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라인 헌금 안내 · 온라인으로 헌금하실 분은 아래 계좌를 이용해주세요. · 온라인 헌금 계좌: 9002-1882-3236-7 (MG새마을금고, 예금주 동산교회 재정수입) · 입금하실 때 이름+헌금종류를 기재해 주세요 - 예배순서 - ▶묵상기도 ▶경배찬송 - 105장 ▶성시교독 - 51. 시편 118편 ▶신앙고백 - 사도신경 ▶찬송 - 115장 ▶기도 ▶성경봉독 - 요한복음 8장 1~11절 ▶설교 - 살리고 세우는 사람 ▶찬송 - 122장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 635장 ▶축복
■2020년 12월20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살리고 세우는 사람 (요 8장 1-11절)
하나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인데 반해서 우리의 죄는 죽음을 가져옵니다. 성부 하나님은 만민에게 친히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고 성자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시려 이땅에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시고 성령님은 생명의 영, 살리는 영이셔서 우리 죽을 몸도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끊임없이 분리시키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범죄한 우리를 사랑하여서 끊임없이 찾으십니다. 우리를 찾으시되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고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죄의 문제를 처리하시려고 법을 주셨습니다. 법을 주심으로 죄가 무엇인지 알려주시고 죄를 규정해놓으셨습니다. 아울러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게 하심으로 죄를 짓지 않도록 예방책을 마련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법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심은 그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죄를 지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지 않고, 죄를 짓고 나서도 그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율법으로 제시하셨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예방하고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제사제도를 규정해주심으로 언약 백성의 삶을 보호해주시고 생명을 증진시켜나갈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법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의도요 율법의 목적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을 살리기 위한 법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의도와는 달리 인간은 너무나 악해서 살리기 위한 법을 오히려 죽이기 위해서 사용합니다. 살리기 위한 법이 죽이기 위한 법이 되어버립니다. 인간의 악이요 죄성입니다. 자신에게도 자신을 살리기 위한 법이 되지 못하고 결국 자신을 죽이는 법이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선한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법이 되었음을 한탄하면서 말합니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왜 선한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에 이르게 된 것입니까? 인간의 죄성과 악함 때문입니다. 율법조차도 악을 저지르는 도구로 바꿔치기해버리는 인간의 교묘한 술책이요 죄성입니다. 만약 인간이 율법의 제정 취지대로 선한 의도대로 율법의 정신을 살리면 그 법에 따라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려는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이라면 법에 충실함으로써 자신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참으로 선하신 예수님이 율법의 목적대로 죄인을 살리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발각된 한 여인을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로 이끌려 왔습니다. 이러한 죄를 저지를 사람에 대해서 율법은 뭐라고 규정하고 있는가 하면 죽일 것을 명합니다. 레위기 20장 10절에 보면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의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간음죄를 저지른 관련 당사자 즉 남자와 여자 모두 죽일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죽이는데 왜 돌로 쳐 죽이는가, 보통 우상숭배를 도모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을 꾀거나 하나님을 저주한 사람의 죄와 같은 경우는 엄중한 처벌로 다스려야 했던 바, 이 죄를 저지를 사람에 대해서 돌로 쳐죽이도록 율법은 규정하고 있습니다. 간음죄도 이와 같은 죄의 범주에 두시는 것입니다. 간음죄가 중대한 범죄인 이유는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을 깨뜨리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시대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에도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 마을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돌로 쳐죽이는 문화가 있었던 듯합니다. 아마 가정을 깨는 범죄, 공동체의 근간을 뒤흔드는 범죄라는 중대성에 대한 인식이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간음이라는 죄가 인간의 분노를 더 자극하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손가락질하고 싶은 죄가 간음죄고 가장 처벌하고 싶은 죄도 역시 간음죄인 것 같습니다. 복수를 유발시키는 죄 역시 간음죄의 속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반면 구약 율법에서는 우상숭배를 꾀하거나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을 큰 죄로 다루고 돌로 쳐죽이도록 했던데 반해서 꼭 법 규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는 간음죄가 더 분노심을 자극하여 그 죄를 저지른 사람을 직접 자신의 손으로 없애버리고 싶은 본성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그래서 당시 간음죄를 처리할 때 마을 사람들이 다 들고 일어나 돌을 던져 죽이는 일이 있었던 듯합니다. 간음에서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마을 사람들이 질질 끌고 올 때 다들 손에 돌을 들고 온 이유입니다. 현장에서 즉결처분하려고 말입니다.
