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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부활절 설교)
사망과 음부의 열쇠 (계 1장 9-20절)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계시록의 서론입니다. 사도 요한이 어떻게 해서 소아시아 7교회에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를 써서 보내게 되었는지를 말해줍니다. 사도 요한이 선지자로서 또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을 증거했다는 이유로 로마 제국의 핍박을 받고 밧모라는 섬에 일종의 유배를 당한 상황입니다. 거기서 주일이 되어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런 환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환상을 보았을 때 그 영광에 압도되어서 죽은 자 같이 되어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주님의 음성을 또다시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진 사도 요한에게 주님께서 당신의 손길로 그 위에 얹으시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영광스런 주님의 환상에 압도되어서 주님의 발앞에 바짝 엎드릴 정도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요한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기도 하고, 그리고 요한이 핍박 받고 유배당한 상황에 처해있기 때문에 그런 맥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었었지만 지금은 살아 있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요 역사를 주관하시고 요한 자신의 생애를 주관하시고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통치하시고 만왕의 왕으로 다스리시니까 ‘처음이요 마지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시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심을 뜻합니다. 로마제국의 핍박과 압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요한에게 유일한 주권자가 오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요한이 당하고 있는 핍박과 어려운 상황은 이미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에서 우리는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성도의 삶이요, 이미 예수님께서 고난을 통과하여 영광에 이르셨음을 강조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인간이 되셨기 때문에 진정한 인간성을 회복하시는 길을 제시해주셨고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의 생애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걸으신 길을 따라가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고난을 지나 영광에 이르는 삶’이 될 수밖에 없음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계시록이라는 편지 서두에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예수님에 대한 같은 신앙을 가진 자로서 자기 자신도 너희의 형제이고 너희와 마찬가지로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환난, 특별히 십자가 고난, 그리고 그 십자가를 참으신 예수님의 인내에 동참하므로 예수님의 통치에 동참하여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는 성도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환난이 예수 안에서 받게 된 환난이요 이미 예수님이 받으신 환난이요 예수님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므로 필연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온 환난임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처럼 환난과 고통을 잘 참고 인내함으로써 예수님의 은밀하고도 역설적인 왕노릇에 동참하고 있는 자 곧 성도임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주님으로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4장에서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성도에게 예수님은 인생의 모든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원이요 우리의 위로요 우리의 심판이시오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고 죽었다가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셔서 우리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죽음이요 우리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죄로 인한 우리의 전체 삶이 총체적으로 부정되는 죽음이요 죽고 결산을 마쳐야 하기 때문에 죽음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는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를 죽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죽으시고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안에서 우리 또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의 이전의 죄악된 삶이 다 결산되었고 옛사람의 죄악을 청산하시고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덩달아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죽음과 부활로 이루어진 우리의 구원을 보여주는 극이 세례식입니다. 짧은 드라마요 퍼포먼스가 곧 세례식입니다. 부활주일에 세례식을 갖는 교회 전통이 그래서 옹호가 됩니다.
우리의 죽음과 부활이전에 먼저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먼저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실 때 요단강에서 물에 잠기셨습니다. 원래 ‘세례’라는 말의 원어의 뜻이 ‘물에 잠기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에 잠겨서 세례를 받았다는 것에 대해서 동방교회에서 혼돈의 물에 갇혀 죽음에 이른 것으로 봅니다. 혼돈의 물, 구약성경 전반에서 물은 혼돈과 암흑의 세력이나 심판을 가리킵니다. 심판의 물은 특히 노아 홍수에서 물로써 심판하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혼돈의 물, 흑암의 물, 죽음의 물, 심판의 물에 잠김으로써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키는 물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받는 “내가 받는 세례”에 대해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가시는 이유가 십자가에 죽으러 가시는 길인데도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서 메시야로서 왕권을 얻으면 자신들을 예수님의 왕좌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하실 때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37-38절입니다.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내가 마시는 잔” 곧 고난의 잔, 죽음의 쓴 잔을 말씀하고서 “내가 받는 세례”를 말씀하십니다. “내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죄인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과 아울러 하나님께 처절하게 버림받는 십자가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내다보면서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혼돈과 죽음과 흑암과 심판의 물에 푹 잠기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가리키는 세례였던 것입니다. 물에 잠긴 예수님이 따시 물 위로 올라오신 것은 그의 부활을 가리킵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부활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필연적입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사망에 매여 계실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내다보며 압축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 물밖으로 나오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예수님의 세례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요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사랑받는 독생자임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부활입니다.
우리가 받는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과 연합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과 하나 되기 위한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 빠지는 것이요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하기 위하여 물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이유는 그렇게 해서 우리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점철되고 죄악으로 누적된 삶, 총체적인 나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 것이지, 우리 혼자 죽는 것이라면 영원한 멸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합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해서 예수님 안으로 받아들여지고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시게 하려고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빠진 물이 그저 심판의 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오히려 우리를 구원하는 구원의 물이 됩니다. 노아의 홍수의 물이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구원의 방주를 그 위에 뛰우는 구원의 물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0-2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를 준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복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노아 홍수 때의 물은 세상을 심판하는 물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노아의 가족 8명에게는 그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는 물이었던 바, 그들이 노아의 방주 구원의 방주에 타고 물 위에 띄움을 받고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물은 더 이상 심판의 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녀들에게는 구원하는 물이 되는 것이요, 그래서 그 물은 곧 세례를 가리키는 물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란 단순히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죄 씻음 받고 깨끗해져서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주가 물을 타고 가다가 결국 아라랏산에 걸려서 정박하고 그들이 방주에서 나와 땅을 밟아서 구원에 이른 것처럼, 또한 하나님의 보좌와 그 우편에 계신 어린양의 보좌 앞까지 인도되어 완성에 이르는 구원과 같이,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하게 찾아가는 것이 곧 세례라는 것입니다. 즉 세례란 것이 공동체 입문의식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입문의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오신 하늘 아버지의 음성처럼 우리가 세례받을 때 들려오는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서 이후 평생의 삶에 걸쳐서 하나님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보좌 앞까지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전 여정 동안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변화되어가는 계속되는 세례의 과정임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예수님의 세례는 죄인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셔서 죄인의 대표로서 물에 빠져 죽으신 것이요 자신은 죄가 없는 분이시므로 물에서 걸어나오신 것이라면, 우리의 세례는 예수님과 합하기 위하여 예수님과 하나되기 위하여 받는 세례요,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합하고 죽으심과 합했기 때문에 그의 다시 사심에 합해서 부활에 이르게 됨으로 그것이 곧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 합한 세례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오늘 요한계시록 본문으로 돌아와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두려움에 처한 요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고서 그 이유를 자신이 “처음이요 마지막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전에 죽었었지만 부활하셔서 이제는 살아 계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처음이요 마지막’이시고, 이뿐만 아니라 “세세토록” 살아 계셔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또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본문 17-1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분으로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음부’는 헬라어로 ‘하데스’로서 신약성경에서 지옥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의 열쇠와 지옥의 열쇠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에는 예수님께서 인생의 죽음과 인생의 지옥행의 키를 쥐고 계시다는 뜻도 물론 포함돼 있겠지만, 그보다 더욱 강조되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심지어 예수님이 지옥에서 다시 살아나오셨다는 뜻입니다.
단순히 죽었다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극심한 죽음의 고통, 마치 지옥의 고통과 저주를 온몸으로 받으실 정도로 육신적 정신적 형벌과 고통을 받으시고서 지옥에서 생환해나오신 것이 곧 그의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에서 이를 근거로 지옥강하, 지옥에 내려가심의 교리를 발전시킨 것입니다. 실제 4세기경부터 사도신경에 예수님의 지옥강하가 들어갔고 이후에 사도신경의 고백에서 여러 논란도 있었지만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나 존 칼빈은 사도신경의 조항에 예수님의 지옥 강하가 들어가는 게 맞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신앙고백하는 사도신경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어서 역사적으로 지옥 강하가 빠져 있습니다만, 종교개혁가들도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할 때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 다음에 지옥에 내려가심을 고백하고서 사흘 만에 부활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존 칼빈과 우리 교단의 신학인 개혁신학은 예수님의 지옥강하를 물리적 공간적으로 지옥에 내려가심으로 이해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전후에 극심한 영적 고통을 받으심으로 해석하며 지옥 강하를 받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될 정도로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 하나님께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극심한 고통이나 십자가 상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를 통해서 드러난 극심한 고통, 곧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 고통이나 혹은 장사지내고서 사흘 간 죽음에 머문 기간에 받은 죽음의 고통이 지옥강하로 표현된 것으로 이해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으로 고통과 사망을 몸소 겪으셨을 뿐 아니라 지옥과 같은 인생의 모든 혹독한 고통을 영적으로도 겪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사망의 열쇠뿐 아니라 지옥의 열쇠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사망의 영역뿐 아니라 지옥의 영역 또한 주님의 주권과 통치 아래 놓이게 된 것이요, 죽음에게 종노릇하는 인생에게 생명의 소망을 주실 뿐 아니라, ‘내 삶이 지옥같다’고 탄식하고 절규하는 인생들에게 먼저 자신이 지옥과 같은 극심한 고통과 하나님의 버림받음을 경험한 자로서 예수님께서 그들의 환난을 아시고 위로하시고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돌봄이 오직 예수님만이 가능하심을 알려주시려고 자신이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계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틴 루터가 1519년에 “죽음을 준비하는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설교했습니다. “너는 지옥과 영원한 고통을 네 자신 안에서... 보아서는 안된다... 천상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아라. 그는 너 때문에 지옥에 갔고, 영원히 저주를 받은 자처럼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았던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너를 보고 너 자신 안에서 너를 보지 마라... 그는 지옥의 문을 부숴버렸고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을 이끌어내셨고, 우리를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내셨다.”
부활절 아침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메시지는 예수님께서 마치 지옥에 내려가신 것처럼 고통을 받으셨던 바, 그것은 지금 여기서 지옥의 고통과 같은, 마치 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지금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환난을 당하는 우리에게 찾아와주셔서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부활절 아침에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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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 요한복음 14장 25~31절
▶설교 - 왜 기쁨이 아니라 근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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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40)
왜 기쁨이 아니라 근심인가? (요 14장 25-31절)
우리가 어떤 사람에 대해서 근심한다면 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걱정할 일도 없겠죠. 걱정을 하고 신경이 쓰인다면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사랑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자녀가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뭔가 평소 같지 않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해 보이면 부모로서 신경이 쓰입니다.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아이의 표정이 이토록 어두운 걸까, 부모로서 걱정이 됩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자녀의 얼굴 표정에 민감하고 관심이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는 것이죠. 그리고 부모로서 자녀를 도와주고 싶고 문제가 있다면 해결해주려는 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녀를 사랑하니까 그렇습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주님이 피흘려 사신 교회라는 바른 교회론을 지닌 성도라면 교회 안의 지체들을 향해서 관심을 갖기 마련입니다. 다른 성도의 아픔에 대해서 공감하고 아픈 문제 해결을 위해서 기도하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한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생각과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한 몸된 교회의 지체를 함께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은 근심할 일도 많아집니다. 신경 쓸 사람이 많아집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래도 애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근심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더욱 우리 자신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걱정과 두려움은 내 자신이 버림받을까봐, 내 자신이 인정받지 못할까봐, 내 자신이 사람들에게 거부당할까봐, 내 자신이 창피를 당하까봐, 내 자신이 불편할까봐, 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까봐, 내 자신의 생존과 생명이 위협을 받을까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왜냐면 다른 누구보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걱정과 근심 대부분은 바로 나 자신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나온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근심과 두려움이 있다면 그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입니까? 자녀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받게 될 고통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존과 관계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근심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미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요한복음 14장 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을 앞에 두고 마음이 뒤숭숭하여 근심하고 두려움에 휩싸인 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의 인격에 반해서 예수님을 따라다니고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두고 근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입니다. 제자들의 근심은 이유 있는 근심이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 때문에 일어난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아울러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는 더 큰 이유는 자신들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자신을 사랑하였더라면 자신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거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 요한복음 14장 28절을 보십시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 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나니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아버지는 나보다 크심이라” 예수님께서는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어서 근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4:1-2)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에 대해서도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은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것인데, 아버지의 집에 가서 너희 제자들을 위한 거처를 준비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고, 갔다가 다시 너희에게로 돌아와서 미리 예비한 거처에서, 즉 아버지의 집에서 자신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너희를 데리러 다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추가로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근심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아버지께서 예수님보다 더 크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들리고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기뻐해야 할 이유는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스런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크신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시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보냄을 받아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보내신 분의 미션 곧 사명을 완수하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여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니까 오히려 기뻐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근심하는 이유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 어느 정도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분석을 했습니다만, 그 사랑이 어느 정도 있기는 했지만 자신에 대한 사랑이 더 컸기 때문에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자신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큰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 그러니까 아버지께로 감에 대해서 슬퍼하고 근심하기보다 기뻐했을 거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뒤덮은 근심과 두려움은 결국 자신에 대한 사랑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더 크기 때문이요, 어떤 신학자가 예리하게 말했듯이, 제자들에게는 소유하는 사랑이 있었을 뿐 베푸는 사랑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니까 소유하려는 사랑이요 집착입니다. 예수님이 곁에 있으면 자신에게 유익이 되고 마음이 편안하고 좋으니까 예수님의 떠남에 대해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였더라면 예수님의 떠나감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명을 완수하고 원래 계셨던 아버지의 영광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제자들은 오히려 기뻐할 일이지 이게 근심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소유하려는 사랑만 있었지, 베푸는 사랑,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손해와 어려움도 감수하려는 진정한 사랑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떠남을 오히려 기뻐했을 것입니다.
한석봉 어머니가 글씨 공부를 위해서 절에서 수학하던 석봉이 돌아왔을 때 “아이구 내 새끼”, 반가워했습니까?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하고 절에 들어갔는데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었다고 생각한 석봉이 10년이 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석봉의 어머니는 자식이 더 큰 뜻을 펼치기 위해서 품에 안는 것을 포기하고 오히려 내보냈지 않았습니까. 불을 끄게 해서 자신은 떡을 썰고 석봉은 글씨를 쓰게 해서 불을 켜서 보니까 글씨가 아직 삐뚤빼뚤 부족함을 깨닫게 하고서 즉시 돌려보냈죠. 자식을 사랑하는 홀어머니가 자식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자식을 위해서 떡을 만들어 팔아서 뒷바라지할 정도인데 오랜만에 집에 찾아온 자식과 함께 있기를 원하는 모정이 있었음에도 더 큰 사랑은 오히려 글쓰기 연마를 위해서 자식을 절로 돌려보낸 것이죠. 이 이야기가 월출산 아래 있는 영암 구림마을에 내려오는 이야기죠. 그래서 석봉이 원래 개성 사람인데 글씨 공부를 위해서 스승의 고향 전남 영암의 한 절에서 수학했다는 사실이 정설입니다. 하여튼 이것이 어머니의 더 큰 사랑입니다. 자식을 조금만 사랑했으면 품에 안으려 했을 테지만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자식의 앞날을 위해서 떠나보내주는 어머니의 큰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로 그점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사랑이란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때로는 자기의 유익에 반하는 것이어도 그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자신이 포기하고 희생하고 손해보는 것입니다. 왜냐 그 사람을 자신보다 더욱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떠남을 앞에 둔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곧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이 있었다면 제자들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기쁨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시기에 지금 제자들의 근심과 두려움은 자기중심성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떠남과 죽으심에 대해서 근심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곁에 두려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해서라기보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라는 예수님의 평가와 진단입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에 대해서 지금 제자들이 기뻐하지 못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유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자기애와 자기중심성에서 제자들이 벗어나지 못한 채 예수님을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확장해서 적용해보면 우리 안에 아가페 사랑이 없어서 기쁨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이 없고 자기애가 가득해서, 자기를 내어주지 못하고 자기중심성으로 가득차서 기쁨이 없고 대신 근심과 두려움뿐이라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아직 알지 못한 제자들의 현주소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에게는 아가페 사랑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무한히 흘러넘쳐서 받게 되는 아가페 사랑, 그리고 아버지를 향한 순종에서 드러나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 그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었습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입니다. 조건과 상황과 환경에 좌우되는 자기중심적인 사랑 다시 말해서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내어주는 사랑, 베푸는 사랑으로서 진정한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절대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예수님 안에 있으니까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인생의 가장 큰 고통 앞에서도 오히려 기뻐하셨습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 예수님도 잠깐 근심에 빠진 적이 있었지만 오히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함을 선택하고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절대적 사랑을 확신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아버지의 주권과 통치를 신뢰하고서 기쁨으로 나아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볼 말씀이지만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의 계속되는 설교가 이어지는데 공교롭게도 예수님께서 ‘나의 사랑’을 말씀하시고서 ‘나의 기쁨’을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 9-11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가페 사랑이 예수님 안에 흘러들어왔고 예수님 안에 있는 아가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들어오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의 사랑, 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 안에 거하는 길은 예수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고, 이 사랑 안에 우리가 거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기쁨, ‘내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되어서 우리 기쁨이 충만하게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해서 사랑,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베푸는 사랑, 자기중심적으로 끌어안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를 내어주는 아가페 사랑이 있으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 앞에서도 예수님이 기뻐하셨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입니다. 또한 우리의 사랑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 사랑과 기쁨은 절대적 사랑과 절대적 기쁨입니다. 환경에 빼앗길 수 있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조건에 좌우되는 사랑이나 기쁨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아가페 사랑이 내 안에 있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 거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누릴 수 있는 절대적 기쁨입니다. 상황에 따라 근심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쁨입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이러한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였더라면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했을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기에는 아직 이르다고 예수님도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언제쯤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보혜사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실 때 그때가 되면 제자들이 이러한 아가페 사랑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지금 근심과 두려움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절대적 기쁨의 비결을 말씀해주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어찌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아직 보혜사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받으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금의 가르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생각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바로 그런 뜻이었구나’고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제자들은 십자가 죽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희생적 아가페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은 절대적 사랑으로서 결코 소유하는 사랑이 아니라 아낌없이 그저 내어주고 베푸는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 사랑이 제자들의 심령에 흘러들어와 그 사랑 안에 거하므로 절대적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도 심지어 기둥 같이 여겨지고 의지했던 예수님이 자신들의 곁을 떠나는 참혹한 상황에서도 근심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기뻐할 수 있는 절대적 기쁨이요 절대적 사랑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보혜사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이들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부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아가페 사랑을 알고 받고 누리는 사람은 절대적 기쁨을 소유하고 누릴 뿐 아니라 또한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이어지는 본문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여기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친다’는 말은 평안을 제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떠나면서 제자들에게 작별하면서 유산으로 남겨주시는 것이 평안인데, 그래서 예수님의 평안 곧 “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도 우리에게 평안을 줍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자기중심성과 자기애를 강화시켜주므로 우리에게 임하는 평안입니다. 자기의 재산이 많아졌거나, 손에 쥐고 있는 돈이 많아지므로, 혹은 지위가 올라가고 명성이 드높아지므로, 또는 비난이 아니라 칭송을 들으므로 자기중심성과 자기애에 보탬이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므로 얻게 되는 평안이 곧 세상이 주는 평안입니다. 이에 반해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남겨주시는 예수님의 평안은 절대적 평안입니다. 우리 자신의 자기를 강화시켜주고 지탱시켜주는 평안이 아니라 절대적 사랑에서 비롯되는 절대적 평안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안에 있게 됨으로 인해서 우리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평화요 그래서 얻게 되는 내적 평안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있었던 예수님의 평화, 예수님의 평안, 내 평안입니다. 이 평안을 제자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인데요, 이 평안도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해주실 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부어주실 때, 제자들이 얻고 누리게 될 평안입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깨닫지 못하지만 후에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깨닫게 될 말씀, 곧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아가페 사랑, 십자가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깨닫는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있게 될 때, 그러니까 절대적 사랑이 우리에게 충만할 때 우리는 근심과 두려움이 아닌, 상황에 좌우되는 기쁨이 아닌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을 얻게 될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요한복음 14장과 이어지는 15장에서 거듭 “나의 평안”, “나의 사랑”, “나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참혹한 고통을 내다보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었던 예수님의 평안, 예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기쁨을 예수님이 언급하시면서 그 평안과 사랑과 기쁨이 우리 자신의 평안, 우리 자신의 사랑, 우리 자신의 기쁨이 되도록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서 우리에게 나의 평안 안에 거하라,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나의 기쁨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것들을 깨닫고 누리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감동 감화, 성령의 충만한 은혜, 보혜사 성령의 임하심이 절실합니다. 보혜사 성령이 오실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게 거하실 때,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십자가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 이때 비로소 우리는 절대적 사랑, 절대적 기쁨, 절대적 평안, 세상이 줄 수 없는 예수님의 참된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서 처음 세 개,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곧 아가페 사랑, 절대적 기쁨, 평화 곧 평안임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 안에서 사랑과 기쁨과 평안을 충만하게 소유하고 누리시는, 주님의 사랑과 기쁨과 절대적 평안이 여러분에게 충만하게 넘치시므로 말미암아 어떠한 형편과 상황과 조건 아래서도 근심이 아니라 기쁨을, 두려움이 아니라 참된 평안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특별히 이번 주 한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는 한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으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기쁨과 예수님의 평안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2021년 3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9)
상호 내주 (요 14장 15-23절)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하나님이 존재하는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방식은 ‘상호 내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는 겁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므로 온전히 하나되시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신다 함은 서로를 향한 온전한 사랑 가운데 하나가 됨을 일컫습니다.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의 띠로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하시고 온전히 하나가 되시는 겁니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 전부터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원 또한 상호 내주로 이루어집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써 삼위일체를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상호 내주를 이루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가 상호 내주의 관계에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요한복음 14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근심에 휩싸인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또한 예수님 자신을 믿을 것을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에 두고 제자들이 근심에 휩싸여 있음을 보시고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갈 곳이 있도록, 가서 머물 수 있는 곳을 마련하러 예수님이 떠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거처는 우리가 죽음 이후에 돌아갈 아버지의 집이요 지금도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는 거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아버지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아버지 안에 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를 힘입어서 우리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할 공간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제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시는지를 설명해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 안에 거하게 되었는데,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려 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내 안에 거하실 수 있는 지를 설명하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을 온전히 하나로 연합시켜주시는 성령을 내 마음 속에 보내어주심으로써 아버지와 아들이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구해서 보혜사 성령을 우리의 마음 속에, 개별 신자의 각각의 마음 속에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본문 1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구해서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성령님을 ‘다른 보혜사’로 말씀하신 이유는 예수님도 보혜사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 ‘대언자’로 번역한 단어와 요한복음에서 ‘보혜사’로 번역한 단어가 같습니다. 예수님을 보혜사로 지칭하고 있습니다. 보혜사라는 말의 뜻은 법정에서 증인이든 대리인이든 변호사든 조언자든 상담자든 법률적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그것은 마치 법정에 서는 것과 같은데요, 그 법정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를 도와서 변호해주시고 어느 때는 보증도 서주시고 대리인 역할을 맡아주시는 대언자 곧 보혜사가 예수님, 의로우신 예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아버지 보좌 우편에 계시면서 우리의 보혜사이시기 때문에 성령님을 ‘또 다른 보혜사’로 지칭하시는 겁니다. ‘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은 이땅에서 우리의 보혜사가 되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께서는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거처를 잡으시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보혜사 성령은 또한 진리의 영이십니다. 성령을 진리의 영이라 말하는 이유는 진리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알게 하시는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심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혜사 성령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시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가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입니다. 이렇게 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우리, 정확하게는 나 자신과 삼위일체 하나님과 상호 내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덕택에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고, 이제 하나님이 보내시는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 속에 오심으로 인해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게 됨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의 상호 내주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는 상호 내주가 곧 구원입니다. 영원 전부터 상호 내주로 삼위일체를 이루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하나님이 내 안에 상호 내주요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20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보혜사 성령을 너희가 각각 마음 속에 받으면 아들과 아버지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알게 될 것이요, 이뿐 아니라 너희와 내가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함을 너희가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제자들이 알게 될 뿐 아니라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령 안에서 하나임을 알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 내주 관계처럼 아들과 개별 신자 각각이 성령 안에서 상호 내주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에게 보내어주심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오심이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처가 마련되는 것입니다. 본문 23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의 말씀은 예수님의 떠남, 십자가의 죽음이 아버지의 집 안에다 우리가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하시려는 것이었다면, 지금 오늘의 말씀은 또 다른 보혜사를 우리의 마음 속에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 죽음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가 거할 수 있었듯이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고 거룩해져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거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자체가 하나님의 위대한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죠. 예수님의 십자 죽음의 효력으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십자가가 능력이요 영광인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의 상호 내주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성령을 보내어주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굳게 믿으면 삶이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에 압도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황이라도 낙심하거나 절망하게 않게 될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의 화염에 사로잡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상호 내주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 안에 아들이 아버지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요 서로 사랑함으로써 상호 내주하심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온전한 사랑을 주고 받음으로써 상호 내주가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의 관건은 서로 사랑하기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사랑함은 아들로서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것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함이 곧 아버지를 사랑함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랑하는 것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로 설명이 됩니다.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와 변화산에서 하늘로부터 들려왔던 아버지의 음성이 “내 사랑하는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아들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면 그 자체로 입증되는 사랑입니다. 반면에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내 사랑하는 아버지”로 자연스레 입증되기보다 아들이 아버지를 공경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일치되게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로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살아감으로써 입증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는 서로 사랑하기와 다르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문제는 상호 내주를 위해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녀로서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녀로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 말씀해주십니다.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곧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1절에서도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때에 예수님이 내 안에 분명하게 계심이 드러나는 것이요, 우리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세상에서 실천할 때에 우리 가운데 계신 예수님이 뚜렷이 증거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인, 예수님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야겠죠.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함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도 함께 설명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만 설명되지 않고 성령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어주심으로 인해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할 거처가 마련되는 것으로도 구원이 설명되는 것입니다.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일방적 통보요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은혜일 뿐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의 우리의 참여라는 점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이요 하나님의 파트너로 존귀하게 여기심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존귀한 하나님의 파트너인 우리는 고아와 같이 버려둠을 당하는 존재가 아니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을 받고 또한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귀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격상됨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길이 열린 것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셔서 자녀 삼아주심입니다. 그래서 본문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께로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에 거처가 조성되어 거주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로 찾아오셔서 우리의 마음 안에 거처 삼으셔서 거주하시는 것입니다. 상호 내주요 서로 사랑함이 곧 우리의 구원입니다.
