의 마음이 더욱 중요해서 자신의 감정을 따라 자신의 마음이 원하는 방향으로 요청했을 뿐인데 하나님의 계획과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겁니다.
하나님은 굉장히 현실주의자의 면모로 그려집니다. 이상적으로 서로 화해하고 관용하고 이해하고 공존해라, 그러시지 않고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닫고 처음에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으려는 사라의 얕은 신앙이나 지금 격분하고서 오직 자신의 아들만을 생각해서 내쫓으라고 하는 사라의 마음을 선하게 보시지는 않으심에도 둘이 같이 갈 수는 없다고 판단하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라보다 더 사려깊죠. 아브라함의 근심을 아셨어요. 그래서 덧붙여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 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3절)고 말씀해주시므로 아브라함의 마음의 근심을 덜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말을 듣는 것이 한결 편안해졌을 겁니다.
그래서 하갈과 이스마엘은 다시 광야로 내쫓김 당했습니다. 광야에서 물이 떨어지자 하갈은 이제 죽게 되었다면서 본인도 죽게 되고 자식도 죽게 되었는데 차마 자식 죽는 꼴은 못보겠다면서 자녀와 거리를 두고 앉아서 탄식하고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물이 떨어진 것이 기폭제가 되어서 죽게 되었다는 절망감이 밀려온 것입니다. 절망감에 털썩 주저앉아 그저 큰 소리로 울기만 했던 하갈에게 이번에도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십니다. 본문 17-1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그 어린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으므로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하갈을 불러 이르시되 하갈아 무슨 일이냐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나니 일어나 아이를 일으켜 네 손으로 붙들라 그가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서 그와 동시에 “하나님이 하갈의 눈을 밝히셨으므로 샘물을 보고 가서 가죽부대에 물을 채워다가 그 아이에게 마시게 하였더라”(19절)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하갈은 이미 샘물 곁에 와 있었는데 샘물을 보지 못한 걸까요? 관심사가 시각을 결정합니다. 절망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미 절망해버린 거예요. 하늘이 무너졌다 생각한 거예요. 솟아날 구멍이 없다고 지레 겁먹은 거예요. 물이 떨어지자 자신과 아들은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이미 생각해버린 거예요. 그것이 시각에 영향을 미치는 법입니다. 이제는 보는 것이 그 마음의 생각을 입증해주는 것들만 보이는 거예요. 편향 지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울어지자 그 마음을 지지해주는 시각의 뒷받침입니다.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니 죽게 될 일만 보이는 겁니다.
절망이 얼마나 무섭고, 부정적인 생각이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소망의 가능성이 눈에서 차단되는 겁니다. 아예 보지 못함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러 가지 삶의 지혜를 얻습니다. 해답은 이미 주어져있습니다. 해답은 이미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하갈은 이미 샘물 곁으로 와 있습니다. 해결책을 얻을 가능성이 이미 우리 안에 있었습니다. 긍정적인 시각이었다면 진작에 발견했을 것을 부정적인 시각이 막아선 것입니다. 절망으로 인해, 부정적인 마음으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그러면 보이지 않게 됩니다. 절망이 시각을 왜곡시킵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시각을 어둡게합니다. 우리는 안된다, 안된다, 뭘 해도 안된다,는 마음의 생각이 진짜 그렇게 이끌어가게 됩니다.
긍정적인 마음은 얼마든지 해결책을 찾는 자리로 나아갑니다. 길을 찾게 돼 있습니다. 해답이 분명이 있고 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우리의 귀에 속삭입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해법이 바로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절망하지만 않는다면, 신앙만 잃지 않는다면 아무리 복잡하고 어렵게 보이는 문제라도 해법이 반드시 우리 가까이에 존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이요,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에 계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믿음의 긍정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를 초월해계시면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룩하시면서 친밀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므로 문제는 해결될 수 있고 절망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것입니다.
눈이 밝아지려면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셔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밝혀주시면 우리가 못보던 것을 보게 되는데, 무엇을 결정적으로 보게 됩니까? 모든 문제의 키를 들고 계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우리의 눈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눈이 밝아지면 이미 곁에 와있었음에도 눈이 어두워 보지 못했던 가능성이 열리고 해법이 발견됩니다. 삶의 문제의 해결책이 찾아집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다 해도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절망치 않고 삶을 긍정하고 긍정적인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결책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써 찾아내지 못할 해결책은 없습니다. 절망하기보다 이때 우리의 눈을 하나님께로 향하고서 그 하나님께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눈을 밝혀달라고,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문제 해결의 길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넉넉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눈이 열려 하나님이 가까이계심을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분께 맡기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특별히 기도할 때 믿음의 눈을 열어주시고 밝혀주시는 것입니다.
관건은 우리의 눈이 열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종에 불과한 하갈에게, 하갈 스스로 생각하기를 주인 아브라함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것처럼 보인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에게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되었던 하나님이 하갈에게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던 이전의 체험을 떠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갈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서 이미 받은 하나님의 말씀도 약속도 내팽겨치고 어둠에 처하게 되고 절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하갈을 긍휼히 여겨주시고 그의 눈을 밝혀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와 더욱 함께하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눈을 밝혀주심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 가까이에 계심을 믿으십시오. 오직 하나님에게만 문제 해결의 키가 주어져있음을 믿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오늘 이 시대에 우리의 눈도 밝아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밝혀주셔서 우리가 보아야 할 영역이 무엇일까요? 엘리사 선지자는 아침에 일어나보니 사방의 적군이 자신이 거주한 성읍을 둘러섰을 때 그런 다급한 상황에서 불구하고 자신의 종을 위해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하니 여호와께서 그 청년의 눈을 여시매 그가 보니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하여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엘리사는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신 하나님을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도우심을 이미 본 것이었습니다. 어떤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성경이 봉함되어 있지 않고 열려져야 합니다. 성경이 읽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눈에 밝히 드러나야 합니다.
제가 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 극동방송을 들었는데 극동방송의 간증이라고 할 최근의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 정부가 아브가니스탄에서 우리를 도왔던 분들 378명을 무사히 우리나라에 수송한 작전이 있었죠. ‘미라클 작전’이라고 명명된 작전이었습니다. 8월 초부터 준비한 작전이었습니다. 작전이 성공한 후 언론 보도를 접하고서 외교부나 국정원에서 주도면밀하게 어려운 작전을 성공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명의 협력자도 탈출시키지 못한 일본 정부와 비교가 되어서 더욱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부심이 커졌고, 외신도 한국 정부에 대해서 극찬을 했습니다. 탈레반이 곳곳에 검문소를 설치했고 피란민이 몰리면서 공항 진입 자체가 힘든 상황이어서 독일도 수천명을 공수할 계획으로 항공기를 보냈으나 7명밖에 태우지 못했고, 벨기에도 군용기를 보냈지만 1명도 태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보면 참 운좋게 잘 되었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역시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 작전을 은밀하게 추진 중이던 어느 날 청와대 고위관계자가 극동방송 이사장 김장환목사님께 전화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런 일을 계획하고 있는데 상황이 너무 안좋으니까 무사히 들어올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이 고위관계자가 누군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화를 받고서 김장환목사님이 본사에서 근무하는 전 직원들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하던 일을 멈추고 이 일을 위해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 보도를 들어서 아시겠지만 작전 과정에서 상당히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고 합니다. 탈레반의 검문에 붙들려서 몇시간동안이나 붙잡혀 있었던 것이죠. 결국 공항에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파키스탄을 거쳐서 무사히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엄청난 작전의 배후에도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김장환목사님을 비롯하여 극동방송 전 직원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도착한 후에 이를 위해서 기도해서 그런지 아프가니스탄인들을 향한 이들의 애정이 깊었겠죠. 이들을 위한 생필품 후원을 여러 기업들에게 전화하고해서 단 나흘 만에 1억 5천만원 상당의 생필품을 후원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 곁에 계십니다. 우리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하갈의 경우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눈을 밝혀주셔서 문제의 해결의 샘물을 보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해결책이 있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상황이더라도 하나님에게는 그곳을 벗어날 지혜가 있고 길이 있고 해결책이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눈이 열리고 눈이 밝아져서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믿음의 눈이 열려서 오직 하나님만 신뢰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만 매달리고 기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문제 해결의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실 것입니다. 살 길을 찾게 해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눈을 밝혀주셔서 하나님의 가까이계심과 함께해주심과 도와주심을 믿고 신뢰하면서 두려움 없이 그리고 걱정 근심 없이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1년 8월29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려면 (시편 16편)
여러분은 신앙생활이 기쁩니까? 오늘 이렇게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함이 기쁨이 됩니까? 예배당에서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기쁩니까? 세상의 친구들도 있지만 같은 교회, 그리스도의 한 몸된 교회를 함께 섬기는 지체들로 인해서 기쁩니까? 많은 것을 주지는 못하지만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음에 기쁩니까?