이 여인을 굳이 예수님께로 끌고 온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법에 따라 처벌하려고 하는데 예수님의 조언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법을 집행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려는 율법에 대한 열심도 아니었고, 이것들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걸려 넘어뜨리고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는 악한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7장에서 보았다시피 성전지배체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이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구속영장을 발부해서 성전경비대원을 예수님께 보냈죠. 예수님을 체포해오라고.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서 어떤 권위를 보고 가르치는 내용의 적법함을 보고서 차마 예수님을 현장에서 붙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이때 이후로 예루살렘 종교의 지도층이 예수님을 그냥 놔두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굳혔고, 그래서 어떠한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예수님을 가두려고 이런 저런 궁리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으로 덫을 놓으려 했던 일화도 공관복음서에 여러 군데 실려 있습니다. 가령, 로마황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는지, 아니면 내지 말아야 하는지,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던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율법을 들이대면서 율법은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라고 예수님께 묻는 그들의 의도는 예수님을 고발할 근거를 찾기 위함이었습니다. 본문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십시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고 자체적으로 사형 집행을 할 수 없게 돼 있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을 따라 돌로 치라고 말하셨다면 로마법을 어기게 되는 것이고, 반대로 그간 죄인들을 용서해주시며 죄인을 다루시는 자비의 가르침으로 알려져 있던 예수님이 가르쳤던 대로 그냥 용서해주자, 라고 말씀하셨다면 유대 율법을 어기게 되어 율법에 충실했던 유대인들에게서 신망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지지하고 따라다니는 민중들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그들에게는 손해볼 것 없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딜레마적인 상황이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곤경입니다.
그래서 음모론이 나오는 겁니다. 이 상황을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기획 연출했다는 음모론입니다. 어떻게든 예수님을 잡아넣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으니까, 대답하기 곤란한 딜레마적인 상황을 만들어내는 질문을 해보았는데, 예수님께서 너무나 지혜롭게 잘 대답하시고서 빠져나가니까, 이번에는 좀더 어려운 곤경에 빠뜨리기에 충분한 사건을 기획한 것입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어찌하든지 예수님을 체포하고 고발해서 잡아넣거나 사형집행을 받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머리를 쥐어짜다가 음행 사건을 기획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실제로 그런 가능성이 있는 남자를 매수해서 현장을 급습할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까 이들은 지금 율법을 어긴 여인을 처벌하느냐 처벌하지 않느냐, 또 어떻게 처벌하느냐, 이러한 문제가 관심사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면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느냐가 이들의 관심사의 전부였던 것입니다. 음모론을 뒷받침하는 근거는 충분합니다. 간음 관련 당사자 중 한 사람인 남자는 어디로 도망쳐서 없고 여인만 붙잡힌 것도 이상하고, 은밀한 중에 저지르기 쉬운 간음 현장을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급습할 수 있었는지도 이해하기 어렵고, 설사 마을 사람들이 평소 보았던 품행에 비쳐서 꼬리가 밟혀서 현장에서 발각될 수 있었다 해도 그들의 손에 의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까지 사건이 넘어온 것도 석연치 않고, 이래저래 음모론이 맞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들의 악함을 아셨겠죠. 자신을 넘어뜨리고 고발하려는 그들의 악한 의도가 있음을 아셨을 겁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음모를 알지도 못하는 순진한 마을 사람들은 손에 돌을 들고서 음행한 여인을 질질 끌고와 돌로 쳐죽일 기세인데, 지금 예수님의 대답 여하에 따라 마을 사람들은 실행에 옮길 수도 있는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고 어떻게든 예수님을 잡아넣을 궁리만 하고 있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서 예수님이 알지 못할 리가 없으시죠.