개별 신자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고 상호 내주를 이룸으로써 성도들 간에 사랑 안에서 하나됨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서로를 향한 상호 내주를 사랑으로써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서로의 마음에 상대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무관심의 정반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부에서 있었던 사랑이 세상을 향한 운동이 되어서 우리의 구원이 되었고, 이제 우리가 그 사랑의 운동에 참여해서 서로를 향해 공간을 내어주고 공간을 차지하고 상호 내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상호 내주와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보이고 세상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우리가 사랑 가운데서 머물러 있고 서로 사랑하기를 실천함으로써 세상을 향한 위대한 선교도 비로소 시작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35절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의 전도와 선교적 발걸음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내주를 이루는 것인데요, 그 첫 걸음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과 주고 받는 사랑이요, 그 사랑 안에서 교회가 하나되는 것입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사랑의 운동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을 세상에 증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남이요 그래서 하나님께는 영광이요,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상호 내주를 위한 사랑의 운동이 우리의 사명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또다시 설명될 필요가 있고 또 다시 설명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확실히 하기 위함도 아니요, 우리의 구원을 우리가 너무 쉽게 의심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너무나 깊고 하나님이 행하신 큰 일이 너무나 놀랍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호 내주가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기가 계속 오가고 있는 우리는 근심할 필요도 없고 두려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사랑의 확신 가운데 든든하게 서 계심으로 인해서 늘 말씀에 순종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는 선교적 전도적 사명을 감당하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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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8)
가장 큰 능력 (요 14장 1-14절)
최근 CBS ‘새롭게 하소서’ 프로그램에 서울 오륜교회 김은호목사님이 출연해서 자신의 목회 여정에 대해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사회자가 물었습니다.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 된 순간이 언제였나요?” 대답합니다. 성도들의 임종 예배 때라고 서슴없이 대답합니다. 임종예배를 위해서 병실 문에 들어서면 가족들이 다 모여 있습니다. 환자들 중 대부분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얼굴빛이 흑갈빛으로 변해 있고, 곧 다가올 죽음에 대한 생각 때문에 둘러선 가족들에게도 슬픔이 가득합니다. 먼저 “예수 사랑하심은” 찬송을 부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합니다. 그리고서 간단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하나님이 이 영혼을 얼마나 사랑하셨고 지금도 사랑하는지, 그래서 예수님이 이 영혼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말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 아니라 죽음에서부터 부활하셨고, 예수를 믿으면 죽음을 이긴 부활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이땅을 떠날 수 있다는 영광스런 복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환자뿐 아니라 가족까지도 얼굴빛이 변합니다.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이 사라지고 이별의 슬픔 또한 사라집니다. 복음을 전하고서 구원의 확신을 점검합니다. “지금 눈을 감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눈을 뜰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의식이 없는 분도 있지만 복음을 듣고서 확신을 가짐을 어떤 이는 말로 혹은 눈빛으로 또 고개 끄덕임으로 표현합니다. 그리고 . “성도님, 잠시 후에 하나님의 나라에서 만나요.”라고 이별하고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전화를 받습니다. “목사님,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어요.” 이 순간이 목회자로서 가장 보람된 때라고 말합니다.
이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고 확신시키고자 성도의 마지막 순간에도 복음을 전하는 목회자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도 교회를 섬기면서 참으로 많은 임종예배를 드렸습니다. 성도들의 임종예배뿐 아니라 성도의 부모님의 임종예배도 여러 차례 드렸습니다. 연락을 받고 갔지만 미처 신앙을 갖지 못한 채 병실에 누워계신 분을 위한 임종예배도 있었습니다. 아까 목사님이 말씀하신 방식으로 저 역시 복음을 전했는데, 임종이 가까운 분들 중에서 한 사람도 복음의 말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꼭 임종의 순간이 아니더라도 죽음이 가까이 온 분들은 병상에서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성도의 임종예배 때는 주로 누가복음 23장 4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이미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교회의 일원으로 예배를 드리며 섬기신 분들의 임종 순간에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된 임종을 맞이하도록 도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 받고 성찬에 참여하고 복음의 말씀을 들으면서 예수님과의 연합을 공고히 해가는 게 성도이니까 임종의 순간에도 예수님과 온전히 합해서 온전히 일치해서 죽음을 맞이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죽음도 예수님처럼 맞이하고 죽자는 것입니다. 온전히 아버지 품에, 아버지 손에 맡기시고 십자가에서 숨을 멎으신 예수님처럼 성도의 죽음은 귀한 것입니다.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님의 것이고, 찬송가 가사처럼 “숨질 때에까지 내 할 말씀은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찬송가 315장 ‘내 주 되신 주를 참 사랑하고’ 3절)라는 고백을 통해서 우리가 주님과 온전히 합하고 하나가 되는 것을 도전하려는 것입니다.
구원이라는 것, 영생을 얻는 것, 내세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확신은 예수님과의 연합, 예수님과의 일치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과 하나됨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님은 신랑 우리는 예수님의 신부, 그렇게 부부의 하나됨으로 예수님과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합해서 온전히 하나됨에 우리의 구원이 달려 있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과 말씀과 같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오직 예수로만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본문 9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과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즉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거하시니까 우리가 어찌하든지 예수님과 합해서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연합으로 끌어올려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4장은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예수님의 고별 강화, 혹은 고별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아마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식사를 하신 후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사이에 제자들에게 전해진 예수님의 설교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한 기도를 마친 후에 제자 유다의 배신으로 예수님께서 성전 당국자가 보낸 성전 경비병들에게 체포가 됩니다.
고별 강화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핵심적으로 가르치시고자 하는 말씀은 스승의 떠남에 임박해서 혼란에 빠지고 동요하는 제자들에게 안심을 시키고 예수님의 떠남으로 인해서 그들이 얻게 될 더 큰 유익, 보혜사 성령을 보내실 것을 말씀하시고 성령이 오셔서 하실 일들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혼란스럽고 흔들리고 있습니다.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 중 한 명 가롯 유다는 이미 뛰쳐나갔고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그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자신을 부인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자신의 임박한 죽음 앞에서 자신조차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신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이 괴롭다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겪으실 하나님의 버림과 하나님의 진노 받을 것을 내다보시며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요 12:27)라고 토로하신 것입니다. 스승이 동요하니 제자들 역시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마지막 식사 자리라고 예감된 자리에서 배신할 제자가 뛰쳐나가고 수석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고 예고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의 마음도 뒤숭숭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에 사로잡혀 요동하는 제자들에게 근심하지 말 것을 말씀합니다. 뒤숭숭하고 불안하고 스승의 임박한 죽음 예고가 도대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믿고 또 예수님을 믿으라고 권면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이고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믿어야 근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걱정 근심에 사로잡혀 지낼 것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지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버리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버리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참되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길뿐입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 믿어서 안심하자는 것입니다. 근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임종의 때에 마지막 호흡을 아버지께 온전히 의탁하셨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과 온전히 하나되어서 아버지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곧 아버지의 집에서 거할 곳을 마련하는 것임을 이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문 2-3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상황에 맞게 상황에 따라 어느 때는 유치원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쉽게, 그리고 전달하고자 하는 진리가 생생하게 와닿도록 비유로써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떠남, 예수님의 임박한 죽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이것으로 인해서 제자들의 근심이 가중되고 있는데,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마치 아버지의 집에 거처를 마련하기 위한 떠남이요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거처’는 요한복음에서 자주 사용되는 동사 ‘거하다’, 가령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 등에서 사용된 ‘거하다’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혹은 아버지의 마음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십자가를 짊어지시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떠남과 죽음이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인데 아버지의 집에 너희들을 위한 거할 곳을 마련하고 예비하면 다시 너희에게로 와서 너희를 그 거처로 영접하여 너희도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효력과 십자가 공로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영원한 아버지의 집,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그리고 아버지의 마음 안에 우리가 거하게 해주시겠다는 구원의 확신이요 내세에 대한 확신을 비유로써 제자들에게 쉽게 안심시키려고 말씀해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의 떠남과 죽음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감이었습니다. 주님이 떠나시려는 길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길이요 아버지께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의 죽음의 길, 예수님이 떠나서 가시려는 길은 목적지가 아버지 품입니다. 아버지 품속에서 독생하지 예수님께서 아버지 품속으로 되돌아가시려는 길입니다. 그 목적지를 알지 못하니 목적지에 이르는 길을 알지 못함은 당연하겠죠. 제자 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는 까닭입니다. 방금 읽은 6절의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은 도마의 의문에 대한 대답이었습니다. 날카로운 의심을 품기로 유명한 도마가 예수님께서 물었던 것입니다. 5절입니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6절입니다. 그 길,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해 나있는 길, 하나님에게로 난 길, 하나님 품속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나있는 그 길은 바로 예수 자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소유하면 바로 아버지 품속으로 직행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길을 알기 위한 과정입니다. 우리는 길을 알고 싶어하고 도를 알고 싶어하고 삶의 방법을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다 길(Way)입니다만,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버지께로 나있는 길, 그 길 자체가 되시는 분이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유일한 진리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계시해주시는 진리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서 온전히 하나이시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온전히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요 길 자체가 되시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계신 거룩한 삼위일체이십니다. 우리의 신앙개념의 확립이나 신앙사상의 발전이나 믿음의 견고한 터전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생각하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도 생각해야 합니다.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을 성령으로 확립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구별되지만 온전히 사랑의 연합 가운데서 하나이심은 성령 안에서입니다. 성령 안에서 아버지시고 그래서 또한 아들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이 중요한 이유는 여기에 우리의 구원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의 일치와 연합이 구원이요 그렇다고 해서 구별과 구분이 말소되지 않은 채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는 게 우리의 구원입니다. 아들이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지만 온전히 그분께 복종하고 순종함으로써 구별됩니다. 자기를 아들로서 자기를 비움으로써 아버지와 구별됩니다. 아버지에게 복종함으로써 아들로서 구별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피조물로 창조주와 구별되는 것이요, 예수님과 연합해서 아버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복종함으로 인해서 하나님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구별됨과 동시에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되어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부어짐을 받고 그 사랑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일치와 구별에 결국 성령이라는 인격이 계시고,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구별되지만 일치되므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삼위일체론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결국 같은 내용이라고 말하는 신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삼위일체를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가 원래부터 계시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활동인 경륜적 삼위일체론이 결국 같은 말이라는 이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가 결국 우리 구원을 위한 경륜적 삼위일체입니다.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가 같다’는 신학명제를 제 자신도 이해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믿고 또한 자신을 믿으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에서 우리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 되어야 할지 예수님이 도전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우리의 믿음은 예수님과 아버지가 온전히 하나임을 믿는 믿음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아들을 믿는 것이요 그래서 아버지를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에 진정한 능력이 있습니다.
어떤 능력입니까?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요 절대자요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이르는 유일한 능력입니다. 믿음의 능력이요 오직 예수 이름의 능력입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하는 능력입니다. 기도의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13-14절에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예수님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음이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능력입니다.
어제 우연히 차를 타고 오다가 극동방송을 들었는데 김장환목사님이 진행하는 ‘만나고 싶은 사람 듣고 싶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이었는데요, 게스트로 개원의협회장이고 산부인과 의사회장이신 김동석의사 부부였습니다. 이분이 이제 곧 있을 의사협회장에 출마하시려고 하는 분이라는 소개였습니다. 이분의 아내가 사랑의교회 이혜옥집사인데요, 이분이 1990년대 초부터 사랑의교회에 출석하시고 구역모임 다락방에도 참여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지냈는데, 그런데 늘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의사 부인이요 살기 좋은 강남에, 자녀들도 잘 자라주고 있어서 참 행복한 여자라고들 말했지만, 마음 한구석에 늘 허전함과 늘 불안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이 뭘까 알려고 생각도 하고 책도 읽어보고 했는데 찾지 못했습니다. 어느 순간 2007년에 ‘아 내 안에 예수님이 없다’ ‘내 안에 진정한 사랑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서 참된 평안이 찾아왔고 모든 관계들이 달라졌다고 간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의 가장 큰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이 말씀의 능력대로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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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7)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 (요 13장 1-13절)
지난 주일 설교에서 ‘십자가가 영광’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때는 십자가에 들리는 순간입니다. 십자가 들림 자체가, 십자가 죽음 자체가 인자가 영광을 얻으시는 때입니다. 보통 십자가는 수치와 모욕과 치욕과 극심한 고통의 형벌이어서 명예나 인정이나 영광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이나 멉니다.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말은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결코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사람에게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사람이시고 참된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십자가가 무한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계시되었기 때문에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적 성품인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알려질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이 영광스럽게 빛날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므로 아들이 또한 영광스럽게 된 사건입니다. 아들이 십자가를 짊어지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였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화롭게 되셨고 아들 또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사람의 영광’의 관점에서 보면 수치와 치욕과 극심한 고통뿐이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의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므로 아들이 영예롭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십자가가 영광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어떠한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까? 우리가 잘 되고 뜻한 바가 이루어지고 형통해져서 그리고 내가 상을 받았기 때문에 상 받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함으로써 내가 얻은 영예가 하나님에게 더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내가 받은 사람의 영광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에 있습니다. 비록 힘들고 감당하기 버겁고 무거워서 내려놓고 싶은 짐과 같은 험한 십자가를 우리가 붙들고 짊어지고 예수님을 따라갈 때 자기 십자가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십자가가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감동 감화와 능력이 없이 우리가 어찌 십자가를 짊어질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 가령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라고 말하며 가치관의 변화가 나타날 때, 혹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누군가가 내게 잘못한 것을 용서해줄 때, 내가 희생함으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도모할 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이루는 길이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갈 때, 이렇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갈 때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이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법칙은 영광 얻으려면 십자가를 짊어지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불명예요 수치요 인정받지 못한 죽음이지 결코 영광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한다, 내가 양보한다, 내가 용서한다, 내가 죽는다’, 이것은 결코 사람에게 영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하나님께는 영광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류 역사를 거스르는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인류 역사를 거스르는 게 십자가이면서 동시에 십자가는 인류 역사 현상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정점입니다. 인간 역사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강화시키기 위해서라면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폭력도 불사하는 죄악의 역사입니다. 자신이 희생하고 양보하기보다 다른 사람의 희생과 양보를 강요하는 역사입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박히기 보다 다른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역사에서는 늘 나타났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형성한 역사를 집약해주는 지점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고 외침으로써 십자가는 인류 역사 전체를 요약했습니다.
반면에 십자가는 인류 역사를 거슬러 나타난 인류 역사의 전환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류 역사에서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극명한 나타남이었습니다.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십자가에서 가장 크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써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구현해내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상 어떤 사람에게도 보여진 적이 없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가슴속에 반향을 일으켰던 전무후무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님에게 충만하게 흘러넘치지 않았던들 예수님을 십자가를 질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있었던 것처럼 자신에게 충만하게 흘러 넘쳐서 십자가를 지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 시대에 십자가는 전형적인 노예 형벌로 알려졌고 시행되었습니다. 자유민의 몇배에 달하는 제국의 노예들이 당시 로마경제체제를 이끌고 가는 주역이었고 소수의 자유민이 다수의 노예들을 통제하는 수단 중의 하나가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의 공포와 두려움이 노예들을 “꼼짝 마!” 했던 것입니다. 수시로 대규모로 노예들을 십자가에 달아 무자비하게 죽임으로써 노예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 통제하고 노예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때문에 예수님이 단순히 인간이 되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빌립보서 2장 7-8절에서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씀하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이 다른 곳이 아닌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에 단순히 사람이 되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은 종의 죽음, 노예의 죽음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받아들여지게 된 것입니다.
서정주 시인의 싯구, “애비는 종이었다”처럼 예수님은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지극히 낮춰 말구유에서 태어나심으로써 사람이 되셨던 것처럼 죽음 또한 십자가에서 죽어 노예 형벌을 받고 종이 되셨던 것입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노예로서의 불명예로운 죽음이요 수치스런 죽음이요, 인간의 죄악된 폭력이 집약된 역사의 정점이요, 역사 현상이라 불리는 모든 인간의 죄악이 집약되어 나타난 역사가 한 점에 모아짐이요, 이와 동시에 역사에서 전혀 일어난 적이 없고 경험해본 적이 없는 자기 비움과 낮아짐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극명한 표출입니다. 십자가가 비록 사람의 영광은 아니어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이게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십자가의 사랑에 감격하여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7절)고 말씀하신 까닭입니다. 십자가의 의미, 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지, 왜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으로 죽어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지금은 알지 못할지라도 이 후에는 깨닫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는 여전히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래서 우리가 들어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가 살아내야 할 신앙인의 사랑의 실천입니다. 험한 십자고 붙들고 짊어지고 가는 게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필연성, 십자가의 의미, 십자가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체적으로 시연해주십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는다는 게 무엇인지 하나의 행동을 선택해서 제자들에게 시연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발씻음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이 선택이 참으로 지혜롭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의 표출이요 종이 받은 형벌이요 인류 역사에서 언제든 흔히 나타났던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을 선택한 데서 예수님의 지혜를 엿보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은 당시 노예가 하는 일이었고 유대 문헌에 보면 유대인으로서 노예인 자에게는 주인의 발을 씻기게 해서는 안된다는 랍비의 가르침이 있을 정도로 전형적인 노예의 일입니다. 특별히 이방 노예의 일입니다. 십자가가 누구라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충격인 것처럼 주와 선생이신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일은 충격적 사건입니다.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던 일이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충격이요 감동이었고 십자가의 의미를 전달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고 이를 통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감격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성도들을 데리고 인도네시아 발리에 가서 단기선교를 진행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인구의 대다수가 회교도이지만 발리섬만은 인도의 영향을 받아 대부분이 힌두교 신자들입니다.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아이들을 한 400명 모았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 음악이 주가되는 기독교 드라마를 보여줬습니다. 25분간 굉장히 감동적인 음악드라마를 보여주었는데 그 드라마에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는 장면을 연출한 장면도 있었습니다. 힌두교 부모 밑에 자란 6학년 아이들, 13세 정도 된 아이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 장면을 보면서 우는 아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 음악극을 보여주고서 이 아이들 400명에게 단기선교대원들이 세족식을 하는데 물론 언어가 하나도 통하지 않았지만 발을 씻어줬습니다. 세 시간 동안 400명을 한 사람씩 다 씻어줬는데 발을 씻어줄 때 아이들이 울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말이 아니라 극과 극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을 전했던 것입니다. 힌두교에서 가장 저층민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은 발이 다 부르터 있는데, 그 발, 가장 천한 발을 씻어주는 것, 힌두교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이 발리에서 하나님 사랑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었던 것입니다. 발을 씻어주는 행동을 통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아이들에게 실제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김회권목사의 요한복음 설교 중에서 인용)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식사 전에, 그러니까 다음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전날에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구체적인 행동의 시연을 통해서 십자가가 무엇인지, 지금은 다 이해하기 어려운 십자가의 의미를 제자들의 기억에 분명하게 각인시켜주었던 것입니다. 십자가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낯선 충격으로 다가갈 것이 분명한 것처럼 제자들의 발씻음도 제자들에게 낯선 충격이요 일어나선 안될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자신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예수님께 “주여 주께서 내발을 씻으시나이까”(6절)고 격렬하게 저항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과 상관이 없게 된다는 말씀은 베드로 네가 나한테 받을 분깃이 없다, 받을 유산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므로 얻게 되는 유익, 그가 얻을 분깃, 그가 상속받을 하나님나라와 상관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지 아니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시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생생하게 가르쳐주심으로써 십자가의 유익, 십자가의 공로, 십자가의 구원을 베드로에게 주시려는 것인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므로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성격이 괄괄하고 화끈한 베드로가 발만 씻겨주실 것이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드로의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미 목욕을 한 자들이니까, 그러니까 이미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예수님의 제자들이므로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고 발을 씻을 필요는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소위 세속식의 두 번째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성격과 의미를 생생하게 예시해준 사건이 발씻음이요 두 번째 의미는 목욕한 자가 돌아다니다보면 발이 더러워지니까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어도 발을 씻을 필요가 생기듯이, 우리가 죄 용서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새사람이 되었어도 여전히 우리의 죄악된 육체 안에서 역사하는 옛사람이 저지른 죄악이 늘 있기 마련이어서 그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 발을 씻김 받음으로써 죄를 용서함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용서함 받아야 할 것을 가리킵니다. 요한일서 1장 8-9절 말씀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것이 우리의 발이 계속적으로 씻겨져야 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 세 번째 이유는 제자들에게 겸손한 섬김의 실천을 교훈하고자 함입니다. 오늘 본문 13-1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이유는 본보기로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가장 천한 노예가 하는 일을 십자가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 실제로 행하신 이유는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요, 우리가 짊어져야 할 자기 십자가의 구체적 예시오, 이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말씀처럼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말씀을 실천해보임으로써 제자들 역시 서로에게 종노릇하라는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종이 되셔서 종의 형벌인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자기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데,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은 구체적은 서로에게 종노릇하는 것입니다. 이 종노릇은 일반인에게 한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일입니다. 전대미문의 일입니다. 주와 선생이 혹은 주인이 종노릇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직 예수님뿐이었고 이후에는 제자들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죄악된 인간 역사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아는 제자들만이 그 사랑으로써 행할 수 있는 사랑의 종노릇인 것입니다.
사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이 되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법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차라리 자신이 희생하고 무거운 짐도 짊어지려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종노릇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종노릇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랑의 종노릇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는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할 수도 없는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주는 종노릇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신는 것입니다.
두산그룹 회장을 역임하고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을 맡고 있는 박용만회장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입니다. 그분이 최근 에세이집을 내고서 한 신문과 인터뷰한 내용을 보니까 그는 국제적 구호봉사단체 ‘몰타기사단’ 한국 회장을 맡아 6년 넘게 노인급식소에서 직접 섬김을 실천하고, 그들을 위한 빵공장과 양로원 등 4곳에서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매주 월·목요일 오전시간은 아마추어 요리사로 무료급식소에서 봉사합니다. 이러한 섬김을 실천하게 된 계기는 2014년 8월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나가라. 나가서 그들을 도우라”는 메시지를 듣고서입니다. “직접 몸으로 뛰는 나눔활동을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라는 빌문에 “담장 너머로 먹을 것을 던지는 행위가 되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서울역 앞에서 알코올중독자들을 위한 도시락을 만들면서 제가 몰랐던 세계를 접했죠. 누군가를 돕는 행위가 굉장한 행복감을 준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그리고 어떤 깨달음을 얻으면서 점점 활동 범위를 넓히게 됐어요.” 이분은 강조합니다. “조금 더 안락한 사람들이 나누고 돕는 공동체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경향신문 인터뷰 중)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여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께 굴복하고 그분께 경배를 올려드리는 게 아닙니까?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무력하게 처참하게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 앞에 왜 꿇어 엎드려 경배와 찬양을 드립니까? 그분께 우리가 설복당하고 굴복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는 기꺼이 우리 마음의 왕좌를 내어드리며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게 아닙니까? 세상의 많은 권력자와 통치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이 설령 총칼로 나를 굴복시켜 그 앞에서 우리로 굽신거리게 할지라도 마음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그들에게 기꺼이 복종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만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어린양께 기꺼이 복종하여 그분 앞에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을 감격적으로 보았기 때문이고 그 사랑에 굴복당해서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헌신과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밀턴의 실낙원에서 마귀는 가장 자주 “나는 굴복할 수 없다! 나는 양보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마귀의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 굴복하고 예수님께 온전히 우리 자신을 내어드립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시고 기꺼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나의 발을 씻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서로 발을 씻겨주어라! 서로에게 종이 되어라! 사랑의 종노릇을 실천하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세상을 향한 섬김과 사랑의 실천이 필요한 요즈음입니다. 비록 십자가의 깊은 진리와 의미를 우리는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 우리의 신앙적 과제가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지음 받은 우리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더 이상 나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흘러넘치므로 그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갈 때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영광 받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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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송 - 이현상 지휘자
▶설교 -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찬송 - 44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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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2월28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6)
사람의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 (요 12장 23-28;37-43절)
최근에 홍정욱씨가 <50>이라는 제목의 에세이집을 냈습니다. 작년에 만 50세가 되어서 50개의 에피소드로 에세이집을 출판했습니다. 이분이 오래 전에 <7막 7장>이라는 책을 내고 유명해졌고,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사업가로 그리고 국회의원으로 소위 촉망받는 젊은피였고, 지금도 선거 때마다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호출되기도 합니다만, 아직은 정치를 다시 할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이분은 인생의 목적이 하늘의 소명을 찾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지금도 소명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합니다. “내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주어진 소명을 다함으로써 세상을 떠날 때 ‘내게 주어진 이 귀한 인생, 정말 잘 살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위대한 비밀은 내 인생에 부여된 독특하고 은밀한 비전을 읽어내는 것, 존재의 목적을 발견하고 성취하는 극소수가 되는 것이다”라고 또한 말합니다. 이분이 보기에 하나님의 소명을 발견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고, 극소수에 불과한데, 자신은 하나님의 소명 곧 존재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은 분명합니다. 일반적인 소명은 누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지음 받고 이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 하나님이 나의 삶을 통해서 영광을 얻으시는 삶, 이것이 일반적인 소명입니다. 반면에 홍정욱씨가 생각하는 소명은 본인에게 특수한 소명, 그러니까 일반적인 소명이 자신에게 특화된 개별적이고 특수한 소명을 말한 듯합니다. 그것을 지금도 찾고 있는 중이고 일단 찾게 되었다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는 삶을 살려고 발버둥치고 있다는 느낌을 책을 읽으며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나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삶이요 하나님이 나로 말미암아 영광스럽게 됨을 일컫습니다. 이러한 소명을 의식하고 소명에 따라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사람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막는 장애물이 사람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지 못하고 대개는 사람의 영광을 추구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영광을 얻고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방향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일까요?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는 걸까요?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 영광을 보시는 걸까요? 어디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까요?
요한복음에서 ‘영광’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을 해석하는데 중요합니다. ‘영광’이 가장 처음 나오는 데가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신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어서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셨습니다. 말씀의 육화, 혹은 말씀의 화육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 가운데서 걸어다니고 눈에 띄게 보여지고 손으로 만져질 수 있는 인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에게는 영광이 있었는데, 아버지의 독생자로서 아들만이 가진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을 고스란히 그대로 반영하고 반사하고 드러낸 아들의 영광이었습니다.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영광, 그리고 아들이 그대로 드러낸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여기서 ‘은혜와 진리’는 보통 생각하듯이 사랑과 공의, 은혜는 사랑이고 진리는 정의, 은혜와 진리가 함께 가야 한다, 사랑과 정의를 함께 그 인격 안에 지니고 계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이 되셨고 그 인간 육신 안에 감쳐진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는데 그 영광이 곧 ‘은혜와 진리’라는 말씀인데, ‘은혜와 진리’는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구약 출애굽기에 보면 언약을 체결한 직후에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습니다. 모세를 제외하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멸하시겠다고 모세에게 통고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화가 나셨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중재의 기도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졌고, 하나님께서 진멸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얻어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송아지 사건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전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시고 그들과 동행하시는 문제에 대해서 모세가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거듭 중재의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청합니다. 보다 확실한 하나님의 응답을 구하면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를 간절히 원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는 기도의 응답이 출애굽기 34장 5-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하나님께서 영광을 보여달라는 모세에게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는 못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의 영광을 모세 앞으로 지나가게 할 때에 하나님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바위 틈에 있는 모세를 덮었다가 지나가면 덮었던 손을 거두어서 하나님의 등을 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기보다 들려주셨습니다. 그 들려주신 하나님의 영광의 내용이 바로 방금 전에 읽은 출애굽기 34장 5-6절입니다. 한 마디로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가시적인 영광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속성의 영광스러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은 빛나는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빛나는 성품이란 곧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으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인자와 진실’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멧’입니다. 헤세드는 언약을 통해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고, 에멧은 언약을 지키고 언약에 충성하고 언약에 신실함을 뜻합니다. ‘인자와 진실’ 은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뜻합니다. ‘인자와 진실’이 요한복음에서 ‘은혜와 진리’로 표현된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곧 독생자의 영광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영광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님에게 고스란히 그대로 드러난 성품으로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속성의 빛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의 광채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영광스럽고 빛나게 하는 것은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이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빛나는 영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2장에 ‘영광’이라는 단어가 여러차례 나옵니다. 12장 23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에 들림 곧 십자가에 죽으심을 가리킵니다. 요한복음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가 십자가 들림 자체를 영광 받으시는 사건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십자가 죽음 이후에 부활이나 승천으로 영광을 받는 것으로만 보지 않고, 이것이 흔히 다른 신약성경에서 부각되는 점인데 반해서 요한복음에서는 십자가 들림 자체, 십자가 죽음 자체가 곧 예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때요 하나님이 영광을 보시는 때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가 곧 영광이라는 것인데요, 십자가에서 곧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하나님이 영광을 얻으시는 사건이요, 예수님 자신에게도 십자가 들림 자체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 수치와 모욕과 치욕과 고통스러운 죽음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는 때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순간이요 주의 영광이 계시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사건임을 요한복음은 강조합니다.
