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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3일 동산교회 설교 (주일 낮)
이전보다 더 큰 영광 (학 2장 1-9절)
오늘로 연말연시 특별방역기간이 마무리되고, 거리두기도 전라북도의 경우 기존의 2단계로 돌아가지만, 최근 전국 종교시설에서 감염이 잇따르면서 종교단체의 경우 비대면 온라인예배를 2주 더 연장하라는 지침이 내려졌습니다. 1월 10일과 17일 주일도 현행처럼 불가피하게 비대면 온라인예배로 드려야 합니다. 바라기는 1월 24일 주일부터는 현장예배가 재개되었으면 합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면서 문제점들도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선 온라인예배에 참여하는 교인 수도 눈에 띄게 줄고 있다고 합니다. 특별히 많은 교회가 온라인예배를 실시간으로 교회 유튜브 계정에 송출하는데 실시간 접속자가 설교만 끝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설교만 들으면 예배를 드렸다고 착각하는 풍토가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는 설명입니다.
온라인예배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고충도 클 것입니다. 어린 자녀를 둔 가정에서 교회학교 예배 시간 길이가 어른 예배와 같지 않아서 교회학교 예배가 일찍 끝나면서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해져 부모들도 설교만 잠깐 듣게 되는 어려움을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온라인예배 초창기에는 옷도 갈아입고 경건하게 예배 준비를 했지만, 이제는 겨우 접속만 해놓는 수준이 되어서 예배에 제대로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국민일보 2020.12.31.)
하여튼 코로나가 사회 전반에 어려움을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신앙생활하는데도 굉장히 많은 장애가 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코로나는 하나님이 진동시킨 것입니다.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코로나를 통해서 한국교회를 흔들고 계시고 우리 신앙생활의 터전을 흔들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흔들어놓으시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진동시키고 흔드신 후에 진정한 보배가 주님의 몸된 교회에, 우리의 신앙생활에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배는 그냥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보배를 소유하게 되는 때는 심하게 터전이 흔들릴 때입니다. 기존의 것들이 흔들리다가 무너져내려야 인생의 진정한 보배가 이르게 됩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의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길을 가게 됩니다. 인생의 보배를 마음 중심에 간직한 자만이 이전보다도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코로나는 교회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의 기회입니다! 마구 흔들려서 결국 보배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코로나 이후에 이전보다도 더 큰 영광을 누리는 교회,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이 머무는 인생이 되려면, 소위 전화위복의 축복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벨론에서 포로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너졌던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통해서 당시 지도자였던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성전 재건에 참여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이 이듬해에 제일 먼저 성전 재건을 착수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성전 공사가 중단되었고 중단되지 어언 20년이 거의 다 될 무렵에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가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유다 백성들에게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다시 성전 공사를 재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약 20년간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약 한 달 전에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선지자 학개의 메시지(학 1장)를 듣고서 사람들이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감동이 일어나서 성전 공사를 다시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학개서 2장은 성전 재건 공사가 다시 시작하고서 약 한 달 후 학개 선지자가 다시 전하는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어렵게 시작된 성전 공사를 진행해나가는데 있어서 어떤 문제가 있었냐면, 이전의 성전, 그러니까 솔로몬 성전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성전을 짓는 동력을 까먹었던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있었습니다. 의욕을 꺾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너희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 중에서 이 성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아무래도 어려운 경제적 현실과 식민통치라는 엄혹한 정치 상황에서 짓고 있는 성전과, 유다 왕조의 가장 큰 번영기였던 솔로몬시대에 지어진 성전을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죠. 솔로몬 성전은 선대 왕이었던 다윗의 물적 준비가 충분했고, 성전 공사에 참여했던 연인원이 10만명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습니다. 성전 건축에 전 국력이 동원된 대 공사였던 것입니다. 