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님만 감방에 쳐넣을 수만 있다면 한 여인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 돌로 쳐죽임 당하는 것쯤이야, 하는 악한 생각을 왜 예수님께서 읽지 못하셨겠습니까.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구약 율법을 어기지도 않으시면서 로마법을 존중함도 보여주셔야 하고, 자신을 죽이려는 저들의 악한 의도의 손길에서도 벗어나야 하겠고, 그리고 무엇보다 실제 죄를 저질렀다 해도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악한 의도의 희생제물이 되기 쉬운 여인을 살려야 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것이었고, 예수님을 죽일 수만 있다면 여인의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악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간음의 죄를 저지른 것은 분명하고 현장에서 붙잡힌 것도 분명하지만, 사건 이면에 이런 복잡한 사건 전개 과정과 음흉한 간계가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동안 땅에다 글을 써내려가면서 사람들의 흥분도 가라앉히고 시간도 버셨던 예수님은 드디어 입을 열어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7절) 예수님께서 이러한 급박한 상황에 직면하시자 마자 예수님은 언급부터 하신 게 아니라 바로 굽혀서 땅에다 무슨 글자를 써내려가는 것이었고, 이를 지켜보다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 상황에서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계속 재촉하던 차에 예수님께서 드디어 말씀하신 내용이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구약 율법에 보면 이렇듯 현장에서 발각돼 드러나게 된 간음의 범죄를 처리할 때 돌로 쳐죽이는데, 증인이 한 사람이어서는 안되고 적어도 두 사람 이상이어야 하고, 돌로 쳐죽일 때도 사건의 증인, 그러니까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고서 나머지 사람들이 집단으로 돌을 던질 수 있게 규정돼 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율법대로 “먼저 돌로 칠 수 있는 사람이 증인이니까 증인 나와봐, 그리고 증인이 먼저 돌을 던져!”라고 말했다면 이해가 될 것인데,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구약 율법에서 증인으로 하여금 먼저 돌로 치게 하셨을까요? 증인이 사건을 증언하는 자로서 이 사건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겠죠. 사람을 죽이는 중차대한 일을 가져온 증언을 한 자로서 이 증언이 진실임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겠죠. 거짓 증언하고서 내가 증인이니까 내가 먼저 돌을 던진다, 이 정도로 악한 사람은 많지 않겠죠. 그런 거짓 증언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또한 죄를 목격하고 죄를 증언해서 죄인을 처벌하려는 사람이라면 최소한 그러한 동일한 죄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야 함을 일깨우기 위해서 증인이 먼저 돌을 던지게 하신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에게 돌을 던질 수 있으려면 최소한 그 죄에 있어서 자신이 깨끗해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구약 율법을 해석하셨습니다. 그래서 증인이 먼저 돌을 쳐야한다는 율법의 의도를 구체화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의도를 담은 이 말이 분노에 가득찬 사람들을 주저하게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입니다. 율법의 본래 취지도 처벌이 목적이 아니라 죄로부터 사람들을 떨어뜨려 생명을 보존하려는 살리는 법임을 예수님은 너무나 잘 아셨고, 예수님 자신을 죽이려는 악한 의도로 달려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간계에 의해서, 설령 비록 죄를 지었다고는 하나, 한 여인이 희생되지 않고 그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율법의 의도와 정신에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에 가득찬 채 손에 돌을 들고 왔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나이가 많은 사람부터 적은 사람에까지 손에 든 돌을 주위에 내려놓고 현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반응도 좀 이상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이 여인과 같은 음행을 저질렀는가, 아니면 예수님의 평소 가르침대로 마음에 음욕을 품은 자마다 간음한 죄를 저지른 것과 같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의 뜻을 알게 되어서 거기에 자신이 없어서 도망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요? 왜 마을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서 하나씩 하나씩 떠났을까요?