보통 십자가라 함은 너무 저주스럽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이고 고통스런 형벌이라 사람들의 대화거리로 올리는 일도 피할 정도로 혐오스런 형벌이었던 당시 시대의 현실에 비추면 십자가가 영광이라는 강조는 지극히 역설적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땅에 자신을 보내셨다는 확실한 의식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땅에 자신을 파송하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그 목적을 이룰 때가 가까웠음을 아셨습니다. 즉 자신의 죽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게 될 때가 이르렀음을 아셨던 것입니다. 십자가 죽음이 가까워오자 자신이 바로 이를 위하여 온 것이고 바로 그때가 이르렀음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가 예수님 자신이 영광을 얻을 때요 동시에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할 때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12장 2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이때 곧 십자가의 죽음을 위해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아버지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예수님의 생애를 통해서 영광스럽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곧 들이닥칠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실 것임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왜 영광입니까? 십자가 들림 자체가 왜 예수님이 영광을 얻을 때입니까? 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는 사건입니까? 오히려 십자가는 수치요 모욕이요 고통이요 치욕이요 입에 담기도 어려운 형벌인데 왜 십자가가 영광입니까?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빛나는 성품, 하나님의 속성의 광채가 우리의 마음에 빛처럼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빛나는 성품 곧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위대하신 사랑을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이 곧 십자가입니다.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향해서 신실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사랑이 곧 십자가이므로 우리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이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 중에서 두 구절을 뽑아서 인용합니다. 인용하고서 이 말씀 두 개가 선지자 이사야가 주의 영광을 보고 말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두 구절은 바로 이사야 53장, 너무나 유명한 고난받는 종에 관한 구절 하나와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 받을 때 보게 된 하나님의 영광스런 보좌에서 이사야가 듣게 된 하나님의 음성에 관한 구절입니다. 우선 본문 요한복음 12장 38절을 보십시오.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우리가 고난주간 때 많이 읽는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에 대한 기록 중에서 53장 1절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은 고난받는 예수님, 고난받고 십자가에서 고통가운데 죽으시는 예수님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리고서 또 이사야 말씀을 인용하는데 이번에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소명환상 대목에서 여호와의 영광을 이사야가 보고서 죽게 되었다고 생각한 그를 하나님께서 제단 숯불로 입술을 정결케하시고서 그에게 사명을 주시는 대목입니다. 본문 39-4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전할 메시지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강팍하게 말들고 오히려 사람의 눈을 감게 하고 그 결과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가 되지 못하고 심판의 말씀이 될 거라는 사명입니다. 이 두 구절을 인용하고서 요한은 본문 41절에서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이사야 6장에서 이사야가 본 여호와의 보좌 환상이 곧 영광스런 주님을 본 것이요 그래서 주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고난받아 십자가 들리는 고난받는 종과 관련해서 주의 영광을 본 것이라고 해석한데 요한의 해석의 심오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자체에도 보면 고난받는 종이 들리는 사건을 높이 받들어 들려서 지극히 존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을 예수님도 그리고 요한도 알았던 것입니다.(사 52:13) 십자가 들림이 곧 예수님이 영광을 얻는 사건이요, 십자가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가장 빛나고 영광스런 성품이 십자가에서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곧 영광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가장 찬란하고 빛나는 사랑이라는 속성이 계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자기를 내어주시고 희생하신, 친구를 얻기 위하여, 친구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준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음받은 본래의 소명과 목적을 이루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시고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고 영광을 보시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때,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될 때,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는 곳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얻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알려지고 드러나는 것만이 하나님의 가장 빛나는 영광스러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크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십자가가 인간적으로는 수치요 모욕이요 희생이요 포기요 비움이요 양보요 죽음이요 고통이요 치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가 영광인 것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수치요 모욕이요 희생이요 포기요 비움이요 양보요 죽음이요 고통이요 치욕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사람들은, 그리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조차 참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 오히려 사람의 영광을 구합니다.
영광이라 함은 보통 명예, 인정, 칭송, 찬란하게 빛남을 뜻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조차 자신의 명예, 타인에게서 인정받음, 칭송을 자신의 영광 삼아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십자가가 영광임을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사랑이 가장 분명하고 크게 드러난 십자가를 짊어지려고 하기보다,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려고 하기보다 소위 사람의 영광을 구합니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43절에서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까닭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여러분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에서 십자가가 살아 있습니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바로 여러분 자신의 십자가가 있습니까?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알고 받고 누리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받아줄 수 없는 사람을 받아주는 십자가,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십자가, 내가 대신 무거운 짐을 짊어짐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편안함과 안식을 주는 십자가, 내가 대신 희생함으로써 몸담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복지를 가져다주는 십자가, 내가 포기하고 내려놓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편케 하는 십자가, 내가 비록 힘들더라도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의 짐을 짊어짐으로써 그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치유케 하는 십자가, 이러한 십자가가 곧 하나님께 영광이요 예수님이 얻으시는 영광이요 동시에 우리가 누릴 영광입니다. 십자가의 영광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고 주님을 영화롭게 하시는 여러분의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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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2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5)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요 12장 1-11절)
10년 전에 소천하신 여류 소설가 고 박완서씨의 따님이 어머니의 글 중에서 골라서 책으로 엮었습니다. 거기에 실린 짧은 글의 제목이 ‘사랑의 입김’이라는 수필이 있습니다. 할머니로서 손자를 곁에 두고 보면서 아이가 다치거나 곤충에게 물렸을 때 물린 자리에 약을 발라주면서 ‘호호, 호호’하면서 상처에 입김을 불어준 일을 매개로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어릴 적에도 마찬가지여서 어머니와 할머니의 입김을 자주 받았던 것입니다. 넘어지거나 다쳤을 때 빨간 소독약도 귀했던 시절이라 약 제대로 못 발라봤지만, 그때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저 입김을 ‘호오, 호오’ 불어주셨습니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다쳤을 때만이 아니라 감자나 고구마나 밤을 화롯불에 꺼내서 껍질을 벗겨주시면서도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식혀주셨습니다. 국이나 찌개도 그렇게 식혀주셔서 먹기에 적당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뿐 아니라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은 온 집 안에 서려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냐면, 학교 갔다가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니가 계시지 않을 때에 문을 들어서마자 직감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집안 전체가 썰렁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는 직감이요 마음의 느낌이지만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학교에서 급식을 줍니다만 예전에는 학교에 도시락을 싸서 다녔죠. 학교에서 먹는 도시락에도 음식 곳곳에 어머니의 입김이 서려 있었습니다.
자신의 어린시절 이야기를 들려준 후에 작가는 말합니다: “입김이란 곧 살아 있는 표시인 숨결이고, 사랑이 아닐까?”
이 글을 읽으면서 마음 한켠이 따뜻해옴을 느꼈습니다. 어머니의 입김을 통해 경험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아울러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호흡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을 완성하셨는데, 이는 하나님의 입김이요 하나님의 숨결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입김이야말로 우리에게 생명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아닐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흔히 말합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에 받은 사랑,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의 추억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게 더 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삶 가운데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는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왜 예수님을 이처럼 사랑할 수 있었냐면 예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9절 말씀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특별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체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집에서 잔치식사 중이신 예수님의 발에 값비싼 향유를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던 것입니다. 이 잔치 자리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마리아의 오빠였던 나사로를 살리셨던 예수님의 기적 이후에 배설된 잔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로서 나중에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되는 가롯 유다가 이 여인의 행동을 비난합니다. 삼백 데나리온, 당시 하루 일당이 한 데나리온이니까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되는 큰 가격이 나가는 향유를 허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팔면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이 구제할 수 있을텐데, 왜 쓸데없이 낭비하느냐는 비난이었습니다. 가롯 유다의 비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오히려 여인을 두둔하십니다. 본문 7-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님은 더욱 가난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자들을 편애하실 정도로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가난한 자, 어려움에 처한 자, 육신이 연약한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어야 마땅하겠죠. 그런데 예수님 사랑에 기반하지 않은 구제나 이웃사랑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다른 사람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계속 동력을 공급받을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중간에서 경제적 이득을 위해 착복하거나 그 구제와 도움을 통해서 자신의 권한과 권력을 강화하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리아를 두둔하시고 옳다 인정하심은 자신에게 좋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주님을 향한 사랑이 우선되어야 이웃사랑도 가능하고 가난한 자를 돌아보는 일도 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이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신 것은 이제 곧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의 장례를 가리키는 상징을 읽어내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리아가 어떻게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았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만, 다소 직관적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형국을 보니까 통찰한 것일 수도 있고요, 아니면 평소 예수님의 말씀을 그 발 앞에서 즐겨 들었던 마리아이다보니 예수님께서 예고한 죽음을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캐치했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여성의 직관으로서, 사랑하는 예수님이 떠나실 것 같은 직감에 이끌려서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여튼 예수님께서는 이제 한 주 후에 자신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아셨기 때문에 이 여인의 행위가 자신의 장례를 위한 것임을 인정하시고 마리아의 행위를 승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리아의 이러한 행위는 이성에 따른 것이든 아니면 직감과 느낌에 따른 것이든, 혹은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미리 알았든 아니면 몰랐든, 그런 것들과 관계없이 마리아의 전심을 담은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표현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기쁘게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 사랑 없는 예배, 예수님 사랑 없는 기도, 예수님 사랑 없는 찬양, 예수님 사랑 없는 구제, 예수님 사랑 없는 전도, 예수님 사랑 없는 성실, 예수님 사랑 없는 종교생활이나 일상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장, 너무나 유명한 사랑장에서 사도 바울이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한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 사랑보다 이웃 사랑을 이야기한 것입니다만 사랑은 나뉘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이 따로 있고 이웃 사랑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고 그 사랑의 역동적인 운동이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랑에 우리가 참여할 뿐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이러한 사랑의 속성에 대해서 누가 말했느냐면 어거스틴입니다. 고백록과 신의 도성으로 너무나 유명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근원하고 하나님께 원천을 두지 않은 인간의 사랑은 결코 사랑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원천을 두지 않는 인간적 사랑은 두 가지로 왜곡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 자신의 목적과 이익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참된 사랑이라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용하게 됩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 사랑하는 사람을 우상으로 만들 수 있고, 우리 자신을 그 사람에게 완전히 묶어 두게 되며, 우리 자신의 모든 기대와 환상을 다른 사람에게 부여하게 됩니다. 이 두가지는 사랑의 왜곡이요 파괴적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다른 사람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을 우상으로 만드는 우를 떨쳐버리게 합니다. 참된 사랑은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깨달을 때 다른 사람을 왜곡됨 없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원천으로 하는 사랑을 강조하면서 덧붙여 말합니다: “사랑은 부분으로 나뉠 수 없습니다. 당신이 사랑할 것을 선택하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저절로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뿐이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사랑뿐이므로 무엇이든 사랑하기로 선택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 사랑이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세계를 향한 사랑이든, 이웃 사랑이든, 교회 사랑이든, 가족 사랑이든, 진정한 사랑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읽는 아우구스티누스>, 로완 윌리엄스 저 참고)
그래서 유다는 틀렸고 마리아가 옳았습니다! 마리아의 주님을 향한 사랑은 언제라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사랑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지만, 유다에게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물론 있었겠지만 그 마음이 왜곡되지 않고 계속 지속되기란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관건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마리아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이 상식을 초월하고 결코 계산되어질 수 없는 이례적인 행동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서 마리아는 이토록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던 걸까요?
세 가지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마리아에게는 특별한 상황이란 게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오빠를,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을 진하게 느끼게 된 체험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에 더욱 확실히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깨달을 수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는가, 그래서 또한 사랑의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는가 공통적인 체험이 있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처했을 때,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으로서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해서 수렁에서 건져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험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 사랑을 안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죠.
우리가 살면서 참 힘들다고 느끼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불행하다고 느낄 정도로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나는 왜 그런가’라고 신세타령을 할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했다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자신의 불우한 환경이, 자신의 고통스런 경험이, 무겁고 힘든 인생의 무거운 짐이, 자신에게 들이닥친 병마가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체험할 수 있는 환경이 되고 무대가 됨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시편에 나오는 수많은 찬양의 시들은 그냥 감사찬송이 아니라 고통 가운데 억울함 가운데 아픔 가운데 끌어올려진 보배와 같은 하나님 사랑의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어려움 속에서 체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순전한 사랑과 찬양이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은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다 해도 또다른 문제는 우리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생생하게 유지되려면 늘 고통에 처해야 한다는 것일까, 이것 또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바람직하지도 않고요. 한때 어렵고 힘들 때는 그랬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힘든 것도 아니고 역경도 아니고, 그렇다고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무미건조한 일상의 연속이고 뭐 큰 이슈가 없는 인생이다보니 사랑하지도 그렇다고 절망하지도 않게 되는 삶을 살아가는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마리아가 처한 비극과 절망과 견줄만한 큰 고통은 없었다 해도 크고 작은 삶의 어려움이 있었고 그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된 계기가 반드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수한 상황이고 늘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신실하고 신의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결코 잊지 않고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길로 나아가겠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특별하지 않은, 특별한 상황에서 비롯되지 않은, 복음의 진리에 기초한, 그렇게 형성된 주님을 향한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둘째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음을 직관으로든 혹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흘려듣지 않고 기억해서든 아니면 상황의 흐름을 분석한 것이든, 어떤 이유로든 마리아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인지했습니다. 비록 잔치 석상이었어도 예수님에게 깃든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고, 그 죽음과 떠남과 이별을 안타까워하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마리아에게 있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창세 전부터, 나를 지으시기 전부터, 나를 향했고, 그 사랑이 결국 나를 찾아냈고 나를 구원해주셨다는 감격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살아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고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는 이유 하나로 나에게 영원한 생명, 하나님이 나와 함께함으로 말미암은 참된 생명을 주셨다는데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구원과 생명을 생각해보면 나를 향한 진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 아가페 사랑으로 값없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고 깊이 절절히 느끼게 됩니다. 잘 아시는 말씀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요한은 말했고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했고, 또 요한일서 5장 9-10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생명이 오직 아들을 이땅에 보내시고 아들을 십자가에 우리 대신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 때문에 가능했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늘 새롭게 들어야 할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되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리아의 지극한 예수님 사랑, 그 사랑을 이례적이고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넘치는 사랑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마리아가 주님 발 아래서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귀담아 들었던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마르다 마리아 자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때도 베다니 이들 자매의 집에 오셨는데, 그때 마르다는 분주하게 예수님이 잡수실 음식 장만하는데 매우 바빴습니다. 그런데도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치에 앉아”(눅 10:3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마르다의 불평이 당연히 생겼겠죠. 그래서 예수님께서 동생 마리아에게 명하셔서 나좀 도와 달라고 하세요, 라고 하소연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르다의 신앙과 마리아의 신앙을 비교한 것도 아니고, 마리아의 신앙이 더욱 우월하다는 것도 아닙니다. 마르다의 은사와 마리아의 은사가 다른 것일 수도 있고, 마르다는 섬김을 통해서 기쁨을 얻는데 반해서 마리아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데서 기쁨을 얻었을 수도 있습니다. 추구하는 영성의 색깔이 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선택입니다. 마르다가 선택한 것이 중요한 것처럼 마리아가 선택한 것이 중요합니다. 마리아는 말씀을 사모하고 말씀에 갈급해서 모처럼 주님이 오셨는데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의 말씀을 듣는 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식사하시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고 그 발을 머리털로 씻겼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향한 겸손이고 주님을 경외하는 태도고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의 관건은 주님 사랑입니다. 주님 사랑의 관건은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특별한 상황에서 극적으로 도우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욱 일상적으로 더욱 객관적인 십자가에서 쏟아진 하나님의 사랑을 늘 깊이 묵상함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늘 귀기울여 듣고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알고 생생한 하나님의 사랑의 감격 가운데 우리가 더욱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은 사랑은 계산되지 않는다는 것이니다. 왜냐면,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이고, 하나님의 사랑은 측량할 수 없는, 일만달란트나 되는 거액을 빚진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탕감해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고 우리가 지금까지 수많은 사랑을 다른 이에게 베풀고 살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랑의 빚진 자입니다. 아직까지 우리는 온갖 좋은 일을 다 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빚진 자로서,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의 빚진 자로서 계산되지 않고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죽을때까지 하나님을 향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함께 나누며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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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1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4)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요 11장 38-44절)
여러분은 어떠한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까? <유명인들의 유언 모음집>이라는 책에 여러 유명 인사들의, 숨지기 직전 마지막 말이 실려 있습니다. 평소 성향이나 고집이 마지막 순간에도 여실히 작동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장한 공리주의자 벤담은 “나는 지금 죽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고통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인가에 주력해야 한다. 하인들을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어린아이들을 내보내라. 어린아이들에게는 건전하지 못한 경험이 될 수 있고, 이 시점에서 그들은 유용성이 떨어진다.”라고 마지막 말을 남김으로써 공리주의자의 면모를 끝까지 발휘했습니다. 19세기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지금 들어가야겠다. 안개가 피어오르고 있다.”고 했고 19세기 미국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모가 “죽기 전에 하나님과 화해하라!”고 말하자, “내가 언제 하나님과 싸웠는데?”라고 반문했다고 합니다. 괴테는 죽을 때 “좀더 빛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네이선 헤일이라는 미군은 미국 독립전쟁 때 영국 군인에게 체포되어 처형당하기 전에 “내 조국을 위해 바칠 목숨이 하나밖에 없는 것이 유감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미국 시인 하트 크레인은 “잘 있거라, 모든 사람들아”(Bye, everyone)라고 했고, 마더 테레사는 “이제 더 이상 숨쉴 수가 없구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습니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저, 176ff)
죽음이란 누구나 거쳐야 할 문이면서도 인생의 한계를 보여주는 커다란 벽입니다. 예술이나 학문도 결국에는 인생이 무엇인지, 사람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야 하는 죽음이란 무엇인지를 여러 방면으로 논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2번은 흔히 <부활>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연주 시간이 90분에 이를 정도로 긴 교향곡이고 대편성 오케스트라와 마지막 5악장에는 합창까지 들어간 대곡이요 대서사시입니다. 원래 이곡은 부활을 주제로 해서 작곡하려고 의도되지 않고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한 곡이었습니다. 죽음과 장례식을 주제로 곡을 작곡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이분이 작곡했던 오페라곡이 큰 성공을 거두고 호평을 받았습니다. 연주회 후 말러는 많은 꽃다발을 받았는데 그걸 자신의 방에 가득 진열했습니다. 그 뒤, 꿈을 꾸었는데 꽃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자신이 죽어서 누워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깬 후 한동안 죽음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고 이를 계기로 죽음과 관련된 ‘장례식’이라는 곡을 작곡했고, 이 곡을 기반으로 교향곡을 작곡하게 된 것입니다.
교향곡을 오랜 기간 동안 조금씩 작곡해나가면서 말러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그리고 청중과 관객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였습니다. 이 곡을 작곡하는 기간 동안 잇따른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기도 하는데요, 아버지가 2월에 어머니가 10월에 돌아가셨고 곧이어 여동생마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작곡하는 기간이 길어졌는데 그 기간 내내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오랜 기간 작곡을 하고 드디어 마지막악장 제5악장 작곡을 남겨두고 있었는데 자신의 친한 친구였고 음악 동료였던 한 유명한 지휘자의 죽음이 있었고 장례식에 갖다가 거기서 한 합창곡을 듣게 되는데, '부활'이라는 곡이었습니다. “일어나라, 자, 일어나라 나의 죽음이여. 고요의 찰나 이후에 영원한 삶! 영원한 삶! 그것이 너를 부른다! 너는 씨뿌려져 다시 소생할 것이니! 농부가 와서 볏단을 수확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은 자를 위해.”라는 시에 곡을 붙인 합창곡이었습니다. 여기에 힌트를 얻어서, 그리고 교향곡 작곡 내내 자신에게 떠나지 않았던 질문, “사후세계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확실한 대답을 듣게 되었던 것입니다.
말러 교향곡 제2번 ‘부활’의 제5악장에서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15분은 장엄한 합창이 펼쳐집니다.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활하리라, 짧은 안식 후에. 나의 죽은 육신은 부활하리라! 그대를 부른 이는 그대를 불멸의 삶으로 인도하리라.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그대는 새롭게 피어오른다! 수확의 신이 성큼 가버리면 우리는 볏단과도 같이 죽어 하나로 맺으리라! 오 믿음을 가지라, 내 영혼이여 그대가 잃은 것,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대가 갈구하던 모든 것이 모두 그대 것이다! 사랑한 것, 싸워 쟁취한 것 모든 것을 갖고 있지 않은가! 오 믿음을 가지라, 그대의 탄생은 헛되지 않다. 그대의 존재, 고통 모두 헛되지 않음을 믿으라! 피조물은 멸하기 마련이고 멸한 것은 다시 부활하기 마련이다! 이제 두려움을 버리고 부활할 준비를 갖추라! 오, 모든 사물에 스며있는 고통! 모든 것을 멸하는 죽음. 이제 그 망령에서 벗어나 그것마저 내 손아귀에 넣었다. 쟁취한 날개를 달고 타는 듯한 사랑의 열망 속에서 어느 누구의 시선도 미칠 수 없는 빛을 향해 치솟아오르리! 내가 받은 날개를 달고 날아오르리! 나는 살기 위해 죽으리라! 부활하리라, 내 영혼이여! 너는 일순간 다시 부활하리라! 그대가 받은 고통 그것이 그대를 하나님에게 인도하리라!” (유튜브 ‘알기 쉬운 클래식 사전’ 영상 참고)
곡 자체도 장엄하고 오케스트라도 웅장한 연주에다가 합창곡은 대서사시와 같은 대작입니다. 이번 연휴 때 반복해서 들었는데 개인적으로도 큰 감동과 어떤 고양을 맛보았습니다.
유대인이었고 오스트리아 출생인 구스타프 말러는 나중에 카톨릭신자가 됩니다만, 이 교향곡은 기독교 토양, 기독교 문화권에서 나온 부활신앙입니다. 부활신앙이긴 하지만 휴머니즘의 극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를, 기독교 문화권에서 이의없이 받아들여진 기독교신앙인 부활신앙에서 찾은 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기보다 휴머니즘의 극치, 이것이 또한 인본주의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왜냐면, 여기에는 부활이 있다는 믿음만 있지 그 부활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 부활을 가져다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된 부활신앙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예술에 대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면 무식한 목사가 될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진정한 부활신앙이 들어갔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1장 전체는 참된 부활신앙이 무엇인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본문입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을 통해서 단순히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이 아니라 이 기적을 통해서 진정한 부활이 무엇인지, 부활신앙은 또한 무엇인지, 아울러 부활생명은 무엇이며 부활생명을 지닌 우리는 지금, 여기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교훈해주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종교 문화권에서 바리새파의 영향을 받은 경건한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역시 마지막 때 있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에 대해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요 11:23)고 말씀하셨을 때 마르다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요 11:24)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지금은 아니고요, 누구나 그렇듯이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입니다’는 당대 유대인의 통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다시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고 물으신 것입니다.
진정한 부활신앙은 단순히 부활이 역사의 끝에 있을 것임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부활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할 것이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 관건입니다. 단순히 부활이라는 사건이 일어날 것임을 믿는 게 중요하지 않고 그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단단히 뿌리를 내릴 때 바른 부활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단순히 부활이 가능하다, 혹은 부활이 있을 것이다, 정도의 차원을 위한 기적이 아니라 죽은 자를 살리는 부활의 능력이 오직 하나님께 있고,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가리키고 있고, 아울러 예수 안에 있는 우리의 부활을 내다보고 있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참의로 의미심장합니다. 부활이 먼저 나오고 부활 이후에 생명, 부활생명만이 우리에게는 참된 생명,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도 부활 이후의 부활생명만이 참된 생명이 되십니다. 인간의 죄성이요 피조물의 한계라 할 수 있고요, 진정한 영원한 생명은 십자가 죽음에서 죽고 이후에 부활에서만 얻게 되는 영생입니다. 기존의 생명을 연장시켜 죽음에 이르지 않게 하는 생명이 아니라 부활이요 생명입니다. 기존의 생명이 죽고, 그리고 죽어서 다시 사는 부활만이 참된 생명 부활생명입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하는 부활은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이라기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얻은 부활생명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보내신 성령을 받아 이미 시작된 부활한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미 부활생명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함께 못박혔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 죽음을 통과하고서 또한 예수님과 함께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내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성령을 따라 살아가므로 부활생명을 오늘 여기서도 살게 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나사로도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게 되어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여느 유대인의 무덤처럼 동굴에 매장을 했고 동굴 입구는 큰 돌로 막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 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믿음을 도전합니다. 이어지는 40절에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재차 도전합니다. 그래서 돌을 옮겨 놓았고 예수님께서 우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41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예수님께서 지금 기도를 간절하게 하셔서 기도 응답을 강청한 게 아니라 이미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를 하셨고 이미 응답을 받았음을 확신하고서 이곳에 온 것이었고 지금은 단지 기도를 들으신 것에 대해서 감사기도하는 것일 뿐이고, 이렇게 함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의 굳은 신뢰관계 안으로 그들도 들어와서 곧 아들 예수님을 믿고 그 관계로 들어오기를 바라시면서 공개적으로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신뢰하여서 예수님을 믿고 참된 부활신앙을 가지면 즉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그 믿음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나사로의 부활을 보았듯이 우리에게도 참된 부활신앙이 있으면 우리 자신의 부활, 생명의 부활을 경험하게 됨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부활신앙을 믿는다는 것은 부활생명을 믿을 뿐 아니라 이미 시작된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미 시작한 부활생명을 살아갈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생명을 이미 얻은 자로서, 다시 말해서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로서, 우리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부활생명을 지금 여기서도 살아가는 것일까요?