반면에 지금 짓고 있는 성전은 포로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페르시아 속국 상태에서 지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만, 이전의 성전의 위용을 보았던 사람에게서 시작된 웅성거림이 성전 재건 공사의 방해가 될 정도로 큰 장애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욕이 꺾였고 낙심하게 되어 성전 재건 공사 과정에서 힘이 빠진 상태가 되었습니다. 학개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되고 고무되어서 오래 중단되었던 성전 공사가 시작된 지 약 한 달이 지났지만 처음의 감동과 열정과는 달리, 과거의 성전과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의욕이 꺾였던 것입니다. 정말 보아야 할 것은 겉으로 드러난 위용과 인간적 가치와 영광이 아닌, 속에 담고 있는 진정한 성전의 본질이 무엇이냐,, 그것이 중요한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선택을 할 때나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갈라디아서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갈라디아서 6장 9절 말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우리가 처음에 잘 시작했다가 왜 꺾입니까? 내가 하는 일이 별 일 아니라는 생각, 내가 쓰임 받고 있다 해도 사소한 일로 여겨질 때, 낙심하게 되고 의욕이 상실되고 처음의 감동과 열정이 소진되어 스스로 제풀에 꺾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걸림돌에 걸려넘어진 사람이 당시에도 많았고 지금도 많습니다. 특별히 요즘같이 교회가 너무나 많이 얻어터져서 교회하면 사람들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드는 시선을 만나게 됩니다. 신앙인들 스스로가 위축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인 게 자랑스러워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못한 현실입니다.
교회 자체가 발산하는 영광으로 따라오라고만 해도 되던 때가 있었던 반면에 요즘은 교회와 연관되면 사람들이 발을 빼고, 교인들 역시 교회를 통해 영광을 보기보단 교회 소속이라는 점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하는 게 요즘 적나라한 교회의 현실입니다.
뭐든지 잘 될 때 사람들의 관심도 받고 사람들이 찾아오기도 하고 부러워하기도 하는데 지금 그런 교회는 눈씻고 찾아보기 힘듭니다. 외양이 화려한 교회여서 한동안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우러러보기도 했으나 지금은 오히려 욕 먹기 쉽습니다. 어려운데 성도들 헌금 갈취해서 뭔 예배당을 그렇게 크게 지었냐고! 그래도 교인 입장에서는 우리 교회가 크고 화려하고 외양도 멋지고 교인들 경제수준도 높고 학식도 높고 교양도 있는 교인들이 많으면 교회 이미지도 좋고 교회 이름의 브랜드도 있는 교회의 일원이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 교회가 예배당 크게 지으려고 경쟁했던 적이 있었죠. 일단 크게 지어놓으면 뭐 있는가 싶어서 성도들이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런 때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영광을 외관이나 외적 조건에 둘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외형 비교에 사로잡혀서 일할 동력을 상실하고 의욕이 꺾어졌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보잘 것 없는 일이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해도 인간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한 소위 인간의 눈에 영광스럽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깨닫게 하고 다시 독려시키려고 말씀을 전합니다. 본문 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가 이르노라 스룹바벨아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야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땅 모든 백성아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내가 너희와 함께 하노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는 쉽게 말해서 “힘내라!”는 뜻입니다. 한두 사람이 힘내서 될 일도 아니고 모두가 힘을 내야 할 때이기 때문에 총독 스룹바벨, 대제사장 여호수아, 온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각각 언급하고서 그들 모두가 함께 힘내서 일해야 할 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힘내라!”, 즉 “스스로 굳세게 할지어다”가 세 번 반복되고 있고, 이들 모두에게 “일하라!” 명령을 주고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도 한두 사람의 노력으로 되어지지 않죠. 모두가 함께 할 때 거리두기도 효과를 발휘하죠. 안타까운 점은 교회 내에서 잇따라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지난 성탄절날 예배를 드리고 나서 교인들이 함께 식사를 하다가 집단 감염이 일어나서 교회당을 폐쇄한 교회도 있습니다. 이런 일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두 주간 이어서 온라인예배하고 상황이 좋아져서 1월 24일 주일에는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어서 5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언약한 말과 나의 영이 계속하여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애굽에서 언약한 말과 영이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은 신실하신가,를 생각해봅니다. 위기의 때에도 좋은 때에도 먼 옛날에도 그리고 지금에도 그리고 먼 미래에도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하시는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하기 직전에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생활하던 그들에게 언약한 말은 무엇입니까? 여호와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이요, 여호와가 그들의 아버지가 되고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그 약속이 여전히 유효하고 그때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영으로써 성전을 재건하고 있는 그들과 함께한다는 것입니다.