신앙생활뿐 아니라 여러분은 일상을 살아가는 삶이 기쁩니까? 기쁨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시편 16편에서 다윗은 “나의 마음이 기쁘”(9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지금 마음은 기쁩니까? 물론 기쁠 때도 있고 기쁘지 않을 때도 있는 게 우리 인생이고 우리의 마음입니다만,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좀 특별한 특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의 가장 주된 특별함은 그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는 기쁨이요 먼저는 하나님 자신이 누리는 기쁨이라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누리는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그 기쁨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요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충만한 기쁨이 있고 주의 오른쪽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주님에게는 충만한 기쁨과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누리시는 기쁨을 우리에게도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부모로서 우리가 자녀들을 바라볼 때 적어도 내가 살아온 인생보다 더 행복한 인생을 자녀들이 살기를 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가 하나님이 누리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시편 4편 7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무엇을 성취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수확이 많아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어떤 것을 손에 쥐게 되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니요 남보다 우위에 서게 되거나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되어서 얻게 된 기쁨도 아닙니다. 이러한 기쁨들도 우리 인생에서 소중한 기쁨입니다만,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이 모든 것들보다 더 큰 기쁨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질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이요 충만한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은 이러한 기쁨들과는 차원이 다른 기쁨입니다. 아까 읽은 본문 11절에서도 말씀하고 있듯이 충만한 기쁨이요 영원한 즐거움입니다.
하나님이 누리고 계신 기쁨, 너무나 좋은 기쁨, 그래서 그 기쁨을 우리 자녀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기쁨은 어떠한 기쁨일까요? 하나님이 누리고 계신 기쁨은 사랑의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기쁨을 영원토록 누리십니다. 인간 사이의 사랑에 관한 노래 중 “사랑의 기쁨은 어느덧 사라지고 사랑의 슬픔만 영원히 남았네”가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은 영원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영원토록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 있는 기쁨은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는 기쁨이 언제나 하나님에게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도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9절부터 11절까지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에게도 있었던 이 기쁨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므로 누리셨던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아들로서 예수님에게도 기쁨이 있었고, 이 기쁨을 제자들에게 주시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있던 기쁨으로 충만해지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도 사랑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받았던 사랑의 기쁨을 제자들에게도 나눠주셔서 제자들도 사랑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 기쁨으로 충만하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면, 주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스바냐 3장 17절에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입니다. 우리를 향한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으로 인해서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하십니까? 오늘 본문 시편 16편 2-3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여기서 다윗은 다른 성도들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안에 즐거움이 있게 됨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나의 기쁨도 충만해지는 겁니다.
사랑은 내리 사랑이고 그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아버지가 아들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아들 예수님이 제자들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 안에 기쁨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도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합니다만, 그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사랑이든 사랑이 기쁨을 낳습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이든 사물에 대한 사랑이든 일에 대한 사랑이든 자연에 대한 사랑이든 그러한 사랑이 기쁨을 낳습니다. 사랑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사랑 받는 대상은 기쁨을 되돌려줍니다. 자연을 사랑하면 자연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것이요 일을 사랑하면 일로 인해서 기뻐하게 되는 이치입니다. 폭넓게 말해서 온갖 종류의 사랑이 온갖 종류의 기쁨을 낳습니다.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을 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시는 일을 사랑합니까? 사랑이라는 말이 좀 거창하게 들린다면 좋아한다는 말로 바꿔도 괜찮을 듯합니다. 그 일을 밥벌이의 지겨움으로 알지 않고 그 일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까? 힘든 일이고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사랑하기 때문에 힘들더라도 기쁨이 있습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은 교회의 일을 하는 것이 기쁘고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이 기쁜 것이요 성도를 사랑하는 목사는 목회의 일이 기쁜 것이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은 섬김이 기쁨이 됩니다. 힘들지 않아서가 아니라 힘들어도 기쁜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전 국민에게 요리의 열풍을 가져다준 백종원씨는 잘 아시다시피 사업가입니다. 본인은 외식경영전문가나 요리연구가로 자신을 소개합니다. 이분의 아버지도 상당한 미식가여서 가족 외식을 하면 맛있는 집을 찾아 식당을 7,8번 옮겨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요리 연구를 즐겼습니다. 햄버거를 사다 먹더라도 그냥 먹지 않고 햄버거에 버터를 바르거나 여러 채소를 넣어 최대한 맛있게 먹었습니다.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군대에서 간부 식당 관리 장교로 일했습니다. 간부 식당 관리 장교라는 보직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은 보직인데 보통은 부사관이 간부 전용 식사 공간을 맡아서 운용했는데 본인이 자원한 것입니다. 새로 온 장군이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분이어서 식사 때마다 너무 맛이 없다고 불만을 하더라는 겁니다. 장교였던 그가 “제가 음식 좋아하니까 한번 해볼까요?”라고 말했다가 보직이 바뀌게 되고 간부 전용 식당을 전담하게 된 것입니다. 장군님의 식사를 좀더 맛있게 제공하기 위해서 장군님께 개인 뚝배기를 제안했습니다. 원래는 사발에 퍼주던 순두부찌개, 된장찌개, 김치찌개를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여서 내놓자 인기 폭발! 최고 인기 메뉴가 되었습니다. 식당 운영과 요리를 얼마나 좋아했던지 제대를 앞둔 1년 동안은 외박이나 휴가도 안 나가고 그 일에 몰두했습니다. 심지어 전역을 앞둔 전역 신고 전날까지 부대 행사 때 뷔페를 차리는 일에 집중했다고 하니, 백종원씨가 얼마나 요리를 좋아하고 식당 운영을 좋아했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보통 군대에서 말년이 가까울수록 하루라도 더 밖에 나가서 생활하기를 원할텐데, 아예 휴가나 외박도 나가지 않았다니 참으로 요리 사랑이 지극함을 깨닫게 됩니다. 당시에 이걸 배워서 식당을 운영하고 요식업이라는 사업을 하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그 과정이 너무 재밌고 좋아서 열의에 불탄 것입니다. 음식 만드는 것을 워낙 좋아했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사람들이 칭찬도 해주니 더 좋아진 것이겠죠.