최근에 기독교방송인 GoodTV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목사님과 올해로 102세가 되신 김형석박사님의 대담이 있었습니다. 두 분이 공히 강조한 것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에 희망이 있으려면 코로나 기간 동안 한국교회가 죽고 다시 사는, 혹은 거듭나는 갱생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고 거듭나는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면 전화위복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였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의 정신, 예수님의 영, 이땅에서 예수님의 삶을 재생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신앙이 강조되었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화신으로서 예수님의 삶과 신앙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형석박사님이 한 일본인 선교사 이야기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동남아시아의 한 국가에서 섬기는 선교사들 모임에 참가하고 왔는데 일본교회에서 온 일본인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교회 수도 적고 목회자 수도 적어서 선교사 파송이 드문 일본교회에서 파송한 일본인 선교사여서 관심을 갖고 어떻게 목사가 되고 선교사가 되었냐고 물었습니다. 이분이 동경에 살았는데 예전에 태평양전쟁 때 동경에 하도 폭격이 많아서 지방으로 피신 갔다고 합니다. 생소한 지방에 가서 살았는데 이웃의 한 가정에서 처음 갈 때부터 올 때까지 친절하게 호의를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분들이 일본 국적을 가진 조선인 가정이었는데 크리스챤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 동경으로 돌아오려고 할 때, 이 가정이 말하기를 "동경으로 가시더라도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라고 하더라는 거예요. 이후 동경에 돌아와서 바쁘게 살다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십자가를 보고서 “당신 가족을 위해 항상 기도하겠습니다”는 그 말이 생각이 나서 교회에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신학을 공부해서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목회자가 되어서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보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는 생각에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어서 선교사가 되어서 동남아시아까지 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생명을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 확신 때문에 우리가 부활을 믿을 수 있는 것이고 그 확신 가운데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누리고 그 사랑이 내 안에서 흘러 넘쳐서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사랑으로 나아가는 삶입니다. 이것이 부활생명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톨스토이가 맨 마지막에 쓴 소설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 중 하나의 작품입니다. 소설가들이 소설을 쓸 때 제목을 어떻게 할지를 고심하고, 그리고 소설의 첫 문장을 쓰는데 심혈을 기울인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제목이 ‘부활’인데 어떤 점에서 부활인가, 궁금중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소설의 처음 문장이 다음과 같습니다. “몇 십만의 인간이 한 곳에 모여 자그만 땅을 불모지로 만들려고 갖은 애를 썼어도 그 땅에 아무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온통 돌을 깔아버렸어도 그곳에 싹 트는 풀을 모두 뽑아 버렸어도 검은 석탄과 석유로 그슬려 놓았어도 나무를 베어 버렸어도 동물과 새들을 모두 쫓아냈어도 봄은 역시 이곳 도시에도 찾아들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소설이 톨스토이의 <부활>입니다. 러시아의 긴 겨울을 지나서 겨울의 암흑을 뚫고 찾아온 봄의 생명력을 언급함으로써 ‘부활’이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서 소설의 줄거리는 주인공이 부활한다는 건데요, 여기서 부활은 몸의 부활이라기보다 어떠한 깨달음과 각성을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서 전혀 새로운 삶을 산다는 의미에서의 부활입니다. 오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부활생명입니다. 죽은 지 나흘 된 나사로가 예수님에 의해서 부활생명을 얻어서 전혀 새롭고 전혀 다른 부활의 삶을 이땅에서 살게 되었듯이,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통과하고 이전에 모든 것과 결별하고, 모든 것에 대해서 죽고 부활생명을 얻어 이땅에서 전혀 새롭게 다시 살아가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인공에게 ‘부활’의 계기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은 러시아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물려받은 대지주인 젊은 영주입니다. 이전에 남들도 다 그러니까 자신도 그렇게 하는 것일뿐이라고 쉽게 생각하고 전혀 죄책감이나 죄의식없이 했던 행동 때문에 한 연약하고 무력한 여인이 이후 타락한 삶과 파멸의 삶을 살게 된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계기였습니다. 오래 해 전에 자신에게 피해를 입었던 여인, 그러나 이 영주는 그것이 잘못인지도 몰랐던 한 사건을 우연히 죄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면서 마주치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떤 양심이 살아나는 경험을 했고 도덕에 대한 상대적인 차원, 여느 영주라도 그럴 수 있다는 상대적 기준이 아니라 절대적인 도덕적 기준이 되살아났던 것입니다. 그것이 각성의 계기, 부활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인에 대한 죄책감과 채무의식 때문에 이 여인이 지금 겪고 있는 사건에서 억울한 일을 당해서 재판 받고 유죄 판결 받아 시베리아로 이송되게 된 여인을 구명하고자 각방으로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구명 노력 과정을 통해서 당시 러시아 사회에 만연한 부패와 사회의 부조리를 몸소 경험하게 되고 이것이 또한 사회적 각성과 눈을 뜨게 된 계기가 되어서 이 영주의 부활이 더욱 심화됩니다. 그리고 소설 맨 마지막에 성경 마태복음을 읽으면서 진정으로 부활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결국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는 삶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소설의 맨 마지막은 여인을 따라 시베리아를 따라갔던 영주가 자신의 고향 마을로 돌아옴으로 끝납니다. 고향 마을에서 전혀 새로운 인생, 부활의 삶, 부활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소설이 끝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믿고 부활신앙을 갖게 된 자는 그 신앙과 믿음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마지막 때 “나사로야”라고 나사로의 이름이 불려질 때 부활한 것처럼 우리의 이름이 불려질 때 몸의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만을 가리키지 않고, 나사로처럼 부활생명을 얻게 된 자가,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죽고 부활생명을 얻게 되었던 바, 지금 여기에서 부활생명에 참여하게 된 자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는 자들이요,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살아가게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될 거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생명을 이땅에서 산다는 것은, 더욱이 오늘 코로나 시대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어진 부활생명이란 예수님을 따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섬기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곁에 있는 분들을 위하는 공동체를 추구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부활생명이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게 넘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주님의 자녀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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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399장
▶기도 - 안승섭 장로
▶성경봉독 - 요한복음 10장 1~16절
▶특송 - 이현상 지휘자
▶설교 - 예수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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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2월7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3)
예수의 음성 (요 10장 1-16절)
개신교만의 가장 큰 특징은 예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카톨릭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안내할 중개자 혹은 그 관계 형성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상을 끊임없이 찾으려고 합니다. 예전에 CBS 신학펀치라는 프로그램에서 ‘카톨릭은 이단인가요?’라는 주제를 가지고 개신교 신학자와 카톨릭 신부님이 토론을 했습니다. 토론의 하부 주제 중 하나가 예수님께 나아갈 때 개신교는 어떠한 중개자도 필요하지 않은데 반해서 카톨릭은 역사상 성인들이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도움을 힘입어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소위 마리아숭배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카톨릭 신부님의 주장은 마리아한테 기도한다는 것은 잘못된 개념이고 마리아한테 기도 부탁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목사님께 기도 부탁을 하듯이 마리아의 도움, 신부의 도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간섭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지만 성도를 위해 기도하는 도움을 요청하는 기도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지나치게 한 인간인 마리아를 지나치게 높이는 교리의 문제를 지적받았습니다. 죄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무염시태교리나 마리아 역시 예수님처럼 승천했다는, 정확하게는 승천 받았다는 피승천교리 등을 지적하자 이스라엘 성지의 중요성, 성지에 가보면 예수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듯이 예수님을 알기 위한 성모의 중요성,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위상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러한 교리의 근거와 출처에 대해서는 초대교회 때부터의 전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이것이 또한 개신교회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우리는 신구약성경 외에 다른 어떤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초대 교황으로부터 지금의 교황에까지 전승으로 내려와 시행되는 예식이나 제도에 대해서 우리 개신교회는 성경적 근거가 없으면 시행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기도해야 하는데 왜 마리아의 도움을 구하는가, ‘예수님이 어려우신가요?’라는 질문을 받고 신부님은 80-90%는 예수님께 직접, 나머지는 예수님의 어머니께 기도하는 편이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마리아의 도우심이라고 한정을 합니다. 고해성사 역시 같은 이유로 시행된다고 말합니다. 이때는 성모 마리아가 아니라 신부를 통해서!
개신교에서 목회자의 위치는 영적 리더의 위치입니다. 사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양과의 직접적 관계를 중개하는 위치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맨 앞에서 친밀한 교제 가운데서 다른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직접적 관계를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를 일컬어 양이라고 비유합니다. 우리는 양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양은 공동체생활을 합니다. 떼를 지어서 있어야 안전합니다. 양 무리는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소몰이를 하듯이 뒤에서 몰아가는 게 아니라 양 무리는 앞에서 인도해야 합니다. 인도하는 역할을 목자가 합니다. 목자는 양 무리를 낮 동안에 인도해서 꼴을 먹이는데, 팔레스타인 지방에는 목초지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목자의 인도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풀을 먹지 못하는 때도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곳에서는 그렇습니다. 그러면 다시 우리로 돌아와서 목자는 우리에서 꼴을 먹여주어야 합니다. 이것도 목자의 역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양이라고 비유하고 자신은 양 우리의 문이요 양을 인도하는 목자로 비유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양의 문’으로 자신을 비유하신 이유는 오직 자신을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에 들어가야 거기서 꼴을 먹고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우리에서 편안한 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예수님은 문이십니다. 양들이 우리에 출입하는 입구의 관문이 되십니다. 이 출입구를 통해서만 양들이 우리에 들어가거나 나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신다는 것은 양들이 예수님 안에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고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라야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고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이 우리 영혼의 참된 양식이 됨을 가리킵니다.
양이 거친 광야에서 이리저리 지내다가 우리라는 안식처로 돌아와서 부족한 꼴을 보충해서 먹고 공동체가 안전하게 그리고 편안하게 쉼을 얻는 그림을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이 예수님 자신을 양의 문이라 비유한 이유라 생각됩니다.
이렇듯 양들이 양 우리 안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생명을 살찌우고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양의 문으로 이땅에 오신 이유는 양들이 예수님을 출입구 삼아서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데 있습니다. 양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예수님과의 직접적 교제 속에서 참된 평안과 안식과 양식을 얻어 양의 생명이 더욱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양의 문이 되어주시는 양의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라 할 수 있습니다. 양은 공동체 안에 있을 때 믿음의 동료들과 함께 안전할 수 있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동료들로 인해서 더욱 풍성한 신앙을 누릴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마음을 나누고 믿음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신앙의 동료가 없다면 우리 안에 있는 상당부분의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이 예수님을 문으로 삼아서 우리로 돌아온다는 것은 한 주간 거친 세상에서 살다가 핍절해진 영혼을 가지고서 공동체로 모이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주일에 이렇게 모여 예배를 드림도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할 때 꼴을 얻게 됩니다. 다시금 생명을 얻고 생명력으로 충만해집니다. 풍성한 생명을 예배를 통해서 누리게 됩니다. 공동체에서 얻게 되는 꼴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양들은 불가피하게 안전한 우리를 떠나 풀을 찾아 광야를 돌아다녀야 하지만 돌아갈 우리가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떠날 수 있습니다. 비록 세상에 나가서 살고 세상에서 사명을 이루어야 할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거친 세상에서 실패하거든 주님 못자국 만져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다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양의 문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통해서 안전한 우리로 돌아와서 전열을 재정비하고 부족한 꼴도 보충받고 참된 쉼과 안식을 통해서 힘을 얻고 다시 세상에 나갈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동산교회가 양 우리와 같은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예배하는 이 시간이 우리에서 다시 풍성한 생명을 보충받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없는 인생은 표류하게 돼 있습니다. 고된 사회생활, 직장생활, 각박한 인간관계에서 지치고 힘든 영혼이 가정이라는 우리, 교회라는 우리, 주님 품이라는 우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면 지쳐 쓰러지게 될 것입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게 될 것입니다. 세속적 관심과 정욕과 쾌락에 탕진하게 될 것입니다.
전남대 의대 정신과 교수이신 이무석 교수님은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신앙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섯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신앙이 있는 사람은 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 의사들의 96%가 이를 인정한다고 합니다. 둘째, ‘든든한 버팀목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의 안정감이 높아진다.’ 무한신뢰를 보낼 수 있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 우리의 피난처요 대대의 거처가 되시는 산과 같은 하나님, 예수 안에서 들어와 안식하는 우리가 있다는 생각은 마음에 평안을 가져다줍니다. 셋째, ‘낮은 자존감 회복에 도움이 된다.’ 스스로 무가치하다고 자신은 아무 쓸데 없다고 내가 없어져야 다른 사람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던 사람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달으면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됨으로 인해서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넷째, ‘좋은 신앙은 성숙한 인격을 갖도록 도움을 준다.’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할수록 믿음만 깊어지는 게 아니라 점점 예수님 닮은 성품이 되어갑니다. 마지막 다섯째, ‘허무함과 우울감을 극복하게 해준다.’ 죽음으로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이가 먹고 신체가 약해지면, 그리고 그럼에 따라 살아가는 환경이 예전만 못해지면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절망감과 허무감을 갖게 될 것이지만, 영생을 소망하는 믿음의 백성들은 영원하신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토록 누릴 영원한 하나님나라를 소망하고 살기에 허무함과 우울감을 떨쳐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김장환 저)
신명기 10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신앙은 여러분을 행복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있어야 행복합니다. 우리가 없으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거친 광야생활과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가 없다면 얼마나 불행한 인생이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 안에 있게 된 자는 말 그대로 우리에 들어간 것과 같은데요, 우리는 또한 우리(We)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우리의 우리입니다. 양들의 우리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다른 곳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안에서 참된 만족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수님 안에서 행복하십니까? 아니면 외적 환경과 처한 상황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십니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이 척박해져서 자신을 보호해줄 수 없다는 생각해 불안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을 점검해보십시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의 문을 통과해서 우리로 들어간 양들은 그곳에서 꼴을 얻고 쉼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양의 문이라고 비유할 뿐 아니라 선한 목자로도 비유하십니다. 본문 11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또 14-15절을 보십시오.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목자는 양들을 먹이기 위해서 양을 인도합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본적인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목자이실 뿐 아니라 선한 목자이셔서 양들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도 버리셨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인도를 받아야 하는데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 대신에 다른 누구의 인도를 받는다면 참된 꼴을 얻을 수 없게 됩니다. 아무리 훌륭한 목사님, 아무리 훌륭한 멘토,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있다고 해도 이들의 도움이 아무리 선하게 영향을 준다 해도 우리 영혼의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의 직접적인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목회활동은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 것인데요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킴은 달을 보라는 것인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고 있는 형국이 될 수도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목회자의 목양활동은 양들이 예수님을 더욱 알고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예수님이 선한 목자가 되셔서 양들을 직접 인도할 수 있는 믿음을 세워가는 목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설교도 결국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양들이 예수님의 직접적 인도 아래서 선한 목자가 주시는 유익을 누리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목자가 되어주시고 있습니까? 그분의 막대기와 지팡이가 여러분을 지키고 인도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시는 예수님을 인생의 인도자로 신뢰하십니까? 그분에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목자되신 그분의 음성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그래서 평안하십니까? 두렵지 않고 안전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소리에 귀기울이고 다른 음성을 듣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세상이 유혹하고 제공하는 세상적 유혹과 욕심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습니까?
양의 문과 선한 목자가 제공하시는 유익을 얻는 유일한 길은 예수의 음성을 우리가 날마다 시마다 듣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서 얻게 되는 꼴도 예수의 음성이요 목자가 제공하는 꼴도 예수의 음성입니다. 목자 되시는 예수님은 자신의 음성으로 자신의 양들을 인도해가십니다.
본문 3-4절을 보십시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여러분의 이름을 아십니다. 여러분의 형편과 사정을 아십니다. 그분이 여러분 각자의 이름을 부르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인 줄 아는 고로 그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양들의 시력이 고도 근시라고 합니다. 목자를 보지는 못하고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게 양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음성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정신과 마인드를 아십니까? 예수님의 가치관을 아십니까? 살면서 듣게 되는 수많은 주장과 선전과 목소리들 속에서 여러분의 목자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분별해낼 수 있습니까?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에 목자를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양인 우리는 목자의 음성을 듣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생존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입니다. 음성을 듣지 못하면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산비탈에서 추락할 수도 있습니다. 꼴을 얻지 못한 채 영혼이 파리해져가게 됩니다. 영혼의 참된 생명력은 상실해가고 세상적 생명력으로 충만해져서 잠시 잠깐은 의기충전할 수 있어도 결국 시들해져가는 인생이 되고맙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적용함으로써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고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도 시간에 예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마음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서 우리는 무엇이 주님의 뜻인지 분별할 수 있게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을 더욱 알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오늘 칼럼에도 글을 썼습니다만 사람에게는 누구나 고뇌가 있습니다. 진리를 찾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스무살 청춘 때 고뇌가 찾아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을 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그런 고뇌할 틈도 얻지 못한 채 어느 정도 삶의 안정을 찾고서 고뇌가 불쑥 찾아오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죽음이라는 공포 앞에서 두려움 가운데 마지막 고뇌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 폭풍과도 같은 고뇌의 시간속에서 어떤 이는 인생 선배의 조언을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신의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지혜를 찾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포자기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책에서 해답을 얻으려고도 하고 또 종교에 귀의하기도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담대하게 확신있게 선언하십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너희 양들의 우리의 입구 곧 양의 문이라고. 양의 문이 되실 뿐 아니라 너희 양들을 직접 인도하는 목자라고. 양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의 품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쉼을 얻고 꼴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목자가 되시는 주님의 인도하심 속에서만 우리의 인생이 안전하게 목적지에 이르는 성공적인 항해가 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찬송가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라는 찬송가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고 즐겨부릅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그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되었고 전날의 함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내 주는 자비하셔서 늘 함께 계시고 내 궁핍함을 아시고 늘 채워주시네 내 주와 맺은 언약은 영 불변하시닌 그 나라 가기까지는 늘 보호하시네’ 우리 양들이 안전하게 편안하게 여유있게 생명력넘치게 그 안에서 꼴을 넘치도록 주시는 양 우리의 문이 되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자가 되어주셔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늘 듣고 그 음성을 따라살아가므로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과 만족과 풍성한 생명을 해가 거듭될수록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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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42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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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봉독 - 요한복음 9:1~12
▶특송 - '시편 23편' 1부 지휘자: 김성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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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1월31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2)
하나님이 하시는 일 (요 9장 1-12절)
서울 등촌동에 가면 실로암안과병원이 있습니다. 그 병원은 시각장애인들의 빛을 되찾아주는 귀한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데, 그 병원의 설립자는 김선태목사입니다. 실로암 병원은 1986년에 설립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개안수술을 해주었습니다. 앞을 못 보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해 준, 김선태 목사는 놀랍게도 시각장애인입니다. 시각장애 1급임에도 그는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30년 가까이 목회자로서 실로암병원을 운영해 왔습니다.
그가 10살 때 6.25전쟁이 터졌습니다. 전쟁이 발발한지 열흘 째 되던 7월 4일, 친구들과 놀러갔다 온 사이에 집이 폭격을 맞았습니다. 현장에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습니다. 8월 어느 날, 친구들과 함께 뚝섬으로 수박 서리를 하러 갔다가 거기서 불발 수류탄을 만지다 터지는 바람에 같이 있던 8명의 친구들은 그 자리에서 죽고 그만 간신히 살아나게 되었지만 완전히 실명하였습니다. 비록 자신은 앞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께서 앞을 못보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준 실로암(보냄을 받았다)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개안수술을 해 준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할머니가 어린 손자를 키우면서 매일 저주했습니다. 아이고 죽어라, 죽어버려라, 그리고 때렸습니다. 양주에 고모가 계시다는 말을 기억하고 20일 걸려 어렵사리 찾아가 만났는데, 고모 왈, "소는 눈이 있어 일하고, 개도 눈이 있어 집을 지키는데 너는 살 필요도 없다" 박대와 욕설을 들어야했음. 12월 어느 겨울밤에 피난길을 가야 하는데 고모가 이야기하는 것을 몰래 들음: "저 귀찮은 녀석 양잿물을 먹여서 죽여버리고 가자" 그날 밤에 도망쳐나옴. 말도 못하게 고생함. 고아와 맹인으로서 전쟁통에...
몰래 친구 따라서 교회를 갔는데 교회에서는 유일하게 머리를 쓰다듬어줍니다. 주일학교 선생님은 눈 먼 소년 김선태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선태 왔네, 성경요절 잘 외웠네, 칭찬을 해줬습니다. 교회에서 따뜻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렇게 시작한 신앙생활을 통해서 나중에는 목사가 됩니다.
불행의 연속이었던 그의 삶, 눈도 보이지 않는 역경의 상황에서 교회 학교 교사의 사랑의 말을 듣고 영적인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는 창조 사역이요, 죽었던 자를 살리는 생명 사역을 하십니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분 예수님도 이땅에서 하나님의 사역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기 위해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대로 순종한 맹인은 눈을 뜨게 됩니다. 실로암이라는 말의 뜻은 보냄을 받았다는 뜻을 지녔는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일컬어 하나님 아버지의 보냄을 받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실로암에 가서 씻고 눈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됨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에 이기시고 그 진흙을 눈에 바르시는 방식으로 눈을 뜨게 해준 것은 구약 창세기에서 흙으로 빚으시고 코에 하나님의 호흡을 넣어주심으로 인간을 창조한 내용에 상응합니다. 지금 예수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 곧 창조 사역을 하고 계심을 가리켜줍니다. 새 창조시죠. 날 때부터 맹인이 된 사람의 삶의 곤궁과 비참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죽은 것과 방불한 비극적인 영혼을 침을 뱉은 새로운 진흙으로 새 창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구약성경 어디를 봐도,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베풀어졌지만 맹인의 눈을 뜬 기적은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 이래로 처음으로 베풀어진 맹인의 눈 뜬 기적입니다. 물론 이사야 35장에 보면 메시야가 오시는 메시야 시대에 눈 먼 자가 눈을 뜨게 되는 일이 일어날 것을 예언했고,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사역이 메시야 사역임을 알리시려고, 세례요한에게 전하기를 맹인이 눈을 뜨게 되었음을 말씀하신 바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사역하실 때 수많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해주셨던 바, 오늘 본문에도 날 때부터 맹인된 자의 눈을 뜨게 해주십니다.
우리도 눈을 뜨려면 계속적으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예수님의 말씀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본 말씀, 요한복음 8장 31-32절에서,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에다가 집을 짓고 거주할 정도로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참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영적인 눈이 뜨여지려면 참된 빛이신,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수지광성교회 안현수목사님이 쓴 ‘담’이라는 책을 보니까 탈옥수 신창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분은 교정선교를 하시는데요, 언젠가 광주교도소에 가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거기서 신창원씨를 처음 만나게 됩니다. 우연히 만나서 인사만 나눈 정도였는데, 그날 설교할 때 해병대 총기 사건으로 인해서 사형수가 되었다가 감옥에서 이분을 만나 예수님을 믿게 된 앳된 군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엄청난 범죄를 저지른 것 같고 실제로 여러 명이 죽기도 했던 총기사건이었는데 뜻밖에도 범죄의 계기가 된 발단이 자라면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던 한 젊은 청년이 군대에서까지 그러한 고통이 이어지자 우발적으로 총기사건을 벌인 것이었고, 그 말을 듣고 신창원씨도 자신과 비슷하다고 공감하게 되었던 듯합니다. 그 역시 성장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자라왔던 경험이 발단이 돼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창원씨가 그와 마찬가지로 총기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그 형제에게 편지를 써서 전해온 것입니다. 그 편지를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데요, 이 편지에서 신창원씨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랑의 권면과 더불어 자신이 어떻게 빛을 보게 되어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합니다.
“고생 많으시죠. 예배를 인도하려고 광주에 오신 안현수목사님의 설교 중에 하신 형제님의 이야기를 듣고 고민 끝에 글을 올립니다.”로 시작한 글에서 따뜻한 사랑이 듬뿍 담긴 애정어린 권면과 더불어서 자신의 간증도 들려줍니다.
이분이 마음의 빗장을 풀게 되었던 계기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서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해야 할 터인데 오히려 어머니처럼 따뜻한 사랑으로 대해주시고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주시는 천사 같은 마음에 감화를 받았던 것입니다. 자신의 악한 마음이 녹아지기 시작했고 기독교에 궁금중이 생겨 옥중에서 성경을 읽게 되었습니다. 구약성경부터 읽었는데 별로 감흥이 없었으나 성경을 끝까지 보기로 결심했고 신약성경에 이르러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서 신약성경에서 좋은 말씀을 암송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은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죄도 없이 십자가의 극악무도한 형을 받게 되는 예수님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죄를 용서해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시고 숨을 거둔 장면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계속 반복하여 예수님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6개월의 시간이 흐른 후에 십자가의 사랑은 죄를 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과 같은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깨닫는 순간 청송교도소 독방이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추한 모습을 하고 있으면 얼마나 악하고 파렴치한 삶을 살았는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이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준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고 헌신하는 것이며, 그 헌신에 진정한 기쁨과 행복과 천국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신창원씨는 무기징역에다가 22년 6개월형이 추가되어 당시 26년째 수감생활하던 중에 쓴 편지였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을 만나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이 맹인임을 깨달음과 동시에 눈이 뜨여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본다고 생각되면 눈을 뜰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9장 39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이 말씀을 하시니 바리새인들이,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40절)하고서 스스로 찔렸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41절)고 하십니다. 맹인임을 깨달으면 보게 되는 것이요 본다고 하면 그대로 맹인으로 남게 되는 역설입니다. 극악무도한 죄인임을 깨달은 동시에 의롭다 여기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써 말씀하신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와 바리새인을 생각해보십시오. 세리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아파했다는 이유로 그는 의롭다함을 받고 성전에서 내려갔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볼 것은 우리의 약점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콤플렉스가, 우리의 부족함이, 우리의 어리석음이, 우리의 연약함이, 우리의 열등감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하시려는 일을 나타내는 주요한 통로가 됩니다.