성전의 본질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됩니다. 교회 예배당의 외관과 규모가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인 구성원의 수준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모이는 방식이 오프라인이든 온라인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중요합니다. “너희 가운데에 머물러 있나니”, 이게 바로 영광입니다! 이게 교회의 영광이어야 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이 영광이 진짜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현혹되지 마십시오.
어려움 가운데서도, 여전히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지만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성전 재건에 참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미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성전의 본질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짓고 있는 건물의 외양 때문에 의기소침할 필요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계속 힘내서 일해서 성전을 재건해야 한다는 것이죠.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사람마다 대기만성도 있고, 실패하는 인생도 있고 코로나로 인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가정도 있을 것이고, 직장에서 해직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고, 인간관계의 파탄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도 있을 것인데, 본인 잘못이든 누구 잘못이든 간에, 어떠한 상황에 처하든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인생이면 됩니다. 애굽에서 하신 말과 약속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대략 천년 전 사건), 지금 나와 함께하시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누구를 두려워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강력한 확신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할 수 있는데 왜 걱정하십니까?
국민일보에서 ‘역경의 열매’라는 제목의 간증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데 최근에 올해 100세를 이미 훌쩍 넘기신 김형석박사님의 일생에서 경험했던 간증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분의 신앙이 무교회주의자가 아닌가 의혹도 받았습니다만, 간증을 보니까 이분의 신앙이 단단한 하나님의 체험으로 형성된 단련된 믿음임을 보게 됩니다.
이분이 평양의 유일한 기독교학교였던 숭실중학교에 입학해서 신앙을 뜨겁게 갖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학생을 위한 신앙부흥회가 열렸던 것입니다. 한 주간 진행되는 부흥회 때 큰 은혜를 받고, 이후에 기도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중1 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집과 예배당은 물론 이른 새벽 산에 올라가 기도에 힘썼습니다. 어떤 상황이 닥치든 먼저 기도하는 습관을 익혔습니다. 이때 한 기도 중 하나가 “이제부터 나를 위함이 아닌 하나님과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택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택하셨다는 믿음으로 드린 기도였습니다. 이후 이분의 인생은 고비고비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의 응답으로, 은혜로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당시 어려운 가정형편과 신체의 병약함에도 불구하고 기도하면서 일본에 유학을 떠났습니다. 철학과를 지망하여 일본 도쿄의 조치대학교에 지원해 입학했습니다. 대학 생활을 마무리할 때쯤, 한인 유학생들에게 큰 시련이 닥쳤습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일제가 대학생과 휴학생,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인까지 전장에 보내기로 한 것입니다. 한인 학생 역시 ‘자원입대’ 대상자가 되었고 주 타켓이 되었습니다. 징집돼 전장에 참여하면 생명을 잃을 우려도 있고, 더욱이 일본군으로 참전한다는 것 때문에 울분이 솟구쳐올랐습니다. 자신의 생애를 좌우할 중차대한 사건이 닥쳐오자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일간 외부와 연락을 끊고 하숙방에서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주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요한복음 15장을 읽던 중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게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눈물이 주룩 흘러내리며 마음에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께서 나를 택했다. 그렇다. 내가 내 삶을 사는 게 아니다. 주님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곧 책상에 엎드리고는 “하나님 아버지”라고 외쳤습니다. 이분이 드린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기도’였습니다. 기도하자 마음에 평안이 넘쳤습니다. 징집이란 폭풍우 속에서도 불구하고 조용히 책을 읽으며 기도하는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아버지인데, 내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학도병 징집을 위한 검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책임자급으로 보이는 내과의사가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어릴 때부터 앓던 병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가끔 의식을 잃곤 했다”고 말한 뒤 몇 가지 질문에 더 답하자 그는 내 서류에 ‘불합격’이라 적었습니다. 