이분이 <골목식당>이라는 프로에 나와서 식당을 개업하려거나 운영하려는 분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사람은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은 힘들어도 끝까지 파고들고 견딜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만 들뿐이라는 것입니다. 식당 일은 그 일을 좋아하지 않으면 견디가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자신이 몸소 그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제대하고 난 후 부모님의 기대도 있고 해서 막연하게나마 ‘큰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큰 사업’을 하려면 건설이나 무역 관련해서 큰 기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처음 시작한 사업이 인테리어 회사였습니다. 건축회사 사장님을 꿈꾸고 얼떨결에 시작한 회사였지만 잘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은 기회가 왔습니다. 목조 주택 건축 자재를 수입하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히 당시 우리나라에 목조 주택 붐이 일면서 자재 수입뿐 아니라 목조 건축 회사를 차릴 수 있었습니다. 사업이 점차 거쳤고 큰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IMF 사태가 터지면서 자재 환율이 두 배로 뛰어서 결국 막대한 빚을 지게 됩니다. 이때 많은 빚을 지게 되었는데 이 많은 빚을 결국 식당 운영으로 갚게 되고, 그 이후에는 다른 사업에는 눈돌리지 않고 식당 운영에만 전념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결국, 깨닫게 된 사실은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끝까지 갈 수 있고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 하는 일을 여러분은 좋아하십니까? 일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이 없으면 열정이 생기지 않고 일을 해도 기쁨이 없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도 사랑이 없으면 기쁘지가 않고 억지로 해야 하는 의무가 되거나 무료한 일이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예배가 기쁘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배 시간이 너무나 지루한 시간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하실 때 마음이 너무 흡족하셨고 기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사랑 받는 대상,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을 창조하시고서 가장 기쁘셨습니다. 그 기쁨과 만족을 성경은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창세기 1장 31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께서 넘치는 사랑으로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후에 창조된 인간을 보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것입니다. 창조의 기쁨도 결국은 사랑의 기쁨이었습니다. 사랑은 창조하고 계속 재창조합니다. 영원한 사랑이기 때문에 사랑 받는 대상을 창조한 것이요, 죄로 인해서 이탈한 그 대상을 계속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끊임없고 다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창조요 구원인 것입니다. 이 좋아하는 일을 함에 있어서, 이 사랑하는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하나님에게는 언제나 기쁨이 가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쁨은 이처럼 사랑의 기쁨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영원한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있는 충만한 기쁨, 영원한 기쁨을 우리도 받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겠죠. 하나님의 마음 안에 거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에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8-9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 안에 거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 위한 비결을 말씀합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나의 영도 즐거워하며 내 육체도 안전히 살리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나의 마음이 기쁘”게 됩니까? 다윗은 그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면 하나님이 나의 오른쪽에 계시게 되므로 나의 마음이 기쁘고 즐겁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할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 안에 거하게 될 때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으로 우리의 마음이 가득채워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내 앞에 혹은 내 오른쪽에 계시도록 항상 모셔들이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기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데서 오는 기쁨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항상 기뻐할 뿐입니다.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습니다. “우리로 단순하게 하시고, 여기 이땅에서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당신 앞에서 기뻐하게 하소서”
저는 훌륭한 신학자들의 설교를 읽는 것을 즐겨 하는 편인데요,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위대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판넨베르크라는 신학자가 한 권의 설교집을 냈는데, 그 설교집의 제목은 <믿음의 기쁨>입니다. 그 설교집 서문에서 그는 말합니다: “이번의 설교집은 믿음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전해줄 것으로 기대해 마지않습니다. 이 기쁨은 기독교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틀림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결국은 하나님의 기쁨에 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이 누리시는 기쁨에 동참하고 그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과 함께 하는 사랑의 기쁨에 우리로 참여케해주시려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 기쁨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늘 가까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그럴 때 우리 또한 기쁨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기쁨이 여러분의 심령에 충만하게 흘러넘쳐서 신앙생활도 기쁨으로, 일상의 삶도 기쁘게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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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잠잠히 (시 62:1-12절)
3세기 중반 이집트 부근 사막에서 시작된 수도원 운동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영성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었습니다. 수도자들은 이땅에서 살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을 삶의 중심에 두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나와서 사막으로 나왔던 것입니다. 이들의 수도 전통에서 보편적으로 권하는 덕목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바로 침묵입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를 받고 체험을 했어도 침묵하지 않는다면 말짱 도루묵이요,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사막의 수도사들에게서 이어져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막에서 혼자 수도하는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방해하는 사탄의 존재를 느꼈던 그는 어떻게 하면 사탄을 추방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습니다. 자신을 찾아온 악령에게 그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너희를 떠나가게 하느냐? 금식이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 사탄도 금식하는데 무슨 금식에 심오한 능력이 있어서 사탄이 떠나겠냐는 것이겠죠. 수도사가 다시 악령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철야기도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잠자지 않는다.” 사탄도 잠자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 철야를 한다 해도 사탄이 떠나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죠. “그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냐?” 악령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사막에 산다.” 세속을 떠나서 수도한답시고 사람들이 없는 사막에까지 나왔지만 이 악령은 오히려 사막에 산다고 대답하는 겁니다. 그러니 그것가지고 사탄이 떠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겠죠. 먹지 않고 잠도 안자고 세상과 절연을 하는 등의 수행을 한다 해도 우리 마음의 사탄을 내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이 악령을 추방할 수 있었을까요? 바로 침묵입니다. 마음이 어떻게 요동을 친다 해도 입을 꽉 다물고 있으면 사탄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입은 악에 물들기 쉽고, 우리가 내뱉는 말이 거짓에 사로잡히기 쉽고, 말로 인해서 우리가 뜻하지 않게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한 사막의 수도사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감화될 수 있는 한 말씀을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내 침묵으로 감화되지 않는다면, 내 말로도 감화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막의 지혜>, 로완 윌리엄스 저, 77-80쪽에서 발췌)
최근에 대통령후보로 나온 분 중에서 어떤 분은 이전에 공직자로 있었을 때엔 달변과 다변이 기자들에게 매력으로 다가갔다고 합니다. 엄정한 공직을 수행하는 근엄하고 좀 다가가기 어려운 일을 하는 분이 소탈하게 말도 많고 재밌게 말도 잘해서 기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치에 입문하고서 정치인들을 만났을 때도 달변과 다변이 친화력을 쌓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정제된 언어와 의도성 있는 메시지를 생명으로 하는 대선 주자에게 말이 많음은 오히려 탈이 되었습니다. 반대편에서 ‘1일 1망언’이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가령, 언론 인터뷰에서 보여준 실언은 단순한 말실수라기보다 인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닌지 많은 사람들이 의혹의 눈으로 주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침묵이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는 오래된 격언이 머릿속에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늘상 침묵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말해야 할 때는 말해야 하고, 기도도 부르짖어야 할 상황에서는 부르짖는 간구, 통성으로 합심해서 기도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해임을 알리고 이해를 구하기 위해서 설명해주어야 할 때도 있고, 열정적으로 지속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침묵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 시를 쓴 다윗이 보기에 자신이 처한 상황은 말을 하고 오해를 풀고 설명을 하고 자신에게 억울하게 가하는 악행에 대해서 폭로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 오히려 침묵할 때임을 다윗은 깨달았던 것입니다. 자신을 넘어뜨리고 직위로부터 떨어뜨리려고 공격해오는 원수들은 입으로는 축복하는 것같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하지만 속으로는 저주하는 사악한 자들인데, 이러한 위선적이고 배신적인 행태를 다윗이 간파하고도 오히려 침묵을 해야 할 상황임을 다윗은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이를 어떻게 알았을까요? 다윗은 왜 침묵을 선택했을까요? 다윗이 침묵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만이!”,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사실을 다윗이 알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이요, 다윗의 삶 중심에는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도 침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출렁입니다. 집채만한 파도라는 현상을 보고 그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은 보지 못하므로 바람의 존재를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보이는 파도에 겁먹고 두려월할 줄 알면서도 파도를 일으킬 능력이 있으신 바람과 같은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른 채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생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은 파도를 일으켜 우리를 올라가게도 하시고 내려가게도 하시는 분이신데, 많은 사람들은 파도 자체의 움직임에 따라 일희일비하죠. 그러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다윗은!