길에서 구걸하던 타고난 맹인을 보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시각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제자들은 딱한 맹인을 보고서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을지 짐작이 되는 모양을 보고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도대체 왜 이렇게 이가 고생을 하게 된 것인가를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본문 2절에 보면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맹인을 보고서 제자들이 떠올린 질문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혹은 부모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길래 이토록 비참하게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각은 달랐습니다. 이 비참함, 이 고통, 이 맹인이라는 처지는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고자 할 뿐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예수님 역시 제자들처럼 맹인의 비참한 현실을 보셨습니다. 그 비참한 현실을 보고서 제자들은 과거로 돌아가서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면 예수님은 미래로 가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비참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역사할 동기가 되고 이유가 되고, 하나님이 하시고 계시는 일이 그의 고통 때문에 나타날 수 있게 될 것임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창조 사역이요 생명 사역이기 때문입니다. 이 맹인의 비참한 현실은 하나님의 재창조가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고 죽은 것과 방불한 절망의 처지에 놓인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의 공급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보 칼럼에 썼습니다만, 제가 국민일보 역경의 열매 김형석박사님의 이야기를 보고서 놀랐습니다. 이분이 올해 102세이신데 아직까지도 한 번도 병원에 입원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어렸을 때부터 병약해서 스무 살을 넘겼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어머니가 가지실 정도로 약한 분이 오히려 그 약함 때문에 백세가 넘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역설입니다. 성경이 강조하는 역전의 원리입니다. 약하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고, 어리석기 때문에 오히려 지혜롭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으로 보게 되고, 콤플렉스가 오히려 나중에는 자신의 강점이 되고, 열등감이 있어서 오히려 성장하게 되고, 우월감이 있는 사람은 그 우월감 때문에 결국에는 열등해지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대로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그 마음과 열망과 노력 때문에 오히려 끝자리로 내려앉게 될 것이지만,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자는 오히려 하나님나라에서는 종의 자리로 끌어내려지게 될 것입니다.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고 탐심에 사로잡혀 채움에만 온통 에너지를 쏟는 자는 오히려 비워지게 될 것이요, 그러나 예수님처럼 오히려 자기를 비우면 하나님으로 충만하게 채워지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에서는 비움이 곧 채움이요 낮아짐이 곧 높아짐이요, 약점이 곧 강점이요 약함이 곧 강함이요 콤플렉스가 오히려 자신의 장점이 되는 역전의 원리, 역설이 작동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그렇게 말하죠.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이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나타나는 통로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약함을 자랑하십시오. 여러분의 부족함이 오히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시고 오히려 감사하시고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러한 약함과 부족함과 콤플렉스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볼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요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공동의 창조 사역이요 공동의 생명 사역이라는 사실입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이땅에 계실 동안은 낮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제자들이 빛의 사명을 감당할 동안은 낮입니다. 지금은 낮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이 있는 대낮입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그러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통해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는 일, 생명을 살리고 어둠을 빛으로 쫓아내고 전혀 새롭게 하시는 새창조의 역사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3절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표현된 것이 4절에서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 일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하는 일입니다. 실로암에 가야 눈을 뜨게 되니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보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뜬다는 것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게 됨이요, 그래서 맹인조차도 예수님의 시각으로 봄으로 인해서, 누구의 죄 때문이냐를 생각하던 제자와 달리 예수님의 시각으로 맹인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을 보게 됨으로 인해서 오히려 그러한 고통과 약함의 처지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소망하고 기대하고,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고통의 멍에를 안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현장임을 깨닫게 됨과 동시에 사명자가 되어 그 일에 나 자신이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 쓰임받게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예전 TV를 유튜브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낚시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대물 낚시에 끌려서 강원도에 살던 사람이 제주도 서귀포로 이주하여서 거기서 유유자적 낚시꾼으로 살아가면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고 큰 잿방어 잡으면 이웃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서 아무 근심걱정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하면서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분은 참 행복한 살고 계심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분의 인생을 폄하하고픈 생각은 하나도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보고서 솔직히 자연을 좋아하는 제 자신이지만 하나도 안 부럽고 제 입장에서 오히려 사명자로서 살아가는 삶이 때론 무거운 짐진 것 같은 부담이지만 오히려 더욱 좋다는 나름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땅을 살아가는 이유는 눈을 뜨고서 발견해야 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눈을 뜨게 된 우리, 다시 눈을 감아버리면 안되겠죠. 보아야겠죠. 무엇을 보아야겠습니까? 날 때부터 맹인된 처지의 불우와 고통과 아픔을 보아야겠습니다.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그러한 고통과 아픔과 말못할 고민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우리 자신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게 될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을 보고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드러나게 될 터이지만, 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눈을 떠서 보게 된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 일이요, 그것이 자신의 사명이 되는 사람을 통해서 이루실 하나님의 역사임을 깨닫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하나님의 생명 사역, 새창조 사역에 쓰임받는 사명자로 서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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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 - 51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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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24일 동산교회 주일 설교 (요한복음 강해 31)
자유 (요 8장 28-36절)
코로나 시대에 여러 자유가 제약당하고 있습니다. 마음껏 누구와 만나는 일도 금지당하고 있고 지난 한 달 넘게 예배의 자유도 행사하지 못했다가 오늘 제한된 인원이 모여 현장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밖에 외출을 할 때 마스크를 착용해야 하는 의무도 어떤 이들에게는 자유의 제한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무엇이든 마음대로 못하는 소위 코로나 시대입니다.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지 못하고 살아온지 이제 만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 좀 적응이 되십니까, 아니면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유를 꿈꿉니다. 생존이 보장되고 나서는 더 큰 자유를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돈이 많으면 경제적으로 자유롭게 되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속박에서도 벗어나서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노년이 되어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 열심히 운동도 합니다. 신체적 자유를 위함입니다.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입니다.
예전에 한 카드 회사의 광고 문구가 화제가 된 적 있습니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그동안 자유를 희생한 채 열심히 회사에서 일해온 당신, 이제 떠나라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여행을 가서 자유롭게 돈을 쓰라는, 마음껏 카드를 긁으라는 독려의 광고 문구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여행의 자유를 행사하지 못하는 많은 분들이 답답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유는 ‘~로부터’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무거운 부담과 짐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꿈꾸는 겁니다. 갓난 아이를 양육하는 엄마는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지만 가끔은 양육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픈 마음도 들 것입니다. 갓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나라 가계 부채가 전체 경제에 부담이 될 정도라고 하는데 가정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은 빚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원합니다. 늘 일을 해야 하는 경제적 부담의 짐을 떠안고 있는 분들은 가끔은 일탈을 꿈꿉니다. 다람쥣 체바퀴 같은 직장생활을 박차고 나와서, 더 이상 시간과 사람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꿈꿀 때도 있습니다. 신체에 장애를 지닌 분들은 가끔 꿈속에서라도 몸의 기능이 온전해져서 마음껏 원하는 것들을 신체로써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분들은 질병으로부터 자유를 간절히 원합니다. 그래서 질병을 가끔은 병마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요즈음 코로나 시대에 우리는 감염병의 위협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습니다. 언제쯤 그런 날이 올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회사에 사표를 제출하려고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가정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평생 따라다니는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놀림받아왔던 이름을 바꾸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외모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성형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로부터’ 벗어나기는 말 그대로 자신의 기존의 모든 옷들을 벗는 것입니다. ‘~로부터’ 벗어나기는 자신을 둘러싼 기존의 주위 환경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입니다. ‘~로부터의 자유’를 모든 영역에 걸쳐서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결국 자기 홀로 남게 되어야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만 홀로 남게 되면 진정 자유롭게 되는 것일까요?
‘~로부터’의 자유는 소극적인 의미에서 자유임에는 분명합니다만, 마지막에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자아의 굴레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자유가 문제가 됩니다. 자신만을 위하는, 자기 중심적인 자아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상태를 일컬어 성경에서 그것을 죄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중심성으로 꽉 들어찬 자아에 하나님이 들어올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소용 없습니다.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를 외면할 정도로 자기 중심성에 고착이 된 상태입니다.
오직 자기만을 추구하는 자아의 굴레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결국 죄로부터의 자아의 해방을 뜻합니다. 죄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죄에서 자유하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아’라는 본연의 인간성을 획득하는 것입니다. 피조물로서 창조주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자유한 것입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에게 집중하고 자신의 뜻을 펼치고, 자아를 추구하고 실현해야 자신의 생명이 지켜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서, 자신을 먹이고 입히고 보호하는데만 온통 집중하는 뿌리 깊은 자기중심성이 인간 본연의 자아가 되어버린 것인 인간의 뿌리 깊은 죄성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존재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 우리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선언된 존재입니다.
언제 자아의 굴레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것입니까? 로마서 6장에서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2절)라고 표현합니다. 죄로부터 자유를 얻으려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면 몸이 결국 죽어야 합니다. 죄의 몸이 죽어야 더 이상 우리의 몸이 죄가 역사하는 통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6-7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죄에 대하여 죽으신 것인데, 우리 옛사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 십자가 위에서 함께 못박혀 죽으므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어 의롭다하심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죄인의 삶은 죽어야만 끝납니다. 죄인이 죽어버리면 죄가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는데, 바로 그 일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일어났다는 성경의 선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기 전까지, 예수님을 알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죄에게 종노릇하던 인생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말미아아 우리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될 때에 이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미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굽니까?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죄의 본질인 자아의 굴레로부터 해방을 받은 자들입니다. 자기로부터 진정 자유로워진 자로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됨으로 인해서, 그 이전에는 온갖 것들이 함께 모여 결국 자기중심성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흘러가던 인생이 이제 자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 벗어나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롬 6:4)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생명이 우리 삶에서 점차 나타나는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새로운 삶이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 말씀드린 이유는 시작이 있으면 완성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죄에서 벗어나 죄로부터 자유로워진 우리가 점차 그 자유를 더욱 크게 향유하게 누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까지입니다. 로마서 8장 21절에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가 있을 것인데, 바로 그날을 모든 피조물이 소망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의 자유에 모든 피조물이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이 얻게 될 영광의 자유란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우리가 얻게 될 영광의 자유는 말 그대로 너무나 영광스런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동참하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된 죄로부터의 자유가 완성이 되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는, 지를 짓고 싶은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온통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살아가는 영광스런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동참하게 되는 자유입니다.
자유라는 말은 하나님에게만 어울리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자유한 것이 무엇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지전능하신 홀로 한 분이신 절대자 하나님께서 못하실 게 무엇이 있겠습니까? 완전한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만이 완전한 자유입니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자유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선물로 또한 주시기를 원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영광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를 제대로 이해해야 우리가 얻었고 또한 앞으로 더욱 얻게 될 자유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자유를 더욱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전능자, 절대자, 일종의 유일무이한 독보적 존재로서의 자유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은 무엇이든 할 수 있으시지만, 과연 하나님께서 죄를 지으실 수 있을 것인가를 물으면 긍정할 수 없겠죠. 하나님의 자유는 무엇이든 마음대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라기보다, 본성상 흘러넘치는 사랑을 위하는 자유요, 본성에 일치하는 자유로서 선을 위한 자유입니다. ‘~로부터 자유’, 혹은 ‘벗어버리는 자유’가 아니라 사랑으로 껴안는 자유요, 선을 위해 고통당하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굳이 만물과 인간을 창조할 필요가 없으신 분이 인간을 창조하셔셔 고통을 껴안게 되신 것입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사랑의 파트너로서 인간을 창조하시므로 고통을 떠안으신 것입니다. 고통의 위험부담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자신의 언약의 파트너로 삼아주셔서 언약에 있어서 불충성하고 불신실한 인간의 배신의 위험을 기꺼이 껴안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유는 다 벗어버려서 홀로 남게 되어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오히려 무거운 짐을 자처해서 짊어지는 흘러넘치는 사랑의 본성에 일치하는 자유입니다.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굳이 인간을 창조하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언약의 파트너, 사랑의 대상으로 정하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십자가에서 인간의 죄악을 짊어지신 자유요, 그러실 필요가 없으신대도 인간을 위해 만물을 갱신하고 새하늘과 새땅을 조성하여주시는 자유요, 인생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자유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유입니다.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함을 입어 시작된 자유인으로의 삶이 지향하는 최종 목적지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자유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유로의 부르심을 입은 우리, 갈라디아서 5장 1절 말씀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말씀처럼 이제는 죄의 종, 죄의 종노릇한데서 벗어나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자아로부터 진정한 해방을 받아서, 이제는 하나님의 자유를 추구하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증진시켜 나가라는 것입니다. 자유를 발전시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고 자유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 우리가 증진시켜나아가야 할 자유, 최종적으로 영광의 자유에 이르게 할 자유, 그것은 자아의 얽매임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서, 거룩하신 성령의 능력으로, 벗어버리고 벗어나려는 자유가 아니라 껴안고 기꺼이 짊어지려는 자유를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지금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벗어버리고 벗어나려고 하기보다는 기꺼이 껴안고, 받아들이고 희생하고, 섬기고, 선을 추구하는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본문이 바로 지금까지 장황하게 논의한 바로 그러한 설명을 요약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3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유만이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자유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자유는 결코 진정한 자유가 될 수 없습니다. 자기 홀로 남게 된 자유, 기존의 자리와 환경과 사람에서 벗어나서 얻게 되는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그 자유는 우리의 자기중심성을 강화시켜서 결국 우리를 죄의 종으로 사로잡히게 하는 것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니까 이 말씀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이들의 이 말도 로마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그들에게 따져들면 진실이 희박한 말이기도 하거니와, 그럼에도 이들은 지금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아브라함의 자손이어서 자유롭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십니까? 본문 3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자유를 행사해서, 자신을 위하여 무엇을 하는 것들, 오직 자기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고 강화시키고 돋보이게 하는 것들, 내가 다행히도 자유를 행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보유하고 있어서 자유를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오히려 죄 짓는 것이요, 죄를 짓는 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죄를 짓는 차원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죄의 종이 되어버린다는 진실을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우리가 자유라고 착각하는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죄의 종으로 전락시킨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되어서 죄가 시키는 대로 죄를 지은 것이요 또 죄를 짓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36절)고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자유롭게 한다는 것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말씀은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시므로 우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과 같은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오직 진리 안에만 참된 자유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셨고 하나님의 자유를 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28-29절을 보십시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이땅에서 완벽한 하나님의 자유를 행사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땅에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을 사셨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심으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유를 향한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든 무엇이든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유에 상응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십자가의 희
생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죽기까지 복종함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자유 곧 선을 위한 자유, 벗어나거나 벗어버리는 ‘~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기꺼이 껴안고 보듬고 짊어지는 진정한 자유를 따라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예수님을 너무나 기뻐하셨고,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충만한 교통 속에서 이땅을 사셨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자유 하나님이 누리시는 하나님의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유,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 위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서 본문 31-32절에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써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으므로 그리스도인이 되어 자유인의 삶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어떤 일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자유로서 ‘영광의 자유’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이 자유를 누리고 이 자유를 증진시켜 나아가야 할 책임을 떠안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동참하기까지 이러한 자유의 확산, 자유의 방향을 추구해야 할 사명을 지닌 자들입니다. 우리는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가서 예수님을 보고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 거하므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마땅히 누려야 할 존재들입니다. 이 진리로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자유에 이를, 영광의 자유를 소망하며 사랑과 섬김과 희생과 나눔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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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1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끝까지 (삼상 29장 1-11절)
우리가 “참, 극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건이 흔하지는 않아도 종종 우리를 찾아옵니다.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거나 사건이 일단락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의 전체 이야기가 참으로 극적입니다.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시작됩니다. 영원한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를 향한 흘러넘치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창조하기로 작정하시고 실행하신 창조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역시나 처음 창조 때 각오하셨던 위험 부담이 컸던 예상처럼 사랑 때문에 창조했고 사랑 때문에 고통을 겪는 이야기입니다. 창조는 사랑 때문이었지만 사랑 때문에 고통 받지 않을 수 없는 창조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인간을 완벽한 자유의지를 지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인간에 의해 거절당할 수도 있는 위험을 자초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죠.
역시나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했고 하나님에게서 등을 돌렸고, 그것이 하나님에게는 고통이었고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하는 자의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누구신지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시험하시는 겁니다. 어쩌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일생이라는 시험 기간 동안 사랑이라는 시험을 치루는 사람들일지도 모릅니다. 전 생애를 걸쳐 인생이라는 시험지에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보여주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이유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가 사랑하는 너의 외아들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소설가 이승우의 신작 소설 <사랑이 한 일>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시험을 한 이야기를 깊게 들여다본 소설입니다. 아들 이삭의 독백으로 이야기하는 소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바치라고 하시지 않고 아브라함이 자신보다도 더 소중하게 여기고 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시험한 것입니다. 시험을 받은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으면서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아들을 바쳐야 하는 애끓는 마음을 보게 됨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시험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아들로서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을 바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사랑 때문에 시험했고 사랑 때문에 아들을 바쳐야 했던, 모든 게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모리아산으로 가는 여정 내내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한 아브라함이 유일하게 한 마디 할 때는 언제였습니까? 아들 이삭이 장작도 있고 불도 있는데 번제로 바칠 어린양은 어디에 있냐는 물음에 대해서 “그분이 요구하셨으니 그분이 마련하실 테지.”라고 말한 게 전부였습니다. 모리아산에서 시험을 치루고 결판이 났을 것이지만 모리아산으로 가는 과정에서 이미 시험을 통과한 것처럼 보이는 대답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시는 아버지를 향한 전적 신뢰와 사랑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아브라함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무서운 것이면서 전적 신뢰요 끝까지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시험은 일단락되었고 아브라함은 시험에서 통과했습니다. 아버지의 전적인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테스트에서 통과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사랑 때문에 비롯된 창조였고 그래서 사랑 때문에 이후에 겪게 되는 고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시험하는 사랑으로서 우리를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에서 통과했지만 그의 대다수 후손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중심되는 요구,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전심전력으로 사랑하라!”는 명령에 전적으로 순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대신하고 우리를 대표하는 예수 그리스도는 이 시험에 통과했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아버지를 향한 사랑의 시험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와 함께 시험을 통과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우리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미래와 종말의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역사 과정의 절정이요 역사 진행의 변곡점입니다. 이로써 종말이 왔고 우리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가 창조를 완성하고 하나님나라를 완성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성경 드라마의 극적인 결말입니다.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하나님나라의 완성이요 하나님의 사랑의 승리입니다. 시험에 통과한 자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더불어 이긴 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종말의 축복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입니다. 그래서 성경 드라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극적 타결이요 극적인 결말입니다. 우여곡적을 통과하고 결국 창조가 완성에 도달하는 하나님의 창조 경륜이요 창조 목적 달성입니다. 사랑 때문에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때에는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는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풍성한 기쁨을 누리는 창조의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입니다. 다윗에게도 시험이 없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의 일생도 믿음의 시험의 연속이었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여러 시험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다윗은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시험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생애 후반부에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시험은 인생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기말시험이었던데 반해서 오늘 다윗의 일화는 작은 사건이 일어나고 일단락되는 작은 드라마의 작은 시험이라는 차이는 있습니다. 결국 끝에 이르러 극적 타결이라는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끝까지 기대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해법이 보이지 않은 막다른 골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에게는 해답이 있음을 믿고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결국 좋은 것을 주실 선하신 하나님을 끝까지 인정할 수 있겠느냐는 시험입니다.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내정에 의해서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그후로도 오랫동안 사울왕에게 쫓겨 유대 광야 이곳저곳으로 피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사울에게 쫓기고 생명을 빼앗길 수도 있는 불안이 늘 다윗을 뒤따라다녔습니다. 사울의 창끝을 피해 이리로 혹은 저리로 몸을 숨겨야 했던 다윗이지만 운좋게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라는 이유로 죽이기를 거부하고 그 사실을 사울에게 알림으로 사울을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피신생활은 사람이 할 일은 아닙니다. 얼마나 힘들었든지 도피생활 끝에 붙잡히 범인들이 붙잡히고 나서 오히려 잘 되었다고 말하고 그날 밤 편안한 잠을 잔다고 할 정도로 피신생활은 고통스러움의 연속입니다. 불안으로 점철됨 삶입니다. 발뻗고 잠을 자지 못하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 속에 지내는 고통입니다. 마피아 두목들이 호화스런 피신생활을 하지만 붙잡히기도 전에 단명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는데, 대개 스트레스와 불안으로 인한 심장질환으로 가게 된다고 합니다. 체포돼 종신형 혹은 사형 언도를
받기 전에 이미 가는 것입니다.
다윗이 이런 생활에 지쳤는지, 사울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하다가 사울의 대적 블레셋의 주요 도시 중의 하나였던 가드를 다스리던 아기스에게로 투항하고 그의 부하가 되고 그의 신임을 얻는데 성공합니다. 저 남쪽 시글락의 한 성을 얻어서 거기서 600명의 추종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주위의 여러 족속들을 약탈해서 얻은 이익을 아기스에게 공납하고 나중에 자신이 유다의 왕이 되면 잠재적 위협이 될만한 싹을 자르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고 그나마 나름 안정된 삶에 적응할 무렵, 위기가 발생합니다. 다윗의 일생에 작은 일화지만 시작이 있고 끝이 있고 결국 끝에 이르러 극적인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는 작은 드라마 사건입니다. 위기가 무엇인지 삼상 28장 1-2절에 나옵니다.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다윗의 근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아기스는 다윗을 신임하면서 자신을 향한 충성을 보일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블레셋의 대적인 사울의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는데 다윗도 함께 하라는 명령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다니면서도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까지 내려놓은 사람인데 아기스의 말을, 사울을 무너뜨리고 자신이 왕으로 세움 받을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다윗의 굳은 마음은 변질이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게다가 자신의 동족을 대적하여 싸운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에 근심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나중에 왕이 된다 해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이미 받았고 하나님의 신탁의 말씀, 사울의 뒤를 이어 왕이 될 거라는 예언의 말씀을 받았다 해도, 만약 자신이 이스라엘 군대를 대적하여 승리를 거둔다 해도 양심의 가책을 두고두고 받아야 할 것이고, 순리로 왕위에 오른 게 아니라 쿠데타로 집권했다는 불명예를 두고두고 받아야 할 것이고, 아기스의 의도도 자신을 왕 삼아주기 위함이 아님을 공언하고 있지 않은가, 하나도 도움이 될 게 없는 전쟁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거절했다가는 속내를 들키고 충성심 없는 자라고 간주되어 블레셋 내에서 입지가 없어질 것이 불보듯 뻔한 딜레마적 상황입니다.
벗어날 길이 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며칠을 불면의 밤, 근심의 시간을 보내고서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결국 전쟁터에 나오게 된 다윗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9장 1-2절을 보십시오. “블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 곁에 진쳤더라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으이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하나님이 주신 선한 마음으로 인위적으로 사울을 제거하지 않았고 선으로 악을 대응했던 다윗이, 이제 사울을 죽이는 앞잡이노릇을 하게 된 비극적 상황 앞에 놓여진 것입니다. 그렇게 전장에 끌려나오게 된 다윗은 이제 어쩔 수 없겠구나, 포기하는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 마당에 사울을 죽이고 이후를 도모해야겠다는 인간적 야망도 꿈틀거리기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들이 다윗에게 주어진 시험이 아니었을까요. 끝까지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선한 마음으로 일관해서 큰 손해를 당한다 해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을 할 것인지, 아니면 마지 못한 척이지만 어쩔 수 없이 인간적인 선택, 인위적인 행위를 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린 것처럼 마지 못한 척 자신의 인간적 야망과 욕심을 충족할 것인지, 만약 그렇게 해서 사울을 이어 왕이 된다 한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 두고두고 후회할 일, 순리를 거스르고 인위적으로 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여태껏 인위적으로 인간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신앙으로 버텨온 다윗인데, 이 딜레마적 시험에서 무너져내릴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보여주고 자신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올곧게 응답할 것인지를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는 길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제 좀 안정을 찾은 블레셋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사울의 창의 위협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받아줄 리 만무하고 다시 쫓기는 불안한 생활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자기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자기 통제를 벗어난 상황에서 다윗은 어느 정도 자포자기 심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론적 해석이지만 자기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든 책임이 다윗에게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왜 이스라엘과 대립 관계에 있는 블레셋으로 기어들어온 것인지, 이미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탓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래도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께서 이 또한 다윗을 훈련하고 단련하는데, 사용하고 계시는 겁니다. 섣불리 어떤 행동을 하기가 쉽지 않은, 행동반경이 좁은 상황에 갇힌 다윗은 상황에 내몰려 결국 전장에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극적으로 문제가 해결되는데, 아기스왕의 절대적 신임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 아기스의 용인술에 대해서 블레셋 방백들, 아마 자신의 군사들을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게 된 방백들이 다윗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그동안 숨겨두었던 속내를 드러내 사울과 연합해서 우리를 공격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블레셋 방백들이 불안해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의 병력을 철수시키도록 아기스왕에게 요청한 것입니다. 아기스왕은 다윗을 믿었고 다윗을 활용하고 싶었지만 방백들의 반대 때문에 뜻을 접지 않을 수 없었고, 다윗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극적인 문제 해결을 보게 된 것입니다.
표정 관리할 극적인 해결의 과정에서 다윗의 반응은 선뜻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나이까 내가 당신 앞에 오늘까지 있는 동안에 당신이 종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내가 가서 내 주 왕의 원수와 싸우지 못하게 하시나이까 하니” 좋은 패를 쥐고게 되었지만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는 다윗의 포커 페이스일까요? 아니면 자포자기 심정으로 어차피 이렇게 된 마당에 복수나 하자, 사울을 제거하자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좌절되자 보여준 반응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섭리적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문제 해결을 본 것은 분명합니다. 전자인 경우라면 당연히 해피엔딩이고 후자인 경우라도 두고 두고 후회할 일이나 불명예를 하나님께서 막아주신 것이므로 결국 다윗에 좋은 일이 생긴 것입니다. 어쨓든 다윗은 극적으로 문제 해결을 경험하게 된 것이요, 이로써 고뇌의 밤은 끝나게 되었고 사건은 극적 타결을 보고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작은 시험에서 다윗이 시험에 통과했는지,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랑,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보여주었는지, 본문만 가지고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사실은 다윗은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고 시편에서 여러차례 반복하고 있다는 것을 통해 보건대, 전 생애를 걸쳐 이루어진 시험에서 통과한 아브라함과 다윗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 때문에 시작한 창조니까 사랑 때문에 종말이 있을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작한 분이 마무리할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가보아야 합니다. 물론 끝까지 가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기대를 끝까지 가져가는 게 어쩌면 제일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가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 사랑을 보여주는, 그렇게 시험에 통과하는 인생이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좁은길입니다.
지나영씨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의대를 나온 분으로서 미국의 존스홉킨스대 소아정신과 교수가 되신 분입니다. 이분이 최근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냈습니다. 대구 카톨릭의대를 졸업하고 의정부 성모병원에서 인턴을 거치고 원하는 대학 병원에 레지던트 시험을 쳤는데 그만 떨어졌습니다. 그곳을 너무나 가고 싶었기에 1년 후에 레지던트 시험을 재수하기로 하고 남은 1년을 어떻게 보낼까 생각하다가 예전에 미국에 가서 1년간 어학공부도 하고 미국 의사 면허증을 따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무작정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미국 의사 국가고시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해서 아예 미국에서 레지던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미국에 남아 결국 존스홉킨스대학 병원의 소아정신과 의사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아정신과 의사로서 잘 나가던 그가 3년 전에 돌연 이름 모를 병마와 마주하게 되었는데, 병명을 알지 못한 채 몇 개월을 고생하다가 알게 된 그의 병명은 자율신경계 손상으로 인한 오한, 빈맥, 서맥, 저혈압, 어지럼증, 두통, 수면장애, 위장장애가 동시에 나타나는 ‘신경매개저혈압’과 ‘기립성빈맥증후군’으로 확진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병은 치료법이 발견되지 않고 완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적응하고서 일상을 살아가고 고된 의사로서 일해야 하는 병을 마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전과 이후가 확연이 구분될 수 없는, 이제는 병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불편하고 고통스런 삶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책이 기독교출판사가 아닌 일반출판사에서 나왔는데, 책 첫페이지가 성경으로 시작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잘 나가던 인생이 거친 풍파를 갑자기 당하면서 그 고통의 과정을 이겨내고 극복하고 적응해가면서 느낀 소회를 나누는 책입니다. 이분은 강조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고 제안합니다. 긍정적인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강조합니다.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는 찬송가 구절을 인용하면서 ‘왜 내게 건강이라는 가장 큰 복을 앗아갔을까?’하며 괴롭고 고통스러운 마음이 들 때마다 자신에게 주어진 복들을 세어보는 연습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당장 힘들더라도 원망하는 마음을 먹기보다는 조금 더 긍정적인 자세와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간증입니다. 결국 이분이 선택한 삶은 자기실현을 넘은 자기초월, 자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삶의 목표로 삼고 지금도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랑 가운데서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로 책을 마무리합니다. 이분이 저랑 동갑이더라고요. 인생의 반환점을 돌고 이제 후반전이 막 시작될 무렵에 이렇게 자기 초월의 길로, 사랑 가운데서 행할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끝까지 이런 자세로 갈 수 있으면 우리 인생 괜찮은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인생의 여러 사건들은 끝에 승부가 날 때가 많습니다. 끝에 결론이 날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 끝에서, 하나님의 시험에 우리가 통과했는지, 우리가 하나님의 시험에 대해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으로 응답했는지가 끝에 이르러 드러날 것입니다. 물론 끝에 이를 때까지 불면의 밤, 고뇌의 밤, 고통스런 과정을 거쳐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성경 이야기의 대단원 결론 클라이맥스는 요한계시록이고 아브라함의 시험도 극적으로 대단원에서 해결되고, 오늘 다윗의 작은 사건도 결국 일단락됩니다.
