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25일 동산교회 성탄절 예배 설교
성탄이 조명하는 인생, 역사, 우주 (요 8:12)
빛은 참 오묘한 특성을 지녔습니다. 물질이기도 하고 물질이 아니기도 합니다. 입자이기도 하고 입자가 아니고 파동이기도 합니다. 입자라는 측면에서 빛을 광자라고 하고 파동이라는 측면에서 전자기파라고도 합니다. 속도가 유한하면서도 우주 전체에서 빛의 속도보다 빠른 물체는 없다는 점에서 무한에 가깝습니다. 유한한 속도로 움직이는 빛이지만 우리가 빛을 관찰할 때 우리가 빛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빛의 속도를 재든 아니면 빛에 멀어지면서 빛의 속도를 재든 빛의 속도는 언제나 일정합니다. 1초에 약 30만 킬로미터를 가는 속도가 일정하게 관측됩니다.
별 중에서 폭발하면서 밝은 빛을 내고 수명을 다하는 별이 초신성입니다. 가끔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초신성을 관측합니다. 초신성에서 밝은 빛을 지구에서 관측했는데 그 별이 지구에서 10만 광년 떨어진 별이라면 이 별빛이 지구에 도착하기까지 10만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우주선이 있다고 하면, 그리고 초신성이 폭발할 때 거기서 그 우주선을 타고 온 사람이 있다면 폭발한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 우주선 관측자에게는 0초의 시간이 흐른 것일 뿐입니다. 빛 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시간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는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시간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신비한 물질이요 물질이 아닌 존재입니다. 빛의 세계와 물질의 시공간 세계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계입니다.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 제원호 저, 참고)
빛의 이런 오묘함과 신비함 때문인지 성경은 하나님을 빛이시라고 묘사합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입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말함은 하나님의 신비함,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함, 볼 수 없는 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거룩한 하나님을 묘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디모데전서 6장 16절에는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눈으로 빛을 볼 수 없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상의 빛’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땅에 오신 예수님도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빛이시라고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을 이 세상에 가져왔다는 의미에서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로는 아들이신 예수님이 아버지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고 반사하셨다는, 소위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신 예수님이 그래서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서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말씀합니다.
이 두가지는 어쩌면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며 100% 인간이라는 사실을 어느 측면에서 보고 있느냐 하는 차이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본래 하나님으로서 빛이신 예수님, 그리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이땅에 파송을 받고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반사하신 빛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첫째 아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둘째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으로 오셔서 하나님의 창조를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말씀하신 이유는 빛은 언제나 일정하게 나아온다는 점에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찾아오시는,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오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빛으로 묘사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오시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빛을 주시는, 세상의 빛으로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오늘 성탄절은 예수님이 이땅에 오신 날이요 아기 예수로 출생하신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만, 한 번 오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시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에게 어김없이 언제든 오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아울러 재림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이십니다. 빛이 매일 아침 어김없이 만물을 신선하게 비춤으로 하루를 열 듯이 빛되신 주님은 날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오시는 예수님이시므로 빛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을 역임했던 신학자 에드먼드 클라우니가 어떤 사람에게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응답했습니다: “내가 느끼는 기독교의 문제점은 그 모든 일이 아주 오래 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당신은 2천 여 년 전에 일어난 어떤 일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100년 전에만 태어나셨더라도 모든 것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분이 대답해주었습니다: “오래 전에 일어났던 그 사건은 현재까지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때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이 성취하신 구원을 각 개인에게 가져다주기 위하여 성령을 통하여 계속해서 오고 계십니다.” (<성탄절 메시지>, 제임스 몽고메리 저, 34-5쪽)
오늘 성탄절에 아기 예수로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오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빛으로 오십니다. 빛으로 오셔서 예수를 믿는 자들의 심령 속의 어둠을 쫓아내주십니다. 본래 어둠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입니다. 빛이 비추지 않은 상태가 어둠이요, 빛이 비추면 어둠은 즉시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니까 빛의 부재가 곧 어둠입니다. 오늘 성탄절에 빛으로 우리의 심령에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의 온갖 어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는 어둠, 미움과 증오의 어둠, 슬픔과 상실의 어둠, 시기와 질시의 어둠, 무감각과 무관심의 어둠을 멀리 쫓아내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님께서 빛되신 자신이 빛처럼 우리 믿는 이들의 심령에 오시면 우리가 어둠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확하게는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큰 어둠은 죽음입니다. 우리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빛은 생명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 가까이가면 빛이고,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면 어둠입니다. 우리가 빛되신 예수님께로 가서 예수님을 따르면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생명입니다. 죽음을 이긴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을 믿는 우리가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나라인 독일은 국교가 지정돼 있지 않고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지만 카톨릭이나 개신교회를 위한 교회세를 징수하기 때문에 기독교가 사실상 국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 교육을 받는다면 기독교의 기본적인 내용들을 숙지하게 될 것이며 기독교의 소양을 갖추게 될 것입니다. 한 독일인 목사가 긴급한 상황으로 인하여 자신의 교회를 부득이하게 비우게 되었습니다. 이 목사는 다가오는 주일에 자신을 대신하여 설교할 목사를 초빙하려고 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웃에 사는 한 명망 높은 선생에게 설교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해달라고 요청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온전히 믿지 않는 것을 어떻게 설교할 수 있나요?” 이 목사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뭐라고요? 당신은 하나님을 믿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물론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다시 “그러면 당신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지 않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물론 나는 우리가 그분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는 그 말을 듣고 “그러면 됐어요. 내가 당신에게 설교할 본문을 가르쳐 드릴게요. 