다윗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에게서 들려오는 말씀을 잠잠히 듣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는 침묵하고 하나님께 잠잠히 아뢰겠다는 것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겠다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십시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본문 5절에서는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고 침묵하며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건짐과 구원도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가능하고, 소망과 기대도 하나님에게서만 비롯되니까, 차라리 입을 다물고 하나님을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말 그대로 자신의 인생에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압도당하고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규정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시편 62편의 다윗의 영성과 비슷한 영성, 곧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성을 보여준 구약의 인물이 또 있습니다. 요셉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요란하지 않고 잠잠한 믿음이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말로 표현되지 않았고 잠잠히 인내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찬송소리와 기도소리로 표현되지 않았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간 하루하루의 성실함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셉의 믿음은 사람을 따라다니며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거나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랐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겼던 형들을 향한 원망과 불평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에 의해서 해결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미리 알려주신 꿈과 비전이 성취되어가는 과정으로 자신의 인생을 해석해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로 인한 억울한 옥살이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실 기대를 사람을 통해서 잠깐 가져보기도 했었죠. 술맡은 관원장과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고 실제로 해몽한 대로 감옥에서 나가고 직위를 회복한 관원으로 인해서 ‘이제 드디어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되었구나’는 기대를 잠깐 갖게 되었죠. 그러나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사람이 달라지듯 요셉의 은혜를 입은 관원은 막상 감옥문을 나가서는 요셉의 부탁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잠깐의 기대였지만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자 더 깊은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 마련이지만, 요셉에게는 이것도 잠시 잠깐일 뿐 요셉은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므로 예상보다 길어진 감옥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이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기다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요셉은 오늘 시편의 다윗처럼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를 깨달았을 겁니다. 오늘 본문 9-10절을 보시면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은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오늘 예배하는 여러분은 무엇에 마음을 두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오직 기대와 소망이 하나님에게만 있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시간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기에 참으로 좋은 시간입니다. 어려움으로부터 구원과 미래의 기대와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만 두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예배의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다윗이나 요셉의 영성과 신앙은 “오직 하나님만이!”로 집약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것같이 여기고 삶의 온갖 역경과 고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믿음이었습니다. 마음 중심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었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추구하였고, 참된 만족과 평안이 오직 하나님 안에 있음을 확신했던 것입니다. 교부 신학을 종합한 위대한 신학자 어거스틴의 말과 같습니다. “주 하나님,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찾아가도록 창조하셨고, 당신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전까지 우리 영혼은 불안합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참된 만족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인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요새와 같은 피난처로 다가오시는 분이십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신앙상태는 영혼의 침묵이며 영혼의 고요와 안식입니다. 바깥이 아무리 광풍이 불고 파도가 솟구친다 해도 내 영혼이 잠잠한 것입니다. 영혼이 고요하고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깥에서 힘겨운 상황이 펼쳐진다 해도 내 안은 잠잠하고 고요하게 안식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마음의 반석이 되시며 전쟁터와 같은 삶에서 요새가 되시며 내 영혼의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구원이 있고 소망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가능한 영혼의 상태입니다.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는 영혼의 상태는 시편 131편 2절에서 말하는 상태입니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강풍과 풍랑이 없어서 고요와 안식이 아니라 강풍과 풍랑속에서의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구원이 있음을 확신하고, 그리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소망이 옴을 확신하고 어떠한 경우라도 사람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하고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므로 풍랑 속에서도 고요와 안식을 누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인생이 날마다 순풍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제가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햇빛만 내리쬐면, 그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전혀 없으면 인생은 사막화될 뿐입니다. 인생에게는 햇빛도 필요하지만 비도 필요한 법입니다.
청년의 때엔 마음이 격동할 때가 많고 쉬이 흔들립니다. 청년의 방랑과 불안이 결혼만 하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혼할 때에도, 또 아기를 키울 때에도, 중년은 중년대로 중년의 위기를 겪고, 노년이 된다는 것은 나이듦의 과정 자체가 힘든 것입니다. 언제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것이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바람이 잔잔해지면 또 다른 태풍이 밀려오고 그렇게 인생의 풍랑에 고요와 평안을 빼앗기는 게 우리의 인생 현실입니다.
거듭 밀려오는 파도에 따라 널뛰기를 하는 인생은 마음 중심에 하나님이 없는 사람입니다. 폭풍 속에서도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석과 같은 분으로, 그리고 요새와 같은 분으로, 피난처로 다가오십니다.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십시오.
사람은 참으로 연약합니다. 쉽게 흔들리고 두려움에 떱니다. 그때 어리석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나 재물 등 궁극적인 도움이 될 수 없는 헛된 것으로 힘을 삼고 의지하려 합니다. 불행하게도 그러한 것들을 의지하면 의지할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의 사람들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반석이시고 구원이시고 요새이시며 피난처이심을 믿고 궁극적 신뢰를 하나님께만 두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잠잠히 하나님만을 바라보므로 넘어지지 않고 다시 일어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한다 해도 우리의 구원의 반석과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므로 위기를 극복해내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어쩌면 우리 신앙인의 위기는 강풍 자체에 있다기보다, 그리고 강풍이 몰고 오는 파도 자체에 있다기보다 강풍 앞에서 다가오는 파도 앞에서 흔들린 채 우리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재물을 의지하고 다른 어떤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 신앙인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들에 손을 내밀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으로서 참으로 자존심 상하는 일입니다.
큰 파도가 와서 여러본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고 하는 것과 같은 위기의 때, 그때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음성에 귀 기울이십시오. 잠잠히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우리의 도움과 구원과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잊지 않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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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아래로 (시 57:1-11절)
누구나 살면서 실패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좌절을 맛보고 낙심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수렁에 빠진 것 같은 침체기에 빠져들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가 반드시 찾아올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이 그런 시기일 수 있습니다. 요즈음 극심한 무더위로 마음도 몸도 지치기 쉽습니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여러 가지로 제한과 불편이 많은데다가 무더위까지 겹쳐서 삶이 피곤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덩달아 침체기에 접어들어 신앙이 힘이 되지 못하고 삶의 활력을 되찾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중요한 것은 복원력이겠죠.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무너져내리지 않고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회복이 중요한데 신앙생활에서 회복력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 것인지, 그 회복력으로써 다시금 일어서고 활기차게 신앙생활하고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오늘 시편 57편을 통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카우아이 아이들’이란 연구를 실시했습니다. 하와이 카우아이섬에서 1955년에 태어난 698명의 아이들을 40년간 추적 관찰했습니다. 모두가 안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서 온갖 역경 속에서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가난, 실업, 알코올 중독 같은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나야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이들 698명 중 약 1/3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이렇듯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유능한 성인으로 성장하였습니다.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데이터를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인 관계’라는 공통점이 있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가 이혼한 가정이라도 할머니가 손자를 지속적으로 사랑으로 돌보아주었다면 그 아이는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된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이어서 가정이 풍비박산난 가정이라도 어머니가 자녀에게 변함없는 돌봄과 안정적 관계를 지속하였다면 그 아이는 잘 자라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만이라도 어린 자녀와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관계가 유지되기만 하면 불우한 가정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연구를 실시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일련의 ‘회복력 인자들’을 발견하고 빈도수에 따라 정리했습니다. ‘회복력 인자들’의 가장 주된 요소는 ‘언제나 변함없는 한 사람과의 안정적 관계’였고, 그것 외에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 도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 신앙과 영성 등도 ‘회복력 인자들’로 밝혀졌습니다. (<당신의 불안한 삶에 답하다>, 빅터 프랭클 저)
삶은 언제나 명암으로 교차됩니다. 삶에는 굴곡이 있습니다. 언제나 기쁠 수만도 없고 그렇다고 언제나 슬픈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골짜기를 지날 때에라도 양지로 나아올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좌절의 쓴잔을 겪은 후에라도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 회복력입니다. 충격의 일격으로 쓰러졌을지라도 추스르고 다시 일어서는 회복력이 중요합니다.