끝을 아는 신앙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끝을 바라보면서 기대하면서 인내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끝을 알려주셨지만 당장 내일은 어떻게 될지 알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끝에 이르는 과정이 순탄할지 아니면 고통스러울지 알려주시지는 않으십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은 결국 해피엔딩일, 소망을 말씀해주십니다. 결국 소망임을 말씀하십니다. 결국 축복해주실 것임을 말씀합니다, 결국 영생이며 새하늘과 새땅일 것을 알려주십니다.
한 사건의 견지에서도 이야기 형태로 진행되는 사건도 극적 해결을 끝에 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참고 인내하고 끝까지 견디고 끝까지 믿고 신뢰하면서 그 과정에는 오직 인내와 감사와 긍정적인 자세와 태도로써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을 보인다면 우리 인생은 결국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비롯된 시험에 합격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우리 주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시험에 합격하시는, 사랑으로써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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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1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인생의 길잡이 (느 8장 1-12절)
우리는 성경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기대하면서 읽거나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것을 기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오늘 신년 두 번째 주일을 맞이해서 새해에 하나님께서 주실 말씀이 무엇인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새해를 맞이하며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내 인생에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지, 나를 향한 뜻은 무엇인지, 특별히 이전과는 전혀 다른 자세와 각오로 살기를 원하는 분들이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원하는 신앙인들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자칫 믿지 않은 많은 분들이 연말연시에 신년 운세를 점치기 위해서 무당을 찾아가 신점을 보거나 사주를 들여다보기 위해서 철학관을 찾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국민일보 신앙상담란에 한 교회직분자가 박종순목사님께 물었습니다. “교회 직분자입니다. 새해가 되면 점을 보러 가자는 친구가 있습니다. 통계니까 괜찮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서 목사님께서 명확하게 대답해주셨습니다. 좀 길지만 좋은 내용이니까 읽어보겠습니다. “가지 마십시오. 친구도 타이르십시오. 통계가 궁금하면 통계청 홈페이지를 참고해야지 왜 점집을 찾아갑니까. 운세, 사주, 궁합, 토정비결, 신점 등은 무속신앙과 접선돼 있습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샤머니즘, 사회불안, 예측이 어려운 장래사, 신비추구심리 등 때문입니다. 많지는 않겠지만 교회를 다니는 사람 가운데도 점집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이 되어 나오리라”(욥 23:10)고 했습니다. 우리는 내일 일을 모르지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시편은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나의 모든 행위를…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1~4)라고 증거합니다. 성경의 경고도 주목해야 합니다.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레 19:31) “접신한 자와 박수와 무당을 음란하게 따르는 자에게는 내가 진노하여 그를 그의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레 20:6) “점술가들 우상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지리니”라고 했습니다.(계 21:8) ‘취미로’ ‘통계니까’ ‘한 번쯤이야’라는 감언에 휘둘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 생명과 성패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기억합시다.” 짧으면서도 핵심을 정확하게 담고 있는 목사님의 지혜로운 대답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면서 올해 운세는 어떨지, 사주상 자신의 미래는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서 불안한 마음으로 점집을 찾는 이들과는 달리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임을 기억하자”는 말로 대답이 된 줄 믿습니다.
영국 성공회의 수장을 지낸, 켄터베리 대주교를 역임한 신학자 로완 윌리암스는 그리스도인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나오고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그 말씀에 대해서 하나님께 반응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곧 성경입니다.
새해벽두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리고 새롭게 맞이한 새해에 하나님께서 어떠한 깨달음을 우리 각자에게 주실지, 당연히 기대해야 하고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배경도 신년을 맞이한 때입니다. 유대 월력으로 7월은 신년입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달입니다. 아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이 7월을 새해로 삼았던 것 같습니다. 포로기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을 중수했던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신년, 그러니까 7월 1일 나팔절을 맞이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학사 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에게 청해서 율법을 읽어달라고 요청했던 것입니다. 아마 에스라가 율법의 말씀 중에서 신년에 이들에게 들려줄 적절한 말씀을 발췌해서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서 대략 예닐곱 시간 동안 말씀을 낭독하고 중간 중간에 레위인들이 모여든 사람들에게 낭독된 말씀을 해설하고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신년말씀사경회가 예루살렘 수문 앞 광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새해를 맞이해서 새로운 각오와 결심을 가지고서 살아가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려고 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점검하고 새해를 주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으로 열기 위해서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일까요? 본문 5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미리 준비한 나무 강단 위에서 서서 두루마리 책을 펼 때에 모든 사람이 일어섰습니다.
사람마다 의견이 좀 다르기는 합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이 초기 회당 예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성경학자도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성전이 무너지고 유다 왕조가 멸망하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유대인들이 제사 중심의 종교를 탈피하고 회당 예배를 시작했는데, 회당 예배의 중심에 두루마리 말씀 낭독과 설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포로기에 돌아와서 이미 성전재건이 완료되었지만, 유대교가 제사 종교로 돌아가지 않고 말씀 종교, 책의 종교로 회당 예배를 이어갔다는 설명입니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여튼 에스라가 책을 읽으려고 책을 펼 때에 온 백성이 일어섰다는 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그들의 자세를 주목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높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경외하는 그들의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것입니다.
경외하는 마음으로 온 백성이 일어섰을 때, 에스라는 말씀 낭독으로 직행하지 않고 온 마음을 합해서 하나님께 경배를 드립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말씀 중심의 예배 예전에서 말씀 듣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기대하면서 말씀하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송축이 먼저 드려지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에 능통한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가 하나님을 더욱 알기 때문에 그의 믿음과 전심으로써 하나님께 송축할 때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서 아멘 아멘 했습니다.
손을 드는 것은 일종의 하나님께 항복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며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표현으로 손을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곧 있게 될 성경 낭독을 통해서 말씀하실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실 것을 믿는 믿음으로 손을 드는 것입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말을 들으면서 온 백성이 손을 들고서 “아멘! 아멘!”하고 응답했을 뿐 아니라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습니다.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 영광 앞에서 광야 성막에서 모세가 엎드렸듯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느끼고서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경외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엎드린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신앙고백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의 태도로써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율법 낭독 전에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엎드리며 경배와 찬양을 올려드리고서, 말씀이 낭독되고 낭독된 말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사람들, 아마 소그룹으로 구분해서 그들에게 레위인이 다가가 낭독한 말씀에 대해 설명이 이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부분은 우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미리 준비된 것처럼 보입니다. 에스라가 설 나무 강단이 미리 준비된 것이나 에스라 곁에 좌우로 13명의 평신도 지도자가 선 것이나, 이후 레위인들이 낭독된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설명해준 것이나 사전에 준비된 것인 듯합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말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다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들을 말씀을 백성들이 이해하고 깨달았던 것입니다.
말씀을 깨달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백성들은 울었습니다.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보고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말씀의 기준이 분명하게 세워지고서 그 기준에 따라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는 모습입니다.
최근에 한 가정에 입양된 ‘정인’이라는 아이의 학대당함과 그로 인한 죽음으로 인해서 온 나라가 분노하고 슬퍼했습니다. 특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정인이를 입양한 양부 양모가 모두 현직 목사님의 자녀들이었고, 양부와 양모가 기독교 이념을 표방하여 설립된 한동대학교 출신이고, 양부의 직장은 기독교방송 CBS였다는 데서 더욱 충격이 컸습니다. 이들이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듣고 자랐을까를 생각해봅니다. 목회자 가정에서 많은 말씀을 듣고 배우고 또 기독교세계관에 입각해서 세워진 대학에서 공부하고 또 복음전파를 위해 설립된 기독교방송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의 가정에서 이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는데서 더욱 충격적입니다.
말씀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말씀하실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고, 갈급하고 빈 마음으로 손을 들고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한 마음으로 할렐루야, 아멘으로 응답하고 엎드려 경배하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설교를 듣고 말씀을 깨달아서 마음에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들은 말씀, 깨달은 말씀, 그렇게 살지 못한 통한의 눈물뿐 아니라 이제는 진정으로 즉각적으로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설교집에서 본 예화입니다. 종이만 보면 계속 찢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책도 찢고, 중요한 서류도 찢고, 심지어는 어느 때엔 돈도 찢었습니다. 종이로 된 것은 가리지 않고 찢었던 것입니다. 보다못한 가족들이 고쳐보고자 저명한 상담가를 찾아 상담을 받게 했습니다. 무슨 내적인 문제가 있어서 그러겠지, 생각하면서 상담을 받게 한 것입니다. 어떤 상담가에게 가니 어린 시절에 종이로 인한 상처, 가령 종이에 베어서 상처받은 적이 있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런 기억이 없었습니다. 또 어떤 상담가는 아버지가 종이를 만드는 회사를 하다가 망한 적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어떤 상담가는 해법을 주기를 “종이를 찢지 말고 다른 것을 부숴봐라”고 했습니다. 여러 상담가가 다양한 치유법을 써봤지만 다 허사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찾아간 한 상담가가 종이 찢는 문제를 산뜻하게 해결했습니다. 그 상담가는 증상을 듣더니 단호하게 딱 한마디 했습니다: “종이 찢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종이 찢는 것을 멈쳤다는 이야기입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할 때가 많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폭풍 속의 은혜>, 한홍 저, 287-8쪽)
느헤미야 8-10장은 말씀 낭독으로 시작하는 초기 회당 예배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말씀 낭독으로 시작하여 9장에서 신앙고백으로 이어지고 10장에서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언약을 갱신하는 의식의 일부로써 느헤미야 8장을 이해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결국 말씀 낭독을 통한 깨달음과 참회의 눈물은 새로운 언약 갱신으로, 새로운 각오와 결단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 9장 38절에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나이다 하였느니라”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도 이러한 결단이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서, 특별히 예수님의 피로써 맺은 새언약 백성으로서 언약 백성답게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인생의 길잡이로 여기고 말씀의 인도하심을 따라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입니다.
말씀을 깨닫고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퍼서 애통하며 울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오늘 기쁜 절기에 울지 말고 오히려 기뻐할 것을 권면합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신년을 맞이해서 나팔을 부는 나팔절 성일을 맞이해서 슬퍼하기보다 오히려 기뻐하자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성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함께 음식을 나눔으로써 기쁨을 나누자는 것입니다. 성일에 예배 후에 나눠먹을 음식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들이라도 준비한 자들이 함께 나눔으로써 모두가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고 느헤미야가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에게 말씀해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는 기뻐할 수 있고, 그렇게 기뻐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힘이 됩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에서 ‘힘’은 ‘보호’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우리에게 보호가 된다는 말씀으로도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를 든든하게 지켜주는 것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 때문에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느헤미야의 권면의 말을 듣고서 온 백성들의 마음이 즐거워졌습니다. 그 권면의 말 때문이라기보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서 얻게 된 즐거움이요 기쁨이었습니다. 본문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신년 새해를 맞이했습니다. 2021년은 그 어느 해보다 고통 속에서 맞이하는 새해입니다. 이처럼 힘든 시기를 살아갈 때, 우리는 다시금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길잡이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 중의 말씀, 우리를 향해서 다가오신 말씀,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인간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하신 말씀, 임마누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불려졌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 중의 말씀, 이 모든 말씀의 핵심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두렵고 떨림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 의존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순종하는 자녀로서 아들의 순종을 봅니다. 경외와 사랑, 이것이 경건의 핵심인 바, 경외와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향한 바른 태도와 자세입니다. 바로 이점에 있어서 예수님은 우리보다 먼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은혜로운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 역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사랑과 경외로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했지만 참으로 힘든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우리는 될 대로 되라가 아니라, 그리고 어려움 가운데서 자꾸 억울하다고만 하지 말고, 이 어려운 상황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자꾸 나를 힘들게 하는 악인을 통해서도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즉시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말씀대로 즉각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이 여러분의 심령에 가득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힘이 되어서 힘차게 그리고 복되게 살아가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이렇게 말씀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시는 2021년 축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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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21장
▶성시교독 - 93. 새해(1)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552장
▶기도 - 김영택 장로
▶성경봉독 - 학개 2장 1~9절
▶설교 - 이전보다 더 큰 영광
▶찬송 - 331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1년 1월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이전보다 더 큰 영광 (학 2장 1-9절)
오늘로 연말연시 특별방역기간이 마무리되고, 거리두기도 전라북도의 경우 기존의 2단계로 돌아가지만, 최근 전국 종교시설에서 감염이 잇따르면서 종교단체의 경우 비대면 온라인예배를 2주 더 연장하라는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1월 10일과 17일 주일도 현행처럼 불가피하게 비대면 온라인예배로 드려야 합니다. 바라기는 1월 24일 주일부터는 현장예배가 재개되었으면 합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면서 문제점들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온라인예배에 참여하는 교인 수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많은 교회가 온라인예배를 실시간으로 교회 유튜브 계정에 송출하는데 실시간 접속자가 설교만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설교만 들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는 풍토가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설명입니다.
온라인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고충도 클 것입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서 교회학교 예배 시간 길이가 어른 예배와 같지 않아서 교회학교 예배가 일찍 끝나면서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부모들도 설교만 잠깐 듣게 되는 어려움을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온라인예배 초창기에는 옷도 갈아입고 경건하게 예배 준비를 했지만, 이제는 겨우 접속만 해놓는 수준이 되어서 예배에 제대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 2020.12.31.)
하여튼 코로나가 사회 전반에 어려움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하는데도 굉장히 많은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코로나는 하나님이 진동시킨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통해서 한국교회를 흔들고 계시고 우리 신앙생활의 터전을 흔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흔들어놓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진동시키고 흔드신 후에 진정한 보배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배는 그냥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보배를 소유하게 되는 때는 심하게 터전이 흔들릴 때입니다. 기존의 것들이 흔들리다가 무너져내려야 인생의 진정한 보배가 이르게 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인생의 보배를 마음 중심에 간직한 자만이 이전보다도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코로나는 교회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회입니다! 마구 흔들려서 결국 보배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코로나 이후에 이전보다도 더 큰 영광을 누리는 교회,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머무는 인생이 되려면, 소위 전화위복의 축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 지도자였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성전 재건에 참여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이듬해에 제일 먼저 성전 재건을 착수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고 중단되지 어언 20년이 거의 다 될 무렵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다시 성전 공사를 재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약 20년간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약 한 달 전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학개의 메시지(학 1장)를 듣고서 사람들이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서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학개서 2장은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하고서 약 한 달 후 학개 선지자가 다시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어렵게 시작된 성전 공사를 진행해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이전의 성전,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 동력을 까먹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있었습니다. 의욕을 꺾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아무래도 어려운 경제적 현실과 식민통치라는 엄혹한 정치 상황에서 짓고 있는 성전과, 유다 왕조의 가장 큰 번영기였던 솔로몬시대에 지어진 성전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죠. 솔로몬 성전은 선대 왕이었던 다윗의 물적 준비가 충분했고, 성전 공사에 참여했던 연인원이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전 국력이 동원된 대 공사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은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속국 상태에서 지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만, 이전의 성전의 위용을 보았던 사람에게서 시작된 웅성거림이 성전 재건 공사의 방해가 될 정도로 큰 장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욕이 꺾였고 낙심하게 되어 성전 재건 공사 과정에서 힘이 빠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학개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고 고무되어서 오래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시작된 지 약 한 달이 지났지만 처음의 감동과 열정과는 달리, 과거의 성전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의욕이 꺾였던 것입니다. 정말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위용과 인간적 가치와 영광이 아닌, 속에 담고 있는 진정한 성전의 본질이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할 때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왜 꺾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별 일 아니라는 생각, 내가 쓰임 받고 있다 해도 사소한 일로 여겨질 때, 낙심하게 되고 의욕이 상실되고 처음의 감동과 열정이 소진되어 스스로 제풀에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걸림돌에 걸려넘어진 사람이 당시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습니다. 특별히 요즘같이 교회가 너무나 많이 얻어터져서 교회하면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시선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인들 스스로가 위축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게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교회 자체가 발산하는 영광으로 따라오라고만 해도 되던 때가 있었던 반면에 요즘은 교회와 연관되면 사람들이 발을 빼고, 교인들 역시 교회를 통해 영광을 보기보단 교회 소속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게 요즘 적나라한 교회의 현실입니다.
뭐든지 잘 될 때 사람들의 관심도 받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지금 그런 교회는 눈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외양이 화려한 교회여서 한동안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우러러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욕 먹기 쉽습니다. 어려운데 성도들 헌금 갈취해서 뭔 예배당을 그렇게 크게 지었냐고!
그래도 교인 입장에서는 우리 교회가 크고 화려하고 외양도 멋지고 교인들 경제수준도 높고 학식도 높고 교양도 있는 교인들이 많으면 교회 이미지도 좋고 교회 이름의 브랜드도 있는 교회의 일원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가 예배당 크게 지으려고 경쟁했던 적이 있었죠. 일단 크게 지어놓으면 뭐 있는가 싶어서 성도들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외관이나 외적 조건에 둘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외형 비교에 사로잡혀서 일할 동력을 상실하고 의욕이 꺾어졌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보잘 것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소위 인간의 눈에 영광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고 다시 독려시키려고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는 쉽게 말해서 “힘내라!”는 뜻입니다. 한두 사람이 힘내서 될 일도 아니고 모두가 힘을 내야 할 때이기 때문에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온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각각 언급하고서 그들 모두가 함께 힘내서 일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내라!”, 즉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가 세 번 반복되고 있고, 이들 모두에게 “일하라!”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도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죠. 모두가 함께 할 때 거리두기도 효과를 발휘하죠. 안타까운 점은 교회 내에서 잇따라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지난 성탄절날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집단 감염이 일어나서 교회당을 폐쇄한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두 주간 이어서 온라인예배하고 상황이 좋아져서 1월 24일 주일에는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애굽에서 언약한 말과 영이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은 신실하신가,를 생각해봅니다. 위기의 때에도 좋은 때에도 먼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기 직전에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하던 그들에게 언약한 말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요, 여호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영으로써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교회 예배당의 외관과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인 구성원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이는 방식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중요합니다.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이게 바로 영광입니다! 이게 교회의 영광이어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영광이 진짜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성전의 본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짓고 있는 건물의 외양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힘내서 일해서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대기만성도 있고, 실패하는 인생도 있고 코로나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정도 있을 것이고, 직장에서 해직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본인 잘못이든 누구 잘못이든 간에,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이면 됩니다. 애굽에서 하신 말과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대략 천년 전 사건), 지금 나와 함께하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확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국민일보에서 ‘역경의 열매’라는 제목의 간증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최근에 올해 100세를 이미 훌쩍 넘기신 김형석박사님의 일생에서 경험했던 간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신앙이 무교회주의자가 아닌가 의혹도 받았습니다만, 간증을 보니까 이분의 신앙이 단단한 하나님의 체험으로 형성된 단련된 믿음임을 보게 됩니다.
이분이 평양의 유일한 기독교학교였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서 신앙을 뜨겁게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학생을 위한 신앙부흥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한 주간 진행되는 부흥회 때 큰 은혜를 받고, 이후에 기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중1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집과 예배당은 물론 이른 새벽 산에 올라가 기도에 힘썼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먼저 기도하는 습관을 익혔습니다. 이때 한 기도 중 하나가 “이제부터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택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택하셨다는 믿음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후 이분의 인생은 고비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은혜로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과 신체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일본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철학과를 지망하여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교에 지원해 입학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한인 유학생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가 대학생과 휴학생,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인까지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한인 학생 역시 ‘자원입대’ 대상자가 되었고 주 타켓이 되었습니다. 징집돼 전장에 참여하면 생명을 잃을 우려도 있고, 더욱이 일본군으로 참전한다는 것 때문에 울분이 솟구쳐올랐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좌우할 중차대한 사건이 닥쳐오자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간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하숙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읽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마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께서 나를 택했다. 그렇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곧 책상에 엎드리고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외쳤습니다. 이분이 드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였습니다. 기도하자 마음에 평안이 넘쳤습니다. 징집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불구하고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학도병 징집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내과의사가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어릴 때부터 앓던 병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가끔 의식을 잃곤 했다”고 말한 뒤 몇 가지 질문에 더 답하자 그는 내 서류에 ‘불합격’이라 적었습니다. 기적적으로 학도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고국에 돌아와서 교사로 섬길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951년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족이 왔지만 문제는 함께 하지 못한 이분의 큰동생과 부모님이었습니다. 동생과 부모님이 북한에 남게 된 것입니다. 동생과 부모님의 무사 귀환을 위해 부산에 오자마자 교회당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습니다. 늘 기도하기를, “올해가 가기 전에 부모님고 동생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기도하던 중 결국 한 해 마지막날에 이르렀습니다. 그해 12월 31일이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에 예배당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이 예배당에 김형석 선생 가족이 있습니까”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생과 모친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은 모시지 못했지만, 다른 일행도 함께 데려왔던 것입니다. 막 방금 전에 예배당에서 여전히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참이었기에 너무나 감사해서 감격의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본문 6-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주위 환경과 세계를 진동시키고서, 심하게 흔드시고서, 그런 후에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될 때, 지금 초라하게 보이는 이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할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작금의 코로나의 어려움은 이 코로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의 안락한 환경과 우리 자신을 진동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진동시키고 흔드신 후 보배가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배는 그냥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보배를 소유하게 되는 때는 심하게 터전이 흔들릴 때입니다. 심하게 흔들리고 기존의 것들이 떨어져나갈 때 진정한 보배를 발견하고 소유하게 됩니다.
코로나는 교회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회입니다! 마구 흔들려서 결국 보배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방역 당국의 예측과 계획에 따르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2월에 도입하고 2월과 3월에 1천만명이 접종하고 얀센 백신은 2분기 접종 시작하고, 5월부터 모더나 백신을 2000만명분이 맞고 3분기에 이르면 화이자 백신을 맞아서 전 국민 60% 이상이 항체를 갖는 집단면역 완성 시기를 9월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칼럼 때 썼습니다만, 빅터 프랭클이 “고통이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인간에게, 오직 그에게만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전화위복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는 키가 무엇입니까? 코로나를 겪은 후 보배가 이르게 될 것인가의 여부, 영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될 것인가의 여부가 관건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이 약속대로 코로나 이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충만하게 나타날 것인가의 여부가 관건인데요, 이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떨어져나가서, 다시 십자가 앞에서 적나라하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인생의 주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중심이요 보배이십니다’라는 진정한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국의 보배가 우리 심령에 우리 교회에 다시 중심을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어려움도 믿음으로 이겨나갑시다.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코로나의 우울, 아픔, 두려움, 제한, 불편, 무력함 등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영광이 호위하는 인생,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맛보는 인생, 인생의 보배, 교회의 보배가 이르는 인생, 오늘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보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영광이 머무는 인생, 이전보다, 코로나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동산교회 위에와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8장
▶성시교독 -94. 새해(2)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301장
▶기도 - 김석곤 장로
▶성경봉독 - 사무엘하 7장 1~17절
▶설교 - 계획
▶찬송 - 384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550장
▶축복
■2020년 12월31일 동산교회 송구영신예배 설교 (온라인)
계획 (삼하 7:1-17)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계획을 가지고서 새해를 맞이하고 계신가요? 뭐든지 준비없이 맞닥뜨리면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준비가 필요하고 계획이 필요하고 대비를 미리 하고서 운명의 시간을 맞이해야 당황하지 않을 수 있고 그나마 성과가 있습니다.
미리 준비하고 계획을 세우고 실제로 그 계획을 실행하는 것의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생각됩니다만, 그러나 아무리 잘 대비한다 해도 우리의 준비와 계획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작년 2020년은 예기치 않은 코로나의 엄습으로 인해서 우리의 많은 계획들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죠. 우리가 아무리 미래를 철저하게 준비한다 하더라도 대비한 만큼 좋은 결과를 얻는다는 보장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준비를 철저히 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예수님의 말씀,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아무리 철저하게 대비하고 세밀하게 계획을 세워놓았어도 염려라는 것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죠.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을 해설하면서 ‘준비의 기만성’을 말했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맨몸으로 미래를 맞을 수는 없습니다. 예비하고 준비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비, 준비, 대비의 기만성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 우리를 속일 때가 있을 거라는 것입니다. 잘 대비하고 예비해놓으면 마음 든든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안전감을 느낍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어떠한 어려움이 와도 미리 잘 준비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이 든든한 보호벽이 되고 방어막이 됩니다. 든든하고 의지할 만한 것들이어서 웬만한 어려움이 닥쳐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어느 때까지는! 그러나 갑자기 들이닥치는 대재난, 작금의 코로나 위협과 같은 염병이나 질병,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든든하게 여겨졌던 것들이 무용지물로 드러나게 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살면서 겪게 되는 대재난이나 파멸의 위협 앞에서 예전에는 마음 든든하게 했던 모든 것들이 단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판명되게 되는 때가 인생에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걸 염두에 두고 ‘준비의 기만성’을 말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잘 대비해놓는다 하더라도 그 준비와 계획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유일한 피난처는 하나님이시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볼 줄 알고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준비 없이 대비 없이 계획 없이 미래를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계획은 필요합니다. 여러분은 어떠한 마음의 자세로 신년을 맞이하고 있습니까? 막연하게나마 여러분은 2021년에 대해서 어떠한 구상과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람과 소망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가장 얻고 싶고 소원하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관통하고 있는 여러분의 관심사는 무엇입니까?