그것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인데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본문입니다” 그는 그 본문을 선택하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목사의 부탁을 받고서 그는 그 본문을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설교를 위한 개요를 적어보았습니다. 그는 회의론자였고 이성을 신봉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자신의 요점들을 쓰고 그 이유를 적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요점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였습니다. 이것을 적고 나서 그는 “우리는 우리의 온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분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서 그는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가?”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을 보고 양심에 찔려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적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각지도 않게 나는 설교 노트에 ‘우리는 구원자를 필요로한다’는 문구를 덧붙이게 되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그의 영혼 위에 한줄기 빛이 비추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것과 나에게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그 구원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 즉시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었고 그분을 붙들게 되었다. 다음날 나는 설교를 하였다. 나의 설교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 구원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탄절 메시지>, 180-2쪽)
예수님은 생명의 빛이십니다.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빛이십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시는 이유를 어쩌다 설교하게 된 이 선생은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어떻게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걸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인간이 되셔서 오시고 이땅에서 아들로서 궁극적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아버지께 드렸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들에게 다가오시는 아버지의 왕적 통치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왕과 신하 관계의 왕적 통치를 받은 게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나라의 통치를 온전히 받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신 것입니다. 부하에게 임한 왕적 통치가 아니라 자녀에게 임한 아버지의 자비로신 통치를 온전히 받으셨던 것입니다. 궁극적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자발적인 사랑의 마음으로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하나님의 나라, 왕적 통치, 그러나 아버지의 나라를 오게 하신 것입니다. 소위 예수님을 통해서 천국이 임한 것입니다. 하늘나라가 이땅에 다가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우리의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바의 나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부자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예수님, 아버지에게 궁극적인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드림으로써 선택받은 자녀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왕적 통치, 아버지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땅에 오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게 된 것입니다. 예수 믿는 자를 양자 삼아주셔서 아버지의 나라의 일원이 되도록 하시고 아버지의 나라의 그 풍성함을 상속받게 하신다는 점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빛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녀로 부름받은 우리에게는 한 분 아버지가 계십니다. 유일하신 독생자 아들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어떻게 섬겨야 할것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우리의 마음속의 우상을 다 깨뜨리고 궁극적인 신뢰와 온전한 순종을 어떻게 아버지께 바칠 수 있는 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유일하신 아버지를 어떻게 사랑하는 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인지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아들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을 걸으면 그 길이 생명의 길이요 구원의 길이요 빛의 길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님이 가져오신 천국, 아버지의 나라의 백성 정도가 아니라 아버지의 나라의 자녀가 되어서 그 나라의 온갖 혜택과 보호와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빛이라는 단어가 라틴어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룩스와 루멘입니다. 룩스는 빛 자체를 의미합니다. 근원적인 빛, 발광체에서 빛나는 빛, 별에서 빛나는 빛, 빛이신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반면에 루멘은 반사된 빛, 빛을 받아 다시 빛나게 해주는 2차적인 빛을 뜻합니다. (<과학 창세기의 우주를 만나다>, 259쪽) 하나님은 룩스이십니다. 하나님은 빛이십니다. 예수님은 룩스이시며 동시에 루멘이십니다. 삼위일체의 영광의 빛을 비추는 세상의 빛으로서 룩스이시며 아버지의 영광의 빛을 그대로 반사해주는 참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루멘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빛의 자녀로서 빛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마태복음 5장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우리 동산교회는 세상의 빛입니다. 세상의 빛이되 하나님의 빛과 예수님의 빛을 반사시켜서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입니다. 루멘입니다. 우리는 발광체가 아니라 반사체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탄절에 빛으로 이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을 환하게 비추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생각해보면서 다음 두 가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봅니다. 첫 번 째 질문은 ‘예수님이 여러분 자신에게 어떠한 분이시냐?’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빛이시며 영광이신가?’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어둠을 밝히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 때문에 여러분은 인생의 온갖 어둠을 극복하고 있습니까? 코로나로 힘겨운 이 겨울에, 어둠이 길어진 이때, 그러나 다행히도 동지가 지나 이제 점점 낮이 길어지고 있습니다만, 이 어려움이라는 어둠이 예수님 때문에 위로의 빛, 소망의 빛,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빛, 내일은 오늘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의 빛이 여러분을 사로잡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빛의 근원이 되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알아가고 있습니까?
두 번째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이 빛을 나누고 있습니까?’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빛이 되어서 참된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도 빛이시고 예수님도 빛이시고 그리고 우리도 빛입니다. 우리 교회가 빛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거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져야 하는 겁니다. 우리 마음 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높아진 우상을 깨뜨리고, 우리 마음 속의 욕심과 거짓과 미움을 몰아내고 자신을 비울 때에 우리의 마음에 빛되신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탄절에 우리는 성탄이 조명하는 인생, 역사, 우주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 특별히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첫 성탄절에 동방박사를 안내했던 빛, 그 빛이 조명하는 우리 인생, 우리네가 살아가는 삶의 역사, 창조주 하나님의 우주, 이 모든 것이 환히 밝아지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아버지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기 위하여 임마누엘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한가지 이유만으로도 우리 인생은 빛으로 환하게 밝아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위로와 소망이 넘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빛되신 예수님으로 인해서 여러분의 인생과 미래와 모든 것이 참된 위로와 소망으로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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