회복력 인자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관계입니다. 사랑과 돌봄을 받을 수 있는 관계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그러한 관계가 불우한 환경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과의 관계, 인격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가 우리를 회복시키는데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시편에는 좌절과 낙심을 딛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일어서는 신앙인들의 선포로 가득합니다. 시편에서 낙심과 좌절, 실패와 넘어짐, 억울과 분통,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 단어를 찾아보면 ‘웅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에서 ‘웅덩이’, ‘구덩이’, ‘함정’, ‘스올’, ‘무덤’, ‘수렁’ 등으로 표현된 상황은 비슷합니다. ‘웅덩이’에 빠짐으로, 혹은 ‘구덩이’에 던져넣어짐으로 인해서 ‘무덤’에 내려간 것과 같이, 죽은 것과 방불한 존재가 됩니다. 무력한 상태가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도 단절되어 하나님께 도움을 받을 수도 없을 것과 같은 장소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굉장히 절망적인 상태에 처한 것입니다. 어둠에 처하게 되고 낙담이 되고 살아도 산 것같지 않고 죽음에 처한 것과 같은 상태입니다. 시편 40편 2절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웅덩이와 수렁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기가 막힙니다. 힘이 쫙 빠져서 그대로 털석 주저앉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도대체 왜 이 일이 내게 일어났는가?’, ‘도대체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망연자실한 상태입니다.
이런 상황에 처했다는 것을 좀더 구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 무능하다고 혹은 ‘나는 쓸모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거나, 누군가에게 버림을 당하거나, 사람들에게 무시를 당하고, 혼자뿐이라는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거나, 누군가 나를 속이고 억울하게 만들거나, 왕따를 당한 소외감이거나, 차별을 받고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사회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잉여인간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거나 혹은 그렇게 취급받거나, 이런 종류의 절망이 ‘웅덩이’로 묘사된 상황입니다.
불가피하게 우리 인생, 특별히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이러한 상황이 종종 우리를 찾아오는데요, 그러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웅덩이’가 우리가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러한 ‘웅덩이’에서 끄집어내고 건져내셔서 웅덩이에 빠진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웅덩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완전히 잘못된 장소에 들어서 있는 것입니다.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닙니다. 빨리 빠져나와야 할 장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어디입니까? 우리는 어떤 장소에 거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시편 57편 6절에 ‘웅덩이’가 나옵니다. 다행히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들이 내 걸음을 막으려고 그물을 준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오히려 웅덩이를 판 다윗의 원수들이 그 웅덩이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 빠지지 않고, 그러면 어디에 거하기를 그가 원하고 바라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본문 1절입니다.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가기까지 피하리이다” 다행히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던 다윗은 자신이 마땅이 있어야 할 곳, 하나님의 자녀들이 머물러야 할 곳인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하기를 원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라는 이미지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서 보호를 받는 것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날개’라는 이미지는 아마 암탉이 날개로 새끼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끌어낸 것입니다. ‘하나님의 날개 아래’는 안전함과 보호하심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한 평안함과 기쁨과 안식 또한 가리킵니다. 시편 17편 7-8절에서, “주께 피하는 자들을 그 일어나 치는 자들에게서 오른손으로 구원하시는 주여 주의 기이한 사랑을 나타내소서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라고 노래하며, 시편 61편 4절에서는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라고 찬양합니다. 이처럼 ‘주의 날개 아래’는 피난처요 안전한 곳이요 보호를 입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주의 장막과 같은 곳으로서 주님과 교제하며 주님으로 인해서 기쁨과 평안과 안식을 얻는 장소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는 시편에서 자주 나오는 ‘웅덩이’와 여러 차례 나오는 ‘주의 날개’가 함께 나오는 유일한 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웅덩이’에 빠지지 않았지만, ‘웅덩이’에 빠져버린 상황에 처한 이들도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옮겨질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웅덩이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절망감과 무능감의 환경에서 완전한 안전함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집니다. 여전히 ‘웅덩이’에 처해 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을 가능케해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다는 결단은 이미 자신을 가두고 있는 웅덩이의 능력이 파괴되었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아직 웅덩이에 빠져있는 상황일지라도 거기서 기도하면 도우셔서 주의 날개 아래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면서 미리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기도>, 월터 브루그만 저 참고)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지존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1절에서는 은혜를 베푸셔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다윗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간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에서 자신을 도와주실 것을 굳게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의 표제를 보면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다윗은 사울의 칼을 피해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의 이곳 저곳으로 피신생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시를 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웅덩이’와 같은 절망적 상황에서 건져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할 뿐 아니라 마음을 굳게 정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본문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또 9절에서도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노래합니다.
상황이 찬양할 상황이 아니고 상황이 감사할 상황이 아니지만 마음을 굳게 정하였다는 것입니다. 찬양하기로, 감사하기로, 마음을 굳게 확정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결심하고 결단하였다는 것입니다. 웬만한 굳은 각오와 결심이 아니면 이런 상황, 웅덩이에 빠진 것 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웅덩이’에서라도 하나님께 부르짖고 감사와 찬양을 결심하고 실행함으로써 ‘웅덩이’에서 빠져나와 이미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그늘 아래로 옮겨지고 있습니다. 미리 감사함으로 ‘웅덩이’의 늪에 더 깊이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거하게 된 것입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우리가 처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겠습니까?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이 각각 따로 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미리 감사하고 찬양을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핵심은 기도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뱅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기도를 주제로 한 장을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기도란 사람이 자기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럼 누가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자신이 가난하고 온갖 좋은 것이 없는 지 알게 된 사람만이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기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이게 기도다라고 기도를 정의하고 기도에 관한 긴 논의를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좋은 것이 없음을 깨닫고 자신의 필요를 알게 된 사람은 자기 밖으로 나가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게 되는 것이요, 기도를 하게 되면 소위 ‘교환’이 일어난다고 강조합니다. ‘교환’이라 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비참함 대신에 모든 행복을, 우리의 궁핍함 대신에 모든 부요함을 제공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늘의 보화들을 열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늘의 보화를 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신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으로 배우게 되고 그분의 빛 속에서 빛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칼빈의 말을 계속 인용하겠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우리가 부족한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아버지는 기꺼이 그분의 모든 풍요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하셨기에 모든 것을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그분에게서 퍼올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칼빈은 우리가 기도할 때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예수님에게서, 하나님께서 그 ‘넘쳐흐르는 샘’을 우리에게 연결시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요, 우리에게 온갖 보화와 하늘의 보물을 주시는 ‘넘쳐흐르는 샘’과 같은 분이 예수님이시오, 그리고 우리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그 부요함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예수님과 연합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므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성령을 통해 기도의 결과로서 풍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칼뱅은 기도를 가르치면서 기도하는 사람이 가장 유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자세는 모든 좋은 선물이 아버지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진정 고마워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그는 죄로 보았습니다. 기도를 진정으로 기도가 되게 하려면 기도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칼뱅이 보기에 기도와 감사를 분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기도요 기도하므로 감사를 표현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칼뱅은 시편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시편을 일컬어 ‘영혼의 해부도’라고 불렀고 자신이 시편에서 큰 위안과 소망을 발견했습니다. 시편에서 그는 기도를 배웠고 시편의 기도의 핵심에 감사와 찬양이 있음을 간파한 것입니다.
오늘 시편 57편에서 다윗이 웅덩이와 같은 처절한 상황에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기도를 드릴 때 감사와 찬양을 마음으로 결단하고 확정한 후에 실제로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웅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고, 더 깊이 웅덩이에 빠져들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윗은 전능하신 주님의 그늘 아래에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평안과 안심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웅덩이’가 곧바로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전환되었던 것입니다.