새롭게 맞이하는 신년 2021년을 위한 계획이 물론 필요합니다만, 우리가 놓치기 쉬운 계획,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계획, 이 계획을 세워놓지 않고 계시는 분이라면 조만간 반드시 이 계획을 세워야 할 바로 그 계획에 대해서 오늘 말씀을 근거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아마 여러분이 세워놓은 신년에 대한 계획은 대부분이 여러분 자신을 위한 계획이거나 여러분의 가족을 위한 계획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겁니다. 새해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잘 풀리고 우리 가정에 우환이 없고 가족들이 모두 건강하기를 누구나 바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계획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떠오르는 주된 생각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를 것입니다. 2021년 계획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주로 자신에 관한 것이거나 자신의 가족에 관한 것뿐일 테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계획이라 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자동적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알기만 하면 그 계획을 따라 내가 나아가리라, 이러한 생각을 그리스도인이라면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확실한 계획, 나를 향한 계획을 알고 싶어합니다. 2021년에 하나님께서 예비해주신 자신을 향한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생각과 구상은 무엇인지, 시편 139편에서 나를 향한 생각이 모래보다 많아서, 셀 수 없이 보배로운 많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했던 다윗처럼 우리는 흔히 생각합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시 139:17-18) 그렇습니다! 여러분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나 보배로운 생각일 뿐 아니라 그 생각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각을 가지신 분이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2021년을 맞이하는 우리 각자를 향해서도 하나님은 많은 생각과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는 것만 해도 훌륭한 믿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송구영신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의 2021년 계획 중, 자신을 위한 계획이나 가족에 대한 계획도 아니고, 심지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아닌, 이러한 계획들이 아니면서 혹시 빠진 계획이 없는지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어떠한 계획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마음속에 품고 있던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자신을 향한 계획만 한 게 아니라 그리고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만 생각한 게 아니라, 다윗의 마음에는 하나님을 위한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과 그 마음의 발로로서의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계획입니다. 다윗의 마음에 그러한 생각과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성경의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약속이라 할 수 있는 다윗 언약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다윗과 그의 자손과 다윗 왕조를 축복해주시는 장면입니다. 너무 무조건적이고 일방적이어서 구약성경의 언약 중의 언약, 아브라함 언약과 더불어 가장 언약적 성격을 보여주는 다윗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축복하시고 그의 나라를 영원토록 견고히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의 자손으로 이루어질 그의 나라를 영원토록 견고히 세워주시겠다는 약속은 다윗이 아마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일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지만 선대 왕이 사울이었고 그는 사울의 시종들던 종이었고 사울의 딸 미갈을 아내로 맞이했지만 장인어른 사울의 질투심과 불안과 권력욕으로 인해서 사울의 눈밖에 나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울을 피해 한동안 도망다녔던 것입니다. 오랜 피신생활 끝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께서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워주셨습니다. 팔레스타인 남부 헤브론을 본거지로 작은 땅덩어리 유다를 다스리다가 수도를 좀더 북쪽인 예루살렘으로 천도하고서 이스라엘 전역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나 사울이 한때 왕이었지만 자손으로 왕조가 이어지지 못하고 몰락했듯이 다윗도 사울왕가처럼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음을 다윗은 알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안이 있었을 겁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7장 바로 직전 장 6장에 보면 오랫동안 변방에서 방치되었던 법궤를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안치하게 됩니다. 법궤를 새로운 수도로 옮긴 이유도 종교적인 이유, 하나님 섬김을 위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정치적인 이유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있었을 겁니다. 정권의 정통성, 즉 하나님 섬김이라는 명목 아래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어서 통일된 나라를 다스리고픈 정치적 욕망도 다윗의 마음 한켠에 있었을 겁니다. 법궤를 새로 정해진 수도로 옮겨놓고 남쪽 사람들이나 북쪽 사람들이 하나님 섬김을 위해서 예루살렘을 방문한다면 이보다 정권의 정당성에 보탬이 되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법궤로써 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여전히 사울의 잔존 세력들이 북이스라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다윗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현실을 알고 있던 다윗은 정치적 목적으로 법궤를 생각해보았음직 합니다.
지금 다윗의 가장 큰 관심사가 바로 나라의 평안과 번영, 그리고 왕조의 지속이었을 겁니다. 물론 오늘 본문 1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사방의 적을 잠잠케해주셔서 다윗의 나라가 평안히 든든히 세워져갔던 시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윗에게는 다윗 왕조가 뿌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인지, 자녀 대에 이를 때까지 계속 존속할 수 있을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을 겁니다. 사울의 세력을 극복하고 통일된 왕국을 지속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 것인지, 자녀에게 대물림하는 왕조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지, 이 나라가 안정되고 번영할 것인지, 다윗은 끊임없는 통치자, 권력자의 불안 같은 게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한 마음, 전적으로 자신과 자손을 위한 마음과 더불어서, 아울러 다윗은 주를 위한 마음 또한 마음 한켠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를 무찌르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살게 하신 때에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에 있도다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다윗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 그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주를 위한 마음이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자신의 관심사만 있었던 게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를 이루어줄 계획만 심중에 있었던 게 아니라 주를 위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한 마음뿐 아니라 계획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평안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물임을 알았고,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않았고 다윗의 심중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배은망덕하지 않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평안을 허락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을 위한 집을 지어드리고 싶다는 계획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합니다. 새해에 송구영신예배 때 교회마다 말씀카드를 뽑고서 좋아들 합니다만, 다 좋은 말씀만 함에다 넣어두니까 그렇게 됩니다. 더 큰 축복의 말씀을 뽑기를 원합니다만, 하여튼 새해에 하나님의 축복을 원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원하고 새해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여다보고 뽑기도 합니다. 말씀의 빛을 받아서 말씀의 인도함을 받고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은 좋은 믿음입니다만, 새해를 맞이하면서 점보러 가는 많은 사람들 역시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서 무당을 찾아간다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새해에는 인생이 잘 풀릴 것인지 아니면 꼬일 것인지, 알고 싶은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지만 오늘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여느 신앙인보다 한발 짝 앞서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다윗은 주를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주를 향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자신에게 주어진 평안과 안식과 번영과 축복에 대해서 감사하면서 상대적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자신이 소홀한 것은 아닌지, 받은 바 은혜에 대해서 감사를 드리지 못한 것은 아닌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서 안쓰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은 백향목으로 지은 안락한 궁궐에 거하는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가 텐트에 모셔있었던 것을 다윗은 안타깝게 여겼던 것입니다. 그것이 늘 마음에 있었어요. 그래서 기회가 왔다고 생각해서 나단 선지자에게 자신의 그러한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자신의 마음뿐 아니라 주를 위한 계획, 법궤를 안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을 짓고자 하는 계획을 선지자 나단에게 내비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나단이 보기에도 그 마음이 너무 이쁘고 기특하고 그래서 하나님도 기뻐하실 거라고 생각해서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3절)라고 바로 즉답해주었던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여러분의 마음에는 지금 무엇이 가득합니까? 오로지 나 자신, 그리고 오로지 우리 가족, 그 생각뿐입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듯 여러분의 미래에 대해서 알기를 원하는 생각뿐입니까? 새해에는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 흘러가고 풀려갈 것인가만을 관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계획없이 새해를 맞이하는 것도 문제지만 머릿속 구상이 오로지 나와 우리 가족의 바운더리 안에 국한돼 있지는 않습니까? 코로나로 인해서 삶이 팍팍해지고 경제생활이 궁핍해지고 사회생활에 많은 제약과 불편이 따릅니다만, 오로지 지금 언뜻이나마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이 오직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닙니까? 주를 위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이심전심, 꼭 말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아니지만 주님이 여러분의 마음을 알고계시는 주님을 향한 마음과 사랑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시행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나 살기 바쁘고 나 먹고 살기 힘든데, 남을 돌아볼 여유도 없고, 심지어 부족함이 없으실 하나님을 생각할 여유가 없는 것은 아니신가요? 다윗이야 이제 좀 평안함을 누리게 되었고 하나님의 큰 축복을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나마 감사할 마음이 생겨서 그런 것 아닌가요, 라고 반문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다윗에게는 불안이 있었을 겁니다. 사울의 사위였던 그가 법궤가 예루살렘으로 들어왔을 때 춤추고 기뻐하니까 사울의 딸이자 자신의 아내였던 미갈이 다윗을 업신여겨서 뭐라고 말합니까? 삼하 6장 20절입니다.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한마디로 사울의 딸이자 다윗의 아내였던 미갈이 다윗에게 “당신 꼴이 보기 좋던데요!”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은 왕실의 풍속을 알지 않았겠습니까? “왕이 체통을 지키셔야죠!”라고 다윗을 업신여긴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다윗이 어떻게 응대합니까? 삼하 6장 21절입니다.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다윗은 기분이 나빠서 그런지 미갈의 약점을 건드립니다. “정말 보기 좋은 것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네 아버지와 네 집안의 꼴이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미갈의 아픈 곳을 찌르고 있습니다. 단순히 부부싸움하는 게 아니라, 미갈은 전왕 사울의 딸로서 새롭게 왕이 된 다윗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하고 말하고 있고, 다윗은 그러한 미갈에게 하나님과 백성이 나를 인정한다고 응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콤플렉스요 다윗의 불안입니다. 다윗의 열등의식은 사울의 집안에 비하면 자신은 비천한 목동 출신이라는 것, 그리고 모압 여인의 자손이라는 점, 그리고 이뿐 아니라 사울의 집안으로부터 왕권을 빼앗았다는 자책감(사울이 죽은 후 그의 집안에서 이스보셋이 나왔고, 다윗이 그와 싸웠죠), 이러한 생각들이 다윗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관심사는 여전히 다윗 왕조의 정당성 확보와 안위, 그리고 지속과 번영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마음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다윗의 마음 한켠에 있던 마음이 오늘 선지자 나단에게 한 발언으로 인해서 드러났고 하나님은 이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다들 어렵고 힘들어도 각박해지지 말고 주를 위한 마음을 가집시다. 주를 위한 계획을 가집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생각해봅시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의 발로로서의 구체적인 주를 향한 계획을 가집시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받으셨지만 다윗의 계획은 거절하셨습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의 핵심은, “나 괜찮다. 나 외롭지 않다. 나 살 집, 내 영광 담을 집 필요치 않다. 내 영광 이땅의 성전에서 담을 수도 없다. 성전을 짓는 것은 네 때가 아니라 너는 그 점에서 적합지 않다. 성전 건축은 평안할 때, 그러나 아직 여전히 전쟁의 위기가 네 주위에는 가득하고, 너는 전쟁에 부득불 참여해야 했고 많은 피를 흘린 사령관이다. 성전 건축에는 적합하지 않고 네 아들 솔로몬 때가 되면 말 그대로 그의 이름처럼 평안이 넘칠 것인데 그를 통해서 성전을 건축해서 내가 받겠다... 그러나 너의 마음만은 내가 받겠다. 그 마음이 기특하고 선하고 좋다. 그래서 내 마음을 네게 알려주마. 네가 나를 위한 계획을 가지고 선한 계획을 품고 있음을 알려주었듯이 오히려 너를 위한 나의 계획을 열려주마.”
그리고서 하나님은 다윗과 그의 자손과 다윗 왕조를 향한 놀라운 약속을 주십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축복의 약속이 주어진 시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위하는 자신의 마음과 계획을 발설하지 않았다 해도 하나님의 이러한 계획은 차질없이 진행되었을 겁니다. 솔로몬을 세워 다윗을 잇게 하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다윗의 자손메시야를 통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실 계획은 다윗의 마음과 생각과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계획대로 진행할 것이었겠죠. 그런데 이 놀라운 계획과 축복을 하나님은 지금 이 시점에서 다윗에게 주시는 겁니다. 이 계획으로 말할 것 같으면 다윗이 그토록 듣고 싶고 얻고 싶었던 다윗의 최고의 관심사였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마음, 어떤 계획을 늦게라도 품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계획이 하나님의 계획과 달라서 하나님의 승인을 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은 그 진실한 마음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배나 갚아주실 축복의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집을 지어드리겠다고 안타까운 마음에 생각하고 계획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자신의 계획은 다윗에게 다윗의 집을 영원히 견고한 집을 지어주시려는 계획이었음을 바로 이 시점에서 다윗에게 알려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는 무엇이 가득합니까? 무슨 생각 무슨 계획으로 가득차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주를 위한 마음, 주를 향한 계획을 가지기에 여러분의 마음에는 너무 여유가 없는 것입니까? 하나님은 오늘 다윗의 마음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주를 위한 생각, 주를 위한 마음, 주를 위한 계획. 물론 이 계획은 다윗의 사명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다윗의 계획과 달랐습니다만, 하나님은 이 마음을 기쁘게 받으셔서 너무나 놀라운 축복의 약속을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이 약속은 다윗의 관심사요 다윗이 가장 얻고 싶어 했던 마음의 소원이었습니다. 오늘 새해를 맞이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한 생각과 계획이 주를 위한 마음을 품는 것이요, 그 마음에서 비롯되는 주를 향한 선한 계획인 줄 믿습니다. 주를 위한 마음, 주를 향한 사랑, 주를 위한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보고 실행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러분이 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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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27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남아 있는 안식 (히 4장 1-11절)
월요일 아침에 유튜브 전주동산교회 채널에 ‘마음의 동산’을 매주 올립니다. 한 주는 제가 하고 한 주는 부교역자가 진행합니다. 내일 월요일에 올릴 ‘마음의 동산’은 ‘어떻게 새해를 맞이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렸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하나님께서 출애굽시켜주시기 위해서 첫 유월절을 허락하셨죠. 유월절이 들어있는 아빕월, 나중에는 니산월이라고 불리는 달을 1월로 정해주셨습니다. 유월절은 1월 14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달을 새해 첫달로 지정하시므로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바로의 왕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참된 왕으로 섬기게 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이하라는 것이겠죠.
나중에 유대 왕조가 멸망하고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서 1월이 바뀝니다. 유대 월력으로 7월인 티슈라월을 새해의 첫달로 바꿉니다. 7월에는 구약의 주요 절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인데요. 7월 1일이 나팔절, 7월 10일이 대속죄일, 7월 15일부터 한주간 진행되는 초막절입니다. 이토록 중요한 절기가 있는 7월을 새해의 첫달로 삼은 것입니다.
7월 1일 나팔절은 우리에게 신년 1월 1일과 같습니다. 나팔절에는 숫양의 뿔로 된 나팔을 불어서 신년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날 이스라엘 백성은 하룻동안 노동을 금하고 안식하면서 성회를 갖고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유대인들이 광야에서 십계명과 율법을 받을 때도 나팔을 불었는데요, 나팔이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된 것은 주로 전쟁 때였습니다. 전쟁을 소집하거나 공격의 개시, 마침을 알리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혹은 적들의 공격을 경고하기 위해서도 사용했습니다. 전쟁의 승리를 선포할 때도 사용했습니다. 나팔을 전쟁 맥락에서 사용한 이유는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알리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수 있는 곳이 곧 전쟁터였기 때문에 전쟁 맥락에서 주로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새해 첫날을 맞으면서 유대인들이 나팔을 불었던 이유는 하나님의 왕권을 새롭게 마음에 새기는 것이었습니다.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이제는 하나님을 진정한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이 주시는 율법을 따라 언약 백성으로서 살아가야 할 정체성을 갖게 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새해도 하나님의 왕권을 인정하고 왕이신 하나님의 보호와 도우심을 통해서 안정과 번영을 누리기를 기원하는 의미로 새해를 맞이하면서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나팔이 불릴 때가 언제입니까? 예수님이 이땅에 다시 오시고 우리가 부활할 때입니다. 마지막 나팔소리죠. 마지막 나팔소리가 울리면 죽은 자가 부활해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예수님은 나팔 소리와 함께 이땅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나팔 소리와 함께 개시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52절에서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 우리가 다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인데,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에게 부활의 몸을 입혀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존의 혈과 육으로는 하나님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을오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어야 하나님나라 곧 하나님의 왕권을 온전히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받기 위해서 우리 몸이 전혀 새로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몸을 입어야만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받아서 하나님나라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나팔을 분다는 것은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등극, 하나님의 왕적 통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나팔을 불며 새해를 시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새롭게 우리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마음에 새기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므로 참된 안정과 번영을 소망하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언제 또 나팔을 부냐면 안식일이 시작할 때입니다. 안식일에 회당지기가 지붕에 올라가 안식일임을 알릴 때도 나팔을 붑니다.(평화신문 2013.9.1. 참고) 안식일을 맞이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어떤 날입니까? 한주간의 제칠일째 되는 날입니다. 한 주의 끝입니다. 한 주를 마무리하면서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리고 새해를 맞이하면서도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끝과 시작에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역사의 끝이고 우리의 부활은 새하늘과 새땅의 시작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예수님이 초림해서 선포하시고 세우신 하나님나라를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완성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끝이고 시작입니다. 끝과 시작에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0년 마지막주일입니다. 지금은 연말연시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할 시점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주일에, 우리의 종말론적인 소망, 참된 안식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더욱이 올해 2020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힘든 한 해였습니다. 코로나의 창궐로 인해서 지금에까지 우리 모두가 고생하고 있습니다. 삶의 제한과 불편뿐 아니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고생스런 한 해를 지나오면서 여전히 이 고생이 계속되는 연말에 우리가 하나님이 주실 참된 위로와 평강과 안식을 소망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누가 안식일, 주일의 가치를 아느냐면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만이 안식일의 참된 가치, 주일의 참된 가치를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지도했던 한 청년의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청년, 그러니까 이분의 아들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 때 이분의 남편이 불의의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한 살 많은 딸과 이제 태어난지 얼마 안된 아들을 둔 가정의 가장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입니다. 남겨진 아내는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요, 돌아가신지 얼마안된 남편이 꿈에서 나타나 교회를 다리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교회에 다녀본 적이 없던 집안이어서 이분도 놀란 거예요. 꿈에서 들은 말이 너무나 선명해서 그래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교회를 잘 다니셨고 자녀들은 제가 지도하는 청년부에서 열심히 교회를 섬기고 신앙생활을 잘 했습니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겨진 그분이 보험일을 하게 되었는데요, 천성 상 보험 영업이 맞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사람들 찾아다니고 말을 많이 하는 그러한 직업이 적성에는 맞지 않았지만 자녀를 키우고 생계를 꾸려가려다보니 맘에 맞지 않고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주야로 열심히 뛰어나녔다고 합니다. 이분이 말하기를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특히 하루를 끝마치고 집에 늦게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합니다. 직업의 특성상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에게 보험상품을 이야기하는 일이 많았는데요, 적성에 맞지 않기 때문에 많이 힘들었고 피곤한 상태로 집에 늦게 돌아오기가 일쑤여서 밤에 잠자리에 드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밤에 안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는 사람은 낮에 힘들게 바쁘게 하루를 보낸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안식일, 오늘 우리에게는 주일인데요 이 주일에 진정한 쉼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엿새 동안 힘써 일한 사람입니다. 그래야 안식의 참된 가치와 맛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에 대해 말씀합니다. 안식이라는 주제로 성경의 구원 역사를 개관합니다. 그런데 안식을 도입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창세기 2장 2-3절에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그치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히브리어로 보면 지금 읽은 창세기 2장 2-3절은 세 문장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세 문장의 각 문장은 일곱 개의 히브리어 단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각 문장의 가운데 단어가 바로 “일곱째날”입니다. 의도적으로 ‘일곱째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목적이 엿새 동안의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칠일째의 안식에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문명역사를 보면 일과 쉼의 순환이 어느 문명에든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어떤 문명은 나흘, 닷새, 엿새, 여드레, 심지어 열흘을 한 주간으로 하는 민족도 있었습니다만, 지금에까지 꾸준히 지속되어오고 인류의 표준이 된 것은 칠일을 한 주로 한 이러한 양식뿐입니다. 칠일의 한 주, 그리고 칠일째 되는 날의 안식이 우리의 내적 존재 양식과 일치하기 때문이겠죠.
하나님은 엿새 동안 힘써 창조하시고 창조의 일을 완수하시고서, 다 마치고서 제칠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셨습니다. 제칠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이라고 부르죠. 안식일이라는 말은 원래 히브리어 동사 ‘사바트’에서 파생된 단어인데요, ‘그치다’, ‘중지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말의 원래 뜻은 일을 그침, 일을 마침이라는 뜻이 있는 것입니다. 동사 ‘사바트’는 ‘그치다’는 뜻만 아니라 두 번째 의미로 ‘쉬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이라는 것은 일을 그치고 쉼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안식>, 미르바 던 저 참고)
히브리서 기자는 안식이라는 주제로 성경을 전체로 읽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창조를 마치신 후 제칠일째 되는 날에 안식하신 하나님이 피조세계에 안식을 도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누리고 계신 안식을 피조물, 특히 인간에게 주시려는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애굽에서 바로의 종살이하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해방시켜주시고 출애굽시켜주신 이유도 참된 안식을 약속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들이 출애굽한 후 시내산에서 하나님께서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죠. 십계명의 가장 중심부에 제4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가 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4계명은 이전 1-3계명의 하나님 섬김과 5-10계명의 이웃 섬김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니까 안식은 이웃과 함께하는 쉼이요 공동체와 함께하는 안식일이요 주일인 것입니다. (<안식일은 저항이다>, 월터 브루그만 저, 25쪽)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신 하나님이 출애굽기에 보면, 이후에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죠. 성막은 안식일에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는 회막이요 또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증거하는 증거막이라고도 불립니다. 회막이요 증거막으로서 성막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어떠한 약속입니까?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는 언약의 성취를 나타냅니다. 이 언약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성막이요 이 언약의 성취를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안식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안식을 목적으로 인간을 창조하셨고 안식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켜주셨고, 안식을 목적으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은 언제나 성취가 되어도 언제든 약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안식의 일차적 성취를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안식을 약속해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약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그들을 인도하셔서 참된 안식을 그들에게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약속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 약속을 온전히 붙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불신했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지 못한 채 하나님께 불순종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 하나님께서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겠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그리고 그 땅에서 누리게 될 안식을 약속해주셨는데, 그들이 그 약속을 믿음으로 붙들지 못하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결국 불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시고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 그리고 하나님이 주실 새로운 기회와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갈 것이라는 약속에 대해서 그들이 복음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 6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하고 오직 여호수와와 갈렙만이,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의 다음세대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서에 보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서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후 그 땅을 차지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사방에 안식을 주셨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기서 안식을 얻었지만 그것이 참된 안식, 영원한 안식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본문 8-9절을 보십시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시편 95편에서 다윗이 광야 이스라엘 백성 역사를 회고하면서 오늘 자신의 동시대 사람들에게 권면하기를 그때 그 광야의 조상들처럼 강팍해져서 불순종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서 여호수아가 제공한 안식, 그러니까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것으로 안식이 끝난 거라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안식할 때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에 동참할 수 있을 거라는 약속이 여전히 그 당시 다윗 시대에도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늘 미래에 남아 있고 소망으로만 남아 있는 안식, 여전히 약속으로 남아 있느 안식이지만, 그러나 오늘 믿는 우리는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간 자라고 또한 말씀합니다. 본문 10절입니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우선 이 말씀은 예수를 믿고 새 창조의 역사를 경험하여 새롭게 된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이 약속하신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장)는 약속의 성취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강조점은 오히려 미래에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11절에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구약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이 거울이 되어서 우리는 불순종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에 대한 약속을 굳게 붙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리게 될 최종적인 영원한 안식은 죽음으로써 얻게 될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안식을 소망하면서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우리는 올 한 해가 끝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나팔을 불펴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올 한 해 분투하며 수고하며 애쓰며 여기까지 오셨는데요, 이걸로 끝이 아니라, 이것으로써 모든 수고가 끝나고 참된 안식을 얻는 지점이 아니라, 새롭게 다가올 2021년 역시 우리가 이 안식을 고대하고 소망하면서 이땅에서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 불순종하지 말고 믿음을 굳게 견지하고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안식을 소망하면서 믿음으로 승리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장 12-13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렇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이땅에서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땅에서 힘써 수고하고 행한 일의 따름, 그 일의 결과로서 그들이 참된 안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적 안식의 기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안식 혹은 ‘쉼’이라는 히브리어로는 ‘메누하’가 있습니다. 헤셀이라는 유대인 학자가 ‘예언자들’이라는 좋은 책을 쓴 분인데요, 이분이 ‘메누하’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메누하는 행복과 고요, 평화와 조화와 같다. 이것은 어떤 다툼이나 싸움도 없으며, 어떤 두려움이나 혼란도 없는 상태이다. 좋은 삶의 본질은 ‘메누하’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79쪽)
시편 23편에 나오는 ‘쉴만한 물가’도 ‘메누하’와 같은 어원입니다. 쉼을 주는 물가입니다. 목자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분의 양떼인 우리를 쉼을 주는 물가로 인도해주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랍비의 창세기 주석에 보면 일곱째 날에 무엇이 창조되었냐면 “고요, 평온, 평화, 휴식”이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교부 어거스틴의 말, “오 주님, 당신께서 우리를 지으셨으므로, 우리가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 우리의 영혼에는 쉼이 없나이다.”
진정한 안식은 오직 안식일의 주인되시는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땅에서도 안식을 누릴 뿐 아니라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쓰므로 우리에게 남아 있는 안식을 모두가 얻고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두렵고 떨림으로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이 큰 약속을 이루어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2020년 12월25일 동산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성탄이 조명하는 인생, 역사, 우주 (요 8:12)
빛은 참 오묘한 특성을 지녔습니다. 물질이기도 하고 물질이 아니기도 합니다. 입자이기도 하고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기도 합니다. 입자라는 측면에서 빛을 광자라고 하고 파동이라는 측면에서 전자기파라고도 합니다. 속도가 유한하면서도 우주 전체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는 없다는 점에서 무한에 가깝습니다. 유한한 속도로 움직이는 빛이지만 우리가 빛을 관찰할 때 우리가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빛의 속도를 재든 아니면 빛에 멀어지면서 빛의 속도를 재든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합니다. 1초에 약 30만 킬로미터를 가는 속도가 일정하게 관측됩니다.
별 중에서 폭발하면서 밝은 빛을 내고 수명을 다하는 별이 초신성입니다. 가끔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초신성을 관측합니다. 초신성에서 밝은 빛을 지구에서 관측했는데 그 별이 지구에서 10만 광년 떨어진 별이라면 이 별빛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1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초신성이 폭발할 때 거기서 그 우주선을 타고 온 사람이 있다면 폭발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 우주선 관측자에게는 0초의 시간이 흐른 것일 뿐입니다. 빛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시간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신비한 물질이요 물질이 아닌 존재입니다. 빛의 세계와 물질의 시공간 세계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 제원호 저, 참고)
빛의 이런 오묘함과 신비함 때문인지 성경은 하나님을 빛이시라고 묘사합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함은 하나님의 신비함,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함, 볼 수 없는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빛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땅에 오신 예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빛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로는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반사하셨다는, 소위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예수님이 그래서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씀합니다.