여인을 살리려는 예수님의 준엄한 진정성과 어떠한 영적 권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나님의 영광의 무게와 같은 존엄을 지금 마을 사람들이 보게 된 것은 아닐까요? 거기에는 분명 음행 현장을 목격한 증인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만 그 증인들이 선뜻 먼저 돌을 던지기에는 지금 예수님의 발언이 너무나 묵직하게 그들의 심령에 꽂힌 것이 아닐까요? 꼭 이 여인 같은 간음죄를 저지른 것은 아니지만, 사건의 맥락과 이면과 악한 의도를 꽤뚫어보시고서 악한 의도의 희생자를 만들 수 없다는, 평소 살리기 위해서 이땅에 오시고 살리는 구원을 가져다주신 예수님께서 여인을 살리려는, 그러면서도 이들의 올무에서 벗어나려는 지혜를 반짝 드러내보이는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적 영광과 권위를 보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요?
옥한흠목사님이 이 본문을 설교하면서 그 점을 언급하셨습니다. 아울러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악한 양심 혹은 구겨진 양심에게서도 작동함을 설교자 본인이 보았음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릴 때 사람들의 양심은 평소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양심이라도 이 말씀의 능력에 의해서 어떠한 반응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양심을 찔러 회복시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져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유일한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상하고 깨지고 억압되고 민감성을 상실한 채 오작동하는 양심조차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보게 된 신적 권위와 영광,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말씀의 권위 앞에서 사람들의 양심은 여인을 정죄하는데로 향하지 않고 자신에게로 향하므로 사람들은 현장에서 하나씩 하나씩 빠져나가게 되었습니다. 본문 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오직 예수님과 여인만 남았을 때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10-1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여인에게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정죄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 후에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죄를 처리함에 있어서 십자가가 작동함을, 이 사건에서 십자가가 미리 예시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여인의 수치스러움, 사람들의 분노에 직면한 공포, 죽음 앞에 서있는 위협, 왜 자신이 그러한 죄에 빠지게 되었는가, 하는 후회와 자책, 이러한 복잡한 감정을 안은 채 두려움에 벌벌 떨고 수치스러움에 몸을 가눌 수 없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너를 정죄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고 죄 없는 나 자신도 그래서 너를 향해서 돌을 던질 자격이 충분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까, 이제는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묵직한 메시지를 돌 대신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급한 상황에서 여인을 살리고 본 것입니다. 무엇보다 여인을 살려야 했습니다.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분노에 찬 사람들과 악의에 찬 사람들의 악한 의도의 질문에 대해서 지혜로운 대답을 하신 것이고,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사람들의 양심을 겨냥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발언하신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살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의 구원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림을 세우기 위한 살림입니다. 살려서 제대로 세우고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게 하기 위한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다급한 여인을 살리실 뿐 아니라 그 여인을 바로잡아주셨습니다. 이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된 삶, 바로 세워져서 올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살리신 것입니다. 살리고서 세우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은 사망에 처한 인생에게 영생만 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다운 바른 삶, 하나님 앞에서 바로 세워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게 하려는 구원입니다. 이토록 살리고 세우는 삶, 이것이 예수님의 생애였고, 우리를 살리고 세우시려고 십자가에서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와 수치를 뒤집어쓰신 것입니다. 이 은혜와 사랑을 받은 여인이 이후에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겠습니까? 이 큰 은혜와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어떠한 기대를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따라 살리고 세우는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 교회가 2021년에 영혼을 살리고 사람을 세우는 생명의 공동체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마지 않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
0
1347
0
이전글 |
다음글 |
QUICK LIN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