신순규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분은 나이 9살 때 시력을 완전히 잃은, 전맹입니다.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 장애를 가진 분이 미국 월가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25년 넘게 일하고 있습니다. 이분이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JP 모건에서 증권 애널리스트로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서울맹인학교에 다니던 15살 때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인 선교사님의 추천을 받고 그분이 자신의 미국인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그 집에 거하면서 미국 유학생활을 했습니다. 그 미국인 가정의 부부가 이후 그의 양부모가 되어서 그를 보살펴주었고, 거기서 그는 처음에는 미국맹인학교에 들어갔다가 일반 고등학교로 진로를 바꿔 공부했고, 이후 미국의 하버드대학교와 MIT에서 공부한 후 증권사에 취업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분이 최근에 에세이집 <어둠 속에서 빛나는 것들>이라는 책을 썼는데요, 이 책에서 그는 말합니다. 코로나가 창궐한 작년과 올해 언론에서 많이 등장한 단어가 ‘깜깜이’ 확진자라는 말인데, 시각장애인들이 반발해서 그 단어를 쓰지 않겠다는 뉴스가 자주 보도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그 단어를 뉴스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 단어를 시각장애인과 연관시키지 못했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는 44년간 빛도 보지 못하는 생활을 해왔지만, 자신의 세계가 깜깜하단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빛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분에게 왜 어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왜 시련이 없었겠습니까. 시각장애인으로서 최첨단 경제의 현장에서 일하는데 왜 좌절이 없었겠습니까. 웅덩이와 같은 시련과 좌절과 낙심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빛이 되어주셔서 그를 인도해주셨기 때문에, 어려울 때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날개로 그를 덮어주셨기 때문에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인생을 깜깜이로 보지 않고 살아왔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세계가 어둡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음에 부른 찬송가 가사와도 같습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서 참 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 나타나 온 세상 비치었네... 이 세상의 빛은 오직 주 예수님”(찬송가 84장 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웅덩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 있습니까? 웅덩이에 빠져버렸습니까? 그러나 그곳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얼른 빠져나와야 할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건져주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로 품어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방법이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기도와 감사와 찬양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겠다고 마음에 굳게 확정짓는 것입니다. 감사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심령이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참된 위로와 평안과 기쁨을 회복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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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1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굳게 믿지 아니하면 (사 7장 1-9절)
믿음을 지키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찌보면 교회의 민낯을 보았다고 할까요, 거기에는 오해도 있고 언론에서 지나치게 부풀려진 측면도 분명 있지만, 신앙생활이란 무엇인지, 믿음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교회의 본질은 무엇인지를 우리로 고민하게 합니다. 코로나가 다시 수도권에서 4차 유행에 접어들었고, 지방에까지 확산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인 듯합니다. 수도권의 교회들은 현장에서 예배가 극히 제한되었고, 작년에 우리 교회도 현장 예배를 드리지 못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아울러 국민 중 종교가 없는 인구가 60%에 이르렀고, 많은 국민들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는 찬사를 받기보다 별종 취급을 받고 있고 종교를 갖는다면 기독교인이 될 것 같지 않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기독교 인구수도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전체 인구 중 15%선도 곧 붕괴되리라 예측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성도 각 개인의 삶에서 여러 가지 위기와 어려움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겪고서 신앙에 회의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언제나 그랬겠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믿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쉽게 느껴질 만한 상황도 제법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안팎의 여러 위협과 위기 가운데서 성도로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을 수 있을까요? 믿음이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전부 들어간 전 인격적인 결정이고 선택이고 결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을 절대자이시며 동시에 온전한 인격자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여준 믿음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기쁜 소식과 성경 교리를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것이요, 매일의 삶에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즉 믿음은 신뢰요 동의해서 받아들이는 것이요 의지하는 것입니다. 신뢰, 동의, 의지가 제가 이해한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의 믿음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 7장 본문은 유다왕 아하스왕 초기에 있었던 선지자 이사야와 아하스왕 사이의 대화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이 왕이 되자마자 아람(시리아 혹은 수리아)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연합군이 예루살렘을 공격했습니다. 유다 아하스왕의 통치 초기에 북이스라엘 베가왕과 아람 르신왕이 연합하여 예루살렘을 쳤습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남하하는 앗수를 제국의 위협에 맞서 반앗수르 동맹을 맺었는데, 유다는 반앗수르 동맹에 가담하기를 꺼리고 친앗수르 정책을 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하스왕을 폐위하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공격해온 것입니댜. 이러한 위태한 상황에서 아하스왕은 두려움으로 마음이 요동쳤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은 심하게 흔들렸고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하스왕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합니다. 이들의 마음 상태가 극도로 공포심에 사로잡혀 당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동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를 아하스왕에게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 이사야를 보내 아하스왕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4절을 보십시오.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조용하라 르신과 아람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이들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아하스왕이 자신들과 연합하여 반앗수르 동맹을 맺기를 원했지만 아하스왕이 친앗수르 정책을 고수하자 그를 제거하고 대신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들이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말은 그들의 위협으로 인해 유다가 크게 불탈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계속 불에 탈 수도 없고 단지 연기만 조금 내는 그루터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야영장의 모닥불이 꺼진 뒤 불가에 남아있는 다 타버린 통나무 끄트머리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나무는 연기를 계속 피우지만 그곳에는 참 불길이 일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아람과 에브라임이 도모하는 그 일은 결코 서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는 것입니다.
유다의 아하스왕과 유다 백성들의 마음이 외부 세력의 위협 앞에서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2절)고 말씀하는데 우리도 인생의 여러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고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하나님은 두려워서 떠는 아하스왕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낙심하지 말라”(4절)고 말씀해주셨듯이 동일한 상황에 놓인 우리에게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만을 신뢰하기보다 앗수르에 의존하여 위기를 극복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선택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을 붙잡으려 한 것입니다. 앗수르 동맹에 의지하여 앗수르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열왕기하 16장 7-8절에 보면, “아하스가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 이르되 나는 왕의 신복이요 왕의 아들이라 이제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나를 치니 청하건대 올라와 그 손에서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아하스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내어다가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마 여러분도 어려운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고 다른 것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벗어나려고 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에게서 오는 도움만이 진정한 도움임을 강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구하기보다 더 손쉬운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본문 7-9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 그 일은 서지 못하며 이루어지지 못하리라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할 것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도모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유다왕 아하스를 안심시킵니다. 아울러 아람의 핵심은 수도 다메섹에 있고, 다메섹의 핵심은 왕 르신에게 있고, 에브라임의 핵심은 사마리아에 있고, 사마리아의 핵심은 왕 르말리야의 아들 베가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왕을 세우고 폐위하는 권한이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 있음을 강조하는 듯합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라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 있고, 하나님이 이미 이 일에 대해서 말씀하셨으니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는 것이겠죠. 그리고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만약 아하스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는 두려워할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만약 그가 하나님을 굳게 믿는다면 임박한 상황이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고요한 확신 속에서 굳게 설 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믿음으로 굳게 설 것을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굳게 믿는다’와 ‘굳게 선다’는 각각의 동사는 모두 믿는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아만’에서 비롯된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멘’이 ‘아만’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멘’이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믿습니다. 저도 그렇게 동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아멘’합니다만, ‘아멘’이 믿다라는 뜻의 ‘아만’에서 온 것입니다. ‘아만’은 원래 뜻이 어디어디에 토대를 두는, 확고한 토대를 두는 것으로서 믿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여호와 안에 확고히 서있는 것! 하나님을 신뢰하고 붙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9절에서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에서 ‘굳게 믿는다’는 동사는 ‘아만’의 강조형입니다. 그래서 믿는다라는 뜻을 강조했다는 의미로 ‘굳게 믿다’라고 번역을 한 것입니다. ‘아만’ 자체도 굳건한 토대, 확고한 토대를 두니까 믿는다는 뜻을 지니게 되었습니다만, 여기서 더 강조해서 굳게 믿지 않으면 굳게 서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굳게 선다’는 ‘아만’ 동사의 수동형태입니다. 굳게 믿지 못하면 확립되지 못하고 안정되지 못하고 그래서 굳게 설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믿음을 단단히 유지하지 못하고 지키지 못하면, 굳게 마음 먹고 믿음을 결단하지 못하면 흔들리고 요동치다가 결국에는 무너지고 말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불신앙적 태도를 아시고 그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해서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때때로 우리에게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굳게 서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이때 믿음은 평상 시의 믿음과는 다른 단호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굳은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을 이겨냈던 경험이 한 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척박한 상황은 굳은 믿음을 요청합니다. 난세가 영웅을 불러오듯이 어려운 상황은 굳은 믿음을 필요로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설 수 없고 흐느적거리다가 쓰러지고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굳게 믿지 아니하면 굳게 서지 못하리라” 말씀하시고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하스왕의 믿음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친히 징조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주는데 도움을 주기 위하여 징표를 주시겠다는 것이니, 그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징표를 붙잡고 믿음에 있어서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합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이어지는 말씀 이사야 7장 11-12절을 보십시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하나님은 두려움에 떠는 아하스왕에게 믿음을 굳게 세워주기 위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신앙이 없는 사람으로서 신앙이 있는 듯이 경건한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징조를 구하지 않는 명분으로 자신이 마치 굳은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아하스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앗수르를 의지하는 쪽으로 굳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조를 주시겠다고 했는데 아하스는 ‘여호와를 시험할 수 없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고 징조를 구하기를 거절한 것은 그의 불신앙을 보여줍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보다 보이는 앗수르를 의지하는 편이 더욱 유리해보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징조 구하기를 거절한 아하스왕을 책망하면서 징조를 주십니다. 