이 두가지는 어쩌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100%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느 측면에서 보고 있느냐 하는 차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래 하나님으로서 빛이신 예수님,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파송을 받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반사하신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첫째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빛은 언제나 일정하게 나아온다는 점에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빛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오늘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이요 아기 예수로 출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만, 한 번 오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어김없이 언제든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아울러 재림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빛이 매일 아침 어김없이 만물을 신선하게 비춤으로 하루를 열 듯이 빛되신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시는 예수님이시므로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신학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응답했습니다: “내가 느끼는 기독교의 문제점은 그 모든 일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2천 여 년 전에 일어난 어떤 일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00년 전에만 태어나셨더라도 모든 것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분이 대답해주었습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은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취하신 구원을 각 개인에게 가져다주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오고 계십니다.” (<성탄절 메시지>, 제임스 몽고메리 저, 34-5쪽)
오늘 성탄절에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빛으로 오십니다. 빛으로 오셔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심령 속의 어둠을 쫓아내주십니다. 본래 어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지 않은 상태가 어둠이요, 빛이 비추면 어둠은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빛의 부재가 곧 어둠입니다. 오늘 성탄절에 빛으로 우리의 심령에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의 온갖 어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어둠, 미움과 증오의 어둠, 슬픔과 상실의 어둠, 시기와 질시의 어둠, 무감각과 무관심의 어둠을 멀리 쫓아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빛되신 자신이 빛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심령에 오시면 우리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확하게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큰 어둠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빛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가까이가면 빛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어둠입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입니다. 죽음을 이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믿는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나라인 독일은 국교가 지정돼 있지 않고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지만 카톨릭이나 개신교회를 위한 교회세를 징수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교육을 받는다면 기독교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숙지하게 될 것이며 기독교의 소양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한 독일인 목사가 긴급한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교회를 부득이하게 비우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는 다가오는 주일에 자신을 대신하여 설교할 목사를 초빙하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웃에 사는 한 명망 높은 선생에게 설교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나요?” 이 목사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물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다시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론 나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그 말을 듣고 “그러면 됐어요. 내가 당신에게 설교할 본문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인데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본문입니다” 그는 그 본문을 선택하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목사의 부탁을 받고서 그는 그 본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위한 개요를 적어보았습니다. 그는 회의론자였고 이성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자신의 요점들을 쓰고 그 이유를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였습니다. 이것을 적고 나서 그는 “우리는 우리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보고 양심에 찔려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적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나는 설교 노트에 ‘우리는 구원자를 필요로한다’는 문구를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영혼 위에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과 나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 즉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을 붙들게 되었다. 다음날 나는 설교를 하였다. 나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구원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탄절 메시지>, 180-2쪽)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어쩌다 설교하게 된 이 선생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떻게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걸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시고 이땅에서 아들로서 궁극적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아버지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다가오시는 아버지의 왕적 통치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왕과 신하 관계의 왕적 통치를 받은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의 통치를 온전히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부하에게 임한 왕적 통치가 아니라 자녀에게 임한 아버지의 자비로신 통치를 온전히 받으셨던 것입니다. 궁극적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자발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왕적 통치,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신 것입니다. 소위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땅에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바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예수님, 아버지에게 궁극적인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드림으로써 선택받은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왕적 통치,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양자 삼아주셔서 아버지의 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의 그 풍성함을 상속받게 하신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가 계십니다. 유일하신 독생자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섬겨야 할것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속의 우상을 다 깨뜨리고 궁극적인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어떻게 아버지께 바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유일하신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들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걸으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빛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 아버지의 나라의 백성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의 자녀가 되어서 그 나라의 온갖 혜택과 보호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룩스와 루멘입니다. 룩스는 빛 자체를 의미합니다. 근원적인 빛, 발광체에서 빛나는 빛, 별에서 빛나는 빛, 빛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반면에 루멘은 반사된 빛, 빛을 받아 다시 빛나게 해주는 2차적인 빛을 뜻합니다.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 259쪽) 하나님은 룩스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룩스이시며 동시에 루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으로서 룩스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그대로 반사해주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루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빛의 자녀로서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 동산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이되 하나님의 빛과 예수님의 빛을 반사시켜서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입니다. 루멘입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에 빛으로 이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을 환하게 비추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해보면서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첫 번 째 질문은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어떠한 분이시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빛이시며 영광이신가?’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은 인생의 온갖 어둠을 극복하고 있습니까? 코로나로 힘겨운 이 겨울에, 어둠이 길어진 이때, 그러나 다행히도 동지가 지나 이제 점점 낮이 길어지고 있습니다만, 이 어려움이라는 어둠이 예수님 때문에 위로의 빛, 소망의 빛,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빛,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의 빛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빛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있습니까?
두 번째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고 있습니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서 참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빛이시고 예수님도 빛이시고 그리고 우리도 빛입니다. 우리 교회가 빛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높아진 우상을 깨뜨리고, 우리 마음 속의 욕심과 거짓과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을 비울 때에 우리의 마음에 빛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탄절에 우리는 성탄이 조명하는 인생, 역사, 우주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첫 성탄절에 동방박사를 안내했던 빛, 그 빛이 조명하는 우리 인생, 우리네가 살아가는 삶의 역사,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 이 모든 것이 환히 밝아지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빛으로 환하게 밝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미래와 모든 것이 참된 위로와 소망으로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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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교독 - 51. 시편 118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115장
▶기도
▶성경봉독 - 요한복음 8장 1~11절
▶설교 - 살리고 세우는 사람
▶찬송 - 122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0년 12월2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살리고 세우는 사람 (요 8장 1-11절)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인데 반해서 우리의 죄는 죽음을 가져옵니다. 성부 하나님은 만민에게 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생명의 영, 살리는 영이셔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분리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사랑하여서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우리를 찾으시되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고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려고 법을 주셨습니다. 법을 주심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죄를 규정해놓으셨습니다. 아울러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게 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예방책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심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죄를 짓고 나서도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율법으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예방하고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사제도를 규정해주심으로 언약 백성의 삶을 보호해주시고 생명을 증진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요 율법의 목적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인간은 너무나 악해서 살리기 위한 법을 오히려 죽이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살리기 위한 법이 죽이기 위한 법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의 악이요 죄성입니다. 자신에게도 자신을 살리기 위한 법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이는 법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법이 되었음을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왜 선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죄성과 악함 때문입니다. 율법조차도 악을 저지르는 도구로 바꿔치기해버리는 인간의 교묘한 술책이요 죄성입니다. 만약 인간이 율법의 제정 취지대로 선한 의도대로 율법의 정신을 살리면 그 법에 따라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려는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법에 충실함으로써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선하신 예수님이 율법의 목적대로 죄인을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된 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로 이끌려 왔습니다. 이러한 죄를 저지를 사람에 대해서 율법은 뭐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죽일 것을 명합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간음죄를 저지른 관련 당사자 즉 남자와 여자 모두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이는데 왜 돌로 쳐 죽이는가, 보통 우상숭배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꾀거나 하나님을 저주한 사람의 죄와 같은 경우는 엄중한 처벌로 다스려야 했던 바, 이 죄를 저지를 사람에 대해서 돌로 쳐죽이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간음죄도 이와 같은 죄의 범주에 두시는 것입니다. 간음죄가 중대한 범죄인 이유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을 깨뜨리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돌로 쳐죽이는 문화가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 가정을 깨는 범죄,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범죄라는 중대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간음이라는 죄가 인간의 분노를 더 자극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손가락질하고 싶은 죄가 간음죄고 가장 처벌하고 싶은 죄도 역시 간음죄인 것 같습니다. 복수를 유발시키는 죄 역시 간음죄의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반면 구약 율법에서는 우상숭배를 꾀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큰 죄로 다루고 돌로 쳐죽이도록 했던데 반해서 꼭 법 규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간음죄가 더 분노심을 자극하여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은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그래서 당시 간음죄를 처리할 때 마을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 돌을 던져 죽이는 일이 있었던 듯합니다. 간음에서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마을 사람들이 질질 끌고 올 때 다들 손에 돌을 들고 온 이유입니다.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려고 말입니다.
이 여인을 굳이 예수님께로 끌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법에 따라 처벌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법을 집행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려는 율법에 대한 열심도 아니었고, 이것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걸려 넘어뜨리고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7장에서 보았다시피 성전지배체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구속영장을 발부해서 성전경비대원을 예수님께 보냈죠. 예수님을 체포해오라고.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권위를 보고 가르치는 내용의 적법함을 보고서 차마 예수님을 현장에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이때 이후로 예루살렘 종교의 지도층이 예수님을 그냥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그래서 어떠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가두려고 이런 저런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덫을 놓으려 했던 일화도 공관복음서에 여러 군데 실려 있습니다. 가령,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율법을 들이대면서 율법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예수님께 묻는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고 자체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을 따라 돌로 치라고 말하셨다면 로마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그간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며 죄인을 다루시는 자비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던 예수님이 가르쳤던 대로 그냥 용서해주자, 라고 말씀하셨다면 유대 율법을 어기게 되어 율법에 충실했던 유대인들에게서 신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라다니는 민중들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그들에게는 손해볼 것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딜레마적인 상황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곤경입니다.
그래서 음모론이 나오는 겁니다. 이 상황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기획 연출했다는 음모론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잡아넣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딜레마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질문을 해보았는데, 예수님께서 너무나 지혜롭게 잘 대답하시고서 빠져나가니까, 이번에는 좀더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사건을 기획한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체포하고 고발해서 잡아넣거나 사형집행을 받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다가 음행 사건을 기획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그런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매수해서 현장을 급습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 율법을 어긴 여인을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 또 어떻게 처벌하느냐, 이러한 문제가 관심사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느냐가 이들의 관심사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충분합니다. 간음 관련 당사자 중 한 사람인 남자는 어디로 도망쳐서 없고 여인만 붙잡힌 것도 이상하고, 은밀한 중에 저지르기 쉬운 간음 현장을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급습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고, 설사 마을 사람들이 평소 보았던 품행에 비쳐서 꼬리가 밟혀서 현장에서 발각될 수 있었다 해도 그들의 손에 의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까지 사건이 넘어온 것도 석연치 않고, 이래저래 음모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들의 악함을 아셨겠죠. 자신을 넘어뜨리고 고발하려는 그들의 악한 의도가 있음을 아셨을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음모를 알지도 못하는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손에 돌을 들고서 음행한 여인을 질질 끌고와 돌로 쳐죽일 기세인데, 지금 예수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실행에 옮길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잡아넣을 궁리만 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알지 못할 리가 없으시죠.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만 감방에 쳐넣을 수만 있다면 한 여인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돌로 쳐죽임 당하는 것쯤이야, 하는 악한 생각을 왜 예수님께서 읽지 못하셨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어기지도 않으시면서 로마법을 존중함도 보여주셔야 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저들의 악한 의도의 손길에서도 벗어나야 하겠고,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죄를 저질렀다 해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악한 의도의 희생제물이 되기 쉬운 여인을 살려야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죽일 수만 있다면 여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고 현장에서 붙잡힌 것도 분명하지만, 사건 이면에 이런 복잡한 사건 전개 과정과 음흉한 간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동안 땅에다 글을 써내려가면서 사람들의 흥분도 가라앉히고 시간도 버셨던 예수님은 드디어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예수님께서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시자 마자 예수님은 언급부터 하신 게 아니라 바로 굽혀서 땅에다 무슨 글자를 써내려가는 것이었고, 이를 지켜보다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계속 재촉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신 내용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이렇듯 현장에서 발각돼 드러나게 된 간음의 범죄를 처리할 때 돌로 쳐죽이는데, 증인이 한 사람이어서는 안되고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고, 돌로 쳐죽일 때도 사건의 증인, 그러니까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고서 나머지 사람들이 집단으로 돌을 던질 수 있게 규정돼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이 증인이니까 증인 나와봐, 그리고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될 것인데,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구약 율법에서 증인으로 하여금 먼저 돌로 치게 하셨을까요? 증인이 사건을 증언하는 자로서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겠죠. 사람을 죽이는 중차대한 일을 가져온 증언을 한 자로서 이 증언이 진실임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겠죠. 거짓 증언하고서 내가 증인이니까 내가 먼저 돌을 던진다, 이 정도로 악한 사람은 많지 않겠죠. 그런 거짓 증언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죄를 목격하고 죄를 증언해서 죄인을 처벌하려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러한 동일한 죄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려면 최소한 그 죄에 있어서 자신이 깨끗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구약 율법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먼저 돌을 쳐야한다는 율법의 의도를 구체화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도를 담은 이 말이 분노에 가득찬 사람들을 주저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 취지도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죄로부터 사람들을 떨어뜨려 생명을 보존하려는 살리는 법임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셨고, 예수님 자신을 죽이려는 악한 의도로 달려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간계에 의해서, 설령 비록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한 여인이 희생되지 않고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의 의도와 정신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에 가득찬 채 손에 돌을 들고 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적은 사람에까지 손에 든 돌을 주위에 내려놓고 현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반응도 좀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과 같은 음행을 저질렀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대로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게 되어서 거기에 자신이 없어서 도망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왜 마을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 하나씩 하나씩 떠났을까요?
여인을 살리려는 예수님의 준엄한 진정성과 어떠한 영적 권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와 같은 존엄을 지금 마을 사람들이 보게 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는 분명 음행 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 증인들이 선뜻 먼저 돌을 던지기에는 지금 예수님의 발언이 너무나 묵직하게 그들의 심령에 꽂힌 것이 아닐까요? 꼭 이 여인 같은 간음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사건의 맥락과 이면과 악한 의도를 꽤뚫어보시고서 악한 의도의 희생자를 만들 수 없다는, 평소 살리기 위해서 이땅에 오시고 살리는 구원을 가져다주신 예수님께서 여인을 살리려는, 그러면서도 이들의 올무에서 벗어나려는 지혜를 반짝 드러내보이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적 영광과 권위를 보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옥한흠목사님이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악한 양심 혹은 구겨진 양심에게서도 작동함을 설교자 본인이 보았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때 사람들의 양심은 평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양심이라도 이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어떠한 반응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을 찔러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하고 깨지고 억압되고 민감성을 상실한 채 오작동하는 양심조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보게 된 신적 권위와 영광,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말씀의 권위 앞에서 사람들의 양심은 여인을 정죄하는데로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향하므로 사람들은 현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오직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인에게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십자가가 작동함을, 이 사건에서 십자가가 미리 예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수치스러움, 사람들의 분노에 직면한 공포, 죽음 앞에 서있는 위협, 왜 자신이 그러한 죄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후회와 자책,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수치스러움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죄 없는 나 자신도 그래서 너를 향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충분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묵직한 메시지를 돌 대신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급한 상황에서 여인을 살리고 본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인을 살려야 했습니다.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분노에 찬 사람들과 악의에 찬 사람들의 악한 의도의 질문에 대해서 지혜로운 대답을 하신 것이고,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양심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언하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살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구원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을 세우기 위한 살림입니다. 살려서 제대로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다급한 여인을 살리실 뿐 아니라 그 여인을 바로잡아주셨습니다. 이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삶, 바로 세워져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살리신 것입니다. 살리고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망에 처한 인생에게 영생만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바른 삶,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구원입니다. 이토록 살리고 세우는 삶,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고, 우리를 살리고 세우시려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와 수치를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여인이 이후에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겠습니까? 이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라 살리고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교회가 2021년에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생명의 공동체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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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1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히든카드 (요 7장 37-39절)
요한계시록 2-3장에 걸쳐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나옵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 촛대라 불립니다. 왜 교회를 촛대라고 한 것일까요? 일곱 교회 중 첫 번째 교회인 에베소교회는 촛대인데 안타깝게도 촛대가 옮겨질 위기에 놓여집니다. 요한계시록 2장 4-5절에 보면,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에베소교회가 분명 촛대인데, 처음 행위를 회복하지 못하면,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겠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에베소교회에 하시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촛대여서 촛대 역할을 해야 하는데, 촛대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촛대를 옮기겠다는 것입니다.
촛대란 무엇입니까? 신약의 교회가 촛대라면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도 촛대라 불립니다. 성막 기구 중 하나인 촛대를 가지고 성막 전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촛대, 다시 말해 금으로 만든 등잔대는 빛을 비추어서 성소를 밝히는 역할을 합니다. 등잔대에서 등불이 퍼져가므로 성소를 환하게 밝히는 것입니다. 등잔대에서 퍼져가는 불빛은 성막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성전에 임한 하나님의 임재요, 성령을 매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곧 참된 성전에 임한 성령의 임재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빛을 발하는 교회의 사명을 또한 가리킵니다.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을 향한 교회의 증언이며, 이 복음의 증거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케됨을 가리키는 표현이 교회가 촛대라는 것입니다. 교회를 촛대라 일컬음은 참된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주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교회에서 촛대가 옮겨진다는 것은 교회의 알맹이, 교회의 핵심이 빠지고, 그 결과 껍데기만 남고 더 이상 교회다움을 잃어버린 채 교회이기를 그친, 실제로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더 이상 교회일 수 없는 껍데기로 전락할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교회다움은 결국 교회에 임하시는 성령이요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가 관건입니다. 하나님은 교회 위에 자신의 이름을 두고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로 삼으시는 바, 교회를 통한 성령의 역사,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 수행, 즉 세상의 빛으로서 교회의 증언과 역할과 관련해서 교회를 촛대라 부르는 것입니다.
촛대가 옮겨지지 않고 교회가 촛대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다시 말해서 교회다움을 유지하고 계속 빛을 발하고 증언하는 공동체로서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되려면, 이는 교회의 본질을 붙들고 본질적인 사명과 기능을 다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요,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빛을 발하는 것이겠죠. 다시 말해서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 의하면 다음 세가지입니다. 교회의 핵심이요 교회의 알맹이를 간직한 교회, 본질을 붙드는 교회, 교회다움을 유지하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초막절 절기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행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본문 37절을 보십시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교회가 계속 촛대로서 존재하려면, 교회가 교회되려면, 하나님의 임재의 빛이 끊임없이 증거되는 교회가 되려면 첫째,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시작해야 합니다. 목마름이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마는 목마름이 없다고 착각하기가 쉽습니다. 자충족적 자기 만족에 빠져서 목마름을 애써 외면하고, 다른 것들로 채워졌다는 착각 가운데 목마름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마름과 갈증이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의 복은 다 목마름의 복입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교회의 촛대가 옮겨지지 않으려면 이 목마름의 복이 흘러 넘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여덟가지 복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목마른 자가 복되다!’는 선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슬퍼하며 우는 애통하는 자, 마음이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이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 이러한 사람들은 참 복된 사람들인데, 근본적으로 이들에게는 목마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 역시 목마른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만나 인생의 해갈을 받았지만 더 큰 해갈을 목마르게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그들도 여전히 목마른 채 하나님이 약속하신 진정한 해갈을 바라보며 광야같은 인생길을 걸어야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유사 해갈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사 해갈, 거짓 해갈도 있다는 겁니다. 인생 문제의 해갈인 줄 알았는데 얼마못가 다시 목마르게 되는 잠깐의 해갈입니다. 그러면 진정한 목마름의 해갈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예레미야 2장 13절에서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목말라서 생수를 찾기 위해서 웅덩이를 팠는데, 절망 끝에 나온 인간의 시도죠. 진정한 생수를 가두지 못하는 터진 웅덩이였다는 것입니다. 목마름에 대한 진정한 해갈을 가져다주는 생수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잠깐의 만족이요, 그래서 해갈된 줄 알았는데 마시고 나서 얼마못가 다시 목마르게 된 상태입니다. 목마름에 대한 진정한 해갈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게로 와서!”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촛대로서 계속 존재하려면, 교회가 성령의 임재로 충만하려면, 교회가 교회다움을 간직한 채 교회가 교회되려면 첫째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 끊임없이 더 가까이 나아가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내게로 와서!” 예수님께 집중하는 공동체! 늘 끊임없이 예수님의 주되심이 선포되고 인정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가르쳐지고 예수님의 생애가 조명되며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 삶에서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나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소망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완전 예수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그리스도를 배우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를 배우고 예수께 집중해야 합니다. 목마른 자들이라면 예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목마른 문제의 해답은 오직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해갈을 위한 웅덩이를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늘 예수님을 오매불망 찾아야 합니다. 더욱이 목마름을 느낄 때마다 즉시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갈증 문제를 해결해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예수님께 집중하는 만큼만 성령이 역사하시는 교회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께 집중된 신앙, 목마를 때마다 예수님을 찾는 성도가 될 때, 그때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충만하게 임재하시는 겁니다.
셋째, ‘마시라’, 마셔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되려면, 교회가 성령의 임재로 충만하려면 성도들이 목마를 때마다 예수님께 가서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마셔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의 진리, 복음의 진리, 예수님을 통해, 특별히 십자가를 통해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자녀됨의 확신, 사죄와 은혜의 확신, 구원의 샘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사야의 예언, 사 12장 2-3절,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우리가 목마를 때마다 예수님께로 가서 구원의 우물을 퍼올려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에게 가서 마신다는 것은 “나를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는 겁니다. 본문 38절을 보십시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예수님을 믿는 자란 어ᄄᅠᆫ 사람이겠습니까? 두 주 전에 ‘마음먹기가 중요합니다’라는 설교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고,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리라고 마음의 결단을 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에게로 나아가서 목마른 문제의 해갈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즉 마실 수 있게 되는 겁니다.
교회가 교회로 계속 존재하려면, 촛대로서의 교회가 계속 빛을 발하는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남아있으려면, 우리에게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목마름을 느껴야 하고 목마를 때마다 다른 데 기웃거리지 말고 예수님께로 직행해서 물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만 하면 교회는 이땅에서 사라져버리는 일이 결코 없게 될 것입니다. 현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가 간혹 이 사회에서 잉여인간 취급을 받는 듯하고 지탄을 받기도 하고 때로는 투명인간 취급을 받기도 하고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한 듯 보이고, 종교가 방역에 짐이 되어서 사회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 불필요한 존재로 낙인이 찍히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깊습니다만, 목마른 자에게 나눠줄 생수만 있다면 교회는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존재요 세상의 소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가 목마를 때마다 오히려 오직 예수님께 집중하고 예수님을 높이고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고민할 때, 우리는 해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목마름이 충족될 것입니다.
그러면 목마를 때 예수님을 찾아서 마신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 말일까요? 무엇보다 예배입니다! 예배의 자리를 사모하고 예배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숭배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낮추어 엎드려 경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로 예배할 때 생수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절망이 변하여 소망이 되고, 우울이 변하여 춤이 되고, 문제가 크게 보여 문제에 치인 인생이 크고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것이 예배 때 목마름의 해갈을 얻는 마심입니다. 예배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는,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나아가는 기도 또한 우리가 예수님께 나아가 목마른 목을 축이는 마심이 됩니다. 더욱이 요즘 같은 코로나 시절에 우리는 더욱 예배와 기도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초월하여 계신 영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기도가 제대로 수행되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생수를 마시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이 예배와 기도를 사모하며 예수님께로 집중할 때마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유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에게서 마실 물,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시켜주는 갈증 해소의 생수는 무엇입니까? 38-3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흘러나오는 생수, 생수의 강, 생수가 흘러넘치는 충만한 성령이십니다. 즉, 예수님께 집중하면 할수록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되는 성령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요, 성령의 사람이 될 때 이로써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선물로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때 우리 속 깊은 곳에서부타 참된 해갈을 얻게 될 것입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가장 중요한 약속도 바로 그것입니다! 목마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광야에서 반석에서 물을 내서 마시게 하신 것도, 초막절 절기를 지킬 때마다 광야의 목마른 생활을 상기하면서 절기를 지킨 것도, 광야에서 다윗이 장인 사울의 위협을 피해가며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 하나님을 목마르게 외치고 찬양했던 것도, 나라를 잃고 조국을 떠나 바벨론 포로민으로 거하면서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할 때도, 하나님의 오심, 하나님이 보내실 메시야가 가져다주실 기쁨의 구원, 목마름을 해갈해줄 생수를 소망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진 않지만, 예수님 탄생 이백여년 전부터 초막절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물을 길어 와서 제단에 물을 붓는 의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출발한 행렬, 맨 앞에 제사장이 선두에 서는 긴 행렬이 실로암못까지 가서 거기서 물을 떠 항아리에 가득 담고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돌아와서 성전 제단에 그 물을 쏟아 붓는 의식이었습니다. 이 의식은 7일간 지속되는 초막절 절기 때 매일 수행되는 의식이었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구원의 풍요로운 새 시대를 소망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목마름을 해결시켜주실 풍성한 생수를 기대하면서, 초막절 절기 매일 제단에 풍성하게 물을 쏟아 부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명절 끝, 곧 초막절 끝날에 예수님께서 그 약속이 지금 이들이 보는 지금 이 현장에서 자신에 의해서 실현되고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생수의 강의 근원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양의 보좌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창을 찔리셔서 물과 피를 쏟으신 예수님의 육체과 일차적으로 ‘그 배’입니다.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에스겔 47장에서 성전 동쪽 문지방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참된 성전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수 샘물이 나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십자가 죽음)을 받지 않으셔서 성령이 제자들 가운데 아직 계시지 않지만, 에스겔 47장의 예언의 환상처럼 나중에는 온몸을 뒤덮는 거대한 강물이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을 생명으로 가득차게 해주실 것인 바, 그 생수의 강의 근원은 참된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믿는 자들의 깊은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을 이차적으로 가리킵니다.
2020년과 2021년 우리 동산교회는 동일한 표어를 가지고 사역을 진행해갑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동산교회!” 여기서 생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킵니다. 즉 성령이 충만하여 흘러나오는 동산교회가 되는 비전입니다. 성령이 예수 믿는 자들, 우리 교회를 통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실천될 수 있을까요? 어떠한 생활혁명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일까요?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온 성령이 교회를 통해서도 흘러나오려면 교회가 예수 공동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떠한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닮은 작은 예수가 될 때,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오시는 성령이 우리를 통해서도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이 흘러나오는 교회, 성령이 흘러나오는 성도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람일까요? 우리가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한 구체적인 실천적 지침은 무엇이 있을까요? 아까,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기도를 말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기도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향해서 성령이 흘러나오는 예배와 기도가 됩니다. 성령이 흘러나오는 예배, 성령이 흘러나오는 기도, 그러니까 성령 안에서 드려지는 예배, 성령으로 드려지는 기도입니다.
서로를 행해서는 성도 간의 교제입니다. 성도 간의 섬김과 봉사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고 그 은사가 서로를 향해서 작동하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세워집니다. 말도 성령으로 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 성령의 말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말을 하려거든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해야 합니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해야 합니다. 성령이 흘러나오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성령이 흘러나오는 말은 은혜롭고, 지혜롭고,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워주는 말입니다.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생명공동체를 이루는 것입니다. 성령의 생명이 말 가운데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여기서 ‘더러운 말’은 공동체를 허무는 말,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못하는 무익한 말, 폄훼하는 말, 비방하는 말 등을 가리킨다면 성령이 흘러나오는 말은 교회를 세우고 상대방에게 유익이 되는 격려와 위로의 말, 칭찬과 긍정의 말, 사랑의 소통의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죽이는 말, 허무는 말이 아니라 살리고 세우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각부터 성령의 생각이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8장 5-6절입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체의 생각은 죽음이요 죽이는 생각이라면 성령의 생각은 생명이요 생명을 증진시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가져다주는 생각입니다. 우리는 생각부터 성령의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말도 성령의 말, 행동도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 순종의 행동이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총체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이 흘러나오는 성도의 삶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교회는 촛대가 아니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러면 촛대가 옮겨지게 됩니다. 촛대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된다는 것입니다.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목마르십니까? 목마르면 예수님께로! 예수님께로 나아가서 ‘마시라!’, 그러면 성령의 생수를 마셔서 진정한 인생의 해갈을 얻고, 그 성령의 생수가 흘러나오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성령의 역사의 통로가 됩니다. 성령의 사람이죠. 성령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성령으로 성도 간 교제하고, 사랑을 실천하고, 섬기고, 생각도 살리는 생각, 세우는 생각, 말도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말, 행동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은 말씀 순종! 이러한 신앙인의 모습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동산교회의 비전이요, 이를 잘 정리하고 실천하는 것은 2021년의 우리의 과제요 비전입니다. 이 비전은 2020년과 동일한 비전이지만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한 발 짝 더 나아가는 비전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교회를 촛대라 함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임재가 있어야 함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촛대가 옮겨진다는 것은 성령의 역사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교회, 껍데기뿐인 교회로 전락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령은 교회를 교회되게 만드는 하나님의 임재의 능력입니다. 교회가 성령의 역사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통로가 되어야 하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코로나 시절에 동네북처럼 난타를 당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회의 히든 카드, 우리 교회가 최후까지 쥐고 있어야 할 히든 카드, 이 히든 카드만 있다면 반전이 일어날 수 있고 교회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우리의 신앙생활이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다시 일어서는 힘! 오뚝이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힘, 더 이상 세상의 짐이 아니라 세상의 소망으로 다시 자리매김하게 만드는 교회의 히든 카드,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의 임재의 불로 환하게 세상을 밝히는 동산교회,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동산교회, 여러분의 배속에서부터, 여러분의 깊은 내면 깊숙한 곳으로부터 성령이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흘러나오는 작은 예수가 되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