기적적으로 학도병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고국에 돌아와서 교사로 섬길 때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이듬해인 1951년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하게 되었습니다. 부산행 열차를 타고 부산에 가족이 왔지만 문제는 함께 하지 못한 이분의 큰동생과 부모님이었습니다. 동생과 부모님이 북한에 남게 된 것입니다. 동생과 부모님의 무사 귀환을 위해 부산에 오자마자 교회당에서 아침저녁으로 기도했습니다. 늘 기도하기를, “올해가 가기 전에 부모님고 동생을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간구했습니다. 그렇게 계속 기도하던 중 결국 한 해 마지막날에 이르렀습니다. 그해 12월 31일이었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저녁에 예배당에서 나오는데 밖에서 “이 예배당에 김형석 선생 가족이 있습니까”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동생과 모친이었습니다. 비록 부친은 모시지 못했지만, 다른 일행도 함께 데려왔던 것입니다. 막 방금 전에 예배당에서 여전히 “이 해가 다 가기 전에 희망의 소식을 전해 달라”는 기도를 드린 참이었기에 너무나 감사해서 감격의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학개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약속을 주십니다. 본문 6-7절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조금 있으면 내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킬 것이요 또한 모든 나라를 진동시킬 것이며 모든 나라의 보배가 이르리니 내가 이 성전에 영광이 충만하게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들의 주위 환경과 세계를 진동시키고서, 심하게 흔드시고서, 그런 후에 만국의 보배가 이르게 될 때, 지금 초라하게 보이는 이 성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할 것을 약속하시고 계십니다.
작금의 코로나의 어려움은 이 코로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와 우리의 안락한 환경과 우리 자신을 진동시키고 계시는 것입니다. 진동시키고 흔드신 후 보배가 드러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보배는 그냥 드러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인생의 보배를 소유하게 되는 때는 심하게 터전이 흔들릴 때입니다. 심하게 흔들리고 기존의 것들이 떨어져나갈 때 진정한 보배를 발견하고 소유하게 됩니다.
코로나는 교회의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회입니다! 마구 흔들려서 결국 보배가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방역 당국의 예측과 계획에 따르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2월에 도입하고 2월과 3월에 1천만명이 접종하고 얀센 백신은 2분기 접종 시작하고, 5월부터 모더나 백신을 2000만명분이 맞고 3분기에 이르면 화이자 백신을 맞아서 전 국민 60% 이상이 항체를 갖는 집단면역 완성 시기를 9월로 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칼럼 때 썼습니다만, 빅터 프랭클이 “고통이 의미가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인간에게, 오직 그에게만 달려 있다”고 말했던 것처럼 코로나 위기를 기회로, 전화위복이 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 있고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게 되는 키가 무엇입니까? 코로나를 겪은 후 보배가 이르게 될 것인가의 여부, 영광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될 것인가의 여부가 관건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이 약속대로 코로나 이후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충만하게 나타날 것인가의 여부가 관건인데요, 이를 위해서 우리의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 떨어져나가서, 다시 십자가 앞에서 적나라하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서 ‘내 인생의 주님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만이 내 인생의 중심이요 보배이십니다’라는 진정한 순수한 믿음을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국의 보배가 우리 심령에 우리 교회에 다시 중심을 회복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경제적 어려움도 참으로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어려움도 믿음으로 이겨나갑시다. 8절에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코로나의 우울, 아픔, 두려움, 제한, 불편, 무력함 등을 뛰어넘고 하나님의 영광이 호위하는 인생, 하나님의 더 큰 영광을 맛보는 인생, 인생의 보배, 교회의 보배가 이르는 인생, 오늘 약속의 말씀이 우리의 것이 되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인생의 보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라는 찬양을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진정한 영광이 머무는 인생, 이전보다, 코로나 이전보다 더 큰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축복이 우리 동산교회 위에와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 위에 충만하게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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