그 징조란 너무나 유명한 이사야 7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아하스왕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없다는 경건을 가장한 불신앙으로 인해서 거절했습니다만, 그럼에도 하나님은 ‘임마누엘 징조’를 약속하심으로써 아하스왕이 믿음으로 설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제 곧 한 여인이 잉태하고 아들을 낳을 것인데, 아마 이 아들은 아하스에게 주실 아들일 것입니다만, 이름을 임나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라는 뜻으로 이름지으면, 그 아이가 크기 전에 얼마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지금 아하스왕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7장 16절입니다.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아하스왕은 앗수르를 의지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왕이 도모하는 것이 결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고, 얼마 못돼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될 것이니까 이로써 하나님이 유다와 함께하심을 알게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왕에게 주신 징조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14절)는 것이었습니다. 이 징조는 비단 아하스왕에게만 주신 징조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주신 약속으로서 이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성취되었습니다. 이땅에 오실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실 것임을 약속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임마누엘’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9절)는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굳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굳게 설 수 있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어떤 사람은 자신감과 자부심을 이야기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돈을, 또 건강을,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굳건한 믿음이 없이는 인생을 살아갈 수가 없고 우리가 설 수 없을 거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이 믿음은 독생자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9·11 테러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경찰관, 소방관, 그리고 시민단체들이 총동원됐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고 흙더미를 헤쳤다. 죽은 사람들의 모습은 처참했습니다. 구조대원들은 그 참혹함 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꺼져가는 생명이 있는지 샅샅이 뒤졌다. 그러던 중 잿더미 속에서 잘라진 손 하나가 나왔습니다.
워낙 많은 시체가 있었기 때문에 손 하나쯤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지나치려고 하는데 무엇인가를 꼭 움켜쥐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 형상을 본 구조대원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죽어가면서 무엇이 그렇게도 소중하기에 끝까지 놓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었을까?'
궁금해서 잘라진 굳은 손가락을 펴보았더니 거기엔 다름 아닌 어린 아이의 작은 손이 들어 있었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엄마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식의 손을 놓지 못하고 끝까지 그 손을 붙잡고 있다가 함께 잘려진 것입니다.
사형수가 마지막 사형 집행 전 제일 많이 부르는 이름이 어머니라고 합니다. 어머니를 부르면서 죽어간다고 합니다.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이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주시려고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요한1서 4장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가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에게 평화와 사랑을 주시며 임마누엘이 되셨습니다다. (국민일보에서 발췌)
임마누엘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을 징조로 삼아 끝까지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굳건하게 서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거나 요동치지 않고 믿음 위에 굳건하게 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굳게 서서 인생을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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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월1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53)
인생의 정답 (요 21장 15-25절)
요한복음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세 번째 나타나신 장면입니다. 이번에는 갈릴리에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몸으로 보이십니다. 세 번째 나타남의 목적은 사도 베드로를 회복시키고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자 함입니다. 우리가 2주 전에 보았던 말씀, 요한복음 21장 1-14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만나시면서 특별히 베드로와의 추억, 베드로의 기억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세 가지 사건을 떠올리도록 예수님께서 연출하셨습니다. 첫 번 째는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거의 초기 만남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실 때를 재현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두 차례 뵈었던 베드로가 고향 갈릴리로 돌아와서 다시 물고기 잡으러 나갔는데 예전처럼 밤새도록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상황을 다시 재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의 사건을 떠올리게 하심으로써 베드로의 부르심이 물고기 잡는 생계를 위한 삶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신 것임을 일깨워주시는 겁니다. 두 번째 연상되는 사건은 오병이어의 기적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굶주리던 수많은 사람들을 떡과 물고기로 배불리 먹이셨던 기적을 떠올리게 하시려고 예수님은 밤새도록 고생하고 주려있는 제자들을 위해서 떡과 물고기로 아침상을 준비해놓으셨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은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공급자 되심을 가르쳐주시려는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면 다시 물고기 잡는 삶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될 것임을 안심시켜주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억은 베드로에게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사건, 숯불 앞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세 번 부인했던 시간입니다. 그때도 이날처럼 숯불 앞에 사람들이 둘러 앉아있었던 것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려면 마음속의 문제, 실패와 낭패와 좌절과 트라우마로 여전히 남아있는 응어리를 해결하지 않으면 쓰임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쓰디 쓴 기억을 연상시키는 숯불 앞에서의 아침 식사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트라우마와 상처의 늪에서 끄집어내기 위해서 다시 실패의 자리로 베드로를 이끌고 들어가십니다.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세 번 동일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실패의 자리에서 일으켜세우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십자가 앞에서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었을 겁니다.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자신만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고 예수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을 굳게 다짐하고 맹세하고 자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을 뿐 아니라 그 모름을 입증하려고 예수님을 저주까지 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면목이 없었을 겁니다. 다시 예수님을 위해서 무언가를 하기에는 그때의 실패가 마음속에서 너무나 깊이 파인 상처로 남아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으나 이 마음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 사람을 취하는 일에 쓰임받을 수 없을 것이기에 예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그를 일으켜세우고자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 질문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 질문은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묻는 질문입니다. 베드로도 이날 아침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입니까?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을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십자가에서 깨닫게 됩니다. 알게 됩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십자가 사랑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심으로써 그 사랑을 우리로 알게 해주십니다. 베드로도 나중에 오순절 성령을 받고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만, 이날에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치명적인 실수와 실패로 엎어져있는 자신을 찾아와주시고 아침상을 손수 준비해주신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서 자신을 이해해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베드로가 느끼지 않았을까요? 베드로가 느낀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실패자로 낙인을 찍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알고 이해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베드로에게 세 번이나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대답은 내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 였습니다. 동일한 질문에 동일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런데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시니까 베드로는 고민이 되겠죠. 예수님이 이제는 내 말을 안믿으시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7절)라고 거의 동일하게 세 번째도 대답을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베드로가 느꼈을 법한 예수님의 사랑은 그를 실패의 자리, 그래서 엎드러져있는 자리에서 그를 치유하고 일으켜세워서 회복시키려는 사랑입니다. 너는 ‘버린 카드야!’, 이러지 않으시고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에서 넘어져 있을지라도 사랑을 나누면 사랑의 힘으로 일어설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아셨기 때문에 지금 베드로를 찾아오셔서 세 번이나 동일한 질문을 하고 동일한 대답을 듣는 과정에서 베드로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치유하시는 것입니다. 치유하고서 회복시키는 사랑을 베드로가 느꼈을 것입니다. 사랑에는 치유의 힘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찾으시고 다가오셔서 그를 실패의 자리에서 끌어올리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곧 베드로에게 너무나 큰 사랑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 사랑의 힘으로 지금 베드로는 치유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진실한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예수님은 베드로를 이해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아무리 ‘손에 장을 지진다’고 확고부동한 마음의 상태를 과시해도 상황에 따라 여지없이 무너지기도 하는 연약한 존재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려고 부인한 것도 아님을 아십니다.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속으로 되내이면서도 겁나서 부인한 것도 아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아서도 아니고 그냥 자기 목숨을 더 사랑했기 때문임을 예수님은 아십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영적 수준을 알고 이해하고 계십니다. 세 번 동일한 질문을 하심은 베드로를 이제는 못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대답의 기회를 주심으로써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스스로 다짐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베드로는 다시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아마 오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실패와 상처가 깨끗이 치료되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나중에 베드로 자신이 쓴 베드로전후서에 보면 자신의 상처나 실패에 대해서 괴로워하거나 그 과거가 베드로의 발목을 잡고 있는 듯한 표현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성경 밖에 전해지는 글 중에서 ‘베드로 행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베드로 행전은 2세기에 작성된 문서입니다만 4세기나 돼서서야 최종 형태로 완성된 베드로의 행적에 관한 모임집입니다. 이 이야기들 중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상상이나 전설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만, 여기서 보여주는 베드로의 마지막 순교에 관해서 감동적으로 들려줍니다. ‘베드로 행전’ 35장에 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네로 황제의 핍박으로 인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됩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에게 강권합니다. 앞으로 계속 주님의 일을 이어가기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로마를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베드로는 그들에게 “형제자매들이여, 우리가 탈영병처럼 행동해서야 되겠습니까?”라고 말하며 거절했지만 거듭되는 요청에 베드로가 설득이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떠나게 됩니다. 떠나면서 성도들에게 말합니다. “아무도 나와 함께 떠나지 말고, 나 혼자 변장을 하고 떠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서 로마 성문을 몰래 나서는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로마로 들어가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라틴어로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러 로마로 간다”고 대답하십니다. 베드로가 다시 묻습니다. “주님, 다시 십자가에 달리시는 겁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렇다. 베드로야. 내가 다시 십자가에 달리러 간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베드로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십자가는 자신이 마땅 짊어지어야 할 십자가임을 깨닫고서 베드로는 주님을 찬양하며 로마로 돌아가서 십자가를 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깨달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네로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감당할 수 없다면서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도록 요청해서 그렇게 순교를 합니다.
이를 보건데 베드로는 오늘의 치유와 회복, 예수님의 사랑으로 인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고서는 다시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배반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예수님처럼 십자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음을 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 본문 말씀에서도 예수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내다보시며 의미심장한 예언의 말씀을 베드로에게 주십니다. 본문 18-19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의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시는 말씀이요, 예수님처럼 베드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임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의 베드로를 향한 사랑은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서 찾아오시는 사랑이고, 그의 형편과 처지와 그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사랑이요, 결국에는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사용하시는 사랑입니다. 베드로에게 주신 사명, 그러니까 ‘사람을 낚는 어부’로 소명을 받은 베드로에게 주시는 특별한 사명은 목양의 사명, 교회의 리더십의 사명입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도 참 감동적입니다. 주님이 친히 기르시는 자신의 양떼를 맡기기 위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양들을 사랑하느냐고 묻지 않고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양들을 사랑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시고서 예수님을 베드로에게 자신의 양떼를 위탁하십니다. 이것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름을 받은 베드로의 사명입니다.
지난 설교 때 ‘사람을 낚는 어부’를 좀 크게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꼭 목회자가 되고 선교사가 되고 그렇게만 생각하지 말고 사람 존중, 생명 존중, 하나님의 사랑 실천하여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직업활동을 통해서든 아니면 직업이나 생계나 밥벌이와는 별개든, 우리는 어찌하든지 사람을 소중히 여기고 한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영혼 존,중 생명 존중 가치관으로 무장해서 ‘사람이 언제나 먼저다’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섬김과 사랑 실천으로 나아가는 것이 곧 ‘사람을 낚는 어부’임을 강조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은 특별히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통해서 이루어갈 터인데 그 사명은 목양자의 사명 선교자의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사명이 주어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확인하시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명을 맡기기 위해서 물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누구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무엇보다도 더욱 사랑하십니까? 오늘 예수님의 질문, “이 사람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은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후자로 번역하면 다시 물고기 잡으러 온 베드로에게 먹고 살기 위한 그물이나 배, 그것으로 잡은 물고기 등을 가리키고서 이것들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번역하든 예수님은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려는 겁니다. 남달리 주님을 향한 열정을 그동안 보여주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맞고 쓰러져있는 베드로를 아시는 주님께서 그를 일으켜세우시려고 베드로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것이요, 그의 마음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비록 실패하고 실수했지만 주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을 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동일한 질문을 세 번이나 하신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은 ‘인생의 정답’입니다. ‘인생의 정답’이란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삶을 이해하고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결국 인생의 정답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고 그 사랑을 받고, 그리고 그 사랑을 누리고 그 사랑 안에서 거하면서 주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사명을 받아서 우리 모두를 부르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명대로 살아가는 것이요 사명 감당을 통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인생,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이 되는 것이 바로 인생의 정답이요 우리가 나아갈 길임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관건은 주님 사랑에 모아집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예수님께 직접 그 앞에서 들은 베드로의 대답은 진짜로 자신이 예수님을 더욱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직접 주님에게서 듣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주님 사랑은 무엇이겠습니까? 주님을 존중하며 주님의 말씀을 귀담아들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시고서 그에게 사명을 위탁하신 후에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베드로에게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더 “너는 나를 따르라”(22절)고 재차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려면 주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환난 날에 주님의 도우심과 건지심을 맛보고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므로 주님 사랑을 깨달아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시편 18편 1절에서 다윗의 고백과 같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인생의 여러 가지 상황 가운데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을 체험하고 환난 날에 건지심을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생의 진정한 힘은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임을 깨닫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가는 겁니다. 이렇듯 주님을 독보적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본분입니다. 신명기 6장 4-5절입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중요한 계명이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걸어야 할 마땅한 본분입니다.
아울러 주님 사랑이라는 마음은 정적인 것이죠. 정적으로 남아 있지 않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따라가는 인생이 되어야 함. ‘나를 따르라!’, 그렇게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 제자가 되는 삶이어야 함을 아울러 깨닫게 됩니다.
아프리카에서 헌신한 스코틀랜드 선교사 알렉산더 클락크에게 있었던 일입니다. 한 원주민이 사자에게 물려서 빈사지경에 처했습니다. 너무나 위태로운 상태여서 거의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 그를 선교사는 몇 달 동안 지극 정성을 다해 치료했습니다. 그 원주민은 기적적으로 살아났습니다. 그 후 클락크 선교사는 자신이 일하던 아프리카 선교본부로 돌아왔습니다. 한 3개월 정도 후에 살아났던 원주민이 선교사를 수소문해서 찾아왔습니다. 그러고는 말하더랍니다. “선교사님, 아프리카의 법을 아시지요? 아프리카에서는 자기 생명을 구해준 은인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저는 당신 것입니다. 제게 있는 모든 것을 당신 것입니다. 제 자녀들도 제 가축도 전부 당신 것이니 당신 뜻대로 하십시오.” (<나를 사랑하느냐>, 옥한흠 저에서 발췌)
선교사가 그렇다고 이 말대로 이 사람의 것을 어떻게 처분하고 소유했겠습니까마는, 참 의미있는 이야기입니다. 원주민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이를 향해 ‘나의 것은 당신 것’이라는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까? 바로 여기에 우리 인생이 걸어가야 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정답이 있습니다만, 우리가 꼭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너무나 큰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셔서 우리를 살리신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요, 우리가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주님을 따라가고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도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 우리를 향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은 사랑이요 참으로 거룩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베푼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묻습니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을 더욱 사랑하시고 주님을 따라가시므로 인생의 방향을 바로 잡고 답을 알고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